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갈 사랑하면 끝을 먼저 생각하게 돼요.

영원히 가질 수는 없을까요?

아빠, 우리도 강아지 키워요.

피솔빈이 태어나서 처음 욕심 냈던 거. 애완동물이 키우고 싶었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던 어린 시절 뭣모르고 했던 첫 욕심. 아버지는 보던 신문을 내려 놓고 솔빈을 빤히 내려다봤다. 한참을 그러다 다시 신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솔빈은 한참 어렸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대꾸할 가치도 없는 명백한 거절…. 피솔빈은 그게 익숙했다. 조금씩 커가면서 욕심을 내는 법을 잊었다. 하루 종일 쌈박질에 공부는 커녕 집에 귀가만 해도 칭찬을 받는 동생과는 다르게 피솔빈은 부모가 원하는 틀에 웅크려 있었다. 계집애가 무슨 공부를… 할 거면 선생이나 해라. 시집가려면 선생만한 직업도 없어. 그런 소릴 들어도 그게 맞는 줄 알았다. 사는 집도, 먹는 것도, 입고 있는 옷도 다 내가 벌어 해준건데 이런 간섭은 당연한 거 아니냐고 굴었던 아버지…. 아버지는 솔빈이 고등학교 입학하고 한 달도 되지 않아서 사고로 죽었다. 평소에도 과묵했던 아버지여서 그런지 금방이라도 눈뜨고 일어나 네 동생 안 챙겨주고 뭐했냐며 호통을 칠 것 같아서 솔빈은 그 자리에 1분도 서있지 못하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토했다. 등 두드려 주는 사람 하나 없이 화장실 변기를 부여잡고 한참을 토했다. 목이 뜨거워 우는 건지, 그동안의 설움이 터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대충 문지르고 다시 식장으로 들어갔을 땐 화장이 한참이었다. 피솔빈의 유년기를 까맣게 물들인 장본인 역시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평생을 이렇게 살 줄 알았는데. 또 그런 것도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가장이 빈 가정은 제대로 굴러가는 날이 없었다. 아버지의 빈자리가 있거나 말거나 동생은 늘 밖을 나돌았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던 은행원 일을 그만두고 전업 주부 생활을 했던 어머니께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졸지에 피솔빈은 한참 학업에 집중해야 하는 나이에 소년가장이 됐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하교하면 알바를 가고…. 바쁘게 사는 와중에 다가오는 다정을 밀어낼 줄 몰라서 학교 선배와 했던 연애는 두 달만에 끝이 났다. 학교에서 잠깐 보고 하는게 무슨 데이트냐고, 너네 집 그렇게 가난해? 빈 시간을 아르바이트로 가득 채운 제 일정이 이해가 안 되는지 첫 남자친구였던 선배가 그렇게 말했다. 네가 나한테 소홀해서 이렇게 된 거야. 솔빈은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정말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그 뒤론 애정을 욕심 내지도 않았다.

수능 날엔 도시락도 없이 시험만 보고 집에 와 하루 종일 울었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는데 풀 수 있는 문제가 많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게, 체력이 견뎌주질 못했다. 아르바이트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평일 주말 할 거 없이 빠듯하게 일하면 하루에 6시간을 자는 것도 행운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와, 무력감으로 방에 틀어박혀 얼굴을 언제 보았는지도 기억이 안 났다. 피솔빈은 그래도, 그래도 또 나갔다. 돈 벌러. 인생을 대체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피솔빈과 반대로 나아가는 동생 뒷바라지를 하려고. 그렇게 훌쩍 스물 둘이 됐다. 대학이 가고 싶어 다시 공부를 하면서도, 뭘 공부하기 위해 대학을 가는 지는 아직도 몰랐다. 수능을 보고, 원서 접수를 위해 작은 노트북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건 ‘선생님’ 하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넣었다. 제일 좋아했던 과목인 국어교육과로. 별 이유 없었다. 그거 말고 아는 게 없어서. 다른 과를 진학한다는 욕심을 낼 줄 몰라서. 그냥 그랬다.

학교에 적응할 무렵 만나기 시작한 남자는 번듯한 사회인이었다. 그 옆에 덩그러니 서서 점점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도 그럴게. 아버지가 했던 말이랑 똑같이 사는 것 같아서. 선생이 시집가기엔 좋아. 그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려고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럼 뭘 위해 선생님이 되었냐고 물어도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전세 기간이 끝나가니 같이 살자는 남자에 말에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 관계를 언제 끝을 내야 좋을지 고민했다. 감히 욕심을 낼 수 있는 인생이 아니었다. 남자의 인생은 그랬다. 견지원이라는 사람 옆에 제가 서있는게 잘못 맞춘 퍼즐 같았다. 분수에 맞게 살기는 피솔빈의 좌우명이었다. 명품 하나 가져본 적 없고, 갖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최신 유행이라는 핸드폰도 별로 갖고 싶지 않았다. 셋이서 사람같이 살려면 한 사람은 포기를 해야 했다. 동생은 포기를 몰랐고, 피솔빈은 욕심을 몰랐다. 그래서 자연히 포기는 솔빈의 몫이 되었다. 그게 이 관계에서도 다를 건 없었다. 견지원의 사랑은 포기를 몰랐고, 그래서 이별을 고하는 쪽이 솔빈이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새벽 공기가 이젠 차다. 며칠 전만해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미리 챙겨뒀던 짐가방을 등에 매고 택시를 불렀다. 같이 살던 집의 보증금이라던가, 앞으로의 거처를 어떻게 할 지는 대충 생각해뒀다. 학교 근처 고시원에서 방학 때까지만 버티다가…. 방학이 되면 연락해봐야지. 두 달이면 괜찮을 것 같았다. 5년 동안 사랑했던 기간이 어떻게 두 달 안에 다 지워지겠냐만 그래도 말을 하며 울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택시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오기 전에 봤던, 웅크려 자고 있던 견지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인사는 하고 올 걸 그랬나. 근데 그랬으면 또 무슨 핑계를 대며 붙잡을지 뻔했다. 당연히 그걸 이길 자신이 없어 도망쳤다. 고시원에서 지내는 동안 견지원에게 연락이 오면 어떻게 해야하나 벌써부터 무서웠다. 다짐했던 걸 다 잊고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해버릴까봐. 욕심을 내는 스스로가 무서웠다.

