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개변 시도는 미친 짓이다.
케테리스 파리부스
「 ceteris paribus 」.
제목을 보고 사회과학 연구서로 착각했다면 큰 오해다.
나는 이 책을 펼친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겠다.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과거의 나를 미래의 나로 바꿔치기 했을 때 과연 원하는 미래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아둔한 연구자가 욕심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말아먹은 이야기다.
인과에 도전하려는 모든 후학들에게 바친다.
과거에 변화의 가능성을 심으면 미래를 개변할 수 있을까? 인과를 비틀어서라도 다다르고자 하는 결과가 있는 자만이 뒤따르는 모든 위험을 감수하고 저지를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미친 짓이라고 감히 단언한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겠다. 시간 역행, 회귀, 과거나 미래와의 소통 등 인과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모든 행위는 전부 미친 짓이다. 이것은 유경험자의 조언이다. 부디 모든 연구자들은 ‘가지 않은 길’을 걸을 생각 따위 단념하길 바라며 이 글을 쓴다.
반하온은 문득 가라앉은 정신을 흔들어 깨웠다. 얼마나 오래 침잠하는 채였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다시 쓸' 기회를 흘려보낸 뒤에야 표류하는 정신을 붙들어 맬 수 있었을지…, 자문해봐야 소용은 없는 일이다.
아득한 과거, 언젠가 그는 자신이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았다. 더 정확히는 스스로 부여했다.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항상 가장 중요할 때에 치명적인 실수를 하니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주의하라고 했던가. 반하온은 후회했다. 격언은 괜히 격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 여러모로 개같은 '별들의 사정' 따위에 얽매이기 전에 전부 그만뒀어야 했다. 세계는 섭리를 거스르는 존재를 가만 두고 보지 않아서, 흐트러지는 법칙과 그로 인한 문제의 해결을 바로 그 존재에게 맡겨버렸다. 그래서 반하온은 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다 죽여버리고 싶었는지도.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대가가 너무, 너무 비쌌다.
무수히 많은 가지 않은 길들이, 열어보지 못한 가능성들이 계간界間을 부유했다. 지독한 꿈과도 같은 그의 실패가 자꾸만 그를 다시 이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이것은 필히 저주다. 스스로에게 세계의 법칙을 거스를 능력을 직접 부여한 자에게 부과된 고통, 업. 그의 원죄가 된 힘이 초래하는 죄악을 상쇄하려는 세계가 죄인으로부터 걷어가는 세. 그가 갚아내야 하는 죄업.
회귀자는 상념을 끊어서 떨쳐내고 눈을 떴다. 방금 막 전방위로 방출한 의지가 입자가 되어 주변에서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이놈의 상념들은 박멸이 안돼, 박멸이.'
잡아도 잡아도 어디선가 슬금슬금 기어나오는 계간의 벌레들.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이 백해무익한 해충들은 계간에 서식하는 사념체 계열의 '이물異物'이다. 이곳 세계와 시간의 틈새에 올 때마다 망할 벌레들은 반하온에게 들러붙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반하온은 주변을 기어다니는 상념을 느꼈다. 뭐라도 하려면 저것들을 다 치우긴 해야하지만…, 계간에 저만큼이나 귀찮은 것들이 또 없는 탓에 수고로운 일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냥 둘까….'
눈을 반쯤 뜬 채 나른하게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붕 떠오르는 듯한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진짜로 정신을 차릴 시간이다.
의지가 곧 힘이 되는 곳, 세계와 시간의 틈에 존재하는 일종의 정신 세계. 그것이 바로 '계간'이다. 좀 더 정확히 정의하자면 모든 인간 정신의 이면. 일반적으로 인지되지 않는, 정신의 내부가 아니라 겉면을 감싼 보호막으로 기능하기도 하는 그런 개념이 실체화한 공간. 사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그의 무의식에 가까운 공간인 것이다.
반하온은 의지로 구형의 공간을 장악했다. 상념이 뚫을 수 없는 방어막을 전개한 그는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나 않았다. 얕게 지면을 뒤덮은 물과 그 아래의 잔디. 혹은 잔디 들판 위로 얕게 깔린 물. 잔디가 시들거나 물이 흙으로 탁해지지 않고 마치 들판과 물 사이에 무언가 가로막듯이 뚜렷한 경계로 나뉜다. 잔디는 싱그러운 풀이고 그 밑의 흙은 건조하다. 물은 맑고 깨끗한 그대로 반하온의 움직임에 따라 옅게 찰랑거릴 뿐이다. 서로 섞이지 않은 채.
"케테리스. 지금이 언제쯤이지?"
적막한 공간을 울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혼자라는 생각은 일절 없는 듯 자연스러웠고, 나른하긴 해도 단단했다. 깨어나고 저걸 처음 불러오면 항상 몰려오는, 마법의 발동으로 인한 과부하가 머리속을 헤집었다. 두통이 말투를 날카롭고 뾰족하게 만든다.
