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엔 본디 근본이 없다
여느 때처럼 원론적인 얘기로 시작해볼까 한다. 장르를 명확히 정의내린다는 건 기실 불가능한 일이다.
판타지라고 하면 기본적으로 용과 엘프, 난쟁이, 오크 이러한 이종족들이 나오고 마법을 쓰는 세계관 정도로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하지만 용과 엘프, 난쟁이, 오크 같이 널리 알려진 이종족들의 기반 신화가 켈트 신화라고 해서 켈트 신화가 들어가야만 판타지로 분류되던가? 아니다. 가장 메이져한 그리스로마신화를 비롯해 나가나 레콘처럼 동남아 기반의 신화가 섞여들어가도 판타지로 분류된다. 그럼 신화 기반이어야만 판타지인가? 신화와 무관하게 게임 시스템 같이 마법의 분류로 볼 수 있는지조차 애매해도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가 섞여들어가면 그것만으로도 판타지로 분류한다. 그렇지 않다면 게임판타지나 현대판타지 등은 장르로 성립할 수 없지 않은가.
이렇듯 사실 장르의 범주는 따지고 보면 굉장히 넓다. 요즘 잘 나가는 SF만 하더라도 SF의 정의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상당히 포괄적인 대답이 나올 거다. 뭐 이런 장르의 특성상 적통이니 순혈이니 따지는 건 별로 의미도 없거니와 이 장르와 저 장르가 섞이며 발달해나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발달과정에 있어 그간 로맨스와 로판은 예외였다. 로맨스는 여성들이 향유하는 장르란 이유로 폄하되어온 세월이 너무도 길다보니 여파로 다른 장르와의 영향에 배타적인 경향성이 있다. 로판은 애초에 장르가 생긴 이유가 폭력이었고 그 이후의 흐름을 지켜보면 로맨스와 유사한 길을 걷다 최근에야 조금씩 다른 장르와의 영향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헌터물, 오메가버스/가이드버스와의 혼합에 긍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러한 흐름 때문인데 물론 기대대로 금방 발달하지는 못하다 보니 지난 연재작들을 돌이켜보면 과도기적인 성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예를 들어... 무협을 믹스한다고 나온 작품들을 읽어보니 내용은 기존 로판의 스토리 라인에서 발달한 점이 전혀 없다거나 무협에 대한 장르 이해도가 밑바닥이라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 왜 이런 경향성이 문제인지 짚고 넘어가자.
장르를 두 가지 섞을 때 작가는 어느 쪽을 좀 더 살릴지 고민하기 마련이다. 특히 판매량을 생각하게 된다면 너무 새로우면 기존 독자들이 못 먹는 게 아닌가, 하고 자기의심의 늪에 빠지곤 한다. 그래서 로판 작가들이 이런 장르간의 혼합을 이룬 작품을 쓸 때 새로운 맛을 보다 과감하게 섞는 걸 주저하게 된다. 그렇게 '안전한 판매'를 노린 결과물이 그래서 새로운가? 아니다. 무협을 섞어서 나왔던 소설들이 특히 실망스러웠는데 그냥 껍데기만 서양풍에서 동양풍으로 갈아끼운 기존의 로판에 불과했다. 이러한 작가의 선택이 어디에서 기인했느냐를 따진다면 로맨스에서 유난히 두드러지는 보수적 성향이기 때문이다.
로판의 독자 주요 연령층은 분명히 로맨스보다는 낮고, 거기다 기존 독자들보다 취향의 폭이 넓다. 괜히 판타지나 무협에 있어 요즘 여성들의 구매력이 확인 되니 시험적이기까지 한 작품을 내는 줄 아는가? 팔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니 그렇게 나오는 거다. 현대 판타지도 더는 금녀의 영역이 아니며 여성 주인공 작품의 매출이 나쁘지도 않았다. 이게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기존대로라면 로판 섹션에 있었을 여성 주인공 작품들이 이제는 다른 장르로 빠져나가게 될 거다.
작가들에게도 이쪽이 더 마음 편한 얘기긴 하다. 몇 화 연재하다보면 주구장창 달리는 '남주 언제 나와요?', '아냐 여주를 사랑하게 될 거야ㅎ' 같은 코멘터리를 참아줄 필요 없이 하고 싶은 스토리 진행을 펼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이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본다. 분류 폭력으로 나뉜 장르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게 나쁠 건 없다. 다만 그렇게 되고 나서 로판이라는 장르는 어떻게 남게 될 지를 생각해보라.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불쾌한 방식으로 발현된 로맨스의 하위 장르'라는 딱지가 안 붙을 리가 없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특정 장르에서 기대할 수 있는 대리만족의 양상이 한 가지로만 뚜렷해지면 그 장르는 자연스레 쇠퇴기를 겪는다. 새로운 걸 원하는 독자는 그 장르를 떠나서 더는 목소리를 내지 않고 기존 독자는 안전한 대리만족을 당연스레 요구한다. 그렇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변화가 사라지고 매출이 반토막나버리는 상황이 오게 되는데... 이런 상황이 대여점 시절에도 있었다.
