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랑] 썰 모음 16
진화랑 2개, 진화랑라스 1개. 간만에 불 붙었다, 달리자. 2024년 2월 1일 연성.
1. 6-1에서 이어지는 내용. 평상시와 다를 바 없어보이지만 진이 아프다는 걸 가장 먼저 알아차리는 화랑으로 진화랑. (은근 리리아스카, 라스알리사, 리백 요소 있음)
뒤늦은 여름 감기를 앓던 화랑이 컨디션을 회복하고 제 옆에서 저를 끌어안은 체 자고 있던 진에 놀라 그를 발로 차 침대에 떨어트린지 한달이 지났을 무렵. 레지스탕스에게 할당된 지역의 회복 경과가 담긴 서류를 전달하러 간만에 위그드라실 본부에 들린 화랑은 자신과 마찬가지의 목적으로 온 리리, 아스카와 만남과도 같은 사담을 나누며 응접실로 향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진, 라스들과 경과 보고를 하며 사담을 나눌텐데 그들은 지금 회의실에서 레오 클리젠과 그의 아버지인 니클라스 클리젠이 조사한 데빌과 아자젤의 근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듣는 중이었다.
리리와 아스카의 대화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응접실로 향하던 화랑이 그들이 있을 회의실을 스쳐지나가며 힐끔 창문을 바라보았다. 창문에는 전체적으로 불투명 시트지가 붙어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지만 교묘하게 창문 윗부분은 시트지가 붙어있지 않았고 화랑이 그 틈으로 회의실 안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인 라스, 리, 레오. 그리고 레오와 닮은 중년의 남성이 보였다. 홀로그램까지 띄워놓고 무언가 한참을 이야기하는 모습들을 가볍게 훑어보던 화랑의 눈에 진이 들어온 순간.
" 음? 왜 그러시죠? "
" 왜 그래? "
화랑이 걸음을 멈췄다. 말없이 창문 너머를 응시하는 화랑이 이상했는지 리리도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무언가 설명을 하는 니클라스와 레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하는 것 같은 리, 라스.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는 진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던 리리와 달리 둘보다 키가 작은 아스카는 불투명 시트지에 가려 아무것도 보지 못하자 이내 무슨 일이냐며 다시 한번 더 물어왔지만 그 물음에도 잠시 인상을 찌푸린 체 계속 창문 너머를 응시하던 화랑이 나지막히 말했다.
" 알리사, 지금 어디있어? "
" 알리사? 일단 본부에 있는 걸로 아는데... 그녀는 왜 찾으시죠? "
" ...알리사 좀 찾아서 데려와줘 "
" 잠깐, 니 지금... "
" 부탁해 "
그 화랑이 꽤나 진지한 어투로 부탁하자 리리와 아스카가 잠시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알았다며 휙, 화랑을 등지고 빠르게 알리사를 찾아나섰다. 그런 그녀들의 등을 바라보던 화랑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이내 저벅저벅 걸어 벌컥, 노크도 없이 회의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예의도 없이 갑자기 회의실로 들어온 화랑에 다들 놀랐지만 그 중 가장 놀란 사람은 진이었다. 화랑? 진의 부름에도 대답없이 곧장 그를 향해 걸어간 화랑이 양손으로 덥썩 진의 얼굴을 붙잡더니... 그대로 이마를 맞대었다.
자, 잠깐...!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화랑이 이렇게 대담한 행동을...? 당황한 진의 눈이 코 앞의 화랑을 담았다. 눈을 지긋이 감은 체 마치 제 앞의 신자들에게 축복을 기도하는 성자같이 이마를 맞댄 화랑을 바라보던 진이 천천히 눈을 뜨는 화랑과 눈을 마주쳤다. 이 멍청이가... 어라? 뭔가 잔잔한 분위기와 맞지 않는 단어에 진이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순간. 화랑의 손이 진의 이마를 세차게 때렸다. 짝, 찰지게 난 소리에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움찔한 순간.
" 아프면 좀 쉬어라, 이 얼간아! 일에 미쳤냐? "
화랑의 외침이 잠시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건지 침묵만이 감돌던 회의실이 다시 소란스러워진건 그녀들이 알리사를 찾아서 함께 회의실로 들어온 순간부터였다. 시야에 알리사가 들어오자마자 화랑이 소리쳤다.
