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카시] 애정의 형태
기분이 간지러웠다. 속은 부글부글 얇게 끓었고 눈을 질끈 감고 싶다가도 그럴 순 없었다. 카시마의 얼굴이 눈앞에 있으므로, 감정에 휘둘려 손해를 볼 순 없다. 이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카시마의 공연을 몇 번 놓쳤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후회할 것이다.
데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호리는 카시마의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미지근한 온기와 겨울바람의 쌀쌀함이 맞부딪쳤다. 허구한 날 목덜미나 끌고 가는 게 일상이라 키스도 한 마당에 어쩐지 손 잡는 게 더 부끄럽게 느껴졌다. 아예 안 잡아보진 않았나. 카시마가 워낙 스스럼 없이 스킨쉽을 하는 스타일이라 그런가 했는지 안 했는지 자체가 가물가물하다.
확실히 껴안는 건 자주 하지. 백허그든 그냥 허그든 덥석덥석 하는 바람에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오히려 연애를 하고 난 후에 더 당황스러워 한 것이 코미디다. 난 왜 그런 일들을 자연스럽게 여겼을까. 그것조차 모를 만큼 스킨쉽에 허물없는 녀석이라는 것이다. 물론 친한 사람들 한정이지만. 의외로 '공주님들'과는 전화번호 교환도 하지 않는 선이 분명한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입에 발린 말은 줄줄이 쏟아내는 가벼운 놈이고.
"손이 작네요! 마치 맺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장미 봉오리 같아요."
"거기까지 해라."
"이런 말은 받아주셔야죠. 남친인데."
"무슨 상관이 있다고. 공주님들한테나 해."
"에이, 질투나 하지 마세요."
"분명히 말하는데 그건 질투가 아니라 네가 부 활동도 안 오고 공주님들이랑 노는 것에 대한 분노다."
"그렇게 포장하셔도 전 못 속여요."
"됐다, 됐어."
"여린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제가 잘 감싸줄게요."
"손 크기도 비슷하면서 무슨."
한손에 꼭 잡히는 건 노자키와 치요 커플에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카시마의 손가락 사이즈는 어떻게 될까. 노자키가 그리는 만화를 보면 손을 잡는 순간 사이즈를 재던데. 애초에 아무런 도구도 없이 손 한 개로 사이즈를 가늠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전에 카시마가 선물한 반지-디*니 영화에나 나올 법한 티아라 모양에 바로 의도를 눈치채고 되돌려준-가 생각났다. 이 녀석은 언제 잰 거람. 손 하나 제대로 잡은 적이, 내 기억상으론 없는데 말이다. 그때는 사귀지도 않았는데.
아무리 생각을 돌려봐도 얼굴이 홧홧하다. 손의 온기는 바람을 타고 오른 건지 얼굴에만 잔뜩 몰린 듯하다. 손은 바람에 차게 식었는데 마주 잡은 틈새엔 미열이 느껴진다. 그냥 느낌인가, 아니면 땀이라도 고였나. 손을 놓지 않는 이상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집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를 일이라는 거다.
"선배, 손 안 시려요?"
"조금."
"그래도 안 놓을 거죠?"
"놓으면 좋겠어?"
"아뇨!"
그러더니 방실거리며 마주 잡은 손을 제 주머니에 넣는다. 하여간 노자키 좋아할 일은 다하는 녀석이다. 그리곤 호리의 손등 위로 가볍게 손가락을 움직인다. 누가 보면 데이트라도 가는 줄 알 것이다. 사실 집에 가는 게 좋은 건가. 그럴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넌 춥지도 않아?"
"하나도요."
"이 날씨에 얇은 코트면 엄청 추울 것 같은데."
"괜찮다니까요. 그런 말은 만났을 때 하는 말 아니에요? 선배, 긴장했죠?"
"만났을 땐 낮이었고 지금은 밤이라 쌀쌀해서 그러지. 긴장은 무슨."
"그러기엔 얼굴이 빨간데. 선배도 별로 안 춥겠다. 다행이네요."
자기도 새빨간 주제에. 카시마의 성격이라면 추위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니 반박도 할 수 없다. 반박하다 놀림 당하는 바에는 그냥 얌전히 얼굴 구경이나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딴 생각, 딴 생각. 생각을 돌리면 열도 저 멀리 날아가 줄 지 모를 일이니.
내가 카시마의 손을 살핀 적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치료해줄 때 말고는 없었다. 곧게 뻗은 손가락 마디마디나 정갈하게 손질된 손톱을 매만졌다. 얼굴을 안 볼 수 없으니 손으로 더듬으며 형태를 짐작했다. 자주 쓰는 손가락에 얕게 베인 굳은 살, 남들보다 조금 긴 듯한 손가락 길이라든가, 전혀 거칠지 않은 살결의 모양을 촉감으로 느껴본다.
카시마에 비하면 호리의 손은 거친 편일 것이다. 나무 목재고 못이고 또 배경을 그리기 위한 자 따위를 종일 붙들고 있기 일쑤니까. 그런데도 카시마의 손은, 곳곳에 굳은 살이 박힌 투박한 손이 아니라 공주님 손이라도 쥔 듯 가볍고 상냥하게 호리의 손을 감싸 안았다. 그 의도가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오해가 아니라 카시마의 친절한 성격 탓이길 바랄 뿐이다. 사실 전자의 가능성이 너무나도 컸지만 이런 설레는 상황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으므로.
"선배, 이쯤에서 키스할까요?"
"넌 무슨 카페 들어가자는 투로 그런 말을 해."
"분위기도 좋고. 슬슬 그런 타이밍인가 싶어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 분위기, 방금 네 발언으로 전부 날아간 것 같은데."
"아녜요. 잘 느껴보세요."
"느끼긴 뭘 느껴. 공기의 흐름도 아니고."
"됐으니까 들어와요."
"스모 경기하냐?"
투덜거리긴 했지만 호리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대부분의 스킨쉽 진도가 이렇게 진행되었으므로 이제 와서 싫다 해봤자 호리만 손해인 것이다. 기분이 간지러웠다. 속은 부글부글 얇게 끓었고 눈을 질끈 감고 싶다가도 그럴 순 없었다. 카시마의 얼굴이 눈앞에 있으니 감정에 휘둘려 손해를 볼 순 없다. 이 얼굴을 보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만 같았다. 카시마의 공연을 몇 번 놓쳤을 때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후회할 것이다.
호리는 이제 카시마의 얼굴을 보지 않고도 카시마를 그릴 수 있다. 어쩌면 아주 먼 옛날부터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시험 준비를 위해 방학에 틀어박혔던 며칠과 노자키의 집에서 마감 지옥에 시달린 수일 동안 손에 쥔 연필과 자보다 머리 속이 더 자세한 그림을 그려냈다. 찰랑찰랑한 짧고 푸른 머리카락, 날렵하게 올라간 눈꼬리, 남들보다 조금 더 짙은 속눈썹 따위를. 이젠 카시마의 손과 이 순간까지 묘사할 수 있다. 싸늘하게 뺨을 어루만지는 공기, 손에 닿는 부드러운 머리칼과 약간 보풀진 얇은 코트,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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