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마법사
사천소의
사막에는 무수한 무한이 있다.
잔바람에 날리며 따갑게 구르는 모래 알갱이 하나하나에도 저마다의 세월과 무한한 존재가 스며있다.
이 모든 영원과 태양이 불타오르는 사막 어딘가에, 옛 마법사가 쌓아 올렸다고 전해지는 탑이 숨어 있다.
사람들은 지쳐 헤맬 즈음 눈앞에 나타나는 그 탑을 두고 '영원의 나침반'이라 부른다.
사막의 마법사
목이 마르다.
여행자는 스카프를 고쳐 묶고는 주저앉아 타오르는 열기에 자신을 맡겼다. 마침 바람이 불어오자, 허리에 장식한 천들과 함께 붉은 천 위로 금색 문양이 새겨진 스카프가 나부꼈다. 그는 흩날리는 푸른 머리칼을 높게 묶곤 눈에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역시 인간이 살 곳은 못 되는군, 그가 생각했다. 모자가 미처 막아주지 못한 찌르는 듯한 빛이 따가웠다. 그래서 누구도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일까?
세간에서 멋대로 이름 붙인 황량한 여기는 ‘영원사막’이라 불렸다. 같은 풍경, 같은 덤불, 같은 더위. 밤에는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이 사막은 마치 잘 짜인 계획도시처럼 모든 것이 비슷해 보였으나, 길을 찾는 게 불가능할 만큼 변덕스러웠다. 듬성듬성 자란 푸른 풀들은 가까이 오지 말라는 듯 삐죽빼죽 자라있는 데다가 분명 평평해 보였던 모래더미를 밟으면 허리까지 푹 꺼지는 구덩이가 반기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그러니 악명 높은 영원사막을 제 발로 찾아온 이 불청객이 얼마나 무모했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 가방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아주 천천히 머금은 그가 가벼운 '읏차'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고 기운차게 스트레칭을 했다. 누가 보면 지도라고 착각할 만한 낡은 양피지를 손에 들고 조심스레 먼지를 털어내기까지 했다. 반투명한 보석처럼 빛나는 회색 눈이 이미 알고 있는 그림과 글을 다시금 훑는다. 영원의 나침반. 바로 그의 목표이자 희망이었다. 어째서인지 그곳이라면, 더 이상 무엇을 찾아 떠돌아야 할 지 모르는 자신에게 길을 알려줄 것 같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이 혈기 왕성한 여행객, 세계 각지를 누비며 수없이 많은 인간의 땅을 밟은 끝에 자연에 도전장을 내민 청년을 이제부터 '사천'으로 부르자. 부모가 내린 이름이며, 이후 사막의 모래에 새겨질 이름이기에.
*
사천은 본래 가만히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성정이었다. 어릴 적부터 큰 상회를 관리하는 부모 아래에서 끊임없이 뛰고, 물건도 좀 부수고, 친구도 좀 골리고, 밥도 곧잘 먹으며 컸다. 식자재를 구분하는 안목은 물론 값진 물건을 알아채는 눈썰미도 뛰어나 차기 동주(東主)가 될 것이 자명한 아이였다. 바깥에 많이 나다닌다는 점만 빼면 정말로 그랬다.
그렇다 한들 성인이 되자마자 짐짝 하나 챙겨 연고 없는 나라에 '여행'을 떠나겠노라 통보한 뒤 소식이 끊기고, 두어 달쯤 지나 태연히 대문으로 들어와 보석 공예품 따위를 의기양양 선물할 줄 누가 알았을까? 모(母) 계숙은 황당함에 손을 다 떨었다.
"어머니. 저는 상회가 체질이 아닌 듯하니 앞으로도 지금처럼 여행을 다니겠습니다. 제 몫의 자금은 그때그때 벌고 있으며..."
"춘삼, 저 애가 지금 무어라 하는 거지?"
"여행 다니겠대요. 진정하세요, 동주, 아니 여보..."
"그것을 몰라 하는 말이 아니라!"
사천은 웃으며 부모를 안심시켰다.
"제게 영특함과 건강한 몸 그리고 기개를 주셨으니 가능한 넓은 세상을 보고 큰 사람이 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해가 저물 즈음 여행길에 오르는 사천상회 외동아들은 참도 즐거워 보였다. 그는 걷거나 뛰거나 무언가 탈것에 올라타 한참 바깥을 바라보며 다음 여행지에서의 삶을 구상했고, 대부분 실현했다. 드넓은 지구에 차고 넘치게 많은 선인과 악인과 광인이 존재했고 그들 모두는 여행의 일부였다. 그러면서도 가끔 집으로 돌아가 부모의 일을 도왔는데, 상회로 찾아오는 이들을 대할 때면 그는 비단옷을 걸친 차기 동주였으나 몇 발자국 나서기 무섭게 다시 방랑벽 나그네가 되는 것이었다.
방랑벽. 사천을 설명하는 데 그보다 더 적합한 단어는 없었다. 무엇을 위한 방랑인지는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다. 매 계절마다 새롭게 무르익는 듯 싱그러웠고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던 사천도, 마음 한편으로는 정착에 대한 강한 욕구를 품고 있었다. 늘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본가도, 사람들 사이에 엮이며 마련한 몇 개의 거처도 종착지가 될 수 없음을 알았다. 신중한 성격의 그였지만 한 곳에 발을 붙이고 머무르는 일만큼은 도무지 견딜 수 없었다. 어쩌면, 정착했을 때 자신의 공허를 발견할까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끔 어떠한 별 아래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을 때 사천은 그런 자신을 비웃곤 했다. 떠도는 여름을 몇 번 지낸 뒤로는 모든 것에 싫증을 느껴 마냥 쏘다니기만 했다. 그의 눈가에는 잠을 자도 가시지 않는 피로의 그림자가 물들게 되었다.
그런 사천을 매료한 것이 바로 영원사막이었다.
더 정확히는, 어느 마을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 구전으로 내려오는 탑과 마법사와 누구도 감히 탐사하지 않는 무한한 모래 들판. 지혜로운 노파의 얼굴 위로 드리우는 주홍 노을에 푹 빠져 사막을 그리며,
어쩌면 발 디딜 곳 없는 나그네는 그곳에 환상을 덧씌우지 않았는가.
수없이 많은 책과 사람을 통해 사천은 영원사막을 배웠고 당연한 수순으로 그 땅을 밟고자 결심했다.
*
그리하여 다시 현재로.
귓가에서 달랑거리는 둥근 귀걸이가 꼭 시계침처럼 느껴졌다. 사천은 아주 잠시간의 휴식 이후에도 끝 모르고 걸었다. 도무지 여기가 지구 상의 공간이 맞기나 한 것일까? 얼핏 회전초라도 볼 때면 그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반가움으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에게는 질렸다고 생각한 그였음에도 막상 인간이 주위에 없는 채 며칠인지도 모를 시간을 내리 걷자니 조금은, 강도라도 만나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다 드는 것이었다.
사천은 해가 뜨면 모래를 밟고, 달이 뜨면 모래 위에 누워 담요와 천을 두른 채로 선잠이 들고, 목이 타들어 갈 지경에 이르면 물을 머금었다. 그것을 반복한다. 오늘, 내일... 얼마나?
마침내 두어 모금만 마시면 사라질 만큼의 물만 남았을 즈음 사천은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기계장치에 가까웠다.
"나침반."
엄숙하고 조금은 절박한 되뇌임. 너무 오랜만에 내는 탓에 바스러지는 소리로 중얼거리고서 곧바로 들이닥치는 인후통에 쓰라린 목을 부여잡고 인상을 썼다. 불어오기 시작한 모래바람 너머에 달달 외운 묘사 속 탑은 보이지 않았다. 그 탑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 여부마저 이제는 불분명했다. 이름을 부르면 비로소 나타나는 존재라도 되는지. 동시에 강한 체력으로도 버티지 못한 고통을 떨쳐내고자 하는 일종의 의식으로 그가 희미한 기대와 함께, 자신을 채찍질하듯 몇 마디를 낮게 중얼거렸다. 마법사, 사막... 종착지.
종착지라, 넓고 넓은 세상에서 도달한 미지의 탑이 그게 될 수 있을까. 적어도 사천은 미지를 알고, 가지고 싶었다. 실은 무엇보다 그 미지 속에서 자신이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헤매는 이유를 찾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영영 머무르지 못할지언정, 바로 그 답을 찾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떠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렇다한들 여기에서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일까.
사막에서 신체를 보존하기 위해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기능성을 챙긴 옷이 이제 와 애틋하기도 했다. 스미는 밤하늘의 냉기를 이 옷이 막아주었기에 그나마 얼어 죽지는 않은 것 아닐까 했다. 그새 더 낡은 양피지를 바스락거리며 사천이 막연한 희망을 펼쳐보았다. 탑에 오르면 이 기이한 곳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통로를 찾아내거나, 음, 사막의 저주를 끝내든지. 아니면 나의 저주— 그런 게 존재한다면, 그걸 풀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침반, 마법사, 사막, 종착지. 그렇게 내일의 해는 떠올랐다.
바로 이날, 말로 다 못 할 심정으로 마지막 물을 머금은 날에 사천은 운명의 길에 놓였다.
빈 병을 멍하니 쥔 채로 이제는 오도 가도 못할 처지임을 실감하여 차라리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는 울거나 청승을 떨 새도 없이 옆머리에 스치는 바람결을 느꼈다. 뜨겁고 따가운 공기의 흐름. 폭풍이다.
