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 나는 펫 - 4부 (완결)
나는 펫
4부
시동을 걸고 어깨와 뺨으로 휴대전화를 고정한 채 재빠르게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고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일전에 급출발을 해 접촉사고를 냈던 큰딸 계집애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절대로 급출발을 하지 말라고 기를 죽여댔던 당사자인 자신이, 미친 사람처럼 엑셀레이터를 콱! 밟아버린 것이었다. 가죽 시트에 물이 흥건한 느낌이 찝찝했지만 세아는 온통 제 집으로 신경이 쏠렸다.
- 어, 언니가 전화 받지도 않고... 그래서 혹시나 해서...
"연락이 안돼?"
- .......흐으윽 흐윽...
"수아야, 울지말고 천천히 말해봐. 나 지금 최대한 빨리 집으로 가고있어."
- 우리언니 죽어요...흐으으으......어어어엉.....
"....크리스틴?"
이미 대성통곡 수준으로 울어재끼는 수화기 너머의 크리스틴은, 자신이 알던 그 똑똑한 둘째 딸내미가 아니었다. 세아는 최대한 신호를 비껴가려고 있는 힘껏 밟아댔다. 신호가 빨간불로 바뀌면 욕지거리와 함께 그대로 우회전을 한 다음 바로 유턴을 해 최대한 달렸다. 핸들을 꼭 안고 달리는 사람처럼 전면 유리로 바짝 몸을 밀착시켜 달렸다.
달리는 건 자동차의 엔진인데 제가 다 숨이차는 것 같았다.
웅얼웅얼...흐느낌 사이로 말하는 크리스틴의 말을 세아가 최대한의 이성으로 정리를 하자면, 큰딸 계집애가 미국으로 간지 얼마되지 않아 어마어마한 토네이도가 강림했단다. 그때 길을 잃고 반나절이상을 사람하나 없는 동네의 편의점 구석에 있었는데 그게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었다. 문제는 그것 때문에 천둥이나 번개가 치면 애가 발작수준으로 벌벌 떤다는 것이었다. 옆에 누가 없으면 심장에 쇼크가 와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언니 괜찮을꺼야. 너는 울지말고 내 전화 기다려. 학원 선생님이랑 같이 있지?"
-....네.
"그래. 곧 다시 전화줄게."
세아는 전화를 끊자마자 다부지게 핸들을 잡았다. 태풍이 오긴 온 것인지 늦은 밤인데도 도로가 막혔다. 지름길이나 샛길로 보이면 일단 바로 차를 넣었다. 도로에 있는 턱들에도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차체가 아스팔트에 쿵쿵 부딪히는 소리를 들어도 그냥 무시했다.
그렇게 겨우 동네 초입길에 들어섰는데, 하필 어느 집의 커다란 조경수가 모조리 뽑혀 차가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유 시발!"
아, 얼마만에 질러보는 쌍욕인가. 세아는 핸드백을 뒤져 머리끈으로 머리를 질끈 묶고 트렁크를 열었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골프화로 갈아신었다. 그리고 차문을 닫지도 않은 채 거기서부터-
냅다 달렸다.
정말 미친듯이.
그냥 달리다가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달렸다.
하필 제가 달리는 방향이 태풍의 방향과 역방향인건 또 뭐란 말인가. 머릿 속이 하얗게 변했다. 회사고, 청담동 흑진주고, 내일 출근이고... 나발이고...
그냥 그 순간엔,
왜 그렇게 크림 스파게티를 만들어 달라던 그 앵앵 거리는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지 몰랐다.
세아는 몰아치는 태풍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그냥 달렸다. 퍼스널트레이닝으로 만든 멋진 각선미와 예쁜 근육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숨이 차서 그런건지, 몸이 꽉 막히는 느낌이었다. 금방이라도 울컥 저도 모르게 주저앉아 버릴 듯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태풍보다 더 세게 몰아치는 것이 있었다. 제 마음 속에 '후회'라는 이름의 천둥과 번개였다.
세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살아 있어...
그냥 얌전히 누워 있어...
내 앨범 보면서 깔깔 거리며 뒹굴거리고 있으란 말야.
코 했니 눈 했니 가슴 했니 어쩌구 저쩌구 떠들어대도 좋아.
경찰서로 소환시켜도 좋아.
