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성벽

벽공 비전을 찾는 와론

231030

*와론이 서쪽다리를 파견 나간 뒤 수도로 복귀함. 

*애늙은이 전반적인 스포. 분량이 꽤 있습니다. 공포 6만자

*앞의 단편은 뒷 글과 이어지지 않습니다. 

마스터피스와 나린기

장인이 만든 명작인 마스터피스란 이름이 붙은 무기의 총칭이다. 그노제스 이후에는 주로 특수한 기능을 넣는 것이 이 무기류의 관습이다. 그러나 본디 마스터피스란 건 그 기능이 특수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 아니다. 단순한 무기에 기능을 부여한다고 해서 장인이 만들어 낸 걸작과 같을 수는 없다. 장인들은 그 무기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기원과 비원을 담아, 마치 나린기와도 같이 명명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마스터피스들은 살아있는 생물과 같으며, 만든 이가 숨을 다한 뒤에도 그의 혼은 여전히 단단히 제련된 무기의 형태로 남는다. 따라서 마스터피스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사로서도 영예로운 일이다.

흔한 세간의 견해와는 달리, 마스터피스라고 해서 양산이 가능한 건 아니다. 하나의 무기는 그것을 만든 장인의 혼 자체. 그야말로 장인이 세상에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기계장치라 하여도 나린기만큼은 아니나, 마스터피스 역시 대체 할 수 없는 반열에 든 무기이다. 마스터피스의 장점은 뭐니뭐니 해도 사용자를 위한 기능을 추가하고 사용자에게 완벽하게 맞추어 설계할 수 있는 데에 있다. 무기를 길들이는 과정도 하나부터 열까지 사용자 스스로 터득해야 하며,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나린기와는 다르게 대장장이들과 도공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반면 나린기는 무생물이 아니라 길을 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나린기를 길들이는 과정은 괴팍하고 심술맞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과도 같은 무기.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길들인 나린기는 협공에 가까운 전투를 벌일 수 있다. 나린기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는 몇몇의 기사들의 싸움은 2:1의 형태를 취한다고 전해진다. 천하에 유일무이한 기능을 가진 존재-나린기를 파괴할 수 없다는 건 법칙을 깨트릴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마치 한 세대에 한 명씩 존재하는 통찰의 눈처럼. 몇몇 특이능력자들은 그들 자체가 나린기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순백색 코끼리와 같이 순수한 근력과 전투력만으로도 이미 별다른 보정이 필요하지 않은 자에게는 마스터피스도 나린기도 도움이 되지 않기도 한다.

그러므로 각각의 마스터피스에겐 특별한 역할이 주어진다. 대표적인 예인 하마턱은 소유자를 지켜준다는 목적으로 알려져 있다. 간혹 까다로운 무기가 있더라도 대부분의 대장간의 장인들은 그 주인을 돕고자 하는 목적을 담는다. 반면 어떤 이들은 자신의 나린기를 증오하기도 한다. 마치 하늘에서 내린 재능과 천재를 시샘하는 사람들과 같이. 이 무기는 대관절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무엇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부러질 줄도 모르는가. 하여 그 알 수 없는 쓰임새를 증오한다.

그리하여 나린기와 마스터피스. 무엇이 더 우세한가?

이 질문의 답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무인들이 창칼을 맞대며 찾아내는 중이다. 그래도 결국 하늘 이 내린 무기란 차원이 다른 강도와 경도를 가지고 있으니 넘어설 수 없는 존재라는 여론이 대다수였으나...

.... 대장장이들. 그들은 그런 당연한 사실에 굳이 좌절하지 않는 자들이다.




*ost 추천_ vinland saga - Somewhere Else

플레이 하면 바로 고어한 장면이 나오니 주의하세요.

성벽

"What is better - To be born good, or to overcome your evil nature through great effort?

선하게 태어나는 것과, 악한 본성을 위대한 노력으로 극복하는 것. 무엇이 더 훌륭한가?"

소음.

노을과 피바다의 경계가 사라진 전쟁터.

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과 단말마. 칼과 창이 서로를 갈아내는 소리.

와론은 이 모든 걸 상공에서 내려다 본다. 자신의 투구가 아래에서 반짝인다.

한 기사가 성벽의 끄트머리로 걸어 나온다. 그의 입모양이 물결처럼 천천히 움직인다.

무장한 갑옷을 마주한 순간 호흡이 멎는다. 또 그 꿈이구나, 생각이 소리처럼 흐르고 와론의 식은 손에 땀이 배긴다. 한때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늘 꾸던 꿈. 하지만 자세히 보니 갑주의 양식이 다르다.

“힌셔, -------”

“하지만 -----”

“스승-”

낯선 남자는 녹이 슨 것 같은 짙은 장밋빛의 옛날 무장을 했고 흉갑 가운데에는 선명한 문장이 무늬 되어 있다.

돌연 땅을 향해 낙하하는 감각과 함께 선풍을 일으키며 창대가 급회전하여 경로를 비튼다. 둔기에 부딪히는 충격이 이어져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들어온 시야가 쇠로 된 바다로 절경이다.

“…헉.”

옅은 잿빛 머리를 가진 인영이 퍼뜩 놀라며 몸을 일으킨다. 악몽이었다. 이마는 흘러내린 땀으로 끈적하고 선명한 꿈 속의 장면이 떠오르자 오한이 일었다.

바람 없는 방 안에서 와론은 침대 옆의 커튼을 걷어 창문 밖을 확인한다. 타는 햇살이 실내로 비쳐든다. 어느 새 아침이 되어 바깥의 수도는 상인들과 여러 사람들이 뒤섞여 분주히 돌아가고 있었다. 후, 와론은 손으로 이마를 짚어 깊이 배어난 땀을 닦아 낸다.

밤새 침잠했던 몸의 감각은 아직도 전장터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창 밖의 평온한 수도가 오히려 현실감이 없어 와론은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다. 모르는 사이 주먹을 쥐어 뻣뻣하게 굳었던 손을 이리저리 풀어본다. 유난히 긴 임무 동안 굳은 살은 한층 단단한 모양으로 자리 잡았다.

서쪽다리에서 복귀한 이후 내리 상태가 안좋은 몸은 아무리 수면을 취해도 피로를 호소했다. 별다른 부상이 남지도 않았는데 근육과 뼈의 여기저기가 쑤시고 미약한 통증이 인다. 와론은 배긴 옆구리를 잡으며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간다. 피곤하다고 해도 집 안에서 하루를 허비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벽공의 완성이 아직이었다.

수도에 돌아오고 나서 와론은 매일 같이 수련터로 향했다. 대륙의 유일한 전장터라고 부르는 격전지인 서쪽다리. 그 이상으로 감각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장소는 없을 정도다. 적을 통과해 물체에 반사되어 되돌아 오는 힘ㅡ 벽공을 터득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힘의 감각을 익혀 적과 벽에 동시에 타격을 주는 조절을 해내는 일이다. 와론은 아직 벽공의 오의를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양손에 다른 힘을 나누어 썼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양 손의 전력을 끌어낼 수 없어 위력 또한 약해진다. 전투 중에 미세한 컨트롤을 해내는 일은 어려워ㅡ 예를 들어 적과 적 사이라거나, 적과 무기 사이에 기술을 거는 일 따위ㅡ 작은 물체는 겨누지 못한다. 그것만 해결한다면 벽공의 활용도는 지금과 비할 수 없을 텐데. 수련에 들인 개고생을 보상할 만한 고지가 눈 앞에 있는데 계속 허공에 헛손질을 하는 중이다.

누군가 가르쳐줄 이도 없으니 와론은 혼자 가벼운 훈련복 차림으로 사암이 섞인 모랫빛 절벽과 작은 과녁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한 손으로도 해낼 수 있을 정도로 감을 잡을 때까지 며칠 동안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벽을 두드렸더니 이제는 자동적으로 손이 뻗어 나간다.

해가 중천을 지날 즈음 더위 속에 서있는 와론의 손 끝이 떨려 왔다. 투구 안에서 땀줄기가 무겁게 흘러 턱선을 따라 그었다. 소음과 같은 숨소리가 웅웅대며 귓가에 이명과 같이 들려 집중이 흐트러진다. 와론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덜 아문 관통상의 부위가 저려왔다. 투구를 들어올려 병 속의 물을 들이키고 던지듯이 내려 놓으며 입가를 닦는다. 단련에서 중요한 것은 평정심이다. 전쟁터를 겪으며 깨우친 힘의 감각은 극에 달했지만 과녁도 군데군데가 방사성으로 깊이 패인 절벽도 그 파손된 형태가 어제와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이만한 집중력을 다해 본 적이 없는 데도 좀처럼 경지를 넘지 못했다. 어쩌면 벽공의 비전이 불완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일었다. 오래 전 벽공의 사용자들도 양손으로만 벽공을 사용했나? 그러나 기록에서 유추하건대 그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물로도 기술을 걸 수 있었다. 그 사람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왔던 수련이지만 비전서를 건네 주었던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다. 설령 비전서에 빠진 내용이 있다고 해도 그건 와론이 하기에 따라 채울 수 있는 부분이다. 핵심은 사라지지 않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와론은 극의는 체득하는 것이라는 주의다. 그 가능성은 와론이 이렇게까지 몸부림 치는 이유를 늘리는 셈이다.

한 숨 돌리며 와론은 꿈의 장면을 떠올렸다. 벽공을 수련하고 난 뒤에는 늘 꾸는 꿈이다. 그 장면이 어디서 온 것 인지는 명백했다. 악마기사와 영웅의 전설. 와론은 그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영웅이 아닌, 이명도 모르는 악마기사에게 이입한 악몽을 종종 꾸곤 했다. 벽공의 수련을 중단하고, 서쪽다리에서 전투를 치르고 온 뒤로는 밤마다 다리로 돌아가는 정신없는 꿈을 꾸기 일수였다. 그러나 오늘 보았던 광경은 평소와는 달랐다. 와론이 알지도 못하는 전장이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나 있었다. 한동안 잊고 살았던 악마기사 얘기가 생각난 건 오로지 자신의 능력만을 의존하면서 벽공을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인해 심리적인 부담이 컸을 거라고 그는 넘겨짚었다. 그러면서도 벽공이 어떤 사용자를 거쳐간 무투술인지 떠올리자 우연이 아니라는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그날 수련은 조지다시피 ㅡ와론은 소득이 없는 훈련은 그렇게 부르곤 한다ㅡ 하고 그는 집으로 들어와 씻고 침대에 털썩 앉았다. 하루 종일 투구 안에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상쾌한 향을 풍기며 베개 위로 물기를 뚝뚝 떨군다. 와론은 대강 수건을 대고 침대 헤드에 깊이 파묻혀 기댔다. 악마기사의 본명은 대체 뭐였을까. 그는 정말 악마였나? 벽공이 실전 된 건 혹시 고의였을까? 이전부터 수 백 번째 해온 질문들이지만 그 답을 수도 어디를 뒤져도 알 수가 없다.

와론이 이런 참을 수 없는 불안한 동질감에 빠져드는 것은 때로 그 시절의 영웅의 탄생을 불러 일으킨 모든 상황 속에 잠재하는 악과 불온함을 이해해버린 탓이기도 했다. 와론은 악마기사가 아니라 오히려 기사의 명예를 흐리는 종자들을 잡아내는 편에 선 기사였다. 그러나 마음 속으로 어쩌면 자신이 악마기사와 별반 다르지 않을 정의를 행함을 알고 있다.

마족을 잡는 건 기사보다는 군인으로서 행한 일이었지. 전쟁터에 불려다니는 게 기사의 본래 일이니까.

마족을 잡는 게 명예와 관련된 건 아니다.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선배 기사인 그가 나서야 했고. 서쪽다리에 파견을 나가는 일은 기사는 눈 앞의 가시적이고 영웅적인 명예 외에도 그 역할이 있음을 제국과 스스로에게 입증하는 일이었으며,

와론의 창 끝이 향하는 건 서쪽 대륙을 향해서 였다. 그것이 묻힌 피는 설령 개인의 것이었을 지라도. 적어도 당시에 그는 제국의 이름으로 살인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니 정말로 그러했을까? 검은 창대를 쥐고 피에 물든 손은 여전히 생생한 자신의 것으로-

잠을 설쳤다.

근육통으로 잘게 다져진 몸을 이끌고 또 다시 수련장으로 향했다. 짧은 휴식을 취하던 중 도서관을 뒤져봐야겠다는 발상은 정말 우연스레 떠올린 것이다. 더 이상 사료는 파헤칠 부분이 없다는 게 그(들)의 입장이었는데, 문득 이곳 수도는 500여 년전 벽공의 전승자 중 하나였던 검붉은 하마 힌셔가 기사생활을 한 장소라는 게 머리에 스쳤다. 수도로 귀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행방불명이라는 기묘한 최후를 맞은 힌셔. 그가 살았던 거취를 당시에 누군가 수습했을 테고, 딱히 후손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는 그의 경우라면 가족이나 주변의 가까운 이들이 아닌 황성에서 나서서 도맡아 정리 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바뀐 적 없는 니젤의 황가는 아직 무언가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진전 없는 수련 따윈 잠시 내팽겨 치기로 하고.”

와론은 아직 말짱한 과녁 하나를 차서 부러트리고는 짐을 챙겨 수련장 밖으로 나섰다.

와론은 한구석에서 고(古)지도를 꺼내 들었다. 지도의 한 부근은 당시에 강이 흘렀다는 오래된 표시가 있다. 그가 보고 있는 건 내부 깊숙한 곳을 뒤져 발견한 몇 백년 전의 대륙의 가도를 표시한 지도다. 보아하니 실용성은 없다시피 하며 학술용 같았으나 표시들이 난해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런 걸 따로 보관해두다니.

오래 전이라고 해도 여기에 강이 흘렀다는 건 말이 안되지.

그가 보는 지역은 날튼과 니젤을 오가는 길목으로 현재는 넓은 가도가 있었다.

잘못된 지도인가... 아니라면 애초에 강이 아니라 다른 것을 표시했거나.

지형이 아니라 수맥을 가리키는 건가. 혹은 광맥이나 용맥..

와론은 하나씩 따져보았다. 설마 은하수나 황도라던가? 그런 건 아니겠지.

희미한 곰팡내가 주변으로 섞인다. 힌셔를 추적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찾으리라 기대하는 것부터가 힌셔의 자필 기록이었다. 보존서고. 그 중에서도 안쪽의 감춰진 독방. 석석하고 서늘한 냉빙고 같은 그 곳에서 와론은 선대 황제의 일기들을 뒤적이는 중이었다. 500년 전의 기록은 지금은 사어가 된 문어로 쓰였지만 와론은 대충 읽어 낼 수 있는 종류다.

기어스가 처음 맹세되었다고 추정되는 건 1440년경. 황제와의 담화를 가감없이 직필로 담은 실록은 길고 두껍다. 와론은 그로부터 대충 5년전의 시점부터 손가락으로 주욱 훑어내려가다 눈에 띄는 구절에서 손을 멈춘다.

1434년. X . XX

ooo의 등대(登對)

이름 부분은 까맣게 마법으로 지워져 있다. 와론은 그 밑의 구절을 읽어나간다.


거미. 너도 제자 하나쯤은 들여 볼 생각은 없어? 너는 주변에 사람이 없으니 필시 외로울 터.

제자? 내가? 나 같은 놈이 무슨 문하를 들인다고.

근성 있는 놈들이야 버텨내긴 하겠지만-. 내 성격에. 분명 괴롭혀서라도 쫒아낼 걸.

난 무언가 도훈을 베풀 놈이 못돼. 누군가를 이끌어주는 건 더더욱.

황제가 그를 보며 파안으로 미소를 짓는다.

천하에 네 적수가 없으니 거미. 어찌 네가 천애하지 않다 할 수 있겠어.

그러나 너의 적수도, 너의 그 경지를 이해할 자도 만들어 내는 건 네 하기에 달렸어.

ooo.

거미는 얼굴을 들어 황제의 말이 어디까지 진심인가 가늠하듯 우러른다.

그래도 같이 부대끼는 건 할 수 있지 않겠어.

네가 그런 발언을 하다니. 퍽이나.

“…이게 되네.”

와론은 책장을 넘겨보았다. 악마기사의 이명이 거미라는 것은 기어스에 대한 지식을 가진 자라면 조금의 관심으로도 알 수 있는 정보다. 하지만 모든 기록이 말살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직접 황제와의 대담 내용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건 의외였다. 와론은 뒷편을 넘겨 몇 가지를 더 찾아 읽는다.

집으로 돌아간 와론은 그 날은 다른 꿈을 꾸었다. 섬뜩하게 우는 듯이 지는 석양에서-

황제는 오랜만에 그를 보고 돌아간 건들한 얼굴에 그늘이 져있는 것을 보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피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내면의 종류다.

사저로 들어온 거미는 조용히 수련장 안으로 들어선다. 시기. 질투. 질투에 의한 모함. 암살. 모함. 착각이라 정정할 새도 없이 화를 내버리고 마는 자신과 주변의 불합리함. 이 정도 무게야 강자로서 타고난 자신이 감내할 업보라 받아들여왔지만 자신 안의 악만은 어쩔 수 없다. 그는 황제의 말이라는 이유만으로 순순히 따를 사람도 아니거니와 황제가 말로 설득하는 일에는 능숙함을 알고 있다. 천애하다라. 그는 누군가 의지할 이가 필요치는 않았지만 수도 생활은 적적하지 않기에 더 고독했다.

“나 같은 놈이 무슨.

문하라…”

거미는 수도의 서문 뒤로 숨는 일몰을 흉진 눈가로 응시한다. 퉁, 벗어내리는 갑옷에서 공소리가 난다. 문득 홀로 지내는 저택이 턱없이 빈 것 같다. 사람은 언젠가는 잊혀지고 목숨은 쉽게 끝나지만 다들 무언가를 남기면서 살고 있을 터였다. 저 꺼지는 노을만이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는가. 자유로운 건 계절에 따라 떼를 지어가는 철새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 철새들 조차 무리를 짓는다.

피할 수 없는 건가.

그는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 자신을 덮치러 다가오는 노을을 홀로 마중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른 책상 위로 낡은 책과 사료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와론은 간식거리 하나 없이 서가 사이에 걸터 앉아 책들을 탐방하는데 열중했다.

