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d fashioned

올드 패션드 글라스

암실몽몽 by 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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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본과 다시 만나면, 그의 무사를 확인한 뒤로는 사라질 생각이었다. 그는 양지의 인물이었고, 나는 그 세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물질이었다. 그가 온전히 그 세계로 되돌아가는데 있어서, 오점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무엇이었다. 나는 그림자 속으로 침전하는 게 알맞았다. 수년 전, 아카이 슈이치의 도움으로 내 죽음은 유예되었고, 나는 그래서 살아있을 뿐이었다. 유일한 의미였던 버본이, 아무로 토오루로, 그리고 어쩌면 또 다른 이름으로 이 양지의 세계로 귀향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가 돌아갔다면, 나는 다시 지저로 가라앉으면 그만이었다. 그림자의 세계로, 지저의 세계로. 내가 그의 주변을 떠돌아본들, 지나간 시기의 망령일 뿐이었으며, 그에게 기생하는 해충 이상의 무엇이 되겠는가. 망령은 여명과 같이 사라지는 법이었다. 떠날 때가 되었다. 유예된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러나 이곳에 남은 것은, 아무로 토오루가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에게 해가 될 것을 알면서도, 정말 염치없게도 그가 붙잡은 손을 차마 뿌리칠 수 없었다. 밑바닥의 인생에서 인간성은 언제나 사치였다. 스스로의 존엄성 따위를 생각하며 살아가기에는, 피륙이 너무 무거운 곳이었다. 영문 모를 폭력이 있더라도 먹을 것을 주고, 당장 내쫓지 않는다면 감사하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다 늙은 노인네에게 사랑에 빠진 척 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 노인네가 휘두르는 폭력을 마치 대단한 포상처럼 여기고 환희로 들뜨는 체 하는 일은 죽는 일보다는 나았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최저를 바닥까지 끌어내려서, 그저 살아있는 것만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감읍하게 여겨야 되는 삶 속에서, 그는 내게 처음으로 괜찮으냐고 물어본 인간이었다.

그게 설령,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가 건넨 그 작은 말 하나로 스스로에게 괜찮은가 물어보는 법을 떠올렸다. 이미 바닥까지 떨어진 최저를 다시 끌어올리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괜찮지 않다는 걸 알 수는 있었다. 그는 내게 거미줄을 내려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좋아했었다고 말해준 처음이기도 했다. 설령 그게, 그가 지니는 인간성에서 나오는 아주 자연스럽고 자그마한 호의였다고 하더라도, 내게는 너무나도 귀중했다. 아마 내가 정말로 그를 위한다면, 그의 손을 놓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도 유의미했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뿌리치기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웠다.

그래서 이곳에 남았다.

셔터에 걸어뒀던 자물쇠를 풀었다. 아무로 토오루가 일하는 가게 건너편에 작은 바를 차렸다. 나는 표면에서의 이력이란 아무것도 지니질 않았고, 뒷골목에서 하던 일을 계속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로 토오루의 곁에 있다면 더욱 그랬다. 좀 더 표면에 가까운 일을 할 필요가 있었고, 그 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몇 없었다. 바는, 그 몇 안 되는 일들 중에서 가장 적당하고, 그나마 잘 하는 일에 속했다. 그래. 조직은 술 이름을 코드네임으로 삼았고, 그런 조직에 오래도록 몸을 담았으니 적어도 술 이름을 헷갈리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까 조직에 몸을 담기 전의 기억도 도움이 됐다. 주정뱅이는 그리 낯선 게 아니었다. 뭐, 어린 시절의 그곳들에 비하면, 이곳은 아주 건전한 곳이기는 했다.

“당신.”

