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착헌

[창호기려] 동거물 1

이세계 착각 헌터

1

강창호와 동거를 시작했다.

"이건 어디에 둘까요?"

"내가 한곳에 모아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못 들었어요."

집안 구석에 쌓인 박스들이 눈에 띄었다. 김기려가 들고 있는 것까지 전부 합해서 세 보아도 겨우 세 개 남짓. 보통 이사하는 1인 가구와 비교해 봤을 때 현저히 적은 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로 들여오는 가구는 끝이 그을린 책상 하나가 전부인 데다, 샅샅이 살펴보아도 그 외 다른 짐들은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모르는 타인이 본다면 과할 정도의 미니멀리스트 헌터라 오해받기 딱 좋은 광경에 헛웃음이 절로 튀어나온다. 하필 이사를 해도 강창호의 집으로 하게 된 이 우울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됐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

때는 일주일 전. 김기려는 서울에 나타난 게이트를 처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게 된 이유가 뭘까? 답을 알고 있음에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원망 섞인 의문이다. 빚도 다 갚았으니 이제 은퇴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건만. 삼주를 내리 서울을 오가며 막노동하게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다. 이는 대한민국 부동의 1위, 국민 영웅 정하성이 불가피한 일정 탓에 해외로 나가버린 것이 가장 큰 이유인데. 본디 일주일이면 끝날 수 있었던 일이 이래저래 복잡한 사정들이 더해져 총 한 달 동안은 집 나간 생활을 해야 한단다. 덕분에 김기려가 두 배로 바빠진 것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으며···.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직접 갔지!'

뒹굴거리고 싶은 욕망을 참지 못하고 한국의 헌터들에게 전부 맡겨뒀더니 이런 후폭풍을 맞을 줄이야. 지금까지 입수한 데이터를 보자면, 미개한 포유류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떠먹여 줘도 제대로 씹지 않고 뱉어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뒤늦게라도 가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복잡한 정식 절차를 거치면 한 달보다 더 걸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얌전히 한반도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것이 이주 전이다. 이제는 정신적 한계를 맞이하여 더 이상 쌓일 피로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기만 하면 아무리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들어오는 연락은 모두 무시한 채 사흘을 내리 방에 틀어박혀 신체 연구에만 집중하겠다는 올곧은 마음가짐으로 몸뚱아리를 굴리고, 굴리고, 또 굴리며 도착 지점에 다다랐을 때쯤이었다.

'어? 저게 뭐지?'

김기려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목도하곤 브레이크라도 밟은 것처럼 몸을 멈춰 세웠다. 그리곤 쩍 벌어지는 턱은 제대로 인지조차 할 수 없었다. 과도한 충격을 받으면 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유자적 파도에 떠내려가는 해파리처럼 공중으로 날아가는 정신 줄은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린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주저앉을 뻔한 것을 혼신의 힘으로 버텨내는 게 지금의 한계라고 한다면 이 심각성이 화면 너머에도 전해질 수 있을까. 현재 김기려가 보는 현장은 참혹하다는 말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머리를 울리는 사이렌 소리. 방화복 안에서 땀을 폭포수처럼 흘려대며 끊임없이 물줄기를 쏟아붓는 소방관들이 여럿. 주변에 몰려든 일반인들은 고사하고 헌터들까지 손가락을 쪽쪽 빨며 구경이나 하고 있다니! 그중 절반 이상은 카메라 어플을 키고 영화감독에 빙의한 것처럼 동영상을 찍고 있었다.

그러니까, 김기려의 약 310억 + @ 짜리 저택이 영하 4도 날씨에 걸맞은 최고급 땔감이 되어버렸다는 소리다. 