걸을 수 있을 때 최대한, 그러나 미리 탈진하지 않게 여행자는 발걸음을 떼었다.
목이 마르다.
마실 수 없다.
광활한 자연의 무거운 열기가 폐부를 부드럽게 짓누르고 다 말라가는 침만 삼키며 여행자는 비틀거리지 않으려 한다. 시야가 입체감을 가지고 울렁인다. 둘러싼 세계가 거대한 몸을 부딪혀 오는 듯한 감각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여행자는 그저 앞이라고 생각되는 곳을 향했다.
허리춤에는 이 마을의 문양 천, 저 도시의 기념 손수건, 어느 국가의 국기, 모든 색색의 천이 펄럭인다. 주인보다 힘찬 기세다. 묶은 머리가 휘날리고 푸른 그림자는 하늘과 맞닿아 버릴 것만 같다.
'살고 싶다.'
아무렴 죽으면 어떠냐고 생각한 언젠가의 무모함이 아득하다. 사천은 휘청이는 몸의 중심을 잡지 못해 끝내 고꾸라지고, 멀게 바라본 황색 하늘에.
아 그 하늘에.
—높게 솟은 건물의 형상을 발견한다.
몸이 바짝 마른 사람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사천은 몰랐다.
*
'영원의 나침반'이요?
그렇다니까, 암, 그 이름이 틀림없고 말고.
그것은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몰러.
예?
보고 싶다고 보는 게 아니지. '하이고, 이제 이 한 몸이 죽나보다' 하면 나타나니까 그렇지.
...어르신께서 환각을 보신 것 같은데요?
이것 보게? 기껏 얘기해줬더니만 아주 버르장머리가 없어!
*
가까이 가려고 할 수록 멀어지는 탑, 사천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폭풍이 몰아치고 또 세상이 흔들리는데 탑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닿을 수는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목이 계속 마르다. 본능적으로 쉬어야 함을 느꼈으나, 어디에서? 탑 뿐이다.
오아시스에서 물을 더 많이 퍼왔어야 했나, 애초에 더 큰 물병들을 고를걸, 이런 후회는 소용 없었다. 탑에 가야 한다. 가서, 누군가 있다면, 염치 없지만 도움을...
...
......
.........바람이,
멎었다.
잔뜩 더러워진 얼굴을 쓸어낼 생각도 않고 사천은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시선 끝에 나부끼는 천은 사천의 것이 아니다. 길고 우아하게 쓸리는 다홍색 로브 끝자락, 이윽고 멈춘 사막을 인지함과 동시에 몸은 한계를 맞이했다. 정지한 모래 언덕 위에 누워 여행자가 몽롱하게 바라보는 것은 금발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눈부신 밀색 머리칼, 아른아른 듣는 것은 차분한 음성.
"살아있네."
마법사를 마주하고, 무모한 여행자는 단숨에 그를 믿게 되었다.
*
탑의 벽에는 돌과 모래가 뒤섞여 있다. 천장에 이질적으로 푸른 덩굴이 늘어지고, 창문을 통해 빛이 쏟아지는 부분의 바닥은 네모나게 바래있다. 사천은 상당히 깔끔하게 세공된 침대 위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마법사의 탑이다.'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나뭇잎 그림자를 밟고 탁자로 향하자 유리 공예품이 근근이 달그랑, 내는 맑은 소리가 기분 좋게 귓가에 맺혔다. 그 옆으로 늘어진 몇 권짜리 책들은 얼핏 가죽으로 보이는 표지와 금색 끈으로 단단히 마감되어 있었다. 이 표지... 낯선 재질인데. 무심코 향하던 손을 멈추고 뚫어져라 들여다보니 소용돌이 치듯 얽힌 결이 투명한 막 아래 번뜩였다.
'이런 건 처음 보는데!'
상회에서 보낸 일평생 이런 가죽은 들어본 기억 조차 없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사천이 고개를 더 바싹 붙였다. 투명한 줄만 알았던 막이 연한 오렌지빛으로 일렁였다. 꼭, 마법같이... 그렇게 생각하자 작은 금빛 입자가 눈앞으로 총총 떠오르는 것이었다. 북극성. 지나친 의미 부여일지 몰라도 그는 그게 꼭 나침반의 환영 인사처럼 느껴졌다. 모래 사이의 보석처럼 빛나는 별과 시선을 맞추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천은 청아하게 울리는 뎅 소리에 퍼뜩 깨어나 굽혔던 상체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리 공예품이다. 구 안의 유리공이 세 번 부딪혀 울리고, 작은 금구슬 수십 개를 담긴 모래시계가 회전하며 다르르르 땡그랑 만드는 환상적인 소리. 머리 위의 풍경이 작게 달랑거리며 잔바람이 불어온다. 작은 가지에 매달린 유리 열매는 까닥까닥 저들끼리 맞닿았다 떨어지며 일정한 박자를 연주한다. 방 안의 모든 공예품이 맑은 소리로 파도 같은 화음을 이루었다. 그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려, 사천은 조금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멍하니 섰다. 유리 물결이 데려다준 시선 끝으로 인영이 보인다. 그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걸음걸음마다 천 자락이 맨살을 휘감고 또 떨어지며 춤을 춘다. 기절 직전 마주한 얼굴임을 확신한 순간 사천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 님!"
긍정도 부정도 않은 사막의 마법사가 공예품의 노래 위로 손짓하자 모든 소리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발소리만 들으면 신이 나는 녀석들이라." 잠잠한 음성이 덧붙일 즈음 천장의 덩굴만이 작게 몸을 흔들다 멈추었다. 그제서야 마법사는 난데없이 자신을 반갑게 부른 생면부지의 인간을 어쩐지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날 알아?"
사천은 즉시 답했다.
"익히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녀간 인간이 지금쯤 육십은 넘었을 텐데?"
"그렇습니다. 찾아뵈었는데요."
마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천의 용모를 살폈다. 그리고 미심쩍다는 눈으로 되물었다.
"그럼 익히 들은 게 아니고 네가 찾아다닌 거잖아."
"이럴 수가, 어떻게 그걸...!"
"넌 누가 봐도 사막에 올 일이 없는 사람이야. 죽으러 왔으면 모를까."
"그래 보입니까?"
"우선 사고파는 물건이 아무것도 없어."
"상회에서 나왔는데요."
"도망이라도 쳤어?"
"헙."
이쯤에서 사천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마치 점집에 간 백치와도 같은 말투였다.
"절 아십니까...?"
"...푸흡."
분명 웃음 새는 소리가 났는데. 사천이 약간 붉어진 얼굴을 드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감한 눈과 다문 입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천 정도의 눈썰미로, 조금 전에 비해 확실히 부드러운 표정이 되었음은 알 수 있었다. 사천은 그것을 굳이 캐묻지 않고 정중하게 몸가짐을 바로 하며 털어놓았다.
"실은, 영원사막의 탑이 실재하는지 알고자 했습니다."
"나침반 말이지."
"예. 그런데 확실한 경로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어서... 직접 횡단하는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영원사막에서 실종되는 사람이 많은 건 요즘도 상식 아니야? 부모는."
"부모님께는 말씀 안 드렸는데요."
"넌..."
마법사가 잠깐 아득한 예전 사용하던 말을 빌려오듯 눈을 감고, 적당한 어휘를 찾아내어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오늘만 사는구나."
내일 정도는 생각합니다! 덧붙이면서도 아주 부정은 못 하겠는지 사천이 웃었다. 마법사의 뒤로 걸린 유리판에 그 모습이 언뜻 비쳤다. 불현듯, 말끔한 제 모습에 이상함을 품은 사천이 과장되게 움츠러들며 말했다.
"저... 씻기셨습니까?"
마법사는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뭐?"하더니 한 발자국 물러서며 말했다.
"청소마법 썼어."
"이제 보니 옷도... 꺄아."
"폭풍 다루는 것보다 안 보고 옷 갈아입히는 게 몇 배는 쉽거든?"
"이래 봬도 순정을 지킨 몸인데요."
"...알고 싶지 않아."
"저, 이렇게 타지에서 욕보이고..."
더 이상은 참아주지 못하겠는지 마법사는 얼굴을 구기며 바람결로 사천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질린 듯한 목소리로 딱 잘라 선언했다.
"나가."
두 팔로 가련하게 몸을 감싸며 머리카락을 흩날리다 말고 사천은 허둥대며 납작 엎드려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는 이미... 비위가 상해 보였다. 공예품이 딸랑딸랑 울렸다. 꼭 '워, 워' 하고 주인을 말리는 소리 같아서 사천은 그 와중에도 조금 웃음을 삼켰다. 머리 위로 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그가 물었다. 너 돌아갈 방법은 있어? 사천은 진솔하게 답변했다.
"대책은 커녕 물 한 모금도 없습니다."
"...하아. 이걸 어쩌지."
"저, 마법사 님."
조심스레 고개를 든 사천은 짐짓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두 손을 꼭 쥔 그가 외쳤다.
"제게 보필을 허해주십쇼!"
보필? 마법사가 잠깐 끔벅이더니 되물었다. '뭐라고?' 거절이나 다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천은 기세로 밀리지 않았다. 그는 더욱 당당하게 말했다.
"소일거리나 귀찮은 것들, 정리는 물론이고 마법도... 가능한 돕겠습니다. 그러니까 절 조수로 고용하시는 거죠. 한 푼 들이지 않고 말입니다."
