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유증
[별의 커비]
별의 커비: 로보보 플래닛을 기반으로 한 이야기.
2017년 은님 생일 축전이었던 글을 수정•보완했습니다.
2018.02.09. 포스타입 게시물을 백업합니다.
“날 용서해요, 제발, 제발……. 미안해요!”
청년은 검사의 이름을 비명처럼 내지르며 그의 갑옷을 칼로 내리쳤다. 오랜 싸움으로 약해지고 갈라진 갑옷은 그 일격에 폭발하듯 부수어지고 여기저기가 떨어져 나갔다. 검사의 보검이 기이한 빛을 잃고 땅에 꽂히자 그 주인이 그대로 쓰러져 고통에 신음했다. 갑옷이 떨어져 나간 부분에서 핏방울이 맺혀 흘러 내렸다.
청년은 제자리에 멈춰 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자신이 믿고 따르던 카리스마 넘치는 검사는 납치당한 채 기괴한 갑옷을 입고 조종당하고 있었다. 이전에 만났을 때 분홍 머리의 비서가 자랑스럽게 그의 전신을 개조했다고 말했는데 그 말대로 검사가 명령에 따라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는 청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청년이 다급하게, 간절하게 검사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검사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젊은 비서가 시키는 대로 보검을 빼들고 청년과 대치할 뿐이었다. 그때도 청년은 비서에 대한 분노를 겨우겨우 참고 있었다. 검사는 자신의 스승이자 신뢰하는 전우이기 전에 오랜 친구였다. 그런 소중한 이에 마음대로 손을 댄 비서에 대한 격노가 치솟아 청년은 검사에게 무작정 달려들었었다.
검사의 얼굴에서 그를 조종하던 가면이 떨어져 나왔다. 드디어 그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청년은 놀라운 사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 눈! 어떻게 된 거예요?”
검사는 청년의 외침에 정신을 차린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금 밝게 빛나는 보검을 들고 푸른 날개를 펼쳤다. 청년은 그의 날개에 난 상처들을 보고 움찔했지만 검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날아올랐다. 검사는 곧 싸움이 일어났던 곳을 벗어났고, 청년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기계왕국의 왕. 청년이 처음 그 사장을 보았을 때 생각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은하 단위로 활동하는 회사의 사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청년은 그가 행사하는 힘이 단순한 회사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회사는 청년의 고향별을 기계화하기 위해 별의 왕성도 파괴하고 검사의 공중전함도 격추했다. 사장은 청년을 ‘원주민’이라고 부르며 그를 제거하겠다고 소리쳤다. 청년은 지친 심신을 달래며 아껴 뒀던 회복약을 마셨다. 순식간에 청년의 상처들이 아물었다. 그는 검을 고쳐 잡고 또 다른 기계에 탑승한 사장과 마주했다.
청년은 사장의 공격을 버텨 내고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사장이 분노해 자신의 모체 기기와 합체하는 것과 그의 여비서가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비서는 사장이 단순히 기절한 것으로 착각하고 기계를 조종하는 헬멧을 쓰려고 했다. 허나 기계가 곧 그녀 쪽으로 레이저를 발사해 그녀 역시 쓰러졌다. 그리고 사장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이상한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기계를 지배하려던 사장은 슬프게도 자아를 잃고 되려 지배당하고 있었다. 모체는 사장을 태우고 사장실의 천장을 열어 그곳에서 벗어났다. 비서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녀는 이런 것을 원한 것이 아니라고 자조하며 리모컨을 꺼내 들었다.
“핑크색 원주민, 이젠 네게 달렸어.”
