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유리막대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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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본이 그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 것은, 진의 소개를 통해서였다.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마주했을 때, 그녀가 진이 제게 붙인 감시자임을 알았다. 감시자를 붙일 법도 했다. 조직은 실력주의였지만, 그는 빨라도 너무 빨리 코드 네임을 부여받았으므로 수상쩍게 여길 법도 했다. 외려, 모든 간부가, 특히 진이 그를 단번에 신뢰했다면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이상하다 못해,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맹신이라며 바보취급하고 넘어가기에는, 조직은 그리 어수룩하지 않았다. 그는 진의 그 표면으로 드러난 경계를 차라리 달갑게 받아들였다.

비터스. 그녀의 코드네임이었다. 그녀의 본명도, 실제 몇 살이나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녀가 제 또래이겠거니 어렴풋이 짐작했을 뿐이었다. 그가 비터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검은 머리카락, 회색 눈동자, 잘 가다듬어진 이목구비. 미형의 얼굴이었다. 목은 희고 깨끗했다. 주름이 지지 않은 목에서 그는 그녀가 젊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정확히 나이를 가늠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특별히 앳된 얼굴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은 제 나이에 걸맞은 분위기를 지니기 마련이었다. 그는 그 분위기를 잘 읽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녀는 예외에 속했다. 어린 기운이 남은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그녀는 도통 활기라고는 없는 인간이었으므로. 구태여 그것이 열정 따위의 긍정적인 것만을 이야기하진 않는다. 그것이 분노나 증오, 혐오, 타기, 경멸 따위의 것이라고 할지언정 그 모든 것들은 격렬한 살아있는 자의 흔적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그런 것을 느낄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무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서는 망자의 냄새가 났다. 혹은 지저의 냄새가. 그는 죽음과 대화를 나눈다면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젊은 기가 어린 얼굴을 빌어, 제 나이와 얼추 비슷하겠거니 생각할 뿐이었다. 나이를 가늠하기 이전에, 그는 그녀를 생자生者라고 분류해도 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진은 불길한 남자였다. 누군가를 죽이는데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남자를 불길하지 않다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이상한 일일 테다. 그러나 그러한 남자보다도, 불쾌한 구석이 있는 여자였다. 그는 진이 왜 그녀를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신뢰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어느 누가 사자가 배신하리라고 생각할까. 배신의 기저에는 욕망이 있다. 그것이 명예에 대한 것이든, 재물에 대한 것이든, 색욕이든, 권력이든, 어느 무엇에 대한 욕망이 인간을 회유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아있는 채로 죽은 인간이었다.

그녀와 팀을 이뤄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니, 일 자체의 난이도가 그리 어렵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코드네임을 받기 전, 그 혼자서 움직일 때보다 제법 어려운 일들이었으나, 그 개인에게 돌아오는 일들은 그리 어렵다고 할 것까지는 없었다. 가장 위험한 부분은 대체로 그녀가 맡는 일들이었다. 타깃의 손아귀가 닿을 곳까지 다가가는 일은, 주로 그녀가 했다. 그는 그녀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정보를 긁어내는 일을 했다. 그녀는 미끼였고, 그 그림자 속에서 움직였다.

짝을 이루는 임무가 많아질수록, 그가 그녀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 역시도 늘어났다. 대체로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게 그랬다. 그녀는 그리 말이 많지 않은 편이었으나, 대화를 기피하는 부류도 아니었다. 대화에 필요한 교양이 부족한 사람도 아니었다. 거슬리는 자에게는 폭력을 행사하기를 망설이지 않는, 그 진이 붙여준 인간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온순한 인간이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온순한 게 아니라, 무던하다고 해야 옳은가? 그녀는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 여상한 태도로 대꾸했다.

의미 없는 대화를 많이 나누었다. 그 모든 것은, 그저 그녀에게서 어떤 쓸모 있는 정보를 얻어내기 위한 일이었다. 대개 사람이란, 말을 많이 나눌수록 경계심이 옅어지는 법이었다. 인상이 나쁘다면 나쁜 대로 그랬다. 알아간다는 게 경계심을 흐리게 만들고, 태도를 결정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가장 감추고, 날것의 모습을 드러내길 꺼내는 것은 아무것도 모를 때이다. 그에 비하면, 설령 혐오한다고 할지언정 완전히 미지일 때보다야, 더 많은 것을 노출했다. ‘태도’를 결정한다는 것부터가 그랬다.

