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착헌 / 창호기려 ] 네크로필리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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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착헌 by 아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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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호는 매일 밤 꿈을 꾼다.

꿈속에서 그는 죽음을 앞두고있던 그때, 그 끔찍하고 황홀한 순간에 갇혀 도움의 손길만을 기다린다.

이윽고 빛이 점멸하면 희고 메마른 몸을 붙잡아 숨을 나눠받으며, 인간의 모습을 빌린 존재에게 더 가까이 닿아야 한다는 충동에 연약한 몸을 으스러뜨릴듯 끌어안는다.

시체처럼 힘없이 흔들리는 몸은 생명력 한톨 찾아볼 수 없지만, 맞닿은 살결 아래 느리게 맥동하는 심장이 느껴지고, 심연보다 깊게 침잠한 두 눈이 자비롭게 그를 응시하는것을 목도하며 경이로운 존재의 편린을 본다.

강창호는 그 찰나에 전율하며 생각한다.

부디, 이 존재가 나를 가엽게 여기기를

나를 사랑해주기를

**

강창호는 일련의 사건 이후 무슨일이 있었냐는듯 빠르게 평소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서진 저택을 수리하고, 그동안 지체된 일들을 처리하며 바쁘게 지내느라 인간으로서 봐서는 안될것들을 본 충격도 빠르게 잊어가는듯 했다.

이전과 달라진 점은 김기려를 더 자주 만난다는 것인데, 김기려의 본질을 보고서도 이 모든 일을 거짓으로 치부하며 한낱 망상이였다고 자위하거나, 그에게 굴복하여 그의 부름을 기다리는것은 아니였다.

그는 알고있기 때문이다.

무지로부터 비롯된 공포심은 스스로 몸집을 불려 사람을 좀먹는것을.

두려워하면 패배한다. 파멸하고 만다. 

상대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없던 곤경에 빠져 있기 때문에, 상황이 너무 나쁘기 때문에, 역전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패배하는것이 아니다.

마음속에 두려움을 가지고 겁먹고 있을 때, 스스로 파멸과 패배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사실, 공포심의 정체라는 것은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가 어떠한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이기에.

김기려라는 인간의 탈을 쓴 미지의 존재는 분명 경외받아 마땅하나, 아무것도 모른채 두려움에 떨어서는 안된다.

이처럼 김기려를 대하는 강창호의 태도는 바뀌었지만 그의 성정이 바뀌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였다.

여전히 오만하고 제멋대로인 그는 김기려가 원하지 않을때도 불쑥 찾아와 원하지 않는 접촉을 해오고, 김기려의 입장에서 쓸모를 모르겠는 물건을 쥐어주고 떠났으니 –강창호 나름의 공경의 표시였지만 이때문에 김기려는 강창호를 다시 심연에 처박을까 고민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이 전혀 변하지 않은것처럼 보였다.

강창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매일 밤 꿈에서 김기려를 마주하는것을 자각하기 전까지는.

이건 정말 꿈이였다. 김기려가 알 수 없는 원리로 만들어낸 미지의 공간이 아니라, 강창호 본인의 수면 도중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말이다.

이런식으로 무의식에 깊게 박힌 강렬한 경험은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몇 안되는것 중에 하나였다.

마치 신의 계시를 받은 선지자처럼 김기려의 환상을 떠올려대는 자신의 머리를 후려 갈기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다가도, 매번 똑같은 꿈인데도 꿈 안에서는 처음과 다를바 없이 절박하게 매달리는 자신이 흥미로웠다.

전능하면서도 위태로워보이는 꿈속의 김기려에게 매혹된것처럼 매번, 매번...

강창호는 무의식이 그려내는 날것의 심상에게 이름 붙이고자 했다.

신앙인가?

글쎄, 강창호는 김기려의 본질을 마주한뒤 그에게 탄복하고 그를 거의 숭배하게 되었으나 이건 그런 고결한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좀 더 음습하며 본능적인 끌림에 따른 무언가였다.

굳이 정의해야한다면, 사랑에 가까웠다.

시체 속에 숨어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기묘하고 위험한 존재를 사랑한다.

