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5
120bpm
탕 탕, 탕 탕탕―
익숙한 소음 속에서 서지혁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에 몸을 기대앉아 손끝으로 제 어깨에 걸린 차갑고 단단한 것을 만졌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있었더라? 본능적으로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가물가물하고 흐린 시야 속에 약간의 희망과 넘쳐나는 불안감을 안고 늘 그렇듯 그를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검은 머리의 한 남자가 다가왔다. 형체는 흐릿했지만 서지혁은 그가 자신이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는 서지혁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기대앉아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고 서지혁은 그 남자에게 어떤 말을 하며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를 내는 거지? 뭐라고 하는 거지?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그다지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소리가 먹먹하게 울리고 불안정한 시야 속에서 서지혁은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렸다.
- 서지혁.
나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더라. 제 것이 아닌 듯 희미한 기억이었다.
- 지혁아.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달려온 사람이 그가 아니라 실망했고.
- 서지혁.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립고 보고 싶어서 마지막에는 아주 조금 슬펐던 것 같다.
"서지혁!"
"허억!"
희미하게 들리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서지혁은 신해량의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깼다.
"……무슨 꿈을 꾸길래 그렇게 낑낑거려?"
"예? 아… 그러게요. 무슨 꿈을 꿨더라."
서지혁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는 동안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몸이 굳어 있어 움직임이 느릿했다. 그 꼴을 가만히 보던 신해량이 침대에 앉아 서지혁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안 그래도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어. 신해량은 서지혁의 어깨와 팔, 등까지 커다란 손으로 쥐어짜듯 마사지를 했다. 아파요! 엄살 부리지 마. 엄살이 아니라 진짜 아픕니다! 서지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이리저리 피했다.
"악몽 꿨어?"
"모르겠습니다. 뭐 기분이 썩 좋은 꿈은 아니었던 것 같긴 한데 깨자마자 까먹었습니다. 허허허허, 이 나이에 무서운 꿈 꿨다고 땀 뻘뻘 흘리면서 일어나니까 좀 민망하네요."
"민망할 일도 아니야. 군대에 있을 때 그런 녀석들 많았잖아."
"아, 하긴. 뭐 매일 누구 한 명은 소리 지르면서 일어나긴 했죠."
서지혁이 낄낄대며 웃으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꼴사납게 일어난 걸 놀릴 줄 알았는데 되려 위로하듯 다독여 주었다. 괜히 더 머쓱해진 서지혁이 코를 킁 먹더니 제 침대에 앉아 있는 신해량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 인간이 아침부터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서지혁은 자기가 신해량의 방에서 잤나 하고 생각했다. 협탁에 올려둔 전자시계를 보니 오전 8시밖에 안 됐다. 이 시간에 왜 아직도 안 일어나냐고 깨울 리는 없는데.
"그런데 뭐… 저한테 볼일 있으세요?"
"오늘 다른 일정 있어?"
"어…… 아뇨. 아직 여기 지리도 잘 모르는데요."
"그럼 이따가 어디 좀 가자. 씻고 와. 밥은 간단하게 먹게."
"어디 가는데요?"
서지혁의 물음에 신해량은 잠깐 고민하는 듯 눈을 내리깔고 있더니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햐. 참 꾸준하시다니까. 이제 어디 가는지도 안 알려주네. 신해량이 결론을 내면 서지혁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지혁은 그저 순응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화장실로 향했다.
미지근한 물로 끈적해진 몸을 씻으며 꿈의 내용을 떠올리려 해보았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감각만 남았다. 무슨 꿈이었는지는 몰라도, 서지혁은 꿈속의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서지혁을 기다리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뿐이었으니까. 찝찝하긴 했지만 곱씹어 봐야 더 기억도 안 나고 기억해 낸다고 해도 꿈은 꿈일 뿐이라서, 서지혁은 몸에 찬물을 끼얹는 것으로 생각을 떨쳐냈다.
