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호기심이 고양이의 평온한 시간을 죽인다.

게임 하다 현실에서 카자마 진들과 만나게 된 화랑의 이야기. 2024년 2월 16일 연성.

후, 오늘은 반드시... 이대로 포기하면 블러드 탈론의 이름이 운다고...! 화랑이 이를 갈며 VR 기기를 쓰더니 그대로 침대에 누워 익숙하게 게임에 접속했다. 눈을 감은 체 접속되기만을 기다리던 화랑이 익숙한 네비게이터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자신이 세이브 포인트로 정해놓은 제 Home이었다. 으챠, 벌떡 침대에서 일어난 화랑이 제 손발을 움직여보더니 이내 발차기를 하기 시작했다. 후우, 사범님한테 허락을 받아가면서 알바한 보람이 있네. 반응 속도 나쁘지 않아. 화랑이 눈물 겨운 한달 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떠올렸다. 이 최신식 VR 기계 산다고 진짜 얼마나 뼈 빠지게 알바를 했던가... 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아르바이트를 한 끝에 손에 넣은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최신 VR기기는 다행스럽게도 화랑이 원하던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물건이 별로면 진짜 그 회사 쫓아가서 따질려고 했는데 다행이네. 자, 그럼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이겨주겠어, D...!

이렇게 화랑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까지 최신식 VR 기기를 원했던 이유는 단 하나 뿐이었다. 바로 화랑이 구매한 VR기기의 회사인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에서 발매한 현존 최고의 VR 액션 어드벤쳐 게임인 레이브 워(Rave War)의 숨겨진 히든 보스를 클리어하기 위해서였다. 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액션 어드벤쳐 VR 게임으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레이브 라는 도시를 지배하는 G사에 대항한다는 뭔가 뻔한 스토리의 게임이지만 이 게임의 진가는 바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전투와 뛰어난 시스템에 있었다. VR 기기 하나만으로 내가 직접 게임 속에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에 현실에서 실제로 사용 가능한 격투기란 격투기는 모조리 사용이 가능했으며 격투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보조 시스템인 새미 오토 플레이로 검이나 총기 사용도 지원하는 덕분에 격투기라는 현실과 검과 총기라는 약간의 비현실을 조합하여 사람마다 각자 개성있는 전투가 가능했다.

또 한 AI도 일품이었는데 AI는 무려 사람과도 같은 안드로이드인 알리사 보스코노비치를 개발한 제페토 보스코노비치 박사와 손을 잡은 끝에 탄생한 자율 성장 AI로 그저 프로그래밍 된 대사만 하는 것이 아닌 사람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했다. 덕분에 말을 걸어 대화를 나눌 때 정말 NPC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반응과 대사들을 마구 쏟아낼 뿐 더러 온라인으로 연결하여 여러 명의 유저가 협동하여 플레이할 경우 게임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협동하는 유저들의 수와 성향에 맞게 게임 안에서도 적이 늘어난다거나 히든 이벤트가 등장하는 등, 게임을 파고 또 파도 즐길거리가 끊이질 않는 정말 소위 말하는 갓게임이었다. 그럼 여기서 화랑의 게임 성향은 어떠했을까? 그건 바로... 솔플 성향이었다. 레이브 워는 싱글 플레이도 가능했지만 많은 유저들이 다른 유저와 협동하는 멀티 플레이를 추천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이벤트가 발생한다는 점도 있었지만 바로 숨겨진 히든 보스인 D의 존재 때문이었다. 

G사의 보스를 쓰러트리면 등장하는 히든 보스인 D는 그 동안 G사가 수면 위로 꺼내지 않은 광폭한 후계자라는 설정을 가진 캐릭터로 그 설정에 걸맞게 G사의 보스, 즉 자신의 아버지를 패배자라는 이유로 손수 결전의 장소였던 빌딩 옥상에서 떨어트려 죽이고는 그대로 주인공에게 선전포고를 하며 대립하게 되는 캐릭터였다. 이 D 때문에 많은 유저들이 멀티 플레이를 권유 했는데 그 이유는 바로... 흉악한 난이도 때문이었다. D는 유저의 전투 방식과 동일한 전투 방식을 사용하는데 격투기라면 풍신류라는 격투기로, 검이나 총이라면 역시 동일한 무기로 무장해서 전투를 하게 되는데 문제는... 도저히 이걸 이기라고 만든건가 싶을 정도의 엄청난 난이도에 있었다. 그나마 D는 히든 보스 타이틀 때문인지 멀티 플레이 시에도 다른 보스들과는 달리 부하없이 여전히 혼자서 등장하기에 많은 유저들이 멀티 플레이로 도전했지만 그마저도 깨는 유저들은 전체 유저의 10%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멋모르고 솔플로 도전했던 유저들이 전투 한번에 이미 사기가 꺾여 바로 멀티 플레이로 전환하는 와중에도 의지의 한국인 화랑은 솔플로 반드시 D를 이기겠다며 계속해서 덤벼들었고 오늘로 그 도전이 무려 100번째가 되었다.

