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의 두 사람

[리발링크] 이 하늘을 닮았다

그렇게까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백년 전의 약속, 지키러 왔어." 

백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금발의 하일리아인은 백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누구는 이런 곳에서 형체도 남지 않게 썩어버렸는데 말이지. 분한 마음에 나도 백년 전과 변함없이 밉살스런 말로 맞아줄 생각이었다. 어라, 정말 쓰러뜨린 거야? 라고. 그야, 당연히 쓰러뜨릴 거라고 믿고 있었지만. 

헌데 녀석이 뜬금없이 그런 말을 하니까. 준비했던 대사들은 전부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나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약속? 너와 그런 걸 했던가?"

정말로 기억이 나지 않아 물은 것이었다. 백년 전에는 어떻게 하면 이 녀석의 신경을 긁을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저 잘난 면상을 구길 수 있을지, 그것 밖에 머릿속에 없었어. 삐뚤어진 입에서 고운 말이 나왔을 리 없다. '약속' 같은 뜨뜻미지근한 말은 더더욱. 

"이 위에서 승부하자고 그랬잖아."

......하아!?

"그거야 비아냥인 게 당연하잖아! 잘도 그렇게 너 좋을대로 이해했군."

"그렇다고 해도, 백년 전의 나는 기뻤...을 거라 생각해." 

기나긴 잠으로 기억의 대부분을 잃어버렸다는 용사는 과거의 자신을 마치 타인처럼 말하고 있었다. 보다 먼저 영혼이 해방된 미파와 다르케르가 귀띔해준 덕분에 알고는 있었다지만, 직접 그 꼴을 보자니 부아가 치민다. 백년을 기다리게 해놓고 본인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니,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아.

그런데도 우리를, 나를 구하러 온 것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의심 없이 퇴마의 검의 용사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너의 그 '사명감' 이라는 녀석 때문일까, 아니면. 

"나 있지. 처음으로 너에 대한 기억을 되찾았을 때, 솔직히 '뭐야 이 건방진 새는?' 이라고 생각했어. 근데, 백년 전의 나도 딱히 호감 가는 녀석은 아니더라고."

용사는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말한다.

"...흥. 알고는 있나 보지."

"여유가 없었던 거 아닐까. 너도, 나도. ...지금이라면, 좀 더 솔직해질 수 있어." 

높이 하늘을 나는 네가 멋있었어. 부러웠어. 

승부하자고 해줘서 기뻤어. 

강한 너와 겨뤄보고 싶었어. 

태연하게도 그런 말을 늘어놓는 용사에게,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렇게 잘 떠드는 사내였던가? 사기라도 당한 기분이야. 더구나, 철가면 뒤에 감춰져 있던 게 고작 그런 유치한 감상이었다니. 끄집어내고 싶어서, 파헤치고 싶어서, 몇번이고 가시를 세우고 달려들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아-아, 차라리 평생 몰랐으면 좋았어.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비아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어리석긴. 설령 정말 그렇다 해도, 내가 이미 죽어버린 이상 승부고 뭐고 무리잖아."

"하하. 그것도 그런가." 

어색하게나마 입가에 걸렸던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죽은 건 난데 왜 멀쩡히 살아있는 네가 그런 얼굴을 하느냐고 따지고 싶어질 정도로, 슬프게 일그러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인다.

"그럼, 말을 바꿀게. 내가 너를 보고 싶어서 왔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건.... 네 말이 맞아. 나는 분명 너를 몰라. 단순히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 애초부터 알지 못하는 건지. 어느 쪽이든――"

――――분해.

"너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었어. 왜냐면, 우리들 분명... 그렇게 나쁘기만 한 관계는 아니었을 거야."

고개를 든 용사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익숙한 눈동자와 마주치고, 순간 피하고 싶었다. 

바람이 멎은 것처럼 고요한 푸른색. 나는 이 눈을 싫어했다. 

감히 이 나를 앞에 두고도 나와 같은 정도의 긍지를 내비치지 않는 공허한 눈이 싫었다. 내가 가지고 싶어한 모든 걸 가졌으면서도 훨씬 앞을 내다보는 너의 눈이 싫었다. 손을 내밀어도, 화살촉을 들이밀어도, 그곳에 내가 없다는 게 싫었다.

결국, 유치한 감정을 감추고 있었던 것은 서로 마찬가지.

"그거참 우연이네. 나도...."

사실 네가 그렇게까지 싫었던 것도 아니었다고, 방금 깨달은 참이야.

"...그렇게까지?"

"친구 정도는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 뭐, 이제와서 너무 늦었지만."

"그렇지 않아!" 

용사는 드물게 큰 목소리를 냈다. 주먹을 꽉 쥐고,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필사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네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나는.... 지금부터라도 너를 소중한 동료로, 친구로 기억할 테니까!" 

"...하."

네가 그렇다면, 나는 너에게 한가지 선물을 하도록 할까. 

착각하지 마. 네가 멋대로 나를 친구로 생각한다니 나도 내 멋대로 할 뿐이야. 본래 우리 리토족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거든. 뭐든 배로 되갚아 주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아.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오른 용사는 멍청한 얼굴을 하고 눈을 깜빡였다.

어차피 죽어버린 나에겐 쓸모없는 능력. 녀석이 커스가논을 쓰러뜨린 보상으로 주려고 애저녁에 마음 먹었던 거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 누구도, 운명에 선택받은 퇴마의 검의 기사조차도 절대 따라 할 수 없는 기술을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완성시킨 이 기술을 이렇게 내주고 말다니. 이보다 굴욕적인 패배는 없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졌을지 몰라도, 우리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앞으로도 훤한 고생길, 중간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이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리토의 영걸 리발이, 친히 너의 날개가 되어주겠다는 말씀이야.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무리 멍청한 너라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마음껏 감사하도록 해!

빛에 휩싸여 희미해져 가는 녀석에게서 마지막까지 본 것은 잔잔한 파랑이었다. 눈꼬리가 조금 휘어져있던 거 같기도 해.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녀석이지만, 전보다야 나은 낯짝을 하고 있다고 평가해주지 못할 것도 없다.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메도와 나 단둘뿐. 재앙 가논을 겨누는 데에 온 힘을 쏟고 있는 기계 파트너는 말할 수 있을 리 없고, 적막한 하늘에 내 목소리만이 울린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겠는데...."

녀석이 공주와 함께 리토의 마을에 왔을 때, 「용사님의 눈동자는 우리 리토가 동경하는 하늘의 색」 이라며 치켜세우던 마을 녀석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면, 저런 게 하늘일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늘이란 그런 거잖아. 마냥 푸르거나 평화롭기만 하지 않아. 좀 더 변덕스럽고, 사납고, 불합리하고... 그래서 나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바람이 되고 싶었던 거야. 하늘의 지배자 리토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가장 높은. 헌데 날지도 못하는 하일리아인이 하늘을 눈에 담았다니.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말이 안 되는 일도 눈앞에서 펼쳐지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녀석은 날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 신수까지 와선 이런 하늘을 가져다주었다. 

백년 만에 보는 하늘은 내가 기억했던 것보다도 훨씬 고요하고, 그런데도 어딘가 자유롭고 마음을 세차게 흔들어서. 줄곧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고 깨달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왜 깨닫지 못했을까. 

....아니, 깨닫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인지도 모르지. 이 또한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하늘이라는 걸.

아아, 그래. 링크, 너의 눈동자는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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