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18

진화랑뎁진 1개, 진화랑스팁 1개, 진화랑 1개. 2024년 2월 21일 연성.

1. 납치 당한 후 데빌이 인자를 주입해 데빌이 되어버린 화랑과 그런 화랑을 구하려는 진으로 진화랑뎁진. (철권6에서 데빌의 식인을 암시하는 묘사가 있었던 만큼 이번 연성은 한 줄 정도긴 하지만 식인 묘사가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불편하다면 바로 2번으로 넘어가주세요)

상황 보고를. 라스의 말에 리가 팔짱을 끼며 상황 보고를 시작했다. 들어온 정보를 조합한 결과 마지막으로 포착된 곳은 한국이었지. 뭐, 예상했던 나라 중 하나였으니 곧바로 위그드라실의 최정예 부대를 보냈으나 돌아온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리고 간신히 살아남아 돌아온 자들이 녹화한 영상 속 상황은... 리가 뒷말을 흐림과 동시에 스크린이 내려오더니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산으로 보이는 곳으로 단단히 무장한 인원들이 이동 중이었다. 제대로 훈련을 받은 부대의 인원들은 말도 없이 눈짓과 손짓만으로 움직이던 그들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데빌의 수작인지 아니면 원래가 안개가 쉽게 발생하는 곳인건지는 알지 못했지만. 얼마나 움직였을까, 안개로 인해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이동이 뎌디다고 느낀 순간 안개 속에서 희미한 실루엣이 보였다. 사람만한 크기의 무언가가 한눈에 봐도 부드러운 땅에 몸을 웅크린 체 있었다. 마치 아기처럼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있는 그것에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눈에 들어온 건 붉은 석양과도 같은 머리빛의 지금 그들이 찾고 있는 남자, 화랑이었다. 그들과 등을 지고 누워있는 화랑은 조금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고 그 틈을 타 부대원들이 화랑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붉은 머리칼도 숨기지 못한 검은 뿔과 손과 몸 여기저기에 보이는 파충류의 비늘, 그리고 결정적으로 꼬리뼈에서부터 길게 보이는 그것은 분명 꼬리였다. 이미 데빌화가 상당히 진행 되었음을 보여주는 모습에 부대원들이 조속히 자신들의 임무, 화랑을 구속해 위그드라실의 본부로 옮긴다는 작전을 수행하려는 찰나. 안개 속에서 붉은 눈의 악마가 나타났다. 먹이가 왔군. 그 말을 하며 웃은 악마는 안개 속에서 나타나 화랑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있던 부대원을 소리도 없이, 마치 밤의 제왕 수리부엉이처럼 낚아채갔다. 공중으로 끌려간 부대원이 얼마 뒤 땅으로 시체가 되어 떨어졌고 그야말로 참살이 시작되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들리는건 두려움의 비명과 총기 소리, 그리고 악마의 속삭이는 목소리 뿐이었다.

" 쉿, 조용히. 지금 너희들의 비명소리는 거슬릴 뿐이야. 조용히 침묵 속에서 죽어라 "

한명 한명씩 악마에게 끌려가 참살 당하고 남은 극소수의 부대원이 두려움에 정신이 나가기 직전. 우, 으. 이 상황에서도 미동도 없이 웅크리고만 있던 화랑에게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새끼 고양이가 낑낑거리는 것 같은 소리를 내던 그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런 화랑에 악마, 아니 데빌이 남은 부대원을 참살하는 대신 화랑에게 단숨에 날아갔다. 화랑.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데빌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화랑이 가만히 데빌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 사이 극소수의 부대원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치면서 영상의 재생이 종료되었다. 제 자리로 돌아가는 스크린을 뒤로하고 라스가 흐음, 소리를 흘리며 팔짱을 꼈다.

