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어디에서든 언제까지나
*당신의 썰에 나온 대사를 그대로 발췌해 사용한 대목이 있습니다.
*사랑해요. 늘 감사합니다.
*나랑 같이 평생 도윤이안 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언제든, 어디든 존재하는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순간들.
자, 상상해보라,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을 어떤 사랑을.
*
일기예보가 장마를 예고한다. 기상캐스터의 또박또박 정제된 발음이 습기를 머금어 먹먹해진 공기를 울렸다. 우중충한 창 밖의 음울한 색채와 달리 다채로운 빛깔의 티브이 화면이 깜박거렸다. 오늘부터 시작될 장마는 3주가 넘도록 이어질 전망입니다. 폭풍을 동반하지는 않겠으나 150mm 이상의 강수량이 예측되오니 외출하시는 분들 모두 우산 잘 챙겨가시길 바랍니다. 화면이 전환된다. 화면의 메인을 차지한 아나운서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대본을 읊는다. 다음 소식입니다. 30대 남성 A 씨가―.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전원이 꺼져 거울처럼 정면을 비춰내는 티브이 화면에 리모컨을 든 소년이 반사됐다. 소년은 무감한 눈으로 리모컨을 내려놓고 제 목에 교복 넥타이를 걸었다. 간편하게 조여 당기면 그만인 넥타이가 셔츠 칼라 아래를 파고들었다. 셔츠깃을 조금 만져 모양새를 가다듬은 소년이 소파 옆에 내려둔 가방을 둘러멨다.
소년은 현관 옆의 장을 열어 장우산을 하나 꺼냈다. 안에 든 우산 중 가장 큰 우산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쓰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서도윤은 그 하나의 우산을 든 채 현관문을 열었다. 철컥. 삑, 삐리릭. 독일에서 한국으로 오며 가장 낯설다 생각했던 가정 문화 중 하나인 도어락이 소년을 배웅했다. 소년이 생각한다. 이안 집 도어락 소리가 더 좋은 것 같은데.
안녕. 책상을 스쳐 지나가면서 작게 속삭였다. 날숨에 가까운 속삭임은 지척에 있는 이조차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으나 서도윤은 그가 제대로 들었으리라 확신했다. 저것 봐, 손이 멈췄어. 이안이 서도윤의 소리를 놓치지 않듯 서도윤도 이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잠시 멈추었던 이안이 손이 다시 사각사각 오선지 위를 노닐었다. 큰 반응은 아니었으나 서도윤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 이안이 잠시나마 악보보다 자신을 우선했다. 말로 하진 않았으나 아침인사나 다름없어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날이 흐리지. 미술실 대신 음악실을 가야겠어. 이안의 것이 들어 있지 않던 우산통을 떠올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담배 안 피우네."
사람이 빈 미술실, 이안이 물었다. 음악 수업을 하는 교실이 있어 미술실로 옮겨온 서도윤은 제 옆에서 악보를 펼치기 시작한 이안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까만 머리카락이 습한 날씨와 맞지 않게 부드러워 보였다. 함부로 만지면 놀라겠지. 서도윤은 충동을 막기 위해 눈을 데구르르 굴리며 음, 하고 비음을 흘렸다. 이안의 시선이 제게 짧게 머무르는 게 느껴졌다. 그게 썩 기꺼웠다, 단 둘이 남을 때면 종종 제게 머무르는 저 은색 시선이. 서도윤이 느리게 입꼬리를 올렸다. 여전히 기묘했지만, 조금 자연스러워진 미소였다. 서도윤은 오른쪽 바지 주머니의 네모난 부피감을 떠올렸다. 담배갑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있었지만 딱히 피우고 싶지는 않았다. 이 기분을 뭐라 해야 할까. 그래…….
"장마니까."
너를 사랑하는 것 같다. 서도윤은 풋풋함 서린 애정의 말 대신 장마를 입에 올렸다. 습하고 우중충하고 피부에 닿는 공기가 끈적해지는 계절의 파편. 악보를 늘어놓던 이안의 손이 멈추었다. 악보의 끄트머리가 떨린다. 서도윤은 그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밀어를 입 안에서 굴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장마, 약속한 사인. 우산을 들고 온 서도윤과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차이안 사이의 표현. 차이안이 길게 숨을 뱉었다. 살짝 열렸다 닫힌 입술이 가지런한 치아에 물렸다. 머뭇거리듯 입술을 약하게 씹던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듯한 셔츠 깃 속의 목덜미가 전보다 발개진 것 같았다.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누구보다 좋은 눈을 가진 소년이 이안의 어깨에 살며시 기댔다. 움찔, 어깨가 떨렸다. 이안이 한숨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장마니까."
서도윤이 웃었다. 속을 채우는 빠듯한 부피감이 심장을 꽉 눌렀다.