아무로 토오루는 그리고 남의 호의를 쉬이 살 수 있는 인종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미움을 살 정도로 요령이 부족한 인간은 아니었다. 구태여 의도하고 행동하지 않더라도 그랬다. 그에게 이미 내재된 습관이라고 말하는 게 맞았다. 그는 습관적으로 호의를 살 수 있는 행동을 했다. 누군가를 잘 돌본다든지, 아니면 친절하게 대꾸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의식하지 않고서 행하는 습관이었다. 그의 다정함은 습관이었고, 그는 그 습관을 유용하게 이용할 줄 알았다.

그가 정말로 그녀에게 호감을 샀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녀는 불쾌한 기색 없이 대꾸했고, 이따금, 그가 물어본 것에 대해서 고민까지 해가며 대꾸하는 일도 있었다. 일이 없을 때면, 그녀는 책을 뒤적거렸고, 그렇지만 딱히 독서가 취미는 아니라고 했다. 이런저런 영화도 제법 많이 보는 편이었다. 제법 ‘문화인’이라고 자칭하는 이들과 견줘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것 역시, 딱히 취미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 좋아하는 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았을 때, 그저,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라고. 그래서 싫어하느냐고, 되물었더니, 그녀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결국에는 싫어하진 않는다고 했다.

그는 그녀와 영화를 몇 편인가 보았고, 책을 몇 권인가 같이 읽었다. 조직의 일과 첩자로서의 일로 그는 바빴지만, 짬을 내서 시간을 공유했다. 그녀의 사적인 거리 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그보다 오래된 간부였다. 조직의 인사권을 지닌 진이 신뢰하는 인물이었고, 막 코드네임을 부여받은 자신보다야 훨씬 많은 것들을 접하는 위치에 있었다. 진이 제게 직접 붙여준 만큼, 접근하기 위해 ‘일부러’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그 정도의 위치에 있는 간부에게 선을 대기 위해서 드는 품이나, 리스크에 비해서는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같이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시간이 그리 싫지만도 않았다. 그래. 기이할 정도로 그랬다. 그녀는 고요했고, 고저가 거의 없는 단조로운 사람이었다. 버석버석하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건조했다. 그가 그녀와 공유하는 시간이 생각만큼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그런 부류에 속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제 결론에 납득했다. 그녀는 ‘진’이 붙인 감시자였지만, 피곤한 인종은 아니었다. 시비를 거는 사람도 아니었고, 애초에 먼저 말 붙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감시당한다는 사실은, 조직의 다른 이들과 어울릴 때 느끼는 욕지기와 지긋지긋함, 혐오에 비하면 대단한 게 되지 못했다. 그녀를 피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조직원 중 누군가가 달라붙을 뿐이라면, 차라리 그녀와 같이 있는 게 나았다. 그건 다만, 최악과 차악 중에서 차악을 고르는 수준의 일이었다.

그녀만큼 조직과 동색인 인물도 드물었으나, 그녀만큼, 대체 왜 조직에 들어오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인물도 드물었으니. 적어도 최악은 아니었다. 그녀는 살아있는 송장이었고,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인간이었다. 명예욕도, 물욕도, 권력욕도, 색욕도 없는 그녀가 이렇게 위험한 조직에 가담하게 된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그는 도무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욕망이 거세된 인간이 가담하기에는, 이곳은 욕망이 들끓는 자들이나 눈이 멀어 투신할 수렁이었다. 다시는 기어나갈 수 없는.

스카치와 같은 조가 되고, 라이 역시도 한 조로 활동하게 되는 일이 늘었다. 그것은 아마도, 진이 신뢰하는 인물인 비터스가 충분히 감시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그리고 여차할 시 바로 처리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밀어 넣었기 때문일 테지. 완전히 조직의 사람인 비터스와 잠입 조사관인 자신과 스카치, 그리고 석연찮은 구석이 있는 라이. 비터스는 자신과 스카치, 라이의 면면을 본 뒤로, 위스키들을 맡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다른 둘과 같은 임무에 배치되는 일이 잦아졌어도, 어쨌든 비터스와 항상 일을 같이 하는 것은 자신이었다.

