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뎁진화랑TS] 꽃은 장식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다.

화랑 TS, 자신의 모습에 고민하는 화랑. 뎁진이 신사적. 데빌이 처음부터 따로 존재했다는 평화로운 철권 세계관. 2024년 3월 3일 연성.

이변은 없습니다! 이번 대결의 승자는 화랑 선수입니다! 장내 사회자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링에 당당하게 서 있던 어깨 길이의 붉은 머리칼의 여성이 후우, 숨을 고르더니 이내 무표정하게 자신이 쓰러트린 상대를 내려보았다. 단정하게 도복을 갖춰입고 단단하게 장갑을 조인 그 몸은 여성 치고는 단단했지만 그래도 남성들 보다는 가늘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이 철권 리그의 상위 탑을 달리는 격투가. 일명... 독화, 혹은 혈화라고 불리우는 실력자였다.

" 수고했어, 화랑 "

" 아, 여우 "

" 언제쯤 제대로 불러줄 생각이야? "

" 네가 이기면 "

" 진적도 없잖아? "

" 그래서 불러주고 있잖아? 여.우. "

여자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을 보며 부드럽게 웃는 화랑을 보던 스티브가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화랑과 같은 나이의 현 미들급 복싱 세계 챔피언이면서 철권 대회에 참가하는 격투가였다. 스티브의 눈이 화랑을 훑었다. 방금 전 시합을 치룬 직후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화랑은 조금도 지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아무리 하위권 선수와의 시합이었다지만 그래도 조금은 지치기 마련일텐데 그녀는 도리어 조금 부족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방금 전 시합 종료 후 상대에게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마치 쓰레기 보듯이 내려다보고는 성큼성큼 링을 내려왔었다. 본인이 인정하지 않은 상대에게는 조금의 여지도 주지 않는 그녀다웠다. 손으로 가볍게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긴 화랑이 스티브와 가볍게 몇마디 나누는 순간 예민한 스티브의 귀에 작게 속삭이는,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잡혔다. 건방... 여자 주제... 꼬리치고... 비겁... 술수...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속으로 혀를 찬 스티브가 경고라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리려는걸 막은 건 바로 그 험담의 주인공인 화랑이었다.

" 날파리가 너무 시끄러운데. 안 그래, 여우? "

" 화랑 "

" 실력도 없는 것들이 꼭 여자니 건방지느니 비겁한 술수 쓴거 아니냐는 소리나 하지. 그런 험담할 시간에 훈련이나 더 하지 그래? 아니면... 그때처럼 단체로 덤벼볼래? 여자 하나 못이겨서 비겁한 술수나 쓰던 그놈들처럼 "

아이고. 스티브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화랑이 말한 그때란 여자에 불과한 화랑이 승승장구 하는걸 못마땅해하던 하위권 선수 몇몇이 복도를 걸어가던 화랑을 무기를 든 체 습격했던 사건을 말하는 것이었다. 뒤늦게 시합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화랑에 모든 스탭들과 대기 중인 선수들이 찾아나섰고 그들이 본 광경은. 기절한 체 널부러져 있던 사람들과 그들 사이에서 이마가 찢어지고 얼굴과 몸 여기저기에 피를 흘리며 분노와 울분이 가득한 눈으로 씩씩거리고 있는 화랑이었다. 상황 파악이 되기도 전에 화랑은 화가 가시지 않은 그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지금 경기장으로 가겠다고 했고 말리기도 전에 경기장에 들어선 화랑은 시합 전부터 피를 잔뜩 흘리며 나타나 10초 만에 상대를 박살내고 철권 리그 역사상 최단 시간 승리라는 기록을 만들어냈다. 그 시합을 보고 사람들은 화랑에게 피를 흘리는 꽃이라는 의미의 혈화, 그리고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고 나서는 습격을 당해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시합을 강행해 단 10초 만에 승리한 독한 모습에 독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화랑의 차가운 목소리에 수근거리던 목소리와 인기척이 모두 사라졌다. 흥, 앞에 나와선 한마디도 못하는 것들이. 그런 화랑에 스티브가 피식 웃었다. 진짜 여전히 강하구나, 너는. 그 말에 화랑이 차가운 미소를 지은 순간. 어머, 화랑쨩. 복도 끝에서 들린 목소리에 윽, 소리를 낸 화랑의 눈에 평상시의 깔끔하고 단정한 의상 대신 시합용의 화려한 무녀복을 입은 준과 시합이 없기에 평상복을 입은 진이 들어왔다. 진이랑... 준씨. 화랑의 목소리에 준이 작게 웃었다.

" 시합 잘봤어. 여전히 강하네 "

" 감... 사합니다. 다음 시합 준씨의...? "

" 응, 샤오유쨩이랑 시합이네. 어머, 말하기가 무섭게... "

" 아, 준씨! 진! "

밝은 목소리와 함께 가벼운 몸놀림으로 진에게 뛰어와 그를 껴안은 건 준의 상대인 샤오유였다. 중국 권법이 특기인 그녀는 진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소꿉친구 사이었다. 자신에게 뛰어드는 그녀를 받아 준 진이 샤오유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주고는 그녀를 내려주었다. 잠시 어리광을 부리 듯 진을 바라본 샤오유가 바르게 서서는 준에게 꾸벅 허리를 숙여보였다. 안녕하세요, 준씨! 오늘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 샤오유가 준의 눈에도 귀여워 보였던건지 그녀도 샤오유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는 함께 경기장으로 향했다. 둘에게 응원의 말을 남기고는 공용 대기실로 향하는 진을 본 스티브가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중얼거렸다.

" 하여간에 여전히 사이 좋다니까. 근데 화랑, 넌 묘하게 준씨에게 약하다? "

" ...나한테까지 엄마 바이브로 다가오니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어... 아니, 그것보다... 있잖아, 여우 "

" 왜? "

" 역시 사람들은 그녀 같은... 아, 아니다. 피곤하다, 먼저 간다 "

어, 화랑? 뭔가 말을 하다말고 가버리는 화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스티브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제 대기실로 발길을 돌렸다. 자신의 대기실로 돌아온 화랑이 소파에 앉아 가만히 이제 막 시작된 준과 샤오유의 시합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로지 승리를 위해 물불 안가리고 피를 흘리는 것도 감수하는 자신의 시합과 달리 두 사람의 시합은 마치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또 한 서로 크게 다치지 않게 배려하는 모습까지. 화랑 자신이 생각하는 격투가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다. 화랑은 상대가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든 서로 시합 중일 땐 진심으로 상대를 이기려고 들었다. 그게 상대를 존중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을 보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하는 여자, 상대를 짓이기고 웃는 무시무시한 여자, 승리에 영혼을 판 여자. 잠시 상념에 잠겨있던 화랑의 눈에 승자인 준이 패자인 샤오유의 손목을 잡고 번쩍 들어올려 같이 환호를 받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 모습을 보던 화랑이 지긋이 입술을 깨물다 이내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나는 나니까... 신경쓰지 말자. 결국 링에 오르면 그 순간은 모두 적이니까...!

