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
2024년 5월경 포스타입에 업로드했다 지웠던 글 재업입니다.
나는 아직도 종종 그 시절을 생각하면 형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다. 이것은 내가 스물두살일 적부터 마흔 무렵에 이르기까지의, 장장 이십여년에 이르는 긴 여정에 관한 이야기다.
그 긴 여정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하는, 잊을래도 잊을 수 없는 내 또래의 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신동현이었는데, 그냥저냥 평범한 검은 머리와 검은 눈을 가진, 굉장히 순박해 보이는 남자였다. 살짝 실없게 보이기도 하는 그 남자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약간의 경외심과 두려움, 또 모순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측은함을 느낀다. 그는 지금 죽고 없다.
아마 그건 그가 진행하던 작전과 무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건 폐허가 된 서울을 통합하자는, 그의 얼굴 만큼이나 참으로도 실없게 들리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자세한 계획을 듣고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무모했지만 그 기개만은 감탄스러웠다. 지금에 와서 떠올리기엔 진저리가 쳐지지만, 당시엔 나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무렵의 나는 특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계획을 처음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10년은 전의 일이다.
나는 집에서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었는데, 출근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공복을 즐기고 있던 때에 들려온 노크 소리는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었다. 특히 그 너머에서 들려온 소리가 제일 그랬다. 처음 듣는 목소리, 남이 알 도리 없는 이름, 수상할 정도로 나지 않은 인기척, 이상한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지만 나는 방문자에게 벌컥 문을 열어줬다.
당시 신동현은 대령의 부관이라는 그의 직책에 적합한 일을 수행하고 있던 차였다.
그는 부하들을 쥐잡듯 잡기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정도냐하면, 군기와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에 집요하게 군 나머지 군법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직접 처형하기도 했다. 하필 그 무렵, 그의 그런 행동과 서울 통합에 대한 계획이 전쟁 전부터 간부로 있던 늙은이들의 눈 밖에 나버린 바람에, 그는 이십여년 동안 전혀 진급하지 못했다. 그는 늘 중사니 상사니, 그 언저리에 머물렀다.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꽤 깊은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그건 그와 나의 첫 만남에서 비롯한다. 아마 그 감정이 긍정적인 감정은 아니리라고 난 확신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벌컥 문을 연 내 앞에 서 있던 것은 나보다 세 뼘 조금 안되게 커 보이는 남자였다. 내가 주저 없이 문을 연 탓에 당황하며 들고 있던 소총을 고쳐잡은 그는, 몇 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여기가 안수근 대령님네 사가이며 그쪽은 대령님네 영식이 맞느냐고. 내가 그렇다고 순순히 답하니, 한발짝 더 가까이 온 그가 나를 정확히 내려다보며, 나는 대령님의 부관인 신동현 중사인데, 대령님에 관해 드릴 말씀이 있으니 영식께서 저를 들여보내 주심이 어떠냐 물었다.
만약 내가 그때 무기 될 만한 걸 뭐라도 들고 있었다면 신동현을 찔려버렸을지도 모른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신동현은 그것을 우려해 소총을 바로 쥔 것일 거다. 그러나 나는 그때 마땅한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고, 현관에 손님을 세워두고 안달복달하는 것도 꼴사나운 일이니, 흔쾌히 그를 들여보냈다.
그는 수돗물에 우려진 싸구려 차를 마시며, 마치 이런 소식을 전해 유감이라는 듯 그 검은 눈동자로 내 시선을 내내 피하다, 찻잔의 차를 반이 넘게 마시고서야 입을 열었다. 대령님이 돌아가셨고, 그런 대령님께서 영식을 위해 남기신 전언이 있다고.
내가 그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신동현이 그것을 긍정적인 반응으로 받아들인 것은 분명했다. 그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졌으니 말이다. 나는 사실 아버지에 대한 것을 거의 잊어가던 차였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몇 년이 흐르도록 연락이 없는 것도 기행이 아니었으니, 필시 어디서 잘살고 있으리라 믿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랬던가. 하지만 죽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연고없는 시체가 되어 아스팔트 위에서 썩어간다면 그건 좀 가엾겠으나, 단지 그 뿐이었다.