여기… 그러니까 이 망할 애정촌에서 지낸지도 며칠이 지났다. 첫째 날 밤의 입맞춤 이후에도 신해량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이전과 다름없이 서지혁을 대했다. 잠을 잘 잤는지 못 잤는지 그런 걸 티 내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 속은 어땠는지는 몰라도, 서지혁을 바라보는 눈빛이나 대하는 행동은 평소와 똑같았다. 서지혁은 생에 첫 입맞춤을 한 사춘기 소년처럼 뛰는 심장을 안고 밤을 새웠는데. 다음날에 여전히 반짝거리는 신해량의 낯짝을 보고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뽀뽀를 받고 죽상인 것보단 낫다고 정신승리를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함께 건강음료 원샷 때린 뒤 조깅을 하고 아침밥을 먹고 각자 할 일을 하다 점심을 먹고 운동방에서 소화 좀 시키다가 또 각자 할 일을 하고. 출출하면 간식을 만들어서 같이 티비로 영화를 보고 저녁 먹고 씻고 취침. 둘 다 백수에 친구라고 칭할만한 인간들은 죄다 다른 지역에 있거나 아직까지 군대에 처박혀 있어서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없었다. 신해량은 헬스장이나 또 무슨 클래스를 듣겠다고 나가는 일이 자주 있었고, 서지혁은 담배를 피우거나 동네 개들과 공원을 돌면서 콧구멍에 바람을 넣었다. 이렇듯 특별할 거 없는 평범한 루틴이 반복되었는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인간이 신해량이라 평범한 날이 모두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오늘도 비슷하게 보내려나 싶었는데 어딜 가자는 걸 보니 다른 계획이 있나 보다. 정작 그 일정을 따라야 할 서지혁은 아무것도 모르긴 했지만 이런 건 익숙해서 신경도 쓰지 않았다.
씻고 나와 간단히 밥을 챙겨 먹고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며 건강음료를 벌컥벌컥 마시고 있으니 신해량이 헬스장을 갈 거라며 운동복을 챙기라고 했다. 아까는 말을 안 해주더니. 아- 헬스장에 가나 보다 하고 운동복을 챙기고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목욕탕도 가려나 싶어서 뭘 챙겨야 하나 했는데 신해량의 것을 빼앗아 쓰기로 했다. 먼저 내려가 있겠다는 신해량에게 예이예이~ 대답하고 소중한 피부가 타지 않도록 선크림도 잘 발라준 뒤 밖에 나왔다. 여름이라 공기가 뜨끈하긴 했지만 아침이라 기분은 상쾌했다. 코에 바람을 넣고 있으니 신해량이 차를 끌고 나왔다. 신해량이 다니는 헬스장은 오피스텔 바로 코앞에 있어서 왜 차를 끌고 왔냐고 고개를 갸웃하고 쳐다보니 빨리 타라고 손짓을 한다. 그러면 또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탔다.
"헬스장 간다면서요?"
"갈 거야."
그전에 어딜 갈 거라고 말해주나 했는데 입을 꾹 닫고 운전대를 잡는다. 어휴, 그러시겠죠. 익숙한 서지혁은 이제 입 아프게 길게 설명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묵언수행하듯 조용한 차 안이 답답해 창문을 여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햐. 속이 트이는 기분이라 헤벌쭉하게 바깥 풍경을 보고 있었더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얼굴을 슥 보고는 웃는다. 왜 웃습니까? 웃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하나? 제 얼굴 보고 웃으려면 허락받아야지요. 유치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젓는다. 그 얼굴이 보기 좋아서 바깥에서 잠시 눈을 뗐다.
조금 더 달린 후 차가 멈추었는데 평범한 번화가였다. 병원도 많고 병원도 많고 병원도 많고……. 아니. 시발 설마. 이 인간이? 서지혁이 어이가 없다는 듯 째려보자 신해량은 평온한 얼굴로 내려. 했다. 가기 싫다고 바닥에 드러누워도 번쩍 들고 갈 인간이라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웬 병원입니까? 아니 무슨. 건강검진할 거면 미리 말을 해주든가요. 금식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건강검진 안 해. ……할 거긴 한데 오늘은 아니야."
"그럼 뭔데요?"