" 후, 이러려고 태권도를 전공하게 된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범님이 가르쳐주신 태권도는 최강인데다 풍신류인지 뭔지도 어느 정도 눈에 익었고... 오늘은 반드시 이긴다! "

그리고 진짜 승급 시험이랑 학기 시험도 얼마 안남아서 이젠 시간도 없다고...! 태권도 4단 승급 시험과 - 이건 조금도 걱정이 안됐지만 - 경호학과 학기 시험이 - 이것 역시 실기보다는 필기 시험이 걱정이었지만 - 코앞까지 다가온 화랑으로서는 진짜 오늘이 마지막 기회였다. 자, 가자! 화랑이 Home을 박차고 나왔다. 히든 보스인 D를 등장시키기 위한 조건은 G사의 보스를 쓰러트리면 되는, 어떻게 보면 히든 보스의 등장 조건에 가장 맞지 않는 쉬운 조건이지만 그 이후 D와 만나 싸우는 과정까지 가는 방법이 굉장히 어려웠다. 최악의 난이도와 더불어 등장은 쉬워도 만나기가 어렵다는 이 조건도 D의 악명이 게이머들에게 널리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을거다. 그리고 그를 만나기 위한 첫번째 조건이 바로.

" 안녕, A "

" 안녕하세요, 블러드 탈론. 오늘도 그의 뒤를 쫓고 있나요? "

" 뭐, 그렇지... 아, 오늘은 반드시 이길거니까 "

이 A라는 NPC를 만나는 것이었다. 다른 NPC들이 풀네임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A라는 별명인지 아니면 가명인지 모를 심플한 이름을 가진 이 금발과 금안을 가진 NPC의 외모는 D, 그리고 앞으로 만나야되는 두번째 남자와 많이 닮아있었다. 히든 보스와 닮은 NPC라니, 분명 무슨 사연 같은게 있을테지만... 화랑이 타고 온 바이크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앉은 체 물었다. D는 지금 어디있어? 답변 전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블러드 탈론. 어라, 뭐지? 99번의 트라이 동안 한번도 A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 적이 없었는데. 이거 또 숨겨진 이벤트 같은 건가? 화랑이 반짝 눈을 빛냈다.

" 물어보고 싶은거? 뭔데? "

" 오늘로 D에게 몇번째 도전하시는거죠? "

" 오늘로... 100번째였나? "

"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동료들과 함께 D에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를 쓰러트리는 사람은 극소수였죠. 근데 왜 당신은 여러명이 도전해도 힘든 D를 상대로 계속해서 혼자 도전하는거죠? "

" 그거야 그게 내 스타일이니까. 그리고 D를 상대로 솔로 플레이가 허용된다는 건 가능성이 있으니까 허용 해준 거겠지? 가능성이 있는데 힘들다고 바로 멀티 플레이로 전환이라니, 그런 건 내 사전에 없어 "

" 이길 확률이 1%도 안된다고 해도? "

" 확률은 그냥 데이터일 뿐이잖아. 그리고 웃기지 않아? "

" 뭐가 말이죠? "

" 결국 이기거나 지거나 결과는 2개 뿐인데 뭐가 이길 확률이 1%라는거야 "

" 네? "

" 이길 확률도 질 확률도 50%야. 결국 이기거나 지거나 이지선다인데 그걸 이길 확률이 1% 미만이네, 이러면서 시작부터 사기 꺾고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싸움은 기세라고, 기세 "

화랑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A는 결국 소리 높여 크게 웃었다. 우와, 이렇게 웃는거 처음 보네. 잠시 후 겨우 진정된 것으로 보이는 A가 화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네요. 당신이라면... 진짜에게 안내해줘도 될 것 같습니다. 진짜라고...? 이건 또 무슨 이벤트야?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던 100번째 트라이에서 갑작스런 이벤트가 발생하자 화랑은 살짝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D와 전투를 벌이는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의 주소를 받은 화랑이 잠시 그 주소를 바라보다 맵을 켜 장소를 확인했다. 어디보자... 뭐야, 야쿠시마...? 여기 그냥 이벤트 때 잠깐 보여주던 장소였는데? 진짜로 여기라고? 이 게임... 보통이 아니네. 여하튼 장소는 확인했고... 일단 가볼까나. 화랑이 가볍게 바이크의 스로틀을 당기는 사이.

" 그럼 무운을 빕니다 "

" 그래, 오늘은 반드시 이길거니까 "

" ...제 이름 "

" 어? "

" 카자마 A 진. 제 이름을 기억해 주시길, 화랑씨 "

어라, 어라? 스로틀을 당긴 덕분에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한 바이크 위에서 화랑의 몸은 익숙하게 네비게이터의 안내를 따라 야쿠시마로 달리기 시작했지만 머리 속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던 NPC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름을 알려주는건 흔히 있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그 NPC가 PC를 게임 시작 시 정하는 닉네임이 아닌 본명으로 부른다...? 아니, 내 본명을 어떻게 알고? 혹시 이 게임 게임기 자체의 계정 정보를 읽을 수 있는건가? 하긴 과거 그런 방식으로 보스전이 진행되던 게임도 있긴한데... 아, 모르겠다. 그런 복잡한 거 생각 말자. 그냥 이벤트겠지, 뭐. 지금은 그냥 D를 이길 생각만 하자. 하지만 화랑은 깨닫지 못했다. 대화 중 멀티 플레이 등의 NPC라면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단어를 사용했음에도 A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단어의 뜻을 이해했다는 걸. 그렇게 열심히 바이크를 운전하며 도착한 야쿠시마의 초입에서 만난 건 화랑이 예상했던 두번째 남자가 아니라...

