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걸윤종
조금 잔인한 묘사가 있습니다. 썰과 연성 사이의 어드메. 커플링요소는 1g 있는 듯 없는 듯.
아차, 하는 순간이었다. 그 직후 든 생각은 끝나면 정신 빼놓고 있었다고 청명이에게 죽겠구나 겨우 그 정도였는데.
정파의 후기지수를 기준으로 잡는다면 조걸을 비롯한 화산오검이 죽음을 바라본 횟수는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굳이 기준을 그리 잡지 않는다 해도, 정사를 가리지 않고 후기지수의 틀로 가두지 않는다 해도 그들이 경험한 죽음은 결코 적은 편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청명이를 뒤따르며 때로는 화산의 가장 앞에 서서 그리고 때로는 설원에서 또 때로는 강에서 그들이 제 손으로 거둔 목숨이 몇이던가.
이제 와서 그 경험에 무어라 말을 붙이기도 새삼스럽지만, 이번만큼은 그리 수없이 눈에 담아온 죽음이 독이 되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모든 것이 사특한 환술임을 머리로 알면서도 이리 생생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비명. 피. 뜯겨나간 팔. 무너지는 몸. 피어나던 매화가 채 꽃봉오리를 펴지 못하고 스러지고 그 위를 다시 피가 덮는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꺼진 숨. 미처 감지 못한 눈에 빛이 사라지는 순간이 억겁 같으면서도 찰나로 스친다. 날라가는 저 목은 청자 배의, 아, 이건 지옥이다. 지옥을 눈앞에 둔다면 필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이를 악문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드는 고통마저도 달갑다. 눈을 감고 싶어지는 광경을 직시하며 조걸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다행히 기억은 끊어짐 없이 선명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그는 늘 함께 하던 이들과 어느 사파 무리를 쫓고 있었으며, 다른 화산의 제자들은 모두 본산에 있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이리 죽어가는 이들이 현실일 수가 없다. 없을 것이다.
걸아, 정신 차려라!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길이 다급하다. 진짜로 이게 환술이 맞는가? 저 표정이, 어깨를 파고드는 손이 이리도 생생한데? 겨우 붙잡은 이성이 불안하게 흔들리고 아득해진 시야에 귀가 먹먹해진다. 이미 익숙해졌다 생각한 피 냄새가 사형제들의 것이라 생각되는 순간 역하게 속을 뒤집는다. 사형, 그리 부르려 한 입술이 떨어지기도 전에 사각에서 날라온 칼이 그 몸에 파고들어서.
살이 터질 정도로 강하게 베어 문 입술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가까스로 정신을 되돌렸다. 한순간 일었던 현기증을 무시하고 조걸은 땅을 박찼다. 생각하기보다 먼저 몸이 기억하는 대로 휘둘러진 검이 적을 벤다.
“걸아! 조걸! 정신 차렸느냐?!”
환술 속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외침이 귀를 울린다. 저거 일단 대가리를 깨면 된다니까?! 나 못 믿어?! 알았으니까 청명아, 진정해라! 그러다 저놈 진짜 죽는다! 역시나 익숙한 목소리가 주변을 윙윙거린다. 눈앞의 적을 처리함과 동시에 빠르게 주변을 훑는다. 사숙도 사고도 청명이 놈도 소소도, 그리고 사형도. 모두 무사하다. 잔상처가 몇몇 있지만, 저 정도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방금 전까지 보던 광경과 완전히 다른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조걸은 뒤늦게 찾아온 현실감에 여직 막혀있던 숨을 토했다. 걱정과 염려를 담은 시선을 마주하며 씩 웃고 한편으로 생각한다. 당분간은 꿈자리가 사납겠구나.
각오는 했었지만 꿈은 어떤 의미로 환술보다도 더 지독했다. 환술은 환술임을 알았으나 꿈은 꿈인 걸 알 수 없었으니. 사형제의 피를 뒤집어쓰고 피눈물을 흘리며 비명을 지르다 깨어나면 식은땀으로 젖은 몸에 차가운 밤 공기가 지나치게 시렸다. 수련을 한바탕 한 후처럼 심장이 시끄럽게 울린다. 터지려던 비명과 함께 숨을 삼키고 어두운 방 안에서 필사적으로 기감을 넓혀 각자의 방에서 자고 있는 사형제들의 기척을 느끼고 나면, 그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알고 있는 사실을 기어이 확인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결국 조걸은 그날 밤도 잠들지 못했다.