"..."
사막의 마법사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사실이 있다.
한 몸으로 드넓은 사막 전체를 다스리고, 먹고 마시지 않더라도 살아가며 책과 모래, 유리, 덩굴, 별하늘을 벗 삼아 기나긴 일생을 홀로 보내는 마법사에게 조수란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정령이나 마도구도 아닌 인간이라면, 잘 쳐줘야 관상용 정도일까.
그러나 모래 위에 주저앉아 기적을 바라던 아주 먼 옛날, 하루에 수십장의 글을 쓰고 탑의 창밖으로 태우던 멀고 먼 옛날, 아득한 한때에 자신 또한 나약한 인간 하나였기 때문일까?
사막을 다스린 이들 중 유독 다정한 이 마법사는 모래 폭풍에 사람을 떠미는 법을 몰랐다.
당장이라도 물을 담아 보낼 수 있는 찬장 속 수백개 병을 생각하면서도 마법사는 탑 안 바람을 멈추고 허공에 손짓하여 작은 팔찌를 불러냈다. 이번에도 사천이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팔찌에 꿰인 조금은 투박하게 깎인 보석 속에는 모래 언덕의 형상이 담겨있었다. “이건..." 사천이 입을 달싹이는 새에 마법사가 말했다.
"그 팔찌를 차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어. 두 층 내려가서 돌로 된 입구를 밀면 온실이 나오니까 거길 매일 관리하도록 해."
사천이 화색을 띠며 황송함을 가득 담아 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또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없습니까."
마법사는 잠깐 음, 고민하다가 옅게 미소 지으며 손을 저었다.
"생각해볼게."
사천은 싹싹하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어찌나 빠릿했는지 장식 천이 팔락일 정도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쇼! 형님!"
"내가 왜 네 형님이야?"
"그럼, 주인—"
"...소의."
“…!”
차마 ‘주인님’이라고는 불리기 싫었던 걸까? 마법사가 잠깐 뜸을 들여 꺼낸 단어가 이름 혹은 그에 준하는 호칭일 것이라고 사천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쩐지 감격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가 조금 전보다 더욱 힘있게 외쳤다.
“예, 소의 형님!"
소의는 대꾸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배웅하는 유리 열매가 흔들거리며 딸랑 소리를 내었다. 그 뒤로 남겨진 사천은 팔찌를 한참 간 매만지다, 시간이 어찌 흐른 건지 벌써 쏟아드는 노을에 물든 창밖을 해가 다 떨어지도록 지켜보았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 탑을 잠시간 집으로 삼겠노라 결정했다. 별이 반짝반짝, 참 고요하고도 처음으로 추위에 몸을 웅크리지 않은 사막의 밤이었다.
*
끼이익.
마법사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공예품의 인사를 받으며 계단을 두 층 내려간 사천은 꼭대기 방보다 훨씬 넓다랗게 햇살이 드는 공간에 다다랐다. 창문과 마주 보지 않는 벽면에는 즐비한 책장 위로 금실이 수 놓인 장막이 조용하게 흔들렸고 책장의 맞은편에는 돌로 된 문이 있었다. 문 앞에 놓인 작은 의자에 조그마한 선인장 화분이 얹혀 있었는데, 조화일까 하는 호기심에 손을 대었다 따끔, 약하게 찔린 사천이 아얏 소리를 내었다. 형님이 이 꼴을 보셨다면 믿음직스럽지 않게 여기셨겠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음에 멋쩍게 안도하는 그였다.
온실 문에 손을 얹자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듯한 낭랑한 ’찰칵‘ 소리 이후로 돌문이 무겁게 밀렸다. 환하게 드는 빛,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하늘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고, 마치 아주 풍요로운 오아시스 주변에 온 것만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금빛 모래가 빛나고 보기 드문 녹색 잔디가 부드럽게 바닥 위를 덮은 위로 드높은 나무들이 제 키를 뽐내며 촘촘하게 모여있었다. 얼핏 둥글게 뭉친 듯 보여도 나름의 삐죽함이 몸을 말고 엎드린 고슴도치처럼 보이는 덤불들이 종종 심겨 있고, 구석진 곳에는 선인장들이 넓게 퍼져 있었다. 개중에는 꽃을 매단 것들도 있었다. 다만…
“관리라고 할 것이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데.”
사천이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식생의 상태는 문외한이 보기에도 완벽에 가까운 게 분명하다. 오아시스의 물은 푸르고 맑아 당장이라도 떠마셔보고픈 충동을 일으킬 정도인데다, 나무에 매달린 이파리 한 장 한 장이 사천보다도 싱그러웠다. 여길 관리하라고? 뭘?
[-정수를 잘 닦아야 해.]
“에?”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사천이 얼빠진 소리를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환청을 다 듣나 싶어 기분이 묘해지던 차에, 저 끝 어디선가 유리종이 달랑달랑 날아왔다. 바로 저 종에서 들린 소리였다.
“무슨…”
유리 종은 사천의 눈높이에서 까닥이더니 울리며 소의의 말을 들려주었다. 종이 좌우로 살랑일 때마다 사막 깊은 곳에서부터 미세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했다. 종은 마치 탑의 일부이자 사막의 리듬을 따르는 존재인 듯, 탑과 사막 사이의 숨결이 산들거렸다. 그 파동을 타고 퍼지는 묘하고 독특한 울림이 그를 조금 놀래켰다.
[음, 이런 건 처음 보겠지. 적절한 때에 재생되는 녹음기 같은 건데… 이게 들린다면 잘 왔겠네.]
사천은 정말이지 믿기지 않았다. 그가 종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살폈다. 평범하게 유리 소리인데, 알 수 없는 문양이 수놓아진 종은 대답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양 느긋하게 추를 흔들었다. 바깥 사막도 저렇게 살랑거리고 있는 것일까? 종을 툭툭 치고, 종에서 틱틱 소리가 돌아오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서 사천이 물었다. 반신반의 하면서도 답을 기대하는 투로,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유리 종은 부드럽게 울렸다. 흔히 예상하는 ‘뎅’ 소리 대신 누군가의 음성이 들린다는 건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목소리가 주는 안도감이 밀려오며 문득 사천은 느꼈다. 낯선 곳에서 믿을 만한 사람과 이어져 있다는 건 위안이 되었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정수는 가장 안 쪽에 있어. 천으로 닦아서 탁해지지 않게 해야 해.]
[네가 가진 푸른 천 정도면 적당하겠네. 충분히 윤기가 나면 물 정도는 떠마셔도 좋아. 많이는 말고.]
황급히 꺼낸 종이에 ‘안쪽에 정수’, ’푸른 천‘, ’물 적당히‘ 따위의 메모를 적으며 사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하는 목소리가 무척이나 매끄럽고 안정적이었다. 많이는 마시지 말라며 덧붙이는 대목에서는 조금 치켜뜬 눈으로 자신을 보던 얼굴이 생각나기도 했다. 사천은 이 별것 아닌 임무가 꽤 달가웠다.
오아시스 온실을 조금 거닐자, 과연 눈에 띄게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구석에 사천의 머리 크기 정도 되는 구(球)형 보석이 박혀 있었다. 천을 꺼내서 닦자 표면에 호수 위 파동과 같은 둥근 원이 퍼졌으나 액체의 촉감과는 전혀 달랐다. 고체 위로 영상을 재생하는 느낌에 가까울까. 사천은 상회에서 만물을 다 보았다고 생각한 자신이 조금 부끄러웠다. 인간사를 벗어난 이곳에서는 모든 기이함이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존재했다.
새로움에 둘러싸여 사천은 매일 그렇게 지냈다.
온실을 충분히 둘러보고, 정수를 닦고, 물을 마셨다. 가끔 소의와 마주치면 무척 반가워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며 말을 붙이고 별것 아니라지만 칭찬을 구했는데, 정수가 덜 닦였다든지 발자국이 너무 찍혀 보기 우스워졌다든지 하는 핀잔을 듣더라도 그는 마냥 좋아라 했다. 인간(마법사는 지금도 인간일까?)이 둘 뿐인 탑에서 매일을 보내기 때문일까? 며칠 지나지 않아 시간을 멍하니 대강 흘려보내는 것에 익숙해진 사천은 점점 탑 안을 둘러보다 마법사와 마주치는 것을 제일가는 낙으로 삼게 되었다.
소의에게 있어서도 사천은 성가신 그러나 싫지 않은 존재였다.
소의는 가끔 오아시스에 비를 내리고 종에 비친 사천의 모습을 빤하니 지켜보았다. 비도 온다며 종에게 물어봐도, 미리 녹음해놓은 말은 ’가끔 비가 내린다‘ 정도인지라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을 보았다. 사천은 매무새가 망가진다며 붕 뜬 곱슬머리를 한 쪽으로 넘기고 가장 넓은 나뭇잎 밑에서 허리띠에 매달린 넓은 천 한 장을 빼 두건처럼 쓰기도 했다. 아직 정수를 덜 닦았다며 쪼그리고 앉아 슥슥 손질하는 행색에는 조금 웃음이 나올 것도 같았다.