셔터를 들어 올리곤,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니, 사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 그러니까. 쿠도 신이치였나. 이 거리에 머무르기로 한 이상, 대강의 조사는 마친 뒤였다. 이 거리를 오가는 유명인이나, 혹은 주목해야 할 법한 인물들 쯤은 이미 꿰고 있었다. 가령, 쿠도 신이치가 이 거리에서 잠시 사라졌었고, 그 사이에 관찰력이 좋고, 귀여운 소년 ‘에도가와 코난’이 나타났었다는 것 정도는.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그리고 그 소년은 쿠도 신이치가 나타나자 사라졌다. 그저 우연이라면, 절묘해도 너무 절묘한 일이었다. 쿠도와 그 소년은 서로 먼 친척 관계라고 했고, 그렇다면 더욱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마땅히 친인척은커녕 가족도 없는 내가 하기에는 좀 그런 말이지만, 원래 그렇게 얼굴도 한 번 마주보지 않고 사라지던가. 고작해야 며칠이면 서로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주 사이가 나빠서, 서로 얼굴 보는 일을 피한다면 모를까. 쿠도 신이치와 에도가와 코난은 의문 덩어리였다. 아무로 토오루의 곁에 있기에 더더욱.

“그러니까, 쿠도, 신이치였나?”

“저를 아네요?”

“갑자기 잠적했다가, 얼마 전 돌연 나타난 고교생 명탐정이라면,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할 정도로 유명하지 않나. 이 거리에서는 더더욱. 시장 어딜 가나 네 얘기던데.”

“그, 여기도 얼마 전에 새로 생긴 곳이죠?”

“그래.”

쿠도 신이치가 나타난 얼마 전과, 내가 이곳을 차린 얼마 전은 서로 단위가 다른 시간이지만, 양자 모두 그리 오래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기는 했다. 아니, 고등학생에게는 제법 긴 시간인가. 나는 쿠도 신이치가 고작해야 스물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임을 상기했다. 그래. 이제야 스무 해 좀 덜 되게 산 애에게는 그가 나타난 ‘얼마 전’과 내가 이 가게를 연 ‘얼마 전’ 사이의 간격은 제법 된다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칵테일 바가 생길 줄이야. 신기하네요. 저기, 누나,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한데, 들어가 봐도 돼요?”

아까 전까지 이야기하던 어조와는 사뭇 다른 어조였다. 나는 쿠도 신이치를 위아래로 훑었다. 누나라. 자못 애교스런 모양새. 어쩌면, 사랑스럽다는 형용사는 이럴 때 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복 차림이었고, 제법 말쑥한 모양새였다. 어쩌면 누군가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 앳된 얼굴이었지만, 일본은 워낙 동안이 많으니 그럭저럭 성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렇지만, ‘그’ 고교생 명탐정이고, 성인으로 치기에는 아이다웠다. 나는 품을 더듬어 지갑을 꺼냈다. 조직에 몸담고 있을 시절의 습관으로 신원을 추정할 수 있을 법한 물건들은 잘 들고 다니지 않았지만, 그래도 개업하면서 만든 명함 정도는 여분으로 몇 장 끼워뒀었다. 상호와 내가 사용하는 가명, 그리고 지금 사용하고 있는 연락처 정도가 적힌 명함을 고교생 명탐정에게 건넸다.

“어른이 되면 다시 찾아오렴, 꼬마야. 그 때는 설명도 해주고 할인해줄 테니까.”

아직 바에 들어오기에는 너무 어리지. 비단 나이만 그런 게 아니었다. 만약 내 앞에 있는 게 십여 년 전의 나라면, 나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다. 어쩌면 무심코 가게 안으로 들여, 손님으로 취급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나는 쿠도 신이치의 앳된 뺨이 발그레 달아오른 것을 눈에 담았다. 손끝에 스치면 온기가 뚝뚝 떨어질 듯했다.

가게는 그리 크지 않다. 창고나, 휴게실, 라커룸, 주방 따위의 드러나지 않는 공간들을 합쳐본들 스무 평이 조금 안 될 크기였다. 이 규모를 선택했다기보다, 이런저런 손으로 구할 수 있는 건물이 이것이었을 뿐이다. 아무로 토오루의 도움을 받는다면, 다른 건물을 구할 수도 있었겠으나, 구태여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좀 초라한 구석이 있는 건물이었다. 주차장은 없고, 건평도 크지 않고,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다. 건축면적 스무 평 남짓, 층수는 2층짜리의 건물. 그러나 모자랄 것은 없었다. 일층은 가게였고, 이층은 방치된 공간이었다. 공백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차마 그곳에 무언가를 들여놓을 수 없었다. 들여놓을 만한 게 좀처럼 남아있질 않았다. 이따금 빈 상자들이나, 아직 창고로 들여놓기 전의 물건들이나 놓일 뿐이었다.