하마? 하마가 뭐지.

그러고 보니 그는 하마가 어떤 동물인지 몰랐다. 수 많은 힌셔의 전기들 중 백 년전에 쓰인 서적에는 동물 하마와 함께 힌셔를 정리한 내용이 있었다. 와론이 조사를 끝낸 부분이 서고 장서량의 반을 넘겼지만 자료의 양은 쉽사리 바닥이 나지 않는다. 현재는 힌셔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는 중이다. 속독이 가능한 천재였다면 좋았을 걸, 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정해진 수치였고 대신에 와론은 사지와 두 눈이 멀쩡한 젊은이였다. 대부분의 기사들이 그러하듯이 와론도 벽공을 단련하기 전에는 쌈질이나 정보를 가진 놈들을 물리적으로 털어내는 조사만 해봤지만, 막상 배운 뒤로는 이런 쪽도 나름 적성에 맞았다. 책에는 펜선으로 그린 동물의 그림이 실려있다.

아- 대양으로 이어지는 넓은 강어귀.

와론은 언젠가 지나쳤던 곳에서 귀가 작고 입이 커다란 포유류들을 본 기억이 있다.

턱이 위 아래로 벌어지며 드러나는 깊은 구강은 웬만한 동물들은 한 입에 삼켜버릴 만큼 거대하고 초식동물 답지 않게 날카로운 이빨이 박혀 있는 광포한 생물들이 황혼에 젖은 강가에 무리를 지어 몸을 담그고 있었다. 서로에게 입을 벌려 물어뜯으며 강가를 첨벙이는 강인하고 포악한 동족간의 싸움에서는 생명력이 피처럼 넘쳐 흐르고 있었다.

하마의 이명을 가진 힌셔도 비슷한 전투를 할 것이라 와론은 추론한다. 말을 섞어야만 하는 기어스. 그리고 통찰의 눈. 초대 그노제스가 만들었다는 전설적인 대검 하마턱까지… 그와의 싸움은 무조건 혈투일 것이다. 일반과는 차원이 다른 기사 간의 벌어지는 결투의 정점에 선 자고, 와론은 전승을 모두 신용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와 악마기사의 결투는 몇 백년이 지난 후에도 회자되는 최고의 기사싸움이기도 했으므로. 영웅을 따르는 일보다 그와의 창을 맞부딪히는 일이 와론의 흥미를 돋구지만,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통찰의 눈이다.

전승에 따르면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만 발휘된다지. 그는 악마기사의 눈에선 무엇을 보았나? 내게서는 읽을 수 없는 건가?

힌셔는 수도에서 보낸 말년에 통찰의 눈을 공개했다. 그 점 또한 와론의 눈길을 끌었다. 자신을 통찰 할 수 있는 영웅이라. 인간은 누구나 뱃 속에 비밀과 칼을 품는 법이다. 과연 당시의 기사들이라고 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그걸 들여다보는 걸 환영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힌셔는 어디로 사라졌지? 힌셔가 실종된 이후로도 대륙 어딘가에 살았던 거라면 발견되지 않은 무언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이를 테면 힌셔의 자필기록 같은. 그 안에는 어쩌면 악마기사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둘은 악마기사가 되기 전부터 같은 시기를 기사로서 보냈으므로 이전부터 접점이 있었을 테니 말이다. 그런게 이미 황궁에 있다면 왜 공개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어느 대학에서도 연구자료로도 사용되지 않는지는 미지수지만 보존서고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수확은 이미 있었다.

아마 힌셔의 벽공은 스승에게 전수받은 거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벽공의 무파라도 찾아낼 수 있다면 벽공이 전수되어 온 과정을 위에서 부터 찾아내려가면 된다. 그러나 힌셔 전기에 나온 스승이라는 사람.. 이 사람부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점도 수상하다. 영웅의 스승식이나 되는 사람인데 힌셔의 뿌리와도 같은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힌셔가 기사가 되기 이전의 기록도 신화와 같이 모호한 비유과 타당성 없는 망상적인 자료들 뿐이었다.

별다른 소득 없이 어제에 이어 사료를 잔뜩 뒤적인 와론은 빈 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와론은 며칠째 성벽 위에 서있는 꿈을 반복해서 꾸고 있었다. 머지않아 꿈 속에서와 같이 자신에게도 기사들이 덤벼들 것 같은 긴장감이 가라앉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이 전생에 악마기사였던 것 같다거나, 혹은 꿈에 누가 나오는데 척 보아도 악마기사 같다고 말해보면 어떨까. 현실과 꿈을 혼동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던가? 다른 기사들도 같은 것을 겪는지 조언이라도 구하고 싶은 심정이다.

“너 몇 살인데? 500년 전의 기사와 아는 사이라고?”

미친 사람의 얘기처럼 들릴 게 분명하다. 일몰을 마주 선 기사의 얼굴은 여전히 볼 수 없었다. 역시나 꿈에는 같은 이가 나왔다. 

거미. 새 제자를 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데리고 황성에 한번 오지 그래.

한 글자 마다 자신의 충고가 어땠는지 직접 듣고 싶다는 뿌듯함과 남을 통해 듣게 했다는 쪼잔스런 서운함이 꾹꾹 눌려 있다.

“스승님!”

“간다,”

그는 편지의 남는 아래를 잘라 답신을 휘갈겨 쓰고 전령에게 건네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수련장으로 향한다.

“…그래서 필요로 하는 자가 먼저 찾는 게 도리겠죠.”

기사의 미덕이라는 학문에서 탈영병과도 같은 와론은 수도 기사들이 따분한 기사론을 지껄이는 동안 투구의 귓바퀴 같은 부분을 만지작 댄다. 그는 못다한 잠을 보충하느라 커다란 가로수 위에서 낮잠을 자던 중이었다. 와론으로선 운이 나쁘게도 무리가 시원한 숲 그늘에 멈춰서는 바람에 떠드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러므로 기사는 칼을 드는데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자고로 어떤 측이 적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기사가 가장 먼저 검을 겨누어야 하는 상대는…”

그러나 자신은 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무엇보다 단단한 신념을 가지고- 그들의 악행을 실현한다. 비뚤어진 자들조차 마음으로는 누구보다 기사의 길을 추구한다. 기사의 연설 듣던 와론은 이따금 저지할 수 없는 살의가 일어나자 손을 내려 푸른 광석의 표면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그들의 말에서 악마기사에 대한 것을 이해해보려 했지만 전혀 다르다.

와론은 머리를 나무에 기대며 푸른 그늘을 올려다 보았다. 유백색 구름을 띄운 하늘이 간간히 보인다.

자기 안의 선악 간의 싸움. 와론이 벌여온 전투는 그런 것이다. 서쪽에 도사리고 있는 악. 그 악을 마주할 때 와론은 자신 안에도 서려있는 거대한 종, 아직 울리지 않은 그 뿔나팔의 맥놀이를 상상한다. 전투의 개시를 알리던 이 편의 뿔나팔. 전장에도 구름 사이로 어김없이 드리우던 미색의 광명들. 그 속에서 파도치듯 부숴져 가는 군대…

그러나 한켠에서는 이 편에 붙들린 병사들이 마족의 목에 칼을 긋는다. 잡혀간 병사들은 시체조차 돌아오지 않는다. 검은 피부의 난도 당한 마족의 시체. 전장터에서는 벌판의 들꽃 만큼이나 익숙한 피 비린내. 개중에는 어린 아이의 것도 있다. 그들이 마주한 악의 모습이란 그런 것이다. 와론은 전장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두려움을 느낀다.

그는 기사였다. 기어스를 어기지도, 명예를 저버리지도 않았고 서약을 하지도 않았지만 흑색을 가진 기사. 타락한 기사. 하늘을 올려다 보고 비처럼 내리는 광명을 마주하는 순간조차 뺏어든 생명의 피를 뒤집어 써야 하는 기사…

그러나 투구 안의 와론도 펄떡이는 심장을 가진 필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

명예에도, 힘에도 취해 미쳐버릴 수 있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악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자리해있다. 마찬가지로 구원도 외부가 아닌, 내부로부터 온다. 기사 자체의 결함이 아니라 기사의 결함에 대한 결함. 언젠가 한 문호가 말했듯이 와론은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니라 의무에 구속 되어 있다는 말에 동감한다. 기사는 오로지 위험천만한 일의 완수에서만 행복한 휴식을 찾아내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스스로의 결함을 극복할 때, 자신을 구제로 이끄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와론이 행하는 대다수의 일은 기사의 의무를 다하는 중이었다….

잠에 빠져들면서 그는 닳고 닳은 공상에 빠져든다. 이대로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뒷날 그는 또 밤새 피바다가 된 전장을 헤매었다. 뒤숭숭한 꿈에서 깬 와론은 마지막으로 서고를 들린다. 일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여 자료를 둘러보는 일은 거의 끝나가는 참이다. 의궤나 실록은 밖으로 챙겨갈 수 없어 일전에 발견한 지도만 둘둘 말아 챙겼다. 그는 구석에 놓인 주인 없는 사료들을 살핀다. 들어올린 횃불이 타원을 그리며 서가를 비춘다. 엄숙한 옛 의궤들이 그를 내려다보던 말던, 각진 서가에 꽂힌 남루한 책들을 살피던 와론은 이질적인 것을 발견한다. 홀린 듯 서가에서 빼낸 작은 단색 노트 한권은 누가 보아도 개인의 것이었다.

어제도 이런게 있었던가?

심박이 묘하게 오르고 책을 펼쳐 첫머리를 읽은 와론은 정지했다.

Hinsher.

힌셔.

끄트머리에 날림자로 쓰인 서명의 주인은 검붉은 하마였다.

일기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흥분이 가신 뒤 와론은 그의 모든 지성이 시험을 받는 기분이다. 영웅이라더니

더럽게 악필이다. 이 사람.

와론은 본인이 글씨를 갈겨 쓰기는 해도 필체를 보는 기준 자체는 높은 편이다. 짙은 펜으로 납작하게 붙여 쓴 글씨의 가독성은 최악이라 암호문에 가까웠다. 500년 전의 구어체로 쓰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자세한 내용이라곤 죄다 생략하여 한 줄 이상을 넘어가지 않는다. 일기에 정성을 들이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일기를 쓰는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체.

와론은 다시 일기를 집어들어 더듬더듬 읽어 나간다.

1435. X. XX

나를 찾아 온 기사를 따라 수도에 가기로 했다. 그는 자신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라고 했다.

X. XX

배울 것이 많아 수련을 하다보면 하루가 끝난다.

X. XX

기사란 생각보다 한가한 것인가? 스승님은 수도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으신다.

1436. X. XX

수도의 정문이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X. XX

스승님은 가끔 예고 없이 사라지신다.

X. XX

수도에 온 지도 일년이 되었다. 벽공을 배우기 시작.

X. XX

스승님이 또 사라지셨다.

X. XX

또. 그리고 이건 대체 무슨 수련이지?

와론은 한숨을 삼켰다. 벽공을 배우기 시작. 힌셔가 벽공을 스승에게 배우기는 했다는 말이지만 일기에서 그 이상의 정보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결국 그는 별소득 없이 수련장으로 돌아갈 터였다.

그 날 꿈 속에서 와론은 하마를 보았다. 수도 한복판에 그를 재현해낸 동상과는 생김새도 풍채도 달랐지만 일견 닮은 구석이 있어 와론은 금방 그를 알 수 있었다. 금발을 하나로 묶은 십대의 영웅은 키가 컸지만 그다지 특별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옅은 빨강머리에 얼굴에 흉터가 난 이는 스승으로 보인다. 둘은 대련을 하는 것 같았다. 


공기가 순간 찰기를 띄며 목도가 달라붙듯 품을 파고든다. 스승은 몇 번 힌셔에게 방어법을 보여주듯이 어깨만 움직여 칼끝으로 공격을 쳐낸다. 그리고 빈틈이 보이자 몸을 옆면으로 틀어 기습을 가했다. 힌셔는 방어하며 몸을 뒤로 물리다가 스승의 손에 붙잡혀 구석으로 내던져졌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벽 잔해의 먼지 속에서 일어선 힌셔가 정면으로 치고 들어온다. 상대는 공격을 흘려내며 뒤로 물러서자 딱- 정확히 가늘어진 부분을 힌셔에게 가격당한 목도가 명징한 소리를 내며 부러진다. 스승은 그것에 눈길도 주지않은 채로 부러진 목도를 내던지고 바로 자세를 낮추더니 힌셔의 목도에 발차기를 날린다.

딱.



“새로운 단련을 시작할 거다. 힌셔.”

스승은 발치에서 목도를 퉁 차올려 잡고는 원래의 자리에 돌려 꽂는다. 그가 공중에 걸린 표적에 주먹을 대고 살짝 밀자 표적 뒷쪽의 시멘트 벽이 우그러 들며 표적이 밀린 방향으로 되팅겨나온다. 바닥에서 막 먼지를 뒤집어 쓰며 일어나던 힌셔가 입가에 흐른 신물을 닦으며 대꾸한다.

“이건 전에 하던 수련이 아닙니까?”

“너도 내가 쓰는 걸 몇 번 보았을 테지.”

힌셔는 고개를 끄덕인다. 스승이 맨손으로 격타 하는 상대에겐 둥근 섬화가 생기곤 했다.

“사실 그게 벽공 기초를 위한 단련이야.”

벽공.

와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그가 본 것은 500년 전의 기억이었다. 와론은 일어나 앉아 방금 본 장면을 상세히 되짚었다. 대강의 시범과 설명들을 바탕으로 얼추 재현할 수 있을 것 같다. 와론은 투구를 집어 들고 창문을 열어 뛰어 내렸다. 건물들은 새벽빛으로 푸르게 보인다. 힌셔는 통찰의 눈이라는 능력의 소유자라고 했던가. 그가 꿈에서 보는 장면들이 그 능력 중 하나 일까? 그래서 그는 일기를 짧게 적은 걸까? 와론은 그런 유추를 내놓기도 했으나 그가 보는 힌셔란 인물은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수련장에서는 퉁, 퉁, 하는 작은 충격음이 새벽공기를 식혔다.

세게 치는 게 아니야. 타격하는 게 아니라 뒤쪽으로 힘을 보낸다는 느낌으로!

힘은 대상을 벽에 밀어 붙일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 힘을 전부 벽으로 배분해서 싣는 거다.

“아~ 머리 아프네. 이거.”

씨익. 아무렴 하마턱의 소유자인 힌셔부터가 무기를 들고 싸우는데, 벽공은 분명 한 손으로도 걸 수 있도록 만들어 졌을 것이다. 와론은 새로운 훈련법이 성과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 후 몇 달치의 일기는 비슷한 내용이다. 내용없이 날짜만 적힌 날도 있다. 그러나 그것과 상관없이 와론은 하마의 사제가 수련하는 모습을 꿈 속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와론은 며칠 간 밤마다 힌셔의 바로 옆에서 듣는 듯이 수련을 설명하는 것을 유심히 듣고 그의 스승이 힌셔를 훈련시키는 광경들을 관찰했다. 낮 동안에는 더듬더듬 꿈에서 본 것들을 따라했다. 기억이 꽤 뚜렷하게 남았지만 머릿속에 있는 감각을 체현하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내가 전성기였을 때는 말이야-”

“스승님은 지금도 전성기잖아요.”

“투덜대지 마라 힌셔. 난 이제 할아버지라고.”


힌셔는 무엇을 가르쳐주던지 배우는 데 일주 이상이 걸리는 일이 없다. 스승은 그런 힌셔를 가르치는 것을 재미있어 했다. 그러나 기사가 으레 그러한 것에 비해 초자연적인 강함을 보여주는 건 아니었고, 다만 그 힘 하나는 타고난 듯 했으며 무엇을 시켜도 불평이나 예민함 없이 해내는 무뚝뚝한 구석이 있었다. 힌셔의 스승은 그것을 검이 어울리는 자질이라 평했다. 하나하나 손을 거치며 가르쳐주면 스스로 턱하니 터득해와 자신에게 내재된 무지막지한 힘을 함께 휘둘렀다. 그것은 어느날 부터인가 속도가 붙으며 날이 다르게 힘을 깨우치면서, 처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왜 싸웠는데. 힌셔?”

그러나 그런 힌셔도 의외의 곳에서 다쳐와 시무룩하곤 했다. 힌셔의 말을 들은 그의 스승 역시 적잖이 놀란 반응을 보인다. 

“녀석들이 저를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저 가만히 지나가는 길이었는데도.”

“그래서, 싸웠어?”

스승은 어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예. 자꾸 시비를 걸잖습니까. 그럼 참습니까?”

기사지망생들이 서로 치고 받는 일은 익히 있다고 해도, 힌셔가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듯 뒤엉켜 뒹군 건 충격이다. 힌셔는 활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훈련 시간 외에는 지나치게 해맑고 무방비한 데가 있다. 그가 싸울 때에 나서지 못할까봐 하는 걱정을 품었으나 괜한 것이었다.

 

낮 동안에는 벽을 일직선으로 파훼하여 땀을 내고 아침에는 같은 논리로 혹사당한 근육의 고통을 삭인다. 노을빛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를 물들이면 함께 가라앉아 밤이면 이제 익숙한 강을 건너듯이 준비를 하며 악몽에 빠져든다.

“헉,, 허억.....”

와론은 진원을 그리며 눈 앞에 부서진 벽을 보았다. 조각조각이 난 벽이 흘러내리고 먼지를 일으키고 거대한 암벽에 유성에 맞은 듯한 파문이 중심으로 부터 새겨졌다. 암석 중앙에 꽂힌 작은 표적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너덜댄다.

X. XX

스승님은 내가 기사가 되기 위해 태어났다고 했지만 그 말만은 갈 수록 더 모르겠다.

“나 때는 말이다 힌셔-”

“그때도 스승님이 짱이었다고요.”

할 말의 선수를 놓친 스승이 더 이상 속지 않는 힌셔를 서운한 표정으로 보았다.

“이거나 한번 해봐. 한번에 따라하면 오늘 수련 면제”

“네? 정말요?”

그즈음의 힌셔는 모든 기사들의 노력이 어이없이 느껴질 정도로 나날이 강해졌다.

