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삶의 안녕은 잔잔히 찾아온다
사소하지만 까다로운 민원이나 관장의 알 수 없는 - 새롭지만 기존 레퍼런스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며 그럴 듯하고 눈에 쏙 들어오는 요컨대 다른 도서관에서 했던 그거 - 요구, 혹은 지하 서고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괴담조사니 뭐니 하는 유튜버들을 제외하면 도서관의 업무는 대부분 큰 소리 없이 유하게 흘러갔다. 오랜 세월을 굳건히 쌓아온 도서관의 위엄에 선뜻 난동을 부리겠다고 마음 먹는 사람들은 드물었으니까. 그렇지만 사서들이 전부 조용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었다. 가지각색의 요구와 자료를 모아 남에게 제공하는 직군인데. 할 말은 많고 시야는 넓었다.
그렇기에 그들간의 교류는 제법 많고 다양한 편이었고, 아는 사람들끼리는 몇 번 놀러가서 술을 마셨다느니, 하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렸다. 조금 예외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까다로운 관장이 그랬고 - 물론 그는 그냥 다들 대화를 꺼려하는 꼰대에 가까웠다 - 예산 담당자인 마츠노 씨, 그리고 몇몇… 을 건너서.
올해로 근무 5년 차인 유카와 란야가 그랬다. 유달리 까다로운 역사나 비문학 서적의 검색 요청을 별 당황없이 받아냈고, 업무 자체에는 별다른 하자가, 아니, 오히려 완벽할 정도로 깔끔했다. 아카리도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오랜 경력이 쌓인 인상이었달까. 화내는 일 없이 좋은 사람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유카와씨랑 퇴근 후에 마주쳐본 사람 있긴 해요?"
"아마 없을 걸요. 지난번에 저녁 같이 하자니까 약속 있다고 자연스럽게 빼더라고."
아카리가 회상하기에도 그랬다. 가볍게 저녁 같이 하자는 말에 가볍게 웃으며 야근을 자처하거나 다른 약속이 있다고 잘라냈고, 단체 회식에는 참여했지만 특유의 차분함이 꺾이지 않은 채로 남을 택시에 밀어넣어 보내는 광경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말을 안 하는 건 아니었는데, 남는 인상이 없다고 해야하나. 두루뭉술한 형태로 남는 이야기만 하며 화제를 남에게 돌렸던 것 같다. 혼자 살고 취향은 깔끔한 레더 제품.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온 적 단 한번도 없음. 점심 메뉴는 늘 '저도 ~~ 씨와 같은 걸로 부탁드려요.' 그 정도가 2년을 같이 근무하며 깨달은 사항이었다.
"사람을 밀어내는 건 아닌 것 같았는데요."
"아 ~ 맞아요. 저 지난번에 어트랙션에서 마주쳤는데 잘 대해주셨어요."
마리나가 한 마디 얹었다. 아마 그와 대화량이 가장 많은 상대이리라. 물론 95%가 마리나의 일방적인 수다긴 했지만. 하여간, 대화는 대화지.
"…끝나고 어디 학원이라도 가시는 거 아닐까요?"
"지난번에 독일어 써있던 고서 훅훅 읽더라. 평소에도 봐, 자기 관리 확실하잖어."
사무실에 아 ~ 하고 끄덕이는 소리가 일었다. 그러면 그럴 수도 있겠다, 그렇지. 다들 성실하게 사세요! 유우! 지난번에 술 잔뜩 마시고 지각한 거 반성 좀 해라. 어? 한바탕 웃음이 일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이 기이한 뒷담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카리 역시도 그 사실에 수긍하고 물러났는데…….
"하세가와씨, 죄송한데…."
그런 서두로 말을 꺼낸 유카와가 고개를 숙였다. 서류를 책상에 가볍게 올려둔 그가 말을 이었다.
"바깥에 누가 와있어서요, 바로 나가야할 것 같아요. ~ 혹시 이 문서 팩스로 보내주실 수 있을까요? 회신이 오면 제 자리에 두고 가시면 됩니다."
"손님 오셨어요?"
"아, 애인…."
엑.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 탓에 아카리가 입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단정한 인상이었는데 애인도 있구나, 하는 순수한 감탄이었다. 집에 가서 책만 읽을 것 같은 인상이었는데. 괜히 사무실의 다른 직원에게 얘기했다가 나중에 유카와에게 빈축을 살 것 같아서, 팩스를 넣은 그녀는 조심스럽게 로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익숙한 장발 앞에 서있는 건 비슷한 키의 남자였다. 부스스한 머리칼이 언뜻 보였고, 유카와의 어깨 너머로 조금 피곤해 보이는 푸른 눈이 스쳤다. 연인보다는 형이나 사촌 같은 관계로 보였다. 서있던 남자가 내내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탓이었다.
"……하지 그랬어요?"
"됐다. 네녀석이……."
엇, 네 녀석이라고 했어. 언뜻 들리던 대화의 호칭이 썩 다정하지 않아 그녀는 고개를 기울였다. 대화는 전부 들리지 않았지만 유카와의 어조는 제법 즐겁고 가벼운 투였다. 사무실에서는 한톤 낮아 진중한 느낌이었기에 상황을 몰랐다면 조금 낯설 정도로, 웃음기가 많았다. 상대의 어조는 조금 신경질적이고 한숨이 섞여있었지만.
"데려다 드려요?"
"됐어. 간다. 이따 보지."
손을 흔든 남자를 멀거니 바라보던 그가 돌아서는 순간, 아카리는 괜히 화들짝 놀라 화장실로 도망쳤다. 남몰래 남의 이야길 들춰본 기분이었다. 다음엔 정말 모르는 척 해야지, 라고 마음먹었으나….
삶은 딱히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건 도서관에 왔었던 그 남자가 생각보다 이 마트에 자주 들르는 단골이었음을 알아챈 순간이었다. 도서관에 들렀던 것이 그나마 차려입었던 것인지, 코트 아래의 잠옷 바지가 힘없고 익숙하게 팔락였다. 장바구니는 제법 짭짤한 간식으로 차있는 걸 보면 귀찮은 심부름을 나온 게 아니라 본인이 해먹으려드는 모양이었다. 모른 척을 하려고 돌아서서 다른 코너로 가려는 차에,
"마사키."
"…네녀석은 왜 이런 타이밍에 오지?"
"왜겠어요?"
"……."
"잠옷 귀엽네요."
"그런 말할 거면 가라. 필요없다."
그런 대화가 들려온 탓에, 아카리는 코너의 애매한 구석에 서서 그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히미코씨가 뭘 부탁한 건가요?"
"치즈감자프라이."
"방금 막 퇴근한 제자의 몫은?"
"없다. 말도 안 듣고 놀리러 온 놈의 몫 같은 게 있겠냐?"
"……흐음. 기대하고 왔는데. 저녁은 굶게 생겼네요."
"윽……."
장바구니에 뭔가 담기는 소리가 들렸다. 안돼, 더 들었다가 마주치면 진짜 빼도박도 못하게 찝찝해지고 만다. 아카리는 서둘러 발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들리는 대화는 이랬다.
"결국 나한테 질 거면서 귀엽게 구시긴…."
……그걸 들어버려선. 다음 날 출근 후의 하세카와 아카리는 유카와 란야가 입을 뗄 때마다 어쩐지 심란한 표정을 지으며 메모지를 내려다볼 수 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왜 거기에서, 마트 바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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