[라이소피] 아무 일도 없었다.
순정철학논고 라이프니츠 X 소피아
소재주의-인권유린 박스
"여기가 맞아? 다른 종이도 너무 많은데."
"나와. 그냥 내가 찾을게."
재수가 더럽게 없는 날이었다. 서류를 한가득 들고 교무실에 가려던 라이프니츠의 어깨를 실수로 밀었고, 종이 뭉텅이가 바닥에 쏟아짐과 동시에 몇 장은 팔랑거리며 날아갔다. 무슨 우연의 장난인지, 근처의 큼지막한 사물함 문 몇 개는 열려 있었고, 서너 장 정도는 사물함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문제가 있다면 이미 사물함 속에도 이면지가 꽤나 많았다는 것. 덕분에 소피아는 근무 시간에 사물함에 쭈그리고 들어가 서류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라이프니츠의 키 정도의 크기에, 사람 두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다면 크고 적당하다면 적당한 사이즈의 사물함 속은 자신의 그림자로 인해 어두컴컴했다. 느릿느릿 종이를 찾는 소피아에게 답답함을 느낀 라이프니츠는 자신이 찾겠다며, 소피아를 내보내려 했다. 그래서 나오려고 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 쪽으로 몸을 돌리고, 구부렸던 무릎을 펴고, 걸음을 내딛으려던 그때, 누가 밀치기라도 한 듯 라이프니츠가 사물함 안으로 우당탕 들어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로 짧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황당함에 둘의 눈이 커져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어..."
정말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몸이 닿을 것 같아 소피아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두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조금, 아니 사실 많이 좁은 사물함과 그 안에 들어가 있는 키 큰 학생 둘. 라이프니츠는 키 때문에 불편한 듯 무릎을 구부려야 했고, 그 바람에 소피아의 다리와 라이프니츠의 다리가 엇갈리듯 닿았다. 소피아의 왼쪽 다리는 라이프니츠의 양 무릎 사이에, 라이프니츠의 왼쪽 무릎은 소피아의 다리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교복 바지와 치마가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피아는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도 몰라, 서류를 양손으로 잡고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 딱 붙였다. 라이프니츠는 손을 둘 곳도 없어 허공에 들고 항복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고개를 숙이자니 엇갈린 다리가 너무 선명히 보였고, 고개를 들자니 라이프니츠와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민망한 상황은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아, 소피아는 애써 바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맞닿은 다리가 간질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 어떻게 등으로 잘 쳐보면 문 안 열려?"
"... 이거 열쇠 넣고 돌려야 되는 사물함이야. 하아... 누구야 진짜."
라이프니츠가 짜증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으로 보니, 분노에 차 있을 것이 뻔했다. 동복을 입은 학생 둘이 좁은 공간에 갇혀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은 후덥지근해졌다. 소피아는 서류를 한 손으로 쥐고 자신의 겉옷 주머니를 조심스레 뒤적거렸다. 라이프니츠가 움찔거리며 팔꿈치를 좀 더 높게 들었다.
"나, 실핀 있으니까 이걸로 어떻게 해볼게."
손으로 라이프니츠의 허리를 살짝 옆으로 밀고, 허리를 구부렸다. 열쇠 구멍에 실핀을 넣고 열심히 돌려봤지만 문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열쇠공에 빙의한 탓에, 자신의 손이나 팔이 라이프니츠의 허리 옆부분과 몇 번이 닿는지는 소피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될 듯, 안 될 듯 애매한 틱틱 소리에 소피아는 실핀을 반대로 넣으려 시도했다. 시도는 했다.
"소피아, 잠깐만..."
"어?"
"... 움직이지 말아 봐."
라이프니츠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소피아는 그때 무심코 고개를 들었고, 라이프니츠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처음 봤다. 리케이온에서 꽤나 오랜 시간을 보냈지만, 분노가 아닌 다른 이유로 생긴 홍조는 처음 본 것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남고생이었다. 소피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맞닿은 허벅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어, 어어..."
그리하여 소피아는 실핀을 주머니에 넣고, 다시 라이프니츠의 맞은편에 등을 기대고 가만히 서 있게 되었다. 라이프니츠는 어째선지 계속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이 고개를 들어도 눈을 마주칠 일은 없어, 소피아는 뻐근한 목을 위로 올렸다.
"라이프니츠. 폰 없어?"
"있으면 진작 연락했겠지. 너는, 실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거야?"
"... 응."
서인식과 연락하기 위한 휴대폰이 있긴 했으나, 굳이 사실대로 말하지는 않았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나. 슬슬 더웠고, 뭣보다 라이프니츠의 목이 빨갰다. 여기서 나가면 날 죽이는 건 아니겠지. 소피아는 애써 부정적인 생각을 지웠다.
"이거, 사물함이 엎어지면 누군가 꺼내주지 않을까?"
"뭐? 무슨..."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말을 꺼내지 말았어야 했는데. 마치 누군가가 밖에서 흔들기라도 하듯, 사물함은 이유 없이 몇 번 덜컹거리더니 라이프니츠 쪽으로 엎어졌다. 순식간이었지만, 소피아의 순발력은 좋아서 자신도 모르게 라이프니츠의 뒤통수를 감쌌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으... 괜찮아?"
소피아는 욱신거리는 머리 탓에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라이프니츠의 머리를 감싼 탓에 손이 쓰라렸지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았다. 어린 아이들이 뒹굴며 주먹싸움을 하듯, 소피아가 라이프니츠에게 올라탄 듯한 자세. 아니, 거의 겹치다시피 한 자세가 되었다. 소피아의 긴 머리가 흘러내려 라이프니츠의 얼굴과 목에 닿았다. 소피아는 최대한 자신의 상체를 들어 올리려 노력했으나, 공간이 협소한 탓에 한계가 있었다. 안 그래도 더운데 상체를 띄우려 하니 당장이라도 땀이 흐를 것 같았다. 말없이 반쯤 뜬 눈으로 소피아를 바라보던 라이프니츠는 왼쪽 손으로 자신의 양 눈을 가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 응. 근데, 열쇠 구멍이 내 쪽에 있는데 어떻게 나갈 거야."
"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다. 사물함이 엎어지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몇몇 학생들이 사물함을 다시 세워 문을 열어줬고, 이 일은 소피아에게 황당한 경험으로 남았다. 사실 이 정도면 누가 일부러 장난질을 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도 서류는 제대로 다 찾았고, 손이 조금 쓰라린 것만 빼면 괜찮았다.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랬다. 소피아는 구겨진 교복을 대충 정리한 후 라이프니츠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이프니츠. 서류 교무실에..."
아. 소피아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 내가 갖다 놓을게."
라이프니츠는 서류 뭉텅이를 휙 들고는 빠르게 뒤돌아 교실을 나갔다. 잘못 본거지, 지금? 소피아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자신이 -11점을 받았을 때에도 얼굴이 그렇게 붉어지진 않았다. 저런 표정도 처음이었다. 괜스레 옷매무새를 다시 정리한 소피아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쟤도 어리긴 어리구나. 왠지 웃음이 나왔다. 르네가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졌냐고 묻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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