[ 가능세계를 점검합니다. ]
"뭐? 그걸 왜 이제 와서 하는 거야. 애초에─,"
[ 현재 '제6 거대 분기점'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
"─타이밍 맞춰서 좀 일찍 깨워달라고 했잖아."
절로 인상이 팍 쓰이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고 있다. 반하온은 눈 앞에 구현된 반투명한 창을 불만 가득한 얼굴로 노려봤다. 저 스펠은 언젠가부터 그의 의지와는 영 따로 놀기 시작했다. 전부 빌어먹을 별들 때문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거대 분기점이 셋 이상 전부 지나기 전에 깨우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이의 있습니다. ]
"뭐? 아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야! 튀어나와!"
반하온은 소리를 지르고 씩씩거렸다. 정신세계인 계간에서는 감정을 억누르거나 숨기는 게 거의 불가능하고 느끼는대로 표출하게 되어서 짜증이나 화를 삭이는 게 어려웠다.
스펠이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은 편리하긴 했지만 또 그 만큼 성가셨다. 알아서 보좌해주면서도 삐지거나 짜증내거나 귀찮아하거나 불만을 표하거나…, 아무튼 감정 표현을 했던 것이다. 지금은 또 이의를 제기하겠단다. 깨워주기로 해놓고 안 깨워준 놈이 당연히 잘못한 게 아니던가? 대체 어디에 이의를 제기할 부분이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강한 의지가 모여드는 감각에 반하온이 대충 손을 휘저어 보호막을 확장했다. 애초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정신체의 형태가 인간을 크게 벗어나기가 어려운 그와는 달리 케테리스는 본디 '스펠', 즉 주문일 뿐이다. 그 주문에 별 놈들의 의지가 섞여서 자아를 형성한 만큼, 케테리스는 고정된 형태나 실체가 없는 관념체였다. 다만 의지를 투영해 형체를 이룰 수는 있었다. 충분히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정신력을 투자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정신세계이니만큼, 스스로에 대한 인식을 조정함으로써 외견을 주무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념체는 신체를 스스로의 보호막으로 여기는 인간과 다르게 그 자체로 자아를 노출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상념에 잘못 물어뜯기면 그대로 소멸할 수도 있어서 주의해야 했다.
〔아아.〕
케테리스의 의지가 가물가물 모여들어 인간의 형체를 이뤘다. 형체가 없을 때는 소통을 위한 '창'이 필수적인데다 곧바로 통하는 대화를 나누기도 힘들었다. 별의 의지가 모여 탄생한 케테리스는 일종의 신과도 같아서 의지를 곧이곧대로 쏘아내면 범인의 정신체처럼 휩쓸려 소멸하지는 않더라도 반하온의 정신체가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의지를 창으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한 차례 격을 끌어내리는데, 이때 불필요한 감정 등은 걸러지고 가능한 단순하게 치환되어 가장 중요한 알맹이인 사실적 정보 정도만 남는 것이다. 반면에 형체를 이루면 이런 과정은 건너뛰어도 됐다. 화신체나 의체 정도로 부를 수 있는 그 몸이 거름망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반하온은 팔짱을 끼고 케테리스를 꼬나봤다. 케테리스는 그 시선을 느끼고 갈무리가 덜 된 화신체를 움직여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흠흠.〕
태연자약하게 목까지 가다듬은 케테리스가 반하온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뾰루퉁하게 얼굴을 구겼다.
〔이의 있음!! 나도 어이가 없다 이거야!〕
"…너,"
케테리스가 취한 형상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반하온이 표정을 굳히고 주먹을 휘둘렀다. 케테리스는 깜짝 놀란 얼굴로 휙 물러섰다.
〔뭐야?! 왜 주먹질하고 난리─!〕
"모습 좀 바꾸지?"
반하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자 케테리스는 흠칫하곤 몸을 내려다봤다. 어린 여성.
〔음. 이해했어. 자, 이러면 됩니까?〕
"…뭐, 그렇다 치자. 그래서 뭔데?"
휘릭, 반하온에게 익숙한 다른 인물의 형상을 취한 케테리스가 입을 열었다.
〔지금에라도 깨어난 것에 감사하십시오. 본래의 예측이 틀어지는 바람에 당신, 산산히 흩어져 소멸할 뻔 했단 말입니다. 그걸 붙들어 안정시키느라 깨우는 데에 필요한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습니다. 계산에 따르면 오히려 제15 소분기점이 발생할 즈음에야 깨어날 수 있을 예정이었는데…, 어떻게 벌써 깨어났는지도 의문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이건 예측 단계에서 실수한 당신의 탓이지 제 탓이 아닙니다!〕
"뭐? …그럴 리가. 예측이 틀릴 리가 없는데…? 너도 알잖아, 예측은…, 미래시에 가까운 기술이란 말이야. 저 미친 별들이 검증까지 해줬는데?"
