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땅을 뒤덮는 그림자의 출처는 하늘이라, 펄럭이는 날개가 드리운 어둠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적란운을 가차 없이 흩뜨리고 데워진 공기를 사방팔방 퍼뜨린다. 화마가 집어삼킨 마을은 연신 열기를 내뿜었다. 열기가 손을 뻗기엔 머나먼 허공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열감에 눈을 찌푸릴 정도는 되었다. 아르카누스 용기사단 소속, 키릴 크뤼거는 대지로 착륙하려는 제 반려의 고삐를 세게 감아쥔다. 얼마 전에 풀을 먹인 가죽 고삐가 뻣뻣하게 그의 손아귀를 휘어 잡았다. 공기 중에 잿가루가 섞여 휘날리니 괜히 눈살만 찌푸렸다. 좁아진 시야 사이로 벽체가 타오르는 광경이 흐릿하게 비친다. 사방에서 바싹 마른 나무 타오르는 소리가 가득히 들려, 정신이라도 차리려는 듯 제 뺨을 툭툭 쳤다. 뒤돌아본 녹빛 용이 고개를 돌린다. 주인의 행태에 의문이라도 가진 듯이.
화마가 뻗치지 않는 공터에 겨우 착륙한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참담한 전경에 구겨진 미간이 더욱 깊은 골을 만들었다. 가을, 깊숙이 머리 숙인 밀 이삭의 색을 했던 키릴의 머리카락은 붉은 빛에 물들어 노을처럼 타오른다. 그래, 마을 전체가 그리 타올랐다. 마을 전체가······.
한 걸음 옮겨 다가간 곳엔 노인의 시체가 있다. 목에 자상을 입고 피로 웅덩이를 이뤘다. 내딛는 발에 쩍 달라붙는 핏물이 내심 불쾌하다. 군화는 검은색이었으며 누수된 지 조금 지나 검어진 피 웅덩이는 화마 때문인지, 더워진 공기에 더욱 빨리 삭은 것 같았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측하기는 싫었다.
두 걸음 옮겨 다가간 곳엔 여자가 하나 죽어 있었다. 긴 머리를 사방팔방 늘어뜨리고 축 늘어진 몸이 망가진 도기 인형이라도 목도한 것 같았다. 키릴은 이내 제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끌러 여자의 머리를 한데 모아 주었다. 여자는 생각보다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세 걸음 옮겨 다가간 곳엔 중년의 남자가 하나 쓰러져 있었다. 아직 살아 있는지 간간히 "그··· 그리핀··· 네 놈이··· 기어이···." 하는 신음 어린 말을 내뱉었다. 옷에 남은 흔적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자상이 열 몇 개는 되어 보이는데, 여전히 죽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 있는 사람이 내뱉는 말에 입 안이 말라 온다. 남자의 뒤로 짧은 단도를 들고 무념히 서 있는 사춘기 갓 넘긴 남자아이가 있다. (그는 아이라고 칭하기엔 꽤 어른의 태가 났고, 청년이라고 하기엔 아직 어린 얼굴이었다.) 아이의 뒤로 이미 죽은 것으로 추측되는 몸뚱이가 하나 더 있었다. 붉은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니까, 아이 하나가 마을 전체를 불사르고 구성원을 전부 죽여버린 듯한 그림이다. 항간에 떠도는 음유시인의 괴담도 이리 잔혹하지는 않을 테다. 아이는 악마와도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눈을 하고서도 붉게 보일만치 피에 절은 상태였다. 초점이 없는 눈동자, 단도를 역수로 쥐었지만 떨리지는 않는 손 끝. 살인을 처음 저질렀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얼굴이다. 키릴은 수없이 전쟁터에 차출되었고, 수많은 병사들을 보아 왔으며, 막 성인이 되어 창대를 꼬나쥐고 적군의 몸을 꿰뚫고, 꿰뚫다가, 결국 칼날에 목이 베여 전장을 굴러다니는 수급 중 하나가 되는 이들을 기억한다. 그중에는 단연, 살아남기 위해 전쟁에 악착같이 매달리는 이들이 있었는데, 뿔로 만든 나팔이 지축을 뒤흔들면 그들의 눈은 침체하여 가라앉는다. 키릴은 그 눈을 바로 앞의 아이에게서 비추어 봤다.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아직 죽지 않은 남자가 별안간 키릴의 발목으로 손을 뻗었다. 사람을 보는 건지, 유령을 보는 건지 헷갈릴 만치 가만히 있던 아이가 순식간에 단도를 하늘 높이 치켜 듦과 동시에 키릴의 장검이 뽑혀 나왔다. 아이는 멈칫했고, 키릴은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민간인을 보호하고 적국을 사살하는 용기사단의 명예에 위반되는 행위임은 분명했다. 용기사라고는 작금 당장의 이름 모를 밀색의 남자밖에 모르는 아이로서는 당황스러울 노릇이다. 남자는 절명했고, 키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칼을 뽑아 들었다. 날붙이에 진득하게 달라붙은 핏물이 칼날을 타고 손잡이를 향해 천천히 흘러 내렸다.