*
"나를 고기 방패로 써."
눈을 잃은 이가 그렇게 말하자, 몇 주 전 바이올린을 내려놓은 이가 숨을 삼켰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재난 상황에 먼지가 묻은 얼굴을 하고서 장님이 재차 목소리를 냈다. 이안, 듣고 있지? 기억해, 고기 방패로 써. 시력을 잃은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짐이 될 뿐이야. 난… 너를 지키고 싶어. 투박하게 이어지는 문장들은 조용하고 나긋했으나 망설임이 없었다. 어디서 좀비가 들을지 몰라 최대한 목소리를 죽인 그가 허공을 더듬어 이안의 팔을 잡았다. 이안은 대답이 없었다. 눈을 잃으니 이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어 조바심이 일었다. 서도윤은 마른침을 삼키고서 이안, 하고 재차 이름을 불렀다. 어떻게든 설득할 것이다. 만약 설득하지 못한다면…….
덜컥, 멱살이 잡혔다.
"내가 나 지키려고 너랑 다니는 줄 알아?"
그 첫 마디를 들은 순간, 아, 서도윤은 모를 수 없었다. 설득할 수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에 더 잘 알 수 있었다. 서도윤은 속절없이 떨리는 그 목소리에 신중히 귀 기울였다. 세상이 망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생각 따위나 하다니 웃기지만, 이렇게 이안의 세계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된 건 기뻤다. 이제 더 이상 같이 있지 못할 텐데 잘 기억해둬야지. 너와 같이 있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하고 뱉어내는 이안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도윤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안을 지키기 위해서 할 행동이니 망설일 필요 없었다.
싫어, 안 돼, 너 그러면 가만 안 둘 거야. 멱살을 잡던 손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진짜 가만 안 둘 거야…. 서도윤은 웃었다. 엄지로 이안의 뺨을 더듬어 입술을 찾아내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처음으로 이안의 허락 없이 한 키스였다. 이게 마지막이야. 서도윤도, 차이안도 알았다. 다음은 없을 것이다. 눈을 잃은 이가 살아남을 만큼 이 세계는 다정하지 않았다.
서도윤은 말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이었다. 이안에게 방해될 '서도윤'을 치우는 데는, 더더욱 빠르게 움직여야 했으니.
때문에 좀비에게 물린 순간, 서도윤은 움직였다. 늘 들고 다니던 칼을 목에 찔러넣었다. 도망치던 이안이 경악 서린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슈테펜! 그에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서도윤은 입으로 피를 쏟아내며 쑤셔넣었던 칼을 비틀어 그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목 안에서 났던가? 몸 안에서 났던가? 머리 안에서 났을지도 모르겠다. 목이 반쯤 잘린 이의 팔이 관성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면 다 잘라내지 못할 뻔했다. 머리를 잃은 몸이 휘청였다. 빠르게 도는 바이러스에 굽혔던 무릎을 펴고 다리를 움직였다. 머리를 잃어 연인을 구분할 수 없는 몸이 이안에게 달려들었다. 떨어져나간 머리가 바란 그대로, 이안을 물 위험성이 없으면서 동시에 다른 좀비를 막는 방패가 되어줄 움직임이었다.
이안은 멍하게 시선을 내렸다. 목 없는 시체가 있었다. 툭, 건드렸다.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도, 심장소리도, 숨소리도, 이안이라 불러주는 다정함도, 사랑한다는 속삭임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서도윤이었다. 그 공백이 사무쳤다. 차이안은 다 풀린 동공으로 바닥에 떨어진 칼을 보았다. 더럽고 날이 나가 있었으나, 살아있는 인간의 부드러운 살을 갈라 꿰뚫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살아있기를 바랐으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찢겨나간 심장 한 켠으로 찬 공기가 드나들었다. 속이 시렸다. 이안은 칼을 주워 목이 없는 서도윤에게 쥐여주었다. 부패가 시작된 시체의 왼손은 딱딱했다. 그것을 억지로 구부려 칼을 쥐게 하고서 뾰족하게 날이 선 칼 끄트머리에 목을 댔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숨이 시체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 위로 흘러내렸다.
분명 죽지 말라 했건만 그의 연인은 멋대로 죽어버렸다. 이건 그 죗값이야. 나를 지키려 스스로의 목을 베어낸 그 손으로 나를 죽이는 거야. 차이안이 웃었다.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했지?
칼 끝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피가 터져나왔다. 다쳐선 안 되는 혈관을 잘라낸 칼이 깊게 들어갔다. 이안은 손을 뻗었다. 바이올린을 내려놓으며 반지를 끼운 왼손을 뻗어 잡아줄 이 없는 시체의 오른손을 쥐었다. 격통이 빠르게 가시며 표현하기 어려운 무기력함이 밀려들었다. 이안은 눈을 감았다. 제 피로 따뜻하게 데워진 도윤이의 손이, 생전의 어느 순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서.
