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NCP] 유령 10 (完)
이제 모든 아쉬움과 슬픔을 뒤로 하고.
Past Scene 19.
시리우스는 레귤러스가 제임스를 밀치고 나가자마자 검은 개의 모습을 한 채로 주저앉았다. 곧 검은 개가 모습을 키워가더니 순식간에 검은 머리의 남자로 변했다.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시리우스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망할…!’ 이라고 짧게 내뱉었다.
‘시리우스! 너 괜찮아?’
‘젠장, 레귤러스가 왜 여기 있었던 거지? 왜 하필…!’
제임스가 바닥에 앉은 시리우스 가까이 다가왔다. 예상치 못 한 상황에 둘 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제임스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패드풋, 이제 어떻게 하지?’
‘나도 모르겠다…. 네가 좀 해결해 봐라.’
‘레귤러스 쫓아가 봐야 되는 거 아냐?’
‘쫓아가서 뭘 어떻게 해….’
‘레귤러스는 일단 데스 이터잖아. 우리 은신처가 발각된 것도 문제고. 물론 여기는 곧 옮기려고 했지만…. 그러고 보니 우리 이렇게 한가롭게 있을 때가 아닌 거 같다. 얼른 여기서 벗어나는 게 좋겠어.’
‘알았다….’
시리우스가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축 처진 채 문으로 향하는 뒷모습이 처량해 보여서 제임스가 쯧쯧 혀를 차더니 시리우스의 뒤로 바짝 붙어서 말을 걸었다.
‘아무래도 그냥 보내는 건 아닌 거 같다. 레귤러스를 찾아보는 게 좋겠어.’
‘찾는다고 뭐가 달라지냐.’
‘너도 봤잖아? 아까 레귤러스 표정 너무 안 좋았어. 엄청 충격 받은 얼굴이었는데….’
‘그래, 누구누구 씨가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준 덕분에 내 애니마구스가 들통 났지.’
시리우스의 가시 돋친 말에 제임스가 움찔했다. 시리우스와 제임스는 마법부에 등록하지 않은 애니마구스이기 때문에 정체를 들키면 매우 곤란해졌다. 그래서 그들은 애니마구스 상태에선 서로를 별칭으로 부르기로 약속했는데 하필 레귤러스의 앞에서 제임스가 실수한 것이다.
‘그건 미안하다. 너무 급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네 이름부터 튀어나왔어. 그래도 덕분에 레귤러스가 널 공격할 뻔했던 건 막았잖아?’
‘그래, 참 고맙다. 차라리 한 대 맞고 기절하는 게 좋을 뻔했지.’
‘이 자식이…! 솔직히 내가 네 목숨 구해준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냐?’
‘그래그래. 고맙다니까? 아주 고오마압다. 고오마워!’
‘이 배은망덕한 자식! 다음부턴 도와주지 않을 거야!’
두 사람은 그렇게 투닥거리며 비밀 은신처에서 점점 멀어졌다. 은신처가 작아져서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시리우스는 자꾸 그곳을 돌아보았다. 영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지 신발을 질질 끌면서 미적거렸다. 보다 못한 제임스가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레귤러스 만나고 와.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몰래 볼 수 있잖아? 레귤러스가 널 팔아먹을 것도 아니고. 내가 망이라도 봐줄까?’
‘됐어…. 지금은 레귤러스도 충격 받은 것 같으니까 나중에…. 나중에 만나서 얘기할 거야.’
제임스는 시리우스의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어깨를 으쓱하곤 앞장서서 걸어갔다. 사실 시리우스는 많이 불안했다. 도망치듯 벗어나던 레귤러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지금 레귤러스를 잡아야 된다고 느꼈다. 하지만 그동안 애니마구스를 숨긴 미안함과 그로 인한 결과로 느낀 죄책감에 시리우스는 도저히 레귤러스를 다시 볼 용기가 나질 않았다. 결국 시리우스는 레귤러스를 뒤쫓아 가는 걸 포기했고 그날 그렇게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뒷모습만이 시리우스가 기억하는 레귤러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어떻게든 너를 붙잡았어야 했는데.
Present Scene 19.