또 입을 닫길래 뭐 하는 짓이냐고 인상을 팍 썼더니 갑자기 팔을 꽉 잡는다. 아니? 뭐지? 동물 병원 안 가겠다고 우는 강아지 붙잡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몇인데 영문도 모르고 질질 끌려가게 생겨서 팔을 마구 휘저었더니 꿈쩍도 안 한다. 아 시발. 쉬면서 근육이 좀 빠졌나? 나도 헬스장 좀 다닐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말로 하십쇼. 말로! 제가 말 안 듣는 초등학생 꼬맹이도 아니고. 어디 가냐구요. 뭐 합니까?"
한 층에 온갖 병원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건물 안 엘리베이터에 들어와서야 서지혁의 팔을 놔준 신해량이 4층 버튼을 눌렀다. 4층? 층수를 안내하는 이름표를 눈으로 살펴봤더니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글자를 보자마자 서지혁은 2층과 3층 버튼을 눌렀다. 2층에 선 엘리베이터에서 뛰쳐나가려는 서지혁의 팔을 신해량이 다시 붙잡았다.
"아니. 시발. 뭡니까? 저 안 갑니다!"
"안 갈 이유가 없잖아. 상담만 받아봐."
"싫습니다! 싫어요! 소용없다니까요!"
"안 해보고는 모르는 거야."
"제가 왜 안 해봤습니까? 바닷속에 처박혀 있으면서 꾸준히 받은 건 기억도 안 나세요?"
실랑이를 하는 와중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조금 더 올라가더니 이번엔 3층에서 문이 열렸다.
"이번엔 다를 수 있잖아. 별로면 억지로 안 보낼 테니까 오늘만 좀 참아봐."
"싫다니까요!"
"너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젊은 놈이 죽을 날 미리 받아둔 사람처럼 살지 좀 마."
"당신은요? 당신은 뭐 평범한 줄 알아요? 저한테 뭐라 할 자격 없는 거 아닙니까? 당신도 하기 싫은 거 저한테 시키지 마십쇼."
3층의 문이 닫히고 신해량이 발버둥 치던 서지혁을 놓아주었다. 그 틈을 타 서지혁이 1층 버튼을 눌렀다. 설득됐나 싶어서 불안할 정도로 조용한 신해량을 힐끔 봤는데 가라앉은 시선이 마주쳤다. 뭐. 그렇게 봐도 안 봐줄 겁니다. 절대 4층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듯 서지혁이 엘리베이터 손잡이 난간을 꼭 잡았다.
"……나도 상담받고 있어."
"예?"
"나는 그냥저냥 살고 싶은 게 아니야. 잘 살고 싶은 거지. 너랑."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정신건강의학과의원'이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신해량은 이전처럼 서지혁을 억지로 끌고 나가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은 눈으로 서지혁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여간 이 인간은 늘 이런 식이다. 강제하듯 하면서도 설득을 했고 마지막엔 꼭 선택권을 주었다. 서지혁은 뒷머리를 벅벅 긁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냐고. 인상을 팍 쓰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왔다. 그 사이비 보다 별로면 중간에 깽판 치고 나올 겁니다. 그렇게 해.
상담 접수를 하고 상담 전 설문지 같은 것을 작성했다. 대충 과거나 현재의 배경이나 고민, 개선하고 싶은 점 같은 것을 묻고 있었다. 대충 쓰고 싶었는데 이걸 신해량도 작성했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가 없어서 생각나는 만큼 쓰긴 썼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민낯을 글자로 적어내는 게 쉽진 않았다. 신해량은 서지혁이 편하게 상담지를 작성할 수 있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누군가와 연락을 하는 듯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서지혁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한 신해량이 다 썼어? 하며 다정하게 물었다. 쓰긴 썼는데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네요. 정답이 없는 거니까 괜찮아. 종이 몇 장을 제출하고 상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해량이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한테 추천받아서 온 건데 괜찮았어.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건데 상담사랑 아는 사이는 아니야. 네 이야기 내가 들을 일 없고 내 이야기도 네가 들을 일 없으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와."
"……예."
첫 상담은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란다. 서지혁은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 신해량에게 건물 아래 카페에 가 있으라고 말했다. 신해량은 순순히 그러겠다고 하며 서지혁의 어깨를 두들겨 주고 병원 밖으로 나갔다.
