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용가하] 꽃놀이
시리던 겨울의 끝물에
*사망 소재
뱀용은 멍한 눈으로 눈 쌓인 나뭇가지를 바라보았다. 봉오리가 채 열리지 않은 꽃송이가 차가운 눈 사이에서도 용케 싹을 틔워내었다. 그 연한 분홍의 색이 참으로 고와보였다. 그녀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뱀용은 흘러가는 의식대로 생각하며 조심조심 꽃송이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톡, 동그란 꽃송이가 제 위에 쌓인 눈을 조금 털어내고 뱀용의 손에 닿았다. 다행히 뱀용의 체온이 썩 높지 않았기에 꽃송이는 열기에 오그라지지 않고 고운 모양을 간직했다. 뱀용은 그 모양새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부옇게 흩어지는 숨결을 내뱉었다. 그녀도, 이리 찬란하게 피어나려 하던 때가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때가 어제처럼 선연했다. 흑단 같은 머리칼을 곱게 빗어내리며 황궁의 귀하신 분이나 쓴다는 금빛을 실어놓은 눈을 사랑스럽게 접는 그녀가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좀체 크게 웃는 법이 없어서 웃을 때면 늘 수줍게, 혹은 자애롭게 웃었다. 그러나 그런 그녀도 새 봄 활짝 피어난 꽃나무 아래에서는 정말 환하게 웃었기에 뱀용은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좋아했다. 쏟아지는 꽃비를 맞으며, 치마를 살짝 쥐고 빙글 도는 그녀는 참으로 그림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았는지 뱀용은 그리 환히 웃는 법을 그녀로부터 배웠다. 그 웃음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그 웃음을 직접 얼굴에 띄워보며 배웠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냐마는.
뱀용은 꽃가지 위에 내려앉은 눈을 손끝으로 살살 떨어뜨렸다. 꽃송이를 가두듯 했던 눈이 뱀용의 시린 온기에 녹아, 또는 밀려나 치워졌다. 뱀용은 눈을 다 치워내고는 한참동안 꽃송이를 지켜보았다. 위협적인 눈 사이에서 기어이 생명을 피워낸 이것은 그녀를 닮아 있었다. 그녀도 제 몸을 사납게 얽매려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 많은 것을 싹 틔웠다. 희망, 행복, 사랑, 애정, 생명, 그녀가 피워낸 것이 무엇이든 이 땅의 많은 것들이 그녀를 말미암아 소생했다.
그러나 그녀의 그 모든 것들은 최종적으로 신의 사랑을 받았기에 가능한 것이라.
만약 그녀가 신에게 사랑 받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생에서 눈이 없었겠지만 동시에 싹도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수많은 업적이 무가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저와도 못 만났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뱀용은 그녀가 신에게 사랑받는 자라는 게 못내 싫었다. 신이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에게 거대한 것을 주었고 그 때문에 그녀는 전능했다. 동시에 신이 그녀를 사랑했기에 그녀는 갓 피어나는 꽃임에도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동백꽃처럼, 가장 활짝 피어난 채로 뚝 떨어져 죽는 것이다.
뱀용은 거센 바람 사이에서도 용케 떨어지지 않는 꽃송이를 보며 충동적으로 손을 뻗었다. 정말, 충동이었다. 짐승으로 난 자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뱀용은 작은 꽃송이가 솟아난 가지를 통째로 꺾었다. 우직거리는 건조한 나무소리와 매몰찬 바람소리가 귀를 때렸다. 뱀용은 꺾어든 나뭇가지를 조심스레 품에 안고 천천히 돌아갔다.
그녀가 있는, 익숙한 청유관으로.
*
뱀용은 문턱을 넘어서며 주술사들에게 까딱 인사했다. 그녀가 가르치는 아이들답게 다들 순진하고 여린 구석이 있었다. 어린 주술사들은 뱀용을 보고 조그맣게 웃으며 지나갔다. 그녀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런지 얼굴이 썩 밝았다. 하지만 청유관의 내실로 들어서며 수뇌부에 가까운 아이들을 만날수록 그들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끼이는 걸 볼 수 있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에.
뱀용은 제게 깊게 허리 숙이며 내실의 숨겨진 문을 여는 빗무리에게 손짓했다.
"됐다. 내가 열 테니 넌 가라."