어느 날의 임무였다. 그녀와 자신, 딱 둘에게만 내려진 지령이었다. 제법 세력 있는 야쿠자가 대상이었다. 조직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만만히 볼 대상도 아니었다. 조직에 비견하자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었지만. 그들은 조직의 일을 방해했고, 조직은 그것을 용납할 정도로 무른 곳이 아니었다. 제 먹이에 손을 뻗는 놈들을 봐줄 놈들이 아니었다. 조직은 그들을 없애고 싶었고, 그 방식은 어떻더라도 괘념치 않았다. 세련된 방식이든, 아니면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이든.

시선을 끌어주는 미끼 역할을 맡은 것은 그녀였고, 그가 해야 할 일은 그녀가 시선을 끄는 동안, 조직에 이익이 될 법한, 그리고 제 위치에서도 이득이 될 법한 것들을 미리 빼돌리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야쿠자 몇 명과 마주쳤고, 그는 그들에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는 여기서 ‘버본’이었다. 대강의 일이 마무리되고, 그는 그녀를 찾았다. 건물의 구조를 숙지하고 있는 그가, 그녀를 찾아가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악취미의 침실이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그녀가 야쿠자의 곁에 다가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욕정을 이용하는 것이었고, 그 역시도 그런 수단에 어느 정도 익숙했다. 조직은 수단을 가릴 정도로 고상한 곳이 아니다. 그가 사랑하지 않는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것만큼, 아니, 사실 그보다도 훨씬 능숙하고 무던하게 사랑을 속삭였겠지.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게 과연 ‘도덕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와 그녀가 소속된 곳은 범죄조직이었고, 그곳에서 목적을 위해서 ‘깨끗한’ 수단을 사용한다는 것만큼 기괴한 일이 있을까? 사랑을 속삭이는 게 너무하다는 건, 순진한 발상이었다. 버본은 오늘 방아쇠를 몇 번이나 당겼다. 탄창 하나를 완전히 비웠고…. 제가 쏜 이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에 비해서, 달콤한 체 하는 독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익숙했고, 가치나 우열을 매기지 않았다. 똑같은 수단을 사용했다면, 그것은 어떤 ‘누구’라서 더 죄가 되거나, 혹은 무고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들을 애써 무시했다. 침대 위에는 그녀가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작은 면도칼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곯아떨어진 남자의 목을 조용히 내리그었다. 극적인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피가 요란하게 튀었지만, 별로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이곳은 불에 태울 것이고, 그 불길은 그녀와 버본이 이곳에 있었던 흔적을 모조리 집어삼킬 터였다. 그녀가 침대 위에서 내려왔다. 흰 다리 위로 검푸른 얼룩이 몇 개나 있었다. 얼추 보이는 것만으로도 서넛은 족히 넘었다. 바닥을 굴러다니던 옷가지를 주워 건넸다. 받아든 옷가지를 걸치는 손길은 기계적이었고, 사실 버본이 들어온 뒤로 본 모든 행동이 그랬다. 그녀는 여전히 단조로웠고, 지극히 건조했다. 얼룩덜룩 요란했던 상처들이 죄다 옷가지 아래로 사라졌다.

“괜찮아요?”

“상처라면, 당연히 아픈데.”

“그것도 그렇지만, 당신 정말로 괜찮냐고요.”

그는 그녀를 흘끔 훔쳐보았다. 흰 얼굴의 반이 검었다. 손버릇이 나쁜 상대라면, 그리 드문 일도 아니라고 했다. 피곤해보이기는 했어도, 그 이상의 무언가는 서려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피로도 머지않아 사라지겠지. 눈가를 꾹꾹 지압하려던 그녀는 상처에 손가락이 스치자 반사적으로 신음소리를 냈다. 그래, 처참한 얼굴이었다. 그건 노골적인 폭력의 흔적이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곧 목적지로 삼았던 그녀의 안전가옥에 도착할 터였다. 그녀와 둘이서 하는 임무의 끝은 언제나 그녀가 지닌 안전가옥 중 하나였다. 단 한 번도, 그의 거처에는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조직의 인물인 그녀를 제 거처에 들일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익숙한 일이야. 새삼스레, 안 괜찮을 것도 없지. 아프기야 하지만.”

“익숙하다고?”

“그래. 벌써 십 년은 족히 하고 있는 일인데. 익숙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하지.”