그녀는 청년에게 익숙한 갑옷병기를 불러 왔다. 청년은 갑옷의 조종석에 앉았다. 갑옷은 청년을 인식하고 그의 전용 형태로 바뀌었다. 직후 갑자기 사장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유리창 너머로 눈에 익은 공중전함을 보았다. 그리고 갑판에 서 있는 검사를 목격했다. 청년은 숨이 막혔다. 분명 방금까지 온몸에 심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던 이였다. 검사는 어서 자신의 전함을 스캔하라고 손짓했다. 청년은 갑자기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전함을 스캔하기 위해 사장실 창문을 깨고 나갔다. 청년의 갑옷에 달려 있는 운영 체계는 전함을 청년에게 맞춰 변형했다. 청년이 탄 조종석은 전함의 맨 앞에 붙었다. 그 조종석도 외부로부터 지켜 주는 방어막 안에 들어갔다. 모든 것이 완성되자 천장에 생겨난 스피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듯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갈라졌으나 청년에게는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없었다. 청년은 조종석에서 난데없이 솟아오른 마이크에 대고 반가움을 표하며 검사의 이름을 불렀다. 스피커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알았다. 여기 본조종실로 올라오지 않겠나. 거기서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청년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번이나 봐 와서 청년은 쉽게 본조종실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가면을 쓴 검사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왔구나. 적어도 이 전함의 운항법은 알아야 하니 불렀다.”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청년을 대신 앉혔다. 그리고 기본 운전법과 주포 발사, 방어하는 법을 일일이 다 알려 주었다. 그는 청년의 어깨를 한 번 토닥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이리 나약해서…….”
검사는 곧 터져 나오는 기침에 말을 끊었다. 청년은 당황해서 검사의 얼굴을 보았다. 비록 손 뒤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아래로 떨어진 핏방울은 숨길 수 없었다.
“피, 피가 나잖아요! 들어가서 쉬세요! 빨리!”
검사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을 힘없이 중얼거리며 본조종실에서 빠져 나갔다. 청년은 검사를 이렇게 만든 회사에 복수를 다짐하며 전함을 이끌고 나아갔다.
모체는 여러 번 형태를 바꾸며 전함을 공격했다. 그것의 정체는 청년이 예전에 목격한 '소원을 들어 주는 별'의 모습을 한 또 하나의 기계별이었다. 청년은 진짜 모습이 드러난 별을 격추했다. 이어 별이 내는 이상한 울음소리에 반응해 본조종실로 다시 들어온 검사를 반겼다.
“드디어 이겼어요! 저거 봐—”
“아직 아니구나. 빨리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거라!”
“네? 왜요?”
“어서!”
검사는 청년을 조종실에서 밀어 내었다. 그 순간 전함이 크게 흔들렸다. 모체가 레이저로 전함의 날개에 달려 있는 동력 장치를 쏜 것이었다. 검사는 청년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다음 조종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갑판에 생긴 사출 레버를 조작했다. 청년이 타고 있었던 갑옷은 튕겨져 나왔고 전함은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체, 왜!”
청년은 황급히 뒤를 돌아 보았다. 전함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희미하게 갑판에 홀러 서 있는 검사의 모습이 보였다. 청년은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별이 하트 모양의 방어막을 만들어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청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오냐, 영원히 잠드는 것이 소원이라면 그렇게 해 주지!”
청년은 갑옷의 팔 부분을 변형하는 버튼을 눌렀다. 팔은 곧 거대한 드라이버로 변했다. 청년은 방어막을 향해 돌진했다.
검사는 전함이 완전히 추락하기 전에 가까스로 방향을 틀었다. 그는 전함을 착지시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아래에서 그의 부하 기사들이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검사는 그리로 내려가서 몇 달만에 보는 소중한 이들과 제대로 된 감동적인 재회를 했다. 그는 전함이 파손된 부위를 그들에게 알려주고, 수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동력 장치는 비상용으로 여러 개를 만들어 놓아 그저 새로 끼우기만 하면 되는 정도였다. 그 수리가 거의 다 끝나갈 때 그의 시야에 하늘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검사는 다른 기사들이 만류하기 전에 자리를 박차고 날아갔다. 그 무언가를 더 자세히 보니 청년이었다. 검사는 잠든 청년을 안전하게 받아 들고 천천히 하강곡선을 그리며 비행했다. 그는 청년을 들판에 눕히자마자 날아올랐다. 자신의 부하 기사들이 이미 전함 수리를 다 끝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청년은 한참 뒤에 눈을 떴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더 이상 기계화된 들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녹빛을 가진 그의 진짜 고향이었다. 청년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푸른 잔디와 단단한 흙을 다시 한 번 밟는 기쁨을 느끼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위에서 나는 진동 소리에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사의 전함이 다시 동작하고 있었다. 청년은 입이 아프도록 활짝 웃었다. 그는 검사의 이름을 부르며 전함이 향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검사는 그의 고향별을 한 바퀴 빙 돌아본 후 전함을 몰고 착륙했다. 그는 그제서야 밀린 피로가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회사에 붙잡혀 멋대로 조종당하고, 청년과의 싸움에 전함 운전까지, 여러 일들이 겹치자 검사는 잠시도 쉬지 못했다. 그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옆에 있던 어린 선원이 놀라며 그를 부축했다. 검사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원이 다른 부하들을 부르는 것이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의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 왔고, 끝내 눈 앞이 어두워졌다.
