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전야
서투른 기념일
꿈벅, 눈을 감았다 뜨며 허공을 쳐다본지 몇십분. 애머디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툭툭.. 투둑.. 의미없는 소음을 내도 해결되는 것은 없고 시간만이 무의미하게 흘러갔다. 곤란한데... 그는 자신의 무신경함에 한탄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정을 체크하기 위해 달력을 들여다보던 애머디는 별 생각없이 팔락팔락 지나간 일정들을 되새겨보던 중 유일하게 별표로 체크한 날짜를 눈에 담았다. 다른 날들은 빼곡하게 글자를 써놓던가 밑줄을 긋는 정도로 해두었는데도 그럴수밖에 없던 날.
다름이 아닌 일라이저를 데리러간 날이었다. 다시 떠올려봐도 온갖 스케쥴을 미루고 당겨서 닥치는대로 해낸뒤에야 그럴수 있었다는 사실이 꽤 뼈아팠지만. 그 이후로는 딱히 스케쥴이 크게 틀어진 적은 없었다. 그만큼 중요한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테니까.
아니,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은은하게 추억에 잠겨 회상을 마치고 나면 다시금 현재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벌써 이렇게 시간이 지났던가. 감회가 새롭군. 그러다가 문득 날짜를 세어봤다. 그로부터 세달은 족히 지났나.
" 세달...? "
그제서야 문득 애머디는 불길한 촉을 느꼈다. 그렇게 많은 날을 지내면서 단 한순간도 떠올리지 않았다니. 물론 경험이 있어야 이런걸 떠올릴수가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는 충분히 서운할만 한 일이지 않나.
보통의 연인들은 온갖 기념일에 명분을 빌려 선물을 나누고 특별한 날을 기념하곤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의미를 갖는날은 다름이 아닌 만남을 시작한 날, 그리고 그뒤로도 변치않고 쭉 사랑한 시간들을 기념하는 것이겠지. 그래, 100일 기념일 같은...
애머디가 이 사실을 알아챈날은 기구하게도 100일 전이었다. 그것도 평소보다 일이 밀려 늦게 퇴근을 하던 날. 사무실에서 퇴근 준비를 마친 직후에 말이다. 다행히 퇴근은 늦을거라 미리 문자 해뒀지만 그래도 가장 큰 문제는 여전했다.
' 당장 내일이 기념일인데 아무런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
애머디가 쭉 허공을 보며 퇴근하지 못한 이유였다. 흔하고 진부한 방법이라면 지금이라도 열고있는 꽃집에 들러 몇송이를 사던가 백화점에 들러 한잔 걸치기 좋은 와인을 사가는것도 방법이겠지만 이건 영 내키질 않았다.
다소 성의없는 방법으로 기념일을 챙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살면서 할 일은 절대 없으리라 생각한 첫 연애. 그렇기에 겪어본적도 생각할 일도 없었던 새로운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갖은 방법들을 떠올려 봐도 기발하게 이 날을 기념할만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 그저 길고 긴 한숨이 사무실을 가득 메울 뿐이었다.
이젠 더 미룰수가 없다.
아무리 늦는다곤 해도 서너시간을 예상했을 테니 일라이저를 오래 기다리게 만들순 없다. 착잡한 기분을 떠안으며 겉옷을 대충 걸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일라이저의 차에 몸을 싣고 운전을 시작하면 다시금 각오를 굳힌다.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수단은 하나 뿐이었다.
꽤 한산한 도로를 달려 집에 무사히 도착해 초인종을 누르고 기다렸다. 이윽고 철컥 반가운 얼굴과 함께 환한낯으로 기다리던 반려가 맞이하러 나와주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저녁은 드시고 오셨나요? 애머디가 어쩐지 어색한 낯으로 뜸을 들이고 있으니 웃음짓던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 선배님? "
" 그게... "
집안에 들어서서도 뒷짐을 쥐던 그가 조심히 오른손을 눈앞에 내밀었다. 손안에 들린것은 노란 프리지아 한송이였다. 비닐포장에 쌓여있는 것이 방금 사온느낌이 확연했다.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던 일라이저가 뒤늦게 웃음을 터트렸다.