" 벌써부터 데빌화가 저 정도로 진행됐을 줄이야 "

" 데빌이 공을 들이는 것 같은 느낌이군. 동족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어떤가, 진 "

라스와 리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영상을 바라보던 진을 바라보았다. 공공의 적으로 인한 협력 관계가 끝나자마자 진은 제 안에 숨어있던 또 다른 힘인 카자마의 정화의 힘으로 데빌의 정화를 시도했고 그 결과는 데빌의 소멸이 아닌 진 자신과의 분리였다. 그리고 분리된 데빌은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순식간에 화랑을 납치해 데빌의 인자를 심어버렸고 그로인해 화랑의 몸과 정신은 착실하게 데빌 인자를 받아들이며 변화하는 중이었다. 영상이 끝나도 잠시 말이 없던 진이 입을 열었다.

" 모두가 데빌을 부정하고 먹히지 말라고 했을 때... 화랑만큼은 데빌도 포함해서 나라고 말을 해줬지 "

" 그가 그런 말을 했다고? 언제지? "

" 아시아 예선전 결승에서 만났을 때다. 지금 생각해보면... 화랑은 본능적인지, 아니면 몇번이고 데빌과 마주해서인지 데빌이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닌 지켜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해준거겠지 "

"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데빌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말일 수도 있겠군 "

" 데빌도 그렇게 느꼈을거다. 그래서 데빌 인자까지 심어가며 자신의 곁에 두고 싶은거겠지 "

모두가 두려워하고 증오하는 자신을 유일하게 인정해준 그를 데빌은 절대로 놓고싶지 않겠지. 그래, 생각해보면 진 자신이 그 충고를 받아들여 데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이번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진 자신은 막판의 막판까지 고심한 끝에 데빌을 받아들이는 대신 거부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 조언을 무시한 결과는 화랑의 데빌화라는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다. 네 곁엔 많은 인간들이 있으니 하나 정도 없다고 해도... 티 하나 나지 않겠지. 끝까지 진에게 거부당한 데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소중하지만... 그 한명이 화랑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진이 주먹을 꾹 쥐었다.

" 위치 알려줘. 바로 가겠어 "

" 진 "

" 시간이 촉박해. 저 상태를 봐서는 완전히 데빌로 변하는건 시간 문제야. 그 전에... 구해서 데빌 인자를제거한다 "

" ...알았다. 어차피 자기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하겠지, 자네는 "

리의 말에 라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 쉬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로 전투기의 방향을 돌렸다. 여차하면 우리도 같이 가겠어. 괜찮겠지? 라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진이 화랑, 작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가 향기로웠다. 데빌은 제 숙주를 배려해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식인 행위를 시작했다. 식인으로 인간의 맛을 알게되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지만 진에게서 분리된 데빌은 더 이상 식인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흐음, 한입 가득 인간의 살을 씹어 삼키던 데빌의 시선이 제 품에서 정신없이 수면을 취하고 있는 화랑에게 향했다. 데빌 인자를 심었을 때 그는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했는데 그의 모습은 머리의 뿔과 날카로운 손톱은 자신과 동일했지만 날개가 아닌 마치 뼈 여러개가 얽혀 만들어진 것 같은 긴 꼬리를 달고 있었다. 날개가 아닌 꼬리라. 자신을 휘감고 있는 무거운 피의 주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꿈꾸던 카자마 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너는 지금 이 상태에서도 데빌 인자를,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마저도 입맛을 돋구게 만드는 소재라고 데빌은 생각했다. 카자마 진의 안에서 최초로 각성하고 난 후 데빌이 제일 많이 부딪친 사람은 바로 화랑이었다. 지금까지 카자마 진의 목숨이 위험할 때만 표면에 자신을 내보이던 데빌이 처음으로 목숨의 위협이 아닌 지고 싶지 않다는 진의 호승심에 반응하여 나타나게 만든 장본인. 죽일 뻔한 적도 있었고 그에게 패배한 적도 있었다. 악연이라면 악연이지만 제 숙주보다 자신을 더 이해해주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자신의 힘이니 거부하지말고 받아들이라는 그 말을 듣고 데빌은 소리없이 웃었더랬다. 음, 그 순간 정신없이 자고 있던 화랑이 스르륵 눈을 떴다. 아직 완전한 변이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 화랑의 눈동자는 평범한 인간들처럼 검은색이었다.

