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3

2033년 4월 4일

시계가 13시를 가르키던, 맑고 쌀쌀한 4월의 어느 날.

2차 by 사단장

2022년 10월 20일에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을 옮겼습니다.


민들레가 군화에 밟혀 뭉개졌다.

돌 위에 히마리없이 뉘여진 민들레를 몇번이고 문댔다. 채 피지도 못한 꽃봉오리가 무참히 으깨졌다.

4월의 찬바람이 목께를 훑고 지나갔다. 폐까지 으슬거리는 기분이었다. 내게 담배를 태우는 취미라도 있었더라면 조금이나마 나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셈이지? 대령은...

아직 그 사람을 대령이라 여기는 것조차 어색했다. 대령님이 돌아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냉큼 자리를 채어 대령행세를 하는 것이 좋게 보이지 않는 것은 비단 나 뿐이 아닐 것이다. 대령님을 아는 사람이 날 비롯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큰 그림만 보자면 아쉬울 것이 없었다. 어쨌든 그 사람은 대령님께서 직접 임명하셨을 뿐더러, 그가 말을 잘 해준 덕에 고산자로와 관련된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니 말이다. 이로써 대령님의 뜻에 한발짝 가까워졌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

물론 그 이후 부대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지만... 애초 혼자 이루려 각오한 과업이니만큼 불만은 없다. 있었단들 대령님께 말했어야 옳지.

다만, 내가 불쾌한 것은...

"신동현." 등 뒤에서 묘하게 웃음기 띤 목소리가 들렸다. "산책하기엔 조금 쌀쌀한 날씨 아닌가?" 갑작스레 나긋한 어투로 묻는 것이 퍽이나 반가웠다. 나름 인적드문 멀리까지 나와 신세한탄을 하고있는데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몸 둘 바 없었다. 먼 곳이래봤자 부대 인근이었지만.

"충성, 중사 신동현." 내가 뒤돌아 경례했다.

"그래, 그래. ...응? 중사?" 대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자네를 상사로 진급시켜주지 않았던가? 먼젓번에 말이야." 태연히 묻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네? 잘 못 들었습니다?" 얼결에 되물은 내 목소리가 꽤나 바보같았을 것이다.

진급? 언제? 부관인 내가 없으면 간단한 서류 처리도 못하는 인사가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진급시킨다니, 대체 무슨 소린지.

대령이 내 등을 도닥였다. 딴에는 나를 어엿비 여기는 듯하여, 속이 메슥거리는 것을 겨우 참았다.

"뭐, 진급되자마자 그런 일이 터졌으니 깜빡 잊는 것도 무리는 아닐세만..."

그런 일?

이번엔 아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을 테다, 대령의 낯에 비친 즐거워하는 기색을 보아하니.

부대에 불미스런 일이 있었던가? 마땅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명색이 총사령관의 부관인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일도 아주 사소한 일이 아니라면 없을텐데. 하물며 대령도 아는 일을 내가 모르는 것도 어불성설일 따름이고.

고산자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 그것은 이미 십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다. 그렇담 최근에 터진 그런 일이라 함은...

"대령님께서 돌아가신 일이요?"

"응?"

"대령님께서 돌아가신 일을 말씀하는 것이냐 물었습니다."

대령은 가만히 서서 눈동자를 굴렸다. 마주보는 것이 눈에 익은 제복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영 좋지 않다. 무심결에 뱉은 말이었으나 취소할 용의도 없었기에, 그저 입을 다물고 대령을 내려볼 뿐이었다.

내 의중을 파악하자는 작정인가? 서로 잘 타협해놓고 이제와 구태여 이 얘기를 꺼내는 심리가 궁금할만도 하지.

대령은 한치의 표정변화도 없이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그 굳은 얼굴은 나보다 꽤나 아래에 자리했음에도, 마치 같은 높이에서 마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 세기같은 몇초가 지나고, 대령이 입을 열었다.

"신동현 상사, 자네에게 대령이라 함은 나밖에 없어. 내가 기억하는 근 십여년간, 최소 우리 7경비단 내에서는 말이지." 그러곤 씩 웃으며 내 가슴팍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혀를 절었나? 그런 것이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걸세. 내가 혼자 되도않는 망상으로 자네를 오해하기 전에 말이야."

가슴에 손가락이 아니라 칼이 박힌 것마냥 숨이 턱 막혔다.

그 말마따나 7경비단 내에 대령은 한 명뿐이다. 대부분이 십여년 전에 죽거나 탈영했으니까. 

...물론, 기록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나를 거쳐간 대령은 당장 눈 앞에 선 이 외에도 한 명이 더 있었고, 그건 마냥 먼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령도 이를 알 터였다.

모를리가 없지, 본인이 어떻게 그 자리에 올랐는데.

시선을 대령에게로 돌리자, 대령은 특유의 묘하고 밝은, 여상한 미소로 내 시선을 받아들였다.

