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나의 길티 플레져
폭군/집착남 코드를 왜 싫어하는지 쓰려고 생각하다 보니 이 두 코드를 분리해서 얘기해야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미묘하게 다른 이야기이도 하고... 길티 플레져가 그럼 무엇인지 이러한 길티 플레져가 왜 먹히는지, 특정 길티 플래져 속성이 있는 코드를 어린 친구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왜 위험한지는 알아두면 좋으니 읽는 사람의 상황에 맞춰 적당한 무게로 받아들이길 미리 권해두는 바이다.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 이 단어를 확 와닿게 번역하라면 요즘 말로 빻타지가 딱일 거다. 하지만 길티 플레져 자체가 빻타지란 말로 대체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도 않고, 빻았다는 단순한 어휘로 이 말이 사용되는 상황 안에 내재되어있는 문제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그럼 먼저 사람들이 왜 길티 플래져를 가지게 되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볼까 한다.
A라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A는 여성이고 섹스 중 더티 토크에 대한 성적 환상이 있다. 이 더티 토크의 방향성이 자신을 폄하당하는 쪽이기 때문에 A는 자신의 판타지를 누구에게도 오픈하지 않기로 한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여성들은 대개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선 안 된다고 사회적 압력이 강하게 가해진 상태로 성장한다.
A가 뭘 알든 모르든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오픈한다면 이 말을 '날 강간해주세요'라 받아들인 성범죄자 예비군이 부나방처럼 달려드는 꼴을 보게 될 거다. 만약 A가 미성년자에다가 뭘 몰라서 그런 행동을 했더라도 이런 일이 있었단 걸 다양한 연령대의 같은 여성에게 하소연한다면 대부분의 여성들은 기존 사회 압력에 익숙해져있기에 A는 지겨울 정도로 '네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됐다'는 요지의 설교를 듣게 될 거다.
여기서 잠시 천천히 생각해보자. B라는 어떤 남성이 자신은 섹스 중에 목이 졸리는데에 환상이 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봐라. 남성들은 곧바로 음담패설로 넘어가던지 끽해야 사내새끼가 어쩌고 타령이겠지만 여성들의 경우 '뭐지 이 미친 새끼는?'이 기본일 거고 최대한 무덤덤하게 넘어가려고 해도 '왜 묻지도 않은 걸 말하는 거고 대체 어쩌라는 걸까...'가 평범한 반응일 거다. 이 B가 미성년자라고 해도 여성들에게 더해질 반응이라면 '아직 어린 친구가 잘 몰라서 한 얘기 같지만 그런 얘기 함부로 하면 성희롱이 되는 거에요' 정도다.
고작 성별 하나로 이렇게까지 사람들의 반응이 달라지는 게 현실이다. 애초에 A가 들어야했을 말은 네가 그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가 아니라 '아무리 네가 그런 얘기를 했다고 해서 애한테 껄떡대는 미친 놈이 있단 말야? 신고하자'여야 하지 않은가? A와 B의 차이는 성별 밖에 없지 않은가. 여성이, 특히 미성년자인 여성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될 확률이 높으니 주변을 잘 경계하는 방법을 배워야한다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잠재적 피해자로써 성범죄의 여지나 빌미를 주지 말라는 식의 발언엔 동의할 수 없다.
문명사회에서 교육받고 자란 멀쩡한 사고관의 성인이라면 상대가 어려 속아넘기기 쉽거나 혹은 육체적으로 제압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쉬이 기만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이런 기만적 행위를 하는 게 결국 성범죄자다.
성범죄는 성욕과는 전혀 무관한 폭력/권력에 의한 범죄에 불과하다. 뭐 이게 다 성욕 탓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상식 삼아 덧붙이자면 여성은 온 몸을 가리고 다니는 부르카를 쓰고 다니는 국가에서도 성범죄는 존재하며 그 동네 성범죄자들은 자신의 성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여성이 음란한 방식으로 걸었다고 주장한다. 요즘엔 시대가 조금 변한만큼 레퍼토리가 추가돼서 '음란하게 몸의 라인이 보이는 옷을 입었다, 음란하게 바지를 입었다, 음란하게 히잡을 안 썼다'도 있다. 이쯤 되면 알겠지만 성욕 핑계는 그냥 전세계에 통용되는 변명이다. '쟤는 그래도 되는 음란한 여자야'라는 말로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부정하는 변명. 성범죄자가 성범죄를 저지른 이유는 성범죄를 저질러도 자신은 괜찮을 것 같아서 저질렀을 뿐이지 다른 이유가 없다.
