뱁새 울음소리 _ 3

무츠노카미 요시유키X남심신자


다섯째 날

1

설마 무슨 사이비 종교 같은 건 아니겠지. 생각하고 보니 굉장히 설득력 있다. 무츠노카미는 거뭇해진 눈밑을 문지르며 밝아온 창밖을 외면했다. 지난 밤 너무 놀란 탓인지 그 뒤로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그대로 날을 꼴딱 새버린 탓이다. 어후 씨, 이러다가 진짜 숨넘어가겠네.

여기 삼 층 아닌가. 방 안에 몰래 들어왔다면 오싹하지만 창 밖을 통해 들어온 거라면 그것도 무섭다. 다른 발자국이나 먼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없어진 것도 달라진 것도 없긴 했으나……. 누군가가 아무도 모르게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다, 이건. 커튼을 끌어당겨 창을 여닫는 양쪽 문고리를 칭칭 감아 묶어놓았음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겨울이 가까워지는 날씨에 누가 일부러 창문을 열어놓고 자겠냐고. 무츠노카미는 부르르 떨리는 몸을 가벼운 남방으로 감싼 채 방을 나왔다. 물 끓여서 커피라도 마셔야지.

몰래 물만 데워 올 생각으로 들어간 식당에는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귀공자처럼 앉아있었다. 조간 신문처럼 보이는 것을 한 손에 들고서 우아하게 홍차를 마시는 모습이란……. 츠루마루는 그와 시선이 맞자 방긋 웃으며 신문 쥔 손을 흔들다가, 이내 무츠노카미의 안색을 보고선 어깨를 한번 들썩였다.

“잠을 잘 못 잤나?”

“그렇게 불쑥 말 걸지 말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네 꼴을 보게, 안 그러게 생겼는지. 뭔 죽다 살아난 시체 같은 꼴을 해 가지곤…….”

뭐라 말을 못 하겠군.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있는 힘껏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보인 무츠노카미는 슬금슬금 그를 피해 부엌으로 들어가려다 다시 발을 멈췄다. 뭔데.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별…, 얼굴 보기 싫다 소리 온몸으로 처하고 있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놀라서 글체. ……둘 다 어째 오늘은 일찍 일어났구먼…….”

“관심 꺼.”

냉장고 구석까지 몸을 집어넣어 꽁꽁 언 샌드위치를 꺼낸 아마노가와가 무츠노카미의 안색에 혀를 찼다. 뭔 피죽도 못 처먹은 얼굴을 해 가지고. 내 이런 말 하고 싶진 않은디 니헌티 듣고 싶진 않구먼. 뭐 이 새키야.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종이 봉투 겉에 생긴 서리를 대충 턴 그는 침침한 안색과 샌드위치를 한 번 번갈아 보고 그에게 건넸다.

“내가 먹어도 되는가?”

“빨리 처먹고 꺼지라는 뜻이다.”

“오…….”

흐린 눈으로 전자레인지를 찾아 샌드위치를 집어넣었다. 그는 무츠노카미가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사이 다시 냉동고에 몸을 집어넣어 샌드위치를 꺼냈다. 그 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무츠노카미가 슬쩍 그 곁으로 허리를 숙였다. 돌덩이같은 샌드위치를 꺼내 든 아마노가와가 인상을 찡그리며 그를 흘기자 무츠노카미가 슬그머니 속삭였다.

“…거, 좀 물어볼 것이 있는디,”

“또 소설 얘기 하면 죽여버린다.”

“아이, 그런 거 아녀. 그런 거 말고…, ……여 혹시 무슨… 귀신이 있거나 하진 않지…?”

“제정신이 아닌데.”

“아니, 그게…….”

무츠노카미는 밤을 새는 내내 이걸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고민했다. 가능한 의심 사지 않으며 안전하게 상대를 떠볼 수 있는 방법. 그렇게 내린 결론이 고작해야 귀신 이야기라면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경험상 고전적인 방법이 그렇게 잘 먹히더라. 그리고 제 평소 모습을 어느정도 본 사람에게라면 더 설득력 있을 테니. 무츠노카미는 밖에서 늘상 지었던 ‘장난스럽지만 진지한 얼굴’ 로 그에게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듣기라도 한 듯 인상을 찌푸렸던 도련님은 그를 벌레 보듯 쳐다봤다가, 잠깐 생각에 잠긴 듯 손에 쥔 샌드위치를 매만졌다. 꽝꽝 하얗게 얼어붙은 샌드위치를 그리 쥐고 있으면 손이 아플 법도 한데 아마노가와는 덩어리를 꽉 쥔 채 그에게 물었다.

“너 2층에 있는 정원 방 쓰냐?”

“…정원 방이 어디여.”

“……손님방. 너 거기 쓰냐고.”

“글체. 손님이니께.”

“왜?'”

“……손님이니까?”

아니 집 사는 사람들이 거기 있으라는데 내가 뭐 결정권이 있나. 제딴엔 성의있는 대꾸였으나 아마노가와의 얼굴은 삽시간에 빛을 잃다 못해 하얗게 가라앉았다. 그는 무츠노카미의 정성어린 대답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퍽 치고서 성큼성큼 부엌을 나섰다. 들고 있던 샌드위치는 간이테이블 위로 땡그랑 소리와 함께 던져졌다. 거 성질머리 진짜. 이번엔 또 뭐에 열받은 거지. 진짜 종잡을 수가 없구만. 무츠노카미는 경쾌한 알림음과 함께 전자레인지 문을 열고 막 따끈하게 구워진 샌드위치를 손에 쥐었다.

잊어버린 이야기가 있다는 걸 깨달은 때는 그쯤이었다. 식당에 츠루마루가 있긴 하다만, 아직 가지 않았다면 잠깐 시간을 끌어서라도 물어볼까 하려던 차에 무언가 깨지는 듯 시끄러운 파열음이 공기를 울렸다. 이번엔 또 뭐야. 저도 모르게 어깨를 들썩인 무츠노카미는 슬그머니 문 밖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저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사람이라면 정면에서 맞는 상황을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는지라.

