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권

[진화랑] 썰 모음 17

진화랑뎁진 1개, 뎁진화랑 1개, 진화랑 1개. 2024년 2월 7일 연성.

1. 페이트(페그오) AU로 본의 아니게 성배 전쟁의 마스터가 되어 참가하게 된 화랑과 영혼에 새겨진 인연으로 진을 제치고 억지로 좌에서 현현한 뎁진. 그리고 그로인해 룰러로 현현해 버린 진으로 진화랑뎁진.

스트리트 파이트 팀이자 이 근방의 폭주족인 레지스탕스의 리더인 화랑은 제 영역에서 수상한 놈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는 제보를 받고 백두산이 하루 자리를 비운 날 새벽에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이미 정보는 충분히 습득한 상태였고 괜히 많은 인원이 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 화랑 혼자서 처리하기로 결정한 것에 아무도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디보자, 여긴가... 하루 전날 미리 습득한 정보를 따라 빠르게 제 바이크를 몰고 가던 화랑은 교묘하게 숨겨둔 지하로 향하는 입구를 발견하고는 주저없이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와, 미친. 그냥 하수도를 숨어드는 땅굴인 줄 알았는데 이건 뭐... 계단을 따라 내려온 화랑은 생각보다 넓직하게 들어난 공간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공간으로 보이진 않는데. 설마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뭐 때문에? 잠시 생각하던 화랑이 이내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고민해봤자 답은 안나오고 내... 알바 아니지. 일단 그 수상한 놈들부터 잡고보고 어차하면 입구란 입구는 다 부셔버리지, 뭐. 팡, 제 오른 주먹을 왼 손바닥에 부딪치며 결정을 끝낸 화랑이 제 자리에서 두어번 뛰더니 이내 가볍게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간의 끝으로 보이는 장소에 너무나도 수상한 로브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서너명의 사람을 발견한 화랑이 눈을 빛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달려오는 발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순식간에 근접해 공격하는 화랑의 공격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나가 떨어져 기절했다. 마지막 한 사람이 칼 같은 걸 꺼내 휘둘렀지만 화랑의 오른손에 작은 베인 상처만 만들더니 그의 발차기를 정통으로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아, 수련 부족. 화랑이 칼에 베어 피가 흐르는 제 손을 보다 혀를 차며 주변을 훑었다. 바닥에는 수상한 그림, 마치 마법진과도 같은 붉은색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 뭐야, 악마 숭배자들이라도 되나... 남의 영역에서 이딴 짓이나 하고 있어 "

화랑이 기절한 수상한 자들의 품을 뒤졌다. 신분을 확인할 만한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나온 건 이상한 글귀가 적힌 종이 쪼가리 뿐이었다. 하긴 이런 요상한 짓이나 하는 놈들이 신분증 같은 걸 가지고 다닐리가 없지. 무심한 눈으로 종이뭉치들을 눈으로 훑던 화랑이 저도 모르게 글귀를 중얼 거리기 시작했다. 고한다. 그대의 몸은 내 아래에, 내 명운은 그대의 검에. 성배의 의지에 따라 이 뜻, 이 이치를 따른다면 응하라. 맹세를 이곳에. 나는 영윈히 모든 선을 이루는 자, 나는 영원히 모든 악을 누르는 자. 그대는 삼대 언령을 두르는 일곱 하늘, 억지의 고리로부터 오라, 천칭의 수호자여.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한심의 뜻이 담긴 숨을 내뱉었다.

" ...뭐야, 중2병들이냐. 성배니, 언령이니... 못봐주겠네 "

종이 뭉치를 던지듯 바닥으로 떨군 화랑이 다시 바닥에 그려진 문양으로 향했다. 이건 뭘로 그린거지? 페인트? 설마... 진짜 피 같은건 아니겠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으로 문양을 조심스레 매만졌고 그 행동으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있던 핏방울이 문양에 떨어졌다. 떨어진 핏방울이 스며드는가 싶더니 문양이 갑자기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뭐야? 놀란 화랑이 벌떡 일어나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환하게 빛나던 문양의 빛이 눈도 뜨지 못할 정도로 밝아지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팔로 얼굴을 가리던 화랑은 제 목을 낚아채는 무언가에 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그리고 그는 제 목에 가해지는 강한 통증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육식 동물에게 목이 물린 것 같은 느낌. 제 목을 깊숙히 파고드는 단단한 무언가에 이를 악 문 화랑이 고통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억지로 들어올려 저에게 고통을 주는 무언가를 움켜잡고는 번쩍 들어올렸다. 강하게 제 목을 문 것과 달리 너무나도 쉽게 들어올려진 무언가는 그대로 화랑을 공중으로 띄웠다. 그래, 말 그대로 공중으로. 빛이 사그라들고 왼손으로 물린 곳을 누르며 바라본 그곳에는. 악마가, 있었다.