“십 년이면, 당신 그 때, 많아봐야 열 몇 살 때 아니에요?”

“그렇지. 그리고 그게 드문 곳도 아니지 않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아버지는 야쿠자, 어머니는 창부. 조직의 협력자들이었고, 그들이 죽고, 그녀는 뒤처리를 하러 온 이들 손에 수거되었고. 바싹 메마른 어조였다.

“자주 있는 일이지. 지금까지도, 그리고 지금이나, 지금 이후로도. 그리 대단하고, 극적인 비극은 아니지 않나.”

그는 침묵했다. 쌕쌕, 그녀가 불편하게 숨을 쉬는 소리만이 이따금 차내의 정적을 흩어냈다. 마땅히 부인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현대 사회는 복지 국가를 표방하고, 아동은 응당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지만. 그렇지만, 모든 이들에게 그 권리가 당연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연해야만 했다. 음습한 세계에 사는 이들일 수록, 양지의 보호에서 제외되었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슬프네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말이었다. 이게 과연, 버본이 할 법한 말인가? 그는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엉망이 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처로 인해 알아보기 쉽지 않았으나, 아마도, 그건.

“고마워.”

그 뒤로도 그는 그녀와 몇 번이고 같이 임무를 수행했다. 스카치와 같이 하는 임무도, 라이까지 함께 하는 임무도 있었다. 그녀는 코드네임을 가진 만큼 유능했고, 그 유능함은 언제나 비참함이 있었다. 음지의 일들이란 대개 그런 법이었다. 그녀는 그 모든 비참함에 대해서 ‘익숙한’ 일이라고 여상하게 대응할 뿐이었다. 이곳에 있는 그 어느 누구보다도 원초적인 폭력과 야만에 익숙한 인간이었다. 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래.

그러던 어느 날, 스카치가 잠입조사관인 게 조직에 밝혀졌고, 그녀는 한동안 자취를 감췄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라이에 의해, 스카치가 직접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뒤의 일. 스카치가 죽었어도,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다. 다만, 그의 내부에서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 존재가 생겨났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FBI의 잠입조사관이었고, 제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잠입을 포기했다. 스카치의 죽음에 빌어, 조직의 핵까지 다가갔던 것에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그는 라이를 증오하는 만큼, 잘 알고 있었다. 라이는 분명, 조직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유능했으나, 그의 발목을 잡는 존재가 있었다. 조직이 혈안이 되서 뒤쫓는 만큼, 그가 짐을 진 채, 빠져나갈 방도는 없었다. 그래. 그는 라이의 숨통을 끊고, 그 목숨을 진상하여, 중구까지 스며드리라. 그래서 이 혐오스러운 조직에 안녕을 고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라이, 아카이 슈이치는 빠져나갔다. 그의 탈피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고, 그건 버본도 잘 알고 있는 이였다. 오래도록 자신의 감시자였던 인물이 그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틈들이었다. 제가 아닌 누군가가 보았다면, 그것은 실수도 아니었다고 할 정도로 작고 교묘한 틈이었다. 그러나 오래도록 같이 움직인 자신은 똑똑히 알 수 있는 원조였다.

이 조직에서, 그와 가장 시간을 오래 보낸 것은 그녀였다. 아니, 사실은 그의 스물 이후의 삶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차지한 게 그녀이기도 했다. 진은,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녀를 가장 신뢰하던 인물은 진이었으나, 그 잘라내는 처우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조직원들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고 다시 도망쳤고, 결국 버본에게 잡혔다. 과연 그녀는 정말로 더는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능했고, 도망치려면 조금 더 오래도록 도피생활을 할 수 있었으리라. 언젠가 붙잡히게 되더라도 그랬다. 어쩌면, 정말로 완전히 조직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라이를 도와줬으니 FBI의 원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들이 자랑하는 그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빌면, 그녀는 양지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 날 항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비참했다. 2년 전, 스카치를 죽이는 게 그녀의 일이었다면, 그렇다면 그 때 몸을 감춘 이유 역시 분명했다. 라이의 손을 빌렸기에, 그를 빼내줬다는 말이 의미하는 게 무엇일까. 속이 들들 끓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머리도, 심장도 차마 쏠 수 없었다. 옆구리를 꿰뚫은 총알은, 착실하게 그 숨을 앗아갈 테다. 방아쇠를 당긴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녀는 죽을 터였고, 죽을 사람을 앞에 두고, ‘버본’ 다울 필요는 없었다. 당신을 조금은 좋아했었다. 입술 새로 흩어진 말이 제 손가락을 아프게 옭아매었다.