*
제 욕심으로 이안을 보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도윤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움직였다. 가슴을 치받고 들어오는 거대한 상실감에 당장 무릎 꿇고 싶었으나, 그는 이안을 차가운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너는 빛이 잘 어울려, 이안. 이제 그의 눈은 빛을 담지 못하겠으나 서도윤은 그를 빛 닿는 곳에 재우고 싶었다. 슬픔을 이기지 못해 떨리는 손이 이안의 눈을 감겼다. 두 손이 식어가는 이안을 들고 재해로 내려앉은 건물을 걸었다. 무너지고 깨진 콘크리트는 발 디딜 곳이 넉넉지 않았으나 서도윤은 건물의 잔해에 긁히고 베여가며 자리를 찾았다.
30분 가까이 헤매어 도착한 곳은 하늘이 뚫려 있었다. 좁은 틈 사이로 억지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잔해 사이의 간격을 벌리고 이안의 몸을 조심스레 옮겼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자욱이 깔린 곳이 걸음마다 희뿌연 먼지를 피어올렸다. 빈 말로도 좋은 곳은 아니었다. 재해가 오지 않은 세계였다면 이딴 곳은 길고양이의 무덤으로도 거들떠 보지 않았을 것이다.
재해가 닥쳐 무너진 세계에 장의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서도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해 주변을 정리한 뒤 이안을 가지런히 눕혀주었다. 눈을 감은 이안은 잠든 것처럼 보였다. 피가 말라붙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무척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이라 안심이 되었다. 적어도 고통스럽게 죽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어 서도윤을 두드렸다. 서도윤은 멍청한 낯으로 이안의 옆에 앉아 이안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이안……. 물을 제때 마시지 못해 갈라진 입술에서 끊임없이 연심이 흘러나왔다. 제 목소리로 되풀이되는 이름이 무의미한 가정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내가 좀 더 빨랐으면 살 수 있었을까? 그랬겠지, 분명 그랬겠지…….
서도윤이 피딱지가 앉은 손끝으로 이안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이미 피가 말라붙어 이안의 손을 더럽히는 일은 없다는 것이 위안이 되었다. 서도윤의 잿빛 눈동자가 이안의 빈 약지를 향했다. 위태로운 상황에 혹여 잃어버릴까 목걸이에 걸어둔 반지가 떠올랐다. 아직 있을까? 머뭇거리던 손이 이안의 목덜미 근처를 배회했다. 조심조심 이안의 잠을 방해할까 온 집중을 다해 서늘한 살갗을 매만진 서도윤이 익숙한 재질의 목걸이를 끌어당겼다. 피가 엉겨붙은 은색 줄에 동그란 반지가 걸려 있었다. 잃어버리지 않았다. 웃음이 새어나왔다. 서도윤이 목걸이를 풀어 이안의 반지를 빼들었다. 재해가 시작되고 한 번도 끼지 않은 반지는 주인을 반기듯 이안의 약지에 딱 맞아떨어졌다. 혹시 살이 빠져서 안 맞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이지. 서도윤이 고개 숙여 이안의 약지에 입맞췄다. 눈물이 떨어져 반지 위에 말라붙은 피를 씻어내렸다.
한 명의 망자와 한 명의 생존자는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나눠 끼었다. 서도윤은 이안의 곁에 누워 뚫린 천장으로 들어오는 빛을 응시했다. 눈물에 젖은 시야에 담긴 빛이 일렁였다. 빛 속을 헤엄치고 있는 것 같아. 서도윤이 혼잣말했다. 이안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서도윤은 잠시 눈을 감고 빛의 온기를 느꼈다. 따뜻하고, 조금은 평화로웠다. 이 재해 속에서 이렇게 평화로운 곳은 이곳뿐일 테지. 서도윤이 손을 뻗어 이안과 깍지 꼈다. 차가운 온도를 손끝으로 덧그렸다. 언제나 너보단 내가 따뜻했다. 하지만 이렇게 따뜻한 빛 속에 있으니 너도 춥지는 않을 거야, 이안. 눈물에 흠뻑 젖어 붉어진 시선이 옆으로 떨어진다. 잠든 것 같은 이안이 있었다. 아, 있잖아, 이안―,
"이러니까 우리 결혼하는 것 같아."