걱정이 무색하게 식당에 앉아 있는 건 츠루마루 한 사람 뿐이었다.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흰 머리카락이 참 눈부셨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수프를 뒤적였다. 픽 웃는 얼굴이 여전히 상기되어 있다.

“거기서 그러지 말고 그냥 나오게.”

“그럴까요?”

“응, 다 보여.”

“예.”

어기적 어기적 샌드위치를 뜯으며 식탁까지 걸어나온 무츠노카미가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거 아까 큰 소리가 나던데. 오. 저쪽 창가로는 가지 말게. 찻잔이 아주 산산조각이 나 있거든. 무츠노카미는 고개를 내어 대리석 위의 반짝이는 조각들을 흘끗 보았다. 병원까지 차로 한참 걸리니 다치지 말고. …..예. 식사하시죠. 그 말에 츠루마루가 시끄럽게 웃어젖혔다.

“자네도 참 어지간히 불감증이구만.”

무츠노카미가 하하 웃었다. 내 가방 안을 보면 그런 말 못할 것인디. 이 양반은 정말 종잡을 수가 없다. 물론 여기 사는 사람이 대부분 그렇다만.

“그보단 두 분이 싸우는 걸 하루 한 번씩 봐서 적응이 된 게 아닐까요?”

“일리 있는 말이긴 한데, 잘못 건드렸다간 훅 가니 마음 놓지 말게. 혹시 아나? 피했는데 내 뒤에 자네가 있어서 그대로 실려갈지.”

꼭 그러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할 수 있는 게 웃는 것 밖에 없어 무츠노카미는 또 하하 웃고 말았다. 츠루마루는 각 잡힌 태도로 홍차를 몇 모금 마시는 듯 하다가 이내 다시 내려놓았다. 마시는 것 같았는데 정작 잔 안의 높이는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시선을 맞대지 않는 츠루마루를 곁눈질로 관찰하던 무츠노카미는 어느샌가 손에 들려 있던 샌드위치가 가벼워졌다는 걸 깨달았다. 무츠노카미가 만나온 모든 사람 중 수다스럽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거다. 턱을 괸 채 손에 쥔 잔만 빙글빙글 흔드는 모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다.

축축해진 빈 종이 포장을 우그러뜨리자 그제서야 무츠노카미의 손을 내려다본 츠루마루는 드물게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알려주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저에게 말입니까.”

젖은 포장지를 손바닥만하게 엉망으로 구겨 접었다. 그는 무츠노카미의 손에 든 것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읽었다니 알겠지. 자네가 생각하기에 그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던가?”

“주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상징적인 것 말이네. 어떤 의미라도.”

애매모호한 말이다. 중요한 것, 부터 이미 문제는 주관적인 답변을 원하고 있다. 가장 상징적인 것이라 함은 글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일텐데. 그런 걸 저에게 묻는다는 말인가? 무츠노카미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으나 그는 무츠노카미에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탓인지 지난 밤에도 보았던 흰 셔츠가 더 넓어 보였다.

“만약 자네가 내가 원하는 대답을 가져온다면… 그렇지. 누구나 궁금해할 것을 가르쳐줄까.”

“…무엇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시는 겁니까? 저와의 선문답이 꽤 재미있으신 모양입니다.”

“부정할 수가 없군. 재미있는 건 사실이야. 그게 자네같은 사람이라서인지 자네여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일세.”

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무츠노카미는 앉은 채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아래로 내리뜬 시선이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무츠노카미가 가볍게 목례로 인사하자, 츠루마루가 받듯 따라 눈짓하며 식당을 나갔다. 바닥에 지익 지익 끌리는 슬리퍼 소리가 한참 복도를 울렸다. 흥얼거리는 콧노래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너무나 희미해, 꼭 잘못 들었나 싶은 정도의 속삭임.

무츠노카미는 그가 놓아두고 간 새하얀 찻잔과 함께 그 자리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다 식은 차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올라오지 않았다.

2

난카이 선생에게 보낸 메일에는 아무런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읽었는데도 답장이 없다는 건 다시 물어도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노트북을 닫으니 무릎 너머로 낯익은 서재가 보였다.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도 깊은 한숨이 나오는 걸 보면 속이 복잡하긴 한 모양이다. 노트북을 가방에 마구잡이로 집어넣은 무츠노카미는 한동안 시선을 주지 않았던 책을 집어들었다.

도련님이 역정을 낸 것 치고 그의 책은 서재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비록 구석에 꽂혀 있긴 했지만 말이다. 타국에도 이미 출간되었는지 영어로 번역된 것도 있었다. 고민 없이 초판을 집어 든 무츠노카미는 책장 사이 작은 소파에 편히 기대어 앉았다. 아직 창 밖이 밝았기에 불을 켤 필요까지 없어 그냥 들어왔지만, 막상 책장들 사이에 앉고 보니 생각보다 어두웠다. 그는 협탁 뒤를 더듬어 도련님이 사용하던 무드등을 밝혔다. 딸각 소리를 내며 등이 협소한 공간을 밝힌다.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아늑하군.

손끝에 매끄러운 감각이 스친다. 시판 출간되는 평범한 단행본과 같은 재질이다. 그러나 보통이라면 저자 소개 따위가 들어있어야 할 책날개는 깨끗하다. 표지와 같이 검정색으로 텅 빈 어둠. 표지에는 흰 선으로 원이라도 그려져있지, 그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오로지 검정 뿐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저자 소개는 이 책의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페이지의 마지막 장에 작은 글씨로 ‘저자가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기에 공개하지 않기로 협의하였습니다.’ 라는 문구가 쓰여있을 뿐. 무츠노카미는 더 볼 것 없이 내부까지 새까맣게 칠해진 앞을 넘어 이야기를 펼쳤다.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저자 소개 따위가 아니다.

첫 문단을 다시 찬찬히 읽어내린다. 읽은 지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무츠노카미는 이 시작을 기억하고 있다. 기억하고자 하여 남은 것이 아니라 펼치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검은 잉크로 물든 그들의 자서自署가 글로써 쓰여 있다.