왠지 기분이 나지 않아 오늘 다른 격투가들의 대회 일정이 다 끝나진 않았지만 돌아갈까 싶어 짐을 챙겨 대기실을 나오던 화랑은 사이좋게 들어오던 준, 샤오유와 마주쳤다. 수고하셨습니다, 준씨. 샤오유도. 아, 화랑! 내 경기 봤어? 어땠어? 샤오유가 친근하게 화랑에게 다가왔다. 성별과 관계없이 진과 라이벌 관계인 화랑이 껄끄러울만 한데 샤오유는 친화력을 발휘하여 화랑의 경계심도 단박에 뚫어버렸고 지금은 진과 화랑의 사이를 중재하는 - 정확하게는 진만 보면 호승심에 으르렁 거리는 화랑의 억제기 - 역활을 훌륭하게 소화하고 있었다. 겸사겸사 인간 관계가 좁은 화랑의 친구 역활도 소화하고 있었고. 샤오유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줄까 고민하던 화랑은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 머리 속이 좀 복잡해서 경기 못 봤어 "

" 머리 속이 복잡해? 왜, 고민이라도 있어? "

" 뭐... 별거 아냐. 그냥 오늘따라 집중이 좀 안되서 그런거니까... 미안해 "

" 아냐, 미안하기는! "

" 고민이 있다면 들어줄게, 화랑쨩 "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화랑에 오히려 당황한건 샤오유였다. 황급히 손사레를 친 샤오유 뒤로 준이 넌지시 건넨 말에 이번엔 역으로 화랑이 손사레를 쳤다. 고민 상담을 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은 아니니까요. 걱정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그럼 저는 오늘은 먼저 가보겠습니다. 샤오유도 나중에 봐. 준이나 샤오유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빠르게 몸을 돌린 화랑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지금은 빨리 도장으로 돌아가서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움직이다보면 이런 쓸데없는 고민이나 감정도 분명 사라질거야. 남에게 기대지 않는 화랑은 이런 식으로 제 상념을 떨치는 방법 밖에 몰랐다.

오늘따라 일찍 복귀한 화랑을 본 백두산은 그녀의 상념을 알아 본 것인지 방으로 가려던 그녀를 붙잡고 한바탕 대련으로 몸을 움직이게 해주었고 화랑은 기꺼이 거기에 몸을 실어 움직였다. 대회에서 불완전 연소 상태였던 화랑이 기분 좋게 연소 상태가 되어 저녁까지 맛있게 먹고 제 방에 뻗어 한가로이 오늘 리그 결과를 확인하던 중 눈에 들어온 기사 하나. 혈화 화랑, 같은 격투가들을 무시하는 조기 퇴근. 이대로 괜찮은가. 이건 또 무슨 거지 같은 제목이냐. 화랑의 손이 빠르게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철권 리그는 암묵적으로 다른 격투가들의 일정이 끝나기 전까지 경기장을 벗어나지 않는 불문율이 있다. 그러나 화랑 선수는 이 불문율을 깨트리고 자신의 경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이것은 다른 선수들의 대한 예의가 아니며... 거기까지만 본 화랑이 뒤로가기 버튼을 눌러 기사에서 빠져나온 후 그대로 들고 있던 폰의 화면을 끄고 가볍게 침대 위에 던져놓고는 그 침대 위로 몸을 던져 베개를 품에 꼭 안았다.

" 정말... 개 같이 짜증나네 "

애시당초 그런 불문율 따위는 없다고. 자기 경기가 끝나도 선수들이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다른 선수들을 파악하고 분석하기 좋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오래동안 계속되다보니 이상하게 제 3자의 눈에는 이것이 불문율로 취급되는 것 같았다. 아니, 잠깐. 저번주에 리리도 일찍 퇴근했는데 왜 나한테만...! 하아... 정말 다 짜증나. 화랑의 여자답지 못한 성격과 행동은 그것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대중들과 기자들의 먹이감이었다. 철권 리그 담당의 기자들의 절반이 오로지 화랑을 공격하고 그녀를 깔아 뭉개는 기사들만 쓴다는 우스게 소리도 있었으니까. 물론 같이 싸워본, 그녀의 실력을 인정하는 상위권의 격투가들은 그녀의 투쟁심과 노력하는 자세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근시대적인,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일부 격투가들은 그녀를 시기하고 욕하기에 바빴다. 물론... 그런 기사나 다른 격투가들의 흉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당당하게 행동하는 그녀의 태도도 한몫했겠지만.

" 그래도 매번 이런 취급을 받으면 아무리 나라도 좀 상처 받는다고... "

침대에 누운 체 베개를 꼭 껴안은 그녀의 눈에 송글송글 눈물이 맺혔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을 음해하는 말과 기사들에 눈과 귀를 막고 무시한다고 해도 결국 마음의 상처는 조금씩 쌓이기 마련이었다. 하아, 오늘 몇번째 인지 모를 한숨을 쉬고 있으려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화랑이 벌떡 상체를 일으켜 잽싸게 제 눈을 문질러 눈물의 흔적을 지웠다. 운건 아니니까 이 정도면 될거야. 화랑아,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그녀의 사범인 백두산이었다.

" 무슨 일이세요, 사범님? "

" ...기사 봤느냐 "

" 아... 그거요? 뭐, 신경 안써요. 애시당초 그런 불문율도 없잖아요? 그냥 트집 잡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일일이 반응해 줄 필요 없죠 "

화랑의 말에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백두산의 손이 슥슥,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보았을텐데도 그녀를 잘 아는 백두산은 그저 말없이 그녀를 위로해줄 뿐이었다. 그리고 화랑의 입장에서도 상처 받은 마음을, 속상한 티를 낼 수 없는 것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 경우 발생할 백두산의 분노가 어마무시했기 때문이었다. 화랑이 무기를 든 다수의 격투가들에게 습격을 당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백두산은 곧장 경기장으로 달려왔고 그 후 리그 운영진과 일정은 없었지만 경기장에 와 있던 격투가들은 잔뜩 분노한 백두산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만 했다. 화랑아! 사, 사범님? 10초 만에 최단 시간 승리를 달성하고 의무실에 와 있었던 화랑은 제 고집으로 마취도 하지 않고 찢어진 이마를 꿰매고 있는 자신을 본 백두산이 그렇게나 화를 내는 걸 살면서 두번째로 목격했다. 그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냐면 도리어 피해자인 자신이 백두산을 말려야 했을 정도였다.