말했지만 영원사막의 마법사에게 인간 조수란 차라리 관상용에 가깝다. 사천의 사생활을 존중하고자 온실 이외의 공간에서는 구태여 행방을 묻거나 거동을 확인하지 않는 소의였으나 완전한 인간이라기엔 조금 무뎌진 감각과 일상의 무료함이 흘긋, 별난 조수를 들여다보게끔 이끌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막여우를 굴 방향으로 밀어주면서도, 밤사이 모래가 아주 날려 모양이 바꿔버린 동산을 그냥 두어도 될 지 확인하면서도, 뜬 별이 여행객을 현혹하지나 않을지 심야의 사막을 둘러본다든지 비가 너무 오래 오지 않은 곳에 손을 쓴다든지 하면서도 이삼일 정도 깜박했다가 돌아가면 이제 오셨냐며 여상히 맞이하는 인간의 존재를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는 일은 없었다.
한 달이 지나고 또 몇 주가 새로이 흘렀다. 시침과 분침이 각자의 경로로 째깍거리다 마주치고 다시 떨어지는 것처럼 탑 안에서 두 사람이 살아 움직였다. 사천은 어느 날인가 또 다른 층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발을 헛디뎠다가 튕겨질 것을 예상하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온실이 열릴 때와 같은 찰칵 소리에 이어 따스하고 눅눅한 공기가 몸을 감쌌다. 소의가 말 없이 열어둔 모양이었다. 꽤 오래 사용하지 않은 부엌이다. 찬장의 접시도 먼지투성이에, 한 눈에 보기에도 너저분했다. 다만 수도꼭지를 돌리면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고 구석진 상자 탑을 열자 싱싱하게 보관된 야채, 사막에서는 구할 수 없는 식자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고기를 이렇게 보관해도 되나?'
셋째 칸에는 다소 이질적인 선홍빛 생육이 종류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놀라울 만큼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이제 비현실에 익숙해진 사천은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상자를 다시 닫고 둘러보니 새삼 실감이 났다. 마법사들은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사천처럼 헤매다 도달한 이들 중 아사에 가깝게 굶주린 경우에게만 선심 써 내어주는 거겠지.
그렇다고 해도 먹는 즐거움이란 분명히 존재하는 개념이기에, 스스로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부해온 사천은 늘 똑같은 일상이 무료해질 즈음 찾아온 변화에 열정을 쏟았다. 소매를 걷어 올리고 먼지를 닦아내기 시작하며 그가 슬그머니 웃었다.
형님과 둘러앉아 식사 해야지.
그 김에 마법사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사천은 드문드문 나타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짧게 나누고 다시 문밖을 나서는 그에 대해 나날이 호기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가 말을 꺼낼 때마다 새로운 모습이 엿보였다. 가끔은 냉철한 면이, 어떤 때에는 유한 성정이. 하나같이 자세히 보려고 하면 잔상처럼 흩어지는 파편적인 정보였다. 그런 잔상들을 사천은 무심코 붙잡고자 했었다. 어떤 사람일까? 여기에서 뭘 하는 걸까? 왜 이곳에 왔을까? 그러니까 사천은 소의가 궁금했던 것이다. 사막의 마법사가 아닌, 한 존재로서의 그 사람에게 감히 돋보기를 들이대고 싶었다.
도마가 제멋대로 바둥대며 씻겨지기를 거부하는 탓에 상념이 더 이어질 수는 없었다. 손으로 탕탕 두드리며 기선을 제압한 그가 다시 청소를 이어갔다. 깨끗해진 부엌에서 제법 그럴싸한 요리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을 그리면 멋대로 날아다니는 양상추도, 갑자기 춤을 추는 포크도 아무렴 즐겁게 봐줄 수 있었다. 후후후, 음모를 꾸미는 아이처럼 웃는 사천의 얼굴에 천진함이 엿보였다.
부엌이 번쩍거릴 만큼 광을 낸 사천이 의자에 털썩 앉아 창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조금만 쉴까 하던 차에 머리 위로 꼭대기 층 공예품들의 노랫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사천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형님!"
한달음에 계단으로 나서 기다리자니 로브 먼지를 손짓 한 번으로 휙 털어내던 소의가 눈썹을 까닥이고 어색하게 인사했다.
"부엌 치웠나 보네."
"예, 열어주신 덕분입니다."
"덕분 이랄 것 까지는 없고."
"헤헤."
사천이 능청스럽게 웃어넘기고는 소의가 벗은 망토를 자연스럽게 받아 털며 말했다. 제법 조수다운 태도였다.
"괜찮으시다면 식사 한 끼 어떠십니까?"
소의는 휘리리 날아와 고개를 대는 유리 종을 매만지다 말고 잘못 들었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식사라니, 얼마만에 듣는 단어인가. 그가 되물었다.
"식사라고?"
"형님께서 제가 탑에 온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시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야 원래 먹지 않으니까."
"가장 마지막으로 드신 음식의 맛을 기억하십니까?"
"언제였더라."
"형님께서 전능하고 위대한 대마법사시긴 하지만, 가끔은 이 정도의 인간적인 유희를 즐기셔도 좋지 않을까요."
소의가 "위대한... 정도는 아니고." 정정하며 사천을 가만 쳐다보았다. 인간적인 유희라. 정말이지 인간적인 발상이었다.
유리 종이 온실을 비운 괘씸한 인간을 보고한답시고 딸랑딸랑 날아온 것을 달래며, 소의는 사천이 무언가 자기만의 세상에 열중해 있겠거니 했다.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천은 탑의 닫힌 곳을 열고 들어가거나 이상한 곳에 콕 박혀 자기 나이의 수십 배도 더 된 고서를 탐독하는 게 아니라, 고작 부엌을 성실히 닦고 식사를 할 꿈에 부풀어 있던 거였다. 조수를 자처할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특이한 인간이었다. 소의가 헛웃음을 삼키며 좋을 대로 하라고 하자 사천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반질반질하게 닦인 의자로 안내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사천은 신이 나 도구를 꺼내고 이리저리 휘둘렀다. 고기를 윽박질러 잠재운 뒤 칼집을 내고, 한편으로 냄비에 올린 물이 잘 끓고 있는지 확인하며 야채를 썰었다. 어디선가 아장아장 걸어온 탁상형 모래시계가 그 모습을 구경하며 폴짝거렸다.
마침내 잘 구운 고기 한 덩이와 야채 스튜가 식탁에 올랐다.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채운 부엌에는 달큰하고 깊은 향이 가득 맴돌았다.
잘 닦인 식기를 올리며 사천이 마주 앉았다. 소의는 요리 과정을 비롯해 결과물에 이르는 일련의 모든 것에 내심 조금 놀랐으나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천은 간만에 보는 음식을 뿌듯한 눈치로 쳐다보았다. 이 탑 안에 있으면 시간 감각도 허기도 무뎌져 꼭 마법사와 같은 종족이 되기라도 한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결국에 그는 사람이었다.
"먼저 드시지요."
"...그래."
음식 내음을 맡자 뒤늦게 밀려오는 허기에 사천은 군침을 삼키며 소의의 반응을 살폈다.
콜록, 너무 오랜만에 음식을 먹어서인지 소의는 기침부터 했다. 깜짝 놀란 사천이 물컵을 밀어주었다. 잠시간 어두운 인상으로 물 몇 모금을 홀짝이던 소의가 곧 두어번의 마른기침 끝에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맛있네."
"헉."
사천은 안도와 환희에 회색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냈다. 사막의 마법사께 인정받은 이 몸의 요리 실력... 속으로만 그렇게 으스대다 이내 자신도 잘 먹겠습니다, 하며 한 국자 뜬 야채 스튜를 머금었다. 단 맛과 고소한 향, 부드럽게 감기는 우유 맛이 맴돌았다. 유희니 뭐니 식사 자리를 마련한 그였지만 원래부터 미식에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음식이란 먹으면 먹는 거고, 말면 마는 거였다. 그럼에도 오래간만에 먹는 따뜻한 스튜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선사하는 즐거움이란 부정할 수 없었다.
각자 첫술을 뜨고 나서 사천은 활기차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무엇을 하셨냐는 둥, 자질구레하고 일상적인 질문이었다. 소의는 사천의 질문에 간단한 대답을 내놓았다. 얼핏 방어적으로 보이는 태도였다. 아니면 귀찮아 하거나. 그는 대화의 흐름을 타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음식을 집어 먹기만 했다.
사천은 소의가 자신이 만든 음식을 천천히 우물거리는 것을 가만 보다 가볍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에 처음 요리를 했던 일, 아버지도 어머니의 눈에 들기 전에는 인기 없는 객잔의 주인이었다든지, 자신의 요리 솜씨는 어머니의 덕이라든지 하는 것이었다. 소의는 여전히 간혹 끄덕이거나 짧게 답할 뿐이었다.
"...사막에도 눈이 올까요?"
문득 꺼낸 그 말에 소의가 잠시 멈칫했다. 사천은 덧붙였다.
"가끔 온실에 비가 내리던데요. 눈이 오는 것은 본 적이 없는데."
얼핏 바보같이 들리는 질문이 소의는 흥미로웠던 것일까. 줄곧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던 그가 처음으로 시선을 들고, 아주 짧은 미소를 지었다. 사천은 잠깐 지나간 그 미소를 더 오래 보고 싶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사막에 눈이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해?"
소의는 미묘하게 부드러워진 투로 물었다. 사천이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 말에 소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손짓에 사천의 눈앞에는 희미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흩날렸다. 사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정말 눈이 내리네.' 그는 손을 뻗어 눈송이를 만지려 했지만, 금세 사라져버렸다. 손 끝에 차갑다기보다 시원한 느낌이 남았다. 소의는 그런 사천을 기다리다 천천히 답했다.