내게 새로운 전환점이 된 것은 신동현의 이어지는 말이었다.
대령님께서 영식을 7경비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그에 의문을 표하자 신동현은 대령님께선 폐허 속에서 살아가던 날 지켜보고 계셨고, 돌아가기 직전에서야 마음을 굳히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핵이 터진 엉망진창의 서울에서야 제 아들을 제대로 알아본 셈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내가 가장 사령관다운 인물이라고 보셨음이 분명하다.
신동현은 내게 당장 부대로 가서, 아버지의 역할을 이어받길 권했다. 왜 그리 급급하는지, 그때의 나로선 알 수 없었다. 지휘권 공백을 메꿀 생각이겠거니 미뤄 짐작했을 뿐.
안수근 대령으로서, 그리고 7경비단의 총사령관으로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확연한 기대의 표정을 띄었다. 내가 흔쾌히 수락하리라고 믿는 듯이. 내가 그의 믿음을 져버리지는 않았지만, 난 아직도 그의 그 얼굴을 떠올리면 약간의 두려움이 앞선다.
그는 이런 세상에서는 무자비가 제일 잘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라고 처음부터 이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몇 번 무자비의 가치를 몸소 체험한 그는 내게 아버지의 전언을 전하는 와중에도 총을 들고 있었다. 그게 장전이 됐는지 안됐는지, 나는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아슬하게 걸려있는 것만이 보였을 뿐.
내 수락에 완전히 경계심을 허문 그는 소총을 저가 앉은 의자에 기대 세워두고는 하나 마나 한 사담을 시작했다.
대령님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직 많이 젊어 보이시는데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하고 말을 꺼낸 그는 내가 대답이 없자 씩 웃었다. 하나 확실한 건, 대령의 아들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명분으로 대령이 된 내 병정놀음에 그가 제일 잘 맞춰줬다는 것이다. 저보다 어린,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대령 따위에게 거짓으로든 아니든 존경심을 표하는 건 어지간한 비위로는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신동현은 산 중턱에 서서, 그 검은 눈으로 서울의 전경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음에, 아등바등 살아가는 저들을 위해서라도 우리가 서울을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 자세한 계획을 물었다. 신동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주위 아무 바위에 기대앉아서 긴 나뭇가지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기호와 글씨가 적힌 흙바닥을 차례차례 짚으며 신동현은 설명했다. 자신의 원대한 꿈과 정의를...
난 신동현의 말을 들으며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추운 밤, 이슬섞인 산의 공기가 온 몸을 경직시켰다. 그건 공포였는지도 모르지만, 거의 분명 희열이었을 것이다. 그 때 신동현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신동현은 조심스레 계획을 설명했다. 물론 난 그가 구사하는 어휘의 반절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밝게 웃으며 노아의 방주 같은 비유를 들기 시작했다. 40여일간의 비 대신 핵, 방주 대신 대피소. 선하고, 믿을 수 있고, 서울에 필요한 시민들만을 들여보내자는 그의 주장을 나는 반대할 수 없었다. 자원은 무한하지 않고, 그에 국가는 감히 시민을 취사선택해야했다.
그 계획은 나와 그, 그리고 몇몇 간부들에 의해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늘 그렇듯, 숨어서 하는 일에는 필시 그러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신동현이 밖으로 나가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나는 신동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나도 아마 무언가에 매료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정의니 대의니, 신동현이 거론하기 좋아하는 그런 주제에 말이다. 우리는 남들이 들으면 기겁을 할 일들을 많이 저질렀다. 사실 사령관이 되기 위해 죽은 아비의 거죽을 쓴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다. 모든 죄도 영광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록될 테니...
그러던 어느 날, 하늘이 높고 햇빛이 따듯하던 봄에, 복도에서 큰 소리가 났다. 나가보니 신동현이 몇몇 부하들의 손에 제지당하고 있었다.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상관의 머리를 깨부쉈다는 얘기가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복도 한 쪽 벽에 흥건히 묻어있는 피가 눈에 띄었다.
