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ㄹㅅㄱ

[글][ㅈㄷㅇㅅ]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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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모래시계 (재연)

ㅇㅇ종도xㅇ우석

[세상에 풀리지 않는 문제는]

01

이게 누구야, 전교 일등? 너 진짜 오랜만이다.

  박태수를 따라 쫓아간 길목에서 마주친 건 태수뿐만이 아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럽다고 마냥 반갑지만도 않았다. 의식하지 않아도 교실 뒤쪽에서, 운동장에서, 하교길에서, 골목 안쪽에서 들려오곤 하던 목소리였으니까. 그걸 어떻게 잊을까. 그 목소리를, 그리고 목소리의 주인을.

  강우석을 이종도를 싫어하지 않았다. 사실 별 생각이 없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강우석은 전교에서 알아주는 우등생이었고, 그 또한 마찬가지로 전교에서 알아주는 학생이었다. 물론 우석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원체 공부에 관심이 없었던 이종도는 학창 시절동안 딱히 강우석을 건드리지 않았다. 누구라도 그랬겠지만, 선생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모범생에게 시비를 걸어봤자 얻는게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고등학교 3년 내내 두 사람에겐 사실상 접점이라곤 있을수가 없었다. 박태수를 빼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박태수가 아니었더라면 강우석이 그들을 멈춰세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종도 안 돼. 태수야, 종도는 진짜 안 돼.'

  바로 며칠 전에 술 김에 스스로 했던 말이 입가에 맴돈다. 우석은 태수에게 부탁했다. 나와 같이 가자. 

  그리고 태수는 대답했다. 미안해, 지금은 안 될 거 같다.

  돌아서는 태수보다도, 입가에 걸린 조소와 함께 자신에게 손을 흔드는 이종도가 더욱 눈에 밟혔다. 강우석은 그들을 쫓아 따라갔다. 그리고 맞닥뜨린 현장에서 연행되었다.

  몇 년을 준비한 시험에서 통 집중하지 못한 것보다도 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우석은 자신의 친구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 감정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배신감, 혹은 허무함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서던 태수와 현장에서 잡히지 않은 혜린에 대한 생각이 복잡하게 섞였다. 혜린이는 괜찮을 것이다. 그때 들었던 말마따나 부잣집 딸내미여서가 아니라, 혜린이는 어떻게든 잘 도망쳤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만약 잡혔더라도..... 우석은 마음 속에 떠오르는 삐딱한 감정을 애써 억누르려 노력했다. 그러다 강우석은, 문득 이종도를 떠올렸다.

  너는 왜 박태수의 옆에 있었던 걸까. 너는 왜 그런 선택을 할 걸까. 사실 강우석이 알아봤자 바뀌는 건 없었다.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슨 생각이라도 하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강우석은 그렇게 -자기 기준에서 꽤 오랫동안- 친구들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난 후에도 우석은 혼자서 시간을 보냈다. 간간이 도서관에 들리기 위해 학교에 가긴 했지만 혜린을 만나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만나던 술집도 발길을 끊었다. 스스로도 언제까지 이럴지 알 수 없었지만, 아직 두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이종도와 다시 마주친 건 그 즈음이었다.

  태수와 혜린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어떻게든 비우고싶다는 마음으로 혼자서 술을 마신 게 화근이었다. 원래도 술을 못하는 우석은 당연히 몇 모금도 채 마시지 않고 취기가 올랐고, 어떻게인지도 모르게 집 근처 골목까지 왔다. 아무리 취해도 귀소본능은 확실하구나 싶어 웃음이 나오면서도, 익숙한 대문이 보이자 괜히 안심이 되어 그대로 길가에 쪼그려 앉았다.

  아픈 머리를 부여잡으며 우석은 멍하니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저기에 태수도 혜린이도 같이 있었는데. 불과 몇 주 전에 불과한 그 때가 그리웠다. 옆에서 부축해주던 박태수를 생각하면서 우석은 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왔다.

"뭐야, 전교 일등? 너 여기서 뭐하냐? 왜 자빠져 있냐."

  또 그 목소리다. 우석은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기다리던 목소리가 아닌 것에 살짝 짜증이 난 것도 있었다. 가장 복잡한 상황에서, 가장 맞닥뜨리기 싫은 사람을 만났으니. 

"건드리지 마... 토할거 ㄱ..."

"아 뭐야, 술 쳐먹은 거였냐? 야, 들어가. 얼른."

  그때처럼 그냥 지나쳐가지, 괜히 아는 척하며 말을 거는 이종도에게 짜증이 밀려왔다. 너 아니었어도 들어갔을거야, 중얼거리며 벽을 잡고 일어난 우석은 이내 다시 휘청거릴수밖에 없었다.