솔빈쌤. 샴푸 바꿨어요? 그 전에 쓰던 게 훨씬 좋았는데.

어색하게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고시원 샴푸가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어요. 같이 살던 집은 견지원의 취향대로 향수로 유명하다는 브랜드의 바디 용품 라인으로 욕실이 가득 채워져있었다. 괜히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모니터를 다시 쳐다봤다. 애들 중간고사 기간이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딴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할 일이 꾸역꾸역 밀고 들어왔다. 수업을 하고 끝나면 잔업하고 고시원으로 돌아갔다. 남은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책을 읽었다. 글자를 읽는데 머릿속에 남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글을 읽기만 했다. 그러다보면 눈이 금세 피로해져서 모로 누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있으면 견지원 생각이 나서… 다시 눈을 뜨고 글자를 읽었다. 하루가 매번 그런 식이었다. 감은 눈으로 네 얼굴을 그리는 게 무서워서 매번 자정이 되기 전에 잠들 던 생활이 망가졌다. 늦게 자고, 혼자 밥을 챙겨 먹는 게 얼마만인지 그것마저도 어색해서 잘 못하니 살이 쭉쭉 빠졌다. 주변 자리에 있던 선생님들이 하나 같이 걱정했다. 초등학교 시험 준비 힘들지. 그래도 잘 챙겨 먹고 다녀. 손에 쥐어진 오렌지 주스를 보고 작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견지원은 오렌지 주스 별로 안 좋아했는데. 너무 달다고.

중간고사가 끝나니 할 일이 없었다. 고시원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짧아서 최근엔 산책을 시작했다. 신입생 시절, 견지원을 마주쳤던 편의점과 같은 브랜드의 편의점 이름을 보면 눈물이 비죽 날 것 같았지만 그것도 요즘은 덜했다. 피솔빈은 욕심은 없었지만, 갖고 싶었던 걸 포기하면 남는 아쉬움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이번엔 그게 조금 길 뿐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하루 이틀 그렇게 산책을 하다보니 이젠 정말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다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할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을 했다. 피솔빈 역시 앞으로 살면서 그렇게 사랑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벌써 한 달이었다. 자신이 견지원을 그 집에 두고 나온지 벌써 한 달이었다. 견지원에게 오는 연락을 거절 못 할 까봐 무서웠던 마음이 무색하게 핸드폰은 늘 조용했다. 피솔빈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 자신보다 더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꼭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가끔은, 염치 없지만 제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그거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네가 내 앞에 있으면 좋겠다고. 한달이 길고도 짧았다. 오늘 밤도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는지 감은 눈 앞엔 네 얼굴이 떠오른다. 매몰차게 거절 당했던 첫 욕심도, 선택지가 없어 내몰렸던 삶도, 겨우 제자리를 잡고 찾았던 여유를 느낄 새도 없이 사랑했던 지난 날이 몸을 누르는 것 같았다. 앞으로 똑같은 시간을 한 번만 더 버티면 된다. 두 달. 딱 두 달 동안 혼자 열심히 마음 정리를 하고… 그뒤엔 다시 웃으면서 보내줘야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 내가 제일 욕심났던 사랑.

차가 교문 앞에 서있다. 여기 주정차 금지 구역인데. 힐끗 쳐다보고 지나가려는데 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익숙하다. 처음엔 밥을 제대로 안 챙겨 먹어서 헛걸 보는 줄 알았는데, 남자가 허겁지겁 뛰어와서 제 이름을 불렀다. 한 달 동안 잊으려고 했던 노력들이 모래성처럼 쓸려나간다. 상한 얼굴을 보니 눈물부터 나왔다. 다 잊고 잘 사는 줄 아는데 그게 아니었다. 견지원은 피솔빈이랑 꼴이 같았다. 한 달 동안 서로를 잊으려고 애쓰고, 쓰라린 이별 때문에 몸도 마음도 다 상해있었다. 더 기다려야하냐고 묻는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자신이 돌아오길 바라는 그 말이 실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어서 고였던 눈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같은 욕심이었고, 같은 사랑이었다. 늘 그랬듯이. 피솔빈은 그렇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견지원과 함께하는 건, 더이상 욕심이 아니라 원래 제 자리라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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