말문이 막히는군. 그의 스승은 세상사에 부정적인 사건 사고가 아니라, 이렇게 순수한 놀라움을 느껴본지가 오래되었다.

X. XX

스승님의 단골 주점에 가는 길을 외웠다.

그의 스승은 과음을 좋아해 종종 만취한 상태로 들어오곤 한다. 사저의 일층이 흔들리고 있어 내려간 힌셔는 문을 열지 못하는 그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곧 2번지 정육점 주인이 기르는 러셀 테리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내버려두었다.

“힌셔?”

“…스승님.”

며칠이 지나자 절벽을 부수지 않고도 표적을 망가트릴 수 있게 되었다. 꿈 속의 벽공은 이미 현재 와론이 구사하는 단계를 뛰어넘어 나날이 완성된 형태를 그려내고 있었다. 일기를 읽어 갈 수록 꿈에서 힌셔의 기억을 보는 빈도는 줄어들고 내용은 길어져 갔다.

X. XX

“…그리고 난 잠시 자리를 비우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가 종종 길거리에서 싸움을 벌이거나 단골 주점에 틀어박혀 있느라 사저에서 사라지기는 했어도 예고를 하는 일은 한번도 없었기에 힌셔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기사가 무슨 일이겠어. 임무가 있거든.”

“예..?”

힌셔는 그의 스승의 실력과 수도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임무라고는 일절 맡은 적도 바쁜 적도 없는 스승을 보며, 그가 이미 은퇴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여러 번 해보았다. 한량하다, 외람되지만 그에게 적절한 표현이었다.

“다음 주에는 없을거야. 돌아올 때까지 열심히 하고 있어라,”

그는 제자를 보고 피식 웃으며 말한다. 흉진 얼굴에도 다정함을 띄는 미소다.

X. XX

기념품이라며 과자를 사오셨다. 스승님께선 나를 제자로 여기시는가? 어린아이로 보시는가?

1437. X. XX

스승님을 대신해 외상값을 치르고 서신을 부치고 오는 길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X. XX

답신: 정진해라. 제자야.

와론은 그 페이지의 왼쪽 하단에 지문이 남을 정도로 빠득히 구긴 자국이 남은 것을 보았다.

그는 편지를 대충 들쳐보다가 전보 하나가 끼인 것을 발견했다.

“서신? 힌셔가 말인가?”

그의 갑옷을 적신 피가 어느 때보다도 붉어 보인다. 젖은 손으로 무장을 풀던 힌셔의 스승은 전령이 가져 온 의외의 소식에 반색을 한다.

“무슨 사건이 생긴 게 아니라?”

일전에는 설마하니 힌셔가 수련하다 막히는 부분이 있어서 도움을 구한다는 생각치 못한 편지를 보내왔다. 그는 은근히 기대하며 웃는 낯으로 팔을 뻗어 편지를 받는다. 갈색 종이에 붉은 지문이 찍힌다.


스승님. 보내 주신 편지의 가르침은 잘 받았습니다. 다만 –


3번지 주점의 주인장인 말튼이 제게 연락을 보냈더군요. 스승님이 갚지 않은 외상이 한두 푼이 아니라더군요. 그리고 같은 말을 2번지에서 요리점을 운영하는 아네사도-

그래서 외상을 갚으라고 그들과 한바탕하게 되었습니다. 왜 얘기도 없이 가신 겁니까?

그리고 옥상에 숨겨두신 주류는 제가 찾았습니다. 좋은 술이라길래 아네사에게 주었으니 돌아오시면 그에게 가보십시오.

중간까지는 미소로 받은 서신을 읽던 그는 빨리 돌아오라는 애교 서린 편지가 아닌 그 내용을-논지는 비슷하지만-읽어갈수록 점차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지막 문단을 읽으며 이내 들고 있던 건틀렛을 저도 모르게 떨어트린다.

꿈 속의 힌셔가 벽공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와론은 조절한다면 작은 예비동작만으로도 접근전에서 벽공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벽공을 쓰는 상대와 싸울 때는 사방이 뚫린 곳에서 싸울 것. 벽이나 엄폐물을 등지지 말 것. 이것 외로도 상대의 무기나 아군이 벽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위치를 점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으로 벽공은 겪어본 것 만으로 상대에게 압박을 주어 전투시에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와론은 밤낮으로 쉬질 못했으나 수면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쳐서 쓰러지듯 누우면 반수면 상태로 내용 없는 악몽 속에서 서쪽다리와 5백년 전의 성벽을 헤매었다. 창문 밖에서 들리는 폭음에 벌떡 일어나 보면 와론은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드디어 잠이 오는 군. 그는 잠다운 잠이 절실했다. 벽공은 거의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으니, 무한정 써대기만 한 체력도 회복이 필요하다. 그리고 수련에 밀려 악마기사에 대한 조사는 멈춘지도 꽤 오래였다. 예상과는 달리 힌셔의 일기에 다른 기사의 얘기는 전연 없었다. 차라리 전쟁터 생활이 나았던가. 흐릿한 물 속으로 다이빙 하듯 풍덩 빠지는 기분을 느끼며 와론은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힌셔는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훈련복을 집어들어 입고 주머니에 손을 꽂고는 수련장으로 향했다. 정진하라니, 자신이 기사가 되는 것이 맞는 건가 의문이 떠돈다. 훈련의 힘든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자신에게 더욱 동요했다.



식탁에 앉은 그림자는 생각에 잠겨있다가 문득 그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는 인기척을 듣고 고개를 돌린다.

“스승님. 안 자고 뭐하십니까.”

힌셔는 스승을 보며 물었다. 그는 같은 날 낮에 수도로 돌아온 참이다.

“네 능력이 마음에 걸리는군. 사람의 의중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라.”

“태어날 때부터 그랬습니다.”

“…예를 들면?”

“스승님이 공격할 곳을 미리 알 수 있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적의를 가졌는 지도 가늠할 수 있습니다.”

“전투시엔 무엇보다 도움이 되겠네.”

그 정도 재능에 통찰 능력까지 있다라.. 스승은 속으로 곱씹는다. 힌셔의 수준은 현재도 수도의 왠만한 기사들을 뛰어 넘었다. 계산과 예상의 범주를 뛰어 넘는 천재. 그러나 오만하지 않은 것을 지나 자각 자체가 부족하다.

“지금은?”

그는 별다른 변화 없이 읽어 보라는 양 힌셔의 눈을 바라보았다.

“…잘 안 읽히는 날도 있습니다. 질문하시는 의중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렇군..”

“같은 사람일지라도 때에 따라 사악하기도 하고 선한 의중을 품기도 합니다.. 수도의 기사들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들에 관해서-”

어두운 낯빛으로 힌셔가 주저하듯 말한다. 작고 차분한 톤이었으나 그는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힌셔는 쉬이 확신하지 못했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중함이라 부를 지도 몰랐으나 그의 본래 성격과 거리가 먼 얘기다.

“네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읽었는지 대충 알 것도 같군.”

“기사란 무언가 달라야 합니까 스승님? 기사들은 영웅이 맞는 건가요?”

“글쎄.”

스승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통찰의 눈이 없어도 네게선 보이는 것들이 있지. 힌셔. 수많은 기사들을 봐왔지만 넌 누구와도 달라. 너로 인해 기사들은 바뀌게 될 거다. 개개인의 무력도, 기사라는 존재들도.”

“….”

힌셔의 얼굴에는 한층 더 그늘이 드리웠다.

“시험을 앞두고 긴장되나 보구나. 그들에겐 굳이 휩쓸리려 하지 않아도 돼. 그 힘이 네게 독이 되지 않게 해라. 힌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돌아갔다. 압도적인 강함. 힌셔가 스승의 눈에서 읽어낸 의중이다. 강철 같은 견고함… 제멋대로에 잠재적인 위험으로 여기는 세간의 평과 달리 스승은 불안정한 기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기사들의 기준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기사들이 받아들이기는 너무 이른지도 모르겠으나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 스승이 영웅인가에 대한 문제는 별개였다…. 힌셔는 세간 사람들보다도 더 정확하게 그를 보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의 내면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그들을 불신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 때다.



힌셔는 스승이 가는 주점의 주인들과도, 사저 주변의 주민들과도 가깝게 지냈지만 기사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대련을 주선해줄까?”

“네?”

“네가 원한다면 할 수 있어.”

힌셔는 루놀의 눈에 비친 지독한 적대감을 떠올려 낸다. 싸움이란 모두 그런 것인가. 상대를 이기려고 피와 적의를 뒤집어 쓰는…

“됐습니다.”

“뭐. 너랑 대등하게 겨룰 녀석이 없다는 것도 문제지.”

또 수련을 보내야 하나… 던진 목도를 받아들고 고민하는 이에게서 힌셔는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견습 시절 다짜고짜 수련이라며 남부를 뺑이 쳤던 석달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그 시절 혹독하게 굴던 스승과의 수련이 결코 더 나았다고 할 수도 없다.

“너나 나나 다른 녀석들로는 몸을 풀 수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 정도로 차이가 납니까?”

힌셔는 진지하게 물었다.

“나도 대련 상대가 없어 고생하던 시절이 있었지~.”

“스승님을 가르친 건 누굽니까?”

“사범님이 계셨지만 별로 강한 분은 아니셨어. 오히려 무력 자체는 평균보다 약한 편이셨고. 난 타고난 편이었지.”

“그럼 결국 누구와 싸우셨습니까?”

그는 말없이 눈으로 웃으며 힌셔의 머리를 헤집는다.

“다 쉬었나봐?”

힌셔는 그를 따라 옆의 목도를 쥐고 일어섰다. 그 말의 대답은 곧 하루가 멀다하고 들리는 풍문에서 알 수 있었다. 그 후 힌셔는 그에게 끌려 왕성의 수련장을 몇 번 드나들었으나 스승의 말한 바에서 크게 어긋나는 건 없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잠에서 깨어난 와론의 옆 얼굴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린다. 복사점에서 뻗어나온 의문들이 서서히 혼란을 가중시켜 가며 어떤 사실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칠감이 벗겨져 여기저기 나뭇결이 드러난 상자들. 이제까지 겉돌던 내용들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피가 드나들때마다 심방과 심실이 달궈진 쇠를 연마하듯이 맥동이를 일으킨다. 거미. 당대 최강의 기사.

힌셔의 스승이 악마기사였다.

악마기사. 그는 왜 악마가 되었을까?

5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의 전말은 무엇이었을까?

와론은 그들에 대해서 그동안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힌셔의 기억에서 악마기사를 찾을 수 없었던 것도 일견 당연했다.

“네가 잘못 본 거 겠지.”

“아냐, 이래봬도 황제인걸.”

그는 턱을 괴며 거미를 쳐다보았다. 여유롭고 느긋한 표정이었으나 그들은 최근 왕국의 수상한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기사 시험이 끝나고 나서 몇몇 영주는 의원을 통해 거미마저 견제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세를 불린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사람 하나는 잘 본다고ㅡ 알잖아.”

“내 제자도 똑같은가 보더라고.”

“음?”

거미가 의자 등받이로 등을 기대며 끼익 거린다. 황제라면 그와는 다른 무엇이라도 알지 않을까 해서였다.

“특이한 능력이 있던데. 들어본 적있나?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

“아하, 그러고 보니 간혹 그런 능력이 있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통찰의 눈이던가. 그렇게 불렸던 것 같아."

황제는 궁금증을 띄운 얼굴로 곰곰히 생각했다.

“아마 생각을 읽지는 못할 거야…."

악마기사는 과연 아무 이유 없이 학살을 자행한 것일까? 의문은 도식처럼 떠올라 그를 사로잡았다.

이게 맞나? 이제라도 멈출까?

와론은 그들의 꿈을 보며 계속 의문해왔다.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을 건드리는 기분이 들었다. 일기는 어디에도 힌셔의 스승이 거미라는 단서는 없다. 힌셔의 수련을 들여다 볼 필요가 없게 된 이후로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일상적인 내용 투성이다. 꿈은 너무나 선명했지만, 그것이 실제 5백년 전의 일이라는 것은 근거 없는 와론의 생각이다. 이 모든 것이 망상인가. 그러기에 벽공을 깨우친 것은 진짜였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는 거지. 몇 번이나 다시 읽은 일기가 베개 위에 무심히 펼쳐져 있다. 그것만은 망상이 아니다.    

그는 공상의 전철을 밟으며 밤을 새우면서, 새벽이 다가올 때까지 두 손을 맞댄 채로 깨어있었다. 아침이 되어 바깥의 햇살이 희다 못해 눈부시다. 와론은 창문으로 네모나게 들어오는 직사광에 눈살을 구긴다. 한 손으로 대강 차양을 만들어 내고서 밖을 보았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창 밖의 풍경은 익숙해지지 않고 생소하다. 수도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거미가 창턱에 턱을 괴고 꾸벅거리고 있다. 감긴 눈과 창문 너머로 햇살이 깊게 비쳐들었다. 힌셔는 수건에 땀을 닦다 말고 거미에게 다가와 그를 흔들어 깨운다.

“또 오침에 드셨습니까, 스승님.”

“아-. 힌셔,”

“수련 시간 입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십시오.”

“….”

힌셔는 또 다시 눈을 감으려는 거미를 쥐고 흔든다.

“이제 그만 깨어나십시오. 어제 또 과음하셨군요.

스승님-”

그 말은 어떤 말보다 잔인하게 와 박히는 말이다.

와론은 강인하게 팔을 쥐고 흔드는 감촉을 느끼며 서서히 눈꺼풀을 들어올린다. 자신은 오래 잠에 들었는지 나무틈으로 들어오는 그림자가 진하다. 해가 중천을 넘어 나아가고 있다. 오래된 거목의 감촉에 등이 배겼다.

그래봤자 다 부질없다. 와론이 이곳에서 아무리 그를 이해하고 그의 흔적을 캐내려 과거를 되짚어도, 거미가 와론이라는 사람을 아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대로 박제되어 와론이 현재를 아무리 바꾸어도 그는 그 모습 그대로 남는다. 이미 몇 백년 전 죽어 묻힌 이를 쫒는다는 건 그런 거였다. 생명을 사랑하지 않고, 잊혀진 그들의 정의를 사랑한 죄. 자기 것이 아닌 이상을 탐낸 죄. 시간이란건 무슨 수를 써도 번복할 수 없는 종류 중에 하나였다. 때에 늦은 와론은 그 대가와 속죄를 그들 사제의 몫까지 시달리고 있었고, 여전히 전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에게 거미를 투영하며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매달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에게서 자신이 잃어버린 정의를 대신 찾고 싶었을 뿐이다. 설령 그 자신을 지울 지라도 말이다.

1437.X.XX

그노제스가 나를 만나러 왔다.

그노제스가 습관적으로 손을 움직이자 힌셔는 시선이 향한 대장장이의 손을 쥐고 살핀다.

“손이 거칠군. 화상이 많고.”

힌셔는 그의 손을 얼굴 앞으로 가져가 코를 킁킁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은은한 기름 냄새와 연마를 끝낸 쇠의 냄새. 그러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노제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불을 다루는 직업이니까요.”

어딘가 난처한 기색을 띄면서도 상냥하게 웃는 그의 귀가 달아있었다.

“…실례했군.”

“괜찮아요.”

힌셔가 손을 놓아주자 그는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입매가 그리는 곡선이 말할 수 없이 다정해 힌셔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쵹, 가볍게 입을 맞추는 소리가 울린다. 누구도 그노제스 같이 웃을 수는 없으리라.

“가끔 네가 부럽군. 난 기사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소.”

그는 힌셔의 진지한 안색을 들여다 본다. 고민에 잠긴 얼굴이다.

“미안하오. 쉽게 이런 말을…”

“아니에요. 실은 힌셔. 나도 고민이 있어요.”

그노제스는 웃음을 지어보인다.

당신이 연약해서, 마음이 여려서 걱정이야. 그게 당신의 올바름을 퇴색시킬까봐. 힌셔는 얼굴 여기저기에 늘상 반창고를 달고 살았지만 최근에는 그 수가 더 늘었다.

“요새 많이 말랐어요. 힌셔. 그래서 당신이 걱정돼요.

한번 놀러 올래요? 내가 일하는 곳.”

“일터인데 가도 되는 거요? 어디에 있소?”

힌셔는 일전에 그가 선물했던 작고 훌륭한 장치가 안겼던 놀라움을 떠올리고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노제스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3번지에 있는 공방이에요.”

해맑은 시야로 침구의 윤곽이 흐릿하게 번진다. 밤을 새우다시피한 그는 아침잠에 정신을 못 차렸지만 눈을 감아도 쉬지 못하고 악몽이 계속 된다. 잠이든지 얼마 안되어 깨어난 그는 비쳐드는 채광에 앓는 소리를 낸다. 어젯밤에 드디어 그 멍청한 일기에 진전이 있었던 것이다. 와론은 고개를 비틀며 옆에 놓인 협탁을 향한다. 각막이 초점을 잡으며 또렷한 물체의 윤곽을 만들어낸다.

그노제스.

와론은 그 상징이 새겨진 완갑의 밑면에 시야를 고정한다.

날튼은 예로부터 대장간으로 유명하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무기를 전문으로 다루는 대장장이들의 심장과도 같은 지역으로, 무예를 익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 무기를 쥐어보기를 갈망하는 그노제스 대장간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전란의 시대에 더더욱 혼란했던 지역에서 그노제스는 남부의 무기창고가 되어 더욱 발전했다. 초대 그노제스가 이곳에 터를 잡았으며 이후 몇 대가 이어지는 동안 그 장비와 규모를 늘려나갔고, 지금까지도 제국 최고의 무기공방으로서 그 풀무질과 용광로는 몇 백년 동안 불을 꺼트리는 일 없이 달구어진다. 근처에 안치된 1대 그노제스의 묘는 물론이며 그의 광염같은 정신을 이어받아 광산의 골육에서 캐어낸 쇳덩이에 날카로움을 불어넣는다. 요컨대 날튼의 그노제스 대장간은 전쟁고아들의 구명을 위해 제국 곳곳에 퍼져나간 그노제스의 장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대장간들의 본점이 되시겠다.

그러나 날튼의 공방은 1호점은 아니다.