신동현은 행정반에 앉아서 제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병사를 물리고, 그와 마주앉아 물었다. 정말 자네가 그랬느냐고. 나름 냉철한 인간상에 속한다고 여겼던 신동현이 불그스름해진 제 뺨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피는 이미 굳어 신동현의 뺨에 검붉은 가루만을 남겼다. 신동현은 저가 그랬노라고 순순히 인정했다. 변명의 여지 없는 하극상이었다.
하지만 저 빌어먹을 새끼가 대령님을 모욕했습니다.
진짜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신동현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고, 아무도 그 말에 토 달지 않았다. 의무반으로 옮겨진 그 간부는 아마 죽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간부는 내가 대령이 되는 것에 반대한, 그러니까 신동현의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한 사람 중 한 명이었고, 신동현은 몇번이고 그에게 저가 옳음을 보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인정욕구는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으니까. 차마 죽여서라도 얻어내고 싶은 인정은, 무릇 인간이라면 한 번 쯤 지녀보지 않던가.
얼마 후, 신동현이 척 보기에도 밝은 낯으로 손에 뭔가를 소중히 꼭 쥔 채 다가왔다. USB라고 했다. 어디서 났는지를 물으니, 대령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라며 선을 그었다. 척 보아하니 그 간부의 것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영 쓸만한 정보도, 데이터도 없어 태워버리는 수 뿐이었다. USB를 찾겠다는 그의 계획은 족족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몇이나 죽었다. 처음과같은, 대령님을 모욕했느니 어쨌느니 하는 자극적인 퍼포먼스는 없었다.
그는 내부의 스파이를 잡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방법으로, 스파이를 찾아다니기로 했다. 뭐, 스파이를 만들기로 했다고 해도 어폐는 없다. 하지만 영 실마리가 없었고, 명분이 있는 대령의 등장으로 잠시 잠잠해졌던 간부들이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하자, 신동현은 USB라는 물질적 성취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약간 섬뜩하게도 느껴졌다. 부드러운 인상의 멀끔한 청년이, 그 얼굴에 걸맞은 나긋하고 얌전한 목소리로 어디에 있는 누구를 찾아내어 사지를 찢어발기고 오겠노라고 말할 때면, 마음이 이상하게 요동쳤다. 그건 농담이나 과장이 아니었다. 내가 그에게 목을 자르는 정도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그는 한참을 묘한 눈빛으로 있다가 수락했다.
말로는 그가 나의 부관이었지만, 하는 일로는 내가 그의 부관이었다. 아니, 명확히 하자면 그는 부관이 필요없었다. 나는 일종의 도구일 뿐이었으니까. 그 당시에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연 중령에 관한 무슨 말이라도 들리면 달려갔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연 중령의 잃어버린 가족인 줄로만 알았을 것이다.
보통 손을 더럽히는 일은 신동현이 했다. 어느 날, 신동현은 기어코 도움 되는 USB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신동현은 기절한 사람 한 명을 업고 돌아왔다. 그러곤 내 앞에 그 사람을 패대기치더니, 숨을 색색 대다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반짝이는 눈으로 말했다. 이 놈이 USB와 연 중령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고문을 하면 불 것이라고, 저가 혼자 할 수도 있었지만 중요한 순간이니만큼 대령님과 함께 하고 싶어 들쳐업고 왔노라고. 나는 이런 일에 나를 참여시키기 위해 기절한 사람을 업고 오는 정성에 놀라면서도, 그 행위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는 것에 미안함을 느꼈다.
직위는 아마도 대위, 전쟁 전 7경비단의 간부였다. 신동현과는 초면인듯 해보이던 그 대위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쩌면 나와는 구면일지도 모른다. 10년도 훨씬 지난 시절의 일을 기억하진 못했지만, 나의 직장에도 군인은 많았으니, 그 중 한 명이었대도 이상할 건 없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피하며 이 일이 어서 마무리지어지길 바랐다.