청년은 검사가 좋아하는 먹을 것을 잔뜩 들고 전함 출입구를 두드렸다. 그는 검사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어서 나와 자신을 반기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정작 나온 것은 어린 선원이었다. 선원의 안색은 매우 어두웠다. 그는 청년에게 검사가 갑자기 쓰러졌다고, 지금 휘하 기사들이 그 원인을 찾으려고 하고 있다고 전했다. 청년의 품에서 그가 모아 온 간식거리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청년은 함내에 있는 검사의 방으로 향했다. 검사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그 주변에 그의 기사들과 함장이 앉아 있었다. 청년은 검사의 몰골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검사의 자랑거리인 날개는 온통 붕대에 싸여 있었다. 그나마 드러나 있는 피부는 반창고와 붕대로 덮여 있었다. 그의 가면은 여전히 얼굴에 있었지만 그것 이외의 무장은 전부 벗겨져 있었다. 청년은 그는 검사가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몰랐던 자기 자신을 탓하며 함장 옆에 앉았다.
“오셨슴까. 보다시피 이 모양이심다.”
함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청년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체 얼마나 심한 거예요?”
“아마 다음 주까지 날지 못하실 검다. 내상도 상당해 한동안 절대 안정임다. 전반적으로는 여기저기 베인 상처가 많고 멍도 비슷하게 많슴다. 아직 가면 밑은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말임다.”
검사의 부하들 중 하나가 갑자기 울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선장님을 이렇게 만든 놈들을 보면 확 그냥!”
함장이 그를 조용히 시키는 동안 청년은 검사의 상처들을 자세히 보았다. 상처 밖으로 피가 베어나 붕대를 빨갛게 물들이자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검사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그때, 그는 검사의 손이 조금씩 움찔거리는 것을 느꼈다. 청년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왜 그러심까?”
함장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청년은 검사를 가리키며 그의 손이 움직였다고 더듬더듬 말했다. 그에 다른 기사들이 모두 검사를 돌아보았다. 그는 약한 신음을 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반응은 다양했다. 움직이지 말라고, 고정하시라고 소리치는 함장부터 검사의 이름을 연발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어린 선원까지. 그 소동 속에서 청년은 검사가 눈을 꾹 감고 가쁜 숨을 내쉬며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았다. 청년이 부하들을 조용히 시키기 전에, 검사는 그의 보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일어나서 자신의 날개로 공격하려고 했으나, 곧 비명소리를 내며 다시 주저앉았다. 부하들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청년은 검사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검사는 신음하며 검을 위협적으로 들었다. 그는 그만하라고, 그만하라고 끊임없이 되뇌이며 발작하듯 뒤로 물러났다. 검사의 절박함이 깃든 그 소리가 청년에게 너무나도 아프게 와 닿았다. 그는 검사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곳은 그의 소중한 전함 위이고, 회사는 이미 이 별을 떠났다고. 청년의 목소리에 검사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로 청년이 맞냐고 물었다. 청년은 맞다고 하며 다른 기사들을 내보냈다. 함장은 나가기를 거부하는 어린 선원의 손을 잡고 끌고 나갔다. 방안에 둘만 남게 되자 청년은 검사의 손을 살짝 잡았다.