" 지, 진정하세요. 사범님! 저 괜찮으니까요. 제가 이겼고 저 멀쩡하니까...! "

" 그게 어딜봐서 멀쩡하다는거냐! 지금까지 너에 대한 불합리한 처사를 그냥 지켜보기만 했는데 더 이상은 안되겠다! 그 자식들 어디 있지?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봐야... "

" 사범님! "

저를 습격한 격투가를 찾는 그의 허리를 붙잡은 화랑이 아니었다면 진짜 백두산은 그 날 화랑을 습격한 격투가들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응징을 했을 것이다. 그나마 운영 위원회에서 그 격투가들에 대한 정당한 처분과 화랑의 완벽한 치료를 - 흉터 하나라도 남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백두산은 살기를 내뿜었다 - 약속한 덕분에 겨우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었다. 잠시 그때 그 백두산의 분노를 떠올린 화랑이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괜찮아요, 사범님. 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연약한 제 제자에게 쏟아지는 시련을 안타까워한 백두산이 다시 한번 더 화랑의 머리를 쓰다듬다 문득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 밖에 화랑을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 기다리고 있군. 화랑아. 저를 부르며 창문을 가리키는 백두산에 창문을 바라보니 그곳엔.

" 저 자식...! "

백두산이 한숨 아닌 한숨을 쉬고는 방을 나가자 화랑이 잽싸게 다시 옷을 갈아입었다. 편안한 평상복 대신 도복을 챙겨 입은 화랑이 창문을 열고 크게 소리쳤다. 데비! 제 목소리에 나무 위에 서서 화랑을 기다리던 검은 날개를 단 남성이 그녀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곤 기다렸다는 듯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라 순식간에 달려드는 걸 화랑이 창문에서 뛰어내리며 내려찍기로 응수했다. 데비라 불린 남자는 그 내려찍기를 가볍게 한손으로 막으며 땅에 닫기 전 화랑을 집어 던졌고 예상했다는 듯 화랑은 안전하게 낙법을 시도해 착지했다. 아까 전 우울하고 음울했던 감정에 휩싸여있던 화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호승심과 혈기로 바뀌었다. 하하, 그런 화랑을 보며 카자마 진과 닮은 남자, 데빌이 웃었다.

화랑은 데비라고 부르는 이 남자. 그녀와 악연으로 이어져 있는 남자로 그의 정체는 미시마 가에 흐르고 있는 통칭 데빌 인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카자마 진의 안티테제와도 같은 남자였다. 스스로 데빌 인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미시마 카즈야와 다르게 진은 데빌 인자를 철저하게 거부했고 결국 어머니인 준이 카자마의 힘을 이용하여 진과 데빌 인자를 분리, 그로 인해 진과 분리된 데빌 인자는 진과 닮은 또 다른 별개의 개체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카즈야와 진은 서로 대립했고 최근에서야 겨우 그 대립이 종료된 참이었다. 물론 제일 고생한 건 그 중간에성 둘의 사이를 조율하던 준이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지만. 그럼 분리된 데빌은 어떻게 되었느냐... 준이 자신을 억제하기 전에, 정확하게는 자신의 목줄을 잡기 전에 도망친 데빌은 마치 도시 전설처럼 강한 격투가를 습격해 싸움을 거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일 큰 희생자가 바로... 화랑이었다.

실내가 아닌 야외 경기장에서 진행되었던 진과의 시합에서 화랑이 이긴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데빌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무자비하게 화랑을 습격했고 제 라이벌인 진과의 싸움에 모든 기력을 다 쏟았던 화랑은 변변한 방어나 반격도 하지 못한 체 그대로 데빌의 공격에 휩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절한 것 처럼 보이는 화랑의 얼굴을 붙잡고 들어올린 데빌이 마무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찰나에 아직 기절하지 않은 화랑이 양손으로 저를 붙잡은 데빌의 손목을 붙잡고 노려보며 던진 한마디가 앞으로 그녀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너... 이 자식... 두고봐... 다음 번엔 내가 이길... 말도 다 끝내지 못하고 결국 기절한 화랑을 본 데빌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경기장에 울려퍼지고서야 겨우 상황을 파악한 백두산이 화랑을 구출, 준이 카자마의 정화의 힘으로 데빌의 힘을 억제하고서야 겨우 화랑은 병원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백두산의 분노 시즌 1을 목격한 때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미시마 카즈야의 멱살을 잡고 화를 내며 설명을 요구하는 백두산에 그 거만하고 고고한 카즈야마저 한발 숙이고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역으로 생각하면 만약 준이 화랑만큼 크게 다쳤다면 자신도 분명 그자를 가만두지 않았을테니까. 3일만에 화랑이 겨우 의식을 찾고 자신을 습격한... 날개를 단 남자에 대해 준에게 이야기를 듣고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 그러니까... 미시마 가에 흐르는 데빌 인자를 진도 가지고 있었고 준씨가 진에게서 그 데빌 인자를 분리했더니 날개를 단 데빌이라고 불리는 개체가 되었고 억제하기도 전에 도망친 데빌이 나를 습격한거다...? 잠시만요, 정리가 안되는데 "

" 음, 복잡하긴 하지만 사실인데... 미안, 역시 이해 하기가 힘들지...? "

" 아니, 뭐... 곰이나 판다, 캥거루가 사람 말을 알아듣고 격투기도 하고 로봇도 있고 흡혈귀도 있고 사람과 닮은 안드로이드도 있는데 데빌 인자... 같은 것도 있겠죠... 는 카즈야씨도 변신 같은 거 하던데 그게 데빌 인자인가요? "

" 응, 카즈야씨는 그 데빌 인자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는데 진은 그 데빌 인자를 거부해서... "

" ...잠깐, 그럼 제가 이렇게 다친 건 진 그 자식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야, 카자마 진! 너 밖에 있지 임마!!! "

3일 만에 깨어난 것 치고는 기력이 있다 못해 넘치는 카랑카랑한 화랑의 목소리가 병실을 가득 울렸다. 그리고 병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는 건 화랑은 절대로 모를거다. 하아, 한숨을 쉰 화랑이 손을 들려다 통증에 다시 팔을 내리고는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뭐, 이건 농담이고... 진, 그 녀석도 힘들었겠죠. 자기가 원하지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분명 힘들테니까. 그리고 나쁜 건 그 데빌인가 뭔가 하는 녀석이니까... 아, 그래서 그 데빌은 어디에...