" 알리사, 이 얼간이 좀 스캔해봐! "
" 화랑씨, 무슨 일... 은 진씨의 체온이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38.9도이며 전체적으로 컨디션이 떨어져있어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
" 어... "
" 이럴 줄 알았다. 알리사, 오늘 처음부터 없었지? 이러니 아무도 네 상태를 모르지... 지금 회의 급한거 아니면 이 얼간이 좀 데리고 간다. 아, 보고서도 놓고 간다 "
" 잠깐, 화랑... "
화랑이 진의 손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그를 끌고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나가기 전 들고 있던 보고 서류를 소리나게 테이블에 내려놓고서. 한 차례 폭풍이 몰려온 것 처럼 분위기를 휩쓸고 간 두 사람이 사라지고 먼저 침묵을 깬 건 알리사를 데리고 왔던 그녀들 중 한 명인 리리였다.
" 정말이지... 너무 달달해서 못봐주겠네요. 질 수 없죠. 아스카씨, 우리도 데이트나 하죠! "
" 자, 잠깐!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
" 그럼 이만 물러가죠. 아, 저희도 보고서 놓고 갈테니 꼼꼼히 확인해 주시길. 자, 갈까요? "
" 아아아, 잠깐만...! "
보고서를 화랑이 놓고 간 보고서 위에 던지듯 내려놓은 리리가 아스카의 손을 붙잡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의실을 나섰다. 아스카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아무래도 리리의 투정을 이길 수는 없는 모양인지 그대로 끌려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팔짱을 낀 체 흥미롭게 바라보던 리가 입을 열었다.
" 라스, 진의 상태 알고 있었나? "
" 전혀. 아프다고 티 낼 성격도 아니고... "
" 그런데 그냥 지나가면서 힐끔 본 정도로 이상을 파악했다라... "
하여간에 카자마 진 한정으로 눈썰미가 거의 알리사 급이다. 저런 눈썰미로 그때도 그의 이상을 알아차리고 적당히 데빌의 힘을 이끌어낼 수 있게 움직였지. 그나저나... 분위기가 완전 깨졌는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리의 말에 알리사가 라스에게 다가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런 알리사에 라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지금까지의 촌극 아닌 촌극을 재미있게 보고 있던 클리젠 부자도 리와 다음 일정을 잡고 나서는 사이좋게 회의실을 나가니 남은 건 리 뿐이었다. 왠지... 갑자기 외로워졌는데. 리가 제 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아, 백? 한국이야? 으응, 밥이나 먹을까하는데. 나? 일본인데? 언제 한국 올거냐고? 무슨 걱정이야, 백을 만나기 위해서라면 전투기라도 끌고... 자동차 끌고 나오는 감각으로 말하지 말라고? "
한편, 진을 끌고 나온 화랑이 향한 곳은 의무실이었다. 의무실에서 대기하던 의무병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진에 놀란 듯 허둥거리다 화랑의 일갈에 겨우 진정하고 진을 진찰하기 시작했고 결국 피로로 인한 몸살 진단을 받았다. 의무병은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진이 겨우 몸살에 시달리는게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고 화랑은... 그게 마음에 안들었다. 칫, 혀를 차고는 약이나 달라며 의무병을 닥달해 약과 생수병을 받은 화랑이 진을 끌고 이번에는 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적당히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가구와 소파가 구비되어 있는 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화랑이 털썩 소파에 앉더니 진에게... 무릎 베개를 해주었다.
" 저기, 화랑 "
" 시끄러워. 자기 몸도 못챙기는 얼간이는 조용히 쉬라고 "
" 아까... 왜 화가 난거야 "
진이 말하는 화가 났다는 건 회의실이 아닌 의무실의 일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화랑이 낮은 숨을 내뱉고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런 괴물의 힘을 가지고 있어도 넌 괴물이 아니라... 인간이잖아. 인간이니까 아플 수도 있는거지. 근데 널 마치 신기한 무언가를 보듯이 쳐다보는게 마음에 안들었던 것 뿐이야. 그 말에 진이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래, 모든 것이 끝나도 세상의 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세계를 멸망시킬 괴물의 힘을 가진 자, 한 때 세계를 전란에 휩싸이게 한 자. 진, 자신도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알기에 제 몸은 신경도 쓰지 않은 체 미친듯이 전세계의 복구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고 아파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자신에겐 아프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기에. 그렇기 때문에... 화랑이 생수병의 캡을 뜯고 물과 약을 입에 머금더니 그대로 진에게 입을 맞췄다. 거부하지 않고 입을 여니 그대로 흘러들어온 물과 약을 받아 삼키고도 화랑의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잠시 그렇게 입술로 온기를 주고 받은 둘이 떨어지고 화랑이 한 손을 들어 진의 눈을 가렸다.