직통으로 넘어오는 열기가 뇌를 자극했다. 김기려는 절망하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물을 내려주어도 반쯤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건물을 어찌 되돌릴 수 있단 말인가. 더불어 쉴 틈 없이 몰려드는 인파들은 또 뭐고? 거슬린다. 그들은 김기려가 이곳에 도착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다급한 몸짓으로 카메라를 돌렸다. S급의 기운이 우습다는 듯 행동하는 꼴에 헛웃음이 나온다. 내일 오후쯤 Y튜브에는 [대한민국 네 번째 S급, 김기려 헌터의 자택이 불타다?!] 같은 영상들이 수십 개씩이나 올라와 있겠지. 이미 제목만 잘 꾸려진 빈 기사가 올라갔을지도 모른다. 아니, 기사까지는 아니더라도 SNS에 글 하나 정도는 올라간 것이 확실했다. 나름 외곽진 곳에 존재하는데 누군가 떠벌리고 다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사람이 몰릴 리가 없었다. 신고자에게는 감사하다만, 동네방네 소문을 내는 건 실례라는 생각이 안 드나?

하지만 이는 나중의 이야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입방아에 오르는 일이야 언제나 있었던 일이고, 이 일이 떠들썩해진다 한들 남의 집도 아니고 자기 집에 불났다는데 비판 여론이 주를 이루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도 동정과 조롱이 더 많겠지···. 정확히 말하자면, 차마 여기까지 신경 쓸 정신머리가 없었다. 김기려의 뇌는 드물게 일시적 과부하가 온 상태였다. 당장 오늘 밤에 어디서 지내야 할지도 고민이었으니까. 

'불이 다 꺼지면 어디서 자지? 불에 타버린 터에서? 소방서에서 하루 정도는 재워주려나? 그러면 그다음은? 아. 역시 노숙이다. 그럼 차라리 붕어빵 트럭 옆에서 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일어나자마자 모닝 붕어빵으로 시작하는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잖아. 하하. 하하하! 이런 X발.'

뇌가 붕 뜨는 기분이란 이런 거겠지. 오랜 시간을 살았음에도 지구에 와서 새롭게 경험하는 일들이 참 많다. 김기려는 막연하게 제자의 집으로 쳐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이유에는 정하성의 탓이 전혀 없다고 하기에는 어렵다.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면 불이 나기 전에 처리할 수도 있었고, 불이 나더라도 하늘 위에 소나기를 불러왔다면 깔끔하게 해결됐을 일. 그러니 잠시 빈 집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주지 않을까. 뻔뻔한 젤리 몬스터는 남 탓을 시전했다.

허나 우스꽝스러운 고민을 할 시간이 주어진 것도 잠시. 침착하게 문제 해결 방안을 찾던 도중에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김기려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왼쪽으로 돌아갔다. 평소보다 한층 더 공허해져, 마치 별들의 말로가 떠오르는 그의 삼백안이 아무 말 없이 누군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숨길 생각은커녕 의도적으로 거슬리는 마력을 흘려보내는 성가신 포유류.

그곳에는 강창호가 있었다.

인지는 하고 있었다. 강창호의 마력을 이미 저 멀리서부터 감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여기까지 찾아온 것에 대해서 짐작 가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갑자기 달려들었을 때를 대비하여 곧바로 땅에 처박을 준비까지 하고 있었는데. 주인 속도 모르고 활활 타오르는 저 건물 때문에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원인이다. 

그리하여 작금의 상황에 왜 강창호가 이곳에 있는지 다시 한번 의문이 들었다. 단순하지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질문.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말아 달라며 부탁하던 그가, 김기려와 만나는 걸 썩 내켜 하지 않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던 그가? 하필이면 집이 불타고 있을 때 찾아온다니!

