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그리고 백야가 영원이 될 때에
2010년 9월 6일에 도달하기 직전, 늦은 밤.
언제였는지 기억은 나나?
기억 안 나요.
마법사의 시간이란 찰나와 영원을 오가는 탓에, 그는 그 순간의 시간을 기억하지 않았다. 다만 그 공기만이 기억에 남았다. 손을 뻗지 말라고, 오랫동안 함께 해온 예지가 몰락을 예고하며 등을 찌르는 듯한 숨 막힌 적막. 주위는 텅 비어있었다. 운이 좋았다. 아니, 운이 나빴던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짐작할 수 없다.
앞에 놓인 금서는 이따금 몸을 흔들어 달각, 달각, 하고 쓸모없는 반항을 이어나갔다. 편찬이 까다로운 탓에 이대로 봉인이 유지될 예정이라고 했다. ‘풀려나면 꽤 까다로운 일이 일어날 녀석이죠.’ 그래, 영원의 백야도 그 점을 알았다. 오랫동안 학원에 몸담은 서경 하나를 태연하게 집어삼킬 금서라는 사실을……. 사슬을 벗겨내던 손마디에 괜한 힘이 들어가 거슬리는 쇳소리가 났다. 속도 모르는 금서는 음습하게 킬킬거렸다. 내가 절박해 보였는가? 백야는 확신하지 못해 제 얼굴을 더듬어 보고 싶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그래, 이건 전부 자기만족에서 저지르는 일이다. 매여있던 예지에서, 틈틈이 따라오던 불신의 눈초리에서 도망쳐 나오고 싶은 충동에 못 이겨 저지른 일이었다…….
그래야했다.
마지막 사슬을 풀어낸 백야가 고개를 들었다. 낮게 깔려 불길하고 웅장한 노래가 휘몰아치며 옷깃을 잡아당긴다.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자 제목 없는 악보와 지휘봉이 눈앞에서 유유히 춤추고 있었다. 쓰지 않아 먼지 쌓인 화음이 제멋대로 들끓어 불쾌하게 웃었다. 동시에 저 멀리에서, 무언가 쿵, 하고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저 예견된 몰락에 당신이 죽는 문장은 없었다.
"나와 손을 잡아줬으면 한다, 노래하는 세계여."
"고고한 대법전의 마법사가 별일이군.“
백야는 조롱에 대꾸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마도서 없는 손을 내밀 뿐이다.
"네 계약 조건은 알고 있어. 승낙하지."
"소원은?"
천애의 예지란 세계에게는 행운이지만 개개인에게는 불행이다. 누군가 그렇게 말한 기억이 있었다. 백야는 그 마법사가 개입에 휘말려 소멸해도 동의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동의한다. 이 시선은 파멸을 불러온다. 알아서는 안 됐다.
"내가 본 예언을 바꿔줬으면 한다."
"그것 참.“
조율되지 않아 한 음도 맞지 않는 악기가 제각기 큰 소리를 냈다. 비웃고 야유하는 듯한 짙은 음이 아래에 깔리다가, 악보에 제목이 붉게 적힌다. 지휘봉은 길게 늘어나 제 손에 놓인다. 검은 지팡이, 푸른 기가 섞인 것은 조롱을 위함인가? 조금도 잊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선고인가? 의중을 묻지 않았으나 미간이 좁혀졌다. "그럴 때가 아닐텐데." 저 멀리서부터 들리던 소란이 점점 번져 이쪽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직감처럼 알고 있던 거대한 몰락이었다. 그는 소란에서 빠져나가는 순간 이 멸망에 가담한 일원이 되리라는 짤막한 문장을 보았다. 돌이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아무도 보지 못한 차였다. 다시 봉인할 수 있는 도구도 있었다. 할 수 있었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2019년 12월 30일 23시 50분.
삶의 평생을 규명하는 데에 몸 담아온 자가 은폐하는 것은 얼마나 간단한가. 삶이 허락된다면 평생을 이러고 살더라도 문제 없을 정도였다. 세계에 유리 되어 흔들리고 있었기에 얄팍한 틈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모순은 유구하게 조소할 일이었지. 날이 갈수록 금서가 본질에 파고들어 종종 제멋대로 하늘 을 희게 밝혔으나 바로 발을 옮기면 되는 일이었다. 어디에도 정을 주지 않 았으니 발걸음은 가벼웠다. 얕게 내려진 닻을 이끌고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내려야할 곳을 하나 빼고 전부 잃었으니, 이 닻만 버리면 영영 아무런 눈치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만 놓으면.
그러나 어딜 가나 당신을 닮은 사람은 있었고 그들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당 신과 비슷한 말을 했다. 면식도 없는 이방인의 몸을 걱정하는 주름살 지고 다정한 사람들. 단숨에 우자 하나를 잡아먹을 수 있는 괴물을 길 잃은 아이처럼 대하는 무모함이 구역질 나 뒤로 물러나려고 해도 결국에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당신을 잊으려고 해도 세상이 당신같이 굴었다. 덕분에 언 손엔 끔찍할 정도로 뜨거운 닻을 쥐고 겨울을 오가며 살았다.
그렇게 10년이다.
"종착역입니다. 잊으신 물건은 없는지 확인해주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자의 교통수단을 쓰는 것은 이제 문호보다도 익숙해졌기에, 백야는 안내방 송이 들릴 즈음에 기차의 윗 선반에서 가방을 끌어내렸다. 늙은 차장의 목소리는 이번으로 꼭 10번째 듣는 목소리였지만, 달라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대 단도 하지. 기차 안에는 한 두어명이 졸린 눈을 하고 비척비척 일어나고 있었다. 연말이어도 고향에 돌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작은 마을. 묵을 곳이라곤 한 두곳의 소박한 여관뿐이며 호수 위에 피어오르는 오로라 외엔 별 볼 것이 없었으나 그가 근 10년간 이 시간에 오던 곳. 숲을 지나쳐 걸으면 얼어붙은 호수가 있었다. 가장 가까운 나무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보면 이질적인 청록과보라가 하늘을 이리저리 수놓았다. 미동도 않고 그 화려하고 덧없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 멀리서 뎅, 하고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생에서 마지막 으로 마주할 12월 31일의 자정이기도 했다.
" 새해 복 많이 받아요. "
체온마저 설원과 같았는지 입김이 희미했다. 겨울밤은 하루 뒤에 이 곳에 온다. 새해에 피어오르는 청록을 한참이고 쳐다보던 눈을 기억한다. 백야는 그의 눈에 청록이 비치는게 제법, …….
회상하지 않는다. 현재로 돌아와 생각한다. 여기서 하루 더 머문다면 마주칠 수 있을 것이다. 드디어 끌어내려 분투했던 분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아니면 무엇을 해도 주지 않던 경멸일지도 모르지. 어느 쪽이든 좋았다. 내어주지 않을 것을 전부 받아내고 죽고 싶었다. 그의 삶에 스쳐지나가듯 녹는 눈송이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 그래, 내게 소원이 있다면. "
" 내 마지막 순간에는 당신이 있었으면 해. "
이 불온한 소망을 당신이 설 곳에 둔다. 영영 이뤄지지 않음을 알고 있지만. 그래, 나는 그 때 당신을 다시 만나길 소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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