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만찬
2024년 07월 14일에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을 옮겼습니다.
어느 날 서울에는 민주주의가 돌아왔다.
마치 사라진 적도 없었다는 듯이 뻔뻔하게도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세상을 다시 한번 뒤집어놓았다. 공무원들, 민병대, 엽우회, 어딘지는 몰라도, 그들이 시작한 일종의 계몽운동이 빛을 발한 셈이었다.
제일 먼저 부활한 것은 행정부였다. 곳곳에는 민주적인 절차대로 세워진 행정복지센터가 생겼고, 이윽고 대대적인 인구조사가 있었다.
전쟁 전 서울의 인구 중 확실히 죽은 사람들에 대해 조사하고, 나머지는 실종으로 처리했다. 전쟁 이후 태어난 사람들을 추가하고 주민등록번호를 부여했다. 그러면서 점차 질서가 바로잡혔다.
다음으로 부활한 것이 사법부였다. 이 혁명을 일으킨 다수의 피지배층은 소수의 지배층을 처벌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본인들만은 무법자였던 그들과 다르다는 듯, 엄격한 법에 입각하여 그러길 바랐다.
버려져있던 법원과 교도소들이 부활했다. 어느새 공권력이라 이름 붙여진 이들이 소수를 붙잡아다 정의의 이름 아래 경질했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의 현현이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은 힘이 없던 다수에게서 비롯했다.
힘이 많던 소수는 그렇게 세상의 변화 속에서 사라졌다.
...
하지만 그 소수들은, 그들이 누리던 무법천지와 같이 간단히 소멸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회복시켰다는 것에 탄력을 얻은 다수는 그들을 심판함으로써 계속 꿈꿔왔던 무결하고 완전한 정의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심판자들 중에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런 디스토피아 서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사람을 죽였다.
"그럼 그들과 우리가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그 살인의 과정에서 쾌락을 느꼈는지 아닌지?"
그리고 여기, 그런 궤변을 토대로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는 남자가 한 명 있었다.
"어차피 그들이나 우리나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인 것은 같아. 우리가 권력을 위해 살인을 했다니, 그런 주장은 근거도 없을 뿐더러, 당장에 본인들도 인간답게 살겠다는 같잖은 이유를 위해 우리를 살인하려고 하잖은가? 전부 어불성설이라고, 어불성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게 맞긴 한 건지, 반질반질한 얼굴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또 그런 남자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남자.
"...대령님, 괜히 힘 빼지 말고 가만히 계세요."
남자, 동현은 제 맞은 편에 앉은 대령을 일축하듯 읊조렸다. 대령은 뭐가 그리 분한지 하, 하고 한숨을 뱉더니 고개를 도리질했다.
"자네도 그리 가만히 앉아있지 말고, 뭐라도 한마디 해보게, 응?"
동현은 아무 말 없이 대령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마음 먹은 듯 시선을 돌렸다.
"젠장, 평소에는 시키지 않아도 잘만 정의를 운운하던 자식이, 무슨 다 산 것마냥 저러느냔 말이야. 응? 밥에 뭐 이상한 거라도 들었나."
대령이 이죽거리며 동현 몫의 빵을 툭툭 건드렸다. 동현은 욱하는 마음을 겨우 삼키며 후...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으응? 그럼 뭐가 중요하길래?"
잘난 신동현 중사님께서 말씀해보시지, 하고 대령은 빈정거렸다. 동현은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이어 말했다.
"지금 여기, 서울남부교도소 아닙니까."
"그렇지."
"명백히 국권이죠."
"그렇지, 아무래도 사람을 구속하려면."
"그런데 말입니다..."
동현이 제 군복 앞주머니를 뒤적였다. 아직은 사치스럽게 수감자들을 위한 옷을 만들 형편이 아니었기에, 동현도 대령도 피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그들의 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 중 진짜 공무원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동현이 꺼낸 것은 그의 공무원증이었다. 대령은 홀랑 그것을 낚아채 흔들리는 눈으로 훑어봤다. 동현은 마치 재밌는 옛날이야기라도 하듯 웃음기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저는 아직도 명백하게 기억합니다. 그 날의 풍경을 말입니다. 나라를, 시민을 지키기 위해 나름의 사명을 갖고 모인 이들이 바로 그 나라에 의해, 성난 시민의 손에 죽어가던 그 모습 말이죠."
"이거 사진, 진짜 자넨가? 참, 이렇게 멀끔하게 생긴 놈이 겨우 몇 년 만에 이리 폭삭 삭아서는..."