" 일단 한숨 자라, 얼간아. 내가 친히 베개가 되줄테니까 "
" ...화랑 "
" 시끄러우니까... 지금은 쉬자, 진 "
시끄럽다라. 쉬지않고 일하려는 자신의 말이 시끄럽다는 뜻일까, 아니면 제 몸 하나 건사하지 않고 속죄 중인 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시끄럽다는 뜻일까. 아마 진을 이해하는 화랑이라면... 서서히 몸에서 힘을 빼던 진의 숨이 잔잔해지자 화랑이 눈을 가린 손을 움직여 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말없이, 잔잔한 침묵이 평온의 시간을 보여주는 듯 했다.
2. G사의 카자마 진, 위그드라실의 라스 알렉산데르손, 레지스탕스의 화랑으로 셋의 첫만남, 조직물. (약간 신세계 느낌...?) G사와 위그드라실은 대립 관계, 레지스탕스는 중립의 위치.
힘이 전부다. 그걸 잊는 순간 네놈은 나락행이겠지. 진은 제 아버지이자 G사의 보스인 카즈야에게 호의적이진 않았지만 단 하나 공감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힘이 전부라는 것. 어릴 적 어머니인 카자마 준이 자신을 지키려다 적대 세력에게 암살 당하는 끔찍한 일을 겪고 진은 자신의 적을 구축할 힘을 강하게 추구했다. 그리고 그것이 진이 G사의 하나 밖에 없는 후계자가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물론 진이라고 카즈야의 약육강식 사상에 무조건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힘없이 그저 말로만 떠드는 평화는 곧 잔인한 힘에 짓밟힌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진은 아주 사소한 반항으로 미시마의 성 대신 죽은 어머니인 카자마의 성을 사용했다. 그걸 안 카즈야는 화를 내는 대신 그저 웃었다. 자기 자신도 깨닫지 못한 것 같지만 죽은 어미의 성을 사용한다는 것이 자기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분노를 보여주고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내 어머니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 그리고... 복수하겠다. 그 마음 속에 활활 화산처럼 타오르고 있는 분노와 증오는 분명 꺼지지 않겠지.
흥, 귀찮은 녀석이 왔군. 오늘은 G사의 로봇개발부서의 신작품인 잭8의 발표회가 있는 날이었다. 물론 그 깊숙한 내부를 뒤져보면 결국엔 전장을 뒤집어 놓을 살인병기를 선보이는 날이었지만. 카즈야의 중얼거림에 이런 행사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그 옆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이 고개를 돌려 바라본 그곳엔 멋드러지게 수트를 챙겨입고 누군가와 대화 중인 은발의 남자가 있었다. 카즈야도, 진도 잘 알고있는 그는 카즈야의 의붓 동생이자 진의 의붓 삼촌인 리 차오랑이었다. 과거 12살, 당시 미시마 재벌의 대표였던 헤이하치가 카즈야를 자극 시키기 위해 입양한 입양아로 카즈야와는 무구한 라이벌의 위치에 있는 남자였다. 제왕학을 배우고 수도 없이 그와 대립했으나 애시당초 이미 정해진 승자는 카즈야였고 리는 자신이 이용당했단 사실에 분노, 그대로 미시마 가를 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휴머노이드 제조업체인 바이올렛 시스템즈를 창설해 G사와 대립했다. 그리고 더불어 겉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물 밑으로는...