빗무리는 별 말 없이 돌아갔다. 스쳐 지나가는 아이에게서 습한 냄새가 났다. 뱀용은 저 아이가 눈물이 많은 건 푸르른 머리카락 탓이 아닐지 생각해보다가 문고리의 역할을 하는 홈에 제 손끝을 걸었다. 그대로 힘주어 문을 옆으로 젖히자, 쓴 약냄새와 함께 익숙한 마력의 파동이 진동했다.
그녀는 방의 한가운데에 누워있었다. 침상 주위로는 새까만 너울을 잔뜩 드리운 채, 미약한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죽기 직전인 듯했지만 뱀용은 알고 있었다.
어제보다 상태가 괜찮군.
뱀용은 문을 닫고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침상에 가까이 갈수록 역겨운 풀냄새가 강해졌다. 드리워진 너울 옆을 보니 약재 우린 물이 다 식어있었다. 뱀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너울을 걷었다. 침상에 누워있던 그녀는 발걸음 소리만으로 누구인지 알았는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뱀용, 화가 난 것 같네요."
"그래, 네가 또 탕약을 남겼으니까."
뱀용이 침상 옆에 풀썩 앉았다. 그녀는 소리죽여 웃더니 뱀용에게로 느리게 손을 뻗었다. 다 말라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손가락이 허공을 휘저었다. 뱀용은 혹여 세게 잡으면 부서질까 꽃눈 어루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연인의 체온을 느낀 그녀가 사르르 온기를 담고 웃었다. 내내 감고 있던 눈이, 하늘이 열리는 것처럼 아주 느리게 뜨였다. 뱀용은 색이 다른 두 눈동자를 지그시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뱀용에게로 눈을 굴렸다.
아직 시력이 다 가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뱀용은 그녀의 두 눈이 자신을 보고 확실히 초점을 맞추는 걸 보며 생각했다. 아직, 시력이 남아 있었다. 이제 그녀의 몸은 천천히 부스러져 이동하는 데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눈만큼은 아직 살아있었다. 뱀용은 그 사실에 안도하며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그녀는 거의 다 푸석해지고 힘없이 끊어지는 검은 머리칼을 온전히 그에게 맡겼다. 푸스스 웃는 모습이 가련하고도 강인해보였다. 모순적인 말이었으나 이제 뱀용은 이런 말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가르쳐주었듯, 그녀가 경험시켜주었듯.
"탕약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가하."
뱀용이 듣기 싫은 말을 들은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가하는 뱀용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안타까움을 담아 웃었다. 늘 얼굴 가득 띠우고 있는 다정에 서글픔과 안타까움이 서리니 심장이 저밀 만큼의 처연함이 담겼다. 뱀용은 가하의 그 표정을 눈에 아로새길듯 응시하다가 입을 꾸욱 다물었다.
뱀용는 이 화제가 싫었다. 그녀의 마력을 통해 인간의 태를 하고 있지만, 그는 본디 뱀이었다. 짐승이었다. 그는 인간보다 제 욕구에 충실한 자였다. 그것은 그가 아무리 인간의 감정을 배운다 해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뱀용은 기꺼이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의 끝물이더군. 거의 봄이던가."
뱀용이 제 옷을 뒤졌다. 혹여 제 몸에 눌려 가지가 으스러질까 하여 조심스럽게 품고 온 것이었다. 뱀용이 제 옷깃을 열어 세심한 손길로 꽃가지를 꺼내자 가하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죽어가는 것이 완연한 얼굴임에도 그리 화사할 수가 없어, 뱀용은 그녀가 이곳에 누운 이후 처음으로 마음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넌 봄을 좋아하지. 뱀용은 꽃까지를 조심조심 가하의 손에 들려주었다. 행여 가는 나뭇가지도 무거울까 싶어 나뭇가지를 약통에 기대어주기까지 했다. 가하는 뱀용의 배려에 기뻐하며 한참이나 꽃가지를 들여다보았다. 제대로 피지도 않은 꽃송이가 무에 그리 예쁜 건지, 가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갈 줄을 몰랐다.
뱀용은 어여쁘게 웃는 가하를 보며 자주 연습했던 웃음을 지었다. 눈꼬리가 곱게 접히고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가하는 그런 뱀용과 꽃가지를 번갈아 보다가 또 배시시 웃었다.
"고마워요, 뱀용."