기차에서 내려 한때 사교의 중심지였을 넓고 푸른 들판을 바라본다. 샛노랗게 물든 밀밭과 푸르게 남은 잔디밭, 먼 옛날 다른 이들이 살았으리라 여겨지는 오래된 양식의 낮은 건물들, 그리고 가장 멀리 보이는 높고 거대한 붉은 벽돌의 저택. 짐칸에서 꺼낸 낡은 캐리어가 울퉁불퉁한 돌바닥에 덜그럭댄다. 이제 그만 놓아달라 애원하듯 삐걱대며 멈췄다 구르기를 반복하는 바퀴를 두고 나는 가방을 고쳐 멨다. 이곳이 나의 도착지가 틀림없다. 오래되고 낡았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가의 저택. 한때 이 근방 모든 것을 호령했던 자들의 땅. 그럼에도 웃음이 만발했던 낙원.

주인공은 한 통의 편지를 받고 저택에 도착한다. 익명의 초대장에 쓰인 것은 주소 한 줄과 부디 와주길 바란다는 짧은 호소문이 전부다. 그러나 편지를 봉한 문장은 분명히 그 가문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문장에 틀림없었다. 누가 보냈는지, 어떤 의도로 그를 끌어들인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은 그렇게 저택의 모두와 불편한 생활을 시작한다. 주인공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지요? 집사가 대답한다. 당신께서 편하신 만큼 머무셔도 됩니다. 단, 주인님께는 다가가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이 다시 묻는다. 어째서지요? 그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긴 하나 나쁜 이는 아닌 것 같아 보여요. 집사는 대답하지 않는다. 고개만 숙인 채 조용히 방을 나간다. 주인공은 방 안에 혼자 남겨지지만, 이곳에 머무르기로 결심한다.

줄거리 자체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익명의 초대장, 의문스러운 저택의 주인, 상당한 노령들뿐인 사용인들……. 주인공은 그 저택에서 머물며 저택의 비밀을 파헤친다. 분위기를 암시하듯 중간중간 나오는 과거의 살인 사건 현장들과 맞물리는 현재. 호소에 가까운 초대장의 정체는 이 집안에 묻혀 있던 끔찍한 연쇄살인마다. 주인공은 그 진실을 파헤쳐 집안의 사람들을 과거에서 끌어내고, 평생을 연쇄살인마 아버지의 그림자에 갇혀 지낸 주인 역시 돌려놓는다. 그 역시 지옥도의 살인마가 될 지, 다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할지에 대한 암시를 주며 끝나지만…….

진부하다면 진부할 전개. 그럼에도 이 책이 어떤 연유로 그렇게까지 입소문을 탔느냐고 한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정신나간 수준의 살해 은폐 트릭과 심리 묘사를 비롯한 흡입력이지. 마치 내가 정말로 사람을 죽여 매장한 것 같은 기분. 지금도 꿈 속에 나와 발목을 잡고 늘어질 것 같은 시체, 죄악감, 그보다 진한 효용감. 뒷목이 서늘해지며 동시에 홧홧해진다. 불쾌한 흥미와 관심. 손끝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잉크가 아니라 진득한 피인 것이다.

무츠노카미의 손가락이 무감히 장을 넘긴다. 몇 번이고 읽었던 이야기이나 매번 읽을 때마다 돌아오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무력감이다. ‘인간의 악의’라는 것은 어디에나 있고 절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속이 거북하다.

분명 해가 쨍할 때 읽기 시작했을텐데 정신을 차리니 창 밖은 보랏빛이다. 그의 낯에 불쾌감이 감돈다. 축축해진 듯한 옷자락이 몸을 소파 아래로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무츠노카미는 더 읽는 것을 그만두고 서재를 나섰다. 바닥에서 끼익대는 소리가 울린다. 애초에 그가 일개 기자인 무츠노카미에게 어떤 대단한 것을 바란건지도 모르겠다. 불쾌하다.

적어도 지금의 무츠노카미는 그저 자고만 싶었다.

3

창을 커튼으로 두 번 묶어 잠근 채 침대에 누웠다. 천장의 핏빛 장미 무늬가 지나치게 현란해 무츠노카미는 눈을 감았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차라리 안대라도 가져올 걸 그랬다. 아예 자지 못하는 것보다야 그 편이 낫지. 눈을 얕게 떠 협탁으로 막아 둔 방문을 흘긴 무츠노카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쯤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며 어디에 있을까. 아마 그의 방에 있겠지. 밤은 춥다. 그렇게 얇게 입고 정원을 돌아다니다간 감기에 걸리는 것도 한순간일 것이다. 츠루마루 쿠니나가라는 사람은 그런 것쯤 신경쓰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럴 정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무츠노카미가 이불 속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시트를 움켜잡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눈을 뜨면 창 밖 테라스에서 그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스민다. 천천히 눈을 떠 새까만 창밖을 향해 눈을 돌리면,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곳에 새하얀 것은 아무것도 없다. 끝없는 어둠만이 존재할 뿐이다.

뒤척이자 시트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그와 마주 돈다. 정말로 그가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가 의심될 정도의 필력. 메소드 연기도 그 정도라면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제대로 상담을 받아 일상생활이 가능해질 정도로 치료를 받았거나, 타고나길 그런 사람이라 그런 생각을 평생 숨기고 살 수 있거나, 둘 중 하나일 테니까.

그렇다면 ‘작가’는 어느 쪽인가? …모르겠다. 무츠노카미는 기자이지 심리상담가나 범죄학자가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알고 싶지 않다. 영원히 모르고 싶다. 그런 것이 희망일 정도로 그렇게 살기는 너무 늦었지만 말이다.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래서 잠은 일찍 자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쓸데없는 잡생각과 허무과 미래에 대한 온갖 불안에 공포를 버무린 감정이 여과없이 들이밀어진다.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고. 분명 억지로 잠을 재우는 건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 쪽이었는데, 지금은 재워줄 사람이 필요한 어린이가 된 기분이다. 무츠노카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이불 아래에 있던 따듯한 공기가 머리를 끝까지 데운다.

푹신한 어둠에 잠기듯 서서히 감각이 옅어지던 찰나, 그 순간이다.

쿵.