원래 이 사람이 이랬던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은근히 대령은 이럴 때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묻던 사람이었다. 가끔 내 앞에서만은 방심하고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 지적받은 적도 몇 차례나 있었고. 어쨌든 대령님의 현현이라 부름직한 인물은 아닌 것이 빤했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령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연기를 잘하는 것인지 정말 그렇게 믿는 것인지. 하지만 내 앞에서까지 연기를 할 필요는 없잖은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는 그 본래의 표정을 드러냈던 것만 같은데. 사람의 눈은 그 빛만으로 수천가지 이상의 뜻을 전할 수 있다지. 지금 대령의 눈빛에서는 그 어떤 거짓도 허울도 보이지 않았다.

답은 하나 뿐이나 다름없다.

역할로는 만족을 못해서 기어코 죽은 사람의 거죽을 쓰겠다는 거구나. 

머리가 차갑게 굳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당장 이십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내게도 돌아오지 못한 그 자리를 채놓고서, 염치도 없이 말이다. 분명 대령님의 이름을 뺏어가라고 준 역할이 아닐텐데.

내게는 대령님께서 보좌역을 내어주셨다. 그것이 사령관보다 못하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난 부사관이고, 그것나름대로 과분한 신뢰를 받고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되려, 그럼에도 당신께서 직접 달고다니던 그 명찰을 채워주시지는 않으셨건만...

"대령님."

가엾은 사람같으니라고.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맞지않는 자리를 제 것인양 걸쳐입고 덜그럭대니.

하지만, 그렇단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른된 도리로, 혹은 제정신인 자의 도리로.

"대령님이 그러신다고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대령의 한쪽 눈꺼풀이 잠깐 경련하듯 떨렸다. 원래 인간은 저러한 반사적인 행동을 조절할 수 없다. 나도 톡톡히 알고있는 사실이라지만, 대령이 저러는 것을 보자니 마음이 언짢았다. 너무도 사람같지 않은가, 마치 나처럼.

하지만 오히려 그러해서 동정심이 들기도 했다. 정신병을 제 힘으로 이겨낼 수 있으면 그게 병이겠나, 싶은 안타까움이 생기는 것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방법은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 정도로 만족하시는 게 여러모로 좋을 겁니다. 대령님께도요."

맞지않는 신발을 신고 다녀봐야 다치는 것은 본인이다. 역할에 과몰입해봐야 남는 것은 없다. 아무리 남들이 떠받들어준대도 결국 공허할 뿐이지. 무대에서 내려온 배우라면 모를까, 당신은 그냥 주위에서 잘한다고 부추겨줄 뿐, 평범한 망상증 환자가 아니던가.

대령은 잠깐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나 싶다가, 픽 웃곤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자네는 그렇게 믿고싶은 거로군?"

대령의 눈동자는 저가 방금 한 말의 뜻을 모르는 듯 곧았고, 물처럼 맑았다. 나이에도 역할에도 맞지 않는, 아이같이 순진한 눈이었다.

"과거의 영광에 멈춰있는 건 하등 득될 것 없어. 현실을 보는 게 좋을 걸세. 자네가 말하는 것같은 대령은 없어. 지금껏 존재치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걸세. 안수근 대령은 나고, 내가 안수근 대령이니까. 나는 자네 앞에 빤히 살아있잖은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양 키득대던 대령이 이어말했다. "모두가 나를 안대령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나도 스스로를 안대령이라 믿는 판국에, 자네 혼자 아무도 알지못하는 대령의 존재를 부르짖어봐야 그게 어디 믿기기나 하냐는 걸세. 자네가 미치지 않고서야..."

제자리에서 연극적으로 빙글 돈 대령이 우뚝 멈춰섰다. 그 자연스러운 몸짓에 불쾌감이 먼저 드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분명 4월의 찬바람이 부는데도 정복만을 덜렁 입은 차림답지않게 추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령은 그저 그 곳에 있었다. 핏줄이 비치는 피부, 음성기관에서 나오는 목소리, 부드러운 관절의 움직임. 모든 요소가 그가 인간임을 방증하는데도, 도통 믿기지 않았다. 

"신동현, 자네는 자네가 본 그 대령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나? 망상증에 걸린 게 자네가 아니라 나라고 어떻게 확신하느냐는 거지. 그런 망상 탓에 상관 앞에서 허튼 소리를 하여도 괜찮은 것은 내가 자네를 많이 아끼기 때문이야. 고맙게 생각하는 게 좋을걸세." 대령은 턱에 손을 괴었다. "그래, 뭐어... 자네를 위해 잠깐 자네의 망상을 참이라 가정해볼까."

대령이 모래 바닥에 구두를 끌어 자국을 남겼다. 부드러운 모래가 먼지처럼 날려 허공으로 흩어졌다.