뭍으로 시신을 건져 올렸지만 어느 누구도 선뜻 손대지 못 했다. 시신은 오랜 시간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던 것 치곤 거의 훼손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핏기 없이 창백하게 질린 피부와 여기저기 붙어있는 해조류만 빼면 금방이라도 눈을 뜨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선뜻 다가갈 수 없는 건 그의 심장이 이미 오래전에 멈춰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리는 망연자실한 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남자는 몇 번이나 젖은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왔었고 어젯밤 꿈에서도 보았던 얼굴과 옷차림 그대로였다. 하지만 유령의 모습이었든, 꿈속의 모습이었든, 움직이고 있든, 그는 지금은 미동도 없이 창백한 얼굴로 해리의 발밑에 누워있었다. 새삼 다시 느꼈다. 레귤러스 블랙은 죽었다.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시리우스가 죽은 동생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레귤러스의 얼굴로 손을 뻗어 뺨에 묻은 이끼를 떼어냈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레귤러스의 얼굴을 닦아주던 시리우스가 깨끗해진 볼을 양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레귤러스…. 왜 이러고 있어…. 불쌍하게….”
시신의 볼을 감싼 시리우스의 손이 차갑게 시렸다. 그 차디찬 온도는 그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걸 피부로 느끼게 했다.
“왜 여기 있었어…. 왜 이런 곳에서…, 혼자…, 외롭게….”
시리우스가 간신히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시리우스는 생전에 그랬던 것처럼 동생의 볼을 쓰다듬고 젖은 앞머리가 달라붙은 이마를 쓸어주었다. 형의 애정 어린 손길에도 동생은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애처로운 광경에 다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귤러스…, 늦어서 미안하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시리우스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어느샌가 해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내려와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시리우스는 이내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 하고 흐느꼈다.
“미안해, 레귤러스…. 형이 미안해…. 정말 미안해…!”
늦은 사과를 건넸지만 죽은 자는 답이 없었다. 시리우스는 그렇게, 죽은 동생을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면서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형제를 잃고 혼자 남은 남자의 울음소리만이 파도에 실려 바다에 고요히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Present Scene 20.
레귤러스 블랙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언제부터 유령이 되어 떠돌았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치지도 물에 비치지도 않으니 자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딱히 볼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의 얼굴이었어도 10년 넘게 보지 못 했으니 기억이 흐릿했다. 막상 자기 시신을 봤을 때, 레귤러스가 처음 느낀 감상은 ‘참 어려 보인다’는 것이었다. 깨끗하게 씻겨져 관 속에 누워있는 자신은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귤러스는 새삼 자신이 일찍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땐 왜 그 어린 소년이 겁도 없이 죽을 생각을 했을까?
“여기에요, 덤블도어. 오, 이런 세상에…. 레귤러스….”
영안실 안으로 덤블도어와 맥고나걸 교수가 들어왔다. 그들은 관 속에 뉜 레귤러스의 시신을 발견하고 비통함을 감추지 못 했다.
“레귤러스 블랙, 이젠 편안히 쉬기를….”
덤블도어가 레귤러스의 이마에 손을 얹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너무 가엾어요. 이 아인 고작 17살 밖에 안 됐어요. 대체 전쟁이 뭐길래 17살짜리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건지….”
“미네르바, 아직까진 추측에 불과하지만 레귤러스 블랙의 죽음엔 뭔가 숨겨진 게 있어요. 확실하진 않지만 데스이터에 관한 일이거나, 어쩌면 볼드모트에 관한 일일지도 모르지.”
“덤블도어, 해리가 레귤러스가 죽어가는 꿈을 꿨다고 하던데.”
“나도 들었소. 안타깝지만 해리는 꿈을 완전히 기억하지는 못 하더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원래 꿈이란 건 꿀 때는 생생해도 깨어나면 흐릿해지는 법이니까. 그래도 해리가 말한 ‘동굴’에 대해 조사를 해 볼 생각이오. 아마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을 테니.”
“그러고 보니 시신을 찾을 때 손에 쥔 거울을 이용해서 찾았다고 하죠? 그게 없었다면 찾기 힘들 뻔했네요.”
“그렇소. 어찌나 강하게 쥐고 있었던지 빼내느라 애먹었다더군. 물론 사후경직이 와서 그랬겠지만 그래도 죽기 전까지 놓치지 않은 걸 보면 꽤 소중히 생각했던 것 같소.”