화랑은 모두가 떠나고 불도 꺼진 늦은 밤 병실에서 눈을 깜박이며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음, 그 데빌이라는 녀석 잘도 준씨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서 도망쳤네... 근데... 왜 날 습격한거지... 역시 내가 강해서일까? 그런 거라면 조금 기쁠지도...? 화랑이 저를 습격할 당시의 데빌의 모습을 떠올렸다. 커다란 날개와 붉은 눈, 그리고 뿔을 달고 있는 카자마 진과 닮은 얼굴로 저를 습격하고 웃던 모습. 진짜 데빌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악마와도 같은 모습이었다고 그녀가 생각할 때 쯤. 갑자기 병실로 차가운 바람이 들이닥쳤다. 뭐지, 갑자기... 창문이라도 덜 닫혔나... 몸을 가누기도 힘들지만 억지로 상체를 일으키려 화랑이 낑낑 거릴 때 낯선 손아귀가 조용히 그녀의 등을 받쳐주었다. 어...? 등에 닿는 차가운 냉기, 그리고 작게 울리는 웃음 소리. 그녀가 쓰게 웃었다.

" 너... 데빌이냐...? "

" 나에 대해서는 그 여자에게 들은 모양이군 "

" 그 여자... 아, 준씨를 말하는거야? 그래, 맞아. 너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어. 일단... 하아, 추우니까 창문 좀 닫아줘 "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상대를 앞에 두고도 태연하게 구는 화랑의 모습에 데빌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데빌이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손짓을 하자 창문이 탁 소리를 내며 닫혔다. 신기하네, 염동력? 신기한 것을 본 아이마냥 눈이 휘둥그레 진 그녀의 반응에 데빌이 작게 웃고는 그 염동력으로 화랑이 편하게 앉을 수 있게 자세를 잡아주었다. 오, 편해. 마치 쿠션을 등에 대고 있는 것 같이 푹신하네. 그래서 왜 왔어? 확인 사살이라도 하게?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무시무시한 질문을 던진 화랑은 날카로운 손톱이 박힌 그 커다란 손으로 제 가슴을 지긋이 누르는 데빌의 행동에도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걸 원하나?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던 화랑이 씨익 웃었다.

" 솔직히 억울한데 "

" 죽는게 무섭나? "

" 아니, 그것보다는 몇번 더 싸워보면 널 이길 수 있을 것 같거든 "

그 말에 데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저러니까 더 진을 닮았네. 하긴 원래 진의 안에 있던 데빌 인자라고 했나? 그래서 그 녀석과 닮은 건가... 잠시 그런 상념에 빠져있으려니 순간 데빌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야밤에 시끄러운데. 작게 중얼거린 그녀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웃어대던 데빌이 만족의 미소를 지으며 손을 움직여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붙잡았다. 내가 지금까지 싸워본 그 인간들 중에 네가 가장 재미있군. 그리고 강해, 몸도 마음도. 머리칼을 빙글빙글 돌리던 손이 다시 움직여 그녀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지긋이 눌렀다. 분명 성희롱이나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데빌의 손에서는 그런 의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두근두근 움직이는 심장 박동을 느끼려는 손길에 화랑도 데빌의 행동을 막지 않고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 나으면 얼마든지 상대해주지 "

" 그것 참 황송하기도 해라~ 내가 이기는 순간 엎드려서 사죄하게 만들거야. 날 다치게 한 놈들은 다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

" 그거 기대되는군, 여자 "

" 이봐, 내 이름은 화랑이야. 여자라고 부르지마 "

" 네가 이기면 얼마든지 불러주지 "

" 아, 진짜... 내가 역으로 당하니 열받네. 좋아, 반드시 이겨줄테니까 기다려, 어... 데비 "

" 데비? "

" 널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냥 심플하게 데비 "

데비... 작게 이름을 중얼거린 데빌이 마음에 든다는 듯 웃더니 화랑을 다시 편안하게 눕히고는 창문 앞으로 가 벌컥 창문을 열었다. 순간 병실의 문이 덜그럭 움직였다. 화랑아, 괜찮은거냐. 화랑아! 어... 사범님? 문은 안 잠근 것 같은데... 는 설마. 나으면 찾아오지. 그러니 빨리 나으라고, 여자. 그 말을 끝으로 창문 밖으로 데빌이 몸을 날려 사라짐과 동시에 쾅, 거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경첩... 고장난 것 같은데... 수리비 괜찮나...? 화랑아, 괜찮은거냐! 갑자기 병실에서 큰 소리가 나서 와봤더니 문이 안열려서 걱정했다! 화랑은 황급히 다가오는 백두산과 열린 창문을 번갈아가면서 보다 작게 한숨을 쉬었다.

" 그래, 무슨 일이 있던거냐 "

" 어... 음... 그게... "

" 그게? "

" ...선전포고 당했는데요 "

으라챠! 화랑이 기합을 넣으며 날린 발차기를 가볍게 붙잡은 데빌이 팔에 힘을 줘 그대로 벽을 향해 집어던졌다. 어떻게든 공중에서 자세를 가다듬어 겨우 벽을 발로 차며 착지한 화랑이 다시 달려들려는 걸 막은 건 데빌도 백두산도 아닌... 토토? 화랑이 제 품으로 뛰어들어와 안기는 작은 고양이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어떻게 나온거야. 아... 설마 내 방 창문으로? 내 방이 몇층인지 알고 나온거야? 아, 나무 타고 왔겠구나... 사범님이 기르는... 아, 정정. 모시고 사는 도장의 터줏대감이자 서열 1위인 고양이 토토가 화랑의 품에서 갸르릉 거렸다. 맞다, 토토 이 녀석 내가 재워줘야 잠을 자는 녀석이었지...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토토를 고쳐안고 가만히 쓰다듬고 있는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 맞다. 이 녀석이랑 싸우는 중이었지. 퍼득 고개를 든 화랑의 눈에 붉은 눈으로 무표정하게 토토를 바라보고 있는 데빌이 들어왔다. 천천히 손을 드는 데빌에 안돼, 토토 다친다...! 눈을 꼭 감고 온 몸으로 토토를 보호하려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데빌의 손은... 툭 토토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그리곤 슥슥, 부드럽게 쓰다듬는 행동에 토토는 기꺼이 갸르릉 골골송을 불러주었다. 어... 당황한 그녀의 눈이 토토와 데빌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잠시 무표정하게 토토를 쓰다듬던 데빌의 손이 화랑의 머리 위로 올라오더니 역시나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 ...뭐하는건데? "