천장이 울릴 정도의 충격에 무츠노카미가 눈을 번쩍 떴다. 잘못 들었다기에는 덥석 일어날 정도의 진동이다. 무츠노카미는 허겁지겁 실내화를 찾아 신고 복도에 들었다. 위부터 울리는 소리가 들렸으니 출처는 위층, 아마도 그의 방 위다. 이 정도 소리면 물건 한두 개가 떨어지는 소리도 아니고, 그보다는…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에 가깝다. 최소한 육십 킬로그램은 되어야 나는 소리.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무츠노카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그저 위층으로 향했다. 그곳에 그가 계속해서 찾아오던 연쇄살인마가 있다면 이 상황에서 죽는 것은 그임을 앎에도 서두르는 발을 멈출 수가 없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한 번 헷갈리지 않고 그 방의 윗층에 선 무츠노카미가 방문을 벌컥 연다. 한껏 좁아졌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온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이제 꽤 익숙한 회갈빛 머리카락이다.

“도련님!”

다른 것보다 꽤 높은 침대에서 떨어졌다 해도 크지 않을 반동이었을 텐데, 바닥에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 잘못 다쳐 일어나지 못할 확률이 높다. 서둘러 그의 곁으로 뛰어 무릎을 꿇고 앉은 무츠노카미가 흠칫했다. 딱딱하게 굳은 몸에서 희미한 떨림이 보였다. 이건 통증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무언가…….

“…도련님?”

그의 어깨를 살짝 흔들자 그가 움츠러든다. 흔들리는 손이 형편없이 바닥을 더듬는다. 무츠노카미는 그제서야 그가 선 주변을 돌아본다. 카페트 위로 알알이 흩어져있는 것은… 하얀색의 조그만 약들이다. 그는 지체없이 바닥에서 약을 주워 침대 옆 협탁의 컵에 든 물과 함께 그에게 내밀려다 그만두고 그를 일으키려 했다. 발작 증상이라기엔 강도가 심하지 않고 약을 찾는 것을 보면 심각한 정도도 아니다. 그렇다면 일으켜세워 약을 먹이는 것이 먼저다.

그의 몸 아래에 팔을 끼워넣어 일으키려하던 찰나 그가 속삭인다.

“……이거 치워.”

“…뭐라고?”

“자네더러 나오라는 소리일세. 이리 오게나.”

재촉하기도 전에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얼마나 놀랐는지 무츠노카미의 어깨가 들썩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본 곳에는 문틀에 기대 선 츠루마루가 있었다. 늘 짓던 미소를 짓고, 평소처럼 얇은 잠옷차림으로, 팔짱을 낀 채.

뭐라 항변하려던 무츠노카미가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사람이 쓰러졌는데 무슨 소리냐는 책망 섞인 눈빛에 그가 눈매까지 접어가며 친절히 웃었다.

“괜찮은 겁니까?”

“설마하니 죽었겠나? 그 정돈 아니라네. 가끔 그런 경우가 있어. 그냥 놔두면 괜찮아지니까 얼른 나오게, 자네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무츠노카미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몸을 제대로 일으켜 앉은 도련님이 그를 쏘아보았다. 무츠노카미와 츠루마루 두 사람을 다 흘기는 것이 어지간히 심기가 엉망이 된 게 틀림없다. 밤이라 그런지 한층 더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로 다 풀린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흘러내렸다. 온통 식은땀 투성이인 것이 척 보기에도 상태가 별로인데, 정말 그냥 내버려 둬도 괜찮다는 건가. 불신 섞인 눈으로 금색 눈동자를 올려다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은 미소뿐이다.

“둘 다 꺼져.”

“자네만 나가면 되겠군. 뒷수습은 내가 하지. 어린 것은 얼른 가서 잠이나 자게.”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방에서 쫓겨난 뒤였다. 방 안에서는 계속해서 조잡한 소리가 들려왔지만 안에서 문을 잠근 건지 절걱이는 소리만 날 뿐 열리지 않았다. 그래도 두 사람이 이곳에 오래 산 게 맞다면 걱정할 것은 없는 게 맞나? 적어도 저보다는 가까운 사이일 게 분명하다. 무츠노카미는 희미하게 심사가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도금이라도 된 듯 광을 내는 서양식 문고리를 잡은 제 손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걸음을 돌려 배정받았던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가 끽끽대며 우는 소리는 곧 멎었지만, 어딘가에서 시계 초침이 흘러가는 듯 째깍이는 소리가 밤새 그를 괴롭혔다.


여섯째 날

1

근처에 호수가 있던가. 이른 새벽의 정원은 곧 해가 뜰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흐릿한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어제 아침은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루만에 날씨가 이렇게 바뀔 수도 있는지 의문이 들던 것도 잠시다. 한두 시간쯤 지나니 곧 앞은 볼 수 있을 정도로 개었다. 비가 오려나. 우중충한 날씨 탓에 안개가 갰음에도 갠 것 같지가 않았다. 마치 내 기분 같군. 흰 머그컵에 담긴 까만 커피에서 희게 김이 올랐다.

잠을 못 자긴 했으나 아주 못 잔 정도는 아니다. 밤새 악몽을 꾼 것처럼 온 몸이 쑤시기야 했다마는 어젯밤에 비하면 잘 잔 셈이다. 문도 제대로 걸어잠그고 잤으니.

올라가 본 위층의 도련님은 노크에도 반응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찾아간 츠루마루의 방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을 걸고 노크를 했음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무츠노카미는 결국 제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설마하니 아주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났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해도 찜찜한 기분은 오갈 데가 없었다. 이 집에 온 것도 엿새째다. 고작 육 일 사이 별의별 일을 다 겪었더니 어지간한 일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어제의 일은 달랐다. 사람이 쓰러지는 건 좀 불안하고 불편한 걸로 끝나는 일이 아니니까.

뜨거운 물에 막 탄 커피는 창문을 열어두었음에도 삘리 식질 않았다. 테라스에 선 채 텅 빈 정원을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길게 뺐다. 저 안쪽 정원에서 누군가가 느릿느릿 걸어나오고 있었다. 살짝 인상을 찌푸려가며 자세히 보려 애쓰던 무츠노카미는 이내 탁자에 컵을 내려두고 방을 뛰쳐나갔다. 어젯밤의 도련님이었다.