눈물에 짓무른 눈이 휘어지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재해의 순간에 걸맞는 예물이었다. 빛이 새어 들어오는 폐허에서, 서도윤은 홀로 주례를 섰다. 주례를 서고, 신랑의 손을 잡고, 예물을 건네고, 사랑을 속삭였다. 사랑해, 이안, 앞으로도……. 새 신랑의 목소리가 멎었다. 숨이 잦아든다. 그 순간에마저 이안을 바라보는 그의 눈을 감겨줄 이는 어디에도 없었으나, 그들을 축복하듯 내리기 시작한 눈이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
차이안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상대를 정확히 응시하는 은빛 눈동자가 주인의 솔직한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허어, 황당함에 가까운 탄식이 절로 터져나왔다. 우아한 자수가 놓인 갓 아래 말끔한 그 낯을 보며 서도윤은 무안하다는 양 눈을 굴렸다. 제 잘못을 회피하려는 강아지 마냥 데굴데굴 구르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는가 싶더니 결국 차이안에게로 돌아왔다. 아니, 비밀로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물어보지를 않으니 굳이 나서서 알려주기엔……. 어영부영 변명이 길어졌다. 한양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차 대감댁 외동 아드님을 앞에 두고 뱉는 변명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하찮았다. 다그락, 서도윤의 손아귀에서 조약돌 두 개가 굴러다녔다. 눈치가 보여 손을 꿈지럭대는 게 티가 나는 움직임이었다.
하, 나참, 어이가……. 차이안은 간만에 뒤통수가 얼얼하다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뒤통수를 맞았던 때가 언제였지? 그 장에서 발을 보았을 때인가, 비녀를 보았을 때인가. 한숨을 내쉰 도련님이 제 앞에 내려둔 종이에 시선을 주었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폭포수가 그려진 그림은 보기만 해도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생동감이 있었다. 이 광경을 직접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서도윤에게 이 화백의 그림을 보여주며 이 그림을 보고 여기에 와보고 싶다 생각했다고 그리 말하려고 했다. 그럼 제 실력에 한해 겸손을 모르는 이 친구가 저 역시 그려줄 수 있다며 소맷자락 걷어붙이고 붓을 들 테니까. 그걸 빌미로 그림이나 하나 얻어가려 했는데…….
"화백 명明이, 너였단 말이야?"
그림을 보여주자마자 미묘한 표정을 짓던 친우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흘렸다. 그 낯을 보니 숨겨놓은 것을 들킨 모양새라 몇 번 캐묻자마자 곧장 제가 화백 명이니라, 하는 고백이 따라온 것이다. 차이안은 하마터면 낯 부끄러운 일을 저지를 뻔했다며 뒤늦게 열이 오르는 귓가를 문질렀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주인장이 그리 말해주었지, 화공 명이 서 씨라는 소문이 있다고. 이것을 따로 찾아보지 않은 제 죄라 해야 할지, 혹은 발칙하게 이 사실을 숨기고 있던 서 씨의 죄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곱씹어보니 서도윤이 부득불 숨기려 들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기에 더더욱 그랬다.
평범하게 물어봤다면 대답해줬겠지. 그리 확신한 차이안이 후, 한숨을 뱉자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고 있던 서도윤이 슬그머니 손을 움직였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봇짐을 주섬주섬 풀어헤치는 손길이 평소보다 소극적이었다. 그래도 아주 뻔뻔하게 나올 작정은 아닌 모양이었다. 어디 무얼 하려는지 보자는 심정으로 서도윤을 응시하자 그가 새하얀 종이에 검은 먹을 꺼내 자리에 하나씩 내려두었다. 화구? 차이안이 눈을 깜박였다. 의아함이 묻어나오는 시선으로 서도윤과 눈을 맞추자 그가 멋쩍게 웃었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았다지만 내 죄가 없지는 않지. 서 씨인 것을 들통났을 적 일찍이 자진납세 했으면 네가 헷갈릴 일도 없었을 테니."
서도윤이 붓을 들었다. 덩치만큼 커다란 손이 먹을 흠뻑 머금은 붓을 섬세하게 쥐었다. 머리카락 한 올로 그리듯 섬세하고 촘촘한 화풍은 화백 명의 대표적인 화풍이었다. 정갈히 자세를 고쳐잡은 그가 폭포를 등진 도령을 응시했다. 그만의 다정을 머금은 눈동자가 꽃피듯 휘어졌다.
"사죄의 의미로 초상을 그려주려 해. 어떠십니까, 도련님?"
예전에나 불렀던 호칭이 되살아난 것에 차이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시원하고 맑은 웃음소리가 허락을 담아 청량한 하늘을 물들였다. 나를 화폭에 담을 자격은 그대에게만 있어.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은 차이안이 속삭였다. 희미한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에 서도윤이 엷게 웃으며 시선을 맞추었다. 삼생에 다시 없을 영광입니다, 도련님.
이윽고, 화백이 붓을 들고 도령이 부채를 펼쳤다. 쏟아지는 폭포 소리가 그들만의 속닥거림을 비밀스럽게 묻어주었다.
*
어느 세계에서도, 어떤 상황이 밀어닥쳐도 스러지지 않을 사랑이 있다.
바로 이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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