그럼 이 질문을 해야한다. 왜 유독 남성들에게서 이런 성범죄자와 성범죄자 예비군의 비율이 높은가? 그야 당연히 여성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건 압박 받는 사회지만(서구권, 특히 미국에선 '주체적 섹시'가 강요된다는 백래시 문제도 있는데 여하튼) 남성이 성적 욕망을 드러내는 건 과도하게 긍정하는 사회기 때문이다.
자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얘기고 실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현실이 거지 같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굴절시킨다. 이런 굴절된 성적 욕망 덕에 흥한 장르가 바로 BL이고... 로맨스와 로판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길티 플레져 또한 그 영향이다.
하지만 길티 플레져란 말 자체에 포함되어있는 그 죄책감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따진다면 이 욕망의 범위가 조금 더 포괄적이다. 길티 플레져에는 성적 욕망만이 아닌 일탈이나 비도덕적 행위나 폭력과 권력을 탐하는 양상 등을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로판에서 남주가 폭군인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의 길티 플레져가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권력을 양껏 휘두르지만 그래도 비난받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발현이고 이러한 길티 플레져를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그런 권력자가 정말로 있다면 보통은 모가지가 화끈하게 날아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로판에서는 하녀가 귀족인 주인공을 푸대접했다는 이유(아동학대 가담은 조금 틀린 얘기니까 논외로 두겠다. 학대당한 아동이 자신의 학대자에게 복수하거나 사망을 꿈꾸는 것 자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로 주인공이 모멸적인 언행을 일삼으며 자신의 신분으로 내리찍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이 신분제를 은연중 옹호하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게 되는데 이를 '어떠한 명확한 이유 없이 자신이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확인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이 장면 자체는 주인공이 마냥 착하다 못해 호구라 현대인도 아닌데 신분제를 무시하고 산다는 비판 때문에 이런 식으로 변형되었는데... 그렇다고 이런 장면에서 사람들이 길티 플레져를 느끼지 못한단 건 아니다. 오히려 길티 플레져 때문에 이 장면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이런 대놓고 좋아하기 힘든 미묘한 욕망을 시원스레 긁어주니 길티 플레져가 안 팔릴 리 없지 않은가. 길티 플레져가 아예 없는 사람은 아마 세상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럼 이쯤에서 어떤 길티 플레져가 위험하다고 하는지 얘기해보자.
이런 말은 좀 웃기지만 길티 플레져가 그렇게 위험하다거나 대단히 유해하다고 보진 않는다. 물론 개인적으론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을 때면 거북해서 으... 하게 되긴 하지만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기 위해 발현된 것도 있고 이런 점이 문제라고 지적해도 길티 플레져를 추구하지 않게 될 거라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하지도 않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길티 플레져 코드가 대놓고 심어져있는 소설이라 해도 그게 19금만 제대로 달려있으면 별 신경 안 쓴다. 그런 길티 플레져를 즐기고 싶단 목적이 뚜렷해서 사겠다는데 그게 뭐 어떻다고. 하지만 로맨스 장르는 물론 로맨스 판타지에도 깊숙이 침투되어있는 어떤 길티 플레져들은 분명히 위험하다.
이쯤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풀어놓을까 한다. 지금은 완전히 범죄로 인식된 리벤지 포르노(으! 이 네이밍 자체도 싫다. 성적 촬영물 유포 범죄가 제일 적합한 명칭이라고 본다.)가 서서히 문제시되기도 전의 예전 얘기다.
그즈음에도 나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페미니즘 의제나 발언을 대놓고 하던 사람이었다. 친구의 애인이 하는 언행을 보고 친구에게 '쟤랑 꼭 사귀어야겠어? 널 별로 소중히 대하는 것 같지 않아'라고 말하게 되면 꼭 나중엔 그 놈이 데이트 폭력(그땐 이런 인식도 없어서 직역해서 설명하고 다녔다 젠장...)을 휘둘렀기 때문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네가 괜찮다는 남자라면 사귈만 하다며 연애상담을 해왔고 그러다 어느날 Z가 상담해왔다.
당시 Z는 장거리 연애 중인데 자신이 지금 연애다운 연애를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결론은 이거였다. 사귀고 있다는 놈이 장거리 연애 때문에 섹스를 자주 못하니까 자신이 자위하고 있는 모습을 촬영해 보내달라고 했단 거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가 띵했다. 나는 Z에게 그래서 영상을 보내줬는지를 물었고 Z는 이미 보냈다고 했다. Z에게 왜 그걸 보내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지를 물었더니 남자는 성욕을 자제 못한다던데 어쩌고로 시작했지만 요는 미디어와 소설에서 그게 한번쯤은 해보는 일탈인 것처럼 묘사하던데 다들 장거리 연애하면 한번쯤은 하지 않냐고 되물어왔다.
