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걸윤종

전쟁 후 깨어나지 못하는 윤종이 이야기입니다. 커플링 요소는 옅습니다. 역시나 썰과 연성 그 사이 어드메

테라리움 by 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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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끝났다. 세상에 나타난 마교는 숨통을 채 크게 틔우기 전에 천우맹을 위시한 이들의 칼에 가로막혔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천마는 결국 화산의 검에 그 목을 떨어트렸다. 그야말로 대승리. 피해를 입은 자들이 없다 말할 수는 없었지만, 목숨을 버리고 나간 전장에서 숨을 쉬며 돌아왔으니 그 어찌 기적 같은 승리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피해를 크게 입은 이들일수록 더욱 크게 웃고 떠들어 그 승리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고 이로써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이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도 점차 가라앉아갈 때 즈음, 화산의 제자 하나가 깨어나지 못한다는 소문이 조용히 입에서 입으로 건넜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 여겼다. 전쟁이 끝난 직후다. 여기저기 몸이 성한 이를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었으니 이상하다 느끼지 못했다 함이 옳다. 사형, 살아있습니까? 전투가 끝나고 피 섞인 숨을 내뱉으면서도 익숙히 던진 질문에 목소리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한들, 질질 몸을 끌고서 닿은 손끝이 차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대답이었다.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모습도, 역시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치료는 끝났고 부상은 심각했지만, 목숨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라 했다. 다만 역시 상처가 큰 만큼 회복에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남들보다 더 실력이 좋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더 전방에서 더 치열하게 싸워 더 큰 부상을 입었던 검협과 오검이다. 도리어 며칠 만에 눈을 뜨고 움직이는 이들이 회복력이 좋은 것일 뿐 그러지 못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뭐, 많이 다쳤으니까. 여상스레 넘겼다.

 또 며칠이 지났다. 청자배의 대사형으로서 짊어진 게 많았으니 유난히 피곤했으리라, 얌전히 두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너무 오래 자는 것 아니냐고 웃었다. 기어오르는 불안을 모른 척 눌렀다.

 다시 며칠이 지났다. 오늘 일어나지 않았으니 내일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보다는 바람에 가까운 목소리로 누군가 중얼거렸다.

 다음날에도 윤종은 눈을 뜨지 않았다.

 “외상도 내상도 모두 치료는 다 끝났어요.”

 윤종의 몸을 한참 살피던 당소소가 말했다.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으며, 혹시나 놓친 부분이 있을까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지만 걸리는 점은 없었다. 이제 와서 새로운 점이 발견될 리도 없었다. 당가는 물론이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술을 조금이라도 할 줄 안다 하는 이는 모두를 불러모았고 그 모두에게 같은 답을 들었다. 감히 중원의 영웅 대화산 앞에서 손을 빼는 일을 누가 할까, 오히려 다들 제 역량 이상으로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럼에도 결과는 같았다.

 그렇다면 마교의 사술이 아닌가. 그런 의혹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청명이 집요할 정도로 그 몸 안으로 내력을 돌렸지만 역시나 잡히는 건 없었다.

 이상은 없다. 그저 깨어나지 않을 뿐이다.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제자 하나가 깨어나지 않은 채 화산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야 했다. 전쟁은 끝났어도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으므로, 삶은 유지되어야 했으므로, 좋든 싫든 그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전후 처리를 하고 타 문파와 세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전쟁에 집중하기 위해 멈췄던 거래를 다시 돌리고. 한 사람에 대한 언급이 줄어들고 그가 잠든 곳 주변만 소리가 없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화산은 일상을 되찾았다.

 그리고 조걸에게는 새로운 일과가 생겼다.

 “사형, 매화가 폈습니다.”

 이번 매화는 다른 때보다 개화가 빨랐다고, 흥얼거리는 듯한 어조로 이어 말하며 조걸은 제 사형의 방문을 열었다. 창을 열어 적막하게 가라앉은 공기를 순환시키고 빛을 들였다. 소담스럽게 핀 매화 몇 송이를 고르고 골라 고운 천에 얹어 가져왔다. 꽃이 혹여나 바람에라도 상처 입을까 머리맡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조걸은 제 사형의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소 같았다면 냅다 날라왔을 잔소리는 없다. 그걸 좋은 기회로 한쪽 발까지 마저 올리고 얌전히 놓인 윤종의 손을 찾아 쥔다. 손의 온기를 확인하며, 입을 연다.

 사형, 이번에 명자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근데 저희 청자배가 유난히 입문이 빠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고민이 많으신 모양이더라고요. 원칙대로라면 아직 새로운 배분을 받기엔 조금 이르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뭐 저는 새로 들어오면 좋겠지만요. 드디어 막내다운 막내를 받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제들도 아닌 척 들떠있습니다. 청명이가 은하상단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아마 그놈이 돌아와야 결론이 나겠지요.

 요즘에도 손님맞이로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지요. 제가 말씀드렸던 거 기억하십니까.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화산에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천우맹을 개파하던 날보다 심했어요. 이게 과장이 아니란 걸 사형이 아셔야 할 텐데. 청명이 사고 안 치도록 밖으로 빼돌린다고 저희가 얼마나 고생한 지 아십니까. 밤낮으로 들으셔야 할 겁니다.