"먼 훗날의 일이겠지만 말이지, 정말 만약에... 자네 말마따나 가짜 대령인 내가 과거의 잔재를 몽땅 치워버리고, 모든 사람이 나를 안대령이라고 굳게 믿는 상황이 온다면... 그 때도 내가 가짜 대령인가? 애초에 역사와 거짓은 누가 정하는 거지? 자네는 모든 사실을 꿰고있나?"

"참이라 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게 참입니다."

어째선지 그 언제보다 대령의 얼굴이 앳되어보였다. 대령님의 춘추는 일흔이 넘으셨었지. 그런 이의 표정을 모방하는 것만 보아 여지껏 대령의 진짜 얼굴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갓 스물이 된 청년처럼 보이는 얼굴을 달고, 일흔이 지난 대령이라 주장하는 폼새가 퍽 믿음직할 성 싶었다.

"자네, 지금 내 얼굴이 많이 젊어보인다고 생각하고 있군? 그것 참으로 고맙네, 내 결혼만 일찍했으면 장성한 손주가 있을 법도 한데..." 대령이 고개만 돌려 나와 마주봤다. "...그런데, 자네는 또 어떻고? 전쟁 전부터 나를 보좌한 부관치곤 꽤나 어려보이는 얼굴이 아닌가." 대령은 제 나이답게 해사하게 웃었다.

나의 얼굴은 그저 나의 얼굴일 뿐이다. 타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내 세계의 것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 현실성은 누가 보장하겠는가? 반사적으로 내 얼굴을 더듬으려 했다가, 그 욕구를 억누르곤 눈에 힘을 주는데에 그쳤다.

"신동현." 대령이 쿡쿡 웃었다. "진실이란 무엇이지? 자네 혼자만 알고있는 진실도 진실로 칠 수 있는 것인가?"

"그럼요, 존재했던 사실의 집합이니까요. 대령님께서 아무리 본인을 대령님이라고 착각하셔도, 진실은 변함없습니다."

대령이 눈썹을 들어올렸다. 못마땅함의 소극적 표출인지, 가여워 아량껏 넘어가주겠다는 오만한 미소인지 모를 것이었다.

"그럼 나도 똑같이 말해주겠네. 자네가 아무리 진짜 대령이 존재했었다고 착각한다 한들, 진실은 변함이 없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납득하고, 슬슬 나를 자네의 대령으로 받아들여주는 게 어떤가? 내가 기억하라고 한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게." 대령의 눈에 부드러운 초승달이 걸렸다. "과거는 만들어지는 거야.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하는 법이지."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대령이 하는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어째선지 언젠가,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하지만 그것은 이미 먼 옛날 일만 같다. 전쟁이 나기 전의 일이었던가?

대령이 대령님을 제대로 연기할 수록, 나야 편해질 뿐이다. 실속없는 인사를 세워놓고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해보면 되는 문제니까. 그렇지만 대령이 스스로를 대령님이라고 착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어디까지나 대령은 대체제일 뿐, 진짜 대령이 되어서도, 될 수도 없기 때문에.

"때로는 새로운 현실이 탄생하는 과도기에 서있는 인간들이 자네같은 실수를 저지르곤 해. 과거의 진실이 영원하리라 믿는 것 말이야. 언젠가는 천동설 또한 자명한 사실이었어. 사실이란 건 그닥 절대적인 것이 아닐세. 알만한 나이잖나? 자네가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대령이 으레 그랬듯 미소지었다. "그리고..."

대령이 내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러 밀었다. 머리가 살짝 뒤로 젖혀졌다. 

"인상도 좀 피고말일세, 젊은 사람이." 대령은 웃으며 등을 돌리더니,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내가 항상 자네를 지켜보겠네!"

혼자 남아 미간을 문지르다 문득, 저 작자를 어찌해야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내 머릿속으로 여러 시나리오들이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머리에 총알을 박아줄 수도 있겠지. 저가 주장하는 대로 말이야. 대령님께서도 겪은 일이니, 끔찍이도 과분하군.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은 지금에서야 하등 쓸모없는 고민일 뿐이다. 나는 나로서 대령님을 기억하는 수밖에 없잖은가.

어쨌든, 달라지는 것이 없는게 내가 바라는 형태니까, 나쁠 것도 없었다. 결국 자유또한 일종의 예속이다. 그건 대령에게도 그럴 것이다. 그냥 이대로 허수아비같이 역할놀이만 착실히 수행해주신다면야, 대령님께서 원하시던 세상은 언젠가 내 손으로 이뤄낼 수 있겠지. 그를 위해 잠시의 역함을 참는 것 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생각치 못한 변수같은 것만 없다면 다 잘 될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은 없어야 하고, 영영 없을 것이다.

그 일만 끝나면 그 때는 대령을 어떻게든 해버리고 편히 쉴 수도 있을테야. 새로운 사령관을 세우는 것은 어렵지 않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노트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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