" 하하... 간만에 먹어도... 네 피는 여전히 맛있군, 화랑 "

" 너... 뭐야... 악마라도 되는거냐! "

뿔과 검은 날개를 달고 붉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건 그야말로 악마였다. 진짜 악마 소환진이었냐고...! 화랑이 이를 악물었다. 갑작스레 목을 물린 충격 탓인지 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후우, 정신 차려...! 화랑이 손을 들어 제 뺨을 힘차게 때렸다. 짝,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고 그제서야 진정된 몸에 화랑이 제 목을 누른 손에 좀 더 힘을 줬다. 그리고 그런 화랑을 악마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 매번 만날 때 마다 너는 같은 행동을 하는군. 언제 쯤이면 너에게 공포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

" 미안한데 난 악마같은 거 만난 적 없거든? "

" 지금이야 그렇겠지. 하지만 영혼에 새겨진 인연은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

악마가 목을 누르고 있는 왼손을 부드럽게 잡아채더니 피가 묻은 손가락 중 약지 손가락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뭐하는거야, 이 악마가...! 경악하는 화랑이 재미있다는 듯 웃던 악마가 이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약지를 강하게 물었다. 윽...! 이러다 손가락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하게 문 것도 잠시 입을 떼자 손가락에 선명한 이빨 자국이 보였다. 그건 마치 결혼 반지와도 같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너를 그 녀석에게서 빼앗아 주겠다, 나의 마스터. 선언과 함께 화랑의 왼손에 붉은 문양이 떠올랐다. 자, 성배 전쟁의 시작이다! 단호한 외침과 함께 악마의 웃음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지상이 까마득하게 보일 정도의 높은 건물, 그 옥상 끝자락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한 발만 헛딛어도 그대로 지상으로 추락할텐데 그 누군가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는 듯 가만히 서서 세상을 내려보았다. 철저하게 악과 정면에서 마주해야 하는 자, 세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지켜야하는 수호자가 현현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잠시 세상을 바라보던 수호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반드시... 구할거야. 그러니까... 기다려, 화랑. 수호자의 눈이 강렬한 의지로 빛났다.


2. 진과 데빌이 하나가 된 후 진이 잠든 밤이면 종종 진 대신 깨어나 화랑을 만나는 데빌로 뎁진화랑. 화랑이 진을 짝사랑하는 묘사 존재. 뎁진 > 화랑 > 진.

어두컴컴하고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는 새벽에 희미한 불빛 하나가 떠올랐다. 후아암. 또 이렇게 이른 시간에 깰 줄이야. 으챠, 화랑이 제 방에서 나와 터덜터덜 밖이 훤하게 보이는 발코니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바지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사범님이 알면 극대노 하시겠지만... 가만히 벽에 기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멍하니 담배 끝의 희미한 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익숙한 날개짓 소리가 들려왔다. 또냐... 작게 중얼거리고 고개를 들기가 무섭게 화랑은 제 얼굴에 닿는 차가운 손에 눈을 가늘게 떴다. 마치 어둠 속에서 스르륵 나타난 것 처럼 화랑은 제 앞에 나타난 자의 붉은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잘 아는 얼굴이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분명 다른 인격이었다. 후우, 화랑이 입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그 얼굴에 조용히 내뿜었다.

" 너 말이야. 아무리 진의 내면에 녹아들었다고 해도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

" 이런 일탈도 없으면 심심해서 그대로 소멸해 버릴 걸 "

"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

그 말에 작게 웃은 데빌이 발코니의 난간 위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앉아 화랑을 바라보는 데빌의 눈에는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는 어린 아이의 호의가 담겨있었다. 그런 데빌에 작게 한숨을 쉰 화랑이 거의 필터에 닿기 직전까지 타버린 담배를 챙겨온 재떨이에 비벼 껐다.

