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엘 연성

After 10958

체리님이 안써주니 내가 써야지...

w. 달이슬

물의 영역이 술렁였다. 현재 물의 정령왕인 엘퀴네스, 그를 아는 존재들에게는 엘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눈을 떴다. 엘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흐릿한 초점을 맞춰나갔다. 오랫동안 꾸던 악몽에서 벗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인간의 육체에 갇혀있던 과거와 달리 돌아온 현재는 너무나도 몸이 자유롭고 홀가분했다. 엘은 천천히 손을 움직이다가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맞아, 그러고 보니 시간이 얼마나 지난거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엘은 허둥거리면서 주위를 둘러봤다. 트로웰도, 이프리트도, 미네도, 아버지도. 다들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인가? 엘은 왜인지 잘 굴러가지 않는 머리에 오도카니 물의 영역 한가운데에 서서 멍하니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은, 나이아스들을 통해서 아크아돈을 먼저 바라보고 시간을 파악해야 할 것 같았다.

“엘! 드디어 일어났구나!”

엘은 익숙한 목소리에 시선을 돌려 주인을 찾았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발견하자마자 머리가 반응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앞서 나가 그를 와락 껴안았다. 서로 마주안은 틈으로 전해져 오는 온기가 따뜻했다. 품 한가득 들어차는 흙내음과 햇빛의 그 따스하고 포근한 향기가 폐부를 가득 채워나간다. 엘은 상대, 트로웰을 껴안고 있다가 뒤늦게야 당황해서는 안고 있던 팔을 풀고는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다.

“다행이야, 엘. 정말… 정말, 다행이야.”

트로웰은 엘과 달리 그를 놓지 않은채로 한참을 그렇게 더 안고 있다가 뒤늦게야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엘에게서 한두발자국 떨어졌다. 그리고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활짝 웃어보였다.

“이프리트랑 미네는 아직 유희중이라서 바로 온다고 해도 조금 걸릴거야. 엘뤼엔도 일에 바빠서 무리일걸?”

“그렇구나… 그래도 트로웰이 바로 와줘서 고마운걸.”

그렇게 말하고는 방긋 웃어보이는 엘의 표정을 멍하니 바라보던 트로웰은 이내 응, 그렇지? 라며 뿌듯한 미소를 잠깐 내비쳤다. 엘의 웃는 표정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생경한 감각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얼마나 시간이 지났어?”

“엘, 놀라지 말고 잘 들어.”

“…?”

엘은 트로웰의 말에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과거에 있었던 만큼 시간이 흘렀던 걸까? 그렇다면 3년? 아니면 조금 더 보태서 10년? 아무리 많아도 설마 10년을 넘지는 않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엘에게 트로웰은 잠시 음, 하며 말을 고르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정확히 30년이야.”

“…응?”

“30년이라고. 엘, 네가 잠든지 30년이 지났어.”

엘은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트로웰처럼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사실은 남몰라 안도하고 가슴을 쓸어내린 엘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엘뤼엔은 엘이 알지 못하게 혹시나 싶어 암시를 걸어두었고, 그 암시가 엘이 카노스를 마주하고도 정체를 들키지 않고 무사히 키워드를 떠올려 돌아올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혹시나 시간이 더 흘렀다면 어떻게 됐을지, 엘은 잠시 상상을 하다가 아찔해지는 미래에 이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돌아와서 기뻐, 엘.”

트로웰이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 모습에 엘 역시 마주 웃고는 트로웰이 내민 손을 마주잡고는 이내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돌아왔다. 내가 있어도 되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그것 만으로도 안심이 되는 기분이라서, 엘은 바보같이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정령왕이나 엘프나 드래곤같이 인간이 아닌 종족에게 있어서 30년은 고작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그닥 길지 않은 세월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30년은 무언가가 변하지도 않을 만큼 짧은 세월이지만 그건 인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인간들에게 있어서 30년은 긴 세월이다. 그들과 다른 유년시절을 가지게 되는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고도 남는다.

엘은 자연체로 내려온 아크아돈에서 수많은 것이 변한 것을 보고들으며 이채어린 눈을 감출 수 없었다. 애초에 스왈트 제국은 대륙 하나를 호령하는 나라였던 만큼 그 위상은 이미 입증이 되어 있었으나, 엘이 눈을 뜬 시점에 이르러서는 이보다 더 좋은 때가 있다고 빈말로라도 내뱉기 어려울 만큼 발전해 있었다. 과장을 조금 보탠다고 해도 이미 그 위상은 전 대륙을 좌지우지 한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엘은 자신과 처음 만났을때의 유약한 이사나의 모습을 기억하고는 감회가 새로워진듯 황궁 앞 광장의 벤치에 앉아서 멍하니 황궁을 바라봤다.

자신과 함께 할때는 아직 어린 십대였던 이사나와 알리사가 부쩍 장성한채로 결혼을 하고, 슬하에 자식을 여럿 둔 사이 좋은 어엿한 부부로 지낸다는 것이 어딘지 믿겨지지 않았다. 자신이 볼때는 여전히 어리기만 했는데. 왜인지 30년이라는 세월을 도둑맞은 기분에 조금 억울하기도 하지만 엘은 더이상 시간이 지나지 않고, 자신이 그들이 살아있을때 돌아왔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이사나와 알리사에게는 돌아온 다음날 바로 찾아갔었다. 그리고는 하루 내내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동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장성해서 가장 아름다웠을 청년의 시기를 놓쳤지만 중년의 이사나와 알리사는 그때에 비해 한 결 더 여유로웠고, 어딘지 모르게 성숙해져 있었다. 엘은 그것이 어딘지 모르게 뿌듯하면서도 조금 공허해지는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이사나와 알리사의 연애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웠었다. 물론 중간중간 알리사가 창피하다는 듯 붉어진 얼굴로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사나에게 괜히 핀잔을 주는 모습도 좋았었다. 그리고 엘은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는 정말이냐며 눈을 반짝였다. 아셀이 재상으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뜻밖이면서도 자신이 놓아준 다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사실에 엘은 내심 뿌듯해 하며 자주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30년 사이에 바뀐 아크아돈을 둘러보기 위해서 자연체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그리운 얼굴들을 만난 후에 엘은 다시 정령계로 돌아왔다.

다행이다.

그들이 살아있어서.

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에 이사나와 알리사를 대신할 분신을 만든 후 같이 놀러가기 위해서는 어느 장소가 좋을지 몰색하기 시작했다.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자신과 같이 시간을 보낸 존재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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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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