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이안] 떨어짐이 낯선 이에게
종이 한 장의 무거움으로
*서로 주고 받은 일곱 개의 편지 아래로 보너스 글이 이어집니다.
*가독성 문제로 서도윤의 편지가 조금 수정되었습니다.(내용은 동일)
서도윤은 문자의 가벼움을 익히 알고 있는 부류였다. 문자는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잉크의 나열에 불과하며 순간의 어떤 격동조차 전달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문자는 소리가 없지 않은가. 소리가 없고 표정도 없고 제스처도 없다. 세상의 증오를 다 담은 얼굴로도 뻔뻔스럽게 사랑한다느니 하는 개소리를 써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니 문자며 편지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사랑의 증명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두고 길이나 글씨체 따위로 감정의 깊이를 파악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서도윤 역시 고전 소설 같은 것을 제법 읽었고 그것들이 아예 무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 마디 문장보다는 백 마디 말이 효율적이고, 백 마디 말보다는 열 번의 관찰이 효과적이며, 열 번의 관찰보다 한 번의 경험이 더욱 유의미했다. 적어도 서도윤은 그렇게 믿었다. 그러니 편지 같은 종이 낭비는 하등 불필요한 쓰레기 생성밖에 되지 않는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상식을 만드는 건 쉽지만 부수는 건 어렵다고 그러지 않나? 서도윤은 평소보다 검은색 비중이 많은 편지지를 펼치고는 작게 탄식했다. 재빨리 편지를 닫아 자신의 정신머리를 보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야가 아찔하게 돌아 같잖은 놀이기구라도 탄 느낌이었다. 편지 분량 따위에 연연하는 성정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이안이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고 생각하니 없는 심장병도 생길 만치 심장근육이 펌프질했다. 손끝까지 열기가 돌아 불그스름해졌다. 서도윤은 호흡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상식은 참 쉽게 깨진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안은 언제나 서도윤의 상식을 깨부수고 새로운 규칙을 아무렇지도 않게 적용시킨다. 달라진 규칙에 허둥거리지도 않는다. 마치 이게 진짜 상식인 것처럼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사랑은 정말 굉장한 감정이구나. 고작 편지 하나에―물론 서도윤에게는 고작이 아니었으나― 사랑까지 논하며 헛소리를 하는 서도윤의 모습은 그를 아는 이가 본다면 크게 폭소할 만큼 멍청했다.
각오를 다진 서도윤이 다시 편지를 열었다. 문장을 읽어가는 시선이 더뎠다. 단어 하나하나 깊게 음미하며 조심스럽게 더듬어갔다. 문장 하나를 넘길 때마다 움찔거리며 올라가던 입꼬리는 두 문장도 채 지나지 않아 함박웃음으로 바뀌고, 편지 중반부에 들어서서는 서늘한 낯 전체가 화사하게 녹아내렸다. 끝내 편지의 마지막까지 다 읽은 서도윤이 나직이 앓는 소리를 흘리며 종이에 이마를 묻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했다. 넘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폭풍우 몰아치는 대해에 달랑 하나 띄운 돛단배―라는 이름의 이성―가 허우적대며 겨우 본모습을 유지했다. 서도윤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아니었다면, 저번이 이쪽에서 발송하는 마지막 편지였던 것을 새까맣게 잊고 편지지를 사러 뛰쳐나갔을 것이었다.
예견되지 않은 추가 편지보다 더 이르게 이안에게 도착하는 불상사를 이성으로 틀어막자 겨우 시야가 트였다. 애정으로 흐물흐물 흘러내린 몸이 언제 침대에 누웠는지도 알 수 없었다. 편지지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닫은 서도윤이 몸을 일으켜 테이블로 걸어갔다. 편지지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머리가 열린 편지봉투가 다시 들어올 편지지를 삼키기 위해 입을 벌렸다. 종이끼리 스치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서둘러야겠다. 서도윤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제 일은 사실상 끝났다. 클라이언트가 조금만 더 머물러달라 사정하기에, 이안의 마지막 편지를 받을 겸 머무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 당장 제네바로 가자. 첫 번째 편지를 받았을 때 바로 구매했던 작은 함을 열자 여섯 개의 편지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 여섯 개의 봉투를 들어 제일 아랫쪽에 새로 받은 편지를 내려둔 그가 그 위로 다시 여섯의 편지를 두고 반듯이 함을 밀봉했다. 보자마자 이안이 생각 나 충동구매한 함이 은은한 백색 아래로 희미하게 푸른빛을 반사했다. 어쩐지 눈이 아려 눈꺼풀을 깜박인 서도윤이 작게 훌쩍였다.