" 배고픈가? "

데빌이 내민 고깃덩어리를 보던 화랑이 입을 벌려 크게 한입 물려는 찰나. 딱, 고깃덩어리에 닿기 전 화랑이 황급히 제 치아가 서로 부딪칠 정도로 세차게 입을 다물더니 꼬리가 순식간에 데빌의 손에 들린 고깃덩어리를 쳐냈다. 후우, 후.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숨을 쉬던 화랑의 시선이 데빌에게로 향했다. 눈에 붉은 빛이 감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하, 아직도 저항하는건가. 하긴 너는 죽어도 인간을 포기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데빌이 제 손목을 가볍게 그어 피를 내더니 그대로 화랑의 입을 강제로 벌리게 해 제 피를 마시게 했다. 입에서 인간의 언어 대신 짐승의 그르렁 소리에 가까운 소리가 나고 억지로 데빌의 피를 마시게 된 화랑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소리가 난 것도 잠시.

" 진... "

이름을 읊조린 화랑이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것마저 자기 방어의 일환이었다. 깨어있어봤자 데빌 인자에게 더 민감하게 반응하여 더 빠르게 데빌로 변화하게 될테지만 수면 중에는 그 변화도 느렸다. 화랑은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다. 진이, 카자마 진이 올거라고 믿으면서. 하하, 그런 화랑을 바라보며 데빌이 가볍게 웃었다. 딱 하나. 자신과 같으면서 자신을 이해해 줄 존재를 데빌은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바로 제 품안에 있었다. 데빌이 화랑을 다시 고쳐 안고는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시간은 내 편이다. 데빌이 작게 중얼거렸다.


2. 비 오는 날 우산도 없이 모자 푹 뒤집어 쓰고 담배 사러간다는 핑계로 미루고 미루던 성묘가던 화랑이 스티브와 진과 만나는 걸로 진화랑스팁. (CP 요소는 적은 편)

오, 비오는 거 보소. 휴식일을 맞이하여 간만에 늦게까지 늦잠을 잔 화랑이 토독토독 기분 좋게 들리는 빗소리에 꾸물꾸물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봄비가 하늘에서 내려와 매마른 땅을 적시고 있었다. 비로 흠뻑 젖어버린 땅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랑이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매마른 화랑의 손을 봄비가 적시기 시작했다. 제 손바닥에 모여있다 결국 표면 장력을 넘어 주르륵 흘러 빠져나가는 빗물을 보던 화랑이 가볍게 손을 흔들어 빗물을 털어내고는 창문을 닫고 제 방의 서랍을 열었지만 원하는 건 그 안에 없었다. 아, 맞다. 담배 어제 다 폈지... 사러갈까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대충 고양이 세수로 잠을 떨쳐버린 화랑이 청바지를 꺼내입고는 평소라면 쓰지 않을 캡모자와... 후드티까지 입고는 후드티의 모자까지 뒤집어썼다. 그럼 나갈... 아. 뭔가 잡힌다. 후드티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뭔가 꺼내자 그건 껌이었다. 언제 넣어놨더라... 뭐, 괜찮겠지. 화랑이 포장을 뜯어 껌을 입으로 밀어넣고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우산은... 없었다.

