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 가을
갑작스러운 소란과 함께 란은 눈을 떴다. 같은 반의 아이들은 삼삼오오 자기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업이 끝난 듯 했다. 구석진 자리에 엎드려 자고 있다가 겨우 잠에서 깬 그는 멍하니 눈을 깜빡인다. 아직 매달려있는 졸음을 쫓아내려는 듯 잠시 앉아있으면 순식간에 교실 안은 조용해졌다. 다들 부활동이니, 모임이니, 각자의 이유로 순식간에 교실을 빠져나가버린 탓이었다. 란은 반 아이들이 전부 나간 뒤에야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인 것이 제법 외로울 법도 하나 그는 그저 태연했다.
사실 그는 같은 반에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친구가 아예 없냐면 그건 또 아니지만. 어쨌든 같은 반에는. 그렇게 된 데에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 컸다. 다들 무리지어 친구를 사귀는데에 여념이 없을 학기 초에도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가을에 접어드는 현재에도 란의 이름을 들으면 그런 애가 우리 반에 있던가? 하고 긴가민가하는 급우들이 대다수였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까만 곱슬머리가 이마 위로 흩어진다. 굳이 정리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내버려두었다. 눈가를 조금 가리기는 하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쩐지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른 채 생각에 잠겨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앞에 있는 간판을 못보고 그대로 우당탕탕 부딪히기 직전이었다. 옆에서 팔이 쑥 뻗어져 나오더니 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급정거를 하듯 멈춰서고 만다.
"엇."
"엇은 무슨."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후유코였다. 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마냥 (넘어지기 전이니 아무 일도 없는 건 맞았다.) 웃어버린다.
"우연이네... 지금 하교 중?"
"응. 그런데 너 가방은?"
"아..."
란은 더듬더듬 제 어깨나 허리춤을 만져보았다. 그런다고 해서 없는 가방이 생겨날 리는 없지만. 교실에서 들고 나오지 않은 것만이 가까스로 기억났다. 교실에... 느긋하게 말하자 후유코의 어이없다는 표정만 더욱 짙어졌다.
"어차피 들은 것도 없는데 뭐..."
여유로운 것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상대는 짧게 혀를 찼지만 더 뭐라 하지는 않았다. 고아원까지는 당연히 가는 길이 겹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특별히 대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친했지만, 둘 다 수다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고아원 바로 앞의 골목길을 지나는 중이었는데, 란은 잠시 멈춰섰다. 왜? 하는 질문을 뒤로 한 채 그가 쪼르르 걸어 들어간 곳은 제과점이었다. 맛있고, 양도 많아 제법 인기가 좋은 곳이었다. 이 길을 지날 때마다 달콤한 냄새에 혹한 꼬맹이들이 조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애들에게 나눠줄 생각인지 넉넉하게 사는 모양새가 이번 달 용돈도 다 털어넣을 기세였다. 란은 돈을 잘 쓰지도 않으면서 종종 이렇게 재산을 털어넣곤 했었다.
"애들 주게?"
"앗... 이엔한테 줄거야... 근데 이엔만 주면 애들이 서운할테니까..."
"결과적으론 다 준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종이봉투를 고쳐 잡으면 바스락거리는 소리 사이로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이걸 주면 분명 무뚝뚝한 얼굴로 됐다고 하겠지. 알면서도 자꾸만 이것저것 가져다 주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고아원에는 종종 벽을 쌓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란은 그런 아이들에게 베푸는 걸 좋아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좋아하게 된달까. 절대 마음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이 행동하는 아이들을 보면 조금쯤 감탄하게 되어버리기도 했다.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순간은 외롭고 쓸쓸하니까. 호즈노미야 란은 그 공백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을 바라면서도 사랑 없는 이가 되는 건 무서워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뭐, 거절당할 때마다 오싹하기도 하고. 절대로 말하지 않을 비밀로 혼자만의 농담을 치면서 란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결과만을 말하자면 그 쿠키는 결국 다른 아이들의 입으로 다 들어갔다. 이엔이 쌀쌀맞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란은 그 표정이 아주 귀엽다고 생각했다.
"이엔, 아ㅡ"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들려오고, 눈 앞에 동그란 쿠키가 불쑥 나타나자 이엔은 무심코 입을 벌려 그것을 받아먹었다. 바사삭, 입 안에서 부서지는 부드러운 식감과 초콜렛의 달콤한 맛. 초콜렛 쿠키였다. 아기새마냥 잘 받아먹는 이엔이 귀여운지 란은 다정한 표정으로 이엔의 머리 위로 입을 맞췄다. 이엔이 살짝 뺨을 붉히고 만다.
"저만 주지 말고... 형님도 드세요."
"그럼 나도 아ㅡ"
이엔이 직접 쿠키를 집어 란의 입에 넣어주었다. 냠, 받아먹는 란은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하긴, 이엔과 함께 있을 때면 대부분 저런 텐션이기는 했다. 이엔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란의 시선이 부끄러워졌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이엔의 모습에 란은 가볍게 웃고 그에게로 몸을 폭 기대버린다. 당연히 기대오는 저를 감싸안아주리라 믿는 태도였다. 그의 생각대로, 곧 애정어린 손길이 이어진다. 두근두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소리가 들려왔다. 어릴 때를 생각하면 재미있을 정도의 변화지만, 란은 그걸 굳이 입밖으로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이엔이 란의 사랑스러운 사람인 것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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