" 이러면 너도 기분 좋은거 아닌가? "

" 난 고양이가 아니거든! "

" 하하, 그런가... 그나저나 기분은 좀 풀린 것 같군 "

" 어? "

슬쩍 미소를 지은 데빌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더니 흥미가 깨졌다며 날개를 움직여 날아가버렸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화랑이 설마 걱정해준건가? 라며 혼잣말을 한 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설마 그럴리가. 하아, 덕분에 우울했던 기분도 날아갔으니 됐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자러갈까? 부드럽게 웃으며 토토의 머리를 쓰다듬은 화랑이 토토를 어깨 위에 걸치듯 안고는 천천히 도장으로 향했다. 졸린 듯 하품을 하는 토토의 눈에 저 멀리 공중에서 화랑을 지켜보고 있는 데빌이 보였지만 이내 고양이답게 깔끔하게 무시하며 그녀의 어깨에 폭, 얼굴을 기댔다.


음? 뭐야, 샤오유는 어디다 두고 혼자 다녀? 나라고 항상 샤오유랑 다니는건 아니야, 화랑. 일치감치 자기 차례를 마치고 - 간만에 상위권 격투가인 리리랑 싸우고 승리한 덕분에 기분이 좋았다 - 유유자적하게 대기실에 거의 누운 체 경기를 관전하던 화랑은 열린 문으로 지나가는 진을 발견하고는 그를 불러세웠다. 마치 배 부른 고양이마냥 소파에 누운 체 손짓만으로 자신을 부르는 화랑에 진이 한숨과도 비슷한 숨을 내뱉고는 천천히 그녀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어차피 자신도 일정을 모두 마친 상태였기에 - 진의 상대는 리로이였고 이겼다 - 시간은 얼마든지 있었다. 흐아암, 누운 체 기지개를 펴는 그녀의 유연한 팔다리를 보던 진이 입을 열었다.

" 괜찮아? "

" 뭐가? 주어 다 잘라먹지 말고 말해줘 "

" ...데빌 말이야 "

" 아아, 괜찮아. 첫인상이 안좋았던거 치고는 지금은 뭐 가끔씩 치고박고 그 정도니까. 물론 아직 못이기긴 했지만 "

" ...미안해, 어떻게 보면 내가 감당해야될 일인데... "

진의 사과에 화랑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 흠 소리를 내뱉고는 가볍게 몸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진에게 접근해 손으로 진의 이마에 딱밤을 날렸다. 으앗! 발차기가 주인 태권도이긴 하지만 화랑은 손아귀의 힘도 쎈 편이었다. 머리를 울리는 통증에 진이 이마를 짚으며 통증에 신음 하는걸 본 그녀가 팔짱을 끼며 당차게 소리쳤다.

" 난 네 이런 땅을 파고들어 삽질하는 성격 진짜 짜증나! 그 녀석의 일은 네가 의도한 것도 아니고 불의에 사고 수준이잖아. 근데 왜 사과하는거야 "

" 하지만... "

" 하지만이고 나발이고 내가 괜찮다면 괜찮은거야. 그리고 나한텐 나쁜 점만 있는건 아니니까. 그 녀석을 이기겠다고 정말 진지하게 수련하고 있거든. 사범님이 놀랄 정도로. 그러니까 언젠가 그 녀석도 이기고 내친김에 너도 다시 한번 더 무릎 꿇릴거야 "

우리 전적 1대 1이던가? 당당하게 하지만 부드럽게 허리에 손을 올리며 당차게 승리 선언을 하는 화랑에 진이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웃는건 처음 보네. 확실히 닮긴 했지만 데비와는 다른 느낌... 잠깐, 나 지금 누구 생각한거야? 화랑이 살짝 고개를 흔드는 사이 웃음을 멈춘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게 너지. 그 녀석이 널 마음에 들만해. 그 녀석? 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것도 잠시 화랑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에 진이 움찔했다.

" 그래서 샤오유한테 고백은 언제할거야? "

" 무, 무슨 소리야? "

" 흐응,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있는데 발뺌할 셈이야? 할거면 빨리해. 샤오유도 내심 기다릴거니까. 진짜 답답해도 유분수지, 여자를 기다리게 하는건 실례라고. 이 답답한 인간아 "

" ...선처할게 "

장난기 넘치게 웃는 화랑과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한숨만 쉬던 진이 이만 가보겠다며 대기실을 나가자 화랑이 마치 침대에 눕듯 소파에 몸을 던졌다. 근데 왜 방금 전에 데비를 떠올렸지? 잠시 누워서 곰곰히 생각하던 그녀가 됐다, 귀찮네. 라며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중계 화면을 한참 보고 있을 때 쯤. 똑똑, 누군가가 열려있는 문을 두드렸다. 음, 누구...? 상체를 일으켜 바라본 그곳엔 오늘 그녀의 상대였던 리리와 그녀와 한 집에서 더부살이 중인 흡혈귀 엘리자가 있었다.