" 진은? "

" 왠 여자랑 식사를 하고오더니 꽤나 만족한 모양인지 심신이 안정된 상태로 잠들더군. 덕분에 나도 편하게 나올 수 있었지만 "

" 왠 여자가 아니라 샤오유겠지. 하여간에 이제 슬슬 이름 외울 때 안됐냐? "

" 하, 내가 왜 내 존재를 자세히 알지도 못했던 인간의 이름을 외워야하지? "

" 하여간에 승질하고는. 그래도 좀 외워라. 매번 지적하기도 귀찮거든? "

혀를 찬 화랑이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역시 그 자식 샤오유랑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됐나보네. 하긴 샤오유가 꽤 오래동안 뒤를 쫓아다니긴 했지... 하아, 그 얼간이한테는 너무 과분한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만히 멍을 때리던 화랑에게 다시 한번 더 닿은 건 데빌의 차가운 냉기였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화랑의 얼굴을 마치 개나 고양이를 다루듯 가만히 쓰다듬는 그 손에 평소같으면 버럭 성질을 내며 손을 쳐냈을 화랑은 새벽의 기묘한 분위기 때문인지 그저 가만히 그 손길을 받고 있었다. 물론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그러다 이내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인지 화랑이 툭 데빌의 손을 밀쳐내며 다시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 너의 이렇게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을 본게 나뿐이라니 그것도 재미있군 "

" 무기력이라기 보다는... 나라고 맨날 24시간 내내 날뛰는건 아니라고. 이럴 때도 있는거지 "

" 그렇게도 카자마 진이 소중한가? "

" ...무슨 소리야? "

" 크큭, 지금 네 표정 완전... "

집사에게 버림받은 고양이의 표정이라고. 데빌의 손이 순식간에 담배를 문 체 깊게 연기를 마시던 화랑의 턱을 잡으며 눈을 마주쳐왔다. 데빌의 붉은 눈에 비쳐지는 자신의 표정 따위 보고 싶지 않았던 화랑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데빌이 턱을 쥔 손에 힘을 주자 몰려오는 통증에 화랑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데빌과 눈을 마주쳤다. 하하, 허무한 표정. 항상 호승심 넘치고 혈기왕성한 표정만 알던 카자마 진과 달리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표정을 보던 데빌이 화랑이 입술에서 담배를 뺀 순간 걸터 앉아있던 난간에서 내려와 그의 앞에 앉고는 이내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에 화랑은 익숙하게 눈을 감고 호응했다. 근데 이 자식이 아직 담배 연기 머금고 있는데... 미쳐 내뿜지 못한 담배 연기가 두 사람의 입안에서 마치 끈적한 크림처럼 섞여 사라졌다. 담배향이 가득한 키스에 화랑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데빌의 옷자락을 붙잡자 데빌이 다정하게 그 손에 제 손을 겹치더니 아슬아슬하게 들려있던 담배를 빼앗아 재떨이에 던지며 웃었다. 크큭, 입 안에서 소리없이 사라진 웃음 소리와 함께 질척한 물소리만 울려퍼진 것도 잠시 퍼득 정신을 차린 화랑이 데빌의 가슴에 손을 주고 그대로 힘을 줘 천천히 밀어냈다. 데빌은 이번에도 순순히 밀려났다.

" 세게 밀치지 않은 건 카자마 진이 다칠까봐 인가? "

" 자고 일어났는데 기억에도 없는 상처가 있으면 당연히 의심하겠지 "

" 그것만이 아닐텐데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야 "

" 아니, 됐다. 여하튼... 오늘은 이만 갈까. 슬슬 타임 오버 같으니까 "

자리에서 일어난 데빌이 가볍게 난간 위에 올라서더니 제 날개를 크게 펼쳤다. 까마귀의 것과 닮은 칠흑 같은 날개를 몇번 움직여보던 데빌이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그런 데빌에 화랑도 일어나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니.