얼마나 알고 있는가와 별개로 술을 좋아한 적은 없었다. 바라고 한들, 결국 주점에 속하는 가게를 운영하게 될 줄도 몰랐다.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이지만, 나는 아버지가 풍기는 술 냄새를 두려워했다. 그는 대체로 무관심했으나, 술에 취한 날이면, 그는 대상이 누구건, 폭력을 휘두르는데 망설임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얻어맞으면서, 그가 술을 마시면 몸을 웅크리고 가게 구석으로 숨는 법을 배웠다. 숨을 죽이고, 웅크린 채로, 두려움을 버티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나는 어린 시절, 어둠이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직접적인 폭력이 훨씬 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가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은 ‘나’가 아니라, 그저 눈에 띄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어둠 속으로 숨어들었다. 칵테일글라스에 불빛이 미끄러졌다. 문에 달아둔 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릴 때야 비로소 나는 유리잔에서 시선을 뗐다. 아무로가 일하는 카페처럼, 손님이 온다고 해서 일일이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누군가 들어온다면 꼬박꼬박 확인을 했다. 그건 일종의 습관이자 강박이었다. 한 때 교도소에 있었던 이들이 화장실을 갈 때 허락을 구하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아카이 슈이치.”

“매번 그렇게 이름을 다 부를 필요는 없는데.”

“그래.”

나는 아카이 슈이치를 잠시 살피다가, 그가 곧잘 마시는 위스키를 꺼냈다. 그가 마시는 건 항상 고정되어 있어서, 이곳을 방문하는 목적이 단순히 술이 아님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정도였다. 술은 어디까지나 핑계고, 그는 그저 동태를 살피러 오는 것뿐이다. 이미 수 년 전, 배신자로 시말처리가 되었던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조직의 잔재였다. 망령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그저, 법적으로 제재하기 곤란한 망령이 제 감시 아래에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나는 바로 앞에 앉은 그에게 잔과 위스키 병을 내줬다. 여긴 유흥가도 아닌, 그저 그런 상점가였고,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가게에 남아있는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단 소리였다. 오래도록 입에 담고 있지 않던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FBI잖아. 일본에 이렇게 자주 와도 되나?”

“네가 연락할 때까지만 해도 본국이었고. 일본에 다시 온 건 일 때문이야.”

“그래.”

입을 다문 채, 의자에 앉아 턱을 괴었다. 아카이 슈이치는 익숙한 손길로 얼음 하나를 잔에 담았고, 그 위로 졸졸 위스키를 부었다. FBI는 연방수사국이다. 나는 그들이 일본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일들을 머릿속으로 추려보다가, 곧 관두었다. 그들과 관련되고 싶지 않다면, 파고들어서 좋을 것은 없다. 아카이 슈이치는 이래저래 ‘훌륭한’ 수사관이었고, 그가 맡은 이상 어떻게든 잘 해결될 일이었다.

“…미야노, 아케미는?”

아카이가 입에 가져다댔던 술잔을 다시 탁상 위로 내려놓았다. 어두운 조명에서도 녹색 눈동자는 제법 선명한 빛을 띠었다. 그는 답지 않게도 무언가 애매모호한 표정을 짓다가, 곧 아주 흐린 웃음을 흘렸다. 한숨인지, 웃음인지 경계가 모호했다.

“헤어졌어.”

“그래. 그녀를 살린 건, 네게 무의미한 일이었나?”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던 대꾸 중 하나였다. 수 년 전, 이미 그는 선택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아카이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켜고 느릿느릿 숨을 내쉬었다. 지극히 정적이었다. 유리잔에 얼음이 부딪혀 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가 이윽고 대꾸했다.

“아니.”

“그렇다면 됐어.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서 미안하군.”

“미야노 아케미는 증인보호프로그램을 받게 될 거고, 앞으로 우리 같은 사람들과 관련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래. 그녀의 이야기는 이게 마지막이 되겠군.”