백화점 명품관에서 머리채 잡고 싸워도 돼.
운전하고 싶다면 해도 돼, 옆에 내가 타면 되니까.
집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놔도 좋아.
내 천연가죽소파 위에서 콜라를 질질 흘리며 마시고 있어도 좋아.
텔레비전을 크게 틀어놓고 있어도 좋아.
맨날천날 화장실 불을 켜놔도 좋아.
크림스파게티...버섯 빼달라고...앵앵...거려도...좋으...니까....
......
......
......
......
.........!!
마침내 제 집이 보이자 세아는 숨을 몰아쉬며 대문을 부서뜨릴듯 온 몸으로 밀고 들어가다가, 이내 다리힘이 풀려 비틀 거리며 주저앉았다. 여전히 비바람이 몰아쳤다.
"야 이 기집애야!!!!!!!!!!!!"
마구 몰아치는 비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제 눈에 비취는 익숙한 실루엣이 있었다. 현관문 앞에 쭈구리고 앉아 있는 온통 흠뻑젖은 작은 실루엣. 제가 소리를 지르자마자 온 몸을 덜덜 떨며 번쩍 고개를 들어 저를 쳐다보는 고양이 한 마리. 눈이 녹아버릴 듯 빨갛다. 하얗다 못해 시퍼렇게 질린 입술을 얼마나 깨물어 댄건지 아랫입술에 잇자국이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침인지 눈물인지 두뺨과 입가에 흥건한 액체들을 닦아대며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이 얼마나 처연해 보이는지 보는 사람이 표정만 보고도 같이 눈물을 터뜨릴 정도였다.
얼마나 울어재꼈는지 더이상 울음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끄윽, 끄윽거리던 계집애는 이내 저를 보자마자 엉금엉금 기어서 다가왔다. 네 발로, 손바닥으로 진흙탕인 바닥을 짚어대며 저를 향해 세아, 세아- 하고 불러대며 다가왔다. 작은 정원의 잔디밭엔 온통 흙탕물인데 그것 따윈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오로지 어미만 찾아가는 새끼고양이처럼. 그 모습에 세아는 저도 모르게 목이 꽉 막혔다.
"왜 이제 와아아-"
"너 죽을려고 작정했어!?"
"흐어어엉...."
"왜 밖에 나와있는건데!"
눈물 콧물 침이 뒤섞인 얼굴로 제 가슴에 와락 안기는 계집애는 "잘못했어..."라는 말만 수십 번을 되뇌였다. 세아가 강제로 일으킬 때까지 품에서 떨어지지 않고 세아의 가슴께에 얼굴을 쳐박고 넘어갈듯 울어댔다. 그리고 이내 탈진해버리고 말았다. 축 쳐져버린 사지에 그대로 그 큰딸 계집애를 들쳐업고 겨우겨우 택시를 잡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건지 저도 알 수 없었다.
일전의 변호사가 일러준 그 전담의료센터의 이름을 대고 택시기사의 도움까지 받아 큰딸 계집애를 응급실에 옮겼다. 병원에서는 한참동안 아무도 제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주지 않았다. 불안함에 세아는 이미 오래전에 고친 습관이라고 믿었던 손톱깨물기만 날이 새도록 했다.
"......"
태풍은 갈수록 심해지는데 응급실 밖, 로비로 이어지는 통로는 너무도 고요했다. 의자에 잠시 앉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쉴새없이 바닥으로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자신의 머리에서, 눈에서, 코끝에서, 입과 귀, 옷의 소매와 어깨, 손가락과 신발에서도 물이 한 가득 배어나왔다.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세아는 크리스틴에게 빨리 연락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 휴대전화를 꺼냈다. 물기가 가득한 휴대전화가, 다행히 제대로 빛을 띄웠다.
"....이 바보가."
그러나 세아는 이내 정지된 사람처럼 멍하니 휴대전화만 바라봤다.
메시지들이 알림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미스윤 잇츠뤠이닝...]
[우산가져갔어?]
[미스윤 나 텔레비전 크게 틀어놔도 돼?]
[미스윤 언제와?]
[언제와?]
[크림스파게티 안 해줘도돼 빨리와]
[전화 받지 않아 제니 전화할 곳 없어]
[집에 못 가겠어 번개쳤어]
[미스윤 이불 덮고있어두 돼?]