지금 그 시절이 다시 온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업계에서 그 예시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바로 게임업계다. 한때 잘 나갔던 국내 게임 업체들이 지금은 다 중국 게임 업체들에게 밀려나있다. 거지 같은 가챠로 단기 매출만 땡기고 스토리나 캐릭터 빌딩 같은 기본적인 걸 신경 안 쓰니 누가 그 게임에 애정을 갖겠는가. '예전엔 게임을 즐겼지만 지금은 안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서 기인한다. 이 말인 즉, 전반적인 경향성에 실망한 향유층은 더는 매출을 내주지 않고 다른 즐길 무언가를 찾아간다. 세상에 즐길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하나에만 매달릴 이유는 없으니 말이다.
애정이야말로 업계가 굴러갈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괜히 요즘 할리우드가 트랜스포머, 해리 포터, DC, 마블 무비들을 찍어낸 게 아니다. 90~00년대까지는 미국의 호황기였고 넘치는 자본이 있으니 시험적인 작품도 얼마든지 시도할 수 있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의 여파로 대규모 투자가 위축된 영향이 영화 업계에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거다. 트랜스포머, DC, 마블(지 아이 조도 포함해서)은 모두 미국인들이 어릴 때 보던 만화영화의 소생이고 해리 포터는 전세계적인 히트 소설이었으니 투자 받기도 쉬웠다. 그런 의미에서 전독시의 영화화는... 그간 한국 영화계에서 소설을 영화화했을 때의 흑역사를 생각해보면 개인적으로는 그저 두렵기만 하다.
결국 모든 투자는 팔릴 거라는 기대에 기반해 이뤄지고 그 기대를 가장 쉽게 입증하는 건 팬의 애정이다. 일본도 이 케이스다. 왜 그렇게 재미도 기술도 없는 실사화 영화를 찍어대나 싶겠지만 일본 만화/소설 작품들의 2차 판권은 생각보다 매우 싸고 어쨌든 개발새발이라도 만들어놓으면 팬들이 영화관에 가서 보니 투자금 회수는 된다. 투자자 입장에선 너무도 안전하지 않은가. 그래서 일본 영화계가 작품성은 물론 상업성이 지지리도 없는 거다.
새로운 시도가 없어진 로판이 바로 이런 꼴이 될 거다. 자기복제로 열화하다 못해 쉰내가 나는 지겨운 장르,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 볼 가치가 없는 장르로 말이다. 로판에 몰려있던 구매력이 다 다른 장르로 흩어지고 난 다음에 어떤 방식으로 로판에 끌어올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천재 작가가 나타나 획기적인 작품을 써내는 천운이 터지지라도 않으면 방법이 없다. 작가와 마찬가지로 독자 또한 '안전하게'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하는 건 마찬가지 아니던가.
간단하게 줄이라면 요는 이거다. 너무 안전만을 찾다가는 장르의 가능성 자체를 죽여버리니 작가면 작가답게 적당히 모험도 해보자. 어차피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파악할 수 없고 어떤 작품이 터지는지는 반쯤 운이다. 히트 치고 난 다음에 이 작품의 이러한 요인이 원인이라고 비평가가 말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래서 해당 요인을 카피한다한들 히트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괜히 대중예술도 예술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여기부터는 로판에서 간간이 보이는 타 장르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얘기해보자.
위에서 무협 얘기를 했으니 우선 무협부터 다뤄보자면... 무협의 세계관이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건 그 장르 안에서 역사로 구성된 세계관 때문이다. 정파와 사파가 서로 겨루고 무슨 도파의 내공을 오래 쌓으면 자연스레 붙는 부가설정 말이다. 이 안에서 어떤 식으로 사건을 만들지는 작가의 자유고 바로 그 부분이 흥미를 유발하는 포인트인데 기존 장르 내에서 나름 머리 끄댕이 잡아가며 싸워서 성립한 설정을 무시하는 건 그 장르를 사랑하는 사람에겐 싸움 거는 거나 다름 없다.
무협 장르 안에서 여자는 무공을 안 익힌다? 헛소리다. 이걸 무협 올드팬에게 말하면 눈이 뒤집혀서 화를 낼 거다. 무협이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워낙 즐기던 장르다 보니 미소지니가 그득한 건 사실이지만 여자라고 무공을 안 익힌다는 설정은 없다. 아마 그간 많은 소설들이 쏟아져나왔으니 찾아보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절대 메이져 성향이 아니고 그런 작품이 히트를 치지도 못 했다.