" 여긴 당신 집이 아니라구요, 화랑씨 "

" 집은 아니지만 내 대기실이잖아? 그래서 무슨 볼일이야? 리매치 신청이라도 하게? "

" 그것도 좋지만 오늘의 볼일은 그게 아니에요 "

" 그럼 무슨 일이야? "

" 시즌 끝나고 만찬회날 시간 비워둬 "

" 내가 왜? "

엘리자의 말에 화랑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그녀가 무섭게 다가와 얼굴을 내밀며 소리쳤다. 작년에 약속한 거 기억 안나? 내년엔 우리한테 드레스코드 컨펌 받고 같이 만찬회 가기로 약속했잖아! 그 말에 화랑의 눈을 크게 떴다. 어, 잠시만. 내가 그런 약속을 했다고? 내가...? 그녀가 뭐라 반박하기 전에 엘리자가 손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며! 그럼 지켜야지, 혈화! 안지키면... 그때 말한대로 나한테 피를 줘야할거야...! "

" 아, 알았어...! 기억에는 없지만 뭐... 약속했다면 어쩔 수 없지... "

무섭게 얼굴이 들이밀고 윽박지르는 엘리자의 박력에 GG를 친 화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리와 엘리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왜냐하면 사실 그런 약속 따위 한 적 없었으니까. 의외로 막무가내로 밀어부치면 금방 항복하고 순순히 따르는 그녀의 심리를 이용한 작전이었다. 항상 그녀는 만찬회에서 바지 정장을 입고 오기 일수였다. 물론 나름 여성이기는 한지라 굽이 있는 구두를 신고 오긴 했지만 평상시 알고있고 많이 보았던 그녀의 모습에 언젠가 한번은 이미지 변신을 시켜줘야겠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기기도 했겠다, 카자마 진에게서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직후 막무가내로 들이닥치게 된 것이었다.

" 한달 후 만찬회 당일 날 데리러 갈테니까 오전부터 시간 비워둬요 "

" 잠깐, 만찬회는 저녁부터인데 왜 오전... "

" 그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꾸며야하니까. 여지껏 헤어, 메이크업 받은 적도 없지? 그 날은 바쁠 것 같네 "

그 말에 화랑이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미 약속이라는 가짜 주박에 얽매인 이상 그녀가 도망칠 길은 없었다. 뭐라 잔뜩 말하고 싶은 그녀의 표정에 리리와 엘리자는 여유롭게 웃고는 손을 흔들며 대기실을 나갔다. 하아, 폭풍이 한차례 지나가고 화랑이 다시 소파에 눕듯이 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헤어, 메이크업 받은 적도 없지? 엘리자의 목소리가 머리 속에서 울려퍼졌다. 선천적으로 귀찮은 걸 싫어하는 화랑은 당연히 자신을 꾸미는 일도 하지 않았다. 몸의 상처도 격투가를 하다보면 당연히 생길 수 있는 명예로운 훈장처럼 생각했으니까. 그런 거 하지 않아도 나는 나인데... 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싫다고 하면 진짜 피를 빨릴지도... 엘리자가 흡혈귀라는 걸 떠올린 화랑이 머리를 거칠게 헤집다 슥슥 손으로 대충 정리했다. 모르겠다, 뭐 별일이야 있을까.

있었다. 그것도 꽤나 요란하게.

한달 후 대회가 끝나고 만찬회 겸 뒤풀이 겸 기자들의 기사감 제공 겸... 여하튼 열렸다. 대회의 우승자는 진이었다. 4강 전에서 라이벌인 화랑과 치열한 승부 끝에 결승에 올라가더니 결승 상대인 카즈야와 대결에서 두번의 다운에도 굴하지 않고 결국엔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우승 후 샤오유에게 고백했다는 이야기에 화랑이 얼마나 웃었는지는 모두가 다 잘알거라고 생각한다. 연회장으로 쓰인 장소는 리 차오랑 제공의 6성급 호텔이었다. 하여간에 미(美)에 대한 눈은 확실한 그가 제공한 장소답게 안은 크고 웅장했으며 깔끔하면서도 화려했고 무엇보다 화룡정점으로 연회장과 이어진 야외 장미 회랑은 눈이 즐거울 정도였다. 저 장미 회랑 때문에 여기로 정한겁니까? 라스의 질문에 리는 당연하다는 듯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나저나 거진 다 온 것 같은데 누가 안왔지? "

" 어... 남성진들은 다 온 것 같고... 아, 리리씨와 엘리자씨, 그리고... 화랑! 이 아직이네요! "

" 그 두 아가씨들은 그렇다쳐도 화랑이 아직 안왔다는 건 조금 의외인데 "

샤오유가 잽싸게 주변을 살펴 보이지 않는 세 사람의 이름을 말했고 그 세 사람에 화랑이 속해있다는 것에 주변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만찬회가 열리면 화랑은 바지 정장을 입고 제일 먼저 와서는 따분하고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은 체 칵테일이나 홀짝거리다가 제일 먼저 돌아가곤 했으니까. 그런 그녀가 아직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걸까. 연락이라도 해봐야 할까, 진의 중얼거림이 끝나기가 무섭게 커다란 문이 천천히 열렸다. 오, 드디어 왔나 보네. 그런데... 좀 소란스럽다? 문이 열리면 열릴수록 밖의 소란스러움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난 돌아갈래...! 기껏 꾸며놓고 코 앞에서 돌아가겠다니요? 오늘은 끝까지 남아있어야해, 혈화! 아, 잠깐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의 끝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화려하게 꾸민 리리와 엘리자가 들어왔다. 그래, 여기까지는 상정 내였다. 원래 두 사람은 화려하게 꾸미고 왔었으니까. 문제는 리리에게 등이 떠밀려 한발짝 앞으로 나서게 된... 화랑에게 있었다.

은은하게, 진하지 않고 엷게 발라 청순함이 배가 된 메이크업. 평상 시 드라이도 하지 않아 뻣뻣하게 뻗어있던 적갈색의 머리칼은 자연스럽게 웨이브를 주어 어깨 근처에서 찰랑거렸고. 무엇보다 의상이 화랑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이었다. 적갈색의 머리칼에 대비되는 옅은 푸른빛의 오픈숄더 스팽글 머메이드 드레스는 화랑의 몸에 딱 맞게 재단되어 있는 것인지 도복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적당히 높이의 구두까지. 평상시 그녀를 생각하면 절대로 입지 않고 절대로 꾸미지 않을 그녀가... 작정하고 나타났다. 흐아아아아...! 그 입에서 들어본 적 없는 높은 목소리가 화랑에게서 흘러나왔다.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잽싸게 리리의 뒤로 도망치듯 숨었다. 휘유, 누군지 모를 휘파람 소리가 나고 나서야 만찬회의 정적이 깨졌다.

