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크소피] 망명
순정철학논고 로크 X 소피아
차라리 널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로크는 황급히 볼펜으로 줄을 찍 긋고 종이를 구겼다. 종이는 순식간에 오그라져, 로크의 손 안에 빨려 들어갔다. 망설임 없이 종이를 바닥에 던진 로크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없었다.
"왜 하필 여기로 오자고 한 거야?"
"너 같으면 이미 다 부서지고 찾을 것도 없는데 여기 오겠어? 하루라도 좀 마음 놓고 자자."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무미건조하게 답한 소피아는 평온하게 잔해를 발로 헤치며 나아갔다. 한때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던 리케이온은 폐허가 된 지 오래였다. 이제는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든 교정을 둘러본 소피아는 묵직한 가방을 내려놓았다. 먼지가 짙게 묻어 거의 회색이 된 검은색 가방은 쿵 소리를 내며 착지했다. 로크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주변을 힐끔거렸다. 재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해는 거의 다 져, 어둑어둑한 하늘에는 달이 떠올랐다. 눈을 가늘게 뜨며 방향을 찾은 로크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기숙사가 저쪽이던가...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다리는. 괜찮고?"
소피아가 안쓰러운 듯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까 로크가 발목을 삐는 바람에 업어주네 됐네 말씨름을 한 탓이었다. 로크는 괜스레 발목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아직도 시큰거렸다. 크게 다친 건 아니지만, 되도록 이쪽 발은 쓰지 않는 게 맞았다.
"어. 괜찮다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래. 의사가 더 잘 알겠지... 하아, 피곤하네. 괜찮으면 기숙사까지 가서 쉬자."
로크는 잠잠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둘은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존 로크의 망명은 꽤나 오래 지속됐다. 그 시작을 함께 한 건 다름 아닌 소피아였고, 둘은 인적 드문 곳을 한없이 찾아다녀야 했다. 소피아의 긴 머리는 수배지 때문에 짧게 정리한 지 오래였고, 로크 역시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드러내지 않고 숨었다. 발목의 통증 탓에 인상을 찡그린 로크가 빠르게 표정을 풀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학과개편안이니 뭐니 밀어붙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뭐, 학생 때 순한 양 같던 애들도 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이니까."
현실에서도 왕당파였던 홉스가 왕의 편에 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조금이나마 바랐을 뿐이다. 이 둘이 대립하지 않기를. 그저 고등학교에서의 뭣 모르는, 다른 과를 배척하고자 하는 한때의 치기였기를. 소피아는 떫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취업 때문에 온 곳이라고는 하나, 결과적으로 동창들끼리 하는 게 죽음의 숨바꼭질이 될 줄은. 며칠 전 일어났던 총격전이 떠올라, 소피아는 가까워지는 기숙사 건물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로크. 난 네가 안 죽었으면 좋겠어. 필요하다면 남을 죽여서라도."
"... 야, 너는 갑자기 무슨 말을."
"그냥. 혹시나 내가 먼저 죽으면, 네가 스스로를 못 지킬 거 같아서 그래."
"나는..."
그는 못마땅하다는 듯 뭐라 쏘아붙이고 싶은 투였으나, 이내 달싹거리던 입술을 다물었다. 소피아는 그의 바지춤에 달린 단도를 바라보았다. 한 번도 쓴 적이 없는 그 물건을.
"비난하려는 거 아니야. 난 네가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해서. 방금 한 말은... 그래. 그냥 걱정돼서 한 말이지."
소피아는 연구가 끝나고 자신이 사라지고 난 뒤, 혼자 남겨질 로크가 걱정됐다. 이러나저러나 그와는 오랜 시간을 보냈고, 나름의 정이 있었다. 소피는 자유를 위해 저항하는 로크가 좋았다. 과학과였고, 수리과에 애정이 있던 것도 아니면서 학과 개편안을 막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과 무모하게 학생회실에 잠입하던 그의 담대한 면이 좋았다. 어쩌다 보니 리케이온 졸업 후에도 몇몇 철학자들과 연락을 계속하게 되었고, 로크도 그중 한명이었다.