당장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 같은 문장이지만 이상하게도 자신의 심상을 관조하고 내린 결론을 마주하니 오히려 번뇌가 걷히고 그간의 의문이 해소되는 느낌이였다.

강창호는 이 '사랑'을 즐기기로 했다.

사랑이라고 이름 붙이고 나니, 알 수 없는 갈망과 치솟던 흥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김기려가 보고싶었다.

저택에 딸린 수영장의 바닥에 가만히 누워 햇빛이 일렁이는 수면을 보고있으면 짧은 시간 보았던 김기려의 본질이 떠올랐다.

그때를 떠올리면 여전히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앞이 아찔하였지만 이것은 더이상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인한 현상이 아니였다.

반투명하게 빛나는, 창백하고 메마른, 가늠할 수 없이 강대하고 볼품없이 연약한 존재에게 욕정하는 것이다.

차가운 물에 둘러싸여있음에도 점점 몸에 열이 오르는것을 느끼던 강창호는 안착되지 못해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나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강창호는 늪에서 사냥감이 다가오길 기다리는 악어처럼 가만히 기다렸다.

동공이 한계까지 벌어진 파충류의 녹색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

김기려는 최근들어 강창호의 행동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얼마전까지 강창호는 그의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한척 하지만, 자신을 죽일뻔한 상대의 앞이라 어느정도 긴장한 상태를 유지하는게 보였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지 지상에 발붙이고 있는 주제에 하루걸러 한번씩 김기려에게 숨을 나눠받는 시늉을 했는데, 본인도 모순을 알고있지만 이 행위를 행해야만 잠을 설치지 않는듯했다.

물론 거기에 김기려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하여튼, 그게 중요한건 아니고

강창호가 그 행위에 모종의 감정을 부여하는것 같다.

인간들이 서로 입술을 맞부딪치는 행동에 깊은 의미가 있다는것은 '김기려'의 기억과 여러 신빙성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충분히 이해했다.

인간은 서로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맞댐으로 다른 이들을 구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그들이 신의 아들이라 추앙하던자를 팔아 넘겼다.

강창호 또한 인간이니 이 행위에 자신과 다른 감상을 가지는것 까지는 납득할 수 있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건 강창호가 성적 욕구를 느끼는 짐승처럼 자꾸만 더 깊이 파고드는 모습을 보인다는거다.

자각하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행하는 것이라도 이상하지만 본인의 의도로 이러는 것이라면 정말 납득이 안되는 일이였다.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에게 번식욕구를 느끼는 생물군의 예는 본능만이 존재해 가능한 이야기이고, 문명을 이룬 지능 높은 생물이 이런식으로 겁을 상실한 모습을 보이는건 빈말로도 정상적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중추신경계에 문제가 생긴건가?

분명 내 본질을 봤을텐데, 그 모든일을 기억하면서 나에게 그런 욕구를 가진다고?

역시 강창호는 겁도 없고 오만하며 동시에 매우 흥미롭다.

생각할수록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져 결국 골통을 까봐야할까 고민하던 와중에, 본인 생각 하는걸 알고있기라도 한건지 강창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는 익숙한 저택에 들어온 김기려는 개인이 사용하기에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수영장에 깨끗한 물이 한가득 담겨 있는걸 보았다.

그리고 잘 갈무리 된 마력도.

언제부터 저 아래에 있던건지 모르겠지만 제아무리 강건한 인간도 숨 못쉬면 죽는다. 그렇게 설계된 생물이니까.

수면이 바람에 흔들려 상이 어그러졌다. 덕분에 육안으로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를만큼 고요해 보였다.

수중 호흡도 못하는 포유류 주제에...

결국 김기려는 자신이 도착한걸 뻔히 알면서 가만히 물속에 숨어있는 인간에게 약간의 짜증을 담아 말을 걸었다.

"강창호 헌터"

"..."

"사람을 불렀으면 이만 얼굴을 비추는게 인간 사이의 예의가 아닌가?"

"..."

"...이거 웃기는 인간이네"

김기려는 결국 물속에서 올라올 생각이 없어보이는 강창호를 끌어올리려 물속에 들어갔다.

인간의 몸을 입은 그는 더이상 전능하지 않았으니 직접 행차하여 오만한 인간에게 다가가는 수 밖에 없었다.