" 어머, 기껏 예쁘게 꾸며놓고는 숨어만 있으면 안되죠. 화랑씨 "

" 우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다고...! 그리고 내 의지는 1도 없었잖아...! "

"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은 택도 없어, 혈화! "

붉어진 얼굴을 하고 빼꼼 리리의 뒤에서 얼굴을 내민 화랑은 여전히 자신에게 쏠린 시선에 다시 리리의 등에 숨었지만 그런 그녀의 손을 잡은 엘리자가 성큼성큼 연회장의 안으로 들어섰다. 아, 잠깐. 천천히! 구두, 너무 높으니까...! 7cm가 뭐가 높다는 거에요. 제 마음 같아서는 10cm는 신기고 싶었다구요. 여하튼 어울리니까 평상시 처럼 당당하게 가죠. 두 사람의 뒤를 따르는 리리의 말에도 화랑의 붉어진 얼굴과 당황스러운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극대화가 된 것인지 눈가에 송글송글 맺힌 눈물조차 매력을 더 증가시킬 뿐이라는 걸 그녀만 모르는 것 같았다.

" 화랑! 너무 이쁘잖아! "

" 으으, 샤오유... "

"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렇게 꾸민거야? "

" 내 의지는 1도 없거든? 리리랑 엘리자가... "

" 지나가다 보면 누군지 모를 정도로 이쁘네, 화랑쨩 "

" 윽, 준씨... 가, 감사합니다... "

" 정말 잘 어울리네 "

차례차례 샤오유, 스티브, 준, 진의 칭찬 세례에 화랑의 붉어진 얼굴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 잘 어울리는 건가... 이... 상하지는 않아...?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그녀에게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으... 그래도 역시 시선은 부끄러워... 정말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당당하던 그녀가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색다르다 못해 사람이 바뀐건가 싶을 정도였다. 잠시의 정적과 소란 끝에 만찬회는 스무스하게 진행되었다. 인사를 하러 돌아다니겠다는 사람들 틈에서 이런 것 만은 변하지 않은 화랑은 형형색색의 칵테일이 담긴 잔을 손에 든 체 가만히 의자에 앉아 연회장의 풍경을 바라보며 칵테일을 홀짝거렸다. 평소 같았다면 화랑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단 한명도 없었겠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상위 격투가들은 물론이고 이름만 알고 있거나 얼굴만 겨우 알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화랑에게 다가와 한마디씩 건냈다. 심지어 그녀의 전화번호를 따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화랑이 딱 잘라서 거절하기는 했지만.

" 오늘 가장 인기 스타는 자네인 것 같군, 화랑 "

" 리씨 "

리 차오랑이 한 손에 칵테일 잔을 든 체 화랑에게 다가왔다. 오만하긴 하지만 예의범절은 지키는 - 백두산의 눈물 겨운 가르침 덕분이었다 - 그녀가 의자에서 내려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는 걸 막은 리가 윙크를 하며 잔을 내밀자 화랑이 작게 웃으며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조신하게 꼬고 있던 다리를 푼 화랑이 칵테일을 홀짝이다 아까부터 궁금하고 하고 싶었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리에게 건냈다.

" 저기... 리씨 "

" 뭐지? "

" 사람은... 아니, 음... "

" 천천히, 심호흡 한번 하고 말하게 "

그 말에 가슴에 손을 올리고 숨을 두어번 크게 내쉬었다 내뱉은 화랑이 뭔가 결심한 눈으로 혼잣말 같은 질문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제 방식이 틀렸던 걸까요? 전... 꾸미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면... 그게 제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모두가... 꾸민 모습을 좋아해요. 오늘만 해도... 솔직히 진짜 제 의사는 1도 없긴 했지만... 매번 저만 보면 욕하고 싫다는 티 팍팍내던 사람들이 이렇게 꾸민 오늘은... 너무나도 쉽게 호감을 표시하면서 다가와요. 단순히 꾸몄다는 이유로, 평상 시의 제 모습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긴 했지만 좀... 힘들었거든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했지만... 그래도... 그런 이유없는 악의를 계속 받고 멀쩡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에요.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이런 상황까지 나오니까... 제 방식이 틀렸구나 싶어요. 저는... 지금까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던 걸까요?

화랑의 길었던 혼잣말 같은 질문에 진지하게 들어주고 있던 리도 흠,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솔직하게 질문이 끝나자마자 웃으면서 괜찮다고 가볍게 말할 줄 알았던 리가 이렇게나 진지하게 같이 고민을 해주고 있자 화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그런 화랑을 아는지 모르는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리가 다시 칵테일 잔을 손에 들었다.

" 내면이 중요하다지만 결국 사람이 제일 먼저 보는 건 겉모습이지. 그 사람의 내면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만 겉모습은 별로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까. 전형적인 수박 겉핥기 식이지 "

" ...... "

" 자네가 얼마나 노력하고 진지하게 임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으니...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하나지 않을까 "

" 하나...? "

" 자네의 그런 면도 아껴주고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거지 "

" 나의 이런 면... "

" 꾸미지 않은 평상시의 모습도, 한껏 꾸민 모습도 모두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자신의 편이라면 그것만큼 든든한 건 없지. 그리고 분명 자네의 근처에 그런 사람이 있을거야. 자네는 충분히 매력적이니까 "

찡긋, 윙크를 하며 위트있게 말을 끝내는 리에 화랑이 결국 작게 웃었다. 평상시라면 호탕하게 웃었을테지만 옷차림이, 분위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인지 손을 입에 가져가며 작게 웃었던 화랑이 조금 편해진 얼굴로 리를 바라보았다.

" 리씨... 생각보다 좋은 어른이네요 "

" 난 원래부터가 좋은 어른이라고 "

" 네, 그렇네요... 근데 말이죠 "

" 응? "

뒤에서 니나씨가 노려보고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리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자 그곳엔 역시나 멋들어진 드레스를 입은 체 칵테일 잔을 든 니나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녀가 손을 들어 까딱 손짓을 하자 황급히 리가 화랑에게 양해를 구하고 니나에게 향했다. 정말이지 저런 점만 없다면 정말 좋은 어른일텐데. 다시 다리를 꼰 화랑이 주위를 가볍게 훑었다. 진과 샤오유, 라스와 알리사, 리와 니나, 카즈야와 준, 스티브와 레오. 리가 말했던 서로가 서로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 나한테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잠시 상념에 빠져있던 그녀의 코 끝을 장미향이 간지럽히듯 다가왔다. 아, 맞다. 여기... 야외 장미 회랑이 있다고... 손에 든 칵테일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화랑이 의자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장미 회랑으로 향했다. 반쯤 열려있던 문이 활짝 열리자 상쾌한 바람과 더불어 장미 향이 한층 더 진하게 다가왔다.