반하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제15 소분기점은 제8 거대 분기점과 제10 거대 분기점 사이 어느 시점에 발생하는 분기점이었다. 제6 거대 분기점의 태동과 제15 분기점의 발생 사이에는 인간의 시간으로 길면 대략 7년이라는 시기의 차이가 있었다. 만약 정말 케테리스의 말대로 그때 쯤에야 깨어날 예정이었다면 미래를 유리하게 이끌어나갈 준비를 하나도 못하고 새로운 선택을 할 기회도 죄다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전 가능세계에서 예측한 것이 전례없이 틀어졌다는 의미였다.
반하온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회귀를 시작한 이래로 이렇게까지 오차가 컸던 적은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가지 않은 길'들은 결국 회귀 후 초반, 제1 거대 분기점에서 제6 거대 분기점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더 늦어졌으면 제일 후회스러운 일들 중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 가능세계를 살아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자세히 생각하려 하지 않는 주제라서 그 감상이 깊이 남지는 않았으나 잠깐 스쳐가는 생각만으로도 오싹했다.
"…됐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능세계를 넘길 수는 없지. 여기의 내가 가진 기억부터 '복사'하자. '덮어쓰기' 할 준비를 해줘."
〔예측이 틀어진 만큼 복사나 덮어쓰기를 하는 과정에서도 타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다른 가능세계로 넘어가지 않고 시도하실 겁니까?〕
"이전에 한 '예측'이 틀어졌잖아. 이번에 하는 '예측'은 틀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 별들이 검증한 예측인데도 오차가 이렇게 크다면 아직 별과 접촉하거나 만날 수 없는 이번 가능세계의 내가 지금 예측을 해봤자 위험 부담만 더 커질 거야. 이번 세계를 살던, 다음 세계로 넘어가던 위험은 비슷해. 어차피 리스크가 비슷하다면 가능성 하나를 버릴 필요는 없지 않겠어? 해야만 해. 이 마법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마법이 곧 인간 인지 속의 마법과 동일하지 않은 이상 필연적인 일이지. 내가 가지 않은 길 사이에서 내가 바라는 단 하나의 미래를 찾으려면 어쩔 수 없이 끝없는 가능세계에 몸을 던져가며 직접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걸, 네가 나보다 더 잘 알 텐데. 케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 내가 너를 이루는 스펠을 만든 건 나의 가능세계를 되감기 위해서지 가능세계 사이를 넘나들기 위해서는 아니었어.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따위의 이름을 스펠에 붙인 건 말 그대로 다른 조건은 바뀌지 않을 때 나만 현재의 나로 덮어쓰기하면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그건 가능세계 전부의 관점에서 따지면 불가능한 일이야. 그렇잖아? 모든 가능세계의 '나'가 나와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예 세계 자체가 판이하게 다를 수도 있는 걸. 그 많은 가능세계 중에 원하는 목적지를 정하는 건 불가능하고."
강력한 의지의 발현으로 반하온이 장악한 공간이 팽창했다. 케테리스는 그 의지를 느꼈다. 별의 의지를 받아 독립적인 자아를 구축하기는 했으나 그 본질인 스펠, '케테리스 파리부스'는 결국 반하온의 의지로 구동하는 종속된 존재였다. 케테리스는 주인의 의지를 받들어 관념으로 화했다.
"그건 분명 보통의 인간은 다다를 수 없는 진실이지만, 어쨌든 나는 그걸 간과했기 때문에 바라던 결과물과 다른 결론에 다다르게 되었고, 아직도 계간에서 이렇고 있네. 그래도 아직 가지 않은 길은 많아. 저 하늘에서 떨어져 죽을 별이라던가, 하는 놈들만 아니었어도 진작에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다만."
반하온은 천천히 심호흡했다. 예측이 틀어진 세계에 회귀를 시도하는 건 처음이므로.
"케테리스, 창 띄워."
[ 내장된 스펠을 구동합니다. ]
[ 사용자의 연산을 보조합니다. ]
[ 연산 중…. ]
[ 스펠의 구동에 의지가 필요합니다. ]
여러 개의 창이 연달아 나타났다. 반하온이 연산을 마치고 눈을 띄자, 모든 창이 회색으로 변했다. 이미 처리된 알람이라는 뜻. 이윽고 나타난 하나의 영롱하게 빛나는 창.
[ 당신의 강한 의지를. ]
반하온은 씨익,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자신은 의지 빼면 시체인 것을.
[ 스펠, 〈케테리스 파리부스〉가 당신의 의지에 화답합니다. ]
[ 가능세계의 당신이 스펠과 공명합니다. ]
[ 기억을 불러옵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
"당연히."
[ 그렇다면, '덮어쓰기' 하시겠습니까? ]
"물론."
[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너는 그거 매번 묻더라. 후회하니까 여기에 있는 거야. 포기 못하지."
[ 스펠이 현실을 개변합니다. ]
[ 미래를 그리는 당신의 안녕을 빕니다. ]
[ 다시 뵙겠습니다. ]
"좋아, 가보자고."
어떤 기억은 필요하고 어떤 것은 필요하지 않다. 불필요한 기억에 락이 걸리는 것을 느끼며, 반하온은 눈을 감았다. 가지 않은 길은 개척한다. 소박한 바람이 모두 충족된 미래를 그는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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