" 날씨... 좋네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화랑은 빗속으로 들어섰다. 툭툭, 봄비가 온 몸을 적시기 시작했지만 화랑은 개의치 않았다. 힐끔, 제 지정석에 얌전히 대기하고 있는 제 애마에 시선을 준 것도 잠시 화랑은 애마없이 길을 나섰다. 제 애마를 타면 10분 컷이겠지만 지금은 이 봄비를 느끼고 싶었기에 화랑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가기로 했다. 질겅질겅 껌을 씹으며 천천히 봄비를 느끼며 걷는 화랑에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가끔씩 꽂히긴 했지만 화랑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후우, 껌으로 야무지게 풍선까지 불어가며 열심히 걸어가던 화랑이 담쟁이 덩쿨이 무성하게 감긴 벽을 발견하고는 무언가 홀린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마치 쉬어가라는 듯 그 벽 밑엔 등받이 없는 긴 나무 의자가 있었다. 잠시 그 의자를 바라보던 화랑이 조용히 의자에 걸터 앉아 등을 벽에 기댔다. 딱딱하고 거친 벽의 표면과 무성한 담쟁이 덩쿨이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뜬 화랑이 한쪽 다리를 꼬고 그 꼰 다리에 손을 올리고 턱을 괸 체 후드티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한가롭게 액정을 두드렸다. 비 오는 소리만 울려퍼지는 가운데 가끔씩 화랑이 분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마치 하모니처럼 울려퍼질 때 그 하모니에 끼어드는 음율.

" 동네 미친 놈도 아니고 뭐하는거야, 너 "

제 앞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기분 좋게 쏟아지던 빗방울이 더 이상 제 몸을 적시지 않자 고개를 든 화랑의 눈에 금발의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들어왔다. 우산을 든 체 자신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남자에 보고 있던 폰을 후드티 주머니에 쑤셔넣은 화랑이 말없이 껌으로 풍선을 불자 남자, 스티브가 손으로 잽싸게 풍선을 터트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입술에 달라붙은 껌을 대충 손으로 정리한 화랑이 미련없이 껌을 바닥에 뱉고는 짜증섞인 목소리를 냈다.

" 뭐하는거야, 너 "

" 너야말로 뭐하는건데. 비도 오는데 우산도 없이 "

" 편의점 가는 중인데 "

" 우산도 없이? 새벽부터 내려서 절대로 잊어먹고 나올리 없을텐데. 설마 새벽부터 지금까지 돌아다녔어? "

" 아니거든? 그냥...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

" 감기 걸려서 쉬려는 속셈 뻔히 다 보이거든? "

제 말에 짜증난다는 표정을 짓는 화랑을 스티브는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근방에 약속이 있어 가는 중 얼핏 보인 실루엣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준 그는 처음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지만 스르륵 흘러내린 머리칼을 보고 화랑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감각한 눈을 폰에 고정시킨 체 껌으로 풍선을 불며 앉아 있는 화랑은 평상시와는 다른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치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고 재 밖에 남지 않아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하는, 허무함과 상실감을 품고 있는 것 같은 모습. 물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불 같이 타오를 녀석인 건 알지만... 뭔가 내버려둘 수 없단 말이지. 결국 가던 길이 아닌 방향을 돌려 화랑에게 걸어간 스티브였다.

" 오늘 같은 날 너랑 시비 털기 싫으니까 가라 "

" 편의점 간다며. 거기까지 데려다 줄테니까 "

" 이미 다 젖었거든? "

" ...화랑 "

일부로 자신을 자극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스티브의 재촉에 화랑이 하아, 한숨을 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짜 오지랍 드럽게 넓다, 너도. 투덜거리는 화랑에 이런 날씨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있던 네가 나쁜거라며 대답한 스티브가 슬그머니 우산을 씌워주며 화랑과 발을 맞춰 걷기 시작했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걷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을까, 편의점에 도착한 화랑이 대충 스티브에게 휙휙 이만 가라는 손짓을 보냈다. 아무래도... 좀 불안한데.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강경하게 나가봤자... 이 녀석 성격이면 들어쳐먹지 않겠지. 머리 속에서 계산을 끝낸 스티브가 감기 걸리지 말고 빨리 집에나 가라. 라며 순순히 물러났다. 딸랑, 화랑이 편의점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스티브도 약속 장소로 다시 이동하며 제 폰을 들어 연락처 리스트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칫, 전화를 걸기도 전에 혀를 찬 스티브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짧은 통화 연결음이 들리고.

