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무텐

행성 탐구자 (3)

이방인


월아


공기가 흐물거린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 깊은 어둠 속에서 사지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잠에 든다는 감각이라면 참으로 끔찍한 느낌이다. 사람들은 전부 휴식을 위해 하루에 한 번 이 짓을 한단 말인가?

현실감은 점점 흐려져서, 팔다리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바깥에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눈을 붙였을 땐 이런 일이 없었다. 정말 머리를 다치거나 한 게 아닐까.

참을성이 없어지려는 순간 강한 두통이 느껴졌다. 머리가 조인다. 둔기에 세게 얻어맞은 듯 아프다. 여전히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정말로 머리가 쪼개질 것 같다고 느껴졌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아까보다 선명하게.

―돌아와.

그 목소리는 동굴 안에 있는 것처럼 울렸다.

돌아오라고? 너는 누구고 난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오히려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여전히 말할 수 없다.

―어서 돌아와.

이제야 조금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고 개운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수수께끼다. 적어도 장소를 알려줬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선 참으로 곤란하다.

그래도 하나 알아낸 것은 있다. 누군가 자신을 찾고 있다. 월아의 이전 모습을 알고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이제 이 이름은 쓰지 않게 되겠지. 스칼렛과 다른 사람들과는 계속 대화하고 싶다. 그렇게나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을 잊을 리가 없다.

―반드시 돌아와야 해.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끝이 묘하게 떨리고 뭉개졌다.

약속하겠다는 대답조차 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눈을 뜨니 어두운 방이 눈에 들어왔다.

소파에 누워서 잠든 탓에, 허리가 아프다. 월아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잠들기 전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기억난다. 스칼렛은 일찍 일어났는지 반대쪽 소파에 앉아 자신의 대검을 닦고 있었다.

어제 하루 동안 세계와 지하 도시, 탐험가에 대해 배우고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누군지 어디서 온 것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 대한 지식은 하나도 없는 주제에, 이건 왜 이렇고 저건 왜 저런지 쓸데없는 궁금증은 계속해서 든다. 과거를 떠올리려고 계속 노력해도 집히는 것이 없다. 애초에 과거를 떠올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전의 기억을 깡그리 잊어버린 자신을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사람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인지 고민했다.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다면, 사막에서 쓰러져 있었을 때 만난 사람들이 선인이어서 다행이라는 점이다. 만약 나쁜 마음을 품고 다가온 녀석이 있었다면 어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돌아오는 길에 리처드가 말했었다. 탐험가들이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푸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이번처럼 운이 좋지는 않을 거다’라고 경고했었다.

어쨌거나 기억이 제대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 탐험대에서 계속 신세 지고 살아야 한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자신 탓에 다른 세 명이 곤란해지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그래도 이런 마음이 든다는 건, 자신이 뼛속까지 악인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두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일어났네. 잘 잤어?”

“…응.”

끔찍한 꿈을 꿨다고 말하기엔 좀 그랬다. 자는 사이에 있던 일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레이시는 먼저 나갔어.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 올 거야.”

“리처드는 좀 괜찮을까….”

“아, 리처드 아저씨. 집에서 쉬고 있겠지. 당분간은 내버려 둬야겠어. 많이 다쳤잖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팔이 부러진 상처는 시간이 얼마 정도 지나야 나을 수 있는지 궁금해졌지만 지금 묻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여기에 적응도 해야 하니까… 맛있는 거 먹으러 갈 겸 도시 구경하러 가자. 길도 알아둬야지.”

“아, 으응.”

스칼렛은 그렇게 말하면서 소파에 걸쳐져 있던 어두운 녹색의 겉옷을 들어 팔을 하나씩 넣는다. 책장 위에 놓인 지갑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월아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쩐지 어정쩡한 자세가 된다.

들어왔을 땐 잘 몰랐는데 문이 자신에게는 조금 작았다. 월아는 머리를 부딪힐까 몸을 숙이며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바깥으로 나온다. 여전히 어제와 같은 지하 도시가 있다. 같은 냄새가 나고, 같은 모습이다. 불규칙한 건물들의 배치가 마음에 든다.

 

20분 정도를 걸어 시장 구역에 도착했다. 아지트 구역과 비교하면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탐험가들도 많지만, 식료품을 구하러 온 일반인들도 꽤 보인다. 오는 길에 스칼렛과 함께 불야성 수배 전단이나 신문을 확인했지만, 자신을 찾는 글 같은 건 없었다. 이곳과는 그다지 연관이 없는 모양이다.

어디선가 맡아 본 적 있는 냄새가 났다. 고기 냄새. 그리고…

시장 구역의 냄새는 묘하게 정겨웠다. 손질된 고기가 일렬로 걸려 있는 곳에서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손님들을 부른다. 작은 물건들을 식탁 위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긴 로브를 두른 사람도 있다. 처음 보는 것뿐인데 저게 유물이라고 부르는 물건일까. 분위기가 붕 뜬다. 사람들이 제각기 무어라 이야기하며 물건을 사고팔고 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싸게 해 달라며 흥정하는 대화다. 가게 주인은 져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지만.

“어때?”

멈춰 서서 감상에 젖어 있는 사이 스칼렛이 옆에서 말을 걸어 왔다. 맘에 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멋지네. 가게 진짜 많다.”

“맘에 들어?”

“응. 사람도 많고.”

그리 말하며 주변을 둘러본다. 채소를 종류별로 수북하게 올려 둔 가판대가 보인다. 저도 모르게 몇 걸음 다가가 앞에서 들여다봤다.

“빛이 없는데 채소는 잘 자라는구나.”

“이건 과거에는 없었던 품종이래. 아니면 이런 것들은 식물공장에서 키우지.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은 좀 비싸.”