살아남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희망적이고, 바보 같은 생각을 조금 했다. 그녀는 코드네임을 가졌고, 그만큼 유능했으니, 어쩌면, 그 상태로도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그 모든 기대는 제가 그녀를 쏜 항구의 창고에서 화재가 났다는 기사를 본 순간 증발했다. 제법 규모가 큰 화재였다. 대부분의 컨테이너 창고들이 불길에 휩싸였지만, 그 내용물이 비어있었기에 실질적인 손해는 크지 않다는 기사였다. 그렇지만, 신원 미상의 전소한 유체가 하나 있었다고.

그는 그녀의 죽음을 빌어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했다. 감시자는 더는 붙지 않았다. 진은 그를 동색의 인물로 여겼다. 그가 고수하는 모호한 태도는, 신비주의를 표방하는 베르무트와 동류의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조직의 괴멸까지 그의 의심을 사는 일이 몇 번 있었으나, 다르게 말하자면, 그건 고작해야 손에 꼽을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떨쳐낼 수 있을 정도로 옅은 것이었다. 이 모든 안정은 그가 조직과 동류임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녀를 제 손으로 살해했다는 게 그를 안전하게 만들었다.

아카이 슈이치와 조우했을 때, 그는 그에게 “그녀는 나를 도와준 게 아냐.”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일을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녀가 아카이 슈이치에게 협력하여 일어난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직의 처리 대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자신이 그녀를 죽였을 뿐이다. 고작 그게 전부였다. 그 모든 것에 그녀에게 이득이 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만약, 아주 만약에. 그녀가 자신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면, 대체 왜….

조직이 무너진 지금도, 그는 그녀가 정말로 바라던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따금 그녀의 생각을 했다. 그는 아무로 토오루의 신분을 유지했고, 대체로 아무로 토오루가 하는 일들은 소일거리였다.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든, 탐정이든. 대단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는 한가할 때면, 이런저런 생각을 했고, 그 모든 생각의 종착점은, 대체로 그녀였다. 그녀의 죽음. 딸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에 달아둔 종이 울리는 소리였다. 그는 문을 돌아보며, 습관적인 인사를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카페 포와로….”

“오랜만이야.”

햇빛을 등진 그녀의 얼굴은 검게 그림자가 져, 도무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입술을 달싹였다. 아, 아. 혀를 움직이고, 무언가 말을 내뱉고자 했지만, 어느 것도 분명한 윤곽을 지니는 말이 되지 못하고 스러졌다.

“버본.”

그녀는 놀랍도록 온후한 태도였다. 제게 총을 쏜 사람을 대하는 태도라고 생각하면, 기괴할 정도였다. 하기야, 애초에 그리 고저가 큰 사람은 아니었다지만. 그녀가 지금 이곳에서 소란을 피운다면, 곤란한 건 아무로 토오루였다. 이곳은 아무로 토오루가 일하는 카페였고, 위층에는 탐정 사무소가 있었고, 그 관계자는 그 명탐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소란을 피우지 않으리라는 기묘한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의 기저는, 그래, 분명했다. 그녀는 항상 살아있는 송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 이름으로는 부르지 말아주시겠어요?”

그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는 무어라 불러야 하느냐 반문하지 않았고, 그는 잠자코 카운터 쪽의 의자를 권했다.

“잠깐만, 기다려줘요.”

“얼마든지 기다리지. 지금을 몇 년이고 기다렸으니, 조금 더 기다리는 것쯤이 문제될 게 있나.”

선선히 의자에 앉은 그녀의 얼굴은 희었다. 그가 알던 시절의 흔적들을 더듬었다. 사라진 흔적들을 더듬는 게 빨랐다. 길게 늘어지던 검은 머리칼은, 목덜미에나 닿을까 싶을 정도로 짧았다. 적어도 보이는 곳에 드러난 상처는 없었다. 얼굴 반쪽이 시커멓게 물든 흔적 따위는 어디에도 없었다. 회색 눈동자가 저를 바라보았다. 아주 흐리게 서린 웃음이 있었고. 그 눈동자에는, 제가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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