[무서워]
[언제 와?]
[언제 와?]
[선생님 잘못했어 나 무서워]
[어서 와]
[보고싶어 베리머치, 제니 지금 떨려]
[미안해요 잘못했어 빨리와]
[세아언니 미안해요 어서와줘]
[제니 울고있어 너무 무서워]
[세아]
[잘못했어요]
[세아]
[빨리 응?]
[빨리와]
[언제 와?]
[언제 와?]
[보고싶어]
[미안해요 제니가 맨날 미안해]
[잘못했어요 얼른와]
[세아]
[세아]
[세아언니]
.
.
.
.
.
..............정말....
...............이 바보같은 계집애가........
.....................................
휴대폰을 두 손으로 꼭 잡으며 세아는 한동안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봤다.
-
"물!"
"정수기."
"물!"
"정수기."
"무울!"
"정수기!!"
"히잉....다리아파."
정수기가 무슨 신호등이라도 건너야 있나. 부엌의 정수기를 무심히 턱으로 가리키던 세아를 보며 입이 삐죽 튀어나온 고양이를 보다가 세아는 결국 가을의 잇백, 이라는 섹션을 보다말고 한숨을 푹 쉬며 잡지를 덮고 일어섰다. 그때서야 히히히... 웃음이 들린다. 저 고양이 같은 년...3년이 언제쯤 빨리가려나.
"세아! 나 아이스티..."
"또! 또! 언니라고 불러. 하여간 몇 번을 말해야 하는거야."
"언니이~ 언니이~"
"......"
결국 복숭아 아이스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시트콤의 한 장면인양 생각하기로 했다.
그 때, 그렇게 기절까지 해가며 설쳐대던 고양이는 불과 삼일만에 의식과 동시에 식욕까지 회복하며 태풍이 쳤던 그 사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엄청나게 저를 부려먹고 있다.
게다가 그 사건 이 후로 세아는 내심 청담동 흑진주 내외와 직속상사에게 조금이나마 신뢰를 잃었을꺼라 생각했지만, 웬걸...
"우리 큰 애가 어디서 그렇게 사람을 의지하는 애가 아닌데... 정말 믿을 수가 없어... 윤 실장... 당신은 우리의 은인같은 존재야."
청담동 흑진주는 이렇게 말했다.
더 가관인건 제 직속상사인 상무이사의 말이었다.
"윤 실장이 아니면 살 수가 없대."
"네?"
"제니퍼, 그 큰 따님! 아주 참한 아가씨지?"
"......"
모두 다 조용히 하세요, 라고 말해주고 싶은 걸 겨우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통장에 찍힌 어마어마한 보너스 때문이었다. 여태까지 그런 보너스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세아는 결국 불만은 커녕, "제가 좀 사람을 잘 돌봐요. 호호"라고 쐐기를 박으며 그 날 이후로 더 맛있게 크림스파게티를 만들어주기 시작했다. 게다가 하필 작은 딸인 크리스틴이 대학입시에서 대박을 터뜨리건 또 무슨 타이밍인가. 이에 청담동 흑진주는 "윤 실장, 우리 한국가면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게."라며 마치 백지수표라도 주는 듯한 어마어마한 말로 세아를 두 번 혹하게 했다. 물론, 크리스틴의 키가 훌쩍 자란 것도 세아가 신경 쓴 덕분으로 멋지게 오해해줘서 세아는 한동안 청담동 흑진주 내외의 찬양과 함께 회사에서 전설적인 성과를 만든 팀장으로 그 동경과 질투의 눈빛을 한 몸에 받아야했다.
"나랑 놀아줘. 책 그만 봐."
"나 내일 회의있어서 일찍 가야 해. 이제 놀만큼 놀았으니까 너네 집 가. 나 곧 자야해."
"아직 크림스파게티가 제니의 뱃속에 이만~큼 있어. 소화시켜야 해."
"너네 집에서 하면 되잖아. 그리고 크리스틴도 곧 올..."
"크리스틴은 합격해서 이제 프뤼덤이야. 맨날 놀아. 늦게 와. 나빠. 집에가면 나 혼자란 말이에요."
"......데려다 줄테니까 옷 입어."
"싫어."
"......야."
"왜 여기서 못자게 해?"