나는 아무래도 정복이 몇 벌 없기에 피가 튀지 않도록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그것을 감상했는데, 일이 다 끝나고 보니 바짓단에 핏물이 튀어있었다. 신동현은 대위가 USB를 보관한 장소를 불었다며, 터무니 없게도 본인이 머물던 곳의 마루 장판 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끌고 오기 전에 집부터 뒤져볼 걸 그랬습니다, 하는 신동현에게 내가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대답하자 신동현은 활짝 웃었다.
기왕이면 연 중령의 위치도 알았다면 좋았을텐데, 허탕이네요, 완전 꽝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곤 잠깐 주저하다가, 들고 있던 칼을 내 책상에 슬며시 내려놓았다. 묶여있던 대위는 안도하는 기색이었으나, 나는 신동현의 눈빛에서 자비가 아닌,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갸륵함을 보았다. 그건 대위가 아니라 내게 보이는 감정이었다.
대위는 뒤돌아 선 신동현의 표정을 알 수 없었을 테지만, 내가 느끼는 불안감은 알아챌 수 있었다. 신동현에게 감히 상관에게 그런 눈빛을 하느냐며 야단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신동현이 내게 바짝 붙더니 이렇게 속삭였다. 대령님께서 처리하십시오, 하고 신동현이 내게 제 홀스터에서 꺼낸 권총을 넘겼다. 마치 일종의 보상을 내리는 듯 한 말투였다. 나는 군말하지 않았다.
USB 해독에 대한 실패가 이어지자, 신동현은 또 한참을 혼자서 싸돌아다녔다. 그러곤 끝없이 중얼거렸는데, 그건 아마 내가 이해하기엔 꽤 까다로운 종류의 사상 같았다. 나는 특별히 그를 걱정하진 않았다. 누굴 걱정할 처지도 아니었고, 신동현은 동정을 받아서 기꺼워할 인간상이 아니었다.
간부들에겐 눈에 보이는 성과가 필요했다. 그래야 지원금을 줄 수 있다는 명목이었지만, 글쎄, 지원금이고 자시고, 그런 건 없다. 애초에 정부가 없었다. 그러나 저들의 명목은 있었다. 신동현에겐 상관의 결재가 필요했고, 거부는 하극상이었다. 물론 전부 다 헛소리였다. 모두 허울뿐이었지만 군대라는 곳은 허울이 크게 작용했다.
내가 멋대로 결재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살얼음판같은 군대의 정치판에서 함부로 그랬다간 대령이고 자시고 목이 떨어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에 그들에게 나는 가짜니까 더욱 스스럼이 없을 것이다. 간부들은 신동현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나 또한 그랬다.
반복되는 실패, 피 냄새, 무능한 상관과 쌓이는 업무, 그리고 왜인진 모르지만 신동현에게 작동한 어떤 트리거가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신동현은 대뜸 선한 서울 시민이 존재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선하다는 게 뭐지? 내가 되물었지만, 신동현은 답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신동현이 말하는 통합의 의미가 나와는 달라진 것 같았다. 하지만 말마따나, 기호지세였다.
신동현은 어느 날 내게 시간이 있느냐고 물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라고 장난스레 답했다. 부대의 총사령관이 그리 나태하면 안되신다고 추궁할 법도 했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신동현은 그러는 대신 비싸 보이는 술 한 병을 냅다 내 앞에 내려놓더니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일종의 고해성사였다. 다만 무엇인지 알아들을 정도로 명확한 고해는 아니었다. 불명확한 발음과 온갖 비유가 섞인 무언가였다.