" 뭐야, 왜 벌써부터 보스가 나와? "

" 그거야 내가 진짜 히든 보스가 아니기 때문이지, 화랑 "

" 와, 이 게임 시스템 어떻게 되어있냐고. 소름 돋네, 진짜 "

제일 마지막에 나왔어야 할 히든 보스인 D였다. 이마의 문신과 적안이 특징인 D가 천천히 화랑을 향해 다가왔다. 진짜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 이 이벤트는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히든 이벤트일거다. 이걸 처음으로 경험하는게 나라니... 정말 기대 이상이라니까. 화랑도 바이크에서 내려 천천히 D를 향해 다가갔다. 둘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둘은... 이미 99번이나 싸운 사이었으니까. 먼저 스타트를 끊은 건 화랑의 발차기였다. 기습적으로 날린 발차기를 D는 너무나도 여유롭게 고개를 돌리는 걸로 피하고 반격으로 힘을 실어 날린 주먹을 화랑도 가볍게 막아내고 두어발짝 떨어졌다. 호오, 가볍게 흘린 소리에 화랑이 씨익 웃었다.

" 99번이나 싸웠다고. 오늘은 반드시 이겨주마, 빌어먹을 자식아! "

" 하하, 99번이나 지고도 공포를 느끼지 못하다니. 네 심지는 그 녀석보다 단단하군 "

그 녀석? D가 말한 그 녀석이라는 워딩이 신경쓰였지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D의 무지막지한 공격을 딴 생각을 하면서 피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여전히... 인간... 아니아니... 히든 보스다운 무지막지한 성능이네...! 하지만 이긴다, 이길거야...! 99번의 패배를 화랑은 그저 물 흐르듯 흘러 넘어가게 두지 않았다. 기억하고, 상기하고, 머리 속에서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을 돌려가며 파훼법을 찾았다. 힘, 힘이 부족하다면 스피드, 스피드가 부족하다면 유연성, 유연성이 부족하다면... 줄건 주고 얻을 건 얻어야지...! 상처가 하나둘씩 늘어났고 게임 시스템 속 체력바도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화랑은... 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체력을 1 남기고 D의 쓰러트리는데 성공한 화랑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숨을 고르다 겨우 몸을 일으켜 고개를 들었다. 시야에는 게임의 첫 업적을 달성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띄워져있었다.

" 이렇게 보니 진짜 게임이긴 하네... 하아, 힘들어...! "

" 하하, 역시... 기대 이상이군 "

" 하아, 체력 0되서 졌으면 사라지던가 기절이라도 하던가! "

" 하나 물어보지 "

" 아, 뭔데! "

비틀비틀 겨우 일어난 화랑이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D를 보며 쯧, 혀를 찼다. 그나저나 아까도 질문 같은 걸 받았던 것 같은데... 숨겨진 이벤트의 조건이 대체 어떻게 되는거야? 그냥 대답만 잘하면 되는건가... 아, 몰라. 깊게 생각하는 건 내 스타일도 아니고... 화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D가 입을 열었다.

" 아까도 말했다시피 히든 보스는 내가 아니라 다른 녀석이다. 지금까지 난 그 녀석을 지키기 위해 그 녀석이 원치 않아도 내가 직접 손을 더럽히는 일을 반복해왔지. 물론... 그 녀석은 내가 행한 일을 모두 자신을 위해서 했다는 걸 부정하고 있고. 이런 상황에서 난... 그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맞는걸까 "

" ...아, 뭐야. 상담이냐? 병원 가, 병원! 심리 상담 같은 거 내 알바냐! "

" ...그게 대답이냐? "

" 아이씨... 하아... 그걸 아는 사람이 또 있나? "

" ...그 녀석을 포함해서 적어도 4, 5명은 더 있지 "

" 그 4, 5명 중에 네가 한 일을 인정해 준 사람은? "

" ...없지 "

그 말에 화랑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레이브 워에서 등장할 때 D는 보스인 아버지까지 손수 죽여가며 G사를 존속하는 길을 택했었다. 또한 D가 등장해서야 밝혀진 설정으로 그 동안 G사의 어두운 부분은 모두 D가 담당했었고 그로 인해 G사가 유지되었다는 설정도 있었다. 그 모든 게 실상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그 다른 녀석을 위해서였다면... 아니, 잠깐만. 화랑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 너는 네 스스로 인정하고 있어? "

" ...뭐가 말이지? "

" 네가 한 일. 네가 한 일에 대해서 너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냐고 "