동현이 대령의 손에서 공무원증을 앗아갔다.
"...서울의 거의 모든 공무원은 폭발의 그날, 타인을 위해 헌신하다 죽어갔습니다. 그러니 저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만약 저 중에 진짜가 있다 한들..."
동현은 빙긋 웃으며 제 주머니에 다시 공무원증을 넣었다.
"그들은 시민이 그들을 필요로 한 순간에 외면하고 도망친, 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이들이죠."
"그럼 자네는?"
동현이 흘끗 대령을 봤다. 대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맑은 눈으로 동현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동현은 아무렇지 않게 하하 웃었다.
"아시는 분이 왜 이러십니까. 저는 그때 더 큰 정의를 실현하느라 바빴습니다."
"아무렴."
"아무튼, 가짜 공무원이 진짜 공무원을 국가의 이름으로 처벌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나 국헌문란이니 반란 모의니 하는 것에는요. 그런 건... 민중이 감히 심판할 게 아니지요."
"그래."
"대령님도요, 그들과 대령님이 본질적으론 같다고 증명하려 노력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다르다고 증명하셔야 될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대령이 순수한 의문으로 동현을 올려다봤다. 동현은 자신의 시혜적인 태도를 과시하듯이 살짝 웃었다.
"제가 대신 증언해드리겠습니다. 대령님은 열 살 남짓 어린애일 때 거처 없이 떠돌던 것을 제가 재우고 먹였을 뿐이라고요. 당신은 제가 해 온 그 어떤 행위와도 연관되어 있지 않으며, 직접 사람을 죽여본 적도, 그리하라 명령한 적도 없는 정말 순수한 사람이라고요."
그 불쾌할 법도 한, 아니, 불쾌한 말에도 대령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았다.
"별 짓을 다하는 군. 그래, 그렇게 나를 살리고 나면 자네는 뭐 어찌하려고?"
"첫 재판 때,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게 있지요. 전쟁 이후, 저희 7경비단에 대한 아무런 문서기록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대령은 불과 며칠 전에 있던 첫 재판을 떠올렸다.
"그래, 그거. 유의미한 증거래봐야 그 비디오가 전부 아닌가."
"그날의 증거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저는."
동현이 자꾸만 피식피식 웃었다.
"저희는 무언가를 문서로 기록한 적이 없습니다, 대령님. 그건 원활한 부대 관리를 위해서이기도 했고, 그럴 자원이 부족해서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죄 입증을 방해하는 데에 기여했죠. 이것도 다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는 제 원칙적인 성격 덕 아닙니까? 생존자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증인이라는 게 있었을 텐데..."
"이럴 때까지 구태여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자네 심리를 모르겠군. 뭐, 그게 아니었으면 우리도 그 인신매매범들처럼 곧장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겠지.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신정부도 참 특이해."
챙그랑, 동현이 식판을 바닥에 내리쳤다.
"신정부라니요."
대령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이어 말했다.
"...그래, 자네 표현을 빌리자면 괴뢰정권이겠지. 어쨌건 이 괴뢰정권도 참 웃긴 것이, 과장을 참 잘한단 말이야. 인신매매에 사형이라니, 듣도보도 못했다고."
대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면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런 것보다...
"그리고 보통 사형집행을 재판장에서 바로 하도록 되어있나? 무슨 쇼도 아니고."
"그게 이 정권의 셀링포인트니까요. 일종의 쇼맨십이랄지, 국민이 바라는 극단적 법치와 형벌을 굉장히 과시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초기 공산주의 정권처럼... 그런 면에서 저희 같은 이들은 오체분시가 되어 마땅하죠."
"그래서 그런데, 우리 맞은편에 있던 청년 말이지, 그 엽우회인지 뭔지에서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고문과 반인륜적인 짓을 했다던 청년 있잖나. 어제 사형당했나 보더군. 다른 이들처럼 법정에서 그대로 집행됐나 보지, 안 돌아오는 걸 보니까."
대령이 제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비비 꼬았다.
"듣자하니 팽형(烹刑) 이랬던가. 체계는 21세기 내각제지만 형벌이나 감수성은 전부 무슨 진나라 시대에 멈춰있어."
"하하, 전쟁 후의 서울을 무법지대로 규정하고 타파하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것 치곤 참 우습지 않습니까?"
그때, 쾅- 하고 철창이 진동했다. 순찰로 지나가던 간수였다.