2

“…그래서 그렇게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거로군.”

“보, 보통 사람이면, 걱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아, 그래.”

헉헉대고 숨을 몰아쉬는 무츠노카미를 건조하게 내려다보던 도련님은 짧게 혀를 차고선 다시 등을 돌렸다. 창백한 손에 들린 쇠 빛 물뿌리개가 흐린 정원 풍경을 비췄다. 꽤 무거울 텐데도 한 손으로 느긋하게 뿌리는 모습은 어젯밤과는 천지차이다. 셔츠 목덜미를 몇 번 펄럭여 더위를 빼낸 그가 곁눈질로 도련님을 훑었다.

지난밤 끙끙거리며 바닥을 기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풍경이다. 하지만 단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기엔 증상이 상당히 심해 보였는데. 우중충한 하늘 아래로 물줄기가 툭툭 떨어졌다. 정원을 한 바퀴 빙글빙글 돌며 물을 뿌리는 아마노가와는 마치 그런 적도 없다는 듯 여지껏 그가 봐온 얼굴과 똑같은 낯을 하고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점부터 마치 이곳에 있지 않는다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까지.

이건 축객령이려나? 벤치에 걸터앉아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그를 좇고 있자니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잠시뿐이었다만 그의 시선에 저가 들었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반증으로 지금 도련님이 제 옆에 앉아 있으니까.

“…몸은 좀 괜찮은가?”

“왜 안 물어보나 했다. 신경 꺼.”

“…많이 아픈 게 아니라면…….”

“가끔 그래.”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구분이 안 되어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저쪽에서 돌아오는 대답도 끊겼다.

좀 더 물을까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서 그렇지, 그와 만난 것 역시 고작 엿새 째다. 게다가 갑자기 집에 눌러붙은 기자 나부랭이에게 개인사를 공개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오지랖이라 욕하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 물론 그가 과거의 사건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반인이라는 가정 하에 말이다.

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수상쩍은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니 그 역시 용의선상에서 완전히 제외할 수만은 없는 일. 애초에 저는 그 진실을 알아보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니까. 캐묻고 싶은 것은 산더미고, 그의 행보들에 대해 제대로 된 설명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했겠다마는……. 그가 피해자인지, 방관자인지, 공범인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관련되지 않은 사람인지 알 수가 없으니.

작가와 저, 도련님뿐인 이 저택에 충분히 경계받고 있는 데다 지금은 미운털도 제대로 박힌 상태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짓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도 못 볼 것을 봐버렸다는 생각만은 떨어지지가 않았다. 차라리 못 봤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한껏 복잡한 상황에 괜히 일을 만들어버린 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고.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분명히 사람의 생명이기에.

차마 이제 와 못 본 걸로 치겠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 말만 고르고 있자니 정적이 끝없이 몰려왔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같은 벤치에 앉은 아마노가와는 대화하고픈 마음이 없는지 옆에 앉기만 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대화를 하려 한다기보다는 그가 꺼내는 말을 기다리는 태도에 가까웠다.

양손을 다리 사이로 모아 잡고 있던 무츠노카미는 그 쪽을 보는 대신 질문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 사이 나눌 수 있는 말은 적었으나, 그렇다고 할 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러면 그건 그렇다 치고. 오늘은 묻고싶은 게 좀 있구먼.”

“쓸데없는 거 물어보면 넌 죽는다.”

“…한 번은 봐 주지.”

“들어 보고.”

그가 다리를 꼬았다. 거 듣기 싫다는 말을 참 선명하게 하는구먼. 애꿎은 엄지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무츠노카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너무 화내지 말고… 내헌티 중요한 것이라.”

“…….”

아마노가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편해보이는 까딱임에서 무츠노카미는 이미 그가 짐작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작가 양반이… 말하길. 저가 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그러니까, 원하는 대답을 가져온다면 누구나 궁금해할 것을 하나 가르쳐준다고 혔는디.”

혹시라도 듣던 도중 벌떡 일어나 돌아갈까 봐 최대한 아껴가며 말을 붙였으나, 그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가 읽기엔… 손 가는 것이 제법 많아서 말여. 뭣보다 원하는 대답이라는 것이……. 독심술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거 물어보면 죽는다고 아까 말했는데.”

“…역시 그렇게 되는가?”

도련님이 대답 없이 안경을 고쳐 썼다. 호의적인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다. 그가 이 저택에 함께 살고 있는데다 저와는 그닥 좋지 않은 관계선에 있으니 어려울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질문을 꺼낸 것은, 지금의 저에게는 어떤 대답이라도 단서가 되기 때문에. 보라. 지금도 짜증은 내지만 자리를 뜨지는 않잖는가.

물론 그에게 물을 것은 많았다. 온실에서의 이야기도 소설에 관한 것도 이야기를 만들자면 끝없이 만들어낼 수 있다. 기자라는 건 그런 직업이다. 누군가는 사명감을 외치지만 누군가는 진실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다. 무츠노카미를 그 어드메에 끼워넣는다고 한다면 그는 분명 후자일 테지.

생각이 저물어갈 즈음 아마노가와가 처음으로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맞춘 것 뿐인데도 무언가에 찔린 듯 놀라니 안 그래도 어둡던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지만, 그는 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너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을?”

“네가 생각하는 그 책의 중심.”

무감한 시선이 그를 훑었다. 기대하는 목소리는 아니다. 작가와 달리 저에게 원하는 대답이 있는 것 같지도 않다. 무츠노카미는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도련님은 눈앞에서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따라 눈짓하다 조그맣게 숨을 내쉬었다. 무언가 망설이는 듯 바닥으로 시선을 두던 그가, 얼마 뒤 고저 없이 내뱉었다.

“그거 내가 쓴 거야.”

정적이 일었다.

눈 깜박이는 것도 잊고 허공을 응시하던 무츠노카미가 한발 늦게 그를 보았다. 팔짱 낀 채 구두 코만 내려다보던 도련님이 뭘 보냐고 쏘아붙였으나 무츠노카미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거 내가 쓴 거라고.