최초의 그노제스 대장간은, 대장간이라 부르기도 무색한 니젤에 위치한 조그만 공방이다. 오가는 이들이 들어서보지 않는 한 무기에 관심이 없는 수도민들은 매일 그 앞을 지나쳐 가곤 한다. 그럼에도 채화한 이래 수백년을 타오른 불꽃은, 만년설과 같이 영구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어졌다.

그리고 그곳은 와론의 단골이기도 했다.

마침 서쪽 다리에 다녀온 뒤로 무구를 정비할 때가 되었다. 아침 수도의 거리를 걷는 와론에게서 팔에 찬 무쇠 완갑의 자잘한 결함이 도드라진다.

달그랑- 판상의 철조각들이 서로 부딪혀 금속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외부로 나있는 입구는 작아도, 안쪽에 석벽 구조의 넓은 작업실이라 불리는 공간이 펼쳐져 있다. 와론이 이러한 내막을 아는 것도 그의 무구 일체를 관리해주는 곳이 그노제스의 공방이어서다. 공방 안으로 들어서자 도제들이 그노제스를 찾는다. 그노제스의 도제들은 언제나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론은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들른 공방 안을 자리에 서서 둘러본다.

사실은, 당신을 위한 무기를 만들고 있어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머릿 속에서 자동으로 들어본 적 있는 부드러운 저음이 재생된다.

강철을 두들겨 모양을 내는 맑은 소음과 숫돌에 표면을 연마하는 거친 소리가 들려온다. 안쪽에선 마감 작업을 하는지 독한 광택재의 냄새가 풍겨온다. 와론은 구석에서 나오는 장인에게 인사했다.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그는 그가 처음 그노제스에 찾아왔을 때에도 장인이었다.

“와론님. 오랜만에 오셨군요.”

“그래. 별 일 없었나. 그노제스? 수도가 조용했던 모양인데 한동안 쉬느라 손이 근질거렸을 테지. 자네가 심심해 할까봐 일거리를 가져왔지.”

장인은 그가 담아 온 투구에 남은 흠집들을 조명 아래 비추어보며 찬찬히 살폈다. 쇠로 만든 투구가 일그러진 흔적과 생채기에서 더러는 섬뜩한 기운이 들어 그노제스는 잠시 심각하게 그 주인의 생명과 무사를 염려한다.

“…이거야. 투구가 이런 꼴인데 그 안이 용케 멀쩡하십니다.”

“멀쩡하다고 누가 그러나-”

그는 노고의 제스처를 취하는 와론을 내버려 둔 채 다른 무구들을 옮겨 든다.

“며칠 걸립니다만.”

“이번엔 안 돼. 급한 일이 있거든.”

“거래처에도 사정이란게 있습니다만.”

“그 사정이란거 미뤄주길 바라네. 기사 고객을 잃고 싶지 않으면.”

갑질- 뒤에서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와론은 못 들은 척한다.

“아, 그렇지. 1대 그노제스에 대해 뭐 아는 거 없나?”

와론은 건틀렛은 쓰지 않는다. 손의 감각이 무뎌진다나 뭐라나. 그렇다고 그가 맨손 격투를 즐기는 것도 아니었고, 창병이라고 하기엔 본인이 부정한다. 다만 언제나 바닥면이 살짝 닳아있는 검은 반장갑을 끼고 손가락 끝을 무디게 하는 굳은 살을 가끔 단도로 정돈했다. 

반장갑을 벗겨낸 그의 손은 흉터가 그득해 그 역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와론은 손의 살갗을 갈가리 찢어놓은 흉터들을 아무렇지 않게 보며 장갑을 벗어 넘긴다.

“치수. 잴 건가?”

“네네, 지금 재겠습니다.”

한 직공이 와론에게 가게 구석에 있던 검은 사각 봉투를 건네자 와론은 그것을 뒤집어 쓰고 방 안으로 들어간다. 한 직공이 눈을 가리고 들어와 봉투를 벗겨내고 그의 머리 사이즈를 재고, 그 후로는 다시 얼굴을 가린 채로 문을 열어주자 다른 직공들이 팔다리를 측장한다. 문간에서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노제스가 말을 뗀다.

“사실 이번에 저희 쪽 장인 하나가 파견을 나갔는데요.”

“근데?”

“말이 출장이지 납치나 다름 없거든요. 몇 달 전에 이상한 자들 몇몇이 공방을 다녀갔지 뭡니까. 와론님처럼 얼굴을 가리고서요.”

비유에 담긴 고의를 와론은 무시했다. 말투에 비해 내용이 가볍지 않아서다.

“그들이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맡기고 싶은 의뢰가 있다고 했어요.”

그노제스의 목소리가 약간은 진지하게 깔렸다.

“그로부터 한 주 뒤에 다시 방문했길래 장인 하나를 붙여줬습니다만,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고 연락만 보내오는데 보아하니 갇힌 것 같아요. 서신에 직접 적혀있지는 않지만 아마…”

초대 그노제스. 그리고 그 공방에서 일하는 장인.

와론의 머릿속으로 마스터피스와 하마의 실종까지 일련의 사건이 빠르게 선회하고 가라앉았다. 장인은 무기를 쓰는 자들을 어떻게 구슬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데려올게. 투구. 하루면 되지?”

“네네. 빠진 장인의 몫까지 대신 해보죠.”

그노제스는 직접 안 쪽의 서고로 그를 안내해 초대에 관련된 자료들을 꺼내주었다. 보통 사람이 읽을 수 없는 대장장이들의 언어로 쓰인 탓에 와론은 내내 도제 아이 하나를 붙들어 옆에 앉히고 자료를 소리내어 읽게 한다.

“그건 직접 만든 건가? 좋은 철이군.”

“사람을 사귀는데에 서툴다니까~ 와론씨도.”

장인들은 작업장에서 마광 작업을 반복하며 창 너머로 검은 박스를 뒤집어 쓰고 아이에게 말을 거는 와론을 보며 소근거린다. 지금껏 들어본 것 중 가장 얌전한 말투다. 와론은 중장갑을 적절히 배합한 무장을 선호한다. 창을 사용하며 권- 무투술을 주로 사용하는 그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그노제스 대장간에서는 와론의 장비에 언제나 각종 보호구와 새로운 기능을 붙여주고 싶어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노제스 공방에서 만든 전신갑주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노제스의 장인정신이란. 한가할 때 그것을 구경해본 와론도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이 사라지고, 이제는 아무도 실제로 착용하지 않는 갑주는 대장장이들의 손 안에서 더욱 발전과 개조를 거듭하고 있었다. 와론은 무기를 좋아하고, 이런 대장간에 오면 가끔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을 아는 직공들은 짐짓 묵묵한 척 갑주에 빠져들어 있는 와론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와론은 갑옷을 입히기 좋은 체형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는 몇 번인가는 대장장이들의 놀이에 어울려 무기의 시연을 맡아주거나 시착용을 하곤 했다. 공수로 뛰어난 와론은 갑옷사들에게는 인형이, 무기제조가들에게는 다양한 무기의 성능을 테스트 하는 무기 거치대가 되어주는 것이다. 오늘 같이 다른 볼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도 가끔은 붙잡혀 주는 일을 즐겼다.

“론누…!”

와론은 문득 들려오는 단어에 자료를 보다 말고 눈을 감아 확인한다. 작업장 벽에 기대 세워둔 론누에 장인이며 도제며 할 것 없이 공방사람들이 몰려들어 있다.

“조금 긁어낼 수 있으려나?”

“미친. 넌 나린기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도 모르냐? 나중에 얘한테 꿰어 죽을 걸?”

“할 수 있으면 대륙 최초인데.”

옆에서 다른 직공이 넋이 나간 소리로 말한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몇 도까지 견디나 실험이나 해보자.”

“강도 테스트도 좋은 핑계지. 와론씨도 허락할 걸.”

“세계 최초…”

“그리고 네가 담궈지겠지. 철의 장인이 어디까지 견디나 궁금하다고 말이야.”

낄낄 거리는 장인들의 웃음이 활기차다.

무기를 만드는 장인의 삶이란 위대한 시. 발산하고픈 철의 광기를 이해하는 자들이었다. 론누와 교감에 성공했을 때 와론은 직감했다. 나린기는 살육을 위해 내려진 운명이리라. 론누가 생명력으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설령 원래의 목적은 달랐다고 해도 수없는 기사의 피를 먹어 흉측한 괴물이 되었다. 그러나 장인들은 론누를 좋아하고, 그 창끝이 이로운 일을 한다고 말한다. 와론뿐만 아니라 그들도 나린기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와론은 그노제스의 공방을 좋아했다.

자료 뭉치의 틈에서 시간을 보내던 와론은 해가 저물 때 즈음 밖으로 나왔다. 그의 주의를 끌기 위해 단단한 신형 견갑이나 보호대를 보여주며 안간힘을 다하는 장인들을 있는 힘을 다해 무시하며 그노제스에게 다가간다.

“이봐. 500년어치 치고는 양이 적은걸. 외주기록은 다른 곳에 있나?”

“이곳에 전부 보관되어 있지는 않죠. 수도 외곽에 기록실이라는 창고가 있습니다.”

“설계도는 남아있나?”

“그런 건 다 날튼에 갔죠. 거기 없는 건 외곽 창고에 있고요. 여기엔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만 있어요.”

하마턱의 이야기였다. 와론은 그곳에 들러 남은 기록을 조사하고 싶었지만 그건 장인을 추적하고 나서 해도 될 일이다. 손질이 끝난 투구에서 은은한 윤광이 돌고 그노제스는 손수 투구깃을 달아내 세심하게 술을 정리한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군. 그노제스. 왜 바로 달려오지 않았지?”

“매번 오시는 걸 아는 걸요. 지금 받은 편지를 추적하러 갔으니 곧 위치를 알려드릴 게요.”

“난 수도를 떠난 다니까. 하마턱을 먼저 추적하러 갈거야.”

“급한 일이 있으시다면서요?”

“우연히도 겹치는 군.”

“어디로 가시게요?”

“날튼.”

와론은 그곳에서 부터 하마를 추적해볼 생각이었다. 그노제스는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하마턱을 찾으면 돌려주셔야 합니다. 힌셔가 없다면 그건 그노제스에게 속한 작품이니까요.”

“일단 찾고 나서.”

“론누도 있지 않습니까.”

그노제스가 진심으로 투덜댄다.

“그럼.”

와론은 투구를 까딱이며 공방의 대문을 밀었다. 1대 그노제스와 관련된 전설 속의 마스터피스. 정식으로 기사를 요청하지 않은 건 외부에 일이 새어나가는 걸 숨긴 것이다. 행여 하마턱에 대한 말이 돌까봐. 와론은 그 눈 밑에서 용광로 같은 화광과 집념을 통찰해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젠 보물찾기까지 하게 생겼군.

그는 장인들이야 말로 때로 기사들보다 명예롭다는 생각을 했다.

그 후로 힌셔는 그노제스 공방에 자주 들렸던 것 같다. 두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붙어 지냈다.

“스승님, 왜 이런 걸 드시는 겁니까. 달기만 하고 별 맛도 없는데요.”

“으잉.”

흰 아몬드 가루를 잔뜩 입히고 형형의 색이 도는 크림을 얹은 과자를 베어물던 거미가 한 대 맞은 듯한 표정으로 힌셔를 바라본다.

“힌셔, 단 맛을 싫어 하나?”

“별로요.

이런 건 애들이나 먹는 거잖습, 그만 드십시오.”

단 것을 좋아하는 자를 보면 어렸을 때 먹어본 기억이 있어서다. 어쩐지 어렸을 때부터 우직했을 것 같은 힌셔도 간식 시간만큼은 좋아할 줄 알았건던 자신의 섣부른 추측이었나 보다. “이빨 썩습니다, 그리고 영양가도 없고요,” 옆에서 만류하는 힌셔를 보며 거미는 상념에 빠진다.

“썩지 않는 건 오히려 병의 원인이 된다 힌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랍니까.”

힌셔는 한숨을 쉬며 과자 박스의 뚜껑을 덮어버린다.

탁.


그러나 다음 번 그노제스 대장간에 갈 때 슬그머니 과자가게에서 나오는 힌셔와 마주친 거미는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와론은 가판에 널린 설탕과자를 보며 그가 보았던 한 장면을 떠올린다. 한 봉지를 사들고 나온 와론은 설탕을 처음 먹었을 때 느꼈던 충격을 다시 겪어야만 했다.

“웩, 달아,”

와론은 나무 그늘 사이에 숨어 앉아 과자 하나를 한참 입 안에서 녹여냈다. 먹다보니 왜 사람들이 이런 단 것을 좋아하는 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의외로 그의 입맛에 맞는다.

“맛은 나쁘지 않군.”

아이들이 좋아할 것 같은 맛이라 나중에 공방에 들려 전해주고 가야겠다. 애들은 애들과 놀 때 제일 재밌다는 말처럼 아이는 그를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간식거리는 좋아할 것이다. 와론은 자신이 애 같다는 말은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식에 나이는 중요치 않다는 것은 또한 와론의 지론이다.

X. XX

“나는 사람들의 내면을 읽을 수 있소. 정확히는 그 내면에 의지를 읽소. 그대들을 속이고 싶은 마음은 없고 다른 곳에 악용하거나 말할 생각도 없소. 하지만 굳이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자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아도 괜찮소.”

기사가 되고 나서 힌셔는 결국 기사들에게 통찰의 눈을 공개했다.


“거미, 설마…?”

“동부를 쓸어 버리고 왔지.”

헹, 입매를 씨익 올리며 방 안으로 여유롭게 붉은 동색의 갑옷을 입은 거미가 들어선다.  

“아주 기겁을 했겠는데, 그 녀석들. 그렇게 앞뒤를 재지도 않고 입안을 통과 시키겠다고 뻐길 때부터 알아봤지.”

“하하하”

“흰머리 늑대 녀석과 결투를 벌였나? 혼자 동부를 맡았다고 뭐라도 된 줄 알더니.”

“그 자는 늙어빠져서 싸우지도 못해. 결투는 무슨. 분명 뒤로 숨었겠지.”

“어. 아주 군대 앞에서 망신살 뻗치는 줄도 모르더라.”

군단도 홀로 상대하는 기사. 거미가 있는 대륙에서 조직화 된 군대란 학살의 기회를 제공하는 전략에 불과했다.

“하,”

그는 양 무릎에 걸린 갑옷 노름쇠를 풀고는 의자에 편한 자세로 나 앉는다. 하완갑의 끈을 풀며 거미는 흥분한 기사들의 반응을 여유로운 얼굴로 대꾸해준다.

“그래도 동부는 겉멋만 든 쓰레기들이지. 금이나 캐느라 별로 전쟁을 치러본 적도 없고. 흰머리 늑대는 아마 시체를 짊어져본 적도 없을 걸.”

누황빛 큰뿔양의 발언에 화기애애하던 방 안이 훅하고 가라 앉는다.

“난 동부를 처리하는 거야 금세 끝내겠지만 황제에게 가서 개처럼 알랑거리는 일은 못하겠거든.”

“그렇게 우습다면야.”

거미는 별 반응 없이 받아넘겼다. 그러나 곧이어 표정을 바꾸어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기사들을 돌아본다.

“다음엔 어떤 머저리가 동부에 배속될까? 아마 황제에게 가서 알랑거리면 수도에서 바닥이나 뒤지는 개새끼한테도 뭔가 줄지도 모르지.”

“궁정바닥을 하도 핥아서 그런가, 혓바닥이 더럽군…”

“그래,”

거미가 그의 낯에 침을 탁 뱉는다.

“그 혓바닥도 말라서 헥헥 대는 게 없는 편이 낫겠군.”

“어어, 거미가 또 한 판 뜬다,”

“진정해,”

“다들 따라나와!”

“아오 저 간 큰 새끼,”

우르르 그 사이에 사저 마당으로 몰려가는 기사들을 힌셔는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돌아오시면 자중하시지 않고서. 오시자마자 또 저러시는 군.

하아, 힌셔는 두통이 밀려와 점차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저관의 뒷문을 빠져나갔다.

“어디 니가 동부로 가고 싶으면 내가 동부를 이기고 왔으니 날 처바르면 되겠네.”

“그 따위로 다 잘났다는 듯이 지껄이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거미.”

결국 질게 뻔한데 왜 매번 덤비는 걸까. 기사들도. 스승님도 결과가 뻔한 시비를 매번 받아주시는 군. 차라리 무시하는 것이 명예로운 일일 텐데.



“헹,”

챙그랑- 뒤로 크게 날아간 장검이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고 거미는 가슴을 관통하기 직전에 한치 앞에서 창을 멈추었다. 강자 큰뿔양에게는 더 없는 굴욕이다.

“네 녀석이 입으로 나발나발 떠들고 싶은 것도 이해한다. 그래야 그걸 듣고 다들 기사가 대단한 줄 알지.”

젠장, 양은 거미가 창도 홱 치우고 나서야 고개를 돌려 저잣거리로 사라진다.

“꼭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다니. 거미도 성격 한번 더럽군.”

“야야, 됐으니까, 한 잔 하러 갑세.”

거미가 원을 그리고 선 기사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그들을 보며 말한다.

“니네들도 말이다.

기사라면 영웅담 같은 걸 주워듣기 보다는 가서 전투라도 하고 오라고.”

기사들의 표정이 굳어지며 일순 싸한 공기가 감돌았다. 거미도 도발을 응수하는 듯이 냉랭한 얼굴로 시선을 받았다. 서서히 솟구치는 살기로 주변의 공기가 따끔해지기 시작했다.

“이따위 실력으로 기사를 자처하려거든 황제를 빨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될 거 아닌가? 니들 같은 거랑 같이 기사를 달다니 정말 기가 차는 군.”

웃음기를 거둔 거미가 눈썹을 치켜뜨며 되묻는다. 위협적으로 잡은 창을 등 뒤로 보낸 자세 그대로 그는 깔아보듯이, 거슬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 말은…”

작은 웅성거림이 퍼져나가며 기사들이 적대적인 투로 서로에게 속삭인다.

“사실인가? 거미가 사실 황제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말. 실제로 황제가 총애하는 것 치고는 받은 게 별로 없잖아. 수도에 있을 때 보면.”