상담은 무난했다. 해저 기지에서 했던 것처럼 과거 이야기만 좀 했는데 상담사가 집중해서 듣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중간중간 질문을 했다. 만약 그때로 돌아가 다시 대응을 할 수 있다면 지혁씨는 어떻게 할 것 같아요? 그다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망설이다 그래도 똑같은 일을 했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럼 그 당시 지혁씨의 선택은 지금 생각해도 최선인 거네요. 했다. 다른 할 말이 없어서 고개만 끄덕였다. 지나온 모든 순간이 서지혁의 최선인 것은 맞았으니까.
상담사는 서지혁이 작성한 종이를 넘겨보며 중간중간 의도하고 비워둔 공백에 대한 답을 유도했다. 이 사람도 누구구처럼 눈깔에 거짓말 탐지기라도 달고 있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서지혁은 말이 많은 덕분에 굳이 거짓을 섞지 않고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티 안 나게 뺄 수 있었다. 중간중간 상담사의 손이 빨라지는 부분이 종종 있어 종이를 힐끔 쳐다봤는데 워낙 악필이라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상담이 끝나고 카페로 내려가 신해량을 찾기 위해 전화를 걸었는데, 서지혁은 신해량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그를 찾을 수 있었다. 넓은 카페에는 사람이 적지 않게 차 있었는데 신해량은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었다. 만화였다면 분명 혼자 반짝거리는 효과를 달고 있었을 것 같았다.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핸드폰 화면을 보고 미소를 띠는 신해량의 얼굴에 서지혁은 타이밍을 놓쳤다.
'끝났어?'
"예."
'카페로 내려와. 벽면 쪽에…….'
자신이 앉아 있는 테이블의 위치를 알려주려는 듯 카페 내부를 둘러보던 신해량이 카페 입구 쪽에 서 있는 서지혁을 발견했다. 자신을 보고 히죽대고 있는 서지혁을 보고 왜 전화를 했냐는 듯 핸드폰을 한번 보더니 전화를 가차 없이 끊고 오라고 손짓을 했다. 서지혁이 낄낄대며 걸어가 신해량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커피와 손도 대지 않은 레몬치즈케이크, 블루레몬에이드가 놓여 있었다. 커피를 제외한 두 메뉴는 딱 봐도 서지혁을 위한 것이었다. 이건 뭐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서지혁이 자연스럽게 블루레몬에이드를 가져가 쪽 빨아 마셨다. 상큼 달달한 맛에 기분이 좀 나아졌다.
"어땠어?"
"사이비보단 낫네요."
그 말에 신해량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어어? 그거 하지 마십쇼. 혼자 반짝반짝."
"?"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표정에 서지혁이 몰라도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상담은 일주일에 한 번씩 받을 거야. 한 달도 아니고 일주일이요? 너무 자주 아닙니까? 진작 갔어야 했어. 너도 나도. 반박할 거리가 없어 고개를 끄덕이니 신해량이 남은 커피를 한 모금 쭉 마신다.
"술은요? 마셔도 돼요? 마시지 말란 말은 안 하던데."
"자주는 안 돼. 넌 내가 관리할 거니까 괜찮아."
서지혁이 입술을 댓 발 내민 채 불만을 표하자 신해량이 케이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예예. 그냥 먹고 닥쳐라 이거겠지요. 말 잘 듣는 개는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어서 레몬치즈케이크도 포크로 가득 떠 한 입 먹었는데 상큼한 레몬맛과 꾸덕하고 고소한 치즈맛이 잘 어울렸다. 당이 충전되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제가 무슨 레몬 중독인 줄 아십니까? 왜 죄다 레몬입니까?"
"맛있게 먹었으면서 왜 시비야?"
"시비 안 걸게 생겼습니까? 무슨 돈까스 사준다고 따라갔더니 포경수술 당한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냥 말을 하지 왜 억지로 데려왔어요?"
"그냥 말을 해? 그랬으면 넌 차에 타지도 않았어."