"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데 "

" 하아, 너 말이야. 지금까지 네가 한 일 모두 그 녀석을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 회피하고 있었던 거 아냐? 난 말이야. 자기가 일을 잔뜩 벌려놓고는 남 탓하는 놈이 제일 싫거든? 네가 한 짓이 모두 그 녀석...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저지른 건 너니까 인정할 건 인정하고 너도 같이 책임을 지라고! 뭘 그 녀석을 어떻게 대해야 맞는걸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냐! 아니, 무엇보다... 그 녀석하고 이야기는 해봤어? 안해봤지? 말이라는 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듣는 것도 중요하다고. 그러니까 일단... 대화를 해라, 대화를!!! 이 답답한 놈들아!!! "

겨우 힘겹게 이겼더니 한다는 소리가 인생 상담 같은 소리에 빡친 화랑이 제 앞에 있는 것이 NPC라는 것도 잊고 진심으로 한소리 내뱉었다. 99번이나 싸우면서 정이 들었던 걸까, 왠지 모르게 그저 흔한 NPC 같지 않게 느껴진 탓도 있을 것이다. 이 게임이 나쁜 거라고, 누가 이렇게 잘 만들래...! 화랑이 이를 갈다 다시 푸욱 한숨을 쉬었다. 게임하다가 이게 무슨 인생 상담... 어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다시 한번 더 한숨을 쉰 화랑이 천천히 자동 회복되고 있는 체력바를 보다 고개를 내렸을 때 움찔, 제 코앞까지 다가온 D에 놀라 뒤로 한발짝 물러섰다.

" 뭐, 뭐야 "

" 그럼 너는 인정해줄건가. 나의 존재를, 내가 한 모든 일을 "

" ...네가 한 일이 모두 잘했다는 건 아니야. 뭐, 그래도... 네 덕분에 G사가 지금까지 유지된 점은 인정해야겠지. 그래, 기분이다. 내가 인정해줄게. 무엇보다 너, 엄청 강하니까. 날 99번이나 무릎 꿇린 건 사범님 빼고 네가 처음이라고 "

실제 인물이었다면 진짜 더 좋았을텐데... 최신식 VR 기기로 반응 속도가 빠르게 나오긴 하지만 실제로 몸을 움직이면서 싸우는게 아니니까... 화랑이 제 오른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폈다를 반복했다. 아무리 실감나는 전투를 표방한다지만... 그래도 실제 격투가인 내 입장에서는 아쉬운 건... 아쉬운거지. 화랑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D의 미소가 진해졌다. 대답 마음에 들었다, 화랑. 아니 근데 진짜 언제까지 내 본명으로 부를거야... 이 게임 진짜 시스템이 어떻게 되어있는거냐고... D가 손가락을 튕기자 숨겨져 있던 길이 모습을 들어냈다. 올라가라, 위에서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을거다. 아아, 그래. 후우, 이제 진짜 끝이 보이네. 그 녀석... 은 왠지 예상되기도 하니... 후, 체력 회복도 됐고... 이제 진짜 가볼까.

" 내 이름은 카자마 D 진. 기억해 두는게 좋을거다, 화랑 "

" ...너 A와... 그 녀석이랑 무슨 관계야? "

" 대답해 줄 의리는 없겠지 "

" 끝까지 재수없는 자식 "

제 말에 웃으며 가버리는 D를 힐끔 바라본 화랑이 천천히 숨겨진 길을 따라 걸었다. 조용하고 가끔씩 새소리만 들리는 평온한 숲이 이어졌다. 실제로도 이런 곳이 있다면 산림욕하기 딱 좋겠는데. 명상하기에도 좋고...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을 느끼며 천천히 걷던 화랑의 눈에 길의 끝이 보였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나타난 넓은 공터에 서있는건 원래대로라면 두번째로 만났어야 할 진정한 히든 보스인...

" 보자마자 잔소리해서 미안한데 니들 대화 좀 해라, 대화 좀. 나도 바쁜데 니들 인생 상담 들어줘야겠냐 "

" 난 D에게 그런걸 부탁한 적 없는데 "

" 하아... 그래서 넌 어쩔거야 "

카자마 진.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이라 불린 NPC가 화랑을 바라보았다. 원래 화랑이 알고 있던 시나리오였다면 진은 두번째로 나왔어야 하는 NPC였다. G사의 말단으로 D의 악행을 알고 있음에도 막지 못했다며 PC에게 D의 처단을 대신 맡기는 키의 역활. 하지만 그가 진짜 히든 보스라면. 시나리오 진짜 누가 짠걸까나... 화랑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 D의 악행을 막지 못했다는거 순 거짓말이지? "

" 그래. 애시당초 D의 악행은 알고 있었지만... 날 위한 일이니까 뭐라 말도 못하고 그대로 묵인하고 있었지 "

" 정체가 뭐야? "

" ...자기 소개를 다시 할까. 레이브를 지배하는 G사의 총수 카자마 진이다. 축하해, 네가 처음으로 나에게 도달한 사람이야. 화랑 "

