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01.

옛날 옛날에 백야가 유카와가 아닐 시절

옅은 시가 냄새 위에 은은한 꽃내음이 덮여있는 코트 자락. 떠오르는 첫인상을 짚으라면 그런 사소한 점이다. 시각적인 것은 많이 바래어 오래전에 읽은 책과 다름없는 형태였고… 딱히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되었으니까. 그래도 활자로 남은 첫 이야기를 서술하면 그랬다.

그 시대에는 현자도 우자도 공평하게 알 수 없는 일로 스러져 나자빠지는 통에 아이의 양육자가 안타까운 일을 당한 정도는 손수건을 몇 번 문지르는 정도로 묻혔다. 시체보다는 재산에 관심이 많은 뼈 마르고 등 굽은 자들이 오래 수군대었으나 슬픔은 없고 탐욕뿐이었다. 그들은 어린 가주의 눈을 가리려고 애를 쓰며 응접실에서 수군댔고, 모리츠 ▒▒▒▒는 가주의 서재에서 사물처럼 웅크린 채 사나흘을 지냈다. 도장이나 펜이, 낡은 편지나 가계도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아우성을 지르는 사람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목소리나 넋을 잃은 사람의 것과는 달라 탐욕스러운 자들은 맥이 빠진 듯 한풀 꺾였으나 그리 오래가지 않는 후퇴임을 모리츠는 알았다.

그날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왁왁거리던 노인들이 삿대질하며 돌아갔고, 모리츠는 무릎을 안은 채로 저녁의 노을이 검게 물드는 광경을 응시했다. 도시는 평소보다 조용했다. 알 수 없는 방화나 살인이 도는데, 누구도 꼬리를 잡지 못하는 탓이었다. 밤에는 나오지 않는 게 새로운 법인 양 거나하게 취한 자들도 술집의 안에서 잠들었다. 죽기는 싫었지. 누구도. 노인들도 그런 이유로 밤에는 쉬이 드나들지 않았다. 모리츠는 이 밤의 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며 무릎을 좀 더 깊게 안았다. 잠들 생각은 없었으나 다소 서늘했던 탓이다.

그리고 누군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가스등의 불을 제일 작게 해두어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도 노인들은 아니었다. 사용인의 차림도 아니었다. 좀 더 무겁고, 마냥 단정하진 않지만 무례하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저, 하고 운을 띄워도 답이 없자 문가를 등지고 놓은 의자와 정리가 덜 된 서류, 책장 사이로 오가던 걸음이 조심스럽게 제 등 뒤에서 멈춘다. 모리츠는 그제야 고개를 든다. 푸른 눈. 혹은 땅거미가 비쳐 남빛인 눈. 불을 켜도 밤과 다르지 않을 빛 같아 그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가 모리츠 ▒▒▒▒ 맞니?”

“…….”

“맞구나.”

“유언장은 이미 낭독했고, 유산은 전부 제게 떨어져요. 정정되지 않을 예정이니 무슨 요청을 하셔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라, …나 원.”

남자는 이미 정리되어 정리할 것 없는 코트의 소매를 매만지다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뒤늦게 유산의 권리를 주장하러 온 사람치고는 여유로웠고, 계략을 짜고 들어온 사람치고는 너무 난감한 얼굴이었다. 모리츠는 의자의 등받이를 쥐고 자세를 곧게 바꾸었다. 어쩐지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신의 남자는 허리를 조금 숙이려다, 그게 위압감을 주는 모양새라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코트가 책들에 걸려 살짝 팔락이자, 그제야 서재에 스며든 이질적인 향을 깨달았다. 사용인이나 저택에 오가는 드레스 자락에서 나는 것보다 한참 연한 꽃향기였는데, 그것보다 한참 더 오래 남아있었다. 사람에게 나는 향이라고 하기에는 이상했다. 꽃이 여전히 피어있거나, 혹은 주머니나 옷자락을 꽃으로 짰다면 이렇게 길고 옅게 남아있겠지. 소년은 생각이 다른 길로 빠졌다는 사실을 남자의 헛기침으로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잠시 협조를 요청해도 될까?”