" 너무 아쉬워하지 말라고. 또 올테니까 "

" ...다신 오지마 "

" 진심이 없는 말은 와닿지 않으니까, 화랑 "

자신을 비웃는건지, 아니면 진심을 알고 있는건지. 답지 않게 광기가 섞인 웃음 대신 마치 정말 카자마 진처럼 미소를 지은 데빌이 날개를 움직여 순식간에 화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잠시 데빌이 사라진 곳을 가만히 바라보던 화랑이 하아아아... 깊은 숨을 내뱉으며 그대로 주저앉아 팔로 제 머리를 감쌌다. 정말 싫다. 방금 전 자신과 키스했던 게 데빌이 아니라 진이었다면... 이라고 생각해버린 자신이 화랑은 너무나도 싫었다.

무슨 변덕인지 진과 융화된 후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거라 생각한 데빌은 어떻게 알고 오는 건지 화랑이 잠에서 일찍 깨어나 이렇게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며 새벽을 보내던 때에만 진의 몸을 빌려 제 앞에 나타나곤 했다. 처음엔 그의 몸을 차지한 후 또 세계를 뒤집어 놓으려는건가 싶었지만 데빌은 그저 화랑과 함께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기만 반복했다. 마치 화랑의 마음을 알고 있고 그를 위로라도 하는 것 처럼. 그래, 화랑은 결코 데빌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 만나고 싶다와 만나고 싶지 않다가 공존하는 건... 무슨 모순이야... "

차라리 진, 너였다면... 아니면 데빌이 없어졌더라면... 아니, 차라리 데빌이... 순간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깨달은 화랑의 소리없는 절규가 울려퍼졌다. 재떨이에서 불이 붙은 체 소리없이 타들어가던 담배가 이내 꺼지고 남은 건 향만 남긴 체 덧없이 어둠 속으로 흩어진 담배 연기 뿐이었다.


3. 5-3에서 이어지는 인외물. 새로운 얼굴들의 등장, 그리고 진에게 들켜버리고만 화랑의 비밀.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던 카즈야가 돌아가고 화랑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제멋대로란 말이야. 처음 만났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뜻을 굽힌 적도 없고 말이지. 그만큼 간절히 원한다거나... 절박하단 소리 일지도 모르지만... 화랑이 카즈야를 떠올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 양반이 그럴 리가 없지. 하아, 됐다. 이만 문 닫을까. 오늘 카운터에 앉은 후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화랑이 출입문을 열어 붙어있던 OPEN 팻말을 CLOSE로 바꾸고는 잠시 서있더니. 혼자 도망칠 생각하지 말라고, 카즈야씨...!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조용하지만 섬뜩하게 울려퍼졌다.

" 안녕, 화랑! 물건 가져왔어 "

" 어서와 "

다음 날 다시 가게 문을 열고 한가로이 시간을 때우던 화랑은 벌컥 열린 문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가게로 들어온 건 화랑도 잘 아는 인외였다. 제 가게의 손님이자 화랑이 자주 이용하는 운송업자인 그리폰, 스티브였다. 금발의 성인 남성으로 둔갑한 스티브는 화랑의 정체를 알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이기도 했다. 으챠, 스티브가 어깨에 매고 있던 보냉 가방에서 혈액팩을 꺼내 내밀었다. 그 혈액팩을 받아 익숙하게 제 발치의 작은 냉장고에 넣은 화랑이 제 폰을 들었다.

" 이번에도 지불은 돈? 아니면... "

" 정보로 부탁해 "

" ...아직도 포기 안했어? "

" 뭐... 그렇지 "

하여간에 끈질기다니까, 너도. 화랑이 혀를 차더니 이내 제 안대 위로 손을 올리고는 세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티브가 찾는 정보는 단 하나, 제 모체가 된 어머니의 위치에 대한 정보였다. 처음 제 가게의 손님으로서 찾아온 스티브는 제 어머니에 대한 정보라고는 달랑 이름만 아는 상태에서 무작정 어머니를 찾아 달라고 했고 화랑은 기함을 토하며 나보고 전세계의 니나 윌리엄스를 모두 확인해 달라는거야, 뭐야! 소리쳤었다. 물론... 그 후 어찌어찌 - 화랑이 가게 문도 닫고 하루종일 전 세계를 관찰한 결과였다 - 그의 어머니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를 발견한 화랑이 그 정보를 판 것을 계기로 화랑과 스티브는 안면을 트게 되었다. 화랑은 모체라고 말하는 스티브에 평범한 이산가족 찾기 수준이 아니라는걸 눈치챘지만 별 다른 말 없이 그저 고객이 원하는대로 착실하게 정보만 전달해줬고 그게 스티브의 호감을 사는 계기가 되었다. 뭐... 화랑의 입장에서도 제 정체를 알고도 저를 괴물 보듯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스티브를 좋게 보긴했지만. 이내 화랑이 손을 내렸다.