“미안해요. 이렇게 심하게 다치게 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더 빨리 눈치채지 못해서 미안해요.”
“그러지, 마라.”
검사가 청년의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청년은 놀라 검사의 얼굴을 보았다. 검사는 바스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이것은 너의 탓이 아니다. 나를 개조한 회사의 탓이고, 바보같이 단신으로 회사에 침투하려다 붙잡힌 나의 탓이다. 너는, 아주 잘 해 주었다. 정작 용서를 빌어야 하는 것은 나일 터이다. 나는, 회사에서 그들이 나를 개조하지 못하도록 막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너를 적대하게끔 이용당했다. 이번 일은 내 탓이 크다.”
나는 용서받을 자격이 없다. 그래도, 나를 용서해 주겠나. 검사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청년은 울음을 삼키고 끄덕였다. 그는 이 일이 검사의 탓이 아니라고, 다 그 회사 탓이라고, 내가 더 미안하다고 계속 중얼거리며 검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사가 다시 잠들자 청년은 그제서야 검사의 가면을 벗겼다. 의외로 그의 얼굴에는 큰 상처가 없었지만 자잘한 멍이 가득했고 군데군데 칼에 베인 상처가 있었다. 이제는 옅어졌지만 한때 수술용 메스 같은 것으로 살이 도려내어졌던 흔적도 있었다. 청년은 차오르는 분노와 죄책감을 억누르고 그 상처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청년이 한참 뒤에 검사의 방에서 나오자 밖에서 대기하던 다른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는 검사의 안부를 묻는 함장에게 검사가 지금 자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 전함을 벗어났다. 검사의 배려로 전함에 아직 그의 방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청년은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전함 옆에 있는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서 전함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한적한 골짜기에 이르자 청년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는 지금까지 쌓고 쌓아 억누른 감정을 비명으로 내뱉었다. 청년은 복제당한 대왕의 몫을, 조종당한 검사의 몫을, 침략당한 고향 별의 몫을 합쳤다. 그 울분과 비통함, 서러움을 담아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청년은 자리에 쓰러졌다. 숨을 몰아 쉬는 청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는 그 원망과 비애의 감정들이 씻겨 내려갈 때까지 울었다. 그 후 청년은 마음과 몸이 모두 지쳐버려 자신의 집까지 가지도 못한 채 푹신한 곳을 찾아 기어가다 잠들었다.
청년이 일어났을 때 하늘에서는 막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잠을 잘못 잤는지 허리가 뻐근했다. 그는 터덜터덜 일어나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그는 검사가 완전히 회복하기 전까지 그에게로 가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검사에게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신이 아는 어느 대왕을 방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집에 도착했다. 몇 달 동안 전혀 집에 들르지 않아서인지 먼지가 꽤 쌓여 있었다. 청년은 인상을 찌푸리며 청소도구를 꺼내 먼지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청소가 끝난 후 청년은 간단하게 씻고 다시 한 번 여행을 떠날 채비를 했다. 대왕의 성까지는 걸어서 반나절 거리. 자신의 몸 상태와 시간 관계상 하루 이상이 걸릴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가 모아 왔던 먹을거리는 모두 검사의 전함에 놔두고 온 상태였다. 청년은 하는 수 없이 주변 나무들에서 각종 과일을 따 먹으며 걸어갔다. 이 별에서 나는 모든 음식은 신기하게도 항상 그의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청년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대왕의 성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땅거미가 져 버렸다. 청년은 아무 나무를 하나 골랐다. 그는 등에 멘 가방에서 담요 하나를 꺼내 덮었다. 하루 종일 걸어서 피곤했던지 그는 금방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청년은 느리게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대왕의 성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사과 하나를 따 우물거리며 청년은 발걸음을 뗐다. 저 멀리에 무언가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자 청년은 더욱 속력을 냈다. 마침내 대왕의 성에 도착하자 보이는 것은 성이 아니라 무너진 돌덩어리들과 그것들을 정리하고 있는 대왕의 일꾼들. 청년은 다급히 대왕을 찾았다. 신체가 복제되고 거주지가 파괴될 정도면 그들의 주인 역시 험한 꼴을 당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지만 의외로 대왕은 멀쩡히 일꾼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청년은 대왕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대왕은 호탕하게 웃으며 청년을 반겼다. 그는 성의 유일한 보좌관에게 작업 계획서를 넘겨주고 청년을 끌어당겨 머리를 쓰다듬었다.
