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과 열대야
청우문대, 청벨au, 달빛과 화살과 열대야
청우문대 21회 전력: 열대야 / 운동선수
오늘도 감사합니다!
박문대, 17세. 사격부의 떠오르는 신예로, 총을 잡고 불과 반년만에 첫 출전한 전국체전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혜성같은 존재였다.
“형 곧 선발전 아니에요?”
“하하.”
“그런데 왜 여기 계세요.”
“음, 시원해서.”
“더우시면 겨울처럼 안에서 창문만 열고 쏘시던가요.”
“하하!”
그리고 그 박문대의 곁에는 언제나 양궁부 국대가 있었다. 양궁부의 자랑, 양궁부 국대, 류청우. 19세. 이전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참가해 당당히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온 전적이 있어 그렇게 불리곤 했다. 정작 본인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던 걸 들켰다간 딱히 좋은 얼굴은 볼 수 없어 양궁부 후배들은 류청우 앞에서 무조건 입조심을 했는데, 유일하게 그 불문율을 깨도 괜찮은 사람이 박문대라고 한다면 그들은 조금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문대도 이번 체전 나가지?”
“예, 나갑니다. 제가 안 나가면 형도 안 나가신다고 엄포를 놓으셨다면서요.”
“응, 그랬어.”
“왜 그러셨어요? … 안 어울리게.”
“너도 그렇게 생각했어?”
“? 예.”
박문대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고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긍정을 표한다. 형은 전력으로 싸우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하고 투덜대는 듯 작고 불퉁한 목소리도 들린다. 류청우가 가끔 헛소리를 한다 싶으면 보이는 저 얼굴은 볼 때마다 류청우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서, 류청우는 오늘도 박문대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으며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 박문대도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결국엔 피식 웃고 마는 것이다.
“그럼 나도 연습하고 올게, 문대야. 너 먼저 끝나면 나 기다리지 말고 그냥 가.”
“예에.”
말은 저렇게 해놓고 결국 연습이 끝나면 또 양궁장을 기웃거릴 박문대를 류청우는 안다. 아마 그래서 연습때마다 집합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맞춰가는지도 모르겠다고, 류청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 짓궂은 건 안다. 하지만 호감이 가는 사람이 저를 기다려준다는 건 생각보다 짜릿하기도 해서, 그리고 그 사람과 함께 어둑한 거리를 걷는다는 건 그 이상으로 설레어서. 류청우는 오늘도 기꺼이 달음박질을 택했다.
“오늘도 마지막까지 있겠지.”
연습을 마치고 자리를 깨끗이 정리한 뒤, 연습장 문단속까지 감독님과 함께 철저히 마친 박문대는 부재중 연락 하나 없는 스마트폰을 잠깐 보고는 감독님께 꾸벅 인사하고는 타박타박 양궁장으로 향했다. 양궁부도 사격부와 비슷하게 연습을 마치기는 하지만, 류청우는 항상 아슬아슬하게 도착하는 버릇이 있어 그런지 가장 늦게까지 연습을 하곤 했다. 양궁장 근처로 가자, 박문대가 예상한대로 그곳에서는 여전히 슉, 탁, 소리가 났다. 박문대는 자연스럽게 연습장 문을 열고 들어가, 이제는 가벼운 안부를 나누는 사이가 된 양궁부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는 빈 벤치에 가방을 올려두었다.
“청우 형은 아직 연습 안 끝난 거죠?”
“그래, 이제 곧 전국체전이잖냐. 이번에는 꼭 자기가 금메달 따올 거라고 웃던걸.”
박문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류청우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과녁만을 곧게 보고 있었다. 반짝이는 별빛이 류청우의 푸른 눈에 비치는 것을 박문대는 멍하니 보았다. 류청우는 활시위에 화살을 메기고, 그대로 왼팔을 들어올리며 시위를 당긴다. 그 상태로 아직 열기를 머금은 밤바람의 세기를 가늠하다가, 직감을 믿고 시위를 놓는다. 마치 효시처럼 커다란 소리를 내며 화살이 날았다. 그리고 그 순간, 류청우가 고개를 돌렸다.
“문대야?”
“…….”
“문대야!”
감독이 망원경을 들어 점수를 확인했다. 10점! 경쾌한 목소리에도 박문대는 반응하지 않았다. 류청우는 황급히 활을 내려두고는 박문대에게 달려갔다. 박문대의 시선은 계속 류청우에게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연한 눈동자에 류청우만이 그려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류청우는 조금 놀란 얼굴로 박문대의 어깨를 살살 흔들었다.
“문대야, 괜찮아?”
박문대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입술 사이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서, 류청우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 모든 감각을 기울였다.
“형, 우리 꼭 같이 올림픽 나가요.”
잠깐 놀라긴 했지만, 그 순간, 류청우는 푸른 눈을 가득 휘며 웃었다.
“응, 그러자.”
“꼭이에요.”
“응, 그럴게.”
박문대는 그제야 멍하던 초점을 또렷이 맞추었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환히 웃었다. 때마침 툭 꺼진 조명 덕에 새하얀 달빛이 박문대를 비추어, 류청우는 눈앞의 박문대가 저 빛과 함께 사라지지는 않을지 남몰래 걱정했다.
“자, 문대 왔으니까 이만 가자. 류청우! 장비 챙겨라. 문대는 오늘도 고생 많았다.”
“아니에요, 감독님께서 고생하셨죠. 오늘도 감사합니다.”
“그래. 자, 이제 문 잠근다.”
“옙!”
“조심해서 들어가고.”
“예, 감독님도 쉬십쇼!”
집으로 걸어가는 길, 류청우는 괜히 박문대를 흘끔거렸다. 그러자 시선을 금방 눈치채고는 연한 달빛에 까맣게 빛나는 눈이 류청우를 마주한다. 해가 지고 이미 꽤 오랜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바람은 습하고 더웠다. 류청우는 괜히 바람 탓을 하며 달아오르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박문대도 더웠는지 흰 목덜미가 조금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보였다. 아닌가? 모르겠다. 류청우는 웃었다. 박문대도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이 참 예뻤다.
“아까 한 말 말인데요.”
올림픽에 꼭 같이 가자는 말.
“저는 자신 있거든요. 그러니까 형도 꼭 와요.”
류청우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메달 따면, 그땐 할 말이 있거든요.”
류청우의 눈이 웃던 그대로 파랗게 굳었다. 그 모습이 제법 웃겼는지 박문대는 또 피식 웃었다.
“지금 하고 싶긴 한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작게 속삭인 박문대는 류청우와 눈을 맞추었다. 시선에서 느껴지는 짙은 무언가에, 류청우는 문득 박문대가 하고 싶다는 그 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게 저와 같은 결임을 눈치챈 류청우도 박문대와 눈을 맞추었다. 느릿하게 깜박이는 눈 사이로 열기에 이지러지는 달빛이 들어찼다.
바야흐로, 열대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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