" 산 넘어 산이네 "

" 무슨 소리야? "

" 네 어머니... 니나 윌리엄스가 고용됐는데 그 고용주가 무려... "

" 잠깐만, 설마... "

" 어둠의 세계에서 군림하는 뱀파이어 로드 "

" 미시마 카즈야냐! 아, 정말! "

스티브가 주먹으로 데스크를 쾅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데스크의 물건들이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떨어졌다. 쯧, 마마보이냐. 니나에게 거부당하고도 여전히 그녀를 걱정하고 생사를 살피는 자신을 잘 아는 화랑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스티브가 이를 갈다 이내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안다고해도 내가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생사 확인 했으면 됐다. 데스크에 기댄 스티브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데스크를 두드렸다.

" 그래서 새로운 고객이라도 유치했어, 화랑? "

" 뭐, 그렇지 "

" 아는 사람만 아는 이 구멍가게 같은 곳을 참 잘도 찾아 온단 말이야 "

" 그래서 불만이냐? "

" 여전히... 나갈 생각은 없고? "

" 그래, 없어 "

자신의 질문에 단호하게 대답하는 화랑을 보던 스티브가 양손을 들어올리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좋다면 상관 없지만... 아쉽지 않냐, 세상엔 그래도 아직까진 재미있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뭐, 네 입장에서는 이해 되긴 하지만. 자세를 바로 세운 스티브가 이만 가야겠다며 인사를 건내자 화랑이 말없이 휙휙 손짓을 해댔다. 마치 파리라도 내쫓는 것 같은 손짓에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준 스티브가 문이 닫히기 전 본래 모습인 그리폰을 변해 날아가는 걸 본 화랑이 아까 전 스티브가 데스크를 치면서 쓰러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바로 세우다가 이내 작은 액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신과 중년의 남자가 같이 찍힌 사진. 화랑의 손이 가볍게 사진 속의 중년의 남자를 쓰다듬다 이내 원래 있던 자리에 놓았다.

약속된 일요일이 되자 진은 오후 쯤 되어 가게를 찾았다. OPEN 팻말이 달린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가니 안에는 화랑 뿐만이 아닌 다른 손님도 함께였다. 안대에 손을 올린 화랑과 그 앞에 있는... 경찰 제복을 입은 남자. 곧 화랑이 손을 떼더니 종이를 한장 꺼내 무언가 빠르게 휘갈기고는 남자에게 건냈다.

" 생각보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긴한데 범인도 같이 있으니까. 흉기도 있으니 방심도, 오판도 금물이야. 그리고... 빨리 잡는게 좋을걸. 약쟁이라 슬슬 금단 증상으로 인한 정신 이상으로 언제 아이를 해칠지 모르니까 "

" 그래, 고맙군. 이번에도 신세를 졌어 "

" 무상봉사 아니니까! 알지? "

" 그래, 담배면 되잖아? "

화랑에게서 종이를 받은 경찰이 빠르게 진을 스쳐지나... 가려다 멈췄다. 잠시만. 네? 진에게 말을 건 경찰이 가만히 진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정. 진의 얼굴을 마치 뜯어보듯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어, 저기... 당황한 진은 아랑곳 하지 않던 경찰이 자네 혹시... 라며 말은 걸려던 걸 막은 건 역시 화랑이었다.

" 빨리 잡는게 좋다고 했잖아, 레이씨? 그리고 내 가게에서 손님들끼리 신분 확인하지 말라고 했지? "

" 아, 알고 있어! 이거 실례했네 "

화랑의 불호령에 화들짝 놀란 레이라 불린 경찰이 빠르게 가게를 나가는 뒷모습을 보던 진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화랑이 손에 혈액팩을 든 체 웃고 있었다. 먹고 갈래, 가지고 갈래? ...먹고 가지. 그 말에 화랑이 그럴 줄 알았지, 중얼거리더니 손수 혈액팩에 빨대를 꽃아 내밀었다. 강한 힘과 속도로 한번에 그 얇은 빨대를 혈액팩에 꽃는 모습에 진이 움찔하긴 했지만.