차라리 그 자리에서 내 머리를 깨고 싶었다. 이런 종류의 영상이 어떤 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아는 입장에선 멘탈을 다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Z에게 그러한 영상이 어떤 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를 지나치게 상세히 설명할 수도 없어서 '너 그거 걔가 악용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를 나름 순화해서 말해줘도 Z는 '오빠는 그럴 사람 아니야'로 일관했다. 하지만 사실 다들 알고 있지 않는가. 이런 얘기를 타인에게 했다는 거 자체가 은연 중에 무언가 잘못 됐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지만 그냥 인정하기가 싫을 뿐인 거다.
2시간 정도를 거쳐 설득한 끝에 Z에게 사태의 위험성을 인지시키는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후 Z는 내가 알려준 대처법을 단 하나도 따르지도 않았고 사귀고 있다는 놈에게 비밀로 하고 행동하라던 당부조차도 지키지 않았다. Z는 오빠가 지웠대 이제 괜찮아 라고 내게 말했지만 얼마 안 돼서 누구도 Z와 더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렇지만 인터넷의 특성상 한번 업로드된 영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성범죄 피해를 주변에 알리면 가해자가 가장 흔하게 하는 짓이 피해자를 고립시키는 거다. 피해자가 주변에 도움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제 뜻대로 움직이기 더 쉬워지니까. 일단 고립시키고 나면 범죄를 계속해서 저지르기 쉽단 이유만으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해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게 고립되고 만, 많은 리벤지 포르노의 피해자들이 자살했다. 나는 차라리 Z가 사회적으로 재출발하기 위해 기존의 모든 인연을 끊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럴 가능성이 아주 낮은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 길티 플레져는 우리의 일상 도처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길티 플레져는 너무도 위험하다. A 예시처럼 언어적 모욕을 당하거나 B 예시처럼 목이 졸리거나 얻어 맞거나 조련 당하거나 자신의 신체 부위를 노출 시킴으로써 관음적 갈망을 채우거나 강간 판타지 같이 포르노에서 자주 써먹는 그런 소재와 구도들 말이다.
인터넷이 발달하기도 전부터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며 자란다. 그러니 포르노에 내재되어있는 문제에 둔감한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하지만 포르노에서 묘사되는 여성의 쾌락이 가짜인 걸 반드시 인지해둬야만 한다.
포르노 산업은 전적으로 남성들만의 판타지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을 물화하는데 망설임 없으며 포르노 화면 안에서 좋다고 하는 여성들은 포르노를 보고 있을 남성의 부질 없는 흔적기관이나 다름 없는 성적 자신감을 채워주기 위해 정해진 대사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포르노 산업이 그리 되어있는 이유는 남성들의 자본 위에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고 인신매매와도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기 때문이다.
로맨스나 로판에서 조금 더 안전하게 성적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기대를 채울 여지를 없애라는 게 절대 아니다. 그저 단 하나, 19금 달고 '이건 그런 목적'이란 티를 내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지만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연령대의 독자가 볼 수 있는 수위로 소설을 낸다면 모두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사랑하는 소설에 내재되어있는 길티 플레져가 지나치게 여성에게 폭력적이지 않은지는 한번쯤은 생각해볼 시대가 되어버렸다.
무언가 한번 실수를 하면 그 흔적이 영원히 일상과 떼놓을 수 없는 공간에 기록이 남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어른들의 조금은 음습한 욕망을 너무 밝은 곳에서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는 건 아닌지 때때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사족 1. 자신의 몸을 탐구해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건 이상한 생각이 아니다. 특히 사춘기라면 변한 자신의 몸을 만지며 거울로 보거나 사진을 찍는다거나 영상을 찍어보는 것 자체는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범죄자들은 노리고 수작질을 거니까 자신의 안전을 위해 저장하지도 어딘가에 업로드 하지도 말고 반드시 완벽하게 지워버려라. 생각보다 인터넷은 좁은 공간이라 몇 가지 단서만으로 어디 사는 누구인지 추적할 수 있고 또 작정하고 속이려드는 사람에게 속지 않는 방법은 없다. 제발 뭐가 됐든 할 거면 안전하게 하자.
사족 2.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이 너무 과대망상 아니냐고 어떤 사람은 비웃을 걸 알고 있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야말로 현실을 모르니 할 수 있는 소리라고 보는데, 뉴스에서 나오는 학생들의 성폭력 사건들은 그나마 폭력의 정도가 심해서 방송되는 거지 그보다 규모가 조금만 작은 경우면 피해자나 가해자가 자살로 끝나는 일이 절대 드물지도 않고 학생과 부모가 공론화하길 원하지 않는 경우엔 완벽하게 조용히 묻힌다. 이미 우린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아이들을 완벽히 통제할 방법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음을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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