크리스틴의 입시대박으로 제일 기뻐한 건 큰딸 계집애였다. 정말 제 일처럼 기뻐하길래 세아는 그래도 애가 언니는 언니구나, 하고 제법 기특하단 생각을 했는데, 그날 부로 고양이모양 베개를 옆구리에 낀 채 의기양양하게 들어와서는 세아의 침대 한 켠에 툭 던져놓는 것이었다.
"이제 크리스틴은 자유니까 나도 자유야."
"그거랑 내 침대에 기어들어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잘거야."
"야!"
요컨대, 이제부터 늦으면 자고가겠다, 라는 선전포고였다. 그러나 세아는 왠지 그것만은 내키지 않았다. 자고가는 것만큼은 안된다고 꼭 집으로 데려다주었다.
역시나 오늘도 자고가는 건, 안돼- 하고 세아가 어르며 큰딸 계집애를 일으켰다.
"왜 못자게 해?"
"너네 집..."
"그거 아니잖아아."
그래, 사실 저 조차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같은 여잔데, 동생인데.
사실 얼마든지 옆에서 재울수야 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럼에도 왜 본능적으로 그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늘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때나, 아니면 큰 딸 계집애가 저를 똑바로 쳐다보며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그 진지한 얼굴로 물어오면 세아는 늘 묘하게 찝찝한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마주하기가 겁이났다.
"가서 너 잘 때까지 있을 테니까 일단 나가자."
"왜애- 왜애- 나 여기서 못 자게 하냐구우."
어찌되었든, 이 고양이를 내쫓아야했다. 아마 오늘도 침대에서 이 고양이가 잠들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자신이 잠들 때까지 절대로 나가지 말라는 고양이년을 위해 새벽까지 양을 1984마리까지 세어주며 버티다 생애 처음으로 무단결근까지 해버렸다. 그 다음 날까지 몸을 추스리지 못해 조퇴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냥... 그건 안돼."
"응?"
"야, 넌 바로 옆에 네 집 놔두고 왜 꾸역꾸역 여기서 자겠다는 거야? 그게 더 이상하잖아."
"어? 어..."
갑자기 조금 당황스러운 듯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는 큰딸 계집애였다. 오늘따라 그 천연덕스러운 눈매가 정말 고양이의 꼬리처럼 예쁘게도 잘 빠졌다. 세아는 그 새초롬한 눈매 속에서 때굴때굴 굴러가는 눈동자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맞은편에 앉아있던 제니가 폴짝 뛰어와서 세아의 옆에 앉는다. 그리고는 빤히 세아를 쳐다보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있지, 오늘은 나 혼자 갈게."
"됐어. 데려다줄테니 옷 입어."
"아니아니, 괜찮아요."
얘가 웬일이래. 세아는 의아하게 눈썹을 치켜뜬 채 제니를 바라보았다.
"있지이..."
갑자기 새초롬한 표정을 짓던 '고양이년'이 정말 고양이같은 표정으로 저를 묘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대디가 그랬어. 나 수석졸업하면 한국에 돌아올 수 있게 해주고,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해준다구..."
"네가 퍽이나 수석졸업하겠다. 너네학교에서 너 졸업 시켜준 것만 해도 감사하게 생각해."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린다. 세아는 오늘따라 묘하게 저를 향해 눈을 반짝이는 큰딸 계집애에게서 요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수석했어! 1등!"
"....?!"
헐. 도대체 어떤 학교길래 이 계집애가 수석졸업을 해? 듣자하니 유명한 명문대라며. 미처 표정관리를 못하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도 안돼, 라고 써붙여놓은 얼굴의 세아였다. 제 그런 표정에도 큰딸 계집애는 여전히 싱긋 웃으며 이내 칭찬을 해 달라는 듯한 뿌듯한 표정을 짓고있다. 이건 정말 말도 안돼. 얘가? 수석? 수석이면 1등이라는 거잖아. 마른침을 삼키며 세아는 당황스러움을 최대한 감추고, 그래도 예의상 칭찬은 해야겠다 싶어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했다.
"축하해. 정말...음... 지금 진심으로 놀랐어."
"응! 고마워~ 머리 쓰다듬어 줘."
"......"