“윽, 아프다고! 정말 힘 좀 적당히 써!”
청년은 대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작게 바동거렸다. 대왕의 장난에 보좌관이 혀를 차며 그만하시라고 대왕의 팔을 잡았다. 그제야 대왕이 손을 내렸다.
“오랜만이다! 저들을 없앤 건 너의 활약이지? 수고했다!”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검사가 없었더라면 그는 마지막 일격으로 별의 침략을 주도한 '별이자 기계이자 생명인 것'을 파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내용을 그대로 대왕에게 전하자 대왕의 얼굴에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검사는 대왕의 최고 기사이기도 했기에 대왕은 그의 안위를 걱정했다. 청년은 검사가 지금 자신의 전함 위에서 쉬고 있다고, 그를 지금 방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결과를 낳을 것 같다고 말했지만 대왕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는 옆에서 듣고 있던 보좌관에게 당장 음식과 여행용 가방을 챙기라고 명령했고, 보좌관은 한숨을 쉬면서도 준비를 시작했다. 그 역시 검사와 꽤 친했기에 걱정이 앞서는 것이었다. 청년은 대왕을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대왕은 누군가가 말린다고 해서 그 행동을 하지 않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결국 청년은 대왕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대왕의 보좌관은 청년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지며 대왕 뒤를 졸졸 따라갔다.
셋은 한참을 걸었다. 청년은 검사에게 방해가 될 거라며 투덜댔지만 대왕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었다. 정작 제일 힘든 것은 검사에게 가져가는 물건들을 든 보좌관이었다. 그가 낑낑대며 걷는 것을 보다 못한 청년은 대왕을 한 대 쳤다. 대왕이 청년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청년이 턱짓으로 보좌관을 가리켰다. 그제야 대왕이 보좌관에게서 짐을 받아 나눠 들었다. 셋이서 나란히 걷다 보니 어느새 태양이 낮의 끝을 고했다.
“아, 여기서 좀 쉬다 갈까?” 청년이 뻐근한 어깨를 풀어주며 말했다.
“그래야지, 해도 졌고 배도 고프고.” 대왕이 맞장구쳤다.
셋은 숲길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보좌관이 부싯돌로 불을 피우는 동안 대왕은 싸온 음식을 내놓았다. 금세 빵부터 카레라이스까지 다양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세 명은 음식 주위에 둘러앉아 잘 먹겠습니다—를 외쳤다. 보좌관은 빵을 한 입 먹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지는 다른 음식들을 보고 오늘도 글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청년이 자기 절제를 하고 보좌관 몫을 챙겨 주었다. 밥을 다 먹고 난 후 셋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청년이 별을 지켜내기 위한 모험을 떠난 이후 둘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그런지 말소리가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대왕이 곯아떨어지자 청년도 자기 침낭에서 잠들었다. 보좌관은 모닥불을 끄고 나서 담요를 덮었다.
청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상했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리고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아무도 없었다. 어제 같이 여행을 떠난 이들이 없었다. 청년은 당황해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대답은 들려 오지 않았다. 숲 속에도, 근처 냇가에도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희미하게 보좌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설마 하면서도 청년은 왔던 길을 되짚어 대왕의 무너진 성으로 달려갔다. 성에 다다르자 보이는 것은 청년이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사라진 줄 알았던 사장이었다. 그는 거대한 괴물처럼 생긴 기계에 타고 있었다. 기계의 한쪽 손에 대왕과 보좌관이 붙잡혀 있었다. 청년은 망연자실해 주저앉았다. 사장은 청년을 비웃으며 나머지 한 손을 꺼내 보였다. 그 손에, 그곳에—
“-어나, 일어나라고!”