" ...그 옆에 있는 건... "
" 라스 알렉산데르손. 저 귀찮은 녀석이 손수 지목한 후계자다 "
리 옆의 처음보는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진이 이내 카즈야와 떨어져 조용히 어디론가로 향했다. 어차피 이제부터는 진, 자신보다는 카즈야와 리의 무대다. 무엇보다 숨 막히는... 정치 싸움이나 신경전 같은 것에 말려들고 싶지 않았다. 숨 막혀... 회장에서 점점 멀어지던 진의 손이 제 목을 조를 듯 매어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런 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스도 리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빠르게 그 뒤를 쫓아 사라지자 정말 남은 건 원수지간이라 해도 무방한 카즈야와 리 뿐이었다. 성큼성큼, 리가 빠르게 카즈야에게 향했다.
" 이야, 이게 얼마만인지 G사의 회장. 이번 신작품인 잭8 발표회 잘봤다고? 물론 우리 바이올렛 시스템즈의 휴머노이드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준이지만 "
" 흥, 초대 받지 않은 불청객 주제에 말이 많군 "
" 초대 받지 않다니 미안하지만 초대장은 있다고? 그쪽은 보안에도 신경 써야겠어. 너무 쉬운건 재미없으니까 "
" 사소한 일에 하나하나 의미 부여할 시간에 앞가림이나 제대로 하는게 좋을텐데 "
카즈야와 리의 견제 아닌 견제에 주위가 금새 조용해졌다. 여기에 초대 받고 온 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겉으로는 기술력으로 대립하는 것 처럼 보여도 깊숙히 숨겨져있는 속을 들여다보면 전쟁병기를 만들어내는 G사와 그런 G사에 대응하는 바이올렛 시스템즈의 또 다른 이름이자 전쟁 부대인 위그드라실의 세력 다툼이라는 것을. 그 전에도 이런 기싸움 끝에 한차례 전투가 벌어졌다는걸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극도의 긴장과 불안감이 스믈스믈 퍼지기 시작할 때 쯤. 누군가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 괜히 불안감 조성하지 말게, 리 "
" 백! 내가 보낸 초대장은 잘 받은 모양이군? "
" 딱히 올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보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자네들이 싸우던말던 관심은 없지만 자네들의 싸움에 피해를 보는건 일반 시민들이라는 걸 명심하게 "
" 흥 "
카즈야와 리가 신경전을 벌이고 그걸 누군가가 말리던 시간, 진은 회장을 벗어나 조용한 야외 정원으로 향했다. 이미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모두가 건물 안에 들어간 것인지 야외 정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개의 전등만이 주변을 밝게 비추는 와중에 진의 시선이 정원을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는 꽃으로 향했다. 어지간히 돈을 들였군. 아무리 속이 중요하다지만 사람들은 최우선적으로 겉을 먼저 살핀다. 취향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신경쓰는게 좋을거다. 머리 속에 카즈야의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진의 손이 부드럽게 전등에 밝은 색으로 빛나는 꽃잎을 매만졌다. 그리고.
" 누구냐 "
" G사의 카자마 진... 맞나? "
" ...그 쪽은 라스 알렉산데르손 이었나 "
" 그래, 직접 보는건 처음이지만 "
" 이런 곳까지 나온걸 보면 달갑지 않은 모양이군 "
" 정치 싸움 같은 건 취향이 아니니까 "
" 그런 점에서는 취향이 맞군. 그래서... 무슨 볼일이지 "
진의 뒤에서 나타난 건 카즈야가 말한 리의 후계자인 라스였다. 이런 자리를 답답하게 생각하는 진과 달리 그는 딱히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조금도 흩트러짐 없는 옷차림이었다. 라스가 잠시 진을 바라보다 입을 열어 질문을 던졌다.