나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럭저럭 미인이었다. 그가 아직 라이였던 시절의 그녀는 상냥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주 가끔, 라이와의 용무가 끝나고 그녀와 마주쳤을 때, 그녀가 짓던 표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내가 그녀를 끌고 다니던 시절 역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조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여자였다. 여동생을 사랑할 수 있는 여자였고. 사랑하는 여동생과 다시 만나고, 조직에서도 벗어났으니, 그녀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터였다. 그곳에서 타인에게 상냥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다시금 종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아무로가 돌연 멈춰서더니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귀여운 얼굴인 게 무색할 정도였다.

“당신은 왜 또 여기에 있어, FBI.”

“네 가게도 아니지 않나, 레이 군.”

아카이 슈이치의 그 ‘레이 군’이라는 부름에 아무로는 처참할 정도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는 잠시 그 얼굴에 눈을 두다가, 잔을 꺼냈다.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할지언정, 내줄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여긴 칵테일을 파는 곳이었고, 주조를 위한 음료는 여럿 있었다. 술이 아니더라도 주스 정도는 내줄 수 있었다. 아무로가 아카이의 옆으로 한 자리 정도 띄워 앉았다. 나는 불쾌한 기미를 감추지 않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불쾌한 건, 아카이 슈이치에게 이름을 불렸기 때문인 듯했다.

잘 이해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하기야, 내가 아무로 토오루에게 이해할 수 있는 감각은 많지 않았다. 이름이 내게 유의미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진실로, 그것을 자신할 수 있었다. 나는 이름과 호명, 자아와의 관계 따위를 잠시 떠올렸다. 명명이 나를 세계에 개시한다고 여겨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되는대로 불렸다. 아마 가장 오래도록 나의 이름이었던 것은 조직의 코드네임이었다. 그 외의 이름들은 대체로, 누군가의 애인 행세를 할 때 잠깐 쓰고 버리는 이름들이거나, 위장용 신분증의 이름들 몇 개였다. 어느 무엇도 유의미하지 않았다. 코드네임 정도는 유의미했을지도 모른다. 그 이름을 지녔기에 아무로 토오루를 만날 수 있었다. 코드네임을 지닌 조직의 간부였기 때문에. 나는 아무로의 앞에 음료수를 따른 잔을 내려놓았다. 한 모금 들이킨 그가 제 앞에 놓인 것과 아카이가 손에 쥔 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윽고 무언가 결론을 낸 것인지 벌레라도 씹은 표정으로 물었다.

“왜 이 FBI의 개는 술인데, 나는 이거예요?”

“술 별로 안 좋아하잖아. 딱히 잘 마시는 편도 아니고. 그게 건강에 좋은 것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닌 걸 구태여 마실 필요가 있나? 술보다는 주스가 좋지?”

얼음이 달각이는 소리가 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카이를 쳐다보았다. 그는 답지 않게도 제법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이 빠졌다고 해도 좋았다. 내가 익숙한 얼굴이라고 해봐야, 라이의 얼굴이 고작이었으니, 답지 않다고 표현하는 게 오히려 모순된 일인지도 모르지.

“아직 어린애로군, 레이 군.”

아카이 슈이치의 속내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들은 조직에 있을 시절부터 충돌이 잦았다. 비단, ‘스카치의 죽음’만이 그들이 갈등하는 전부는 아니었다. 아니, 앙금인가. 스카치의 죽음은 기폭제였을 뿐이다. 내가 라이와 처음으로 일을 같이하게 됐을 때, 버본은 몹시 불쾌한 듯했다. 당신의 새로운 파트너냐고. 그건 분명히 적대감이 서린 어조였었다. 임무는 무력 제재의 간단한 일이었고, 그와 마주쳤을 때는, 일을 끝마치고 돌아가던 때였다. 라이와는 때마침 조직의 거점으로 돌아가는 길이 겹쳤을 뿐이다. 버본은 나와 나란히 걷고 있는 라이를 발견하곤, 이 수상쩍은 남자를 설마 세이프하우스까지 데려갈 속셈이냐고. 그래서 그 때 나는…. 여하간 이 둘의 사이가 험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스카치의 문제의 전후라고 둘이 충돌하지 않을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실 이 충돌의 가장 큰 문제는 아카이 슈이치가 아무로 토오루를 놀리는 걸 즐기기 때문이며, 아무로 토오루가 능란하게 대처하기에는 아카이에 비해 너무 어리다는 점이었다.