그러더니 가하의 손에서 보랏빛 기류가 나왔다. 주술이었다. 죽어가는 자의 주술이 차마 피지 못하고 꺾인 꽃송이를 활짝 틔웠다. 선명한 생명의 태동이었다. 뱀용은 꽃이 만개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다 놀란 눈으로 가하를 바라보았다. 뱀의 노란눈이 두어 번 깜박였다.
"주술을… 아직 쓸 수 있었나?"
"네, 이제 정말 마지막이겠지만요."
가하가 소리내어 웃었다. 실낱 같은 소리였지만 그 여린 웃음 가득 기쁨이 묻어나왔다. 가하는 꽃이 활짝 핀 꽃가지를 느리게 흔들었다. 마른 나뭇가지가 한 번 살랑일때마다 분홍 꽃잎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가하가 버석하게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저는 봄이 좋아요. 화사하게 핀 꽃도, 겨울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의 모습도, 제국이 다시 숨을 들이켜는 모습도. 생명이라는 건… 언제나 위대한 것이니까……."
"알고 있다. 그러니 봄이 오늘 날마다 네가 밖으로 나서지 않았나."
뱀용의 손이 과거를 더듬는 가하의 눈동자 근처를 맴돌았다. 뱀용이 뱉은 말에 현재로 돌아온 가하가 빙긋 웃었다. 그랬죠, 그랬어요. 저는 봄을 좋아했으니까요. 희미한 애착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건조하게 떨렸다. 뱀용은 그 떨림이 무엇에 기초하고 있는지 몰랐기에, 꽃가지를 든 가하의 마른손에 제 뺨을 비볐다. 단단한 뼈와 메마른 살가죽이 버석하게 뺨을 긁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뱀용이 가하를 닮은 웃음을 가득 그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목소리 하나하나에, 음절 하나하나에 애정이 실려나왔다.
"봄이 오면 꽃놀이를 갈까."
"꽃놀이요?"
"그래. 꽃이 완연히 피고, 햇살이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지면, 같이 꽃놀이를 가자."
예전처럼, 단둘이서.
애정이 담뿍 실린 말이 귓가에서 노골하게 녹았다. 가하는 잠시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가 곧 찬찬히 웃어주었다. 가하의 목소리가 습기에 젖어, 느리게 느리게 흘러나왔다.
"그래요, 같이 꽃놀이를 가요."
"단둘이."
"……단둘이서."
가하가 웃었다. 뱀용은 가하가 웃는 것을 보고 따라 웃었다. 가하의 눈에 반질하니 빛나는 것은 가하가 빛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그 속에 비친 제가 일렁이는 것은 가하의 눈이 바다 같이 깊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웃었다.
*
봄이 왔다. 꽃이 화려하게 자신을 피워내고, 온세상 가득하던 시린 기운이 모조리 물러갔다. 저잣거리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완전한, 언제나 기다려왔던 봄이었다.
그러나 꽃놀이는 없었다.
뱀용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뭇가지 하나가 꺾여나간 나무에 다가갔다. 분홍 꽃망울이 서러워질 정도로 나무에 가득 열렸다. 뱀용은 그것을 소리없이 바라보다가 목이 꽉 조여오는 걸 느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매년 봄이면 늘 가던 꽃놀이는 이제 더이상 뱀용의 삶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뱀용은 제 삶의 귀퉁이가 떨어져나간 기분을 느꼈다. 속이 허하고, 목이 아프고, 폐가 꽉 조여왔다. 눈가가 욱신거렸다. 뱀용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고는 탄식하듯 숨을 뱉어냈다. 내뱉어지는 습한 숨이 하르르 떨렸다.
이제 뱀용을 알고 있었다. 왜 봄을 그리는 가하의 목소리가 떨렸는지, 왜 꽃놀이를 가자던 가하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뱀용은 치미는 기억을 삼켜내며 청유관을 향해 발을 돌렸다.
이제 그곳에 더이상 그녀는 없었지만, 뱀용은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삶과 흔적이 가득한 그곳으로, 뱀이 사랑하고 뱀을 사랑해주었던 여인이 죽어 사라진 그곳으로.
그리고 끝내 겨울을 이기지 못하고 동백꽃과 같이 숨을 거둔, 찬란했던 사람이 피워낸 가장 아름다운 씨앗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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