"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G사와 위그드라실의 대립은 모두 미시마 카즈야와 리 차오랑의 대립이지, 우리 둘의 대립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 대에서는 대립이 아니라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 "
" ...그럴지도 모르지 "
" 그걸 위한 질문이다. 너는... 미시마 카즈야의 사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
" ...그의 양육강식 사상에 모두 동의하는건 아냐. 하지만 힘이 전부라고는 생각한다. 힘으로 적을 구축하는 것. 그게 나의 목표다 "
" 이미 그렇게 말하는 시점에 그의 사상에 동의하는거다. 그의 그 사상으로 얼마나 많은 사상자가 생겼는지 아나? "
"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우리의 적이지. 나는 적을 구축하기 위해 힘을 아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마치 그쪽은 사상자 하나 내지 않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 우리와 대립하면서 조금이라도 연관이 생기면 가차없이 처리하는 걸로 아는데 "
" G사를 등에 업고 권력을, 힘을 휘두르는 자들을 처리하는 것 뿐이다. 그래, 인정하지. 하지만 전쟁 병기를 만들고 전쟁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너희를 막기 위해선... 필요한 희생이고 각오도 되어있어 "
서로의 사상이 충돌한다. 진도 라스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들의 생각과 사상을 토해냈다. 그렇게 잠시 서로를 노려볼 때 쯤 어디선가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맑고 청량한 느낌보다는 어딘가 모르게 깔보는 듯한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 소리에 귀를 기울인 것도 잠시. 아, 진짜.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웃겨서 못참겠네. 약간 높은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이내. 자욱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두 사람 사이에 붉은 노을이 내려앉았다. 전등에 비춰진 그 붉은 노을은 누군가의 눈에는 아름다운 풍경처럼 보였고 누군가의 눈에는 마치 흩날리는 붉은 피처럼 보일 정도로 선명했다. 으챠,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캐주얼한 복장을 한 붉은 노을... 아니,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툭툭 제 옷의 먼지를 털어내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둘 사이를 휘젓기 시작했다.
" 갑자기 끼어들어서 미안하네. 조용히 듣고만 있으려고 했는데 너무 웃겨서 말이야. 푸핫, 다시 생각해도 웃기네 "
" 넌... 누구지? "
" 초대 받지 않은 침입자인가, 그렇다면... "
" 자자, 성격도 급하긴. 초대 받긴 했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니라 우리 사범님이지만 "
" 사범님? "
" 억지로 끌려오긴 했지만 들어갈 생각은 1도 없었고 그 동안 뭘 할까, 하다가 이 정원의 나무 위에 올라가서 멍 때리고 있었던 것 뿐이야. 이곳에 온 건 내가 먼저라고? 여하튼. 듣고있자니 말이야... 마치 자신들이 정의고 선이며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단 말이지? 기분 나쁘게 "
" ...그런 거창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
" 아니, 거창해. 애시당초 댁들이 싸우던말던 나와는 관계가 없는데 말이야... 댁들의 싸움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건 권력이나 힘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반 시민들이란 말이지. 그리고 내 역활은 그런 시민들을 지키는 거고 "
" 지킨다고? 그럼 너는... "
" G사와 위그드라실 사이에서 죽어나는 일반 시민들의 유일한 구원줄인 레지스탕스의 블러드 탈론, 화랑이다. 잘 부탁해, 차기 리더들? "
역시나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를 건낸 붉은 머리칼의 남자, 화랑이 작게 웃었다. G의 차기 리더 카자마 진, 위그드라실의 차기 리더 라스 알렉산데르손. 그리고 레지스탕스의 차기 리더 화랑. 셋의 첫 만남은 자신들의 신념과 사상이 부딪친 최악의 첫 만남이었다.
3. 진의 뒤를 쫓은 화랑의 흉터 가득한 몸을 보며 상처를 지우라 제안하는 라스와 생각해본다는 화랑, 그리고 라스의 권유가 달갑지 않은 진으로 진화랑+라스. (뭐 워낙 튼튼해서 인게임에서 상처 따위 없지만 그래도 진을 쫓다 상처 입은 화랑은 상상만 해도... 어휴...)