솔직히 연필도 제대로 못 잡고 젓가락질도 제대로 못하길래 하는 것마다 허탕치는 맹한 계집앤 줄 알았다. 그래서 늘 세아는 부모 잘 만난걸 감사하게 여겨라,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금 제 옆의 큰딸 계집애의 말은 상당히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다. 빙긋빙긋, 아주 기분좋게 웃어댄다. 공중에서 잠시 멈칫하던 손을 그대로 큰딸 계집애의 뒷통수로 살포시 올렸다.
"자, 이제 진짜 갈 시간이야. 언니 피곤해."
"그래서 있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어제 대디가 전화가 온거야."
"일어나봐. 옷 입자."
"그래서 내가아 아주아주 엄청난 용기를 냈어."
"응?"
"아이참! 갖구싶은 거! 말하라구 했었다고 했자나, 우리 대디가. 왜냐면 제니가 1등을 했으니깐."
"그래그래... 일단 일어나, 옷 입으면서 이야기 하자."
아주 자기가 걸어온 흔적대로 옷을 벗어놓은 고양이년. 비바람에 흠뻑 젖은 저 옷들은 정성스레 세탁을 해서 갖다 줘야했다. 도대체 오기만 하면 일거리를 안겨주는 신기한 애가 아닐 수 없었다. 세아는 제 옷 중에 아무거나 집어왔다. 이미 세아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던 제니는(속옷은 미리 세아가 만일을 대비해 손님용으로 새것을 준비해두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속옷조차 공유할 애라고 믿어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세아가 가디건을 내밀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실이 운동장이라도 되는 듯 뱅뱅돌며 세아를 피해다니는 것이었다.
"....야. 그만하자, 응?"
피곤함과 인내심이 뒤섞여 약간 짜증이 밀려올라오는 세아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억지로 어금니를 깨물며 웃었다. 다시금, 결혼은 하지 않겠다,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혹여나 이런 애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고 생각하며.
"나 오늘 진짜 자고가면 안돼?"
"안돼."
".....진짜?"
"응."
우뚝.
한참 뱅뱅 돌며 약올리듯 조잘거리던 큰딸 계집애가 갑자기 우뚝 멈춰선다. 그리고는 저를 향해 휙 몸을 돌리더니 차분하게 내리깐 눈동자를 파르르 올려 시선을 똑바로 맞춘다.
".....그럼 한 번만 키스해줘."
"너 미쳤니?"
"그것도 안돼?"
"......너 지금 무슨 말 한 줄 알아?"
"알아. 나 똑똑해. 나 수석졸업생. 1등이야."
"장난치지 마."
"장난 아니야아."
"......."
뭐지, 이 전개는? 새로운 장난의 종류인가- 아니면 개방적인 아메리칸스타일의 조크야? 세아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쓸어넘기며 고개를 갸웃했다. 째깍째깍, 앤티크문양의 벽걸이 시계에서 초침이 돌아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세아는 들고 있던 가디건을 스윽 내리고는 제 앞에, 정말, 신기하게도, 거의 처음 본 것 같은 고양이년의 진지한 얼굴에 두 번 당황해야했다.
.....얘...그 쪽이었나?
그...
이 순간, 세아의 머릿 속은 그때의 태풍만큼이나 오만가지 생각들이 몰아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개인적인 취향을 존중하면서 완곡하게 거절할 수 있을까. 세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틈에 제 앞으로 바짝 다가서는 고양이 계집애의 움직임에 세아는 저도 모르게 상대가 다가선 만큼 뒷걸음질 쳤다.
"무서워?"
".....무슨소리야."
"키스 하는 거."
"그게 왜 무서워?"
"그럼?"
"언닌.....그 쪽 아니야."
"응, 나두 아니야!"
"....?"
이게 뭔소리야?
이 기집애는 대화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상대방의 이해를 혼란스럽게 하는 재주가 있는게 분명했다. 세아는 갑자기 제 목에 팔을 두르고 뒷꿈치까지 올리는 고양이의 행동에 저도 몰래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작스러웠지만 먼지만큼의 위화감도 없는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것이었다.
꾸욱, 작게 앙다물어진 입술의 끝이 몰캉하게 제 입술을 눌러온다. 평소에 그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스파게티를 먹어대던 장면만 봤기 때문에 이런 느낌이라곤 생각을 못했다. 게다가...