 또,

 두서없이 이어지던 말이 끊어졌다. 사형, 백천 사숙께서 부르십니다.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 사형은 둘 있지만 지금 사제가 부르는 이는 한 명이었고, 이름도 부르지 않았는데 그게 당연히 저임을 알아들은 조걸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에 잠깐 동안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사형, 윤종 사형. 이만 가보겠습니다. 괜히 제 손안의 온기를 한 번 더 힘주어 쥐었다 놓고 조걸은 윤종의 처소를 나섰다.

 “청자배 대제자를 다시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

 백천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미 몇 번 언급되었던 이야기다. 언급만 되고 말았던 건 그들 역시 그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조걸이 날마다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화산에 없다. 어떻게 그걸 알면서도 이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는 최악을 가정한 만약을 대비해야 했고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백천 자신이어야 했으니. 윤종이 눈을 뜨지 않은지 벌써 몇 달이 지났던가. 가능하다면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싶었으나 먹지도 움직이지도 못해 내공으로 겨우 숨을 붙여놓은 몸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져 갔다. 쓴 것을 삼킨 듯 울렁거리는 속으로 백천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조걸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으리만치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걸아.”

 “사형은 일어날 겁니다. 눈만 뜨면 약해진 몸은 금방 회복하시겠죠. 근데 굳이 다시 정할 필요가 있습니까.”

 “조걸.”

 눈치가 없는 게 아니니 백천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뻔히 다 알 텐데도 조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씩 웃었다. 안 그래도 됩니다. 사형은 일어날 겁니다. 의심 한 점 보이지 않는 믿음에 결국 백천이 뱉을 수 있는 말은 그래, 한마디밖에 없었다. 곧 깨어날 거라 믿고 싶은 마음이 그라고 없을까. 벌써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괜찮다고. 몇 번이고 곱씹어 이미 잘게 된 희망을 다시 삼키고 백천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봄이 지나고 여름, 가을. 잠든 윤종의 머리맡에 조걸이 그리고 때로는 다른 제자가 가져다 놓은 꽃이며 당과며 과일이며 잡화가 매일 셀 수 없이 바뀌고 희망과 체념이 번갈아 찾아왔다. 아직도 청자배의 대제자는 윤종이었으며 조걸은 여전히 내일이면 깨어날 사형을 말했다.

 절망이 소리 없이 찾아온다 하면, 기적 역시 그러하다.

 화산에 들어온 선물 중 특히나 맛있는 당과가 있었다. 어디 먼 곳에서 전해져 온 것이라 했는데, 틀림없이 제 사형이 좋아할 맛이라 조걸은 주어진 것에서 하나를 더 챙겨 윤종에게 향했다. 화산오검에서 더욱 이름값이 높아진 조걸 역시 많은 일을 하고 있었기에 사형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오늘도 넘쳐나도록 있었다. 그것들을 입속으로 하나하나 엮으며 익숙하게 기척을 내고 문을 연다.

 “사형, 저 들어갑니….”

 순간적으로 느껴진 건 위화감. 어쩔 틈도 없이 덜컹 내려앉은 속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조걸은 눈이 마주쳤다. 그래, 눈이 마주쳤다. 매일같이 봐온 얼굴에서 잠기운이 아직 남은 듯 풀어진 눈동자가 지독하게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곱게 싸들었던 당과가 어느새 바닥을 뒹굴었지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 저도 모르게 내뱉은 목소리에 드디어 그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그리고.

 조걸은 무너졌다.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이 내는 것과 같은 오열이 목 안으로 치밀어 올랐다. 사형, 윤종 사형, 제가, 제가 얼마나, 울음에 섞여 제대로 된 단어조차 형성하지 못한 말들이 멋대로 입에서 튀어 나갔다. 우당탕, 구르는 소리가 제 울음소리 너머로 들렸다. 윤종이 갑자기 주저앉은 제 사제 탓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다 넘어진 것이다. 그도 그렇다. 며칠만 몸을 움직이지 못해도 제 몸 같지 않을 텐데 하물며 몇 달이다. 가서 일으켜 드려야지. 당황스러울 테니 설명도 해드려야지. 그렇게 생각을 하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 아아, 이젠 의미도 가지지 못한 모음만이 눈물과 함께 흘렀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윤종이 깨어나면, 모두를 향해 제 말이 맞지 않았냐고 웃어 보이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떠들려 했다. 사형, 들어보세요. 사형이 조금만 더 늦게 깨어났으면 제가 대사형이 될 뻔했습니다. 아니 그리 웃으실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하면 잘할 겁니다. 보고 배운 게 있지 않습니까. 그래도 역시 청자배 대사형은 사형밖에 없지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하나하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예정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치만, 불안했다. 누구보다도 불안했다. 이대로 그가 눈을 뜨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하루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어느 날 잡은 손에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을까 봐 얼마나 겁먹었던가.

 “…걸아.”

 매마른 목소리가 이름을 부르고, 움직이지 못하는 저에게 기어이 기어서라도 와준 것인지 손이 닿았다. 늘 그를 두렵게 했던 그 손이다. 제 의지로는 한치도 움직여지지 않던 몸이 연약한 손길을 따라 그 품에 얼굴을 묻었다. 손에 닿는 옷자락을 마치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조걸은 울었다. 등을 다독이는 손이 따뜻해서, 그래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십니까. 겨우겨우 내뱉은 한마디에 미안하구나, 말 한마디가 돌아오는 것을 그리도 기다렸다.

 멀리서 소란에 눈치챈 이들이 달려오는 기척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조걸은 깨달았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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