김기려는 확신했다. 우연? 웃기는 소리. 이는 필연일 수밖에 없다. 저 미개한 포유류가 또다시 쓸데없는 의심병이 돋아 결국에는 제집을 불태워버렸다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서 전개됐다. 분노와 함께 이 아늑한 보금자리에 들어서기 위한 험난한 나날들이 떠올랐다. 환생한 직후부터 귀찮은 일에 휘말려 떠맡겨진 사건만 해도 얼마나 많았는가. 심지어 기심체라는 의심까지 받지를 않나. 폐는 터지고, 국정원이라 의심까지 사고, 세금은 쌓이고! 그렇게 해서 겨우 받은 보상이 한 순간에 폭삭 무너진다고? 세상이 이렇게 각박해도 괜찮은 거야? 어? 물이 가득 찬 내 7000만원짜리 풀장. 빚 때문에 전부 팔아넘겼던 가구들을 이제야 다시 채워나가기 시작했는데. 쾌적한, 쾌적했었던 저택이···.

김기려는 꾹 다문 입술 안쪽으로 새하얀 이빨을 으드득 맞부딪혔다. 멋들어진 선글라스와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이쪽을 구경하는 저 모습은 분명 자신이 범인이기 때문이 틀림없으리라. 한계까지 다다른 분노 탓에 두 손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얼굴근육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김기려가 몇 안 되게 할 수 있는 감정표현 중 하나였다.

여즉 김기려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던 강창호는 손을 흔들며 가벼운 인사를 보냈다. 당연한 결과지만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허나 강창호가 이를 모르고 있을 리 없었다. 

'저거 지금 나한테 빅엿 주는 거 맞지?'

범인을 특정했으니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강창호의 코앞까지 다가간 김기려는 그림자 진 얼굴을 내보이고 시선을 올려 그의 눈을 마주했다. 오늘따라 더욱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용의 눈이다. 어두운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선명하고 길쭉한 세로 동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는 마음에 들었냐 묻는다면, 아니. 김기려가 강창호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오해요? 무슨 오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제집이 불타고 있는데 강창호 헌터가 우연히도 이곳에 서서 불구경을 하고 있었던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쪽네 집은 정반대에 위치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반듯하게 꾸민 듯한 모양새로 찾아와서 저에게 인사를 보내시는지?"

정말이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영웅의 부재로 삼주째 혹사당한 몸뚱이와 처참하게 무너진 집, 아직까지도 몰려드는 사람들, 눈앞에 강창호까지. 김기려 불행 사종 세트로 시중에 판매해도 되겠다. 위와 같은 이유로 분노로 인해 한 번 트인 말들이 봇물 터지듯 입 밖으로 줄줄이 새어 나왔다. 기어코 잡고 있던 끈을 놓아버린 것이다. 본디 자아 존엄성이 높기로 유명하신 위대한 대마법사님은, 지금까지 눈앞의 남자에게 받아온 온갖 핍박과 더불어 쌓인 분노를 전부 터트려버렸다. 성격이며 자존심이며 전부 꾹꾹 누르고 눌러 속 안에 구겨 넣은 채 굽신거려야 했던 나날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면서.

강창호는 의외로 얌전히 김기려의 말을 들어주었다. 단순 흥미였다. 이렇게까지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실로 오랜만인지라 조금 재미를 본 것도 있으며, 쉬지도 않고 튀어나오는 말들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궁금했던 것도 있었다.

"강창호 헌터가 방화범이죠?"

드디어 문장의 끝맺음을 장식하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기다리느라 몸이 찌뿌둥했다는 듯 두터운 손으로 뒷목을 잡고 고개를 한 바퀴 빙 돌리더니 크게 숨을 내뱉었다. 조금이나마 불이 사그라든 건물을 가리키며.

"김기려."

김기려의 시선이 강창호의 손끝을 따라 이동했다.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방금 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혼란스러운 현장. 도대체 무엇을 보라는 걸까. 

"화풀이하고 싶었으면 상황 파악은 제대로 한 후에 오는 게 맞는 절차 아닌가? 착각도 유분수지. 내가 저 꼴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네 집은 자기 혼자 불탄 거야. 목격자에 의하면 안쪽에서부터 불이 피어올랐다는군. 설마 김기려 헌터께서 그럴 리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볼게. 온열 기구를 켠 채 그대로 나온 건 아니겠지?"