나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지만, 나는 그에게 분명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와 거리를 두려 시도하기도 했지만, 부대의 실권력자인 신동현이, 심지어 내 부관이기까지 하니 거리를 둘래도 둘 수가 없지 않은가. 신동현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내게 대피소로 데려가는 건 우리 국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처음 신동현의 정의를 들었을 때와 같은 열정은 더이상 내게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는 신동현의 얼굴은 방금 뱉은 말의 진의가 의심될 정도로 태연했다.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나 나나, 이해받을 대상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이해나 문제의 해결 따위는 우리에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애초 우리는 섣부른 이해가 어떤 폭력이 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면의 무가치한 해체와 사상적 침입은 보통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기 마련이다.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주는 상대의 존재가, 어떨 때는 고맙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이해해줄 상대를 갈구하는 것이 인간이겠지. 비록 나는 한번도 이해받아본 적 없고, 신동현은 자신을 감히 이해하려 하는 상대를 경멸했지만. 나는 신동현에게 고마움을 느꼈는데, 신동현도 그럴까?
핵을 터뜨리기 위해선 암호의 해독이 필수적이었다. 우리는 기술자들과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늙은 간부들은 프로그래밍은 커녕 스크린을 다루는 것에도 서툴렀고, 나 또한 전자기기를 다루는 데엔 센스가 없었으며, 신동현은 수와 계산에 터무니 없이 약했다. 물론 나보단 잘난 편이었지만 말이다. 기술자들과 돈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 신동현은 제대로 미치기 시작했다.
계속 받는 신병은 수준이 너무나도 떨어졌고, 총사령관의 부관이자, 굳이 따지자면 총사령관 본인이기도 한 신동현이 밖에 나가 보초까지 서야 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그럼에도 계속 노트에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한동안 밖으론 한 걸음도 떼지 못한 셈이었다.
물론 여기서 미쳤다고 하는 것은 단지 내면만을 말하는 것이다. 신동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맑은 눈을 하고 실없는 웃음을 지었고, 여전히 부하들에게 냉정했으며, 태연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사상자 수를 브리핑했다. 신동현은 부드럽게 씩 웃으며 오늘 저녁 우리끼리 술 한잔 어떠시냐고 물었다.
신동현의 방은 자주 바뀌었다. 부사관 숙소에 묵는 사람이 많지 않아 그럴 수 있었다. 7경비단에 사람은 많았지만 숙소에 머물 만큼 대단한 사람은 많지 않았던 탓이다. 신동현이 방을 바꾸는 이유는 의외로 별 게 아니었는데, 종종 찬 바람이 너무 많이 들어오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그걸 또 내게 왜 보고 하는 건지, 천막에서 자는 제 부하들을 생각하고도 그런 배부른 소리가 나올까 싶었지만 신동현은 그들을 제 부하로 생각하지 않았다.
신동현이 가장 최근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쓴 방은 산등성이가 훤히 보이는 방이었다. 내심 신동현이라면 어떤 군사적 이유를 들고 방을 고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산등성이 너머로 적을 본다거나... 물론 그건 내 환상이었고, 신동현은 그저 가만히 앉아 초라한 나무들을 지켜봤다. 그러곤 산을 보니 떠올랐다는 듯, 도봉산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내가 괜히 아는 척을 하자, 신동현은 대꾸도 없이 다음 주에 그곳으로 산행을 가는 게 어떻겠느냐 물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자신의 계획에 대해 갖는 신동현의 심란함은 복합적인 것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이 필수적이었고, 그 중엔 어쩌면 군인들이나 그 가족 또한 있을 것이다. 애초에 연 중령의 부하들이 전부 군인이었다. 신동현은 그들을 군인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아 그의 계획이란 건 고산자로와 다를 바가 없었다. 정의를 위한 전쟁, 혹은 그렇게 포장된 이기로 인한 학살. 신동현은 저가 국가를 위해 헌신한다고 믿으면서 동시에 현실을 볼 줄도 알았다. 그 둘 사이의 모순을 신동현 스스로는 해명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그건 신동현의 한계이자 진실로 인간적인 면모 중 하나였다.
도봉산에 가기 얼마 전부터 컨디션이 좋았던 신동현은 가는 내내 내게 어떻게 자신이 이 여자의 거처를 알아냈는지, 어찌할 셈인지를 상세히 설명해줬다. 분명 내게는 산행이라고만 했건만... 물론 나도 산행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 길에는 정 상병도 동행했는데, 정 상병은 우리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총의 가스조절기를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다만 신나서 주절대는 신동현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긴 했다.