"뭘 얼마나 퍼마신거야... 여기냐? 여기 맞아?"

  흐릿한 의식 속에서 우석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수 없었다. 자신의 팔을 붙잡고 집 안 화장실로 질질 끌고가는 이종도가 마냥 낯설었다.

"너 뭐ㅇ... 왜 그러..."

"야, 알아서 토해라. 자빠지지 말고. 간다."

  화장실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져 간다. 이내 대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가 문 너머로 들려왔다. 세면대에 기대어 서있던 우석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쉬었다. 대문 앞에서 몰려오던 구토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강우석은 이종도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서로 이름만 알고있는 사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왜 구태여 자신을 챙겨준건지 이해할수 없었다.

  사실 이종도보다도, 우석은 스스로에게 당혹스러움이 더 컸다. 그는 분명, 이종도를 다시 만나게되면 화가 나거나 원망스러우리라 생각했다. 그때 박태수의 옆에서 자신을 보며 미소 짓던 얼굴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다. 마지 자기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우석을 바라보던 그 얼굴이. 분명 박태수에게 바람을 넣은 것도 이종도일것이 분명함에도, 이상하리만큼 그에 대한 원망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이 일을 고맙다고 해야하나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문을 열고 비척비척 방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숙취로 며칠을 방 안에서 누워있다가 빌린 책을 반납하러 하숙집을 나선 것은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서고를 훑다가 책을 또 빌릴까 잠시 고민하던 우석은 이내 빈 손으로 도서관을 나왔다.

  저물어가는 저녁 해를 멍하니 바라보다 발걸음을 옮기던 우석은, 멀리서 보이는 낯익은 뒷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한동안 마주칠 일이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뭐 이런 일이 다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이종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우석은 걸음을 옮겨 건너편에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이종도."

"....전교 일등? 뭐야, 니가 여긴 웬일이냐? 왜."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 말없이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내려다보는 이종도의 표정이 꽤나 우스웠음에도, 강우석은 따라서 웃고 싶지 않았다.

"이게 뭐냐?"

".....그냥. 너 담배 많이 피잖아."

  이종도 역시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긴 마찬가지였다. 기껏나온 윗분과의 저녁식사 일정은 빠그라졌지, 담배도 하나밖에 안 남은 상황이 유쾌할 리가 없었다. 방금까지도 이종도는 마지막 한 대 남은 담배를 태우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키고 있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기는 귀찮고, 그렇다고 혼자서 어딜 가기는 궁상맞고.

  밑에 있는 놈들 아무나 불러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즈음, 이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눈 앞에 전교 일등 샌님이 있는 걸로도 모자라, 자신에게 냅다 담배와 라이터를 건네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그래서 갑자기 왜 주는 건데."

"그.... 저번에 나 술 먹고 집 들어가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그거 인사하려고."

  고맙다고 담배랑 라이터를 주는 놈이 다 있네, 쳐피다 뒤지라는 건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며 이종도는 그저 눈 앞의 담배와 라이터, 그리고 손바닥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도 상황이고, 누가 범생이가 아니랄까봐 공부만 했다고 이런 걸 주는 놈도 웃기기 그지 없었다.

"근데 어떡하냐, 나 이거 안 피는데."

"........어?

  얼굴에 스치는 당혹스러움을 놓치지 않으며 이종도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거봐, 역시 재밌다니까.

  우석이 사온 담배를 피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종도는 담배를 딱히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눈 앞의 이 새끼 놀리는 게 중요한 거지. 실실 웃던 이종도는 허공에서 멀거니 떠있다 천천히 내려가려는 우석의 손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뭐 그래도 주니까 받는다. 아, 라이터는 나중에 쓸 일 있겠네. 땡큐."

"어... 어어...... 갈게."

  어찌되었든 받아주었다는 안도감이 얼굴에 스쳤다. 이내 지나치려는 우석을 또 한 번 잡은 건 순전한 변덕이었다.

"야, 일등. 너 지금 바쁘냐? 어디 가야 돼?"

"어? 아니. 집 가는데 별 일 없어...... 왜?"

"야, 그럼 나랑 잠깐 좀 가자. 너 나한테 고맙다고 했지. 따라와 봐 좀."

  우석은 망설였다. 어디 가는 지를 떠나서, 이종도랑 같이 있어도 되는건지 생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이종도랑 대화는커녕, 같이 있는 것도 어색할 상황이었다. 지금도 두 사람은 평소와는 다르게, 너무 많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 이상 더 엮여도 괜찮은 걸까. 잠시 생각하던 강우석은 이종도의 뒤를 따라 걸었다. 오늘만, 정말 오늘만 스스로를 눈 감아주자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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