“아, 자네 정신 나갔구만. 쟤가 받은 게 없기는 왜 없어? 그리고 기사가 기사 할 일만 하면 되지. 뭐 영주 작위라도 바란다는 말인가?”

“기사가 뭐 돼나? 순진해 빠져가지고. 또 모르지. 영주는 줬어도 제 그릇에 작다고 내던졌을지.”

“사실 왕이 되고 싶은데 황제에게 계속 거절 당한 거 아냐?”

“왕?”

술렁대며 여러쌍의 눈이 짧은 순간 자신에게 머무르는 것을 느낀 거미는 경계를 세우듯이 콧대를 찡그린다. 그러나 거미를 포함한 누구도 크게 움직이지 않는다. 하나 둘씩 뒷편으로 물러서 자리를 피하는 이들도 있다.

“돌아가세. 거미도 쉬고 싶은가 보군.”

한 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고 기사들은 혼란스러움과 살벌함을 띄우며 정원을 빠져나갔다. 거미는 냉랭한 표정으로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본다. 왕. 권력을 가진 기사. 그 단어는 거미와 기사들의 사이를 극단적으로 몰아가는 추진제와 같았지만 어쨌거나 근본적인 책임은 거미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셈으로 여겨졌다.



“힌셔… 힌셔! 수련 하랬더니 얘는 어딜 갔어.”

거미가 그를 찾는 소리를 들으며 힌셔는 그가 지나간 곳을 피해 슬그머니 앉아있던 풀숲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

기사를 관두시는 겁니까 스승님?”

“기사들에게 이 정도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기사의 맹세란 받은 사람이 그만하라 할 때까지는 멈출 수도 없는 법이고.”

힌셔는 처음 거미를 만날 적에 그가 드물게 다치고 들어왔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그때 거미가 은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모여 네게는 경험이 될 거다. 하나씩 쌓여서 말이다. 너는 너무 강해지는 걸 꺼리고 감추려 하지. 그럴 필요 없어.”

그는 힌셔를 내려다 보며 말하곤 했다. 그의 웃음에는 언제나 이해 어린 다정이 녹아있었다.



어수선한 법정 안으로 드문드문 발언이 울려퍼진다.

“기사가 와해되는 순간 제국은 무너지고 대륙은 전쟁에 휘말린다. 그리고 명예가 훼손되면 기사는 무너질 것이오.”

“기사들이 명예를 어기리라고 확신하나?”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힘을 가졌어.”

당대에는 어떨지 몰라도 과한 압력이 발생하면 반드시 주변으로 터져나갈 것이다. 그게 당장이던, 몇 년 후던, 한 세기 뒤의 일이던 역사가 증명하는 명제였다. 냉기가 물결처럼 들썩이며 회의장 내로 퍼져나간다.

황제의 자안이 차가운 빛을 띄며 공기마저 가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거미. 그대의 생각은 어때.”



거미는 회의 내내 팔짱을 낀 채로 그 한번 이외에는 발언하지 않고 다만 언쟁들을 듣기만 했다. 그들은 이제 강당을 빠져나와 걷고 있었다.

“참 답답하군.”

“…뭐?”

거미는 몇시간 만에 입을 떼었다. 참을성 있게 자리를 지키던 친구의 입에서 나온 말이 의외여서 였다.

“아니 제후들 말일세. 좀처럼 내 손이 닿지 못 하고 있어.”

거미는 회의에서 유독 기고만장하던 몇몇 왕국의 영주들을 떠올린다. 그는 날튼 국왕의 대리로 참석한 자를 떠올리며 가벼운 톤으로 긍정했다.

“수도에서 기사를 보내주는 것도 한계가 있는 일이지. 기사들을 꼬드겨 유혹하니 말이야. 그들도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야."

"너도 그들과 같나. 거미?”

그는 친근감과 우애의 눈으로 오랜 친우를 바라본다. 그러나 어떤 대답보다도 황제는 오로지 솔직함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아닌 기사로써의 그의 답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네게 충성을 맹세해. ooo. 그건 내가 기사가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함없고.”

“이런, 거미. 기사는 사실 한 사람에게 충성을 바쳐서는 안돼. 너는 군인이 아니잖아? 맹세는 명령도 아니야.”

황제는 너털한 표정으로 우스운 듯 그의 대답을 받는다.

“내가 기사이기 때문에 내 맹세는 무거운 법이지.”

그는 황제를 보며 씨익 웃는다. 얼굴의 흉터가 없었던 시절의 미소다.

“그럼 친우로서는 어찌 생각하나.”

“네 생각은 어떤데.”

거미는 황제에게 되물었다. 그는 단호함이 서린 얼굴로 말한다.

“기사를 제국에 기반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야 해.”



거미는 살면서 자신 같은 존재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 저는 과연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사실상 괴물이 아닌가.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니 누가 그의 지킴을 받으며, 곁에 머무르려 하겠는가. 시선은 소매 속의 날카로운 암기 같이 등 뒤로 꽂히며 말한다. 거미도 한때는 자신이 사람은 맞는가 의심했으나 황제를 만나고 그 역시 인간이란 걸 곧 깨달았고, 힌셔는 거미가 독보적인 존재도 아니란 걸 깨우치는 제자였다. 그러나 그들 같은 기사가 늘어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면한 왕국들 보다도, 머잖아 더 큰 위험이 되어 다가올 것이다. 어쩌면 그것을 기사들 스스로도 거미를 보고 깨달아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저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하면 됩니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나를 두려워하니까. 알잖아.”

기사들은 거미를 싫어함으로서 두려움을 감추었다. 황제는 그를 만류하는 안색을 띄었다.

“자네가 그들의 사령관이라도 되어서 기사를 복종시키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거미? 오만하기 짝이 없군.”

수염을 기른 나이 든 의원 한 명이 여우 같은 눈을 번뜩인다. 그는 황제가 유일하게 총애해 거미와의 삼자대면에 불러내는 원로의원이다. 그는 노기 어린 목소리로 지적한다.

“자네가 피운 난동이 절반만 되었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걸세.”

“황제가 당신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그 낯짝을 갈아 버렸을 텐데.”

거미가 위협적인 살기를 번뜩 내보인다. 황제가 둘의 중재에 나선다.

“그러면?”

“반역을 일으킬게. 너에 대한.”

그 말에 다른 둘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나를 죽이려고? 네가…?”

“폐하께서 새겨 준 상처가 아픈 줄도 모르는 군. 저놈은.”

의원은 비소를 지으며 궁시렁 거렸고 황제는 어이 없는 빈 웃음을 짓는다.


“하하. 그건 불가능하잖아. 너는 나보다 강하니까. 난 네게 검을 겨눌 수도 없고, 형제여.”

거미는 목소리에 결의를 담아 낮춘다.

“대신 남부의 왕국을 치겠다. 혼자서 말이네. 기사를 동원해 반란을 제압해 ooo.”

“기사들이 너보다 약할 텐데 거미.”

황제는 그의 의견을 확신하지 않는 투였다. 그러나 의원이 눈살을 찌푸린다.

“한 명이 있잖습니까. 거미에 견줄 만한 실력을 지닌 기사.”

힌셔. 셋의 머리에 같은 인물이 떠오른다.

“너… 설마.”

“난 기사들을 힘으로 굴복시켜왔다 ooo. 설령 내게 온당한 정의가 있다해도 난 그걸 펼쳐낼 방법이 없었지. 두려움은 그들의 눈을 가리고 마음을 움츠러 들게 하기 마련이니까.힌셔라면 그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하마는 스스로 스승에게 적대할 결심을 세울 이가 아닐텐데.”

“계책이 있소.”



“맹세를 하겠어. ooo”

의원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수긍하며 황좌에서 몇 걸음을 떨어진다. 거미가 고개를 숙인다.

결국 이렇게 되었는가.

몇 년전 그에게 제자를 권했던 때가 떠올랐다. 황제는 무릎을 숙인 그가 하는 맹세를 받았다.



“친우여, 자네는 부디 천수를 누리시구려.”

그는 위태롭게 서 있는 친구를 바라보며 인사를 하고는 처소 밖으로 나갔다.

1441. X. XX

힌셔가 루놀을 통찰 해냈을 때 그는 이전에는 단순한 적의만이 읽혔던 벽안 뒤에서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 순간 힌셔는 의미없는 분풀이를 해대는 자신의 행동이 거미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분노 이전에 전의가 바닥까지 가라앉아 그는 루놀의 설욕전을 거절하고 수련관으로 돌아왔다. 거미가 창가에 힌셔와 마찬가지로 바랜 회색의 눈을 하고 앉아 있었다.

“스승님. 루놀의 눈을 봤습니다.”

“… 그래?”


스승은 굳이 그 내용을 묻지 않았으며, 대답을 듣기를 두려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창 밖으로 향한 시선에 빛이 반사되어 무언가를 읽기도 어려웠다.

인정욕. 힌셔는 루놀의 눈에서 보잘 것 없는 인정욕을 읽어냈던 것이다. 그것이 질투의 정체였다. 그는 자신의 인정 따위를 받아낸다 해서 무슨 소용이 있으며 어디에 쓰이는 지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자신에게 부딪히는 파도를 원망하듯 그것을 적의라 판단하였다. 그에 대한 반발심에 그를 때려 눕히면서도 자신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 이들에 대한 염증을 쏟아내면서, 저도 모르게 자신에게는 과분하게 다가오는 스승의 기대와 기사들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힌셔의 안에서 가치있게 다가오는 것 중 하나였던 기사들의 가치를 스스로 무너트려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힌셔는 루놀에게 서둘러 사과하고 입술을 짓씹으며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온 것이다. 

“힌셔, 나에겐 적이었지만 너에게는 그렇지 않을 테지.”

스승, 거미에게도 힌셔에게 읽히고 싶지 않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부러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여야 할 때 거미는 그에게 마치 오랜 친구에게, 혹은 아끼는 제자에게, 혹은 진심으로 동료라 여기는 자에게 짓는 것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스승님?”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힌셔는 술에 취해 가게에 널부러진 그를 찾아 짊어지고 오는 날도 있었다. 힌셔는 그를 부축하며 마치 건넛집에 사는 청소부가 아침에 엉망이 된 상가 거리를 봤을 때 내는 것 같은 소리로,

“으- 스승님.”

“힌셔, 누가 스승을 그런 식으로 부ㄹ르냐.”

“적도 많으신 분이…”

한동안 거미가 힌셔를 은근히 피한다고 느꼈지만, 오래가지 않아 이전처럼 돌아왔다. 그러나 수련이 길게 이어지지 못하는 날이 잦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인지 힌셔는 고민했다. 수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기사들과 거미의 사이가 악화되는 것에도 그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힌셔는 한숨을 쉰다. 통찰의 눈으로 무엇이든지 명확히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승도, 자신도,  그 속을 읽어 그들의 심란함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나열해서 구분지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저는 이 일이 좋아서 시작한 건 아니예요. 힌셔.”

그노제스가 마치 고민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듯이 힌셔보다는 가늘지만 거칠고 투박한 양 손 끝을 겹치고 움직거렸다. 불에 그을린 손이었다. 여기저기에는 화상이 발톱자국처럼 손목과 팔뚝까지 덮고 있었다.

“어렸을 때 부터 재주가 있었고 아버지를 따라 자주 대장간에 가곤 했죠. 그 길로 도제가 되었어요. 저는 가끔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 일을 고른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죠.”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고는 따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불을 가까이 하며 사는 사람은 그를 따라 마음도 따뜻해지는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힌셔는 달라요. 힌셔는 이미 누구보다도 부족함 없는 기사예요. 인간인 이상 완벽할 수는 없지만, 전 그런 당신을 옆에서 지켜주고 싶고요.”

그가 힌셔에게 고개를 돌리자 싸한 샛바람이 들풀처럼 그를 흔든다.


“그리고 저는”

그는 살짝 주저하다가 발치의 풀 몇 줄기를 꺾는다. 그노제스의 손 안에서 이리저리 얽힌 풀은 동그란 환모양이 되더니 힌셔에게 내밀어 진다. 힌셔가 그에게 손을 건네자 그노제스가 그 손을 잡고 풀반지를 약지에 끼워주며 말했다.

“힌셔가 좋거든요. 진심으로요.”




“웃지 마십시오, 스승님.”

“대체 무슨 일, 풋, 아니 말하지 말아라, 크핫,”

힌셔는 머리 끝까지 커다랗고 벌건 용광로처럼 달아올라 사저로 돌아왔다. 보나마나 그노제스 때문일 터지만 그렇게까지 티가 나는 것은 거미도 처음보는 광경이라 폭소를 멈추지 못한다. 얼굴은 마치 술취한 하마처럼 분홍빛이다.

우엑,

와론은 여행지에서 별로 유쾌하지 못한 아침을 맞는다. 로맨스는 와론으로서는 별로 즐기지 않는 종류인데다가, 이미 동문 사형제자매 못지 않게 지긋지긋하게 봐온 힌셔가 어떤 사랑놀음을 하는지 보는 것에 대해 형언할 수 없는 관심 없음을 느꼈다.

쓸 데 없이 과한 회상은 필요 없다고, 거미.

그나저나 일기는 그 부분에서 끊겨 있었다. 남은 페이지들은 더 이상 날짜조차 적혀있지 않고 비어있다. 그러나 이제는 일기와 상관없이 수도를 떠나오고 나서도 기억은 계속 되고 있다. 와론은 신화를 악용하는 기사들을 저주했지만 영웅에게 무언가 있는 건 사실이었고, 결국 무언가 알아낼 것 같다는 허무한 가능성을 따라 날튼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예로부터 동편은 성소로 신성시 되어오고, 서편은 악마의 땅을 상징한다. 그러나 진정한 악마의 요새는 서쪽이 아니라 남쪽에 있었다.

그노제스는 길을 못 찾는 힌셔를 대신하여 매번 사저까지 그를 데리러 왔지만 그게 다가 아님을 거미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곧 위안도 어느 무엇도 함께 할 수 없는 길로 나아가야만 했다.


불길한 적색 갑주. 뾰족한 정이 박힌 검은 건틀렛.

가슴에 새겨진 기사단을 상징하며 두려움을 안기는 방패꼴 문장.

마치 이명과도 같은 팔방형의 실루엣.

수도의 서문 밖으로 검붉은 낙조가 지고 있었다.


거미는 수도의 삶. 기사의 삶. 그의 악행에 흥미와 염증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제 가야하는 같은 노을이 비치고 있을 남쪽과 이곳의 번잡하고 종잡을 수 없는 권모와 제자와의 수련과 사람들과의 술상이 가득찬 틈에서 망설여졌다. 여기 남는다면 그는 아주 길고 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ㅡ 수도 구석에 한적하게 쳐박혀서, 거울 속에 늙은 자신을 마주하고 하늘이 그를 고요히 부르는 날까지 멋대로 굴고 기사들이나 괴롭히며 지낼 수 있다. 그는 이제 미소를 잃게 하는 전란이 니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형태로 닥쳐올 것을 예지한다. 그들의 미소는 지금 같은 시대에서는 언제나 불투명했다. 거미는 자신의 손으로 길러낸, 어렸으나 지금은 장성한 제자의 단단한 버팀을 떠올린다. 전장으로 향한다면 그는 어떤 목숨보다도 오래 존재하는 불후의 악명을 떨치리라. 그러나 그는 두 번 다시 이곳의 땅을 밟지도 뼈를 뉘이지도 못하리라.


그가 같은 자리에서 수없이 지켜온 검붉은 노을이 지는 시간. 자신의 제자와, 마을과, 친우와 보내는 마음까지 데우는 한 잔의 따끈한 모주 같은 활기 넘치는 행복은 그릇되지 않다는 걸 거미는 이해한다. 그리고 그의 삶에 자리한 고립과 무의함 역시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인 거미의 안정은 백성들의 행복과 양립할 수 없었다. 서민들의 행복은 이미 철저하게 기사의 손 안에 달려있다. 부정하지 않아도 오늘만큼은 모든 그의 개인적인 일부와 삶이 도시 전체의 행복과 정반대의 길에 놓인 것을 알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창 밖으로 보이는 이 수도 전체를 뒤엎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낙조가 지는 남문과 남쪽 경계를 넘어간다. 빠르게 이동하면 정오에는 도착할 것이다. 이동 중간에 바위와 나무 틈에서 쪽잠을 잤다. 남부에 도착한 그는 곧장 성이 있는 유명한 협곡으로 접어든다. 멀리서 성채 외성의 망루 위에 선 경계병들이 보인다.



국경을 넘을 때 거미를 멈춰 세우지 않은 건 날튼이 한 가장 큰 오판이다.

알았어도 막지는 못했을 걸.

거미는 망루 위의 병사들이 기사를 알아보고 꼿꼿한 근무태세를 갖추어 서는 것을 보았다. 어린 병사 몇은 핏빛거미를 봤다는 사실에 약간 흥분한 상태다.

“이름을 대시오!”

“나는 기사, 핏빛 거미다. 날튼의 영주를 만나러 왔다.”

“그 분은 영주가 아니오. 왕이시오. 그리고 당신이 거미인 것은 알지만 황명이 아닌 이상 함부로 들일 수는 없소!”

경비대장이 망루 아래에 선 거미를 보며 크게 외친다. 기사라고 해도 단신으로 무장을 하고 온 그가 황명을 가져왔을 리도 없지만 이곳에서 그는 적의에 가까운 경계를 받고 있었다.

날튼 영주는 이미 마음을 굳혔군.

그것을 알아차린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악의를 담아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어깨에 걸친 창을 들어 올리고 등 뒤로 보내 전투태세를 잡는다. 높은 방벽 위에서 병사들이 당황하기 시작한다.

“멈추시오, 거미! 허가 없이 들어가겠다면 무력으로 제압하겠소!”

“다시 한번 말하지. 나는 기사 거미. 날튼 국왕은 오늘부로 왕족에서 사라지고 영주에 불과하다. 물러서지 않는다면 직접 돌파하지.”

그는 마지막 문장을 작게 중얼거리고 창끝에 힘을 집중한다. 주위로 바람이 일고 병사와 근위병들이 우왕좌왕 무기를 들고 전투태세를 갖추려는 순간,

성벽 위로 크게 뛰어오른 거미가 크게 성탑을 베어낸다.