안하던 일을 하시느라 그렇게 굳어계셨던 거에요? 꽃을 받아들며 그의 웃음소리가 줄어들 쯤에야 고개를 마주한 애머디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 그것도 있지만, 사실은 내일 네게 뭘 해주어야 좋을지... 계획해둔 것이 없다. "
" 아, 100일 말씀이시군요. 선배님은 그런건 신경쓰지 않으실줄 알았는데요. "
" 너는... 알고 있었나? "
" 곧 100일이라는건 몇주 전부터 알고 있었죠. "
대답을 들은 애머디의 낯이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러니까 당연하게도 이런걸 신경쓰지 않으리란 것까지 파악당한 것이 꽤나 부끄럽다. 손에 식은땀이 찬 것도 같았다. 알아채는게 너무 늦었다던가, 차라리 일찍 알려주지 그랬냐는 말을 하기에는 그 말조차 할 시기가 지난 것이었다.
누가봐도 민망해 하는것이 표정과 몸짓에 드러난 애머디를 빤히 보던 일라이저가 먼저 손을 이끌고 그를 거실로 데려와 앉힌다. 주춤거리던 애머디도 그 몸짓에 속절없이 이끌려 소파에 앉았다. 마주보고 앉은 자리에 가시가 돋친것만 같았다.
긴장한 애머디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던 그는 고개를 슬쩍 빼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채 말을 이어나갔다. 선배, 저는 예전부터 쭉 행복한 사람이 됐다는 걸 실감하고 있어요. 아무것도 아닌 일상인데 앞으로도 선배와 함께란걸 떠올릴때마다 다른건 무엇도 필요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해요.
" 그건... "
" 선배도 그렇죠? "
틀림없는 사실에 멍하니 시선을 유지하던 애머디가 할 말을 잃고 꼼질거렸다.
" 이미 전 행복해졌는데 여기서 더 뭘 해주면 좋을까 고민을 하는 선배님이 사랑스러워요. "
안그래도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하고 히죽거리는 표정으로 말을 멈추지 않는 일라이저가 손을 포개잡았다. 내일은 주말이고 약속도 없으시죠. 그러니까 그 날은 하루종일 저와 함께 있어주세요. 눈을 뜬 순간부터 눈을 감을때까지요.
아침은 집에 있는걸로 간단히 식사하고 점심땐 같이 장을보러 나가서 전에 가보고 싶다하신 가게에 들르도록 해요. 지나가다 전망 좋은 공원이 있다면 들러서 가볍게 산책도 하구요. 그 동네를 다 둘러보고 집에 오면 준비한 재료들로 멋들어진 저녁을 같이 준비해요. 분위기 있게 준비하는건 제가 할테니까 조금만 도와주시면 돼요. 아, 장식이 화려한게 별로면 미리 말씀하시구요. 저녁을 먹고 나면 오래된 영화를 한편 보고 잠들고 싶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구상한듯 술술 뱉어내는 일정엔 막힘이 없었다.
" 고작 그런걸로 충분하겠나? "
어딘가 특별한 곳에 간다거나 예정된 이벤트 같은게 없더라도... 미안한 기색은 훨씬 줄어들었지만 애머디는 아직도 신경이 쓰이는지 그의 어깨에 뺨을 묻고는 감싸안은채 중얼거렸다. 그가 이렇게 생각할 동안 자신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 네, 그거면 충분해요. "
그의 해맑은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 ... 알겠다. 내일은 온종일 너만을 바라보도록 하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같이 할거고 무얼 하더라도 진심으로 만끽하겠다. 널 사랑하게 되서, 너와 이런 시간을 보낼 자격이 주어져서 고맙다고 하루종일 감사하면서 말이야. "
다시금 고개를 들고 마주한 서로의 얼굴에는 티없이 맑은 웃음만이 묻어났다. 미안해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는 듯 망설임 없이 저를 향해 보내오는 목소리와 시선을 듣노라면 어떤 감정이던 누그러질수 밖에 없으리라.
일라이저의 손엔 아직도 한송이의 꽃이 들려있었다. 구하기 어렵지도 않은 꽃이건만 구겨지지 않도록 세심히 쥐고있는 것이 가슴에 와닿았다. 이렇게 손짓 하나도 빠짐없이 어여쁜 제 반쪽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단 하나의 문장을 뱉고 마는 것이다.
널 사랑한다, 일라이저.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않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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