“시리우스에게도 특별한 물건인 것 같더군요. 지금 그 거울은 시리우스가 가지고 있어요.”
“그렇겠지. 동생의 유품이니까.”
레귤러스는 영안실에 두 사람을 남겨둔 채 벽을 통과해 밖으로 나왔다. 영안실 입구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곳에서 시리우스가 양손에 얼굴을 묻고 몸을 수그린 채 의자에 힘없이 앉아있었다. 시리우스의 곁으로 리무스가 다가와 말했다.
“시리우스, 쉬면서 뭐라도 좀 먹어. 어제부터 한숨도 안 자고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생각 없어.”
“그럼 물이라도 좀 마셔. 그러다가 너까지 쓰러지겠다.”
리무스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시리우스의 어깨를 감쌌다. 시리우스가 손으로 감쌌던 얼굴을 떼고 고개를 들어 리무스를 보며 말했다.
“리무스, 난 후회한 적 없었어.”
“그게 무슨 말이야?”
“내가 아즈카반에 수감 된 것 말이야. 오히려 해리의 대부로써 해리를 돌봐주지 못한 걸 후회할지언정 제임스를 위해 피터를 죽이려 했던 걸 결코 후회한 적 없었어. 누명을 쓰고 아즈카반에 들어갔어도 제임스의 원수를 갚으려 했던 걸 후회한 적 없었는데…. 지금 너무 후회가 돼….”
“시리우스….”
시리우스의 얼굴이 자괴감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리무스는 그런 친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지금 리무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옆에서 위로해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가 지금 수배 중인 몸이라서, 난 지금 레귤러스의 장례식을 제대로 치러줄 수도 없어. 형이라는 사람이 동생 장례식을 치러줄 수도 없다고! 그 간단한 추도문조차 읽어줄 수 없단 말이야! 내가, 내가…! 지금 범죄자라서…!”
시리우스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분을 토해내고 있었다. 리무스 또한 생각지도 못 한 암담한 현실에 위로조차 하지 못 하였다. 때마침 영안실 복도로 들어오던 해리가 그 광경을 보고 놀라서 다가왔다.
“난 이걸 후회할 거야…. 난 이걸 평생 후회하게 될 거야….”
시리우스가 허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런 대부의 모습에 해리는 가슴이 아팠다.
“시리우스….”
“해리?”
해리의 부름에 시리우스가 고개를 들어 해리와 눈을 마주쳤다. 해리는 그대로 대부를 꼭 끌어안았다. 오늘따라 시리우스의 마른 등이 훨씬 앙상하게 느껴졌다.
“시리우스,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레귤러스 블랙은 시리우스를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제가 대신 맹세할게요. 절대 그러지 않을 거예요. 그는 대부를 많이 사랑해요.”
“해리…, 정말일까? 정말 그럴까?”
“그럴 거예요. 그가 물에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건 시리우스의 얼굴이었어요. 사실 그건 물에 비친 본인의 모습이었는데도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 그가 떠올린 건 시리우스의 얼굴이었다고요! 저는 꿈에서 그걸 봤어요. 이것만은 확실히 기억해요.”
시리우스는 이제 해리의 품에서 어린애처럼 흐느꼈다. 해리도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시리우스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이를 지켜보던 리무스가 입을 열었다.
“시리우스,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왜 하필 해리가 콘월에서 그런 꿈을 꿨을까? 해리가 그동안 가위에 눌린 적은 있어도 살아생전 레귤러스에 관한 꿈을 꾼 적은 없었잖아? 아마 레귤러스는 콘월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던 게 아닐까 싶어. 시신을 찾기 힘들다는 걸 알고 해리를 통해 힌트를 준 거지. 손에 쥐고 있는 거울을 이용해서 우리가 찾기 쉽도록.”
리무스의 말에 시리우스와 해리가 리무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다정하게 바라보며 리무스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너와 해리가 다시 만난 순간부터 레귤러스는 너를 따라다녔을지도 몰라. 그동안은 너를 찾을 수 없었지만 해리 덕분에 너를 다시 만나게 된 거지. 이래도 레귤러스가 널 원망할까? 진짜로 널 원망했다면 조용히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네가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들었겠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아마 널 배려해서 그런 걸 거야. 게다가, 생각해 봐. 레귤러스는 죽을 때까지 그 거울을 놓지 않았잖아. 그 거울은 너희 형제에게 의미 있는 물건인데 이것만으로도 레귤러스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니?”