"가지, 여긴 더 이상 볼 일도 없을 것 같은데."
키릴은 검을 크게 휘둘러 남은 핏방울을 전부 털어 냈다. 두렵도록 아름다운 철제 검신이 투박한 검집에 가려지고 나서야 아이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을 떼어 힘겹게 키릴의 뒤를 따라간다. 빳빳하게 잘 다려진 제복이 날아든 불씨에 거뭇거뭇 타들었고, 머리카락도 그슬린 구석이 몇 군데 있었다. 그는 아이를 일견하며 머리가 검어 티가 안 난다며 농담 아닌 농담을 건넸다. 키릴은 그 사실을 제법 부러워 하는 듯 보였다.
아이는 바로 용이 자리한 곳으로 향하지 않고 마을 전체를 빙 둘러 한 집 씩 살펴보는 키릴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키릴은 시체가 보이면 꼭 한 번 씩 검을 뽑아 머리를 찔러보곤 했다. 그 와중에 죽은 척을 하거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가 있었는지, 끊기는 신음이 열 번에 한 번은 났다. 아이는 자신의 미숙함을 실감한다. 한 번 찌르고, 다시 찌를 것이 분명한데도 꼭 피를 턴 다음 검집에 집어 넣는다. 편집증적인 용기사의 반복 행동에 아이도 슬슬 익숙해졌을 때 쯤, 시작점에 신세 좋게 앉아 있던 용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비늘 사이 번들거리는 짐승의 기름, 숨을 내쉬면 지면에 가라앉았던 먼지가 다시금 떠오른다. 거친 나뭇결과 비견될 만한 발톱은 입에 올릴 가치도 없다. 보통 용을 매번 접하는 직업을 가지지 않는 이상 적란운 너머를 날아다니는 용기사의 그림자나 한 번 보는 게 다일 텐데, 아이는 신기하게도 용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늘 사이를 손톱으로 긁어보는 것이었다. 키릴은 황당하단 듯, 눈썹 한 쪽을 올렸다.
"너···, 용 안 무서워?"
"······기사님이 있으시니까, 절 죽이진 않겠죠."
"마지막으로 널 죽일 생각이었을 지도 모르지."
"그럼, 죽이세요. 도망쳐봤자 창이라도 던져서 꿰뚫으실 테고."
"맹랑한 새끼······."
"안 도망쳐도 죽이시려면 용한테 꼬리라도 휘둘러서 목을 따라고 하셔도 되고."
"이름이 뭐야?"
"그리핀이요."
"성은?"
"블리츠하르트···."
"아니, 크뤼거."
아이는, (그러니까, 상기한 내용으로 판단하자면, 그리핀은.) 용에게 집중했던 고개를 돌려 키릴을 바라본다. 크뤼거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이는 어쩐지 무감해 보인다. 그리핀은 살아 오며 그런 음성의 조합을 이름 외적으로 들어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으니 추측 상 이름일진대, 눈앞의 용기사가 정신이 이상하여 대뜸 자신의 이름을 밀어 붙이나 싶었다.
"이 마을은 모두 불에 타서 죽어버린 거야."
"불에 타긴, 했어요."
"그리고 크뤼거에는 새로운 사람이 들어 왔어."
"네? 축하드립니다."
"검은 머리카락은 크뤼거에 존재치 않지. 그런데 어쩌나, 나만 남아서 반대할 늙은이들도 없고."
"······."
그리핀이 고개를 기울인다. 들은 것을 따라가지 못했다.