와, 예쁘다. 천천히 장미 회랑에 발을 디딘 화랑이 형형색색의 아름답게 피어있는 장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평상 시 꽃에 관심도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예쁘다. 이렇게 꾸미려면 엄청난 정성이 들어갈텐데. 확실히 사람들이 좋아할만해. 내 이름에도 꽃이 들어가지만... 난 이런 예쁜 꽃이 아니라 야생화... 에 가까우니까. 예쁘지도 않고 땅에서 피어서 꿋꿋하게 버티는 그런 꽃. 나한테는 그게 어울려. 그런 야생화에 신경써주고 사랑을 줄 사람은... 없을거야, 그래. 하지만... 괜찮겠지, 응.

" 난 괜찮아 "

혼잣말을 중얼거린 순간 어디선가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이 소리는... 어. 화랑이 제 눈 앞에 팔랑팔랑 떨어지는 깃털을 무의식 중에 붙잡는 순간 뒤에서 순식간에 나타난 손이 그녀를 품에 안고 날아올랐다. 까아아아악! 정말 놀란 그녀의 입에서 높은 하이톤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왔다. 저를 품에 안은 누군가의 손을 움켜잡은 화랑이 황급히 올려다 보았다.

" 데, 데비? 놀랐잖아, 무슨 짓이야! "

" 하하, 처음보는 모습이군. 여자 "

 

지금 제가 어떤 모습으로 데빌에게 안겨 있는지 깨달은 화랑이 화악 얼굴을 붉혔다. 평상 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그런 복장을 하고 데빌의 품에 공주님 안기로 안겨있다니...! 이 악마가 무슨 생각을 하고 날 보고 있을까. 안어울린다고 비웃을까? 아니면 당장 도복으로 갈아입고 자신과 싸우자고 할까? 나와 이 녀석의 관계에는 싸움 밖에 없으니까... 두근두근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화랑은 잠시 저를 바라본 데빌의 입이 서서히 벌어지는 걸 보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 잘 어울리는군 "

저에게 쏟아질 비웃음과 쓴소리를 각오하고 있던 화랑은 번쩍 눈을 떴다. 저를 보는 데빌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경멸 대신 정말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따뜻한 미소와 시선이 담겨있었다. 어... 그런 그를 화랑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데빌이 날개짓을 하며 조금 더 높게 날아올랐다. 어느 정도 상공에 올라온 데빌이 고개를 들어 어디론가를 바라보자 화랑도 따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곳엔 너무나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보름달이 있었다. 아... 예쁘다. 화랑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커다란 달. 그런 화랑에 데빌이 작게 웃고는 천천히 마치 공중 산책을 하듯 화랑을 품에 안은 체 주변을 날아다녔다. 상공에서 바라보는 화려하게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들은 분명 눈이 즐거웠다. 한참을 그렇게 공중 산책을 즐기던 화랑은 데빌이 서서히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하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이... 상하지 않아? 데비 "

" 뭐가 말이지? "

" 나한테 이런 모습... 어울리지 않고... 너는 나와 싸우기를 원하잖아? 근데 이런 곳에서 이런 옷이나 입고 파티에 참석하고... 잘 어울린다고 말한 것도 그냥 립서비스? 그런 거 안해도 너와 얼마든지 싸울거니까... "

" 갑자기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

잠시 멈춰선 데빌이 그녀와 이마를 맞췄다. 어, 어? 당황한 그녀의 검은 눈동자와 데빌의 붉은 눈동자가 서로를 담았다. 잘 어울린다고 말한 건 진심이다. 아니, 내가 지금까지 너에게 말했던 건 전부 진심이다. 너는 강하고 아름답지. 네가 어떤 모습이든간에 내가 너에 대한 생각을 바꿀 이유가 되지 않아. 그러니 지금처럼 당당하게 나를 대하면 된다. 그게 너니까, 화랑. 아... 처음으로 들어보는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은 데빌이 웃었다.

" 그리고 너는 장미보다는 이름 없는 야생화가 어울린다 "

어디선가 꺼낸 이름 모를 들꽃을 그녀의 머리에 꽃아준 데빌이 다시 천천히 하강했다. 데빌의 말에 잠시 정신을 못차리고 있던 화랑이 장미 회랑과 점점 가까워지자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아까 전 데빌에게 납치될 때 지른 비명 때문인지 꽤나 많은 사람들이 연회장의 창문을 통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땅에 닿기 직전 용케 샤오유와 눈이 마주친 화랑이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들어 흔드려는 찰나. 땅에 내려온 데빌이 반쯤 들어올린 그녀의 손을 붙잡아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 어어...? 하하, 바보같은 표정. 거기서 반쯤 패닉 상태가 된 화랑을 보며 낮게 웃은 데빌이 그대로...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푸웁! 어디선가 칵테일을 내뿜는 소리와 함께 휘파람 소리, 더불어 엄청난 건수를 잡은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잠시 후, 입술을 뗀 데빌이 방심하니까 이렇게 되는거다, 여자. 라고 작게 속삭이고 화랑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화랑은.

" 데비!!! "

붉어진 얼굴로 잔뜩 분노한 표정을 지은 화랑의 손이 제 드레스를 붙잡더니 그대로 남자 저리가라 할 악력을 이용해 다리 부분을 찢기 시작했다. 그런 화랑의 행동에 저 멀리서 꺄아악! 안돼, 빌린거라구요. 그거 얼마짜린지 아시나요? 라는 리리의 절규가 들려왔지만 이미 부끄러움과 분노에 이성을 잃은 화랑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움직이기 편하게, 정확하게는 발차기 하기 편하게 드레스를 찢은 화랑이 그대로 데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평상시 와는 다른 막무가내식의 공격에도 데빌은 즐겁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 체 요리조리 화랑의 공격을 피해다니며 그녀에게 공격... 이 아니라 그녀의 손등을 붙잡아 입을 맞추거나 머리칼을 매만지는 등 누가봐도... 즐기고 있었다. 아이고. 그 난장판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내일 1면 기사가 기대되네. 그리고 소동이 끝난 다음날. 정말 혈화, 악마의 사랑을 받다 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데빌에게 입맞춤을 받는 화랑의 사진이 1면으로 대문짝만하게 나오고 그 사진과 기사를 본 화랑이 엄청나게 화를... 내기도 전에 백두산의 분노 시즌 3의 시작과 더불어 데빌과 진심으로 한판 하려는 걸 그녀가 또 다시 말리는 일이 발생했지만 그건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왜냐하면 몇년 후... 그녀는 데빌과 정식으로 교제를 시작하게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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