"아, 말 괜히 꺼냈네. 이게 다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래."
소피아는 신발코로 로크의 신발을 두어번 가볍게 건드렸다. 그는 도망자로서의 삶을 이어가면서도 꾸준히 누군가를 도왔고, 사람을 살렸다. 리케이온 졸업 후 그는 당연하다는 듯 의사가 되었고, 나머지는 소피아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후원인의 간 종양 제거 수술에 성공했지, 아마. 망명길에서 뭔가 어긋나는 바람에 나랑 다니게 됐지만. 소피아는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뭐, 지금은 이런 상황이지만. 나는 알아. 자유가 승리할 거라는 걸. 그래서 널 따라온 거고."
"정말 이런 상황인데 자신감이 대단하네."
"네가 그러면 안 되지. 학생 때의, 혁명이 시작될 때의 열의는 어디로 가고."
"객관적으로 지금 상황이 좋은 건 아니니까. 당장 지금 너도..."
"아! 내 입이 문제다. 그만, 그만하자."
대화는 겸연쩍게 끝났다. 캄캄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두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혁명 후의 미래를 그리는 소피아와 달리, 로크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생각이 뒤엉켰다. 소피아는 모르는, 최근에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운이 좋았던 건지, 추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목숨을 한 번 건졌던 날. 로크는 그날 간만에 홉스를 만났다.
-소피아 양이 너와 함께 있을 거라는 건 예상했어. 지금까지 붙어있을 줄은 몰랐지만.
-뭐?
-이번 한 번은 살려줄게. 소피아 양에게 전해줘. 잘 생각해 보라고. 이 나라에 필요한 게 진정한 군주 대신 뭐가 필요한지.
-이렇게 보내준다고? 무슨 속셈으로...
-소피아가 돌아올 곳이 어딘지는 알지? 약속하지. 소피아가 자진해서 온다면 살려줄 거야. 그럼 이만.
-잠깐, 너...!
-로크. 꼭 다시 보자. 소피아도, 날 반드시 찾아오게 될 거야.
홉스의 마지막은 이랬다. 늘 그렇듯 여유롭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미련 없이 자신을 살려 보냈다. 졸업 전부터 소피아를 향한 눈빛에는 묘하게 집착이 드러나 있어서, 로크는 애써 착각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때 확신하게 되었다. 홉스는 소피아를 여전히 원하고 있다고. 설명하기 힘든 분노가 차올랐지만, 로크는 그날 홉스가 고상하게 건네고 간 쪽지는 힘을 줘 구겼을 뿐 버리지는 않았다. 로크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쪽지를 떠올리며 멈추어 섰다.
"너는 나랑 있으면 안 돼."
"뭔 소리야. 나는 내 의지로 너와 함께하기로 선택한 거야."
대립의 결과가 궁금하니까. 소피아는 말을 삼켰다. 로크에게 대단한 애정이 있어 이 망명길을 함께 한 것이 아니다. 얕은 한숨을 내쉰 소피아가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내일은 서쪽으로 갈까. 중얼거리듯 말한 소피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로크를 바라보았다.
"잡히면 당연히 죽겠지. 뭐, 그걸 모르고 내가 이러는 것 같아?"
"너만 잡히면 살려줄지도 몰라."
"상관없어."
소피아는 무관심하게 답했다. 오히려 이런 태도가 로크의 속을 긁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소피아는 가방에서 물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오늘은 조용히 자고 싶은데. 안 그래? 나름의 농담을 꺼내며 로크에게 물을 건넸지만, 손이 아닌 경직된 목소리가 돌아왔다. 그는 이마를 한번 쓸어 넘기고는 언짢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소피아. 너는... 가끔 상황이 어떻게 되든 아무런 상관 없다는 듯이 말해."
'실제로 상관 없으니까.'
"그래? 그치만 이런 상황에서 덜덜 떠는 것보단 낫지 않겠어?"