그 말을 들은 시리우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눈물을 닦아냈다. 잔뜩 쉰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한 시리우스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 해리에게 건넸다.
“해리, 이걸 받아 주겠니?”
“이게 무슨…, 어! 이거 그 거울 아니에요? 레귤러스 블랙이 가지고 있던….”
“맞아, 해리. 이건 원래 나랑 레귤러스가 하나씩 가지고 있던 거울이야. 두 개가 한 쌍인데 거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린 언제든지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단다. 이걸 너한테 주고 싶구나.”
“제가 이걸 어떻게 받아요…. 이건 동생 분이 아끼던 건데….”
“괜찮아. 어차피 내가 두 개를 가져봤자 의미가 없어. 그리고 레귤러스도 네가 받아주길 바랄 거야. 이건 나도 맹세할 수 있어. 레귤러스가 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너를 믿어서 그랬을 거야. 네가 자길 도와줄 걸 믿고 그랬던 거지. 너는 훌륭하게 약속을 지켰으니까 이걸 받아도 돼.”
시리우스가 해리의 손바닥에 거울을 올려주고 해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치며 거울을 꼭 쥐여주었다. 대부와 대자가 서로를 보며 웃었고 옆에서 지켜보던 리무스도 웃었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지만 함께 있었던 레귤러스 블랙도 미소 지었다.
레귤러스는 이걸로 다 되었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떠날 때가 온 것이다.
Epilogue.
“…무니, 너무한 것 같지 않아?”
“뭐가?”
마시던 술병을 내려놓은 시리우스가 리무스를 부르며 중얼거렸다. 혹시나 자제력을 잃을까 봐 술을 마시지 않는 리무스는 몇 시간 째 시리우스의 곁에서 말 상대를 해주고 있었다. 레귤러스의 장례식은 조용하게 치러졌다. 15년 전 실종 된 블랙가 차남이자 현재 1급 현상수배범인 시리우스 블랙의 동생인 레귤러스 블랙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는 예언자일보 1면에 실릴 특종감이었다. 하지만 세간의 화제가 되는 걸 시리우스가 원치 않았기 때문에 레귤러스의 장례식엔 덤블도어를 비롯한 몇 명의 교수들과 시리우스와 리무스 그리고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만이 참석해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이것마저도 혹시 보는 눈이 있을까 봐 시리우스는 모습을 숨긴 채 장례식을 지켜봐야 했다. 무사히 장례를 치르고 모두가 잠자리에 든 시각까지 시리우스는 원통함에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괘씸하잖아. 레귤러스 말이야. 해리 앞엔 몇 번이나 나타났으면서 내 앞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고. 네 형은 나란 말이다! 네 가족은 나라고!”
“…시리우스, 너 많이 취했다. 이제 들어가서 자라.”
“씨이…, 내가 아무리 형 노릇 제대로 못 했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냐? 나도 유령이든 뭐든 좋으니까 보고 싶단 말이야…. 나도 가윈지 칼인지 눌려줄 수 있는데….”
“그래그래, 레귤러스가 나빴네. 그러니까 이제 가서 자자, 응?”
“레귤러스…. 나쁜 자식…. 매정한 자식…. 나도 보고 싶은데….”
결국 시리우스는 술기운을 이기지 못 하고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그 상태에서도 계속 중얼거리다가 어느새 잠들었는지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무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불을 가지러 2층 방으로 올라갔다. 곧 시리우스에게 덮어줄 이불을 챙겨서 다시 거실로 내려온 리무스는 시리우스를 보고 무척 당황했다. 분명히 소파에 앉은 채로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던 시리우스는 어느새 소파에 똑바로 눕혀져 편히 잠들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해리는 이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온몸이 묵직하고 살짝 오한이 들었다. 뭐지, 이 익숙하면서도 기분 나쁜 느낌은…, 그거다! 이게 얼마 만에 눌려보는 가위더라? 해리는 끙끙거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침대 발치를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고 기대했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리가 묘하게 아쉬움을 느끼던 찰나.