" 나라고 전화 걸고 싶었던 건 아니거든? 라이벌에게 사탕 따위 주고 싶지 않아. 근데 좀 불안해서 말이야... "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고 화랑은 스티브가 걱정했던 것 처럼 순순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오자마자 포장을 뜯고 담배를 입에 문 화랑은 담배 연기와 함께 이곳저곳 정처없이 돌아다녔다. 토독토독, 제가 쓴 모자챙에 빗물이 떨어져 내는 소리가 참으로 듣기 좋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화랑의 걸음이 닿은 곳은 공동묘지였다.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긴 화랑의 발이 멈춘 곳은 이름도 없이 그저 비석만 덜렁 남아있는 곳이었다. 사망했지만 시체도 찾지 못한 사망자를 위해 만들어진 위령비였다. 잠시 그 위령비를 바라보던 화랑이 후,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그 담배를 위령비 아래에 내려놓았다.

" 자자, 담배를 싫어하는 다른 분들은 잠깐만 참아줘. 내가 아는 레지스탕스의 녀석들은 대부분 담배를 좋아했으니까 잠시만 피게 해주고 싶거든. 물론 몸에도 안좋은거 한다고 잔소리 하던 놈들도 있긴 하지만... 여하튼. 이미 사람들이 와서 실컷 떠들고 갔을지 모르지만... 다 끝났어. 그 얼간이랑 그 양반이랑 한바탕해서 난리쳤던 전쟁. 진짜 부자 싸움 한번 스케일 크게 한다니까. 뭐... 원래는 진짜 그 얼간이 잡아다가 니들한테 사과 시키고 싶었는데... 그 자식도 원한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이대로 용서할 생각은 없거든? 언젠가는 니들한테 사과 시킬거야. 하지만... 조금만 뒤로 미루자고. 모든 게 다 원상복구되고... 세상이 안정될 때 까지만. 그러니 오늘은 내 사과로 만족해줘. 일단... 내 고집에 끝까지 따라와줘서 고맙다. 진, 그 자식의 뒤를 쫓겠다고 진짜 무리하게 움직이는 나한테 너희들은 싫은 소리 한번 없이 날 믿고 와줬지. 그 대가가 이런 비석 하나 딸랑 있는 묘지라니.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잊지... 않을테니까. 너희들 몫까지 살아갈게 "

미안, 더 말하고 싶은데... 이럴 때 뭐라 말해야하는지 모르겠네. 안 그래, 진. 화랑이 웃으며 왼쪽 대각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느 순간부터 빗줄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 화랑은 제 머리 위를 덮는 커다란 날개에 헛웃음을 흘렀더랬다. 스티브 그 자식인가. 눈치만 빨라가지고. 화랑의 눈에 데빌의 날개만 꺼낸 체 자신과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진이 들어왔다. 역시 너한테 아직 이런거 시킬 생각은 없었는데. 그 말에 진이 고개를 저으며 날개를 접더니 위령비로 다가와 가만히 손을 모으며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랑이 다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조용한 침묵의 참회의 시간이었다. 느긋하게 담배가 필터 끝까지 타들어갈 때 까지 기다린 화랑이 담배를 끄고는 위령비 밑에 두었던, 이미 꺼진 담배 꽁초까지 주워들고는 담배갑에 쑤셔넣었다. 그리곤 가볍게 진의 등을 두드렸다. 팡, 비에 젖은 소리가 맑게도 울려퍼졌다.