잔물결만 일던 고요한 수면이 크게 요동치며 순간 하얀 포말을 만들었다.

물속에 들어오니 그제야 강창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물그림자가 일렁이며 지나가고 햇볕이 수영장 바닥까지 비춰내자 보인 그는 환히 웃고있었다. 소년처럼 순수하게 즐거워하며 호선을 그린 입가에는 보조개가 움푹 패여있고 김기려는 순간 존재할 수 없는것을 목격한 학자의 상태가 되어 굳어졌다.

강창호는 김기려의 팔을 붙잡고 끌어내려 수없이 하여 익숙해진 입맞춤을 나눴다.

당황한 김기려의 입술 틈으로 공기방울이 빠져나와 수면 위로 올라갔는데, 강창호는 그것이 아까운지 김기려에게 더욱 밀착하여 숨을 받아갔다. 이어서 거추장스러운 옷을 뱀같은 손놀림으로 벗겨내고 김기려의 몸을 더듬었다.

김기려는 잠깐 안본사이 행동에 거침이 없어진 강창호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기나긴 입맞춤은 강창호가 산소 부족으로 물속에서 균형을 잡지 못해 김기려에게 매달리면서 끝났다.

김기려는 자신보다 체구가 크고 무거운 강창호를 수면까지 끌어올리는것이 버거웠지만 공기의 세상보다 수면 아래가 익숙했기에 어떻게든 해결했다.–만약 김기려가 수영에 익숙하지 않은 진짜 인간이였다면 강창호의 사인은 익사가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오래 물속에 있던건지 채신머리없게 거친 숨을 들이켜며 김기려에게 매달려 그의 뒷목에 찬 숨을 내뱉던 강창호는 돌연 소리내어 웃으며 물이 뚝뚝 떨어지는 김기려의 뒷통수와 목덜미에 도장찍듯 입술을 부볐다.

"역시 너는 물에 젖은게 잘 어울려."

기껏 살려놨더니 헤엄치는데 도움은 커녕 이상한 소리나 하며 방해만 하는 그가 귀찮아졌는지 그를 떼어내려 안간힘 쓰는 김기려에게 강창호는 아랑곳 않고 달라붙어 벗겨지다 만 옷가지들을 마저 처리해 수면 아래 떠다니게 두었다.

'미친놈...'

김기려는 뒤늦게 눈앞을 떠다니는 셔츠를 보고서야 자신의 행색을 확인할 생각이 들었는지, 안그래도 부족한 마나를 사용해 강창호를 밀어내고 눈동자를 굴려 수면 아래에 시선을 두었다가 강창호의 거대한 남성을 보게 되었다.

딱 붙는 재질이 아닌데도 수영복 겉으로 그 거대한 생식기의 윤곽이 그대로 보였다. 그것은 물밖에 있었다면 몰린 혈액의 무게를 못견디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지 못했을텐데 물속이라 중력의 영향을 덜 받아 자신의 위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모른척 하기 힘들 정도로 선명한 욕망 표출에 김기려는 순간 할말을 잃고 생각에 빠졌다.

'저건, 그러니까...지금 나와 관계를 하고싶다는 의사 표현인건가? 이렇게 갑자기?'

그 광경을 보고있자니, 김기려는 강창호가 이상한 인간임을 확신함과 동시에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지성체는 단순한 신경계를 가진,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생물보다 까다로워서 번식을 위해 원초적인 쾌락 중추가 발달되어있다.

알파우리에서도 그랬고, 지구 또한 그렇다.

다만 지능이란것이 고도로 발달하면 여러 이유로 스스로 쾌락을 마다하고 관계 자체를 포기하는 개체들이 생기는데, 그중 하나였던 사람으로서 이 상황은 정말 형용할 수 없는 감상이 들었다.

생명체의 정의 중 생식 가능여부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것을 생각하면 반쯤은 생물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알파우리인은 고향행성을 벗어나 처음으로 번식 행위–쾌락만이 목적이라도–를 몸으로 겪게 될 상황에 놓인것이다.

강창호가 관계 도중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상정하지 않았다. 그의 영혼은 이미 김기려의 손아귀에 있는것이나 다를바 없었으니까.