"높은 고도에 있는 사막에서는 눈이 내릴 수 있어, 아주 드문 일이지만."
그는 나긋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너도 알겠지만 사막의 낮과 밤은 기온 차이가 매우 커. 고도가 높은 곳은 그 차이가 훨씬 커지고. 겨울이 되면 아주 차가운 공기가 만들어 질 수도 있는 거야."
"확실히 낮에 무더운 만큼 밤에는 서늘하더군요."
"응. 그렇게 공기가 매우 차가워진 상황에서 구름에 수분이 충분하다면..."
사천의 눈앞에 모래 위로 덮인 흰 눈이 스쳐 갔다. 역시나 순간의 환영이다. 그러나 조금도 놓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눈이 내릴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는 소의는 무척이나 열성적인 학자와 같이, 따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천은 멍하니, 형상과 사람 중 어느 것에 대한 반응인지 자신도 구별하지 못한 채 말했다. 그렇습니까...
"나만 너무 재미있는 얘기를 했나."
"아닙니다! 더 듣고 싶은데요... 사막 이야기를."
"하하."
소의가 소리내어 가볍게 웃었다. 그것을 사천은 처음 보았다. 웃는 모습이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두근두근, 사천은 지워지지 않았으면 하는 풍경을 열심히 머리 속에 집어넣고 또 돌려보았다. 소의가 숟가락을 식탁에 완전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잘 먹었어."
한 눈에 보기에도 그리 많은 양을 먹지는 않았으나 사천은 그저 자리를 지켜준 것만으로도 자신의 마법사에게 대단히 감사한 마음이었다. 그가 앞치마를 다시 두르고서 먹은 그릇을 개수대에 가져다 놓았다.
소의는 사천이 자리를 치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함께 도왔다. 아무 말 없이, 그러나 어느새 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사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음에도... 같이 식사 해주시겠습니까?"
소의는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말했다.
"사막 이야기는 나중에 더 해줄게."
그것만으로 사천에게는 충분했다.
마법사와 조수는 주에 한두 번 식사 자리를 함께 했다. 마법사가 해가 떠 있을 때 돌아오면 점심을, 밤이 깊어 돌아오면 저녁이나 간식을 준비했다. 식자재는 떨어질 만하면 다음 날에 단출한 가짓수나마 채워져 있었다. 가끔 사천은 소의가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는 익숙한 꼭대기 층 공예품의 아침 인사를 들으며 온실로 향하면 어떤 날은 비가 내렸고, 또 어떤 날은 맑다 못해 무더웠다. 정수를 닦는 일은 때때로 몇 시간이 꼬박 들기도 하여 가끔 무료함을 견디지 못할 때면 그 앞에서 이런저런 잡담을 늘어놓기도 했다.
사천은 곁을 맴도는 사막의 유리종이 유달리 달그락대는 모양새를 보고 형님이 폭풍 속에서 불편하시지나 않을는지 주제 넘은 걱정을 해본 적도 몇 있었다. 그 이상한 장신구가 이따금 보였다가 또 사라지는 모습에 사천은 어련히 그것이 형님의 안부를 살피는가보다 하고 마음을 놓았다. 가끔 종의 유리로 된 몸통에 대고 형님, 언제 오세요, 저 심심합니다, 속삭이면 이튿날 돌아온 소의가 어쩐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먼저 안부를 물어주기도 했다.
사천은 이렇게 단조롭고 평이한 일상에 만족했다. 가끔은 용기를 내어 식사 자리를 마련하고, 제멋대로인 식재료를 다루며 그럴싸한 음식을 내놓은 뒤 턱을 괴며 이런저런 궁금증을 내비치며 웃는다. 마법사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자제하는가 싶으면서도 사막에 대한 갖은 일화라면 나긋한 투로 말해버린다. 그 틈새로 섞여나오는 소의의 버릇, 감정이나 가치관을 사천은 차곡차곡 모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아간다는 느낌. 동시에 자신을 들키고 마는 느낌. 만일 이런 편안함이 다름 아닌 '집'에서 오는 종류의 감정이라면, 사천은 생각했다, 나는 이곳을 감히 집이라고 부를 것이다.
소의는,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따금씩 사막에서 발견한 희귀한 것들을 보여주면서 사천의 은근한 응석을 그런대로 받아넘겼다.
사천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밀빛의 눈동자 한 쌍으로부터 적대감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만족감을 느꼈다. 떠돌이 방랑객이 받기엔 과분한 대접이었다. 그러나 조수라면, 이 탑에 있는 '인간' 둘 중 하나가 자신이고 나머지가 형님이라면, 곁을 허해주시는 동안 제 살가죽을 바쳐서라도 헌신하고, 기대며, 머무르고 싶었다.
그 열망이 닿은 것인지 어느샌가 두 사람의 식사 시간은 자연스러운 일과로 자리 잡아갔다. 심지어 어느 추운 날에는 천을 둘둘 두르고 잰걸음으로 생선을 뒤쫓던 사천을 보다 못한 소의가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자신이 요리를 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사천은 몹시 놀라 철퍽 엎어져 절을 올렸다. 사색이 된 소의가 잡은 생선을 떨어뜨릴 뻔하며 만류했으나, 형님께 궂은 일을 시킬 수는 없다고 강경히 우기는 조수 앞에서는 제아무리 사막의 마법사도 별다른 수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왜 요리를 하는 건 넌데 네가 감사하다고 하는 거야?"
그 말에 사천은 실없이 웃으며 조금은 주제 넘은 속내를 숨겼다. 제게 머무를 곳을 주셔서...
그렇게 수많은 낮과 밤이 또다시 흘렀다. 큰 흐름에 자주 노출되면 인간의 인식은 더 큰 단위로 바뀐다. 주변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사천에게 점점 지루하다기보다 당연한 것이 되어갔다. 벌써 소의가 자신을 탑에 데려온 지 몇 달은 흘렀을 것이다. 어쩌면 일 년을 다 채워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속의 하루하루는 점점 짧아졌다. 오아시스 표면에 일렁이는 물결을 보는 것만으로도, 온실 덤불에 기대어 느린 공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익숙한 정보의 향연, 느릿한 템포의 생활양식, 허기를 망각할 즈음 다가오는 식사 시간, 짧은 온기를 되뇌며 잠에 드는 밤. 문득 사천은 사막의 마법사가 수십 수백 년을 견뎌내는 원리를 짐작했다. 그저 흘러가는 것이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시간마저 그를 막아서지 않기 때문이다...
쾅.
길고 긴 일상은 어느 저녁, 부엌 창문을 거세게 두드린 강풍에 의해 금이 갔다.
로브를 두르고 짧은 양해의 말을 남긴 뒤 계단을 내려가는 소의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사천은 들었다.
분명, 폭풍이 올 때는 아직인데...
형님이 예상하지 못하는 영원사막의 자연현상이란 이상했다. 그 자체로 질서인 마법사가 치밀하게 그린 궤도를 그 무엇이 거역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렵지 않게, 기상이변이라는 낱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무언가 이상해진 것이다. 사천은 순간 자신이 안주하던 현실이 얼마나 연약했는지 깨달았다. 가슴 한 구석에 서늘하게 끼쳐드는 이 감각은 불안이다. 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방황의 시기에나 느꼈던 나약한 마음 한 자락. 머지않아 돌아온 소의가 조금 식은 수프 앞에서 수저를 들며 담담하게 다독이는 말을 해도, 야속할 만큼 기민한 촉이 속삭였다. 이제 달라졌다고, 이전과 같지 않다고.
예상은 적중했다.
소의가 미리 말하지 않고 사막에서 하루 이틀 정도를 더 보내고 들어오는 날이 잦아졌다. 소의가 없는 날 식사 시간이 찾아오면, 하염없이 앉거나 누워있는 사천을 마법 장식품들이 등 떠밀어 부엌에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온실의 덤불이 조금 변색하여 형님께 영양제를 부탁드리거나 잠 못 들게 까닥거리는 유리 열매를 억지로 멈춰 세워야 하는 따위의 일도 있었다.
습관적으로 하루를 훌쩍 떠나보내고 문득 온실 문을 열었다가 소의 형님이 본 적 없는 고서를 넘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해, 두어시간을 정신없이 바라보다가 책등으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그게, 형님의 품격이 너무나 지고하여... 아얏. 죄송합니다."
"또 이상한 소리."
이변 이후로 마법사는 그럴 때만 빙긋 웃었다.
그 미소에 사천이 안주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
1층 안쪽, 마법사의 조수가 유일하게 열어보지 못한 문이 있다. 문 안은 지하로도 탑의 최상층으로도 볼 수 있는 곳. 꼬이고 얽혀 도무지 단어 한 둘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곳.
예기치 못한 폭풍 이후로 한 달. 사천은 우연한 계기로 그 장소를 알게 되었다.
"저, 소의 형님. 그러고 보니 탑 안에 계실 땐 어디에서 주무십니까? 제가 꼭대기방에 머물고 있으니 더 올라가실 수도 없을 텐데..."
유달리 잠이 들지 못하는 날이다. 계단을 내려온 사천이 조각처럼 앉아 밤이 내린 창밖을 관찰하는 마법사에게 그렇게 물어보았을 때다. 마법사는 시선을 돌려 느릿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말 없이 더 아래층, 더 안쪽으로 향했다. 사천은 홀린 듯 뒤따랐다. 매번 형님이 드나들던 현관 맞은 편에 계단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인지 왜곡이야."