" 자자, 돌아가자고. 너 또 말도 없이 뛰쳐나온거 아냐? "

" ...하지만... "

" 내가 네 몫까지 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가자, 진 "

" ...응 "

먼저 앞서 걷는 화랑을 따라가려던 진이 멈칫하다 뒤를 돌아봤지만 이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그의 뒤를 따라갔다. 공동 묘지 입구의 쓰레기통에 아까 주운 담배 꽁초를 버린 화랑이 다시 담배를 입에 무는걸 막은 건 진이었다. 너무 빨리 피잖아, 화랑. 그 말에 잠시 가만히 바라보던 화랑이 말없이 라이터만 집어넣었다. 불을 붙이지 않고 물고만 있겠다는 뜻이 담긴 행동에 진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간다, 너도 빨리 돌아가 "

" ...데려다 줄게 "

" 됐어, 내가 여자도 아니고 "

" 화랑 "

" 하아, 괜찮으니까. 비까지 오고 잠시 센치해진 것 뿐이야. 약속했으니까. 그 녀석들 몫까지 살거야, 나는 "

" ...알았어. 너무 무리하지마 "

다시 날개를 꺼낸 진이 화랑을 바라보고는 이내 하늘로 날아올라 가버렸다. 잠시 하늘을 올려다 본 화랑이 라이터를 꺼내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이내 다시 주머니에 넣고는 움직이려는 찰나.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지더니 이내 햇살이 비추기 시작했다. 오, 비 다왔나? 그래, 역시... 맑은 게 좋지. 화랑이 힐끔 공동 묘지의 입구를 보다 또 올게. 중얼거리곤 그곳을 떠났다. 점점 대지를 밝게 비추던 햇살은 이내 위령비를 환하게 비췄다.


3. 13-2에서 이어지는 계속해서 진을 기다리는 화랑으로 짧은 진화랑. (약간의 카즈리 요소 포함)

빅터가 돌아간 후 화랑이 천천히 들어간 곳은 작은 집이었다. 야쿠시마, 진이 어머니인 준과 어린 시절을 보냈다던 그 집이었다. 하여간에 빅터 그 양반은 여긴 어떻게 알고 와가지고... 뭐 미행했겠지만. 화랑이 작게 혀를 차며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꽤 오래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탓인지 여기저기 먼지와 거미줄 투성이었다. 잠시 상황을 살피던 화랑이 옷을 갈아입고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정말이지 도장에서 사범님한테 혼나가며 청소하던 경험이 여기에서 발휘될 줄이야. 청소하기 싫다고 도망다니다 잡혀서 꽤나 혼나긴 했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작게 웃던 화랑은 꽤나 빠르게 청소를 끝냈다. 어디보자... 슬슬 어두워지니까 불을... 아. 그러고보니 전기는... 들어오나...? 그리고 잠시 후. 아, 진짜. 이것부터 확인했어야지, 나 뭐했냐! 화랑의 절규가 집 밖을 뚫고 나왔고 이내.

" ...이런 일로 나까지 부를 필요가 있었나, 화랑? "

" 그럼 누굴 부르는데? 라스나 알리사는 바쁘잖아? 거기가 주도해서 지금 세계 복구 중일텐데 "

" ...난 바쁠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

" 응, 전혀 "

" 날 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 머리를 뜯어보고 싶군 "

리는 저를 보며 키득키득 웃고 있는 이 소악마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다짜고짜 연락해서는 전기가 안들어오니 해결해달라고 하길래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사람과 함께 화랑이 지정한 장소에 도착한 리는 뻔뻔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기 들어오게 해줘, 라며 명령 아닌 명령을 하는 화랑에 기가 막혔지만 일단 카즈야를 상대로 같이 공투하고 함께한 동료이기에 이번 한번만 이 소악마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같이 동행한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사람이 수리를 하는 동안 화랑은 리와 함께 어두컴컴한 집에 마주 보고 앉았다. 불빛은 리가 가지고 있던 작은 컴봇이 대신 비추고 있었지만 역시 택도 없었다.