“…그러니까… 그 책을?”

“그래.”

상상도 못 했다. 엉겁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무츠노카미가 갈 길을 잃은 채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했다. 그렇다면 지금껏 그 소설에 대해 온갖 짜증을 부린 이유가,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그의 소설 작가로 쓰여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었나?

“그러니까 그 ‘텐노사마’가,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아니라, 당신이다?”

“…온전히 내 책은 아니야. 내가 쓴 초고를 그놈이 훔쳐서 마음대로 고쳐 내놓은 거니까.”

“…어째서?”

“…어느 것이 ‘어째서’인 거지?”

무츠노카미가 짧게 침묵했다. 가라앉은 주홍빛 눈동자가 살짝 형체를 잃고 허리춤에 올린 양 손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바닥을 끌듯 내는 목소리밖에 나오질 않았다.

“전부.”

“…….”

팔짱이 살짝 느슨해졌다. 무츠노카미는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몸은 이미 그쪽으로 한껏 기울어진 상태였다.

무츠노카미의 시선을 감내하던 도련님이 짜증 섞인 한숨을 뱉으며 미간을 있는대로 찌푸렸다.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그 소설을 내놓은 건에 원작자의 의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건가. 아니라면 그 사실을 저 같은 기자에게 털어놓게 되어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기대한 내용은 이런 것이 아니었지만, 이건 충분히 큰 일이다. 어쩌면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전부 뒤엎게 될 지도 모르는 일.

아무 말 없이 아마노가와가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 도련님은 검지로 옷자락을 쑤시며 대답을 피하다 한참 후에야 느지막히 대답을 주었다. 지금껏 들어온 목소리 중 가장 감정 섞인 목소리였다.

“초고는 내가 쓴 게 맞아. 집 밖을 나가지 않은 것도 한참 됐고. 그건 그 동안 할 게 없어서 썼던 거야.”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훔쳤다는 건?”

“…버린 거였어. 쓰레기통에.”

“원고지에 쓴 건가?”

아마노가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행본 한 권이라지만 사백오십 쪽이 족히 넘는 두꺼운 분량이다. 원고지에 쓴 초고라면 필시 수정해가며 더 늘어났을 터. 애정이 담기지 않는다면, 천재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시간을 들여 쓴 것을 버리기란 쉽지 않은 일일 텐데.

시선을 바닥으로 둔 그가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시간 때우는 용도로 쓴 거야. 별 의미는 없어. 너도 읽었다면 알 텐데? 교훈 같은 것도 없어. 포르노라고 해도 틀린 말이 없을 정도로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내용 뿐이지.”

“…‘작가님’이 고쳐 썼단 내용은 어느 쪽이여?”

“…대부분. 교묘하게 내용을 고쳐 썼더군. 제멋대로 복선 같은 것도 끼워 넣고.”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은 아니다. 자신의 작품을 망친 것 같아 불쾌한 얼굴도 아니다. 그는 그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 격앙된 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와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얼굴빛이 괴리감을 더 크게 만들 뿐.

그러나 본인에게 나오는 이야기라도 전부 믿을 수는 없다. 거짓말일 가능성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상황이 지금이다. 복잡하게 꼬이기 시작하는 뇌리를 뒤로 하고 무츠노카미가 거칠게 턱을 쓸었다.

“…살인의 과정은 전부 당신이?”

“…이것저것 찾아 읽었지. 과학 서적 같은 것도. …이 집에서 할 일이라곤 그런 것 따위가 다였어.”

그건 자료 좀 찾아 읽는다고 쓸 수 있는 점도의 내용이 아니다. 흔한 클리셰에 가까운 진부한 내용임에도 대중이 열광한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폐에 진득하게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죄악감이 느껴지는 것은 결코 시간을 조금 들인다고 써낼 수 있는 범주에 들지 못한다.

하지만 눈앞의 그는 단순히 심심풀이로 그런 내용을 썼다고 말한다. 그 소설은 쾌락이기보다 학대에 가까운 집필이었음이 분명함에도.

“…그 놈은 내가 생각하는 대부분을 알지.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놈이니 모를 리가 없어.”

“그걸 나에게… 말해주는 이유가 있나?”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영원히 『뱁새 울음소리』의 저자를 츠루마루 쿠니나가로 알았을 터다. 그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독자 또한 그랬겠지.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작가란 그렇다.

목소리에 담긴 의문을 읽었는지 아마노가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음산한 말투에서 날카로운 악의가 뚫고 나왔다.

“알아달라고 말한 거 아니야. 그딴 거 썼다고 알릴 생각도 하지 마. 그랬다간 허위 사실 유포로 고소할 거니까. 입 밖에 냈다간 지구 끝까지 찾아가서 사지를 도륙내 주지.”

…그러겠네. 아무래도 이건 큰 문제 같으니. 그리고…….”

본인도 그러길 바라지 않는 것 같고. 이어지는 말에 도련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으로 긍정을 대신한 도련님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꼿꼿하던 어깨가 살짝 가라앉았다.

“…아무튼, 그 놈은 나에 대해서라면 모르는 게 거의 없지만 딱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어.”

그러고선 다시 한참 입을 다물었던 그는 무츠노카미가 재촉하지 않자 무겁게 운을 뗐다.

“그게 내, …그놈의 잡글에서 결정적으로 차이나는 부분이고.”

무츠노카미가 맞잡았던 손을 놓으며 벤치 등받이에 기댔다.

“말해 줄 생각은 없는 모양이구먼.”

“내가 말하면 의미가 없지. 내가 너 같은 놈에게 그걸 말할 이유도 없고. …그 놈은 날 잘 알지만 난 그 놈을 잘 몰라. 솔직히 말하자면, …….”

이 가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뜨린 도련님이 씹듯이 내뱉었다.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개 같은 새끼……. 어디서 객사 안 하나. 씨발.”

“…….”

“…아무튼 제정신 아닌 새끼야.”