"범죄자 새끼들이 조잘조잘 말이 많아. 아가리 좀 하자, 응?"
"...아가리."
대령이 중얼거렸다. 동현이 풉, 하고 웃음을 참았다. 바깥에 있던 간수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둘도 마찬가지였다. 적막에 휩싸인 교도실에서 대령이 빵을 찢는 미세한 소리만이 들렸다.
대령은 잘게 찢어진 빵부스러기를 스프 위에 뿌렸다. 그러곤 한 숟갈 뜨더니, 불만족스러운 듯 동현의 식판과 제 식판을 맞바꾸었다. 동현은 그러기를 기다렸다는 듯, 대령이 넘긴 식판에 담긴 음식을 먹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의 어느 주에서는 사형수가 사형당하기 직전에 원하는 음식을 먹게 해준다고 하더군. 최후의 만찬이라고 하던가."
대령은 다시 빵을 잘게 찢고 있었다. 동현은 굳이 눈길을 주지 않고 말했다.
"마치 저나 대령님이 사형당할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자네는 그렇게 된다면 무엇이 먹고 싶나?"
"저희 나라는 사형 사실을 사형수에게 전달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여느 때처럼 일상을 보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끌려 나가 도살당하는 겁니다. 지금처럼요."
도살이라는 표현은, 동현치고는 꽤나 감정적인 말이었다. 살아생전 그가 범죄자 따위에게 감정을 이입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대령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나는 뭐랄까, 제대로 된 국물 요리가 먹고 싶군. 여기서 주는 형편없는 것 말고, 제대로 된 것 말이야. 전쟁이 난 이후로 통조림이니 편의점 음식이니 간편식으로만 때웠더니..."
"대령님."
"그래. 도살 말이지, 도살!"
대령은 대뜸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제 처지가 한심스럽다는 듯, 아니면 자신 스스로를 동정하듯이.
"맞은 편의 엽우회 청년이 팽형을 당하기 전날 부식이 뭐였는지 아나? 삼계탕이었어. 하하! 참, 정말... 다음날의 자신처럼 푹 끓여진 닭을 맛있다고 미련하게 처먹었겠지."
동현은 그 눈물마저 거짓임을 알았다. 대령은 우는 법이 좀체 없었다.
"대령님, 대령님은 심신미약으로 감형되실 겁니다. 대령님의 그 뼈 깊이 새겨진 우울증은 이 시대에 이르러 현대인의 고질병처럼 되어버렸지만, 전쟁 전부터 갖고있던 조현병과 망상장애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럼 자네는?"
"아까부터 같은 질문을... 말씀 드렸잖습니까, 가짜 공무원은 진짜 공무원을 국가의 이름으로-"
"팽형 말일세, 팽형. 대한민국은 김대중이 때부터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한 적이 없어. 그런데 그런 나라가 사람을 물에다 넣어 끓여 죽였다, 이 말이지."
동현은 무감정한 얼굴로 대령을 돌아봤다. 대령도 어느새 진지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뺨을 적신 눈물과는 대조되도록 냉정한 눈빛이 동현을 꿰뚫는 듯했다. 그에 동현도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자네가 끓는 물에 고아져 죽으면, 난 앞으로 어떻게 국물 요리를 먹겠나."
순간 맥이 탁 풀린 동현이 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얼마 후면 다 잊으실 것 아닙니까? 다른 모든 일에 그러시듯이..."
"자네와 관한 것이 어떻게 그런 일들과 같을 수 있겠나?"
대령이 다시 찢어둔 빵가루를 스프 위에 뿌리더니, 한 숟갈도 뜨지 않고 팔짱을 끼고 앉았다.
동현은 슬쩍 창살 근처로 다가가 그 너머를 살폈다. 인기척이 없었다.
동현이 다시 대령과 마주앉았다. 그리고 제 스프를 떠 대령에게 디밀었다.
"수감되신 이후로 음식이라곤 입에도 안 대셨습니다."
"됐어, 밥맛이 없네."
"대령님, 대령님께는 미래가 있으신데 뭐가 고민이십니까. 그러실 시간에 그리 확신하시는 제 사형부터 어떻게 좀 해주십쇼."
동현은 농담하듯 말했다.
"나한테 무슨 미래가 있나? 자네가 죽게 되면 나도 죽을 텐데."
"왜 이리 비관적이게 되셨습니까?"
"그러는 자네야말로, 언제부터 그리 이상적이었다고?"