이어지는 말에 서서히 피가 식어가는 기분이 든다. 작은 벌레 하나가 구레나룻부터 시작해 턱선까지 기어가는 듯한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는 소리다. 김기려의 시선이 다시 강창호에게로 옮겨졌다. 요동치는 검은 삼백안이 파충류의 것을 닮은 눈동자와 마주한다. 꾹 다물린 입술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지며 희미하게 떨려갔다. 얼굴 표피 위로 군데군데 늘어가는 작은 땀방울들. 타인이 보기에는 충분히 압박감을 받을 법한 얼굴이었다. 강창호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눈 좀 그렇게 뜨지 말라니까. 네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기는 한 거지?"

그렇다고 해서 얼굴을 바꿀 순 없는 노릇. 허나 강창호의 말은 이미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기려는 그저 골몰했다. 

'온열 기구···. 내가 난로를··· 키고 나왔었나?"

그래. 온 힘을 쏟아부어 만든 방벽과 침입자 경보 시스템을 작금의 지구인들이 함부로 깨부술 수 있을 리가 없었을 텐데. 그들에게는 철벽 요새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럼 온전히 내 잘못으로 이렇게 됐다는 거잖아.' 

확실히 겨울은 불이 나기 쉬운 계절이다. 상대적으로 습도가 낮기도 하고. 건조한 환경인 만큼 공기 중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는 데다가 온열 기구 사용량이 대폭 늘어나는 시기. 0.01 정하성이 가정에 수두룩하게 늘어나는 아주 위험한 계절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런 때에 정신머리를 어디다 버려두고 난로를 켜고 나와? 

"X됐다···."

의도치 않게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강창호는 그 반응이 마음에 들기라도 하였는지 한쪽 눈썹을 바짝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움푹 파인 보조개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특유의 낮은 웃음이 번진다. 

"저쪽에 노란 후드티 입고 있는 사람이 최초 목격자라니까 궁금하면 가서 물어보고."

이런 상황에서도 최초 목격자라는 단어는 잘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강창호에게는 여기서 더 따질 게 없다. cctv와 목격자를 확인하고서 말의 진위를 판단해도 늦지 않기에. 김기려는 여기서 더 밀어붙였다가는 자신이 불리해진다는 것 또한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덕분에 진실도 알았고 머리도 식혔으니 깔끔하게 인정하는 것이 좋겠지. 천재는 상황판단도 빠르다. 김기려의 눈은 여전히 초점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지만 나름대로 이성을 되찾은 상태가 되었다. 

"예.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문제가 일단락 된 것 치고는 근심 많아 보이는 얼굴은 딱히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서늘한 얼굴빛, 그림자가 진 얼굴, 퀭한 눈두덩이···. 아. 얼핏 보면 평소와 같을 수 있겠지만 시간을 두고 자세히 살피면 1.5배 정도 더 심각해진 안색을 확인할 수 있다. 김기려는 그러한 제 꼴을 아는지 모르는지, 턱을 매만지며 허공으로 비음 섞인 숨소리를 내뱉었다. 지구인들이 고민할 때 자주 보이는 행동을 따라한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노숙을 할 수는 없어. 급하게라도 고시원에 방 하나 잡을 때까지는 잠시 들어갈 곳이 필요한데.'

이렇게 흘러가다가는 완전한 길거리 노숙자로 전향하게 될 미래가 눈에 훤하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 집 좀 잠시 빌릴게, 하성아···!'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다. 살면서 딱히 염치 있었던 적은 없었으니 앞으로도 쭉 염치없는 외계인 스승으로 남기를 택했다. 정하성이 안된다고 하면 윤승이도 남아있으니까. 이쪽은 좀 눈치 보이긴 하다만···.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남은 문제는 하나.

'원시인이라 그런가 역시 느리네. 내가 나서야겠다.'