그가 겨눈 망루 아래가 부수어져 내리며 탑이 기울어 아래의 병사들을 덮친다. 거미가 단숨에 성벽 위로 뛰어 내릴 즈음 그가 서있던 성 바깥의 지면에 창칼이 날아와 꽂힌다.

“기사님을 불러와! 빨리!!” “반란이다!!!”

다급한 비명과 긴 뿔나팔 소리가 울린다. 그제서야 안쪽의 성채에서 병사들이 달려 나온다. 퍽, 튕겨져 나온 병사와 돌무더기들이 떨어져 내리고 거미가 달려들던 근위대장의 목을 꺾어버리자 무기를 들고 그를 감싸던 병사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담장을 창으로 찍어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병사들의 위를 뛰어 넘어 착지했다. 반댓편의 퇴로로 향하던 자들 사이로 창으로 때린 거석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박힌다.



끼익-

중정으로 향하는 굳게 닫힌 문 안은 피바다로 물들었지만, 왕과 귀족들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그는 회랑에 초점을 잃은 눈으로 피에 잠겨 널부러진 기사들을 보았다. 그는 기사에게 꽂힌 창을 뽑아 핏자국을 탁 털어내고 질척거리는 손을 옷자락에 닦아낸다. 신음 소리 하나 없이 멎어버린 중정을 벗어나며 뒤로 학살의 현장을 버려둔 채 계단을 올랐다.

붉은 머리카락에서 그보다 더 선명한 선혈이 뚝뚝 떨어졌다. 그는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불길함을 그러모아온 듯한 처참한 몰골이다. 유리창에 비친 남자의 눈에 세로로 그어진 흉터. 아주 어릴 때 그 자리에 새겨진 상처의 흔적이다. 그보다 강한 어떤 이들도 이 자리에 없으므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곧 이곳으로 내려오게 될, 그의 제자 외에는.


날튼의 왕족들은 성의 가장 높은 탑에 스스로를 몰아넣어 숨어있었다.

“내가 왜 찾아온 건지는 알고 있나?”

거미가 턱 끝으로 그를 내리 깔며 살기를 발산하자 남은 이들이 일제히 무기를 쥐고 으르렁 댄다.

“잠깐, 진정하시게. 그대는 기사 핏빛 거미, 황제의 오른팔이잖나. 우리 왕족은 황제의 은을 받은 황가의 일부나 다름없네”

그는 얼마 전 회의때 얼굴을 접하고도 점잔을 빼는 한 왕족의 태도가 우스웠다.

“남부는 지금 내전으로 쇠락하다네. 우리를 친다면 자네에게도 좋을 꼴 없을걸. 황제의 명이라 해도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

“쇠락?”

거미는 오만하게 흉터가 있는 왼눈을 찡그리며 창대를 까딱인다.


“그 말대로 사병이 보잘 것 없긴 하더군. 하지만 나는 기사들도 황제도 별로 두렵지 않은 걸. 그보다는 세간에서는 내가 오만방자한 날튼 왕가를 끌어내리고 영토나 가져볼까 한다 하더라고.”

“드디어 황제를 배신하기로 한 거냐 핏빛 거미...!!!”

“나는 이미 세상에 묶이고 매이고 맺힌 것이 많아 더 묶일 것도 없는 존재다.”

왕이 치를 떠는 듯한 투로 겁에 질린 언성을 내었다. 거미는 혐오해 마지 않던 그들을 그의 손으로 학살한다.

“너도 한 때는 기사라고 믿었는데…!!”

한 왕족이 단말마를 내며 쓰러졌다.


거미는 영주가 앉았던 네모나게 다듬은 돌 위에 앉았다. 이제 남은 건 분노와 배신감을 가득 채워 온 힌셔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스승님. 당연스레 찾아올 시대를 구태여 열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무구한 물음과 달리 괴물같은 힘을 지닌 제자에게 그는 답한다.

시간이 지나면 범사가 되고 그것도 아무렇게 않게 여기지만 무엇이나 시작이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법이지. 기사나 왕국들도 그러했듯이.


기억하고 있냐. 힌셔?

다른 시대를 여는 것. 그것을 위해 네 발걸음은 지금 가고 있는 게 맞냐?

오래지 않아 그는 그 답을 알게 될 터였다. 그는 힌셔와 기사들을 기다렸다.



반란의 소식이 온 대륙을 떠돌았다.

경계를 넘어 날튼으로 들어왔다. 낮은 산악 지형이 주를 이루며 빽뺵한 숲과 사막이 반복되는 북부와 달리 동서의 분수령이 되는 험준한 산맥과 평탄한 구릉으로 이루어진 남부의 광경은 일견 풍요로웠다. 북부에 비해 더 오래 내전을 지속해온 남부. 한때 이 전체가 전쟁터나 다름 없었다. 남부의 이 너른 영토들은 죄다 그 땅에 시체를 눕힌 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백여 년의 역사를 가진 내륙국. 날튼은 지배권 다툼이 온 산맥을 뒤덮었을 정도로 피를 흘린 왕국이기도 하다.

와론은 손 끝에서 바스락 거리는 지도를 꺼내 한참을 들여다 본다.   

전쟁이 잦았던 시기에 지어진 날튼의 성채는 요새처럼 산을 통과하는 길목에 표시되어 있다. 도중까지는 날아갈 생각이었다. 와론은 검은 창대에 손을 올렸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이 나린기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 중의 하나인 것만은 확실하다. 단단하다는 것을 객관적인 지표들로 집을 건축 할 때 쓰이는 강도, 충격을 견뎌내는 경도 혹은 물질의 구조적인 개념만으로 정의하지 않더라도, 그노제스의 도제들이 그러하듯이 철의 배합율에 따라 결정하지 않더라도 나린기는 불에 타거나 부러지거나 작은 흠집이 나거나 하질 않는다. 무결점의 측면에서 단단함을 정의한다면 론누는 무엇보다 단단하다. 그리고 무기의 견강함이란 전투에서 도처에 활용할 바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와론은 그 쇳덩어리는 형태가 변하지 않는 다른 강고한 물질들과는 달리 손 안에서 살아있는 생명을 내뿜는 것을 느끼곤 한다. 미동 없는 창은 그가 눈 감으면 마치 생명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살아있지만 단단한 것. 와론은 언젠가 나린기가 되고 싶었다.

와론의 머리 위로 콘도르 한 마리가 스쳐 날았다. 그의 앞으로 펼쳐진 구릉을 따라 자리한 숲과 뒷편의 산세는 지도와 비슷했으나 산맥 안으로 접어드는 길은 없었다. 대신 구릉의 안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하강한 와론은 저벅이며 걷기 시작했다.

정오가 지날 무렵 서로 손을 맞잡은 모양새의 다리를 건너자 분지에 자리 잡은 소도시가 모습을 드러낸다. 와론은 입구를 통과하려는 주민 하나를 붙잡고 산맥으로 가는 길을 묻는다.

"여기 날튼 협곡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나?"

"날튼 협곡?"

"이봐 날튼 협곡이라는 곳이 있는가?!"

농부가 소리쳐 뒷편의 몇 사람을 불러 모은다. 보아하니 이곳 주민들조차도 성채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다.

"산 안에 있는 그 요새를 말하는 것 아니요?"

"설마 그 셋산 뒤에 있다는 곳 말인가?"

"거길 가시려구?"

와론은 자신을 쳐다보는 이들에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해주었다.

"기사님, 사정은 모르겠으나 우리는 아무도 그 곳에 가지 않는다오. 그 성채는 오래 전에 저주 받았소."

나이 든 농부 하나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와론의 태도는 완고 했다. 옛왕국의 통로의 역할을 한 협곡. 왕국의 성채는 분명 저 산 어딘가에 묻혀있을 것이다.

이름도 얼굴도 밝히지 않고 다만 창 하나를 어깨에 얹은 채로 미동 않는 기사에게 그들은 길을 가르쳐주었다.

“감사.”

그는 인사를 표하고 다시 론누에 날아오른다. 요새나 다름없는 성채는 산기슭에 높은 곳에 댐처럼 건설되어 있다고 한다.

“제발 신들을 두려워하시구려.”

노인의 목소리가 산명처럼 돌아온다.

와론은 저물녘 즈음에 성벽에 다다랐다. 미동 없던 협곡의 저 편에서 성이 차차 그 모습을 드러낸다. 성을 둘러싼 해자를 단걸음에 풀썩 건너뛰고 무너진 성채를 지나 요새 중앙의 내성 가까이로 다가간다. 안개가 낀 바다의 발톱 틈으로 부수어진 하늘에서. 양 옆에서 민둥이 같이 살갗을 드러낸 암벽의 산이 어스름에 잠기어 검게 보였다.

얼핏 보아도 50미터가 족히 넘는 거대한 성벽은 몇 백여 년 전의 것인데도 견고하게 만들어져 건축한 사람들에 대한 경외를 품을 정도였다. 사람들이 찾지 않고 버려진 성채는 전체가 푸른 손에 점령 당한 듯 잡목으로 뒤덮여 자라나 하나의 살아있는 녹색 암벽과 같아 보인다. 초록빛 때가 잔뜩 끼어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낙뢰를 맞은 것 처럼 중앙에 크게 그어진 자국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좌우로 벽이 갈라지고 무너져내려 가장자리의 단면이 뚜렷하지 않았어도 둔기로 내려친 것으로는 볼 수 없이 깊은 협상을 이루고 있다. 둔기보다는 대검으로 내려쳤다면 이해가 갈 법한 형태였지만 끄트머리가 경계랄 것 없이 무너졌어도 와론의 눈으로 보기에 남아있는 원래의 절단면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아 애초부터 검격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운데의 같이 남겨진 것은 창상이고, 벽 여기저기에 깊게 들어간 것은 검에 무언가를 두르고 벤 것 같은 모양새. 마력이었을까? 그럴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5백년 전 영웅이라 불렸던 기사가 남겨놓은 소재해 같은 상흔과 그 형태에 수많은 마스터피스와 기사들을 보아온 와론도 잠시 경외감에 젖어 감상했다. 수 백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흔적. 마스터피스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기사들이 가진 힘은 경이로웠다. 그것이 기사가 행하는 일이고 그런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자신 역시 경험한 바를 바탕으로 잘 알고 있었음에도. 와론은 가슴 앞에 늘어트린 녹색 원석을 손 안에서 굴리며 생각했다.

그는 담쟁이가 붕괴시킨 돌들을 밟아 성 위로 올라섰다. 와론이 예상했던 것은 폐허 위에 수없이 남은 사람의 뼛무더기 조각들이었다. 5백년 전의 처형이 얼마나 혈투였는지는 모르지만 기사들의 것으로 보이는 흔적들도 남아있기를 예상했다. 그러나 후처리를 했던 것인지 그 오래된 성벽 위에 사람의 유골을 포함해서 별다른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흠집과 금은 이미 잡목의 뿌리와 세월에 바스라진 것이 그 위를 덮어 구분할 수 없었다. 와론은 울퉁불퉁한 바닥을 돌 하나 채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주위를 둘러보며 굳이 이 성벽을 철거하지 않은 심산을 생각해보았다. 누구도 악마기사를 기억하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커다란 성채는 그 안에 살던 사람도, 건물도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고 아무도 이곳을 떠올리지도 수습하고 싶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날튼 사람들에게는 그런 방식으로 기억되었고, 시간이 흘러 끔찍한 기억이 잊혀졌을 때즈음에는 이곳 자체도 함께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었다.

문득 망루 밑의 벽에 바위와 잡목이 아닌 다른 것이 눈에 들어와 와론은 바위의 잔해를 밟고 탑 주위로 다가갔다. 그는 처연하게 망토자락을 늘어트린다. 잔뜩 녹슨 쇠가 바닥에 박혀 세워져 있었다. 이끼와 덤불로 뒤덮인 폐허에서 부러진 쇠에 부서질 듯 색이 바랜 붉은 끈이 묶여있고 뒷편으론 성벽과 같은 재질의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있다. 마치 비석과 무덤 같은 모양새다.

창술의 기본 자세는 하단세. 언제든지 창 끝을 상대에게 걸어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고 공격을 회피해내기 위한 다양한 동작을 위한 기본 자세다. 반응을 빨리 하려면 둔기를 앞에, 강한 타격을 원한 다면 뒤에…

힌셔를 가르치던 거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명예를 등진다면 모든 기사를 등지게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와론이 보기엔 악마기사나 힌셔나 별다를 바 없다.

거대한 섬광으로 된 마력이 성벽 위로 모여든다. 하마이빨이 전력을 다하며 진정한 위력을 드러내고 세 개의 분사구에서 분출되는 마력이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하며 하마턱으로 부터 날카로운 형태로 길게 뻗어나간다. 거미가 집중하여 모든 기력을 창으로 모아내는 것이 아래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마치 거인 같은 거대한 검이 성벽 위에서 집채만한 몸을 일으켜 세웠을 것이다. 마력과 창격의 소용돌이가 성벽 위를 덮으며 푸르다 못해 희게 빛났겠지.

누군가 말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힌셔. ‘네가 해야 해.’

용기의 또 다른 이름은 오만이며, 그것은 선을 지향할 때만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악을 배제할 때만 선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선은 사실 악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선은 악의 누구보다 친한 친구이며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보다 선을 사모하고, 그들은 서로를 닮고 싶기 때문에

그 일부를 지녀 서로를 닮으려 한다는 것을.

핏빛거미와 검붉은 하마 처럼.

악마기사와 힌셔처럼.

스승과 그의 제자처럼.

해와 또 하나의 항성처럼.

선을 사모하는 사람은 또한 악을 사모하고

악을 사모하는 자는 또한 선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신을 베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누군가 옷깃을 잡아당기는 느낌에 거미는 흠칫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 왜 그러십니까 스승님?”

“응, 아니.”

힌셔가 걸음을 멈춘 스승을 돌아보았다. 거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힌셔에게 묻는다.

“과거의 내가 나를 멈춰세우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아나 힌셔?”

“네?”

“나랑 정말 놀라울 정도로 닮은 아이가 말이야.”

“정말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스승님. 농담이라면 그렇다고 말해주시죠.”

“하하 힌셔. 넌 이런 면으로는 타고 나지 않은 거냐?”

“무서운 얘기라면 전혀 재미있지 않습니다.”

마치 자신을 만류하는 듯이.

힌셔는 그가 검을 내지르는 스승의 눈을 통찰해내며 견습 기사복을 입은 금발의 한 아이가 그의 곁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울면서 그가 무기를 움켜쥔 두 손을 잡으려 필사적이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힌셔,.. 힌셔, …! 그만 둬, 스승님이잖아,”

우는 얼굴로 그를 만류하면서도 단호함이 서린 아이는 자신과 꼭 닮아 있다. 지금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한 힌셔는,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제까지의 자신을 밀어낸다. 단호하게 장검을 머리 위로 치켜든다.

그리고 어린 자신과 모든 마음과 추억을 단념하듯이 검을 휘둘렀다.

기사란 초월적인 존재. 초자연적인 존재.

그들은 발생하는 것에 가깝다.

그들을 묶어둔다는 것이 가능한가?

용을 복속시키고자 하는 건, 인간의 지나친 이기심이 아닌가?

기사들은 성채와 비슷한 존재이다. 그들은 성벽을 부수어 자유와 힘을 얻으려 한다. 그리되면 남는 건 부수어져 창공과 적군에게 개방된 요새 뿐이다. 거미가 한 말은 오래된 소설에 나온 구절이다. 그에 따른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의 시작으로, 아무것도 거두지 못하는 파괴만 시작된다. 사람들은 뙤얕볕에서 농익어 가는 포도나무 가지가 만들어 내는 향이나, 털을 깎아주어야 하는 양으로부터 진리를 발견하곤 한다. 그렇게 발견된 그들의 진리는 우물처럼 그 깊이를 더해간다. 그러나 그들을 위협할 수 밖에 없으며, 그들과 같은 것을 찾을 수 없는 기사들은, 거미는 성채를, 자신들의 마음 속에 세운 것이다. 그들의 시야가 흐려지지 않도록.

와론은 투구 안에서 메아리를 울리듯 되내인다. 내가 해치려는 건 기사가 아니다. 나는 그들을 없애지 않는다. 내가 없애는 건 이런 거대한 성벽을 모두가 잠에 든 사이 타고 올라가 서서히 망가트리는 담쟁이와 원시림이다. 론누는 등대는 되지 못할 지언정 타락한 정의와 논리에 실명한 이들의 숨을 끊어줄 수는 있다.

부러진 창이 꽂힌 성벽 위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금처럼 고요할 것이다.

이곳에 기록된 건 극히 적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돌을 쌓은 자가 누구인지는, 그것을 쌓은 의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성벽은 조용히 허물어져 내리며 언젠가는 그들 사제의 마지막 형태 또한 완전히 어둠 속에 묻히리라.

그러나 와론이 걷어내는 것이 정말로 이끼나 담쟁이가 아니고 기사들이 성벽이 아니듯이 기사들이 이대로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아가고 있다. 와론은 그 불안에 손끝을 창대에 두드린다. 명예의 시대는 그들이 모르는 사이 종말을 맞고 있다. 저녁해와 함께 핏빛 거미가 스러져 악마기사만 표지석으로 남았듯이. 그 명멸 속에서 빛을 발하던 힌셔의 거친 목소리를 들으며 기사들은 스스로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열광했어도. 기사들은 그들이 고른 길이 대로인지 협로인지, 막다른 길인지도 몰랐지만 종착에 다다랐을 즈음엔 깨닫지 않았나? 수도에 돌아가고 나서 깨닫지 않았나?

와론은 그 시대에 이미 서서히 무너져갔을 견고한 성벽과도 같던 그들의 긍지를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명예가 가장 순수한 형태로 정립된 힌셔 이후로 기사들은 내리막으로 기울고 있다. 새까만 닭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들과 함께 걷고 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있을까. 분노를 동력 삼아 가열된 그가 보지 못하는 사각을 보여줄 기사가 있을까-. 서쪽다리, 핏빛거미. 거미는 기사의 가치를 명예라고 여기는 자도 머저리라고 여겼다. 나약한 기사, 힘이 없는 기사, 약자가 세상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을 구제하는 편이 약자여서는 안되나? 와론의 질문은 마치 자기 부정과도 같다. 그러나 그들은 오백년 전에 있고, 와론은 그들과 떨어져 현재에 있었다. 그들 간에 시간의 공백은 길었고, 그 사이의 이야기는 힌셔와 함께 사라졌다.