예상하고 있던 상황이라도 이렇게 앞당겨진 시기에 갑작스럽게 마주하니 조금 당혹스럽게 느껴졌지만 그 와중에도 뇌에서는 이성이 중심을 잡고 익숙하게 생각을 이어나갔다.

가령, 강창호에게 몸을 내주었을때 얻을 수 있는것들 말이다.

아직 차지하고 있는 몸에 대해서도 전부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이런 특수한 상황에 처했을때의 생체기작을 볼 수 있는건 꽤 나쁘지 않았다.

덤으로 강창호의 머리를 열지 않고서 심리상태를 유추 할 수 있는것도.

한 외계인의 영혼이 찰나에 여러 생각과 판단을 거쳐 다시 관찰자의 담담한 태도로 돌아오자 강창호는 전보다는 조심스럽게 김기려에게 다가와 그의 몸을 붙잡았다.

급하지 않게 메마른 그를 쓰다듬고, 어미의 품을 파고드는 어린 짐승처럼 그의 반응을 살피며 품에 얼굴을 묻고는, 쌉쌀한 살냄새에 본능처럼 혀를 대어 맛보았다.

"음..."

굳은살 박힌 커다란 손이 예민한 부위를 쓸고 지나가자 김기려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나왔고, 여전히 낮은 체온이지만 더 세차게 맥동하는 심장소리가 들렸다.

강창호는 김기려가 평소같으면 진작 밀어냈을 행동을 해도 얌전히 받아주자 좀 더 과감하게 움직였다.

"...!"

"요즘에 네가 계속 꿈에 나와."

커다란 손으로 김기려의 흉곽을 지나 골반께를 꽉 붙들고 뒤로 내빼지 못하게 한 강창호는 목줄기와 쇄골 사이 다정하게 입맞추다가 돌연 거세게 입질했다.

통각을 차단해둔 김기려의 감각에는 약간의 압박감이 느껴질 뿐이지만 보호막이 깎여나가는것을 감지하여 예민한 신경이 곤두섰다.

"처음에는,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강창호의 손이 김기려의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의 부드러운 살을 움켜쥐었다.

저절로 다리가 벌어지며 뒤로 넘어가려해 김기려는 손을 뻗어 강창호의 목에 손을 둘렀다.

강창호는 여전히 흥분으로 풀어진 동공을 하고서 눈앞에 있는 김기려의 모습에 꿈을 덧씌워 보았다.

"매일 밤 정체도 모를 괴물을 마주하고, 그 괴물이 숨어든 육체에게 삶을 구걸하기를 반복하는게 정상적인건 아니잖아."

–"아...!아윽..." 

김기려는 거름망 없이 뇌에 내리 꽂히는 이상야릇한 감각이 버거웠다. 원래 이런건가 넘어가려해도 이 감각이 계속되면 이성이 날아가버릴것 같아 섬찟했다.–

"으읏..."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강창호가 달래듯 목덜미에 가볍게 입술을 문지르다가 김기려의 입술을 장난스럽게 깨물었다.

그는 자연스레 벌어진 입술에 혀를 넣고 힘없이 말랑한 김기려의 혀를 감아올려 김기려가 아래의 사정에서 눈돌리게 만들었다.

김기려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을 삼키며 헐떡이는 와중에–

"내가 정말 그 괴물을 두려워하고, 기피하고싶어 했던것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어."

–낮은 체온을 가진 김기려는 몸이 시키는대로 따뜻한 강창호에게 더 가까이 달라붙었다.

"어쩌면 나는 너를 마주한 순간부터..."

강창호는 말을 멈추고 김기려를 내려다보았다.

꿈에서 그는 하나의 인격체와 마주한것이 아닌,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현상에 휘말린 느낌을 받았다.

불변하는 진리. 감히 항거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끔찍하고 아름다운 죽음의 형상에게 내던져져 영혼과 자아의 중심부터 바뀌어 버린건지도 모른다.

좀처럼 간단히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일수록 간절히 원하는것처럼, 강창호는 피할 수 없는 재난과도 같은 김기려를 원했다. 그의 몸과, 마음과, 영혼 모두를 가지고 싶었다.

그가 김기려에게 몰두한 만큼, 

김기려 또한 그를...