“……잠시라면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혹시 이런 책을 보지는 않았니? 혹은 이런, …… 질문은 조금 이상했지만, 그는 대답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어쩐지 알고 있었다. 이상한 책의 소문이라거나, 골목길에서 이상한 빛을 보거나, 하는 전조들. 또는 사용인이나 저택을 오가는 사람들이 돌변하는 것을. 남에게 말하면 유령이나 믿는 어린애 취급을 받을 이야기를 그는 곧이곧대로 듣고, 진지한 눈으로 응시하며 끄덕였다. 모리츠 ▒▒▒▒는 이 사람이 좀 더 의심스러워졌고, 동시에 어쩐지 그가 갓 태어나거나 겨우 걸음마를 뗀 아이 취급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를 잠시 멈추면 괜찮다는 듯 부드럽게 끄덕이거나, 다독여주려는 모양새 같은 것들이 그랬다.

“이 정도가 다예요.”

“그 정도면 충분해.”

“……이 이야기가요?”

의심스러운 눈초리에 남자는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해를 끼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고, 부드럽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이야. 이상한 질문이었는데 대답해줘서 고맙다.”

본인도 그걸 아는구나. 모리츠는 말없이 끄덕였고, 남자는 불 꺼진 서재와 그가 앉아있던 자리를 몇 번 훑어보다가, 긴 한숨을 내쉬고 담요를 끌어 그에게 건넸다. 날이 추우니 이거라도 덮고 있는 게 좋을 거야. 모리츠는 그걸 덮는 법을 모르는 아이처럼 손길을 쳐다봤고, 남자는 결국 옆자리에 담요를 올려놓고 돌아나갔다. 그럼 잘 자렴.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그걸 기억했다. 사용인들이 누구도 그를 들여보낸 적 없다는 사실도. 암암리에 도는 마법의 형태가 꼭 이런 형태일까? 그렇다면 그는 아주 잠깐 배울 용의가 있었다. 처음 배우게 해달라고 요청할 게 있다면 그 꽃향기를 불러일으키는 법이겠지….

물론, 그는 그런 감상을 다음 날 아침이면 잊어버렸지만. 애초에, 그 방문이 꿈과 진배없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저택에 불이 붙을 때까지는 말이다. 큰불도 아니면서 물을 들이부어도 식지 않아 사용인들과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굴렀다. 노인들이 응접실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연기 때문에 나와도 회복되지 않으리라는 말도. 그는 젖은 시트에 감싸여 있다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정원에 몰린 사람들은 도움도 되지 않는 예쁘고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 역시도 불을 꺼트리는 데에 낄 생각은 없었다. 어디론가로 도망치거나 얌전히 앉아있는 게 좋은 대처겠지. 울타리를 밀고 나와 몇 발자국 물러나면, 누군가 등을 감싸고 시트를 걷어냈다. 아마 부상자라고 생각했는지 급히 상태를 살피던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모리츠는 조금 맥없는 소리를 냈다. 어, 보다는 아? 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눈만 크게 떴다가, 멋쩍은 듯 웃었다. 그리고는 시트를 완전히 걷고 부드럽게 손목을 잡았다.

“놀랐지? 곧 해결될거다.”

“…….”

모리츠 ▒▒▒▒는 순간 방화범이 여기 있노라고 소리치려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것치고는, 재나 기름 냄새가 없었다. 일관적으로, - 조금은 담배 냄새가 강했지만 – 꽃향기가 났다. 그리고 어딘가, 그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다. 근거 없는 확신이지만. 상대를 샅샅이 훑는 시선에 별 불쾌함도 없는 얼굴로 손목을 잡고 있던 남자는 경계가 조금 거둬지자 울타리 바깥의 구역으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의 보폭을 맞추는 느린 걸음에 모리츠는 오기를 부려 빠른 걸음으로 상대를 조금 앞서 나갔다. 남자가 향하는 곳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여유로운 얼굴로 불길을 흘긋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뗐다. 그 이후로 일어난 일은 아주 명확하지 않았다. 아주 빠른 것이 눈앞에 스쳤고, 아주 잠깐 볼에 눈송이가 와닿았던 것 같다는 착각이 있었을 뿐. 이후에는 연기의 매캐한 내가 사그라들었다. 모리츠를 앞에 두고 다른 곳을 보는 듯 고개를 까딱이던 남자는 몇 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입을 뗐다. *됐다*, 고. 무엇이? 라고 물을까 하다가 묻지 않았다. 방금 스친 눈송이가 답인 것 같았다. 막연히, 이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우악스러운 재난을 덮고, 꽃향기를 책에 밸 정도로 오래 남겨두고, 밤의 계단과 거리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존재라니, 그게 사람이라고 한다면 조금 기이하지 않아?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모리츠는 점점 더 몸을 수그렸다. 젖은 시트에 옮은 물이 그제야 추위를 불러오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서서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아선 제 또래보다 조금 더 많아 보였다. 스물의 막바지, 혹은 서른을 좀 넘은. 그러나 몇백을 살아온 여유가 있었다. 시선이나, 목소리에서, 혹은 걸음에서. 퍽퍽하고 탐욕스럽게 살아온 노인네들과는 다른 무게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격차 안에는 꼬박 들어찬 미지가 있겠지. 내가 파헤칠 수 없을 미지임이 분명하고. 그 막막함이 불쾌해 모리츠는 손을 빼내어 뒷짐 졌다가, 그것이 꼭 아이가 낯을 가려 머뭇대는 꼴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손을 늘어뜨렸다.