청년의 얼굴에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리자 눈이 번쩍 뜨였다. 젖은 머리를 털어내며 축축해진 얼굴을 담요로 닦아 내던 청년의 시야에 대왕과 보좌관이 잡혔다. 둘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너무 세게 맞은 거 아닌가요?”
언제나 걱정이 많은 보좌관이 물었다. 청년은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다음으로 대왕이 대체 무슨 꿈을 꿨는데 그렇게 자면서 난동을 부리냐고 물었을 때 청년은 도저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날개가 찢기고 옷은 피투성이가 되어, 미동도 하지 않는 검사가 시체처럼 늘어져 처참하게 망가진 모습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저 두 사람이 안전한 것이 감사했던 청년은 둘을 꽉 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보좌관은 하려던 말을 하지 못했다. 대왕에게 청년의 떨림이 전해져 오자 그는 아무 말 없이 청년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청년이 마침내 둘을 놔 주자 둘은 청년의 수상하게 빨간 눈가를 모른 척해 주었다.
세 명은 자리를 정리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청년은 다시 본래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고, 대왕 역시 유쾌한 표정으로 나아갔다. 드디어 저 멀리 검사의 전함이 보이자 청년은 반사적으로 기뻐했다. 아침에 꾼 그 꿈 때문일까. 대왕이 아까는 가기 싫다면서 하고 짓궂게 놀리자 청년이 검사가 불편해할까봐 그랬다고 진지한 얼굴로 반박했다. 보좌관은 둘의 말다툼에 익숙해져서인지 휘파람만 불며 걸었다. 셋은 금세 전함의 출입구에 도달했다.
“누가 노크할 거야?” 청년이 물었다. 자기는 죽어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여기까지 오자고 한 대왕에게 눈짓했다.
“네가 하면 안 되냐?” 대왕이 보좌관을 앞으로 밀며 반 강제로 부탁했다. 보좌관은 어어 하며 밀려가다가 문에 부딪혔다. 밖에서의 소동을 누군가가 들은 모양인지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에서 나온 것은 피곤에 절어 있는 어린 선원이었다. 그는 세 명을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왜, 왜 오, 오셨어요? 지, 지금은 방문자를 받을 수 없습니다!”
선원이 그들을 밀어내기 전에 대왕이 문을 턱 잡았다. 그는 달달 떨고 있는 선원을 내려다 보며 위협적으로 명령했다. 그가 당장 길을 트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선원은 겁을 너무 먹은 나머지 찍소리도 못하고 길을 열어 주었다.
대왕 역시 검사의 방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기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쿵쿵 걸어갔다. 청년은 보좌관과 함께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며 조금 떨어져서 걷고 있었다. 함내로 깊숙이 진입해서야 그들은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대왕은 검사의 방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노크하며 검사의 이름을 불렀다. 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대왕은 문을 두드리며 몇 번 더 불러 보았다. 그 소리를 들은 다른 기사들이 달려와 대왕을 말렸다.
“저희 선장님 이제 겨우 회복세에 드셨단 말입니다! 지금은 안 됩니다, 대왕님!”
“맞아요, 잠드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다구요!”
“대왕님, 제발 좀 나중에 오시면 안 됩니까?”
그 난장판 속에서 검사의 방문이 벌컥 열렸다. 모든 말소리가 일제히 멈췄다. 침묵 속에서 검사가 평소처럼 무장을 하고 지친 발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이냐.”
검사의 몸에는 아직도 붕대로 뒤덮인 부분이 많았지만 그의 날개는 다시 원래의 영광을 되찾았다. 청년은 무의식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까지 회복하는 데 본인의 엄청난 자가 회복 능력과 부하들의 극진한 보살핌이 있었을 것이다. 청년은 그제야 왜 다들 피곤해 보였는지 깨달았다. 아마 검사의 병수발을 하면서 몸고생 마음고생 다 했으리라. 검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왕님? 대체, 왜,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그리고, 저 둘은……. 끌려 오신, 겁니까.”