" ...니들 제 4의 벽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넘는거 아냐? "

" 애시당초 이 시나리오까지 오는 조건은 혼자서 D에게 100번을 도전하는 거니까. 그걸 해낸 유저를 위한 시스템이다 "

" 제 4의 벽을 뛰어넘는 시나리오라. 진짜 이 게임 만든 인간 얼굴 좀 보고 싶네 "

분명히 변태일거야. 화랑의 말에 웃던 진이 화랑의 눈 앞에 선택지를 띄웠다. 갑자기 나타난 선택지에 조금 놀란 화랑의 어깨가 튀었지만 이내 천천히 선택지를 확인했다. 첫번째 선택지, 이대로 진을 모른척 하고 돌아간다. 두번째 선택지, G사를 없애버린다. 자, 선택해. 너의 선택에 따라 나도 움직일거야. 진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이내 손을 움직이더니... 선택지를 2개 다 치워버렸다. 어...? 얼빠진 얼굴을 한 진을 앞에 두고 화랑이 한숨을 내뱉었다. 너 말이야, 왜 이렇게 수동적이야? 수동적...? 왜 중요한 선택을 남에게 맡기냐고! 나에게 준 선택지, 결국 네 앞으로의 시나리오에 대한 선택지잖아. 그 말에 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유저의 선택에 따라 시나리오가 유동적으로 바뀌는건 당연한거 아닌가? "

" 그거야 평범한 유저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이겠지.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넌 평범한 NPC 같지가 않단 말이야. 그리고 제 4의 벽을 깬 김에... 나도 깨보려고 "

화랑의 손이 한쪽으로 치워버린 선택지를 붙잡아 진의 앞에 던지듯 건냈다. 네가 선택해. G사를 어떻게 할지. 그리고 A와 D를 어떻게 할지. 도망쳐서 D의 악행을 계속해서 눈을 가린 체 못본척 할건지, 아니면 스스로 저지른 죄의 대가를 치루는 뜻으로 G사를 없애버릴 건지. 화랑의 행동에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던 진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선택을 거부한다면? 주저없이 화랑이 말을 내뱉었다.

" 어쩔 수 없지. 네 그릇이 거기까지구나 생각하고... 포기할거야 "

" 포기한다고? "

" 어, 포기야. 너도 A도 D도 포기하고 끝이야 "

" ...... "

" D의 악행도 결국 너의 묵인하에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A를 보내서 사람들한테 넌지시 D를 쓰러트려달라고 부탁이나 하고... 넌 아무것도 한게 없잖아. 선도 악도 아니고 어설프게 중립은 뭔데? 확실하게 해, 확실하게! 자율 성장 AI라면서? 그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 어느 쪽이든 인정해줄테니까! "

화랑의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진이 작게 선택... 이라고 중얼거리다 작게 웃고는 그럼... 이걸로 할까 라며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윽...! 갑자기 화랑은 큰 두통을 느끼고는 황급히 쓰고 있던 VR 기기를 벗어던졌다. 아으... 뭐야, 갑자기 서버 다운이야? 멀티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로그인 및 게임 연결은 온라인 서버를 이용하다보니 아주 가끔씩 이렇게 게임 서버가 다운되어 튕기는 경우가 있었다. 운이 없게도 그게 지금이었다. 순식간에 레이브 워의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돌아온 화랑이 내동댕이 쳐진 VR 기기를 보다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5시간은 지나있었다. 아... 조금만 더하면 결말을 볼 수 있었는데... 하아, 시간도 늦었고 서버가 언제 올라올지도 모르니...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아... 찝찝하네, 진짜. 투덜거리던 화랑이 VR 기기를 얌전히 거치대에 올려놓고는 그대로 불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진이 인상을 찌푸리며 쓰고 있던 VR 기기를 벗고는 몸을 일으켰다. D의 짓인가. 하여간에... 자기는 볼일 다 끝났다고 아주 제멋대로...! 지끈지끈 밀려오는 두통에 잠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진이 벌떡 일어나 제 방에서 나와 빠르게 어디론가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절대로 꺼져서는 안되는, 이 곳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고 있어야하는... 중앙 통제실이었다. 그 중앙 통제실 한가운데서 팔짱을 낀 체 혀를 차고 있는건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대표인 리 차오랑이었다. 리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진을 발견하고는 어깨를 으쓱 들어보였다.