"너라면······."
"저라면요."
"누구보다 용을 잘 죽일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는 키릴의 만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반려를 옆에 두고 용의 살해를 논하는 얼굴이 그토록 환할 수가 없었다. 녹색 비늘이 유독 빛나는 용은 키릴의 목덜미에 제 이빨을 부볐다. 키릴은 용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두어 번 두드려주었다.
"어차피 여기서 잡히면 참수인데, 이왕 살려주겠다는 손을 잡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사유는 모르겠다만, 가족한테, 아니, 가족 맞나? 아무튼. 혈육을 죽도록 미워하는 것보다 낯선 사람과 데면데면하게 사는 게 낫지 않나 싶은데."
"사람이랑 용을 죽이는 방법이 같습니까?"
"이봐, 꼬맹이. 사람이든 용이든 결국 핏줄기를 잡아 뜯고 뇌에 검을 찔러 넣으면 죽는 건 똑같아. 배를 갈라 심장을 베어도 좋아. 등줄기를 창으로 내리 찔러 척추를 끊어 내도 돼. 기본은 다르지 않아."
"···용이 듣습니다."
"괜찮아, 사랑하는 걸."
그리핀은 키릴의 행동을 전혀, 그러니까, 일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달랐다. 용의 부속물을 전부 끄집어내 살해해도 좋아, 하지만 내 반려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심이야. 그리핀은 키릴의 손을 잡고 용의 안장에 올라 타는 순간에도, 그의 영지에 도착하여 숨 죽은 듯 고요한 들판을 바라보았을 때에도, 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키릴과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는 용을 이해치 못했다. 필연적으로 느껴버린 것이다. 아, 이 사람은 언젠가, 흔한 시체와 같이 전쟁터에서 죽어 나가겠구나.
그의 용과 함께······.
흰 옷가지로 갈아입혀지고, 이름 모를 음식이 입에 넣어지는 순간에도 제 처우를 깨닫지 못했다. 해가 뜨고, 거뭇한 얼굴을 닦아 낸다. 이른 새벽에 습관적으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키릴은 그리핀에게 충분한 먹을 것과 밀짚이 아닌 푹신한 잠자리, 묵직한 철검을 쥐여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공범의 동정은. 데리고 왔으니 온정어린 눈길을 줄 만도 한데, 키릴의 시선은 온통 그의 용으로 향해 있었다. 그리핀은 제가 사실 온정의 끄트머리도 원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아무 시선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명 밖에 남지 않은 크뤼거의 새로운 양자, 그리핀 크뤼거는 날렵한 몸과 두터운 근육으로 어느 영식에게도 대련의 승리를 허용하지 않았다. 수습기사 정도는 손쉽게 해치웠으며, 이는 키릴이 그리핀에게 제시한 최소한의 계약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죽여야 돼, 그리핀. 이 정도로는 안 돼. 더, 더 죽여서, 손을 더럽히고, 아귀가 찢어지도록 검을 휘둘러. 지금은 부족하잖아, 그렇지?
용을 죽이려면 말야.
키릴 크뤼거는 불과 십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장에서 사망했다. 눈먼 포가 용의 가슴께를 꿰뚫고 낙하했다. 용이 추락했을 때를 대비해 비상 탈출이 가능하도록 돕는 장치는 있었지만, 키릴은 아무 장치도 건드리지 않은 채 그대로 추락했다. 지상에서 지켜본 바로는, 축 늘어진 용의 머리를 더듬으며 우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그리핀은 마침내 양부가 사랑하는 이와 동시에 죽어버리는 숙원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장례에도 울거나 얼굴 하나 찌푸리는 법이 없었다. 당연하지.
감정이 영 죽어버린 냉혈한이 아니더라도, 이건 마땅히 축하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키릴을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근본 모를 짐승을 거두어준 아비를 어찌 저리 쉽게 내팽개칠 수 있느냐, 죽음을 슬퍼하기는 하느냐, 하며 우짖었다. 하나,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하나, 용기사단의 동료들은 어느 하나 울음을 내걸지 않았고.
하나, 그의 양자 역시 무표정을 일관했으며,
하나, 그가 자신의 용을 비참하게도 사랑한 사실을 그 두 부류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자는 아비의 숙원을 무덤에 같이 묻었다. 녹색 용의 사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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