당신을 잃음으로 기사들은 무엇을 얻게 되는가.

당신이 이탈함으로 우리는 어느 길로 가게 되는가.

힌셔.

해가 저물며 시야는 점점 암전한다.

저녁조차 되지 못한 해질녘이 짧게 하루를 감싸안는다. 돌탑에는 언어조차 되지 못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와론은 창대를 흔들어 허망된 전설을 털어낸다. 이 창과 자신이 해내는, 그리고 그 투구를 만든 장인들이 해내는 일의 위대함은 장인들 자신조차도 모르며 오직 와론만이 알 것이다.

넓은 어깨가 성벽을 등지고 돌아섰다.

날튼에서부터 거슬러 올라온 와론은 수도의 초입에 다다랐다. 지도에 강이 표시된 자리에는 여전히 논밭 외에는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와, 그는 잡목과 억새 사이를 한참 헤쳤다. 얕은 벼랑을 따라 놓인 암반의 뒷부분으로 잡목을 잔뜩 끼고 있는 작은 하천을 발견하고서 그제서야 와론은 서쪽으로 가면 운하가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곳은 강이었던 것이다, 5세기 전에는. 그와 동시에 와론은 한 가지 사실을 더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고 멈춰 물기슭을 바라보았다.

강을 건너는 다리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이곳으로 내려올 때는 절벽 위쪽으로 지나왔을 테니.

어마어마한 길치가 분명한 그라면, 지금 와론이 서있는 것과 비슷한 부근에서 길을 헤맸을 것이 분명했다. 협곡에서부터 이어지는 길 역시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어찌어찌 이곳에 다다랐다고 해도, 건널 방도가 없다. 다리는 훨씬 상류에 놓여 있었으므로. 그는 다리를 찾아 북쪽으로 강을 따라 올라갔겠지. 수도가 바로 길목에 있는 것도 모르고.

와론은 어렴풋이 그의 의심 중에 적어도 한 가지는 들어 맞은 것을 직감한다. 검붉은 하마는 길을 잃어 니젤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이었다.

와론의 머리 위로 전서매 하나가 날았다.

남쪽으로 떠난 핏빛거미도 힌셔도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 그노제스 측에서 핀델로 향하라는 기별을 보내왔다. 와론은 몸을 돌려 악마의 땅, 북서쪽을 향해 떠났다.

로브를 뒤집어 쓰고 수도의 골목으로 사라지는 자들을 추적하던 와론은 이들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아하. 말토구만. 그들도 전설이라면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핀델로 들어온 뒤로 요새를 찾는 건 그에겐 식은 죽 먹기였다. 지하요새에 난입하는데 성공한 와론은 어두운 굴 속을 뒤지며 대장장이를 찾아나선다.

대륙의 도시마다 지하 음지에 마법사 집단이 거점을 틀고 있다는 정신나간 이야기가 있지만, 몇 백년 전 이후로는 그들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적도 없는 도시 전설이고 설령 여전히 있다해도 폐쇄적인 마법사들의 집결지이니만큼 그들도 바깥 세상에 드러나거나 목격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왔을 것이다.

쥐새끼 같이 잘도 만들어 두었군. 아마 대부분 마법으로 파낸 석굴일테지.  

“그만.”

그는 바닥으로 내팽겨친 법사의 목에 호위의 칼을 빼들어 겨누었고 법사의 가슴팍을 까만 장화가 누른다. 말토 법사의 당황을 숨겨줘야 할 두건이 뒤로 벗겨져 조명이 한층 반사되어 지하동굴은 밝아진다.  

“하마턱을 어디서 구했는지 말해라. 거짓말하면 재미없을 줄 알고. 뜸을 들이거나 마법을 쓴다면 죽이겠다.”

“히이익-! 하, 하마턱. 지금 여기에는 없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 맞다는 얘기다. 와론은 목을 갈아낼 듯 겨눈 칼을 틀었다.

“교활한 마법사의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지, 진짜, 준법사가 가지고 나갔네!”

“그건 진짜예요. 와론님.”

장인이 어깨를 으쓱하며 법사의 말을 긍정한다.

“그런가.”

“그들이 지도를 가지고 있어요. 와론님. 하마턱을 찾은 곳을 표시한 지도요.”

와론은 다른 법사를 시켜 돌탁상 위에 지도를 펼치게 했다. 일반적인 지형을 그린 지도가 아닌, 도형을 통해 기호화 된 것이었다. 와론이 가진 것보단 최신의 것이지만 만만찮게 오래된 물건이 분명했다. 그는 흘끔 지역의 이름을 읽었다. 레툰.

하마턱이나 하마가 레툰까지 갈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걸 읽을 수 있는 자를 데려와.”

“살… 살려줘!! 진짜로 모른단 말이네! 당시 무기를 가져다 준 자들은 이미 다 묘지 아래 있네!

“그러면 대강의 지점조차 모른다고? 이걸 해석하지 못했나? 바른 대로 말해.”

탓. 와론의 한 손에 접힌 지도가 투구 높이까지 들렸다.

“하마가 묻힌 장소도 같은 곳인가?”

옆에서 파린이 불안하게 눈을 기웃거렸지만 말토의 법사가 그를 막았다. 500여 년전 말토가 영웅과 충돌해 죽인 것이나 다름 없는 게 알려지거나 영웅이 깨어나 말토로 찾아온다면 그들은 끝이다.

“그 위치가 어느 부근일지 해독하는 방법 정도까지만 알고 있네, 하지만 정확한 위치까지는 못 들어가!”

“좋다. 대장장이를 넘기고, 길을 아는 사람을 붙여. 그는 대장장이가 수도에 무사히 도착하면 돌려보내지.”

“하마턱은 찾지 않으시는 건가요?”

그를 여유롭게 지켜보던 장인이 와론에게 물었다. 그는 하마턱을 가진 자가 떠난 뒤 몇 달동안 말토의 전속 대장장이가 되었던 반감금생활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약속은 너를 돌려보내는 데까지 였으니까. 정보를 가지고 돌아가라.”

“예?”

“가지고 싶으면 니들 힘으로 해.”

와론은 구석에 유유자적하게 서 있는-다소 침울해진- 그에게 가지고 가고 싶은 쓸모 있는 자료들을 대강 고르라고 지시하고는 법사를 책상 위로 끌어올려 지도를 해석하게 했다. 그리고 나서 장인이 짐을 쌀 때까지 기다렸다. 법사는 죽어도 따라가고 싶지 않는 눈치다.

“네가 안내해 드려라..! 파린!”

“예…?”

파린은 제 자신을 집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새까만 닭을 쳐다본다. 그는 그것으로 되었다는 듯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투구를 뒤집어 쓰고 파린이 앞장 서길 기다렸…

“뭐해? 안내 안하고.”

“진짠가요?”

젠장. 나보고 뭘 어쩌라고.

론누의 창날은 꽤 선뜩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는 기사는 여차하면 안내의 보답으로 그를 황천길로 데려다 줄 것 같다. 그러나 고등 법사의 재촉에 파린은 불가항력이라는 듯 이를 딱딱 부딪히며 앞장 섰다.

습한 곳에 오래 있다 나오니 입 밖으로 기침이 샌다.

기사도 다 죽었네.

와론은 잔기침을 뱉으며 벽돌 사이를 빠져나온다. 마른 입안과 콧 속에서 먼지 맛이 느껴진다.

“돌아가면 그노제스에게 잘 전하고.”

장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뭉치를 든 보따리를 둘러매고 동쪽으로 떠났다. 하마턱을 뺏기 위해 모루와 격자쇠를 들고 지하세계로 쳐들어오는 대장장이들을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와론은 고개를 돌려 반댓편을 보았다.

목적지는 서쪽.

“서쪽..”

다리에서의 결투는 잊을 수 없었다.

“어이-”

파린이 조금이라도 쉴 기미를 보이면 그는 론누로 등을 찔러온다.

“레툰까지 꽤 멀잖아~. 바쁜데 빨리 가자고.”

너나 바쁘지. 미친 놈아-

일생의 대부분을 공부에 매진한 마법사에게 대장정은 가혹한 법이고, 그 동행인이 기사라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파린은 체력을 보강하는 마법을 스스로에게 쓰다가 관두었다. 마법으로 인해 빠져나가는 것은 직접 걷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다. 파린이 대충 걸으며 속도를 줄이려 할 치면 귀신같이 알고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뒷편에서 들려온다.

“뭘 그리 서두르나? 하마가 발 달린 것도 아니고 더 천천히 가지.”

그딴 걸 농담이라고! 파린은 속으로 분을 삭힌다. 심장이 쫄깃하다 못해 내내 움츠러 들어 수축한 것이 북쪽으로 향하며 부쩍 내려가기 시작한 온도 때문인지, 등 뒤에서 내내 그를 재촉해대는 위협적인 투구 때문인지 알게 뭐람. 한편 겉으로는 태평히 그를 따라온 와론은 어두운 지하굴에서의 첫만남 때 보다는 미온하게 굴었다.

그나저나 기사들에게 배급되는 식량은 해도 너무하다. 파린이 가져온 식량이 떨어지고 난 뒤 그들은 내내 형편없는 식사를 했다. 설마 기사씩이나 되면서 이딴 걸 먹고 다니는 거라고? 파린은 투구 틈으로 사라지는 마른 육포를 쳐다본다. 와론이 고개를 들자 심연에서부터 섬뜩한 시선이 그를 꿰뚫는게 느껴졌다.

뭘 봐.

어둠은 그렇게 양아치 같이 말을 걸었다.

검고 짙은 밤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더 불안하고 위태하다. 불 하나 켜지 않은 정전에 단상 앞으로 휘장이 황좌를 가릴 듯이 내려져 있다. 그 위에 미끄러질 듯 비스듬히 앉은 인영은 긴 머리를 손잡이가 있는 곳까지 늘어트린 것으로 보아 황제가 분명하다.

어두움 속에서 고개를 숙인 황제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들은 사람 처럼 홀로 고개를 위로 젖힌다. 드러난 그의 입매가 섬뜩하게 올라가 그는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도 모르게 잠에서 깬 와론이 몸을 급히 일으킨다. 투구 안으로 소리없이 땀이 흐르고 나무에 기댄 등이 흠뻑 젖어있다. 떨어진 곳에 누운 파린이 뒤척인다. 성벽을 떠나온 후로 그는 다른 기억을 보지 않았다. 다만 이런 식으로 어지러히, 과거의 기억과 분간할 수 없는 악몽을 꾸곤 한다.  

각고의 시간이었던 삼일을 보내고 나흘째 되는 날 저 멀리 경계석이 눈에 들어왔을 때 파린은 무엇보다 안도했다. 심장 쫄려 뒤지는 줄 알았네.

“길 아는 거 맞아? 모르는 놈은 필요 없는데.”

“알 거든.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론누에 꿰어서 데려가기 전에 부지런히 걷지.”

쉴 라 치면 들들 볶아대는 소리에 파린은 여기까지 거의 휴식 없이 달려왔다.

“지도에 표시 된 건 여기까지야. 저쪽으로 반나절 가면 레툰의 경계선.”

파린이 와론의 지도를 보며 위치와 방향을 짚어 주었다. 그는 추위에 이를 닥닥 떨며 스스로에게 다시 보온 마법을 건다. 나무 울타리로 만든 검문소를 앞에 두고 그들은 한참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좋아. 대강 알 것 같군. 이제 가라.”

“못 찾으면 내 책임은 아니다…!”

“그래. 수고.”

다신 보지 말자. 닭대가리야. 파린은 그가 쫒아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는 말토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픽,

“더 빨리 걸을 수도 있었구만.”

여차하면 내가 들고 뛸까 했는데. 와론은 마법사를 보내고서 홀로 국경을 통과한다. 마법사는 예상보다 훨씬 나약했다. 이 정도 추위에도 얼어죽으려 하는 마법사는 두고 가는 편이 짐을 줄이는 길 같았다. 그는 길을 잃기 쉬운 침엽수림을 보며 걸어서 통과하느니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비행해서 가는 편이 나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는 어둠 속에서 해변처럼 보이는 호설이 사방에 낮게 깔린 경사면으로 날아든다. 영지의 경계를 통과할 때마다 점점 내려가기 시작한 밤의 기온과 더불어 연무 같은 눈더미가 고지를 희게 덮어간다. 와론의 머리칼처럼 점점 산 아래로 내려오는 눈의 경계는, 어느새 드러난 땅보다 눈 속에 파묻힌 지대가 더 많아지고 나서야 사라진다.

와론은 그 경계 위를 비행하면서 이 부근이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이 계절에 따라 설선이 남북으로 오가는 지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산맥의 이 편으로는 봄에도 얼어있는 영구동토의 지대였고, 저 편은 불의 마을이라 불리는 우디온까지 이어지는 타이가 숲이었다. 이 편의 대지-그걸 땅이라고 할 수 있다면-는 등대로 삼을 만한 불빛 하나 없이 컴컴했다. 그는 그 부동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와론은 체중을 아래로 실으며 자신이 더 무거워지는 감각을 느끼며 지면을 향해 하강했다. 산허리의 능선으로 가까이 붙어 모든 소음을 빨아들이는 하얀 땅 위로 안착했다.

눈은 부드러웠다. 꽤나 성공적인 착지였다. 와론에게 있어서도 기념할 만한 첫 레툰 입성이나 박수갈채 대신 장화굽이 퍼스스 가루 같은 눈을 떨치는 소리만 들린다. 와론은 문득 이곳에서 서쪽다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상기한다. 레툰의 산맥 기슭을 따라가다보면 서쪽다리와 서대륙 사이에 놓인 해협을 직접 내려다 볼 수도 있을 터다. 와론은 그 사실을 제쳐두었다. 여기서부터는 스스로 밤을 보낼 거처를 찾아야 한다. 마지막 마을에서 숙박을 하고 내일 새벽에 이곳으로 건너오는 편이 나았을 지도 모르지만 와론은 기상이 좋은 때에 그의 새로운 적들을 정찰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을 홀리지도, 눈보라가 우우- 음산한 소리로 귓가를 할퀴고 지나가지도 않는 설경은 솜을 머금은 듯 하다. 눈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치열 같은 산봉우리들이 위협적인 장성을 이루어 고지의 냉기를 한껏 지키고 있다.

와론은 이곳 레툰에서 오래 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빠르게 원하는 것을 찾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는 바람을 적절하게 막아줄 바위 틈 하나를 찾아내고 그 틈새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온마법이라도 뜯어내는 건데. 너무 빨리 돌려보냈군.

와론은 마법사를 데려왔어야 했나 잠시 반성해본다. 등 뒤로 느껴지는 암반이 얼음장이나 다를 바없이 차갑다. 불을 피우기도, 무언가를 먹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그는 마치 밤의 어둠은 그에게 건너오지 못한다는 듯이 망토를 펄럭여 주름을 펴고, 그것을 몸 위로 덮어 잠에 들었다.

눈이 그쳐있다. 새벽에 문득 밖이 밝아 나가보았다.

대기가 푸르게 빛을 내고 있었다.

대륙의 북반에서만 관찰 할 수 있는 현상. 높은 상공에 잔류하는 마력 물질이 극도의 저온 환경에서 느린 속도로 충돌하며 방전된 마력이 발광하는 현상. 이 현상을 유일하게 관측되는 장소는 대륙의 모든 마력이 수렴하는 레툰 같은 북방의 극지가 전부다. 이곳에서 긴 파장을 갖는 마력은 마치 깊은 물 속에서와 같은 남빛과 비취빛의 산란 장막을 만들어낸다. 이 부근에서 마력은 쉽게 충전되고, 반면 내부의 마력과 충돌해 부하를 견디지 못한 마력 도구-후에 개발될 카톤 같은 것은-는 작동이 멈추기도 한다. 일종의 기체방전상태에 해당하는 레툰의 마력이 가진 특수성.

오로라다.

고체화된 눈의 바다. 와론은 스스로 대흑반이 되어 밤 아래로 나아간다. 머리 위로는 성곽 같은 우람한 설백들이 눈 덮인 구릉을 전망한다. 투구와 망토에 쪽빛이 내려 앉는다. 순수한 마력에 어떠한 가공도 거치지 않은 그 광경은 비(非)마법사인 와론을 어느 마법보다도 매혹했다. 육안으로 마력을 보고나니 늘 마력의 세계를 감지하는 마법사들이 일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스럽다.

마력이 주는 저릿한 전극에 뇌가 절여져 정신이 나가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들은 어쩌면 시공간마저 다르게 인식할지도 모른다.

말토의 말에 따르면 힌셔는 500년간을 레툰에 머물고 있는 셈인데도, 정작 오로라를 본 일은 적을 것이다. 그 수많은 일과 밤 동안 견고한 눈밭 아래에 갇혀 지금도 옅은 금발 위로 오로라가 일렁이고 있을 것이다. 자연을 주관하는 용, 촉룡이라 불리는 오로라가 넘실대며 만들어 내는 빛의 길은 마치 차가운 피가 흐르는 광경 같았다. 와론 안에 흐르는 피. 악마기사가 지니고 있는 심해와 같은 빛깔의 피.. 그와 악마기사는 피가 맞닿아 있었다. 현실이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홀로이 유리되어 다른 것을 보는 감각을 평생 지니며 살아가는 자들. 기사가 되기 이전, 태어날 적부터 법칙에서 열외적인 존재들- 그들은 기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기사들에게도 거부되는 정의를 지녔다. 자신은 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단단한 신념은 허락되지 않은 것이며 그들의 악행으로 실현된다. 기사에게 불친절한 그들이지만 그들 역시 마음으로는 누구보다 기사의 길을 추구한다.

해발고도가 천 미터는 족히 넘는 고원에서 해는 무용지물이다. 달빛 대신 오로라가 내리며 밤에는 전체가 요동치지 않는 푸른 바다가 같았다. 하얀 눈가루가 돌풍에 휩쓸려 어두운 위 쪽의 천구 어딘가로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땅. 레툰은 달의 표면과도 같았지만 충돌구 같이 암석이 드러난 곳은 이내 다른 설파가 밀려와 덮어버린다. 녹색 유리와 같은 반투명한 오로라장이 머리 위를 떠돈다.