그건 또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머쓱해져 눈동자를 굴리다가 음료와 케이크를 해치웠다. 들어올 때부터 느꼈지만 카페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신해량을 계속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익숙한 광경이라 신해량은 신경도 쓰지 않았는데 괜히 심술이 난 서지혁이 자리를 정리하고 빠르게 밖으로 신해량을 끌고 나왔다. 좀 더 있다간 번호를 달라는 쪽지를 받거나 번호가 적힌 쪽지를 받을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받았을지도 모르겠네. 그래봤자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개인정보를 줄 정도로 물러터진 인간은 아니라서 걱정도 안 된다만.
다시 차에 타니 미리 에어컨을 틀어둔 것인지 시원했다. 또 몰래 데려갈 곳이 있냐고 물었더니 헬스장에 간단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드디어 헬스장에 도착했다. 정기권을 등록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왔는데 이미 몸이 엄청 좋으시다며 칭찬을 해대서 서지혁이 헤벌쭉 웃었다. 신해량의 집에도 운동기구가 몇 개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홈트레이닝 용도이지 제대로 몸을 풀기엔 부족했다. 오랜만에 물 만난 물개처럼 뛰어다녔더니 꿍했던 속이 좀 풀어졌다. 땀을 쫙 빼고 오.운.완 인증샷까지 찍고 바로 신해량과 근처 목욕탕에 갔다.
손목 워치를 풀고 그 위에 작게 자른 파스를 붙이고 달라붙은 땀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고 있으니 오랜만에 무리한 근육들이 이제야 살 것 같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몸이 녹는 느낌을 받으며 앉아 있자 신해량도 들어와 옆에 앉았다.
"나가서 뭐 먹을래?"
"아까 돈까스 이야기했더니 먹고 싶은데요."
"근처에 경양식 돈까스집 있던데, 가볼래?"
"햐. 요즘 경양식 잘 있지도 않던데 좋죠."
엄청난 크기의 돈까스의 등장에 서지혁의 눈이 반짝였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절로 군침이 돌았다. 얇게 펴진 돈까스 한 덩어리가 커다란 접시에 담겨 하나씩 나왔는데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서지혁은 애영이가 봤으면 자기 머리 크기만하다고 놀렸을 거라고 투덜댔는데, 신해량이 네 머리 이렇게 크진 않다고 위로했다. 그 당연한 말을 위로라고 하는 거냐고 성질을 냈더니 그럼 뭐 어쩌라는 거냐는 눈이 서지혁을 차갑게 쳐다봤다. 내 키에 이 정도면 당연한 거 아니냐. 야투경 안 맞았던 건 좀 충격이긴 했지만 나는 내 비율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완전 모델 아니냐. 당신 머리가 비인간적으로 작은 탓에 비교를 당해서 그렇지, 내 머리가 전혀 큰 게 아니다. 한 맺힌 듯 말하니 신해량이 닥치고 밥이나 먹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크다고 감탄한 돈까스를 다 처먹고도 부족했던 서지혁이 우동까지 시켜 먹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히죽대며 웃었다. 집으로 들어가기 전 서지혁이 목마르다며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청량음료를 몇 개 샀는데 신해량이 술은 안 사냐고 물었다. 술 안 드시잖아요. 넌 술 좋아하잖아. 혼자 무슨 기분으로 마시냐고 투덜댔더니 웬일로 같이 마셔주겠단다. 이게 무슨 떡이냐 하고 헤벌쭉 해져서 맥주 몇 캔과 안주도 골랐는데, 욕심 많은 강아지처럼 양손 가득 술과 안주를 들고 있는 서지혁을 보고 신해량이 웃었다.
서지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후딱 갈아입고 편의점에서 사 온 오뎅을 뜯어 오뎅탕을 끓였다. 그 사이 신해량은 커피 테이블에 서지혁이 골라 담아온 맥주들을 놓고 부엌을 살피다 견과류 몇 봉지와 과자 몇 개도 가져왔다. 비닐 포장을 뜯고 수저도 두니 어느새 완성된 오뎅탕도 테이블 위에 올라왔다. 술을 마시기 전 노래라도 듣자고 티비를 켜 음악프로를 틀어뒀더니 반짝반짝한 아이돌들이 나왔다.