[여기야.]
옆에서 속삭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해리가 옆을 돌아보자 그곳엔 익숙한 남자가 서 있었다. 레귤러스 블랙이었다. 그동안 해리를 찾아왔던 그 얼굴 그대로였다. 다만 바뀐 게 있다면 더 이상 온몸이 젖어있지 않은 말끔한 모습이었다. 해리는 화장터로 가기 전 관에 누워있던 레귤러스 블랙의 말끔한 모습을 기억해냈다.
“…당신, 이제 추워 보이지 않네요.”
[누구 덕분에. 고마워.]
“그러고 보니 당신 목소리도 처음 들어요. 그 동안 말할 수 있으면서 안 한 거예요? 나 놀랄까 봐?”
해리의 장난스러운 말에 레귤러스가 살짝 웃음 지었다. 해리는 그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다 바보같이 따라 웃었다.
“웃는 거 처음 봐요. 당신 사진을 찾아봤는데 활짝 웃는 사진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근데 웃으니까 더 잘생겼어요. 앞으론 좀 웃고 다녀요.”
해리의 칭찬에 레귤러스는 아무 말 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해리는 유령인데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찾아온 레귤러스가 몹시 반가웠다. 이미 레귤러스는 대부의 죽은 동생뿐만 아니라 해리의 친구나 마찬가지였다.
[작별인사를 하러 왔어.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하고 싶어. 너한텐 신세진 게 많으니까.]
“작별 인사요? 레귤러스, 가는 거예요? 이제 못 보는 거예요?”
순간 해리는 가지 말라는 말을 꺼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앞으로 볼 수 없다는 건 아쉬웠지만 그래도 레귤러스를 붙잡을 수 없었다. 유령인 레귤러스를 산 사람들의 세상에 묶어두는 건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이제 편히 쉬어야 했다. 그래도 해리는 헤어진다는 아쉬움에 어떤 말도 꺼내지 못 하고 레귤러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귤러스 역시 해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레귤러스가 허리를 숙여 자신의 얼굴을 해리의 얼굴로 가까이 가져갔다.
[시리우스를 잘 부탁해.]
당부의 말을 남기고 레귤러스는 해리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이마에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당황한 해리의 귓가에 레귤러스가 속삭였다.
[굿바이, 해리 포터.]
마지막 인사와 함께 해리는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레귤러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해리가 침대에서 일어나 방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렸지만 어디에도 레귤러스 블랙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완전히 떠났다는 걸 깨닫자 해리는 허탈함에 레귤러스가 서 있던 자리를 서성였다. 해리가 손을 들어 레귤러스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만져보았다. 방금 일어났던 일에 도저히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해리는 생각에 잠겼다. 유령을 만질 수도 있는 건가? 아까 느낀 감촉은 진짜였을까? 그 동안 나한테 찾아온 남자는 어쩌면 내 착각은 아니었을까?
그 순간 해리의 눈에 침대 옆 탁자에 놓아둔 별의 거울이 보였다. 본래 레귤러스 블랙의 거울이었고 이젠 해리의 거울이 된, 시리우스와의 소중한 끈이 되어주는 거울. 착각이 아니었다. 이 거울이 레귤러스가 자신을 찾아왔었다는, 레귤러스 블랙이 존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해리는 이 거울을 볼 때마다 그를 떠올릴 거라고 생각했다. 거울을 손에 든 채로 해리가 속삭였다.
“잘 가요, 레귤러스 블랙.”
fin.
- 2013. 3. 6.
* 이걸로 '유령'은 완결입니다. 끝까지 지켜봐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레귤러스의 시신을 찾는 과정을 쓰면서 '레 미제라블'의 OST 중 하나인 'Epilogue'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렸어요.
Come with me Where chains will never bind you
All your grief at last, at last behind you.
Lord in heaven, Look down on him in mercy.
나와 함께 무엇도 당신을 묶어두지 않는 곳으로 가요.
모든 슬픔은 이제 뒤에 남겨두고.
신이여, 자비를 베풀어 그를 살피소서.
외롭게 죽어갔던 레귤러스가 제 글 속에서 나마 평안을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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