그 녀석을 보며 와론은 사장석 내지는 감람석을 떠올리고, 언젠가 공방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 목걸이는 감람석인가요. 와론님?”

“석영 아닌가요?”

“아냐. 감람석 특유의 아름다움이 있죠. 가공하면 페리도트가 되잖아요. 이거-”

그노제스가 와론의 목걸이로 눈짓하며 웃어보이자, 흥미롭게 듣던 장인과 도제들이 눈을 반짝인다.

“엑?”

와론은 순식간에 목걸이로 쏠린 이목에 목걸이 끈을 손으로 너덜거린다.

“어허-. 다들 손댈 생각 마시게.”

“그다지 비싼 보석은 아니예요. 가공도 거쳐야 하고요.”

그 말을 듣자 실망한 도제들이 물러서며 자리로 돌아가고, 그노제스가 웃는 낯으로 그에게 닦고 있던 무기를 건넸다.

“그런데 그다지 단단한 편이 아니라 쉽게 상할 텐데- 열에도 약하고 충격에도 약하고요-주의해서 관리하셔야 겠어요.”

“그래. 고맙네.”

그러더니 관리하는 법이며 광택을 내는 법에 대해 잔뜩 잔소리를 해낸다. 투구의 귓바퀴가 뚫릴 정도의 이야기들을 귀담아 듣는 그에게 그노제스가 관리용품을 끊임없이 건넸다.

시린 손가락이 목에 걸린 광석을 매만진다. 와론은 목이 꺾일 정도로 투구를 들어 하늘을 본다. 밤의 빛을 받아서 빛나는 장석. 어느 전설에서는 오로라를 닮은 돌은 하늘에서 떨어져 얼어붙은 것이라고 믿었다. 섬광 속에서 드러나는 돌의 색은 길을 찾는 이들의 길잡이가 된다고 믿었다.

이봐, 악마기사. 거미, 거참. 뭐라고 불러야 해? 나도 당신과 같은 처지라고. 이름과 이명을 잊어버린. 나는 애초에 받은 적도 없지만.

당신은 어디까지가 악마이고 어디서부터가 기사였던 것일까.

그래서 언젠가는 당신의 이명이 다시 사람들 사이에서 울리는 날이 올까?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핏빛거미와 검붉은 하마의 이야기가 되어서. 그렇다고 영원히 당신을 묻어두려고 한, 그 관짝 같은 돌무더기 속에서 살아나지는 말고. 당신이 이름을 되찾는 날엔.

이름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가 또 있다니, 의외로 혼란 많은 속세에 그런 자들이 더 많을지는 몰라도, 이름 없이 사는 건 마치 그 자리에 별이 존재하는 데 지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격이다. 자신은 이곳에 존재하는데 아무도 그가 거기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역시 지도에서 자신을 찾아내지 못해, 자신이 서 있는 곳도 가야할 방향도 전부 모르게 되는 일이다.

추측과 감각의 영역에서 사는 일을 반복하면서 와론이 알고 있는 별은 하나였다. 겨울이 되면 남동쪽 하늘에 낮게 걸리는 청색의 별. 차가운 얼음으로 된 유성 같은. 그러나 그 해에도 그 이듬해에도 사라지지 않고 걸려있는 별, 와론.

지도대로 그는 있었다. 그리고 핏빛 거미,

당신과 나의 이름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을 뿐 넓은 지도 어딘가에 이미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튿날은 바람이 거세다. 초속 30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눈폭풍이 몰아친다. 와론은 지도에 표시된 지세를 찾아 기슭을 타고 평원으로 내려왔다. 론누를 띄워보려 시도했으나 고장난 나침반처럼 론누는 뱅글뱅글 돌다가 눈 속에 처박힌다. 몇 번 설원을 구경하고 나서야 비행을 포기한다. 시야도 확보할 수 없는 눈보라를 꼼짝없이 직접 걸어서 돌아다녀야 할 판이다. 투구가 얼어 영하의 온도가 두개골을 감싸 냉기를 뿜었지만 거센 칼바람 때문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와론은 투구 앞을 완갑으로 가리며 레툰의 깊숙한 지역을 찾아 발을 옮겼다.

오직 눈 밖에 보이지 않는 설원을 홀로 헤치며, 고독은 뼈를 찌르는 냉기처럼 폐부에 근접해 그가 숨을 쉴 때마다 기도를 긁어내리고 공기 속의 응결된 입자가 머리의 온도를 차게 내린다. 피안의 세계와도 같은 눈보라를 와론은 멀게 내다본다.

해가 떨어지기 전 간신히 설옹의 산들 사이에서 몸을 피신할 곳을 찾아냈다. 와론은 암석 주변에서 바위를 굴려와 바람이 드는 바깥을 적당히 가리고 바위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 불을 피웠다. 낮 동안 마비되었던 손발이 풀리기 시작하자 그는 주섬주섬 식량을 꺼내고 물을 데워 먹으며 짧은 식사를 마친다. 바위의 위로 사람의 그림자가 드러났다 사라진다. 어두워진 바깥은 건드릴 수 없는 화염처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와론은 추위와 어스름 속에서 거미가 말했던 구절이 나온 소설을 떠올린다. 성채. 그것은 그가 기사가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읽었던 책이다. 책의 저자는 설산에 고립된 친구를 찾아 닷새 동안 헤매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는 홀로 조난 당한 친구의 외로움과 추위를 달래주기를 기원하는 서문을 써냈다. 책에는 고립된 병사에게 사방에서 폭풍이 다가오는 순간이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장면이 인물의 마지막이었다. 와론은 그가 있는 곳까지 밀려드는 눈보라와 백색의 광야가 되어버린 바깥을 보며 그 병사와 같은 최후를 맞는 듯한 기분이다. 주마등처럼 서쪽다리에서 그의 뒤와 앞, 양 옆으로 스러져 가던 사람들이 스친다. 더러는 와론의 구원이 늦을 때도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깊은 눈으로 주마등을 보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숨이 꺼지는 부상자들의 눈이 유리 같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전투에서 흘리는 피는 폐병에 걸린 병자의 것처럼 붉었지만 그렇게 죽음이 내린 자리에는 까만 타르와도 같은 웅덩이가 퍼져나갔다. 폭거는 그 끝없는 나락 속에서 살아있는 정의였다. 마치 바닷속에서 형태를 알 수 없는 어둠이 기어다니듯 보이지 않아도 사방을 맴돌고 있는 그 검은 새들. 까마귀들. 우리 안에 때로는 너무 짙고 흑연 같이 은은해 표현 할 수 없는 아름다움들..

그것들은 마족들에게서는 뿔로 표출되었고 다리에서는 전장으로 나타났다.

와론은 그 심연을 다리의 전투에서 다시 보았다. 그는 오랜 날들이 스쳐지나가도 여전히 처음 투구를 썼던 날의 자신과 맞닿아 있을 것이다. 늘 무언가에 맞서내고 있다. 싸움이 주는 환희와 활력에 그는 열광할 수 밖에 없다. 그 잔인하고 도착적인 광란은 그가 놀리는 창대에서 드러나곤 한다. 와론 속에 도사리는 전투와 강자에 대한 집요한 악.

어쩌면 그는 서쪽다리에서 벌인 전투를 단순히 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와론 같은 기사의 태도는 누군가에게 종용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 테면 싸우지 못하는 기사. 사슬에 얽매인 기사들에게 그와 함께 족쇄를 허물고 날뛸 것을 종용했으며 그렇게 기어스를 깨버리고 날아오르는 이들을 다시 사냥해 땅으로 곤두박질 치게 했다. 그리고 사냥감의 마지막 열기가 사그라들 때까지 지켜보았다. 마치 누구도 불꽃을 잡을 수 없듯이 그렇게 타오르는 것이 기사라고 그는 믿었다.

그러나 저자의 친구는 눈이 덮인 산맥에서 끝내 자신의 힘으로 살아 돌아왔고, 그 소설가야 말로 전쟁 중에 전사했다.

와론은 밤중에 버르적히 부는 골풍을 피해 작고 투명한 램프에 담은 남폿불을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불꽃의 끄트머리가 누군가의 머릿결 같다. 치이이-. 와론은 공상을 꺼트리듯 램프 위로 남은 물을 부어 불을 잠재운다. 내일은 원하는 것을 찾으리라는 예감이 서린다.

그는 의식을 벗어나 서서히 밤의 사해 속으로 침잠했다.

며칠동안 나쁜 날씨가 계속되었다. 망망대해 같은 눈의 바다. 얼음의 바다. 무엇도 완전한 흰색도 푸른색도 아니며 천지가 무색이다. 밤새 추위에 시달린 와론은 이단 같이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절벽의 틈을 건너 뛰었다. 어서 밤이 온다면 그는 누구의 눈에도 쉽게 식별되는 위험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의 편과도 다름 없는 존재, 늘 그를 배척하고, 또 숨겨주기도 하는 친구같은 그 존재는 대륙의 어디를 가도 시간과 함께 찾아온다.

말토의 법사-이름이 파린일 것이다-의 유추는 생각보다 들어맞는 구석이 있다. 말토에게 뜯은 지도는 해석해 와론이 가진 것에 대략적인 위치를 환산할 수 없는 종류였다. 유동하는 모래의 산이 가득한 사막과 달리 몇 백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달과 같은 땅. 그러나 무엇도 뚜렷한 경계선이 되어 줄 수 없었기에 마법사들은 지형을 법칙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했다. 돌을 떨어트려 맑은 소리가 세 번 이상 나는 빙하들은 표준점으로,

그로부터 동쪽 산맥의 주봉을 따라 나아가면 항상 숲을 만나게 된다. 숲에서 주목나무를 만날 때마다 방향을 나침반보다 1/4만큼 더 깊이 잡으라. 나아가면 하루 안에 두 개의 쌍둥이 꼴의 언덕을 지나게 된다. 눈보라에서 빠져나가려면 왼발로 원을 그리며 걸으라. 길을 잃으면 다시 표준점이 되는 빙하를 찾으라….

세상의 끝에서 발현되는 이상성으로 레툰에서 대기는 급격하게 차가워진다.

돌풍이 심해지며 마치 모든 것을 끝으로 쓸어가버리는 듯이.

와론의 망토 자락을 뒷편으로 휘날렸다. 회오리 바람이 날려 가루 눈이 프랙탈 같은 긴 꼬리 그리던 것이 한순간 물러서며 시야가 걷힌다. 지도대로 너른 빙원에는 좌초선의 흔적 같은 빙하가 여럿 있다.

혹은 끝으로 간다는 것을 고지하듯이.

와론은 그 중 한 얼음 조각 앞에 멈춰섰다. 하나의 행위가 화하여 돌이킬 수 없는 인과연.

힌셔는 얼음이 되어 있었다.

마치 얼어버린 소행성의 장미처럼.

대륙의 어느 곳보다 깊은 바다에 영웅은 잠들어 있었다. 그의 주변시계는 500년 전 이후로는 내내 겨울이었다.

“네가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기 때문에 언젠가는 별 것도 아니게 되는 날이 올 거야.”

거미의 말은 영웅조차 그 무게와 가치가 잊혀지고 땅에 떨어져 변질 될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들렸다.

명예의 시대를 연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

악마기사와 영웅의 이야기. 그 결말은 이러했다.

핏빛거미는 타락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은 힌셔에게 어떻게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와론은 공중을 헤집어 손가락을 얼음 위에 얹었다. 저도 모르게 푸른 손 끝이 떨리고 있었다.

결국 너도 이렇게 얼어버렸구나. 힌셔. 우리 둘 다 수도로 돌아가지 못했군.

거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와론은 북풍의 결대로 생긴 송곳같은 빙결에 손등을 대고 미끄러트렸다. 불을 피운 것 같은 흰 입김이 투구 틈으로 빠져나간다. 영웅의 손에는 그와는 다르게 무기가 없었다. 힌셔는 눈 속에 묻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악마기사의 본명은 물을 수 없었다. 그리고 힌셔에 대해서도.

힌셔는 그곳에 있었으나 아무것도 물을 수 없었다.

눈 하나가 손 위에 내려 앉았다. 결정이 녹아내려 눈물처럼 흘렀다. 와론은 저도 모르게 마지막으로 보았던 기억을 떠올려 냈다. 그 꿈을 꾸었을 때 그는 말토를 찾으러 가고 있었다.

석양은 태양 가까이 모여든 구름 사이로 선뜩선뜩 거물어 하늘이 피멍이 든 것 처럼 보였다. 성벽 아래 잔해를 쌓아 올린 돌무더기가 역광을 받아 사람의 모습 같이 기이한 땅거미를 드리운다. 


목이 잘린 시체는 이곳 사람들이 수습할 터였다. 그러나 힌셔에게는 등 뒤로 망루에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에도 불구하고, 동색의 갑옷만 남은 것처럼 내동댕이 쳐진 거미만은 여전히 살아있는 듯이 보여 그를 매장해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힌셔의 등 뒤로 사위가 다시는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보랏빛을 드리웠다.

“루놀, 먼저 돌아가.”


어디까지가 기사가 해야 하는 역할이고, 어디서부터는 스승으로 남을 수 있는 걸까? 스승님을 완전히 버려야 하는 가?

목을 베는 데는 망설임은 없었다ㅡ 거미의 머리채를 끌어 잡자 눈이 마주쳤다. 힌셔는 머리 뒤로 펼쳐진 끔찍한 광경을 떠올렸다. 기사의 힘은 이런 방식으로 쓰여서는 안 되는가? 그것이 거미가 말하고 싶은 의도였겠지만 힌셔는 아무래도 좋았다. 기사는 옳은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들은 하등 검을 다루고 손에 피를 묻히는 자들일지언정 무엇보다 단단한 벽이다. 스승이라고 이미 손에 피를 묻히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랴.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투명한 잿빛눈과 마주쳤다. 햇빛이 투과하여 여러 겹의 빛을 띄는 동심원의 눈에서 힌셔는 마지막 말을 읽어낸다. 누군가 힌셔에게 칼을 건넸다. 검신을 세게 휘둘러 자신을 보고 있는 목을 베어냈다. 거미는 비명을 내지 않았다.


"수도에 돌아가지 마라 힌셔. 황제는 너를 죽이려고 들 사람이야."

오백여 년전. 황성의 한 켠에는 거대한 괴물이 도사리고 있었다.

토벌전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기사들은 기어스를 맹세하고, 힌셔는 수도에 여전히 남았다면?

수많은 기사들이 죽었을 것이다.

아니다, 거미는 기사를 베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힌셔가 자기와 싸우기 위해 올 것이라고 확신했겠지.

내 손에 살해당하려 한 스승.

나라면 용서하지 않았을 거다. 힌셔.

와론은 얼음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투구 틈 밖으로 보이는 서리가 내린 손이 얼음에 들러 붙는다.

너의 스승도, 너를 찾지 않은 기사들도

이곳에 영웅을 오백년이나, 이 쓸쓸한 레툰에 홀로 방치한 말토도. 너를 위로 한다며 위선을 떠는 이들도.

기어스는 명예가 아닌 족쇄. 너와 나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에게는 힘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주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앞으로 네가 기억되는 한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황제의 명령만으로 기사들은 기어스를 맹세하지 않아.

그러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악당이 필요하겠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너도 알다시피 하나 뿐이다. 힌셔. 이것은 명예의 탄생이 아니라 두 힘의 겨룸. 악마기사의 학살은 악행이 아니라 기사의 힘을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이렇게 강한 힘을 보유하는 것에 동의하나? 그러나 힘을 직접 빼앗을 수 없다는 것은 너도 알고 있겠지.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 알겠지.

악하고, 강하고, 대적하는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약자를 구제하는 기사.

바로 네가(내가) 그런 세상의 시작을 여는 거다, 힌셔.


칼날 위에 선 것 같이 차가웠던 그 날의 밤을 그는 살아서 맞지 못했다. 쌀쌀한 공기에 입김이 나왔다. 거미라는 기사가 죽은 날에는 저녁놀에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힌셔는 잔해에서 일어나 걸어가며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창을 찾지 못하고 꽂아 둔 부러진 미늘이 있는 자리에 스승은 여전히 구부정하게, 힌셔를 보지도 않은 채로 앉아있다. 다만 건틀렛을 낀 왼손바닥을 보이게 하여 손을 흔들어보인다.

거미가 힌셔를 두고 수도를 떠났을 때와 같은 다정한 얼굴은 볼 수 없었다. 힌셔는 돌무덤 옆 산산히 부서진 성벽의 잔해 위에 앉은 거미가 그를 부르는 것 같아 자꾸만 눈을 떼지 못하며 걸었다. 

이 영웅이 깨어나 진실을 마주할 날이 올까?

고체의 어둠 속에 숨길 수 없는 걸 감추고자 친 몸부림이 만천하에 드러날 날이? 물 위로 떠오를 날이? 와론은 고개를 젓는다. 과거의 일이 그대로 묻혀 전설이 되면 실체는 사라진다.

모래에는 붉은 쇠가 섞이고 거미가 그려준 지도에는 누군가 피와 잉크를 쏟아버렸다. 그래서 힌셔는 길을 찾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500여 년의 세월을 젖히고 얼어붙은 힌셔를  발견한 것이다. 그를 너무나도 봐온 와론은 익숙한 친근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힌셔가 깨어나는 날 악마기사도 다시 돌아올 것과 다름없다. 영웅은 흑과 백 측이 동시에 등장하는 법이다. 하얀 말을 먼저 움직이면,

어딘가에서 검은 말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듯이.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머니 기사들은 다시 도리를 역행할 수 밖에 없다.

레툰을 벗어나면 힌셔도 다른 계절을 맞을까. 그에게 다시 봄이 올까?

눈은 동토가 차츰 녹아내린 또 다른 세상 위에서는 눈물이 되어, 대지로 스미고 있을 것이다.  


빈란드 사가ost가 아니었다면 이 연성은 존재할 수 없었다네요. real warrior 나 fire, rusty sword도 같이 들었습니다. 

소정의 후원박스를 만들었습니다. 저의 덕질 장려금으로 쓰인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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