그리고 또 다시 총성이 울렸다.
신동현은 시체를 치우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지만, 도봉산에서는 시체를 치우지 않았다. 시체를 업고 하산이라니, 무리예요, 신동현은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내심 그런 얼토당토않은 내숭의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신동현이 그 여자를 보자마자 한 말이 아직도 종종 머리에서 울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중사님, 하고...
나는 아직도 신동현이 가졌던 서울의 통합에 대한 이상하리만치 강한 열망의 티끌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그런 거대한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신동현이 날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으니까. 그렇지만, 난 그저 궁금할 뿐이다. 신동현이 가진 것도 내가 가진 병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을까? 나의 경우엔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문제의 것이었지만, 신동현의 경우에도 그랬을까?
그럼 그는 '치료'할 수 있는 문제를 갖고 질질 끌다가 속부터 곪아 죽어버렸다는 말인가? 스스로 그것을 이겨낼 수 있다고 합리화해가며,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을 미쳤다고 생각하며? ...마치 나처럼?
어쩌면 우리 둘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광기, 미련함, 혹은 순진함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에서...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내가 바랐던 것은 어쩌면, 장교라는 직위가 아니라...
어떻게든 날 침범하고 해체해서, 진정으로 이해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신동현은 지금 죽고 없다. 나는 그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그저 어느 때부터 연락이 끊겼고, 이젠 나도 더이상 스물을 겨우 넘긴 어린애가 아니게 되어, 서울에서의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님을 알 뿐이다. 정황을 살피기 위한 후속부대는 내가 떠나기 하루 전 출발한 참이다. 마지막으로, 신동현은 나서기 전에 제 총을 점검하면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령님은 서울을 왜 통합하고 싶으신 건가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아마 그것이 정의고 대의니까, 군인이란 자고로 저보다 나라를 우선해야 하니까, 이런 식의 횡설수설을 덧붙였던 듯싶다. 신동현은 허울없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령님, 전 사사로운 정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정말 싫습니다. 그들은 진정 중요한 게 뭔지를 잊고 있습니다. 저는 한 평생을 국가와 군대의 부활을 위해 힘써왔는데, 대령님은 어떠십니까?
마치 어머니가 자녀에게 저녁 메뉴로 뭐가 먹고 싶냐고 묻는 듯한, 정말 일상적이기 그지없는 말투의 회화였다. 신동현의 옆얼굴에서, 난 늘 그렇듯 태연한 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내가 그 말에 대한 대답을 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신동현은 죽었고, 나는 지금 민간인이다.
대령의 정년은 56세였고, 핵이 터지기 전 아버지가 정년을 두서해 남긴 노인이었으니, 난 정년을 한참 넘긴 셈이다. 물론 전부 다 헛소리였다. 모두 허울뿐이었지만 군대라는 곳은 허울이 크게 작용한다는 게 상식 아니던가. 간부들은 눈엣가시를 뽑듯 내게 퇴직금을 넉넉히 쥐여줬다.
신동현이 죽자마자 찬 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병사들이 두려워하던 건 내가 아니라 신동현이었으니, 호랑이가 떠난 산에서 어떻게 여우가 계속 왕 노릇을 할 수 있을까? 신동현이 호랑이 같은 남자라는 뜻은 아니지만, 여하간 상황이 그러했다. 당장은 아무 문제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앞으로는 장담할 수 없다. 뒷배가 사라졌으니...
공상의 뒷받침이 하나둘씩 사라지면, 허무고 뭐고 없다. 나는 7경비단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사실을 전하려고 한 적도 있지만, 그들은 내가 미친놈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리고 몇 명은 내가 사람을 죽이는 걸 본 적 있다고 했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7경비단은 작은 세계였고 그 세계의 모두가, 말하자면 각기의 방식으로 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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