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성영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백업용 by 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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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조레가 걸린 감기가 꽤나 독했다. 1년 365일 내내 추운 홋카이도지만, 그래도 제법 기온이 따뜻해지는 여름에 걸린 이상한 감기였다. 여름 감기는 바보도 안 걸린다던데. 바보란 소릴 밥 먹듯 듣는 내가 아닌 누나가 여름 감기에 걸릴 줄이야. 괜스레 옆에서 미코토가 쫑알거리자, 미조레는 그냥 작고 힘없이 웃으며 팔을 올려 미코토의 머리만 두어번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독한 감기가 버겁긴 한 모양이었다. 

 

금방 지나갈 줄 알았던 감기가 생각보다 더 독해, 미코토는 등교를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누나를 겨우 자리에 눕힐 수 있었다. 미코토의 걱정대로 자리에 눕기는 한 미조레였으나, 미코토는 여전히 기분이 썩 좋지는 못했다. 본인의 건강을 걱정해 설득하는 말보다, 이 독한 감기를 누구에게 옮기기라도 하면 어떡할 거냐는 말에 미조레의 눈이 더욱 흔들린 걸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이런 성격은 도대체 누굴 닮은 걸까. 기억이 나질 않아 확신할 순 없지만, 아마 부모님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책임감 없이 – 그게 자의든 타의든 - 우릴 두고 떠나버린 부모님을 답답할 정도로 우직한 누나가 닮았을 리 없다.

 

어쨌든 아픈 이를 돌봐줄 보호자가 집에 따로 없다는 것은 언제가 되었든 무척이나 불편한 일이었다. 누나를 눕히고, 이마에 붙인 쿨 시트를 갈아주고, 또 알아서 잘 챙길 걸 알지만 점심으로 먹을 죽도 팔팔 끓였는데도, 현관문에서 발걸음을 떼는 게 쉽지 않았다. 일부러 무언갈 까먹은 척 계속해서 애꿎은 방을 들락거리다가, 곧 지각하겠다는 누나의 걱정스러운 말만 듣지 않았다면 아마 미코토는 전화기를 꺼내 라리마에게 오늘은 학교를 못간다는 전화를 남겼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든 도착한 학교에서도 여전히 머리는 복잡했다. 신경이 자꾸만 교실 창문 쪽으로 쏠렸다. 더 정확히는, 제 집 방향으로, 더더욱 정확히는 아픈 누나가 있는 제 집 방향으로 쏠렸다. 아픈 건 제 누나인데도, 제 머릿속에 솜사탕을 집어넣은 것 마냥 몽롱했다.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 그리고 수업시간이 정신없이 흘러갔다. 오늘 누나가 아파 학교에 오지 못했다는 소식을 축구부며 반이며, 또 여러 군데에 전하느라 더 그랬다. 누나의 부재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더 많았다. 미코토의 입에서 나오는 사정을 들은 그런 사람들의 반응은 미코토가 보기엔 크게 두 가지 부류였다. ‘그렇구나, 푹 쉬고 내일 보자고 전해줄래?’ 혹은, ‘의외네, 카제하야도 아프구나.’ 라는 두 가지.

 

버스 정류장에서 라리마와 헤어진 후 걷는 하교길에서도 평소 저 답지 않게 자꾸만 생각이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원인을 찾기 위한 생각은 오히려 악순환을 불렀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기분이 썩 좋지 못했는데, 그 기분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고, 동시에 가슴이 선득해지는 묘한 느낌이 계속해 들었다. 의외네, 카제하야도 아프구나, 라고 하던 수많은 이들의 별 생각 없었을 대꾸가 귀에서 자꾸 맴돌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의 감상은 아주 근본부터 잘못된 오해라고 할 수 있었다. 타인이 카제하야 미조레에 대해 하는 가장 흔한 오해는 바로 그녀가 무척이나 강인해 감기조차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다. 미코토가 보기에 진실로 그의 누이는 아주 심지가 곧고, 누구보다 강하며, 단단하긴 했지만, 그러나 오직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장인의 손을 만져본 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 단단함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와 흉터가 필요한지. 그리고 그의 누이가 얼마나 상처입기 쉬운 이인지.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카제하야 미조레의 강인함은 그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마도 미코토는 그 곳에서 제 지금 이 묘한 기분이 비롯된다는 것은 깨달았지만, 그 이상의 명확한 답은 낼 수가 없었다. 비록 요즘은 아니더라도, 흐려진 기억을 천천히 더듬어보면 누나가 아픈 일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이번 일에만 이렇게 유난을 떨게 되는지. 

 

열쇠로 문을 따고 현관문으로 들어서자, 늦은 오후와 이른 저녁에 걸쳐진 노을빛이 거실 베란다 창으로 사선을 그으며 들어오고 있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했다. 방 안 쪽에서 들어오는 아주 작은 숨소리만 아니었다면 미코토는 누나가 훈련에서 늦나,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거실 아무데나 가방을 집어던졌던 미코토는 다시 금세 가방을 주워들었다. 가끔 들었던 누나의 잔소리가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아픈데, 그런 누나에게 별 다른 고민거리나 걱정거리를 주고 싶지 않았다.

 

거실벽면에 가방을 잘 기대놓은 미코토는 순간 생각났는지 부엌으로 가 아침에 끓여놓았던 죽을 확인했다. 싱크대에 놓여있는 죽 그릇과, 쓰레기통에 들어가 있는 약 포장지가 몇시간 전 이 곳에 있었던 미조레의 존재를 증명해주었다. 확실히 비어있는 냄비를 보자, 안도감이 따뜻한 물에 잉크가 퍼지듯 피어올랐다. 물론 걱정조차 하지 않았다만, 그래도, 아주 조그마하고 굳이 필요 없는 일이라도 제 누이가 제게 의지했다는 점이 기뻤다.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침에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미조레가 얕게 잠들어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감고 있는 미조레는 눈을 뜨고 활기차게 남을 이끄는 그녀의 모습과 또 다르다. 새삼스럽게 그런 생각을 하며 미코토는 아주 조용히 누워 있는 미조레에게 다가갔다. 깨워서 저녁은 죽 말고 밥을 먹어도 괜찮은지, 이젠 상태가 많이 괜찮아졌는지, 열은 재봤는지 따위를 묻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미코토는 그냥 아주 잠시 차분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고 누워있는 미조레를 바라보기로 했다.

 

아프거나, 잠에 들거나, 혹은 둘 다인 사람은 누구나 무방비하고 연약해 보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제 누이일 때에는 그 당연한 것이 새삼 묘하게 다가왔다. 가만히 앉아있던 자리에서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제 누나의 입술 주변의 흉을 공중에서 덧그리면서, 미코토는 아주 조용히 오늘 하루 종일 이상했던 제 기분과, 생각과, 또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사유했다.

 

누나도 아플 수 있다는 아주 당연한 것들을 모르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이런 고요하고 정적인, 가끔은 단단해보이지 않는 누나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으리란 걸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어떠했는가.

 

저도 모르게, 미코토는 아주 조용히 입을 열어 하루 종일 가슴에 진득히 고여있던 것들을 속삭였다.

 

아주 가끔은, 누나가 많이 강인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누구에게나 의지가 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약해졌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어. 오직 나의 앞에서만 약해졌으면 좋겠어.

 

다음 말은 더욱 작게 뻐끔거리게 된다.

 

약해보일 때만 누나가 내 것 같아₁.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₁.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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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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