그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굳이 너한테 알려주고 싶지는 않다는 뜻인가. 여전히 풀리지 않는 팔짱과 꼬아 넘긴 다리를 흘끗 본 무츠노카미가 잠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왜 그랬는지는 물어 봤나?”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고. 이미 나간 거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고. 미친 새끼.”

“…그렇군.”

원했던 대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모서리 없는 백지퍼즐을 맞추는 것 같던 감각은 어느정도 윤곽이 잡힌 듯 했다. 원래도 사이는 좋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더 틀어졌다면 그의 날선 반응과 받아주는 ‘작가님’의 태도에 근거가 생긴다.

그렇다면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어째서 그 버린 글을 주워 책으로 낸 거지? 그것도 본인의 허락 없이. 그 성격에 도련님이 싫어할 것을 몰랐을 거라 생각되진 않는다. 아무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할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그만의 무언가가 분명 있다는 소리가 될 텐데…….

꽤 오래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 무츠노카미가 퍼뜩 정신을 차린 건 도련님이 다리를 풀고 구두굽으로 돌바닥을 두드렸을 때였다. 한참 그 모습을 바라보았던가. 도련님은 전보다는 가라앉은 투로 그에게 고갯짓했다.

“네 기사가 어떻게 되든 짤리든 말든 내 알 바는 아니지만, 그 놈이 생각하는 게 뭔지 알고 싶으면 다시 읽어. 의외로 단순한 놈이니까.”

“…그 책을?”

“서재에 있잖아. 초판.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무츠노카미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그제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한참 팔짱을 끼고 있느라 그대로 주름이 진 셔츠자락이 정원을 휩쓰는 찬 바람에 펄럭였다. 추위라도 탄 것인지 짧은 신음소리를 낸 도련님은 그새 차가워진 팔뚝을 두어 번 쓸고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결국 왜 사실을 말해준 것인지에 대해서는 진실을 듣지 못했다. 어쩌면 그가 한 말 역시 거짓일지도. 하지만 그리 여기기에 아마노가와의 반응은 대부분 진심이 섞인 것 같았다. 사람을 오래 보아 온 저이기에 알 수 있는 점들이 분명히 있었다. 근거라곤 그의 직감일 뿐이었지만.

곧 텅 비어버린 정원에는 무츠노카미만이 남았다. 그는 어깨를 펴고 앉은 채 고요한 정원을 눈에 담았다. 이렇게나 풀이 무성한데도 생기 하나 찾아볼 수가 없다.

…만약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아니라 아마노가와라면. 물론 그는 츠루마루 쿠니나가 만큼이나 수상쩍고 의문스러운 점이 많은 인물이긴 하나, 한순간이나마 그런 감각을 느꼈던 츠루마루와는 다르게 그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없었다. 사람을…죽일 수 있을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기묘한 신뢰가 있었다. 고작 육 일 만난 사람에게 이런 말을 붙이는 것이 더 기묘하다마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는가?

3

제지할 사람이 없으니 서재에서 무엇을 해도 걸릴 것은 없었다. 초판본을 방으로 가져와 앉은 무츠노카미는 지난번 읽었던 그 페이지를 다시 폈다. 그럼에도 크게 와닿는 것은 없었다. 찝찝하고 끈적한 잔류감만이 남아 종이 속을 가득 채웠을 뿐.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면 보통은 주제의식일진대, 원작자는 그런 것이 없다 하고 고쳐 쓴 자만이 알고 있으니.

그에게 이 소설의 중심됨이라 함은 이 소설 자체였다.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 첫 문장부터 마지막의 묘한 문장, 어두운 책날개와 새까만 표지까지. 이곳에 있는 이가 다른 사람이라면 무츠노카미와는 다른 대답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하나 무츠노카미에게는 그 이상의 ‘중심’이라는 것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았다.

새까만 표지와 그 위를 장식하는 흰 선의 원. 뱁새 울음소리. 이 책에서 말하는 뱁새가 무엇인지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일부는 그것이 ‘주인공’ 이라고 추정하곤 했으나 그다지 설득력 있는 주장은 아니었다.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말하는 것은 그것일까? 이 책의 제목이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것처럼 보이던 것? 그럼에도 그가 어떤 것인지 작중에서 한 번도 비춰지지 않은 것?

원래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눈빛을 하게 되었는지, 느긋한 태도와 어울리지 않는 통찰력은 어디서 온 것인지, 왜 도련님을 끔찍하게 아끼는 것 같다가도 가볍게 대하는지. 그 모든 것이 연극이고 다른 일을 꾸미고 있다 한다면 모든 것이 한 치 틀림 없이 완벽해지겠으나, 왜인지 그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다.

그가 연극을 하는 듯 보인다는 점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 조금 더.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채우듯 협탁 위 녹음기에서 인터뷰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자 양반은 왜 기자가 되었나? 가장 적성에 잘 맞아서요? 진심인가?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닙니다. 서로 내뱉는 말에 거짓과 진실이 엉망으로 뒤섞여 있다.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는 사람들의 대화는 언제나 빙빙 돌기 마련이지. 방치하던 녹음기에 시선을 둔 것은 그 다음이다.

이 저택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곳은 어디십니까? 당연히 서재, 가끔은 도련님의 방이고. 혹시 옥상에 올라가 본 적이 있나? 열려 있는지 모르겠군. 벌레 쫓기 용으로 향이 피워져 있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만 풍경 하나는 아름다운 곳이니 나중에 한번 올라가보게.

혹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을까. 그 이야기를 할 때의 츠루마루 쿠니나가는 퍽 즐거워 보였다. 연기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고는 하지만 정확한 순간 진심에서 우러나는 미소를 짓는 것은 숙련된 연기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음산한 저택이란.

무츠노카미가 걸어 잠근 문 너머로 시선을 두었다.

도련님 방에 들어갈 수 있을 리는 없으니 서재를 조금 더 찾아봐야 하나. 하지만 크게 눈에 띄는 점은 없었는데. 그 많은 책들을 다 뒤집어 엎어 볼 수도 없고.

옥상으로 가는 길 역시 발견한 적도 없다. 있다고는 했으니 어딘가 들어가는 문이 따로 존재함은 확실하나 괜히 그런 것을 찾아다니는 모습을 보였다간 또 의심을 살 지 모른다. 아예 숨겨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감춘 것이 지나치게 많으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확신이 가지 않을 수밖에.