"저는 언제나 이상적이었습니다. 이상을 좇아 새로운 세상을 꿈꿨죠. 하지만, 뭐... 보시다시피."
대령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자,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드셔보십쇼. 이 스프가 제 피와 살이라고 생각하시고..."
동현은 스프를 후 불어 식히고 다시 대령의 입가에 대었다.
"되었대도 그러네!"
그에 동현은 주춤하다 결국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또 잠시 정적이 지나고, 동현은 대뜸 대령에게 말했다.
"대령님, 저와 약속하나만 하시죠."
"약속?"
"만약 대령님께서 혼자 법정에 서시게 된다면, 제 말만 따라 하시는 걸로요."
"자네의 말이라 함은?"
"나는 신동현의 뜻에만 따라 행동했을 뿐이다, 원래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이런 것들이요. 어차피 전부 사실이니까 괜찮잖아요?"
그 의중을 모를 말에, 대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보고 지금 자네를 배신하라는 말인가?"
"배신이 아닙니다, 대령님. 생존전략이죠. 원래 상관에게 있어 부하란 쓰고 버리는 장기말 아닙니까."
"뭐라는 겐가, 대체..."
대령이 학을 떼듯 읊조렸다.
"내가 자네없이 혼자 법정에 설 일이 있을까 모르겠군. 어떻게 상관이 부관 없이 혼자 있을 수 있겠나?"
"그래도 대령님은 저를 부인하게 되실 겁니다, 몇 번이고요."
대령은 동현의 그 굳은 확신에 차마 어찌하지 못하고 가만 바라만 봤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하자면요?"
"나는 그 반대를 상상했네."
동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는 지금껏 나를 전면에 내세우질 않았나. 지금껏 계속 그래왔지. 나는, 자네가 책임을 지기 싫은 줄로만 알았는데... 의외로 그런 파렴치한 이는 아니었나 보군."
대령은 말한 스스로가 우스운지 킥킥 웃었다.
"자네 입장에서 보면... 자네가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는 편이 더 낫지않나. 그런데 나를 풀어주겠다? 자네가 나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상관의 명령에만 따랐다는 변명은 너무나 구식입니다, 대령님. 아이히만 이후로 한 물 가버렸단 말입니다. 아이히만은 교수형이었습니다."
"자네는 나를 일방적으로 이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자네를 충분히 이용했어. 그걸로 된 걸세."
"저희, 왜인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만 같지 않습니까? 저희의 말이 섞이질 않네요, 지금껏 늘 그래왔지만..."
대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또 철컹, 하고 쇠창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신동현, 나와. 2차 재판이다."
대령은 고개를 들어 간수를 봤고, 동현은 그러지 않았다.
"나오라고, 새끼야."
대령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는 동현을 봤다.
"아까까지는 멀쩡하더니, 왜 또 어리광인가? 그 나이 먹고 쇠창살까지 배웅이라도 해달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젠가?"
동현은 괜히 무슨 말이라도 할 듯 입을 옴싹이다가, 이내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게."
나가기 전, 동현은 흘끗 뒤를 돌아 대령을 봤다.
"아까 말씀하신 최후의 만찬, 말입니다만..."
대령이 동현을 올려다봤다.
"빵과 와인 정도가 어떻습니까?"
"자네가 그리 먹고 싶다면 그리 먹는 거지. 나는 그래도 국물 요리일세."
동현은 그런 대령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 맞습니다."
그 맥 없는 대답에 대령은 왜인지 모든 의지가 한풀 꺾여 수저로 애먼 스프나 뒤적거렸다.
"저 없는 동안 식사는 거르지 마십쇼, 몸 상하십니다."
그 말에 대령이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 동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재판이 뭐 그리 오래 걸린다고, 유난은..."
...
마주 놓인 식판, 온전한 채인 음식들이 대령의 속을 메슥거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동현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도 없겠다, 대령은 그냥 스프를 한 숟갈 떴다.
식판을 비우는 동안, 대령은 왜인지 모를 죄악감에 하늘로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식사를 하면서 이리 죄인이 된 기분은 처음이었다. 입 안에서 빵조각을 녹여 먹으며, 대령은 하늘에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동현이 꽤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았을 때, 둘 간의 대화를 곱씹던 대령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렸다.
피와 살, 빵과 와인, 배신, 몇 번의 부인, 그리고... 최후의 만찬.
대령이 방금 느낀 죄악감의 이유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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