머릿속으로 결론지은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거대한 비구름이 몰려왔다. 투둑, 툭···. 곧이어 머리 위로 차가운 빗물이 쏟아져 내린다. 김기려가 몰고 온 비는 영하까지 내려가는 매서운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상태를 무사히 유지한 채 땅까지 도달했다. 난데없는 호우를 맞아 추위에 떨지만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넋을 놓고 하늘을 바라봤을 멋들어지고 신비한 광경. 덕분에 빠르게 소화 단계에 이른 건물은 점차 그 불길이 꺼져갔다. 더불어 김기려의 얼굴도 나름대로 화색을 되찾았다. 

'비를 맞으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져.' 

사선으로 쭉 뻗은 팔의 두꺼운 옷 위로 떨어지는 빗물을 기꺼이 맞이했다. 심해에서 생활하던 알파우리인이 삭막한 육지에 올라와 할 수 있는 힐링이란 겨우 바다 나들이, 수영장에서 시간 보내기, 빗물 맞기 등등. 물과 관련된 것들이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 행위는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안정화 작업이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렇기에 김기려의 입장에서는 더욱이 방해받고 싶지 않을 순간이었다.

김기려의 껍데기는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나, 그 안에 든 삼 눈의 외계인은 열심히 물장구를 치며 기뻐하고 있을 때였다. 조금 전보다 확실히 편안한 인상을 주고 있는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강창호가 이내 입을 열었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내 집에서 지낼래?"

평화로운 어조. 어디 집 앞 이웃과 매일 하는 아침 인사라도 된다는 듯 툭 내던진 문장 하나가 김기려의 정신을 다시 저 먼 쌍성계로 보내버린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뻐끔뻐끔. 다리 얻어 육지 올라온 인어공주가 된 것처럼 목구멍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시체 얻어 육지 올라온 것만 빼면 나름 비슷하긴 한데···. 하여튼. 

"왜 그래? 내가 못할 말 했나?"

못할 말을 하긴 했지. 그런 생각을 했다. 웃음기가 가신 덕에 퍽 진중해 보이는 얼굴이 무게감을 더하고 있었다. 이런 부류의 장난을 즐기는 자는 아니라고 판단했었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김기려를 제 집에 들이기라도 한다는 것일지. 아니, 어째서? 한 번 든 의구심은 그 몸짓을 키워나가는 법만 알았다. 막말로 김기려가 당신네 집에 들어가 몇 주만 지내겠다고 하면 진저리를 치며 지금 당장 바이크를 타고 자리를 떠났을 인간이 무슨 바람이 들어서 대뜸 남의 뇌를 이리도 헤집어둔단 말인가?

'자기 집에서 살라고? 강창호 플러스 집? 강창호 플러스 김기려 플러스 집? 플러스, 플러스···. 엥?'

덕분에 김기려의 정신은 지구로 되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물론 강요는 아니고. 김기려 헌터가 너무 딱해 보여서 내가 드물게 선행을 베푸는 중이지."

강창호는 저딴 것도 언어라고, 턱턱 내뱉어서 대충 짜집기만 하면 문장이 완성되는 줄 아는가 보다.

뜨거운 열기란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에 탁한 회색 연기만이 피어오르는데도 빗물은 그칠 새를 몰랐다. 그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가, 고개를 떨구고 둘 사이를 지나가는 개미들의 행렬을 바라봤다가, 다시 한번 강창호를 바라본다. 눈을 게침스레 뜨고 새까만 눈동자를 굴려 허공을 살핀다. 그리고 금색이라 하기에는 조금 옅은 모발의 앞머리를 쓸어올린다. 

"저, 그. ······내가 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답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창호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가 불쾌하다는 듯 눈썹 사이 간격을 좁히는데 십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내가?"

"아, 아뇨···. 제가."