묻기도 전에 답이 돌아왔다.
"네가 있는 꼭대기방은 따지자면 남는 방이지. 가끔 하늘의 동향을 살필 때 머물기도 하고."
사천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어디선가 미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탑이 이렇게나 넓었던가? 미풍은 점점 힘차게 불어왔다. 펄럭대는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발목에 소의가 두른 머플러 형식의 긴 천 끝자락이 살랑였다. 간지러워 멈칫 걸음을 늦추고 말았다. 소의는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느려지자 가벼운 손짓으로 바람을 갈무리했다. 좀 추울 수 있겠네. 그 말에 사천은 답했다. 네에... 물론 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안 가 소의는 벽처럼 단단한 문을 열었다. 짱그랑- 다르르르, 딸랑. 마치 꼭대기방에서 처음 들은 소리처럼, 문 너머에서 유리 장식품들의 환영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아름답습니다."
사천은 감탄했다. 마치 거대한 요정의 정원에 들어온 것 같았다. 초목이 우거진 공간, 한 쪽으로는 귀한 것들이 늘어진 기다란 진열장에서 보물들이 번쩍거리고, 탁상은 매끄럽고, 안쪽 마법 덩굴 그늘이 드리운 곳에 익숙한 세공 방식으로 장식된 침대가 있다. 덩굴이 살랑이는 아래 놓인 침대는 사천 자신이 꼭대기방에서 사용하는 것과 거의 같았다. 그게 신기하면서도 눈길을 사로잡아 사천은 빤하니 쳐다보았다.
"남의 침대를 구경하면 안 돼."
소의가 안개를 씌우자 그 편의 풍경이 흐리멍덩해졌다. 화들짝 놀란 사천이 귀 끝까지 빨개진 채 손을 허둥지둥 내저으며 해명했다.
"아닙니다! 감히 허튼짓을 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무 말 없이 쳐다보는 소의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덜그럭댔다. 최악이었다. 정말 궁금해서 보았을 뿐인데, 사천은 상종 못할 개자식이 되어가는 자기 자신의 꼴을 도무지 버티지 못하고 엎어졌다. 풀썩. 천장에 길게 늘어진 형형색색의 유리발이 '저런', 이라고 말하듯 하늘거리며 짤랑 소리를 냈다. 사천은 풀이 부드럽게 깔린 바닥에 엎드린 채 비장하게 말했다.
"죽겠습니다."
"...인간 죽이는 취미는 없어."
"그렇다면 더욱 형님 손을 더럽히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스스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는 와중.
"푸핫."
소의가, 웃었다.
사천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었다. 잠깐의 환한 얼굴은 금세 모습을 감추었지만, 정말로-
"세 계절 만큼을 탑에서 지냈더라도 너는 인간이니까. 마법사의 공간을 궁금해하는 건 당연해."
-죽기 전에나마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장면이었다. 사천은 한 박자 늦게 소의의 용서에 감읍하며 깊이 인사했지만 그전에도 후에도 맑게 번지는 웃음이 눈앞에 아른거려 떠나지 않았다. 잔상은 망막에 깊이 뿌리내린 듯이 끈질겼다. 불안도 기쁨도 그 잔상에 녹아 사라졌다.
꼭대기방에 돌아와 눕자 주변에 얕은 온기가 맴돌았다. 아까 바람 앞에 걸음을 늦추었기 때문일까, 사천이 추위에 약해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생각한 마법사의 안배인 모양이었다. 깜박깜박,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아예 창가로 붙어 별을 보기도 하고, 다시 돌아와 흔들리는 덩굴에 매달린 잎을 세기도 하고.
기어코 잠에 들 때 사천은 또다시 엄습하는 마음의 냉기에 몸을 약간 움츠린다.
틀렸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
마법사는 푸른 머리의 인간 조수를 언제부턴가 '관상용'으로만 인식하지 않았다.
그것은 미숙하고 흔들리는, 무척이나 바보 같은 '사람'이었다.
*
겨울의 한가운데에 접어들었다. 혹자는 무엇이 다르냐고 하겠느냐만, 사막의 마법사에게는 중요한 시기였다. 눈 깜짝할 새에 돌아오는 겨울, 자연은 숨을 죽이고 제 모습을 감춘다. 생명이 격동하는 봄과는 사뭇 달랐다. 이곳 영원사막은 비교적 고지대에 있다. 겨울은 여름과 대비되게 매섭다. 이때부터 봄에 걸쳐 매년 사막을 조정하고 재구성하는 것이 마법사의 가장 큰 책무 중 하나였다.
잘 구워진 고기를 썰다 말고 사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럼, 이제부터 사막을 다시 구성하시는 겁니까?"
"그런 셈이지."
소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고 자신도 잠시 아차 싶은 눈치였다. 소의가 사천을 흘긋 보며 무덤덤하게 덧붙였다.
"언제나 혼자 해왔으니까."
사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선망을 가득 담은 눈을 빛내며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군요, 고생하십니다, 형님의 거룩한 자비로... 사천은 말이 잘릴 때까지 청산유수로 찬사를 늘어놓았다. 소의가 그런 식의 긴 미사여구를 끊을 때면, 아쉬운 티를 감추지 못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그의 살짝 구겨지는 미간과 단호하게 나무라는 투에 중독이라도 된 듯 고분고분하게 굴게 되었다. 헤헤. 사천은 마냥 달가운 마음으로 얼간이 같은 웃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소의는 바보 같은 얼굴을 잠시 눈에 담다가, 아주 약간 입꼬리를 올렸다. 식기를 몇 번 움직여 음식을 정량만큼 먹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눈치라면 둘째가로 서러운 사천이 진즉 소의의 먹는 양에 맞추어 덜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잘 먹었다고 말하자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크게 기뻐하는 순진한 표정. 소의가 잠깐 생각했다. 뭘 새삼스럽게.
조수가 가지런하게 쌓은 그릇을, 하나 집기도 전에 마법사가 간단히 씻어내고 찬장에 차곡차곡 돌려보낸다. 대단히 놀라고 감격한 조수가 치렁치렁 긴 머리를 바닥에 늘어뜨리며 엉겨 붙으면 마법사는 자연스럽게 내빼고 홀연히 제 갈 길을 재촉한다.
이참에 머무시는 곳 가는 길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천도 소의를 따라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먼저 내려온 소의가 알만하다는 듯 뒤를 돌며 온실에나 돌려보내고자 입을 열던 때였다.
덜컹, 탑의 문이 흔들렸다.
"소의 형님!"
사천은 쏜살같이 달려 나가, 우습게도 마법사의 안위를 살폈다. 목에 두르던 천을 휙 넘겨 머리 위로 보온대처럼 두른 소의가 손을 가볍게 들어 사천을 진정시켰다.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냉기를 살피던 소의가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허공에서 청색의 판초를 꺼냈다. 폭, 그것이 사천을 부드럽게 덮었다. 삼각형과 사각형 무늬가 어지럽게 수 놓인 판초는 꽤나 따뜻했다.
"무엇이든 명하신다면 돕겠습니다."
사천이 매우 감격하여 말했다. 소의는 그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문을 가볍게 밀어서 열었다. 휘이잉, 모래 알갱이와 바람, 뿌옇고 흐린 하늘... 그 한복판으로 소의는 스며들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한 발에 무게중심을 싣고 바깥을 등지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사천이 있는 탑 내부를 바라보는 쪽이었다. 소의가 나지막이 말했다.
"바깥으로 나가는 건 무척 오랜만이지."
"그렇습니다만, 그 말씀은 혹시, 저도..."
"응. 맞아."
마법사가 손을 내밀었다.
"춥고 뒤틀린 공간이지만 버틸 만 할 거야. 단, 무리라면 바로 돌아가. 팔찌에 손을 얹고 탑을 떠올려."
사천은, 긴장으로 조금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마법사의 손은 부드럽고 뜨뜻미지근했다. 그 아리송한 온기가 와닿자 이상하게 아무런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 조수가 넋 빠진 듯 어리숙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앞으로 발을 디딘 순간 회색 바람이 소의와 손을 잡지 않은 쪽 손목에 느슨히 걸려 있던 머리 끈을 앗아가 버렸다. 이 매서운 날에는 머리를 묶어봐야 춥기밖에 더 하겠거니, 순식간에 휩쓸려 날아가게 두었다. 한편 눈앞에는 머리를 한 갈래로 모아 낮게 묶은 소의의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은 꼭 장식품에 매어두는 종이 끈이 날리는 장면을 연상시켰다.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사천은 푹푹 빠지는 발을 계속 옮겼다. 팔락이는 형상에 숫자를 붙여 하나 둘, 이제 언덕 위를 오르고 있었다. 이상한 점이라면 분명 내려가는 것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시야는 높아지고 있다는 거였다. 소의는 이곳이 뒤틀린 공간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미였을까?
어느 순간 소의가 나긋하게 손을 놓았다. 사천은 무심코 다시 붙들려다 실례임을 깨닫고 엉거주춤 팔을 늘어뜨렸다. 소의 발치에서는 금 자수가 수 놓인 천이 겹겹이 팔락였다. 모두 같은 방향성으로 오고 가는 풍력에 의해서였다. 여기는 바람이 비교적 질서 있게 부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소의가 말했다.
"도착했어. 그리고..."
반짝.