" D는요? "

" 이미 없어. 정말이지... 도와달라고 말한 건 나지만 너무 제멋대로군 "

" 서버 복구는 "

" 이미 끝냈어. 다운 시간은 고작 2초지만... "

그 2초로 얼마나 많은 항의와 주가가 떨어질지 잘 아는 리는 주주들에게 시달릴 생각에 골치가 아프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누가 데빌의 D 아니랄까봐 사악한 짓은 다 하고 다니네. 그 혼잣말에 진은 조용히 동의했다. 아, 맞다. A가 전해달라네. 한국에서 보자고 하던데. 리의 말에 진의 눈이 커졌다. 어지간히... 그 화랑이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던데?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자기 차례가 끝나자마자 가버렸어. 하긴 보는 나도 흥미진진하게 봤는데 직접 대면한 A는 오죽했을까. 직접 게임 속에서 플레이를 한 화랑도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대부분의 직원들도 모를 이번 히든 이벤트는 바로 A, D, 그리고 진이 직접 PC로 뛰어들어 NPC인 것 처럼 플레이하는 것이었다. 이 말도 안되는 아이디어를 낸 건 바로 리였다. D에게 솔플로 100번 도전하는 유저를 위한 히든 이벤트. 그것을 위해 일부로 D가 유리하도록 설계를 해놓았다. 근성 있는 유저라면 반드시 도전하겠지. 아이디어를 내놓으면서 음흉하게 웃던 리를 보며 D가 혀를 차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정말... 그걸 실행하는 유저가 있을 줄은 몰랐다. 심지어 98번째와 99번째는 아슬아슬한 한 끝차이의 패배여서 리가 경악했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정도였다.

" 보통의 유저라면 10번 정도 패배하면 멀티 플레이로 변경할텐데. 진짜 근성이 대박인 남자군 "

" ...... "

" 다른 것보다 A와 D의 마음에 들 줄은 몰랐어. 히든 이벤트는 발동됐지만 진행은 결국 A와 D의 마음에 달린건데 말이야. 아마 조금이라도 질문의 답이 어긋났더라면 그냥 기존의 시나리오가 발동됐겠지 "

NPC가 아닌 PC라고 했지만 A와 D는 진보다 특별했다. 그 이유는 A와 D는 인간이 아닌 알리사 보스코노비치와 동일한 안드로이드였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맑은 면만을 뽑아내 형상화 시키고 성장시킨 안드로이드가 A, 인간의 어두운 면만을 뽑아내 형상화 시키고 성장시킨 안드로이드가 D였다. 게임 속에서 등장하는 히든 NPC이긴 했지만 시스템 상으로 A와 D는 이 게임의 AI의 절반을 담당하기도 했다. 즉, 레이브 워 세계의 절반을 담당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화랑은 하루에도 몇만, 아니 몇천만의 유저들을 마주하는 A와 D의 마음에 든 것이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진이 이내 몸을 돌리고 중앙 통제실을 나서려는 그의 발목을 리가 살짝 붙잡았다.

" 가는건가? "

" A는 모르겠지만... D는 확실하게 사고 칠테니까요. 그러기 전에 데려와야죠 "

" ...D는 충분히 그럴만 하지. 조심해라, D의 생각은 나도 잘 모르니까 "

" ...네 "

리의 낮은 한숨 소리를 배웅 삼아 중앙 통제실을 나온 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 가는 빠른 비행기를 수배해줘. 그리고... 알리사를 빌려줘. 어차하면 D의 기능을 정지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순순히 따를지는 의문이지만. 그래... 부탁한다, 라스. 통화를 끊은 진이 오늘 몆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쉬었다. 갑작스런 A와 D의 일탈 아닌 일탈이 진의 입장에서는 불안 요소로 다가왔다. 하지만.

" 선택인가... "

그럼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해, 어느 쪽이든 인정해줄테니까! 화랑이 자신을 향해 외친 그 말이 계속해서 진의 마음을 울렸다.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움직이고 선택해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인정해주겠다. 하하, 어차피 자신을 게임 속의 NPC로만 생각하고 내뱉은 별다른 뜻도 없을 말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울리는건지. 그건 화랑이 진심을 다한 말이기 때문이지만 진은 그걸 깨닫지 못했다. 일단... 갈까.


후아암, 진짜 지옥같은 필기 시험이라니까. 어렵지는 않지만 키보드나 두드리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게 더 편하니까. 학기 시험을 끝내고 터덜터덜 주변 학생들의 시선을 받으며 학교의 지옥같은 - 학생들은 지옥의 언덕이라 부르며 체육계 학생들의 체력 시험용으로 자주 쓰이는 - 언덕을 내려가던 화랑은 정문이 상당히 소란스럽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또. 연예인이라도 왔나 무슨 난리야. 뭐, 관심 없지만. 승급 시험도 얼마 안남아서 바쁘신 몸이라고. 사람들이 잔뜩 뭉쳐있는 곳을 스쳐 지나가려던 화랑의 눈에 얼핏 그 무리들 속에 절대로 현실에서 보지 못할 색상이 있는 것을 보고 멈칫, 걸음을 멈췄다. 금빛, 외국인의 금발과는 결이 다른 금빛을 가진 남자. 화랑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A...? 그리고 그 소란 속에도 용케 목소리를 들은 것인지 고개를 돌린 남자의 눈은 금안이었다. 어, 어...? 남자, A가 성큼성큼 화랑에게 다가왔다. 머리를 뒤로 넘긴 깔끔한 올백의 금발의 남자가 부드럽게 웃었다.