“걸아, 들어가마.”
“네? 네, 사형.”
조걸이 대답하자마자 문을 연 윤종은 방 안을 한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상에 앉아있던 조걸을 보고 쯧, 혀를 차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어째 갈수록 사형은 성격이 나빠지시는지. 예전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그러나 최근에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모습에 조걸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저 다음 날라오는 주먹이 너무나도 익숙한 탓이었다. 순간 주마등마냥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몇몇은 이미 그 자리에서 얻어맞은 건이고, 몇몇은 아직 맞지 않은 일이었으며, 또 몇몇은 그냥 일상적인 대화와 행동이었다.
이번엔 뭘까.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 모르겠지만 뭘 잘못해도 잘못한 거겠지. 곧 닥칠 폭력에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다가오는 건 주먹이 아니라 저를 침상 안쪽으로 꾹 밀어 넣는 손이다.
“으악, 사형! 좁습니다!”
“시끄럽구나.”
어어, 하는 사이 윤종이 미는 대로 밀렸지만 벽에 딱 붙고 나서도 미는 힘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침상의 한쪽을 차지하다시피 올라오는 모습에 조걸은 입을 떡 벌렸다. 어릴 적 쓰던 것보다 더 크고 넓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한 사람이 자는 걸 전제로 만들어진 침상이다. 두 명은 상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걸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윤종 역시 조걸에 비하면 얇은 편이나 일반적으로 작은 체형은 아니니 더욱 그렇다.
“몸 좀 더 줄여보거라.”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 악!”
그러나 화산이 어디인가. 청명이가 온 후의 화산은 안 되면 되게 하여라 와 하다 보면 된다를 체득한 이들만 모여있는 곳이다. 거의 조각을 맞추다시피 몸을 구깃하게 구기다 보니 이게 되네, 싶어지는 순간이 왔다. 좁은 침상에 둘이 딱붙어 누웠다. 조걸이 불편한 만큼 상대도 불편한 게 당연한지라 슬쩍 인상을 찡그리는 게 보였지만, 윤종이 별다른 말 없이 눈을 감았기에 조걸도 뭐라 말하는 걸 포기하고 입을 닫았다.
왜 사형 방을 놔두고 여기서 그러십니까. 입안을 맴돌던 질문은 답을 원하는 게 아니었기에 삼켰다. 모를 수가 없다. 조걸은 자신이 환술에 걸려있는 동안 본 광경도, 그리고 그 이후 제가 겪고 있는 일도 이야기한 적 없다. 그러나 그들에겐 대충 파악되고 있으리라. 그러니 수련량에 비해 더 피곤해 보이는 조걸을 보면서도 청명이가 못마땅한 표정 한 번으로 그냥 넘어가는 것일 것이고 언젠가 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나갔다가 마주친 사고가 아무 말 않고 함께 해준 것일 테며, 사형이 굳이 여기 와서 편하지 못한 잠을 청하는 것이겠지.
주변은 조용하다. 이미 다들 잠자리에 들었으리라. 밤이 깊었다. 바로 곁에서 들리는 숨소리에도 눈만 감으면 선명해지는 핏자국에 쉬이 잠들지 못하기를 또 한참. 어둠 속에서 옆에 누운 윤종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걸은 충동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수련이 끝나고 또 전투가 끝나고 몇 번이고 농담 삼아 입에 담았던, 그러나 최근에는 해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사형, 살아계십니까.”
이미 잠들었다면 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목소리는 매화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조용했고 그러나 답이 돌아올 것을 확신했기에 그 음색은 선명했다. 그리고 조금 지나, 예상했던 대로 윤종이 한숨인 듯 웃음인 듯 옅은 숨을 섞은 목소리로 답했다. 몸에 닿은 타인의 체온이 따뜻하다는 것이 이다지도 안심될 수 없었다.
“그래, 살아있다. 그러니 너도 안심하고 이만 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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