무언가 작은 것이 저 멀리서부터 빛을 받는 듯하다. 어쩌면 그 자체로 빛을 잘라 만든 조각 같다. 사천은 뺨에 닿아 녹아드는 결정을 가만히 매만졌다. 눈이다.
"네가 내게 사막에 눈이 오냐고 물었던 거 기억해?"
사천은 조금도 지체없이 물음에 답했다.
"당연히, 저는 무엇이든 기억하고 있습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이렇게 오는 거야."
자, 소의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사천도 따라 했다. 그러자 눈앞이- 빛났다. 기상이변으로 생겼을지언정 진짜인 눈, 형상에 그치지 않는 실제적인 결정. 그 사이로 소의가 반짝이는 빛무리를 날려 보냈다. 모든 흰 별 조각들이 섞여들며 은색 오로라와 같이 황홀한 정경을 빚어냈다. 저 속에 몸을 맡기면 누구라도 고통을 씻어낼 수 있을 것처럼, 그 장벽은 영험한 기운을 뿜어냈다.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형님. 이건 정말..."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소의가 고갯짓을 했다.
"사막의 마법사의 특권이야. 하지만 이 정도의 눈은 나도 몇백년 간 볼 수 없었으니, 내게 있어서도 낯선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네."
"제가... 감히 이런 영광을 누려도 괜찮을까요?"
소의는 가만히 조수의 잿빛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은 눈보라와 한데 섞여, 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
정적 속에서 반짝반짝반짝, 빛나는 장막은 둥실거리며 얼음 알갱이를 흩뿌리고 하늘은 여전히 흐리다. 뎅그랑, 어디선가 투박한 소리의 종이 날아든다. 유리가 아니다. 금으로 된 종이었다. 연회색으로 물든 세상에 노랗게 튀는 마법이 끼어든다. 소의는 한 손으로 종이 앉을 곳을 주고 귀를 가까이 대었다. 그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천을 인식한 뒤 종에게 무어라 소곤거렸다. 뎅, 종이 하늘 저편으로 사라졌다. 금색 입자가 사라지자 사천이 입을 열었다.
"소의 형님."
소의는 고개를 까닥였다.
"제가 이변인 것이지요?"
"..."
소의의 두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그것만으로도 사천에게는 충분한 답이 되었다.
"형님은 아주 오래간 이곳을 지켜주셨습니다. 제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시간 동안... 그 옛날과 지금 달라진 것은 단 하나뿐이지 않습니까."
다름아닌, 저...
사천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탑에 온 지 수개월. 갈 수록 감각이 둔해지고, 긴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가는 것이 탑과 상호 영향을 주고받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제 갈 길이 있고 돌아갈 곳이 있는 인간들 중 누구도 사천처럼 오랜 기간 탑에 머무르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무섭도록 아름답고 조용한 낙원은 여태 어느 낯선 이도 손님이 아닌 무언가로 품어본 일이 없다. 그렇게 소의의 삶, 소의의 관념에 맞추어 조성된 환경은 파도에 깎이는 바위처럼 조금씩 '함께' 쓰는 공간으로 변해갔다. 사천은 그 어떤 사막의 마법사도 두어본 적 없는 조수이자, 질서에 끼어든 변인이었다.
소의는 평소와 같이 동요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단지, 잠시간 말을 골랐다. 이윽고 머리에 두르던 천을 조금 느슨하게 한 그가 사천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자박자박 눈 섞인 모래알이 밟히는 소리만이 또렷했다. 헉, 사천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켰다.
마법사가 느릿하게 말했다.
"네겐 돌아갈 곳이 있지?"
사천은 그게 꼭, 마법 주문을 외우기 위한 언어 같다고 생각했다. 빛무리에서 쏟아지는 빛이 마법사의 단정한 얼굴에 느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역광이었다. 부드러운 기운의 눈동자는 거의 금색으로 보였다. 마법사가, 소의가 재차 물었다.
"떠나온 곳이 있다는 건,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는 거잖아."
언젠가 돌아가야 할 곳. 사천은 그 말을 입 안에 두고 굴려본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찾기 위해 온 세상을 헤맨 것이 아니었나? 화려한 장막이 일제히 늘어져 오색찬란한 상가, 자신처럼 떠도는 이들끼리 장난삼아 정한 만남의 장소, 알아듣기 어려운 방언 혹은 외국어를 쓰는 바다 건너 사람들, 그것도 아니면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보았던 상회의 고동색 벽지와 거목 기둥이 받치는 천장...
"모르겠습니다."
조금은 애처로운 목소리, 지친 목소리가 삐져나온다.
"오래도록 찾아 헤맸습니다. 어디에 가도 제가 머물 곳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곳의 이야기를 듣고, 반드시 제 두 발로 다다라 마법사 님을 만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사천이 입꼬리를 올리며 읊조렸다.
"물론 대단한 오만이었지만요."
그리고 조금은 수줍게, 시선을 아래로 틀며 덧붙였다.
"마법사 님, 형님이라면... 무언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소의는 사천의 한 뺨에 손을 얹었다. 그것을 인지하자마자 사천의 흰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그가 당황한 듯 우물거렸다.
"저, 저기..."
소의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천의 볼을 매만졌다. 꼭, 장난감을 잃어버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듯, 너무나 다정한 태도였다. 여전히 금빛으로 찬란한 두 눈이 얼어붙은 땅을 녹이는 봄날의 아침 해와 같이 따사롭게 깜박였다. 사천은, 마음 한구석이 울렁이며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턱 메었다. 무엇으로도 묘사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외롭지 않았다.
마법사가- 소의가 조용히 이야기했다.
"집을 찾고 있었구나."
"마음 둘 곳이 없었구나, 네가 누군지 너 자신도 알 수 없었구나, 미신에라도 의지하고 싶었구나."
무척 오래간만에 사천은 코 끝이 아려왔다. 시야가 흐려져 끔벅, 눈꺼풀을 여닫았더니 피부 위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아마도 눈물이라는 이름의 무언가였다.
"그래서 영원사막을 건넌 거야."
소의의 손이 서서히 떨어졌다. 잠깐 남은 온기가 아쉬워 사천은 그 손을 눈으로 하염없이 좇았다. 소의는 사천의 손목에 걸린 팔찌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대었다. 알 수 없는 언어를 중얼거리더니, 불현듯 맑게 개는 하늘 아래에서 작게 웃어주었다.
"내가 그랬듯이."
살랑.
사천은 탑의 문 앞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소의 형님...!"
폭풍이 몰아치던 주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했다. 순식간에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천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노을로 물들었으며 주홍색으로 칠해진 모래 알갱이가 서늘한 겨울 태양 아래 바싹 익어갔다. 그 이후 두 시간 가량의 기억은 생략된 것일까? 조금은 섬뜩한 감각보다도 우선하여 마법사를 찾았다. 허리춤에서 무언가 달랑였다. 처음 이 곳으로 향할 때 묶었던 형형색색의 장식 천, 그 사이로 익숙한 형태의 유리병이 달려있었다. 안에는 깨끗한 담수가 가득 차 있다.
이대로, 돌아가라는 듯이...
사천이 탑의 문을 힘껏 밀었다. 소의에게 그토록 손쉽게 열리던 나무 문이 사천의 앞에서는 무겁기 짝이 없었다. 몸을 부딪쳐 열자 달칵 소리와 함께 내부가 보였다. 익숙한 풍경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른 구석이 없이 평화로웠다.
"형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사천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 온실로 향했다. 그런데 열리지 않았다. 설마 하고 내려다본 손목에 팔찌가 없었다. 형언할 수 없는 쓰라림이 온 몸을 할퀴고 지나갔다. 꼭대기 방으로 가는 계단은 진입조차 불가능했다.
버려졌다, 꼭 그런 기분이 들어 사천은 계단에 주저앉았다. 온실과 최대한 가깝게 자리 잡아 눈을 감으니 익숙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하고도 끊임없는 오아시스의 자장가. 이따금 들으며 선잠이 들기도 했던 소리.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떠나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떠나고 싶지 않다.
사천은 다시 몸을 일으켜 혹시나 실마리가 될 것이 있는가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저 너머에서 무언가 달그락대는 소리를 듣고 휙 고개를 돌아보았다. 딸랑딸랑 가벼운 소리, 허공에 뜬 유리종이었다. 아까 소의를 찾아온 것이 평소와 달리 금 종이었던 이유는 유리종이 탑 내부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일까? 사천은 덥석 종을 낚아챘다. 항의하듯 날카롭게 달그락대는 소리를 못 들은 척 종에 대고 외쳤다.
"마법사 님, 형님, 소의 형님! 이대로 버리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인사라도 하고 싶습니다."
버둥거리던 유리종이 점차 얌전해졌다. 머리 위에서 꼭대기 방의 유리구슬 장식이 흔들리는 듯한 맑은 진동이 윙윙거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사천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천이 마저 외쳤다.
"소의 형님. 저의 형님."
진심을 담아 부르는 이름, 감히 붙여보는 두 글자 짜리 꾸밈말.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내쳐진 조수는 거리낌이 없다. 덜커덕, 일 층 벽면의 나무 장식품이 좌우로 움직이는 듯했다. 계단 아래에서부터 향긋한 풀잎의 내음이 끼쳤다. 사천이 마침내 잠깐의 주저 끝에 내뱉는다.
"저는 당신을 정말로-"
그 끝말은, 순식간에 나타난 눈앞의 반짝이는 존재에게.