단어를 수정한 것은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나 지금 불쾌합니다, 라는 티를 감추지 않는 강창호의 낮은 음성이 김기려의 정신을 다시 끌고 와 지구의 육신으로 쑤셔 넣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레밍!'

당장이라도 자신의 뺨을 때릴 것 같은 기세로 눈을 부릅떴다. 

'꼴을 보아하니 장난은 아닌 것 같은데. 강창호 집이 넓고 편하긴 하겠지만 함부로 들어갈 순 없어. 애초에 안 어울리게 무슨 착한 짓? 웃기는 소리 하네. 구린 냄새가 펄펄 난다! 절대 안 속아. 어차피 나는 정하성네로 들어가서 지내면 되니까 강창호가 아니더라도 길거리에서 잘 걱정은 안 해도 돼. 됐어.'

이성을 되찾은 대마법사는 생각했다.

'흠. 그러면 이유나 좀 물어볼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즘.

"대한민국의 김기려 헌터가."

"네?"

"물을 그렇게 좋아하신다고 소문이 자자해. 얼마나 좋았으면 수속성으로 각성했겠어. 내가 또 그 마음을 이해하거든. 그래서 그런데, 수영장도 마음껏 쓰게 해주려고 해. 어떠실까?"

"좋아요. 같이 살아요." 

이성을 잃은 대마법사는 제안을 수락해 버렸다.

'아.'

강창호는 그제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좋아할 줄 알았어. 복잡한 서류는 이쪽에서 전부 처리해 줄 거고, 뒤처리도 마찬가지야. 방이 꽤 남아서··· 잘하면 두 개는 줄 수 있겠네. 괜찮지?"

진도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구린 냄새가 진동했다. 그런데도 차마 거절 의사를 낼 수 없다는 게 억울해서 눈가가 촉촉해지는 기분 탓이 들었다. 아무리 쌍성계 외계인이라도 이 퍼런 별에서 힘없는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에 물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결국 강창호와의 동거로 이어지게 될 줄 알았다면 그때 목걸이로 협박이 아니라 행동을 보였어야 했는데.

하지만 그 강창호가 조건 하나 없이 들여보낼 리는 없고.

"반년이야. 너는 반년 동안 여기서 지내야 해. 중간에 나가는 건 허락하지 않아."

"반년이요?"

"한 번만 말하게 해."

화법 한 번 눈물 나게 아름답네. 

"···아, 아무튼. 그게 끝이에요?"

"그래. 당장 너한테 원하는 건 이거 하나야. 나중에 더 추가될 수는 있어도 너에게 불리한 내용은 없을 거야. 아마. 그리고 나한테 너무 대들지 말고. 조금 전처럼 나이 일곱이나 어린 사람에게 대뜸 반말을 들으면 기분이 안 좋거든."

호칭이 '김기려 헌터'에서 '너'로 바뀌었다. 친해지고 싶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겠지? 상황을 좋게 좋게 마무리하려면···. 

"······주의하겠습니다."

빗물 고인 물웅덩이들이 하나씩 얼굴을 내비쳤다. 행운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의 서막이라고 해야 할지. 이를 알아가기에는 아직 미지수였지만. 

"비부터 멈춰."

그래. 길바닥에 버려지지 않고 수영장까지 딸린 집에 들어간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긍정적으로. 

"다음부터는 대답도 재깍재깍 해주면 고맙겠어."

아니 근데 X발 정도를 모르고. 

***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눈동자가 허공을 구른다. 전보다 되레 홀쑥해진 볼살이 눈에 들어왔다. 호화로운 집에서 잠을 잘 수 있게 해준 것까지는 고마웠지. 그런데 강창호의 잔소리가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다고. 

"바로바로 정리해. 옷은 이게 다야? 그나저나 얼굴이 왜 이렇게 야위었지? 안 먹고 다니나? 안에 살펴보라는 말 못 들었어?"

그렇게 여차저차 시작한 김기려의 불행의 서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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