"하아... 맞아. 맞는데, 지금 그런 태도가..."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 쉬듯 말하던 로크는 소피아의 미소를 보고 말을 멈췄다. 소피아는 전부터 그랬다. 안지 얼마 안 된 자신과 함께 학과 개편안을 막기 위해 만났을 때도, 홉스의 다리를 걷어찰 때도, -11점을 맞고 여러 일을 당할 때도. 늘 한결같았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고.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이런 걸로 체력 소모하지 말자."
"... 알겠어. 오늘은 내가 불침번 설게."
도착한 기숙사, 아니 한때 기숙사였던 건물은 여기저기 금이 가고 부서진 폐허였다. 그럼에도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라, 둘은 망설임 없이 이미 박살이 나 쓸모가 사라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찢어지고 먼지로 뒤덮인 침대는 아예 없는 셈 치는 듯, 소피아는 벽에 몸을 기댔다. 로크는 불침번을 서기 위해 가방에서 물과 쓰지도 않을 총을 꺼냈다. 소피아는 그런 로크를 바라보고는 눈을 붙였다.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긴장이 풀린 듯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나 오늘 너무 피곤하다... 먼저 잘게. 뭔 일 있으면 바로 깨우고."
"그래."
유리가 다 부서져 틀만 남은 창가에서, 로크는 조용히 소피아를 응시했다. 소피아는 빠르게 곯아떨어졌고, 밖에서 이따금 들리는 바람 소리만이 귀를 울렸다.
-그냥. 혹시나 내가 먼저 죽으면...
소피아의 말이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계속 이대로라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어릴 적 화염병을 던져서라도 홉스를 막겠노라 말했던 건 자신이었지만, 홉스의 종아리를 차고 휴대폰을 물에 던진 건 소피아였다. 당장 며칠 전에 홉스의 심복을 죽인 것도, 자신을 지키려는 로크를 밀치고 총을 맞을 뻔한 것도.
놔주자.
애써 모르는 척하고 있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소피아를 붙잡고 있는 건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피아가 자신의 안위만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이 모든 것을 각오하고 자신과 함께 하기로 한 것도. 하지만, 그는 좋아하는 사람을 죽음의 위협에서 빼내고 싶었다. 소피아는 자신과 함께 한다는 이유로 운 나쁘게 죽기에는 너무 소중한 사람이었다. 소중하다는 마음은 참으로 이중적이라, 그 대상을 잃었을 때 오는 슬픔을 반드시 수반하게 된다. 소피아의 죽음을 잠깐 상상한 로크는 울렁거리는 속을 애써 진정시키며 바닥에 굴러다니는 펜을 아무렇게나 쥐었다. 자신의 손등에 그어보니 다행스럽게도 잉크는 잘 나왔다. 종이를 벽에 대고 떨리는 손으로 짤막한 편지를 적었다.
차라리 널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미안, 소피아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몇 장의 종이가 바닥에 버려졌다. 결과적으로 쓰인 건 한 줄의 주소와 잘 지내라는 인사 뿐이었다. 소피아가 이런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할지 알고 있었다. 자신을 원망하고 한심하게 여길 거라는 것도. 로크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마를 짚었다. 어쩔 수 없었다.
'깨지만 마라...'
엉성하게 접은 쪽지는 소피아의 머리맡에 두었다. 소피아의 잠귀는 예민해서, 조용히 사라져야 했다. 새근거리며 얕은 숨을 내쉬는 소피아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돈한 로크는 겉옷을 벗어 조심스레 소피아의 등에 걸쳤다. 어깨와 머리 옆면을 벽에 대고 쪼그려 앉아 깊게 잠든 소피아는 잠에 취하기라도 한 듯 깨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소피아. 우연히 만나지는 말자."
그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소피아의 소식을 모르고 살아가고 싶었다. 혁명이 성공하고 난 뒤 자유의 몸이 되어, 그때 자신이 소피아를 찾아가리라. 소피아를 눈에 담은 로크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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