이렇게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어 마음이 흔들렸다. 세 달은 긴 시간이었다. 이안의 공백을 상상조차 해보지 않은 서도윤에게 있어 세 달은 가히 삼 년에 버금갔다. 긴 이별이 끝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눈물샘이 액을 쥐어짰다. 이안……. 조그맣게 이름을 혀 위에 올리자 애처로운 울음기가 한가득 배인 이상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재빨리 혀를 물어 소리를 막은 서도윤이 후, 하고 긴 숨을 뱉어냈다. 술렁이던 마음이 차차 진정됐다. 괜한 감상에 젖지 말고 이안에게 가자.
*
늘 앉는 자리였다. 매번 보던 시야에 담기는 무대가 낯설고 익숙했다. 숨이 떨리는 걸 꾹 억누르고 시선을 고정했다. 드넓은 무대는 그 위에 누가 서든 삼켜낼 것 같았으나 서도윤은 그 무대조차 아무렇지 않게 밟아 서서 관중을 이끌어내는 이를 알았다. 시간이 되자 사위가 조용해졌다. 어두워지는 객석, 무대, 스포트라이트가 떨어졌다. 무대의 그림자를 밟고 그가 들어서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환호와 함께 스포트라이트 중앙에 선 그가 가볍게 인사했다. 시선을 올린 그가 우아한 태로 자세를 잡았다. 활이 현을 긁기 전의 찰나,
아, 시선이.
음이 터져나왔다. 드넓은 무대를 가득 채우고 사람이 빽빽이 들어앉은 홀 전체를 울리는 음이 뇌리에 파고들었다. 자신의 높디높은 이상을 실현하는 손끝이 곡의 섬세한 떨림을 잡았다. 쏟아지는 음률, 말도 안되는 무대 장악력. 관객 모두가 숨을 죽이고 무대에 홀로 선 이에게 매료되는 것을 느낀다. 곡이 빠르게 흘러갔다. 관객 모두가 쥐고 있는 팜플렛에 나열된 리스트를 따라 이안의 손끝이 현 위를 내달렸다. 독주회이기에 자신의 해석을 담뿍 녹여낸 곡이 새로운 시대를 열듯 펼쳐졌다.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구현력이 이곳에 존재하는 모두를 악곡으로 빨아들였다.
활이 현을 긁으며 떨어진다. 악장이 깔끔히 마무리된다. 주변에 앉은 이들이 가늘게 숨을 토해내며 한숨 돌리는 게 들렸으나, 서도윤으로서는 그럴 수 없었다. 이 악장 다음의 곡. 투어를 이어가던 도중 바뀐, 제네바에서의 특별한 리스트. 구성이 바뀐 탓에 이것을 놓칠 수 없다며 티켓 경쟁이 제법 거셌다. 이미 투어를 함께한 이들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정도로.
잠시 허공에 떠 있던 활이 다시금 현 위에 내려앉는다. 가늘게 울리는 첫 음. 서도윤은 무너지려는 표정 위로 포커페이스를 덧씌웠다. 아랫입술을 꾹 깨물어 터지려는 신음을 막았다. 세레나데. 이 넓은 무대와 수많은 관객을 앞에 두고 감히 한 사람을 위해 준비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연주였다. 다른 이조차 뺨을 발그레 붉힐 선율이 심장에 파고들었다. 빛 속에 선 그가 고백했다. 사랑해. 편지에서 읽었던 문자와 귀로 들리는 세레나데가 겹쳐들렸다.
감정에 압사 당할 것만 같았다. 서도윤이 숨을 죽였다. 이안이 전하는 음을 무엇하다 놓치지 않고 새겨들었다. 절절한 악곡을 따라 흘러가는 음이 잦아들 무렵, 이안은 지치지 않고 이어서 음을 터뜨렸다. 경쾌한 음이 관객의 집중을 끌어올렸다. 물 흐르듯 곡이 바뀌었다. 그 흐름을 따라가며 서도윤이 열 오른 뺨을 쓸었다.
답장하고 싶었다.
일곱 번의 편지에 일곱 번의 답장을 받았던 것처럼, 이번엔 제 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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