" 현실에서 보는 당신은 또 다른 느낌이군요, 화랑씨 "

" ...잠깐. 나 아직 게임 속이야? VR 안끄고 잠 들었나? "

" 아쉽게도 현실입니다 "

화랑이 손을 들어 제 눈을 비비는 모습이 퍽이나 귀엽게 보였던건지 A가 손을 들어 화랑의 눈가를 매만졌다. 어, 어? 지금 이 짧은 순간에 얼빠진 소리를 몇번이나 내는건지. 그러다 자기가 꽤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다는지 알아차린 화랑이 A의 손목을 붙잡았다. 이런 곳에서 동물원의 동물 신세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 가득이나 평상시에도 그 신세인데 너까지 오니 더 난리도 아니잖아. 그 말에 A가 가만히 화랑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제 머리 만큼이나 튀는 붉은 노을 같은 머리색과 외모는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게임 안에서 본 외형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 레이브 워는 외형을 꾸미기 위한 각종 커스터마이징을 지원하긴 하지만 기본적인 외형은 실제 자기 자신을 기반으로 했는데 덕분에 유저가 게임 속에 녹아들 수 있게 해주는 장치이기도 했다.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A를 본 화랑은 이 녀석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하나를 잠시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거대한 그림자가 화랑의 머리 위를 점령한다 싶더니 순식간에 무언가가 그를 낚아채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우와악! 비명소리만 남기고 사라진 화랑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사이 A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여전히 숨길 생각이 없군요, D. 그럼... 나도 어쩔 수 없나 "

잠시만 뒤로 좀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위험하니까요.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 충분한 공간이 만들어지자 A가 익숙하게 상체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날개뼈의 부품이 열리면서 나온 것은. 천사... 누군가의 중얼거림 그대로 그것은 새하얀 날개였다. 그 날개는 리의 미적 취향에 맞춘 A의 비행을 도와주는 부품이었다. 세밀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깃털을 닮은 부품 여러개가 모여 만들어진 날개는 바이올렛 시스템즈사의 기술력이 - 정확하게는 제페토 보스코노비치 -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날아오른 A가 눈을 가볍게 깜박였다. 그러자 A의 머리 속에 떠오른 지도에서 한 점이 깜박였다. A의 위치를 알려주는 그 점을 가만히 바라보던 A가 천천히 그곳을 향해 움직였다. 그 지도의 맞은 편에 또 다른 점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한편 진짜 말도 안되게 납치 아닌 납치를 당한 화랑이 나뒹구르게 된 곳은 망해버려 조만간 재개발이 들어간다는 공장 지대였다. 바닥에 굴려지고 몸도 정신도 추스리기도 전에 강제로 멱살을 잡혀 일으켜진 화랑이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적당히 해, D! 진짜 재수없는 자식! 상황파악도 못한 주제에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아맞춘 화랑에 D가 미소지었다. 그리곤 주저없이 제 손에 잡힌 그를 집어던진 D가 화랑에게 덤벼들었다. 간신히 낙법 자세를 취해 피해를 최소화한 화랑도 머리 끝까지 화가 나 진심으로 상대하기 시작했다. 게임과 다르게 실제로 부딪치고 통증과 감각이 머리 끝까지 지배하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하지만 차이점이라면 화랑은 인간이고 D는 안드로이드라는 점이었다. 안드로이드는 절대로 지치지 않으며...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그래, 지금처럼. 죽일 기세로 사각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힘겹게 피한 화랑이 반응하기도 전에 날아오른 발차기를 복부를 맞고 그대로 나뒹굴렀다. 데빌의 D답게 고통스러워하는 화랑을 보며 웃던 D가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른 기침을 하며 으득 이를 갈던 화랑이 지지 않고 붉은 눈과 마주했다. 잠시 후 D의 웃음 소리가 공장 지대에 울려퍼졌다.

" 짜증나니까 웃지말아줄래? 진짜 이렇게 쳐맞은게 얼마만이야... "

" 무섭지 않나? "

" 그냥 열받을 뿐이거든? 그나저나... 안드로이드였냐... 그럼 A도 안드로이드겠네... 아니 근데 갑자기 나타나서 이게 무슨 짓이야? "

" 호기심 "

" 넌 호기심으로 사람을 패냐! 그러니까 요새 뉴스에서 안드로이드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만 나오지... "

점점 고도로 인간처럼 진화해가는 안드로이드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 소식을 입에 담으며 혀를 차는 화랑을 보던 D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움켜잡았다. 인간과 같이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더 강하고 이성적인 사고 판단을 하는 안드로이드들이 종종 인간을 죽이는 사건들이 하나 둘 발생하자 언론에서 점점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튀어나왔다. 화랑이 말하는 부정적인 이야기란 이걸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D는 아랑곳 하지 않고 웃었다. 그런 사건이 발생하고 부정적인 이야기가 도는 걸 알고 있으면서, 지금 제 얼굴을 움켜잡은 안드로이드가 조금만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이상의 힘만 줘도 죽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을 바라보는 화랑의 눈빛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었으니까. 넌 절대로 날 안죽여.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화랑을 보는 D의 회로에 떠오른 감정은.