키스, 가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입술만 끈덕지게 눌러올 뿐이어서 세아는 그 짧은 순간 이 상황에 대해서 정리를 해야만 했다. 도대체 이게 뭘까. 이 행위를 어떻게 정의해야할까. 그쪽이 아니라면, 이건 그냥 친한 언니동생끼리 하는 키스,
일리가 없잖아. 게다가 키스라며? 왜 입술을 벌릴 생각조차 않는거야. 게다가 이 고양이년...
"푸흐흐...크크..."
제 입술에 그 요망한 입술을 붙인 채 웃고있다.
"야, 뜨. 으스..."
"바보. 지인짜 바보야."
".....뭐하는거야?"
한참을 웃더니 그제서야 제 목에 둘렀던 팔을 풀고는 새촘하기 그지없는 눈길로 저를 올려다보며 눈을 휘어뜨린다. 세아는 진심으로 지금 어떻게 대꾸를 해야할 지 몰랐다. 그런 제 모습을 즐기는 듯 고양이 계집애는 연신 입을 가리며 까르르 거린다. 입을 맞췄다. 끝. 이게 모든 상황의 다다. 그런데 왜 생각보다 위화감이 들지 않는걸까? 마치 너무 자연스럽게, 마치 연인처럼, 정말 그런 느낌으로 한 스킨십같아서, 여자랑 뽀뽀를 했다는 사실보다 그 뽀뽀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게 더 황당하고 놀라운 세아였다.
"키스했어."
".......키스는...아니지....않아?"
"미국에선 이것두 키스야!"
"....아..."
"더 진한 걸 원하는거야, 당신?"
"....너 나가."
"한 번 하니까 또 하고 싶지?"
"......"
"그러니까 내꺼해. 내꺼하면 평생 내 입술 공짜야. Free!!"
".....너 다른 사람에게도 이래?"
"놉! 온리유!"
한 마디도 지지 않고 야옹야옹 되받아친 고양이년은 아직도 벙찐 채 멍한 얼굴이 되어있는 세아를 비웃기라도 하듯 빙긋 웃고는 세아의 가디건을 받아 입는다. 그리고는 총총 현관으로 뛰어간다. 엉덩이에 꼬리만 하나 딱 붙여주면 완벽한 고양이 뒷태다.
아.
어쩌다가, 저런 고양이를 키우게 되었을까.
아니 어쩌다가, 저런 고양이에게 길들여지게 되었을까.
여전히 넋을 잃은 표정으로 세아는 현관에서 당연하게 제 신발을 신고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는 여자애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화분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하던 자신이, 어쩌다가 고양이, 아니 고양이 같은 여자애를 키우게 된건지, 아니 저 고양이에 말리게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리 연습해! 이제 당신 곧 내꺼 될꺼야!"
"......너...말이 짧..."
"대디에게 말해뒀어! 갖고 싶은 거 있어요, 아빠!"
"......."
"옆집 언니가 너무 갖구 싶어요!"
"......?!"
뭐라고 이 계집애야!?
세아가 숨을 한껏 들이키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거나 말거나 환하게 웃는 천진한 얼굴은 변함이 없다. 정말이지, 오늘 왔다간 태풍이 무색하게 아침에 막 뜬 햇살보다 더 밝고 맑은 얼굴이다.
"안녕! 사랑해!"
쾅.
세아는 아직도 가시지않은 입술의 온기에 그제서야 손가락으로 꾸욱 제 입술을 눌러본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방금까지 웃고 키득거리고 환하게 눈을 휘어뜨렸던 고양이 한 마리가 있던 현관문 앞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창문으로 옆집에 불이 켜진 것이 느껴지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안녕...사랑해...
라니.
제법 고양이 같이 말하네, 기집애.
흐음, 하고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던 세아는 이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뱉으며 제니가 벗어놓은 옷들을 주웠다. 사실은 전혀 수고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언제나 늘 그랬듯, 아무도 보지 않을 때마다 그 고양이같은 큰딸 계집애를 떠올리며 지었던 그 묘한 표정으로,
그러나 누구도 모르게, 빙긋.
"계집애...옷 벗어놓은 꼬라지하고는..."
내뱉는 말과는 달리 지극히 여유로운 그 표정은 영락없이 사랑스러운 고양이를 둔 주인의 그것이었다.
끄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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