라스의 눈이 화랑을 훑었다. 워낙 짐승같은 예민함을 가지고 있는 화랑이라 자신의 시선을 곧바로 알아차릴 줄 알았지만 그는 지금 진과 대화를 나누느랴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모든 일이 끝나고 순수하게 진과 한바탕 대결을 끝낸 화랑이 덥다며 상의를 벗자 들어난 상반신에는 온갖 흉터들이 즐비했다. 찰과상, 베인 상처, 화상, 관통상, 목숨까지 위협 받았을 정도의 큰 상처까지. 데빌 인자를 가지고 있는 진이나 철인이라 불리던 그의 피를 물려받은 자신과 달리 화랑은 순수한 인간이었다. 흉터들은 그런 그가 얼마나 죽을 각오로 진의 뒤를 쫓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 뭐야,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거야. 라스 "
" 미안, 실례했군. 그저 흉터가 많다고 생각해서 보고 있던 것 뿐이야 "
진과의 대화 중 겨우 라스의 시선을 눈치챈건지 화랑의 시선이 라스에게 향했다. 불쾌함과 의아함이 섞인 그 말에 라스가 사과의 말과 함께 이유를 설명하자 곧 불쾌함을 누그러트린 화랑이 고개를 슬쩍 내려 제 몸의 흉터들을 보고는 이내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 그래, 누구씨 덕분에 엄청 고생했으니까 말이지. 뭐, 거의 대부분은 그 괴물 때문이긴 하지만... 중동에서 얼굴에 입은 상처는 진짜 의사를 엄청 닥달해서 겨우 흉터없이 치료했다고 "
" 어째서지? "
" 그거야 몸의 흉터는 옷으로 가리면 그만이지만 얼굴의 상처는 아무래도 가리기 힘드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아 "
무언가 더 말하려다 부자연스럽게 끊긴 말에 라스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도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화랑은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제 얼굴의 흉터를 보고 더 상처 받을 진을 생각해서 그랬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오글거리는 걸 싫어하고 솔직하지 못한 화랑으로서는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발언이었다. 더 이상 이어질 것 같지 않은 화랑의 말을 대신 이어 받은건 라스였다.
" ...그럼, 흉터를 지울 생각은 없나? "
" 뭐? "
" 과거랑 다르게 지금의 기술력이라면 흉터도 깨끗하게 지울 수 있으니까. 무엇보다 G사가 와해되면서 그들이 연구하던 생명공학기술도 손에 넣었으니... "
" 남의 몸으로 실험할 생각이야? "
" 흉터를 지우는 기술은 이미 대중화된지 오래야. 다만 지금의 기술력으로는 그런 관통상이나 커다란 흉터는 깔끔하게 지울 순 없으니까. 강요하는 건 아니야. 그저 제안일 뿐이지 "
그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화랑이 뭐, 생각해볼까. 라며 누가봐도 대충 대답을 하고는 벗어놓은 상의를 챙겨들고는 샤워실 좀 쓰겠다며 자리를 벗어나버렸다. 보아하니 한 귀로 듣고 흘렸군. 그렇게 생각한 라스를 향해 지금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진이 툭 말을 내뱉었다.
" 라스 "
" 뭐지? "
" 앞으론 화랑에게 그런 제안 하지마 "
그 말에 라스가 진을 바라보았다. 노골적으로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지만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불쾌함이 가득했다. 그의 몸에 남은 흉터는 모두 화랑이 진 자신을 원하고 그 뒤를 어떻게든 따라 붙었다는 표시였다. 그리고 그 흉터를 남긴 사람도 오직 진 하나 뿐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모두 데빌이 남긴 것이지만 화랑은 그런 데빌조차 자신의 힘이라고 인정해주었다. 그러니... 진 자신이 입힌 상처라고 해도 무방하겠지. 진은 자신이 화랑에게 남긴 흔적, 그것이 자국이든 상처든 흉터든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는 걸 원치 않았다. 만약 그걸 지워야한다면 지우는 사람은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 진을 궤뚫어 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노려보는 진에게서 살기라도 느낀 것인지 라스는 별 다른 반박없이 그저 알겠다, 대답만 내뱉었다. 눈에 잠시 데빌의 이체가 도는 듯 싶던 진은 라스의 대답에 마음이 풀린건지 이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런 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라스가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한편 샤워를 마치고 나온 화랑은 거울에 비친 제 상반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온갖 상처를 입고 아물면서 생긴 흉터들이 흉할 정도로 가득했다. 깨끗했는데... 하여간에 그 자식이랑 엮이기 시작하면서 엉망진창이 됐다니까. 그나저나 지운다라... 작게 중얼거린 화랑이 이내 피식 웃었다.
" 절대로 허락 안해줄텐데 "
그리고 동시에 열린 문에 몸을 돌린 화랑은 저를 덥쳐오는 인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주었다. 또 다시 돋아난 커다란 검은 날개에 감싸인 화랑이 그저 웃었다. 그래, 제 몸에 남은 건 단순한 흉터가 아닌 카자마 진의 집착과 소유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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