"역시 당신은 재희 말처럼 데뷔를 했어야 했는데. 그럼 인생 좀 편하게 살았을 텐데 왜 그 얼굴을 군대에서 썩히고 바닷속에서 썩혔습니까? 이제 나이 차서 아이돌은 못하겠네요."
"재희가 너한테도 그런 말을 했어?"
"예. 당신한테도 했어요?"
"그래."
짠! 캔을 부딪히고 시원한 맥주를 목에 때려부었는데 목에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스르륵 잘도 넘어갔다. 그래, 바로 이거지. 서지혁이 맥주 광고 모델처럼 크으 하고 엄지를 치켜들자 신해량이 먹으라는 듯 오뎅탕을 서지혁 쪽으로 밀었다. 뜨끈한 오뎅탕도 숟가락으로 떠먹은 서지혁이 이번에도 크으 하며 엄지를 치켜들었는데 그게 웃긴 듯 신해량이 웃었다.
해는 지지 않았지만 전망 좋고 기분 좋아서 술이 술술 잘 들어갔다. 신해량도 목이 말랐는지 술을 고래처럼 마셨다. 맨날 빼더니 웬일인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강제로 병원에 데려간 것이 마음에 걸려 같이 어울려 주는 것 같았다. 몇 캔 더 따서 쭉쭉 들이마시니 알딸딸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여기에 담배 딱 한 대만 피우면 죽여줄 텐데 하고 입맛을 쩝 다시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는다. 왠지 요즘 자주 이러지 않나 싶어 뭐 하는 거냐고 쳐다보니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었는데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저를 향한 까만 눈동자를 쳐다보고 있으니 심장께가 간질간질했다. 입을 맞추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고개를 돌리니 기가 막히게 신해량이 서지혁의 이름을 불렀다.
"서지혁."
"예."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된다고 했잖아."
"또 그 소리입니까?"
"왜 안 하는데?"
"안 하긴요, 전에 했잖아요."
눈을 마주치면 또 들킬 것 같아서 딴청부리며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는데 술기운 때문인지 신해량 때문인지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아서 이마를 긁는 척 손으로 얼굴을 좀 가렸다. 이유가 뭔지 말해줄 수 있겠어? 대답은 무시해놓고 질문은 다정했다. 이 인간이 또 왜 이러나 싶었는데 마음과는 다르게 입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저만 좋자고 하긴 싫은데요."
"싫은 건 억지로 안 한다고 했잖아."
"좋지도 않잖아요."
"그것도 안 해보곤 모르는 거라고 말했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댔는데 생각해 보면 또 말이 돼서 마음이 복잡했다. 이미 한 번 충동적으로 저지르긴 했지만 그 이후론 썩 용기가 나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신해량이 다시 심지에 불을 붙인다. 또 이러는 걸 보니 정말 입맞춤이 싫지는 않았나 본데, 서지혁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겨우 싫지 않은 정도로 당신이 나를 견디는 게 싫은 건데.
"모르는 게 나을 수 있다고는 생각 안 하세요? 싫으면 어쩌려고요?"
말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아 시발. 쪽팔려서 뒤지겠네. 눈치 보며 징징대는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라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답이 없길래 신해량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신해량은 서지혁의 눈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입술을 쳐다봤다. 괜히 입술에 힘이 들어갔는데 다시 시선이 올라와 눈이 마주쳤다.
"싫지 않을 거 같은데."
그 말과 동시에 서지혁은 신해량을 덮치는 상상을 했지만 잘 참았다. 왜 이렇게 도발을 하지? 열이 받아서 이번엔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제발 쪽팔리게 그만 좀 붉어져라. 서지혁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해량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마른 세수만 해댔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인내심이 끝이 난 듯 대뜸 서지혁의 양볼을 두 손으로 붙잡았다. 깜짝 놀란 서지혁의 얼굴이 신해량의 손이 화상을 입지 않을까 걱정되는 수준으로 붉게 타올랐다.
"뭐, 뭐 하십니까??"
"넌 너무 생각이 많아."
"당신이 너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거 아니구요??"
"키스가 뭐라고 이렇게 내빼지? 한번 해보면 되잖아."