깨닫고 나니 모든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다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여유가 있는 것도, 한참 어린아이를 –물론 그의 짐작이 맞으면 한참 어린아이가 맞겠지만- 대하는 듯한 조심스러운 태도도. 이 앞의 인간이 얼마나 나이를 먹었을지는 몰라도 그는 지금까지 나름대로 성인 대접을 받아왔었다…. 그래, 제 지위를 인정해주던 노인들이 서넛 정도 목숨을 잃었으니 그 대접이 취소될 지경에 놓이긴 했지만.

모리츠 ▒▒▒▒는 그 모습을 뜯어낼 듯 살피고, 한참 침묵했다. 시선이 몇 번 제 이마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물기 어린 셔츠 위에 제 머플러를 둘러줄 때까지. 그렇게 오래 살아도 아이를 달래는 법은 모르는 걸까? 아니, 집안의 노인네들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사건은 종료됐고, 더 이상의 피해자는 없을 거다. 이런 일에 엮였으니 곧 네 인계를 도울 사람이 오겠지만…….”

부드러워진 목소리가 위쪽에서 들리다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시선이 맞닿을 정도로 내려오자 그제야 그가 다시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리츠는 이런 호의가 부담스러웠다. 사용인도 아니면서 이렇게 몸을 숙여주는 남이란 없다시피 했으므로…. 도망치듯 시선을 돌리자 골목의 끝에서 푸르고 옅은 빛이 일렁였다. 바닥의 돌이나 거울에 비치는 푸른 빛이 아니라, 새벽이나 나비 날개와 비슷한 빛이었다. 지금까지 보던 세계의 것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시선을 남자에게로 돌린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

그때서야 모리츠는 그 남자의 눈이 제법 부드러운 푸른 빛임을 알았다. 완연한 밤의 빛이 아니었다. 아주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이따금 새벽 끄트머리에서 빛나는 하늘의 빛. 이른 새벽에 홀로 눈을 떠서 아주 외로워지는 순간에 해가 뜬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만드는 빛…. 빛이 휘어진다.

"함께 가지 않겠니? 지낼 곳이든…. 가족이든. 무엇이든 되어줄 테니까."

모리츠는 헛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그가 가주로 있지 못함을 아는 듯한 말투였다. 아니, 알겠지. 그는 마법사고, 내가 모르는 일도 전부 알 테니까! 이건 동정이다. 버려지거나 갈 곳 없는 아이에게 감정이 휩쓸려 내미는 손과 다름없는 일 아닌가……. 이용할 곳이라도 발견한 참인가요? 그런 비아냥을 꾹 참았지만, 표정을 감추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남자의 얼굴이 난감하게 구겨지고 입을 떼려는 순간을 가로채어, 모리츠가 먼저 입을 뗐다.

"…… 당신을 따라가면 무엇을 알 수 있는데요?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려주겠다."

"……거짓말 같지만, 난 갈 곳이 없네요."

당신이 허튼짓이라도 하면 바로 도망칠 거예요. 그렇게 말하듯이 내민 손은 묘하게 뻣뻣한 기색이 있었다. 제 손을 쥔 남자가 부드럽게 웃어 보이더니, 조심스럽게 힘을 주어 이끌기 시작했다. 모리츠는 다시 보폭을 좁히지 않았다. 조금 뒤에서, 그 코트 자락에서 딸려오는 꽃잎이라도 있는 양 빤히 바라보다가, 일렁이는 푸른 빛이 다가오자 눈을 조금 감았다. 골목과 다른, 오래되고 기이한 먼지와 종잇장의 냄새가 훅 닥쳐왔다…….

명명과 운명의 세계가 그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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