BL을 로판에 섞을 때도 주의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BL은 남자끼리 섹스하니까 BL인 거고 굴절욕망의 여파로 BL의 캐릭터 빌딩이 굉장히 폭력적인 걸 숨기지 않는다. 괜히 BL 작가들이 '이 소설은 비윤리적으로 나갈 겁니다. 괜찮은 사람만 먹으세요. 현실에서 그러는 거 아니얏!'하고 친절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이유는 어쨌든 여성혐오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기도 하다. 그렇게 내부에서 싸워가며 성립된 게 '광공'의 캐릭터성이고 이 놈은 미친 놈입니다, 비윤리적입니다, 따져보면 범죄자니까 소설에서만 좋아하자! 로 박아놨는데 로판에서 이 광공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 결국 집착남에 불과하다. 결국 잘 따져보면 그럴 듯 해보이는 단어가 자기네들 맘에 드니 자신들이 가져가 멋대로 오용해대는 언어오염인 거다. BL 팬들이 불쾌해하는 건 당연하니 정말로 하지 말자.
개인적으로 이 믹스를 유난히 불쾌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덧붙이자면... 어쨌든 남성 캐릭터들로 자신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르라지만 그렇다고 BL에 여성이 있다고 여성과 섹스하는 게 당연하지도 않은 마당에 로판에서 이걸 마음대로 비틀어서 분명 동성애자였을 캐릭터가 여성과 눈 맞아서 불 같은 사랑을 한다는 건...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도 없고 존중해줄 마음도 없어보여서 더 불쾌하다. 사람들이 잘 모르니 막 지르는 건 너무나 잘 봐왔지만 써먹을 거면 최소한의 공부를 하고 쓰자 좀. 좋게 말해서 없어보인다.
오메가버스/가이드버스도 마찬가지다. 이 두 장르가 팬덤 문화에서 시작했다 해도 1차 소설에 넣을 때는 굳이 2차에서 사용하던 방법을 그대로 써야할 필요는 전혀 없다. 알파와 오메가만 섹스해야하는 거 아니다... 예술계에서 절대 떼어놓을 수 없는 주제, 사랑에 대해 묘사하고 싶다면 한쪽 캐릭터를 베타 설정으로 두는 게 훨씬 낫다. 그렇게 만들어놔도 어쨌든 외관은 이성애 연인의 모습이니까 거부감을 낮출 수 있는데까지 낮춘 거다. 애초에 이 장르의 설정을 변형하는데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은 그저 포비아니 적당히 무시해도 된다. 나는 포르노로 이 설정들을 쓰고 싶다! 면 굳이 말을 더 않겠다. 19금만 잘 달자.
그리고 나는 가이드버스 자체엔 관심 있지만 가이드버스의 원작 드라마 센티넬이 너무 올드해서 못 보겠다면 이거만 염두에 두자. 꼭 폭주 막기 위해 섹스 안 해도 된다. 이 세계관 설정도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는데 포르노 성격만 기대하며 에스퍼와 가이드의 섹스씬을 넣을 필요는 없다. 솔직히 당장이 급한데 섹스씬으로 어영부영 넘어가는 걸 좋아하는 독자는 생각보다 별로 없다. 모험물을 좋아하는 독자층은 스토리가 긴박한데 섹스를 하면 '너네 장난해? 상황이 이런데 섹스가 하고 싶어?'하고 싫어하고 스토리 전개상 자연스러운 섹스씬도 전개가 궁금하기 때문에 대충 넘어가버린다.
자주 착각하는 거 같은데... 야하게 쓰면 무조건 잘 팔린다는 건 절대 아니다. 포르노 성격이 뚜렷한 소설은 포르노를 원하는 독자층이 일단 사니까 최소한의 생계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얘기지 포르노 성격이 뚜렷한 소설이 대중적으로 크게 히트치는 일은 이제껏 없었다.
영미권에서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들고 오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는.... 솔직히 말해 많이 약하다. 많이 약해서 오히려 히트치는데 장애물이 되지 않은 쪽이지... 절대 야하니까 대히트! 는 아니다....... '상수리나무 아래' 작품이 포르노 성격이 강한데도 히트친 건 사실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 포르노적인 성격 때문에 영화화는 무리인데다가 어린 팬층을 확보하는 건 불가능하다. 세월이 흘러 관짝에 들어갔던 작품이 예토전생하려면 어릴 때 그 작품을 향유하던 팬들이 어른이 되어 추억팔이 하는 수밖에 없는데 포르노 성격의 작품은 이게 아예 불가능하다.
아무리 지금 당장 돈을 많이 쓰는 독자층이 성인 연령대라 해서 굳이 미성년자인 독자층을 배제할 필요는 없다. 자꾸 까먹는 거 같은데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누리고자 하는 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아무리 웹소설이 펄프 픽션에 가깝다 하더라도 펄프 픽션에서 멈춰야할 이유는 없다. 폭력이 자극적이고 재밌긴 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킨다면 오히려 활자기 때문에 더 건전한 방식으로 오래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될 수 있단 말이기도 하다. 그러니 장르의 소설들이 더 다양한 시도를 하고 더 다채로운 스토리 라인을 확보해가며 더 안전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쪽으로 발전해나가길 바란다.
사족 1. 월초가 되어 포스트를 하려고 와보니 유입이 훌쩍 늘어 제법 놀랐고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바이다. 운행은 통상운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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