귀찮을 듯한 질문에도 친절하게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해 준다.

“기술이 대단하네.”

“그렇지?”

“먹어 보고 싶어. 맛있을까?”

“으음… 난 채소를 좋아하지는 않아서.”

스칼렛의 미간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의외로 편식하는구나. 그래도 먹어 보고 싶다는 말을 신경 썼는지, 채소를 몇 개 고르며 가게 주인에게 담아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나 먹어 봐.”

“그냥 먹어도 돼?”

대답 대신 스칼렛은 봉투에서 잎이 달린 줄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고개를 가까이 가져간 순간, 스칼렛은 내밀었던 것을 도로 가져가 버렸다.

“씻어서 먹어야지. 농담이야.”

“믿었는데.”

스칼렛은 대답 대신 소리 내어 웃었다. 월아는 이제 이 표정이 뭘 뜻하는지 알고 있다. 스칼렛은 즐거워하고 있다. 친구가 된다는 건 이런 걸까. 사소한 것을 나누고,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

시선이 계속 자기에게 가 있는 것을 눈치챘는지, 스칼렛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월아를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둘은 인파 사이를 헤집고 조금 더 들어갔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가게들은 형태는 비슷했지만 각자 다른 냄새가 났다. 살짝 허름한 간판들 아래로 긴 테이블이 있고, 그 앞에 놓은 철제 의자에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보인다.

가게 안에서 바삐 움직이는 요리사들이 내는 소리가 사람들의 대화 소리와 섞여 소란스럽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조차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판 위에서 구워지고 있는 고기 향이 유달리 신경 쓰였다. 월아는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게 최선을 다했지만, 길은 좁은데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리 와.”

그중 한 가게로 스칼렛이 손을 잡아끌었다. 월아는 저항 없이 끌려간다. 가게 주인은 스칼렛을 알고 있는 듯 살갑게 인사를 건네고, 스칼렛도 마주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아버지는 요즘 어떠셔?”

“건강하세요. 요즘은 제가 따로 나와 있어서 자주 보진 못하지만요.”

둘의 대화를 가만 듣는다.

“옆에는?”

“새 친구요. 이름은 월아에요.”

“반갑다.”

가게 주인은 월아를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얼굴을 가진 중년 남자다. 불을 써서 뜨거운지 이마에 땀이 맺혀 있다. 뺨에는 긴 흉터가 하나 있었는데, 보기에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월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덩치에 비해 기운이 없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었다. 어쩐지 얼굴이 화끈해진다. 스칼렛은 자리에 앉고, 월아도 그 옆에 앉는다. 테이블 앞쪽의 구이대에 꼬치들이 가지런히 늘어져 있다. 가게 주인이 익숙한 솜씨로 꼬치들을 뒤집는다. 고기나 채소 따위가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자, 처음 온 손님. 이거 먹어 봐.”

가게 주인은 그렇게 말하며 월아의 앞에 검은 접시와 함께 꼬치 몇 개를 내밀었다. 좋은 냄새가 난다. 연기가 나는 꼬치 접시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 사이, 옆에서는 스칼렛이 고기 꼬치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열심히 볼을 오물거리는 것이 작은 동물을 연상시켜 귀여웠다.

하나를 조심스레 들어 입에 넣었다. 따뜻한 고기 한 덩어리에서 육즙이 흘러나왔다. 단순하게 생긴 것과 달리 맛이 좋다. 촉촉한 속살을 씹을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배가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월아는 단숨에 접시 위의 꼬치들을 전부 해치워 버렸다.

“배고팠어? 급하게 먹으면 체해.”

“잘 먹으니 보기 좋네.”

시선이 쏠리자 부끄러워져 고개를 다른 곳으로 슬쩍 돌렸다. 스칼렛은 꼬치 하나를 가로로 든 채로 물었다.

“어때?”

“…맛있어.”

“다행이네.”

가게 주인은 둘의 대화를 가만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둘이 보기 좋네. 한창 때라서 그런가….”

“콜록.”

입에 든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사레 걸리는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 듯한 표정을 한 채로 가게 주인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눈썹을 휜 채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정확히 무슨 의도로 꺼낸 말인지는 알 수 없다. 자신은 스칼렛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다.

“숫기가 없군.”

“…그런 거 아니에요.”

“월아, 귀 빨개졌어.”

그 말을 듣고 월아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스칼렛과 가게 주인은 소리 내어 웃었다.

 

하루 종일 불야성을 돌아다녔다. 중간에 탐험 장비를 파는 가게에도 들렀다. 거기서 시간을 제일 많이 쓴 것 같다.

가게에는 배낭, 피켈, 조리 도구, 야시장비 등 탐험가들이 쓰는 장비가 가게마다 빽빽하게 걸려 있었다. 스칼렛은 자기가 쓰던 장비는 맞지 않을 거라며 능숙한 모습으로 장비를 하나씩 고르기 시작했다.

어떤 걸 사러 온 거냐고 하는 물음엔 ‘전부 다’라고 대답했다. 얼떨결에 또 끌려 들어갔다. 상인은 스칼렛과 대화를 몇 번 나누더니, 큰 가방을 하나 가져왔다. 튼튼한 재질의 탐험용 가방이란다.

장비가 가방에 하나씩 들어갈 때마다 설명을 들었지만, 너무 많은 정보가 한 번에 들어오는 탓에, 반은 흘려 버렸다. 한참 동안 잡혀 있는 기분이었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기도 했고.

커다란 탐험용 가방이 꽉 찰 때쯤, 월아는 이것들을 전부 다 사면 비싸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비싸지 않아? 하고 물어보았다. 스칼렛은 어차피 자기 돈이 아니라는 대답을 해 왔다.

리처드가 잔소리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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