" 그래서 이 집은 뭐지? "

" 카자마 진, 그 자식이 어릴 적에 제 어머니와 함께 살았던 집 "

" ...잘도 알아냈군 "

" 알아낸거 아냐. 그 자식이 알려줬어 "

" ...진이? "

" 그래, 결판 내고 반드시 돌아올거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

자신에게 있어서 소중한 장소일 이곳을 그에게 알려주었다라. 리가 가만히 화랑을 바라보았다. 21살, 진과 같은 나이지만 그와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기묘한 청년이었다. 물론 환경적인 요인도 있겠지만 개인 성향도 있을거다. 지극히 본인 위주로 생각하는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타인을 외면하거나 생각을 안하는건 아니다. 그가 아시아 예선전에서 진에게 건낸 조언은 분명 진의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을테니까. 호전적이다 못해 지금까지 진의 뒤를 쫓은 그 끈기는. 그래, 마치 자신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 대략 40일 정도 지났나... 진이 돌아올거라 믿나? "

" 솔직히 지금까지 그 자식이 나랑 한 약속 중에 지켜진게 거의 없긴 한데... 돌아오지 않아도 상관없어. 그땐 내가 찾아가면 되니까 "

" 만약... 졌다면? "

" 진다고? 하, 절대로 그럴 리가 없지. 만약 그 자식이 졌다면 지금쯤 이미 세계는 불바다 상태였을걸? "

" ...미시마 카즈야는 죽었을까 "

그 말에 화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신은 이 남자에 대해 잘 모른다. 듣기로는 이 남자도 미시마에 이용당하고 카즈야에게 증오심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증오심으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와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거라고. 대제 몇명이나 자신들의 운명에 끌어당겨 피해를 주는건지. 엄청난 집안이라고 생각한 것도 잠시 화랑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 그럴 리가 없지 "

" ...그 말은 카즈야가 이겼을거라는 건가? "

" 아니아니, 이긴 건 진일거야. 그냥 이건 내 감이야. 결국... 같은 짓을 해봤자 미시마 카즈야 그 양반과 다를 거 없잖아 "

" ...... "

" 이건 내 호기심인데... 만약 미시마 카즈야가 살아있고 다시 당신 앞에 나타나면 그땐 당신은 어떻게 할거지? "

" ...... "

" 나는 진과 만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생각해. 그때 만나지 못했다면 난 그냥 길거리에서 조금 강한 사람으로 남았겠지만 진을 만나면서 날 돌아보고 진지하게 강해지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진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

" 후회하지 말라고 "

댁 같은 인간들이 후회로 제일 삽질하고 들어갈 상이거든. 그렇게 말하며 웃는 화랑의 얼굴은 그 나이 대에 맞는 얼굴이었다. 후회하지 말라... 인가. 정말이지, 이런 어린 청년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리가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그와 동시에 집의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전기 수리가 끝난 것이었다. 리는 수리 값은 충고를 들은 걸로 대신하겠다며 돌아갔고 남은 건 화랑 뿐이었다. 천천히 집으로 들어가 집 안을 한번 훑은 화랑이 이곳에 올 때 가지고 온 무언가를 손에 들었다. 그 무언가는 바로 진의 겉옷이었다. 하아, 하여간에 놓고 간게 자기 옷이라니 대체 어디서 뭘 본거야? 헛웃음을 흘린 화랑이 잠시 말없이 옷을 보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는 그대로 바닥에 대충 누웠다. 옷에서 느껴지지 않아야 할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손이 겉옷을 움켜잡았다.

" 이번에도 약속 어기면 진짜 쫓아가서 그 얼굴을 차버릴거야, 빌어먹을 자식아 "

기다리게 하는 것도 적당히 하라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화랑이 눈을 감았다. 차디찬 바닥에 이불도 없이 그저 진의 옷을 걸친 체로 잠을 청하는 화랑에게 그가 기다리던 온기가 닿은 것은 새벽 빛이 집안을 환하게 비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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