강창호는 문득 산산이 부서진 유리잔처럼 김기려를 만나기 전의 자신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이미 그에게 종속되었다. 

.

.

.

마침내 – 무자비했던 성행위와 대비되는 부드럽고 다정한 입맞춤이 김기려에게 쏟아졌다.

김기려는 거의 시체나 다를바 없는 상태가 되어 날선 눈으로 강창호가 하는짓을 지켜볼 뿐이였다.

"김기려."

"..."

"화났어?"

강창호는 답변이 없는 그를 조심히 추슬러 끌어안았다.

김기려는 장시간 다리를 벌리고 있던 탓에 고관절이 삐걱대는걸 느끼며 – 강창호에게 알파우리식 쌍욕을 내뱉었다.

언어란 참 신기해서 외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자신을 욕하는것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강창호는 처음 듣는 외계의 언어였지만 김기려가 지금 거칠게 자신을 인신공격 중인것은 알 수 있었다.

창백한 안색으로 외계의 비속어를 남발하는 김기려를 품안에 둔 강창호는 속을 들끓게 만들던 불길이 사그라드는것을 느끼며 자신을 모욕하려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 입술에 가볍게 입맞췄다.

기분이 좋은듯 송곳니가 보일정도로 호선을 그린 입매가 시원스러웠다. 강창호가 말했다.

"김기려. 네가 무엇이든, 기왕 인간으로 살게 되었으니 서로에게 좋은 선택을 하는게 어때?"

"...?"

"나는 너에게 인간 사이에 벌어지는 모든 경험을 제공하지. 육체와 정신적인 모든것들, 모든 행위와 교류를 함께하는거야."

"..."

"너는 평범한 존재가 아니니 여지껏 대외활동에 크고 작은 문제를 느껴왔을거라고 생각하는데...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

김기려는 여전히 몸에 힘을 풀고 늘어진 채 강창호의 심장 박동을 듣고있었다.

강창호는 본인이 굉장한 선의를 베풀기라도 한듯 의뭉떨고 있지만 김기려의 눈에는 그가 진심을 숨기고 있는것이 보였다.

김기려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조용히 읊조렸다.

"네 알량한 자존심 세우기를 내가 들어줄 이유가 있을거라 생각해? 좀 솔직해져봐. 이제 몸도 섞은 사이인데 뭐 이렇게 숨기는게 많아..."

김기려가 말을 끝내는 순간 강창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강창호는 잠깐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음."하고 목을 가다듬은 후에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 솔직하게..."

"..."

"김기려. 날 사랑해보는건 어때?"

김기려는 강창호에게 기댄채로 규칙적이고 강하게 혈액을 밀어내는 심장박동을 느끼다가, 고개를 들어 강창호의 눈을 들여다봤다. 몸을 타고 흐르는 마나를 보았고 표정근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저것이 강창호의 진심이였다.

김기려는 생각했다.

지성체가 범할 수 있는 최대의 오만은 무엇인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다. 

거기에는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 강하게 내재되어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 있는 특별한 존재라 생각한다. 

자신만은 특별히 평가될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믿는 차별주의자다.

강창호는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가장 후회하던 시절의, 내가 가장 증오하는 나를 닮았다.

악인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들의 공통점이란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출중한 능력에대한 자부심과 남들보다 내가 낫다는 자기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렇다.

김기려는 모든 진실을 파악하고 강창호에게 몸을 부딪치면서 그칠 줄 모르고 웃어댔다.

강창호와 만나게 되어 한동안 신경전을 벌인 일부터, 지금 이 순간 까지의 일을 떠올리니 참을 수 없이 우습고 강창호의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오만한 자아를 가진 남자가 하필이면 본인보다 더한 외계의 영혼을 만나게 되었으니...

김기려는 강창호의 진심에 영원히 대답하지 않기로했다.

이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지레짐작하여 괜히 고생시킨 벌이다.

강창호같은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지겹도록 잘 알고있으니 앞으로의 일상에 지루함은 없을듯 했다.

김기려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강창호에게 입을 맞췄다.

강창호는 예상치 못한 그의 웃음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서 뇌리에 새기듯 모두 지켜보다가, 가까워지는 김기려의 얼굴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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