두 눈이 휘둥그레진 사천이 유리종을 손에서 놓친다. 그것은 가볍게 날아 소의에게 지난 일을 일러바치듯 흔들린다. 그 소리는 사천에게 닿지 않지만, 소의의 표정에서 사천은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청색 머리칼이 쨍하게 흩날려 눈앞을 조금 가렸다가 다시 흩어진다. 붉은 노을에 담가진 세상은 무척이나 열렬히 타오른다. 이토록 말끔한 탑 안이 마치 거칠고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진다.
문득,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천은 자신이 딛고 선 이 탑이 다름 아닌 심장처럼 느껴진다.
나침반이라는 별명은 일부만 맞았다. 사막의 시작이자 끝, 모든 방향과 모래 한 알 한 알, 광활한 천지는 이곳 탑에서 정해진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다.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날의 다홍색 로브 끝자락이 맞닿은 탑의 바닥에는 사막을 아주 작게 줄여 만든 모형의 그림자와 같은 문양이 선명하다.
소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돌아가지 않았구나."
"이렇게 보내시는 건 불합리합니다. 저는, 저는 이곳이야말로 저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법사의 망토가 번뜩이는 노을을 품고 팔락였다. 사막의 바람이 탑 내부까지 스며든다.
"달라, 사천아."
처음으로 이름이 불린 사천이 너무나 단호한 거절에 우두커니 선 채 말을 잃는다.
"이곳이 네 집이 된다는 게 뭘 의미하는 지 알아? 이곳을 모두 가지는 거야. 반대로 말해볼까. 이곳을 제외한 어디에도 갈 수 없어."
"사막의 심장도, 사막도 다른 어딘가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는 건 형님 또한..."
"난 온전히 나의 선택으로 마법사가 되었어. 그리고 그건 이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 선대 마법사가 모든 것을 물려주었을 때, 어느 날 사막의 경계를 넘다 쓰러져 다시 탑에서 눈을 떴을 때, 아름다운 마법과 고독함이 찌든 기록을 내 손으로 하나하나 정리했을 때,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어."
잔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천은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러나 소의는 놀랍도록 평온했다.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감당하셨습니까."
소의는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감당한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너에게 있어서는 감당해야 하는 일이겠지."
"제가 함께 있어 드릴 수는 없겠습니까?"
그것이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너무나 놀라웠던 모양이다. 소의는 굉장히 복잡한 얼굴로 한낱 인간의 발칙한 제안을 곱씹고, 곱씹고, 또 곱씹는 듯 고민하다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천이 꿈에 그리던 바로 그 웃음이다. 아름다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토록 맑게 눈을 휘고 웃는 소의에게서 그는 희미한 행복의 향내를 느꼈다. 진심으로 웃는 사람에게서 새어 나오는 광채는 눈이 부셨다. 분명 그 광채란 무형임에 틀림 없는데, 이 순간 사천은 그게 꼭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졌다. 소의가 기뻐하는 모습에서 우습게도 자신은 더 커다란 기쁨을 느낀 것이다.
"그런 영원은 원하지 않아."
마침내 평온한 상태를 되찾은 소의가 여전히 웃음기 어린 표정을 하며 딱 잘라 말했다. 진실된 기쁨 만큼이나 진실된 사양의 말이었다.
"너에게는 자유가 어울려. 너는 겪어보지도 못한 낙원을 찾고 있는 거야. 하지만 어디에서든 조금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철학적인 이야기였다.
"하물며 지옥조차도 너의 낙원이 될 수 있어. 네가 타고난 별은 그런 거야."
오리온(Orion)은 이곳 영원사막의 겨울이면 더없이 밝게 차오른다. 언젠가 소의가 그렇게 일러준 적이 있었다.
길잡이이자 모험의 별, 해가 지고서 비로소 그 모습을 보이는, 일등성을 품은 별.
사천은 그 아득한 빛이 머리 꼭대기에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완전히 압도되어, 그가 나지막이 말한다.
"하지만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향한 그리움을 떨쳐낼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사천이 담담하게 청했다.
"언제든... 형님을 만나러 돌아오고 싶습니다."
해가 저물고 있었다. 지금은 한바탕 겨울의 틈바구니, 머지않아 소의가 속삭인 그 별이 하늘 어딘가에 떠오를 것이다. 사천은 그 별을 기어코 마음에 새겨두고는 훗날 다시 이곳에, 영원사막에, 영원의 나침반이자 심장에... 소의가 있는 곳에 돌아오고 싶었다.
소의는 느릿하게 사천을 들여다보다가 허공을 갈라 무언가를 꺼냈다. 깔끔하게 보존된 팔찌였다. 사천이 일 년간 떼어놓은 적 없는 팔찌 주위로 옅은 푸른빛 입자가 떠돌았다. 두 손으로 팔찌를 감싼 소의가 눈을 살풋 감았다.
"그렇다면 널 이 사막에 새겨줄게."
"네가 내키면 언제든 머물다 갈 수 있도록, 탑으로, 아니다. 내게로 찾아올 수 있도록..."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존재할 수 있는 마법사가 부드럽게 선언했다.
"기억해줄게."
마법사가 눈을 뜨는 순간 번뜩이는 황금빛 광채가 작은 팔찌로부터 터져 나온다.
한 인간에게 바치는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그것은 고작해야 백 년을 못 다 살고 스러지는 한낱 필멸자들이 감히 스칠 수 없는 무게의 약속.
넓고 험한 영원사막의 유일한 관리자로서, 겨우 인간 하나를 제 질서에 들여보내겠노라 말하는 무모한 관용.
무척이나 다정한 금빛 안개가 사천에게 스며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주변이 완전히 밝아진 뒤였다. 또 다시, 소의가 긴 시간을 넘긴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로 전과 달랐다. 목도리의 형태로 둘러진 스카프 천, 손목에서 딸랑거리는 팔찌, 무엇보다도 눈앞에 소의가 서 있었다.
소의의 어깨 너머로 탑이 보였다. 보통의 여행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단단히 숨겨두는 사막의 심장이었다. 떠다니는 유리종이 가볍게 딸랑, 울리며 사천의 몽롱한 잠을 깨웠다. 소의는 옅게 웃었다.
"잘 가."
"형님, 잘 지내셔야 합니다."
"알겠어."
당연히 사막의 마법사는 인간 따위에 비할 바 없이 건강하고, 젊고, 평온할 것이다. 그럼에도 안부를 맡기는 미련한 마음을 소의는 이해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을 붙박인 채 선 사천에게 그가 못 말린다는 듯 다가왔다. 그리 세지 않은 바람으로 어깨를 조금 떠밀며, 이제 가야지, 보내는 말을 전했다.
"저 일 년만 더 살고 싶은데요."
"안 돼."
"네엡."
사천은 과장되게 풀 죽은 시늉을 했다. 그러자 소의가 눈가 가득 웃음을 머금고 손짓했다. 어서 떠나라는 줄 알았더니, 가까이 와보라는 수신호였다. 사천이 한달음에 거리를 좁혔다.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는 그에게 소의가 잔잔한 투로 속삭여주었다.
"-나도 그래."
"예? 무엇이..."
또 한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제법 거센 바람이었다.
탑도, 소의도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무척이나 긴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덩그러니 사막 한복판에 놓여 오래도록 눈만 깜박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몰아쳐 왔다.
집으로, 가자.
상회로 가서, 익숙한 얼굴들에 인사하고 익숙한 말을 듣고 익숙한 풍경을 보며.
다시 한 번 떠날 여행을 준비하는 것이다.
살며시 마음을 간질이는 목소리를 끊임없이 해독하면서 사천은 태양이 환히 밝혀주는 사막을 걸었다. 어째서인지 가야 할 방향을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정확히 움직이는 발이 손이 눈이 향하는 쪽을 향해 사천은 끊임없이 걸었다. 목이 마르면 잠시 쉬어가며 물을 마셨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병 속의 물은 쉽게 줄지 않았다.
낮과 밤이 두 번 바뀌었을 무렵 사천은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다. 탈수 증세를 겪는 모양이었다. 지체없이 물병의 마개를 열어 입가에 물을 흘려보냈다. 곧 정신을 차린 그가 목을 축인 뒤 크게 인사하며 무언가 쥐여주었다. 운명의 장난인지, 그것은 유리로 세공된 아주 작은 종 모형이었다. 자신이 온 지역에서는 이것에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다며, 원래는 판매하러 가는 것 중에서도 일등품이라고 하였다.
뒤돌아서며, 손에 작은 모형을 쥔 채 퍼뜩 사천은 멈추어 섰다.
생각났다.
무엇에 대한 대답인지 깨달았다.
그는 자리에 멈추어 얼굴을 붉히다가, 안절부절못하다가, 펄쩍 뛰다가, 또 숨이 터져라 웃었다.
이윽고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두 뺨 가득 황홀감을 내비치며 종 모형을 두 손으로 힘주어 쥔 뒤 목에 두른 천에 매달았다.
유리종처럼 우아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가끔 달가닥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전혀 부족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우스운 일이었다.
사천이 힘차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유랑하는 별, 모험하는 젊음은 충만한 기쁨과 미래를 향한 기대로 가득 차오른 채, 두둥실 떠오르듯 새로운 인생을 열었다. 밟는 모든 곳을 알아가고 말겠노라는 오만과 열정이 그림자에마저 서려 이글거렸다.
그 뒷모습을 장엄한 영원사막이 고요히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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