" 자, 손님. 주문하신 혈액팩 나왔습니다 "

마치 카페에 온 손님에게 음료를 건내는 알바생 같은 말에 진이 살짝 웃고는 혈액팩을 받았다. 하아. 마시기 싫다는 한숨이 담긴 숨을 내뱉은 진이 빨대를 입에 물고 마시기 시작했다. 하얀 빨대에 붉은 혈액이 빨려들어가고 그대로 입으로 들어가자마자 진은 피에 대한 갈증이 조금씩 사라지는 걸 느끼고는 속으로 자조했다. 반쯤 마셔가던 진에게 불쑥 핸드폰을 들이 민 화랑이 톡톡 손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이 방법으로 송금해줘. 가격은... 비싸지만 못낼 가격은 아니었다. 도리어 진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싼 편이었다. 버릇 없긴 하지만 입에 빨대를 문 체 빠르게 화랑이 보여준 방법으로 송금을 마친 진의 혈액팩이 슬슬 바닥을 보이자.

" 갈증은 좀 가셨나? 하나로 되겠어? "

" ...걱정하는 척 하면서 하나 더 강매할 생각이면 포기해 "

" 아쉽네~ 간만에 온 손님이라 좀 뜯어내야 하는데 "

" 그나저나... 아까 그 경찰은... "

" 아아, 정보 사러 온거야. 아이가 유괴 됐는데 좀 찾아 달라고 해서 "

" 그런 정보까지 구할 수 있는건가? "

" 내 주력 상품은 정보라고 했잖아? 그리고 이 정도도 못하면 블러드 탈론이라는 이름이 울지 않겠어? "

" ...그렇군 "

" 아, 다 먹었으면 줘. 버려줄테니까. 여하튼 매주 보게 될 얼굴이니 편하게 말해도 되겠지? "

" ...지금까지 날 대한 건 편하게 말한게 아니었나? "

그 후 매주 일요일이 되면 진은 화랑의 가게를 찾았고 화랑은 진에게 빨대를 손수 꽃아 혈액팩을 내밀었다. 진으로서는 나름 다른 쪽으로 수확도 있었는데 그건 화랑이 말해준 뱀파이어의 특성이었다. 21살? 흐음. 그럼 이제 슬슬 성장이 멈추겠네. 뭐야, 몰라? 뱀파이어는 이론상 영생을 살 수 있는 종족이야. 그 영생을 위한 준비 단계로 육체가 가장 건강하고 강한 시기에 성장이 멈춰. 대략... 20대 초반에서 중반 정도 되면 성장이 멈추고 그 후로 쭉 그 육체로 살아가는거지. 응? 어째서 이론상이냐고? 그거야... 육체는 성장을 멈춰도 정신적으로는 계속 마모되니까. 계속해서 마모되고 버티지 못하면... 태양빛에 자살하거나... 결국 폭주해서 퇴마 당하는거지. 뭐, 이런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는 그만 할까나. 근데 넌 뱀파이어면서 왜 모르는거야? 화랑의 악의 없는 질문에 진은 어색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기억 속 가족은 오직 인간인 어머니 뿐이었고 어머니는 뱀파이어의 특성 같은 건 하나도 알려주신게 없었으니까.

" 아, 그러고보니 특징이 하나 더 있네. 진조 뱀파이어나 그 피를 타고난 자들은 몸에 악마의 힘이 깃들어있어 "

" 악마? "

" 응, 뭐 나도 실제로 본건 손에 꼽긴 하지만. 여하튼 진조가 괜히 진조가 아니니까... 괜히 뒷세계에 얼굴 내민다거나 하지 않는다면 볼 일은 없을걸? "

화랑의 말에 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지만... 자신은 그런 뒷세계나 인외임을 들어내며 살 생각이 없었다. 물론 성장이 멈추는 순간 겉의 세계 보다는 인외들이 모여있는 세계로 갈 생각이긴 하지만 위험한 곳으로 스스로 걸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빨대를 입에 문 진을 화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바라봤다. 하지만... 네 피가 그렇게 놔둘 것 같지 않네. 속으로 중얼거린 화랑이 작게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순간. 화랑이 가만히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화랑? 갑작스런 행동에 진이 다 마신 혈액팩을 대충 갈무리해 쓰레기통에 던져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화랑 "