“아닐세!” 대왕이 외쳤다. “나는 그대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네. 그리고 이것도 전해 주러 왔네."
대왕은 보좌관이 들고 있던 바구니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윤기가 흐르는, 별처럼 생긴 과일 몇 개와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막대사탕을 꺼냈다. 검사는 두 눈을 깜박였다.
“이것들은, 귀한 것, 아닙니까? 왜, 제게.”
“그래서 자네한테 주는 것이네! 나는 자네가 이렇게 다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자네는 훌륭한 검사이자 나의 최고 기사가 아닌가!”
대왕은 하하 웃으며 음식이 든 바구니를 건넸고 검사는 그것들을 감사히 받아들였다. 검사는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바구니를 자신의 방에 가져다 놓았지만 청년은 검사가 잠깐 비틀거린 것을 놓치지 않았다. 검사가 자신의 방에서 나오자 청년은 대왕의 귀에 대고 검사가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소곤거렸다. 대왕은 바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챘다.
“자 그럼, 우리는 이만 가 보겠네! 자네가 다 나으면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 자네의 쾌유를 기원하네!”
검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대왕은 급히 청년과 보좌관을 데리고 선내를 빠져 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대왕은 청년을 붙잡고 멱살을 탈탈 털어댔다.
“저리 심하게 다친 건 왜 언급을 안 했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저 음식만 보냈을 텐데!”
“그 언급 어제 했잖아요 이 바보탱이야! 지금 가는 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둘의 언쟁이 격화될 조짐을 보이자 보좌관이 대왕에게 매달려 둘을 떼어 놓았다. 그는 최대한 두 사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래, 내가 잘못했다! 됐냐?”
“흥, 안 됐거든요? 지금 또 상태 악화됐으면 어쩌려고?”
“너 그거……!”
대왕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면서 상황이 종결되었다. 그는 보좌관에게 쟤 좀 어떻게 해 보라며 매달렸으나 보좌관은 그를 짐짓 냉정하게 내쳤다.
“저 안 도와드릴 겁니다. 잘못한 건 대왕님이니 대왕님이 뿌린 씨는 알아서 거두십쇼.”
“야, 너무하잖아, 그거!”
대왕이 한참을 칭얼거리자 보좌관이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서는 대왕이 최고라는 둥 그를 한참 치켜올려주는 말들을 늘어놓았다. 대왕은 뚱한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청년의 눈에는 그가 좋아하는 것이 다 드러나 보였다. 정말, 단순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청년은 발걸음을 옮겼다. 대왕이 그에게 어디 가냐고 물어보자, 그는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고 답했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 본인은 성을 고치는 걸 마저 감독해야겠다며 길을 나섰다.
그렇게 세 명은 다시 하나와 둘로 갈라져 각자 제 갈 길을 나아갔다. 청년은 자신의 집으로, 대왕과 보좌관은 대왕의 성으로. 또 하나의 큰 위협이 물러갔으니 한동안 별은 평안할 것이다.
그 사이 검사는 몸이 다 나아 청년과 훈련을 하고, 대왕을 알현하고, 쌓인 서류를 보좌관과 처리하며 전함을 타고 별의 하늘을 순찰할 것이다. 허나 그는 회사의 침략으로 생긴 정신적 상처들을 오랫동안 안고 갈 것이다.
청년은 나름대로 즐거운 생활을 하며 검사와 자주 대련하고 대왕에게는 장난을 치고 보좌관과는 대왕에 대해 수다를 떨 것이다. 그리고 밤에는 가끔 검사를 찾아가 그의 악몽을 덜어 줄 것이다.
대왕은 성을 다 수리한 다음 모두를 초대해 연회를 열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는 성이 또 무너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저번보다 더 견고하게 성을 보수할 것이다.
보좌관 역시 대왕에게 딴지를 걸며 청년과 같이 떠들고 검사와 서류를 처리하는 매일매일을 반길 것이다.
다시, 일상으로. 언제나 그랬듯이.
한림님이 후기를 남겨 주셨습니다. 언제나 큰 관심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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