…이래서 경찰들이 꼭 팀을 이뤄서 행동하는 건가. 무츠노카미는 숨을 내쉬며 천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위가 아마노가와의 방이었지. 아무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그가 방문을 열어주는 상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도 도련님에게만 신경이 쏠려 방을 전부 확인하진 못했다. 얼추 구조는 비슷했던 것 같지만… 애초에 츠루마루 쿠니나가의 제안과 그의 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보여 달라’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사유를 대야 할 터인데 그 책의 저자가 살인 사건의 용의자라 털어놓을 수도 없고.

이미 ‘진짜 작가’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츠노카미의 가설은 일그러진 지 오래다.

그 책을 쓴 저자가 사 년 전 살인 사건의 용의자이다, 라는 것.

어느 쪽이 진짜 용의자인지 특정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차라리 용의자가 아니라면 낫지, 진짜 용의자를 가려내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이다니.

점점 더 복잡한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다. 진전이 있음은 확실하나 생각지도 못한 일들로 이루어지니 제자리걸음이라 느껴질 수 밖에.

무츠노카미는 책을 협탁 위에 올려둔 채 침대에 누웠다. 알려주는 것 하나 없이 답만을 원하는 질문. 머리 쓰는 놀이는 좋아한다만 이런 난제는 반갑지 않다. 지금 같은 호랑이 굴에서는 더욱.

4

다시 이상함을 느낀 것은 늦은 밤이다.

어제처럼 무언가 떨어지는 요란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신경에 거슬릴 정도의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갈 때 나는 소리 같기도 했고, 나무로 만들어진 듯 거친 소리 같기도 했으며, 쇠슬이 당겨질 때 균열이 일어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좁히자면, 그래. 거대한 기계장치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

막 침대에 누웠던 무츠노카미는 소리 없이 다시 일어났다. 저택 전체에 스며들어 오는 듯하던 소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사그라드는 듯 했으나 그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신발을 신고 방 중앙에 선 무츠노카미는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오 분 정도가 지났는데도 그 소리는 희미하게 방 안을 땅, 땅 울렸다.

어디서 나는 거지?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저택 안쪽에서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할 수 있을 정도로 한 방향에서 들려오는 게 아니었다.

‘도련님’이 또 뒷편 온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나? 온실에서 나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리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면 가능성은 한 가지다. 이 저택에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 확률이 훨씬 높다. 그 편이 더 신빙성 있고. 무츠노카미는 신발을 고쳐 신었다. 신발끈을 풀어 묶고 일어서려던 순간이다.

끽.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가 천장부터 울렸다.

위층이 틀림없다. 도련님의 방이 아니라, 이 저택의 위층 어딘가다.

무츠노카미는 잠가 두었던 문고리를 열어 어둠에 잠긴 복도로 나섰다. 중간중간 보조등이 켜져 있고, 저 멀리 닫힌 유리 창문에서 어스름하게 달빛이 들어왔지지만 복도는 신비하리만치 어두웠다. 하루 내내 해가 나지 않더니 밤 역시 그런 모양이다.

복도로 나오면 조금은 사라질 줄 알았던 소음은 오히려 조금 커진 것도 같았다. 사람이라곤 저 하나뿐인 어두운 복도에서 울리는 기괴한 소리가 음산함을 더했다. 잠시 굳은 듯 그 자리에 서 있던 무츠노카미는 방문을 제대로 닫아 잠근 채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둠에 적응된 눈은 어스름한 복도의 구조도 어느 정도 잡아챘다. 이 위층으로 가는 계단의 위치 정도도 알고 있다. 희미하게 걸음마다 마룻바닥이 내려않는 듯한 소리가 났지만 그를 신경쓰기엔 무츠노카미를 감싼 어둠이 너무 짙었다. 그는 지체 않고 기억을 따랐다. 마치 무언가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위층까지 올라오는 건 쉬웠다. 그러나 소리는 이보다 더 위층에서 들려왔기에, 무츠노카미는 가까운 곳에 존재할 다른 계단을 찾으러 몸을 돌렸다. 편의성이 중요하지 않았던 것인지 계단을 여러 곳에 나누어 세워 둔 저택의 구조 탓이다. 잠깐 헤맸으나 곧 찾아낸 계단에서는 뻥 뚫린 공기를 타고 마찰음이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숨을 삼킨 그가 단숨에 계단을 오르려던 찰나다. 바로 위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그를 쑤셨다.

“안 자고 뭐 하나?”

퍼뜩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면, 어느새 구름이 걷힌 건지, 계단 중앙부에 크게 난 창에서 소름끼치는 달빛이 저택을 비췄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색을 잃었다. 존재해야 하는 색이 모두 그 눈동자 속으로 빨려들어간 것만 같은 풍경. 무츠노카미의 목에서 막힌 소리가 흘렀다. 중심을 잃지 않으려 난간을 쥐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말일세. 진짜 귀신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기자 양반이라 그런가 영 겁이 없군? 그래서 기자인 건가?”

“…이상한… 소리가, 나서…….”

“뭐, 이런 낡은 저택에서 이상한 소리가 하루이틀 나겠나. 어지간히 예민한가 보구만. 방을 바꿔 줘야 하나.”

난간에 기대선 채 제 손톱을 긁던 츠루마루 쿠니나가가 감흥 없이 대꾸했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 하나 없는 마냥 표정 없이 그를 내려다보던 츠루마루는 그와 마주한 순간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래까지 희게 늘어지는 셔츠에 시꺼먼 그림자가 졌다. 무서울 정도로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사이에서 상냥하고도 다정한 말이 쏟아졌다.

“얼른 들어가서 주무시게나. 내가 낸 숙제도 아직 풀지 않았을 것 같은데.”

이건… 지나갈 수 없다. 무츠노카미는 계단에 걸쳤던 발을 무의식적으로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착한 아이로군. 늦게 자면 못 쓴다네. 그 후로도 그는 무언가 더 덧붙였지만 아침의 기억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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