"미쳤어요?! 싫어요! 안 할래요! 싫다니까요!"
"싫어?"
"안 싫은데요. 그래도 싫어요!"
"닥치고 입이나 벌려. 계속 떠들든가."
"아니 시발. 잠시만요! 이 미친쇅!"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입술이 부딪혔다. 서지혁이 버둥댄 탓에 코가 부딪혔는데 더럽게 아팠다. 신해량도 꽤나 아팠는지 눈을 찌푸리길래 겁먹은 서지혁이 그냥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벌어진 입 사이로 혀가 불쑥 들어왔다.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의 등장에 확 깨물어 버릴까도 생각했는데 그랬다간 잡힌 볼이 터질 것 같아서 얌전히 받아들였다. 차가운 술과 물을 벌컥벌컥 마신 탓에 입안은 차가워진 상태였는데, 혀에서도 운동 에너지가 나오는지 점점 입속이 따뜻해졌다. 혀가 닿을 때마다 서지혁이 움찔대며 몸을 빼댔는데 신해량은 놓아주질 않았다. 신해량과 키스를 하고 있는 건지 입으로 영혼을 강탈당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능숙한 혀가 입속을 헤집고 다니는데 설렘보다는 따먹히고 있다는 공포감이 더 컸다. 입만 맞출 때는 가슴이 간질간질하고 기분이 좋았는데 이 전투적인 키스에는 오히려 심장이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 딱 죽겠다고 생각할 때쯤 삐- 하는 경고음이 들렸다. 서지혁은 자기 몸에서 내는 이상신호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는지 신해량도 멈칫하며 입술을 떼어냈다. 번들해진 입술을 닦고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 손을 들었더니 스마트 워치에서 또 삐- 하고 붉은 화면을 띄우며 소리가 났다. 무슨 메시지라도 왔나 싶어서 속으로 나이스 타이밍을 외치고 화면을 터치했더니 짤막한 문구가 떴다.
[주의! 120bpm 초과]
"아 시발."
황급히 화면을 가리고 이 사단을 만들어낸 남자를 바라보았는데, 신해량이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푹 숙였다. 뭘 하나 싶어 멀뚱거리며 보니 낮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 시발. 존나. 미친! 심장이 멈춘 게 아닌가 싶었는데 오히려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아 웃지 마세요! 웃지 말라니까요? 아니. 웃지 말라고요! 서지혁이 소리칠수록 신해량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이 인간이 이렇게까지 웃는 꼴을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 별꼴을 다 보는구나. 심박수를 낮추기 위해 집중하는데 귓가에 들려오는 웃음소리 때문에 영 진정되지 않았다. 아 진짜 웃지 말라니까요! 한번 더 빽 소리를 지르니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심호흡 몇 번을 하니 심박수가 빠르게 60bpm대로 뚝 떨어졌다. 이렇게 익숙하고 쉬운 일이 이 인간 앞에서만 고장 난 듯 뚝딱 되는 게 열받았다.
서지혁의 심장과 스마트 워치는 조용해졌지만 신해량의 웃음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여간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이 인간과 있으면 늘 그랬지만 익숙하다고 해서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다. 왜 맨날 나만 못난 꼴을 보여야 하는 거지? 악 소리를 지르자 신해량이 위로하듯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도 그만 좀 하라고!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손길에 고개를 세차게 저어 손을 떨궈냈다.
복수할 거야!
복수할 거라고!
복수해 준다!
뒤끝이 긴 서지혁은 이날을 잊지 않기로 했다. 아니, 사실은 잊고 싶었는데 잊힐 리가 없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갑자기 달려드니까 놀란 거라구요! 알아. 좋아서 그런 게 아니라 당황해서 그런 겁니다! 알겠어. 이거 첫 키스도 아니고 저도 키스 남부럽지 않게 많이 해봤습니다! 알겠다니까. 알긴 뭘 알아 진짜 그만 좀 웃으라니까요!!
서지혁이 변명할수록 신해량의 웃음소리가 길어졌다.
그래. 시발. 지금 실컷 웃어두십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은 저일 겁니다.
아 시발 진짜 그만 좀 웃으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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