" 정도가 심합니다, D "

" 위선자 납셨군 "

"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는건 당신 뿐만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이 이상 나아가면 피해를 입는건... "

" 흥 "

그딴 녀석 인정할 수 있겠나. 화랑의 얼굴을 붙잡은 손이 미끄러지듯 움직이더니 이내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좀 얌전한 방법으로 안되냐. 투덜거리는 화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체 손을 놓은 D와 날개를 접고 다가온 A가 짧은 사과를 건내며 툭툭 화랑의 상태를 살폈다.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됐어, 괜히 시끄럽게 하고 싶지도 않고... 멍은 생기겠지만. 정통으로 차여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복부를 옷 위로 만지던 화랑은 또 다시 들려온 3자의 목소리에 번쩍 고개를 들었다가 혀를 찼다.

" 넌 인간이야, 안드로이드야? 카자마 진 "

" 난 인간이야. 그리고 거기 있는 A와 D를 회수하러 온 것 뿐이다 "

" 회수라 아직 화랑씨와 만난지 1시간도 안된 것 같은데요 "

" 그래. 너는 걱정하지 않아, A. 내가 걱정하는건... "

그 말에 D가 코웃음을 쳤다. 역시 넌 아직도 멀었어, 카자마 진. 미안하지만 돌아가지 않아. 아직 화랑과 덜 싸웠단 말이지. D! 자신을 부르는 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D의 손이 진의 멱살을 잡았다. 네가 걱정하는 건 저기 있는 저 녀석의 안위냐, 아니면 폐기 안드로이드가 될 내 걱정이냐. 아니, 아니겠지. 네가 걱정하는 건 네 치부가 들어나는 상황이겠지. 너는 대체 언제쯤이면 인정할 생각이지? 네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너의... 순간 급박한 상황을 일순간 해제시킨건 화랑의 일갈이었다.

" 미안한데 촌극은 적당히 하고 상황 설명을 해! 갑자기 게임 속 NPC들이 현실로 튀어나오고 이러니 슬슬 현실이 붕괴될 것 같으니까 "

" ...그러네. 네 입장에선 영문을 모를 일 투성이겠지 "

" 여기가 레이브 워였다면 그냥 이벤트네, 하고 말겠지만 현실이잖아. 아직 현실과 가상을 구분 못할 정도로 미치지 않았다고 "

그 말에 A가 살짝 웃더니 그럼 한국 지부로 가죠. 거기라면 얼마든지 이야기가 가능할테니. 라며 말을 한 순간 D가 화랑을 낚아채 날개를 꺼내 단숨에 날아올랐다. A와 다른 검은 날개는 그야말로 악마의 것과 비슷했다. 우악! 말 좀 해주고 움직여, 이 빌어먹을 자식아! 비명 소리와 비슷한 단발마를 남기고. 그런 D의 행동에 A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는 자신도 날개를 꺼내 D의 뒤를 쫓았다. 가기 전 힐끔 진을 쳐다보는 것도 잊지 않고. 이제 평온한 시간은 끝인 것 같네요, A가 중얼거렸다.


사족.

끝. 네, 끝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고 쓰고 싶은 부분은 모두 썼으니 설정이나 풀겠습니다.

1. A와 D의 정체.

진의 인격들로 진은 어릴 적 사고로 인격이 붕괴 되었고 어머니와 함께 였던 순수하고 호의적인 인격 A와 난폭하고 통제가 불가능한 인격 D가 생겨버림. 소위 말하는 3중 인격으로 고통 받던 진을 위해 리와 라스가 주도해 A와 D의 인격을 끄집어 내어 안드로이드에 정착시키고 그대로 레이브 워 게임의 대부분에 NPC의 AI를 맡김. 

2. A와 D가 진을 대하는 태도

A는 순수했던 그 시절의 진의 인격 답게 진이 자신들을 보며 괴롭지 않게 일부로 금발의 금안, 올백머리, 존댓말 등으로 진과 자신이 겹치지 않게 하지만 D는 진을 인정하지 않기에 이마의 문신과 적안을 제외하고는 진과 겹치게 하고 다님. 

3. A와 D가 화랑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유

레이브 워 안에서 하루에도 수만명의 유저를 마주쳐도 화랑에게 호기심을 가진 이유는 말그대로 화랑의 행동이 수많은 유저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기 때문. 희박한 확률을 스스로 깨부수며 계속해서 도전하는 화랑이 둘에게는 신기하게 보인 것. A는 호감의 호기심이라면 D는 가학심을 담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음. 

그리고 사실 마지막 100번째에서 화랑은 D와 싸우지 않아도 되었으나 불같은 성격의 화랑이 이야기도 안들어보고 덤벼들었고 오히려 그 점이 D의 가학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음.

4. 그래서 A와 D는 어떻게 되나요?

모든 키는 진이 쥐고 있고 화랑은 D와 자꾸 엮이게 되는데 D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진에게 돌아갈 생각이 1도 없기에...

나 역시 너의 인격이라는 걸 인정해야 할거다.

네가 나의 인격일리가 없어.

빨리 깨닫지 못하면 부셔질겁니다.

...이 멍청이들이 진짜. 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죽여놓고 한다는 짓이 고작 이런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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