“고작 이런 기호품이 어른스러움을 말하는 건 아니지. 여기에 어린애라고 불릴 이가 어디에 있나? 열여덟 고교생 꼬마도 아니고, 다들 서른 줄인데. 당신도, 아무로를 놀리는 건 적당히 해둬.”

“열여덟 고교생 꼬마?”

“오늘 가게 여는데, 꼬마랑 마주쳤거든. 이 동네의 그 명탐정 꼬마 말이야.”

“호오? 그래서 그가 뭐라고 했나?”

“열여덟에게 누나라고 불릴 줄은 몰랐지. 안이 궁금하다고 했나. 명탐정으로 유명한 것치고는 너무 어리게 말하던데. 어쩌면 그래서 명탐정인 걸지도. 가령 에르퀼처럼 그는 그 ‘꼬마’의 의태를 쓰는 걸지도 모르지.”

건너편 가게가 이름을 딴 명탐정처럼. 인간은 간교한 생물이다. 어떤 가감도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다. 이건 ‘낭만’에 젖어 하는 소리가 아니다. 지나친 비하는 미화만큼이나 낭만 위에서나 가능한 이야기다. 나는 ‘인간’에 대해서 그만큼의 낭만적인 생각을 지닌 적이 없었다. 인간의 간교함은 일종의 생물학적 특성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이 아둔한 방향이든, 아니면 현명한 방향이든. 인간은 자기와 동등한 대상을 대할 때보다, 혹은 대단히 뛰어난 존재를 대할 때보다, 깔보는 것 앞에서 제 치부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것들이 자신의 치부를 물어뜯을 수 없다고 굳건히 믿고 있기 때문에. 그가 앳되게 구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인간적 특성을 고려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열여덟이라는 나이는, 구태여 그런 ‘체’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어린 나이이기도 했다.

“꼬마가 그랬다고?”

아카이 슈이치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어린아이처럼.”

이렇게 즐거워 보이는 아카이 슈이치는 처음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젊은 시절의 아카이 슈이치, 그러니까 그가 아직 모로보시 다이였던 시절에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어린 웃음이었다. 아니, 모로보시 다이였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웃을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낯설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낯선 올올은 돌연 나타나 이곳의 좌표를 상기시켰다. 느릿느릿 숨을 삼키고, 내뱉었다. 입술을 스치는 숨결이 미적지근했다.

이곳, 이 자그맣고 초라한, 일견 궁색하기까지 한 이 자락에 발을 디뎠다. 결코 떳떳한 지표의 세계는 아니리라. 나는 사람을 죽이는 일에 무뎠다.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죽음이 가볍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고야 만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렇다. 그 불쾌한 감각마저도 익숙해진다. 그래서 그 모든 불쾌함은 굳은살이 되어 무던해진다.

지표의 세계에 있어서 안 될 것이었다. 유리잔의 표면을 매만졌다. 나는 여전히 죽음에 익숙하다. 이 굳은살은 사라지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도록 감췄을 뿐이다. 작고 초라한 가게와 거짓 신분으로 만든 조악한 의태를 빌어. 부드럽고 무른 표피는 없다. 아니, 그 위로 너무 많은 것이 쌓여, 차마 드러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나는 여전히 저편에 익숙했다. 죽음의 무게는 여전히 가볍다. 무도는 끝났다. 지상의 세계에 죽음이 발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들의 세계로는 편입될 수 없다. 그들은 망자가 아니었다. 그저 지저의 세계를 잠시 방문한 생자였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찾아 죽은 자의 세계를 방문한다. 아름다운 노래로 관용과 자비를 샀다. 그는 그 님프를 데리고 이레 동안 사자의 세계를 거슬러 오른다. 그러나 다시 지도 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오르페우스뿐이다. 에우리디케는 출구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망자는 결코 지상으로는 나아갈 수 없다. 망자가 머무를 수 있는 곳은, 기껏해야 그 출구어름이었다.

그러나 햇볕을 탐할 수 있는 곳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얼굴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햇빛이 꿀처럼 마른 흙 위로 쏟아져 노랗게 물들고, 그 냄새가 흘러들었다. 나는 그 어린 웃음을 망막에 담고, 숨을 삼켰다. 이 웃음이 텅 빈 내장을 채우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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