" 진, 이쪽으로 와 "

" 뭐? "

" 오라면 와라, 쫌 "

화랑의 손짓에 처음으로 데스크 안쪽으로 들어간 진은 갑자기 데스크 안, 그러니까 제 발치에 주저 앉히는 화랑에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화랑은 대답도 하지 않고 시선도 주지 않으며 계속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쾅, 거칠게 문이 열렸다. 화랑에 의해 강제로 데스크 안쪽에 숨어있게 된 진은 들려오는 목소리로 상황 파악을 했다. 흔한 강도였다. 화랑은 익숙한 듯 양손을 들어올리다 아래에 놓여있던 금고를 꺼내 대충 내밀었다. 그리고 쏘지 말라는 등, 돈이라면 다 가져가도 괜찮다는 등 순순히 주려는 태도를 취했고 그 태도에 강도의 답변은. 탕! 가게를 울리는 소리에 진이 움찔, 몸을 떨었다. 동시에 쿵, 데스크에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 랑...? 이내 진의 눈에 축 늘어진 화랑의 팔을 타고 흐르는 피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런...! 어차피 자신은 뱀파이어, 은 탄환도 아니고 일반 탄환에 죽을 일도 없는데 손님인 자신을 지키겠다고 화랑 본인이 대처를 미리 하지 못한건 아닌지 싶었던 진이 다급히 데스크 안쪽에서 나오려는 순간. 팔을 타고 흐르던 피가 순간 멈추더니 천천히 역행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피가 역행하는, 상식에서 벗어난 광경에 진의 눈이 커졌다. 역행하던 혈액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축 늘어진 손가락이 까딱 움직이더니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났다.

" 아, 젠장.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간만에 빌어먹을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왔네 "

" 힉! 주, 죽었을텐데... 괴, 괴물! "

" 야, 잠깐... 얼씨구. 돈은 얼마 가져가지도 않았네. 뭐... 저승으로 가는 노잣돈으로는 충분하려나 "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도망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후 저 멀리서 차가 다급하게 멈추는 거친 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딪치는 소리, 비명 소리가 섞여서 울려퍼졌다. 강도살인으로 전과 12범. 죽어도 싸지, 다 자업자득이라고나 할까나. 아... 근데 진짜... 이게 얼마만에 죽은거야... 그럼... 나와도 돼, 진. 담담한 그 목소리에 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데스크 안쪽에서 나왔다.

" 화랑... 너 정체가 뭐야? "

" ...... "

" 인간이든 인외든 공통점은 있지. 바로 죽으면 끝이라는 거. 근데 너는... "

" 그래, 죽지 않는 생물은 없어.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은 반드시 끝이 있지. 그건 이론상 영생을 살 수 있다는 뱀파이어도 마찬가지고. 근데 왜 나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까, 응? 진 "

" ...신... "

" 아니아니, 비슷하지만 틀렸어. 여하튼... 다시 안와도 괜찮아 "

" 뭐? "

" 물건은 아는 녀석을 시켜서 집으로 직접 보내줄게. 어차피 송금 방법도 알고 있으니까 대면할 필요 없잖아? "

" 잠깐만, 화랑... "

자자, 오늘은 일찍 문 닫을거니까. 빨리 가. 그럼 잘지내라, 진. 억지로 진의 등을 떠밀며 가게 밖으로 내몬 화랑이 잽싸게 팻말도 CLOSE로 바꾸고는 쾅, 문을 잠궜다. 화랑, 화랑! 문을 두드리며 잠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있던 화랑은 이내 조용해지자 하아, 숨을 내뱉고는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올렸다. 어차피... 너도 곧 날 두려워하는 눈으로 보겠지. 화랑은 제 비밀이 들통난 후 자신을 바라보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해냈다. 그들 중 정말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결 같이 두려워하는 눈으로 저를 보며 이렇게 외치곤 했다. 자신의 시야에 비춰진 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죽지 않는 신의 괴물이라고. 비슷하긴 하지만 조금 다른데... 그나저나... 간만에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는데... 잠시 진을 떠올린 화랑이 이내 고개를 휙휙 저으며 터벅터벅 2층으로 올라갔다. 오늘은 파업이야, 일 안해.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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