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6

서 바이벌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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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https://youtu.be/2osv8ilTW1M


서지혁의 하루에 새로운 루틴이 추가되었다. 밥 먹다 소리 지르기, 양치하다 거울에 머리 박기, 운동하다 폭주하고 트레이너한테 한 소리 듣기, 자기 전 침대에서 이불 차기. '120bpm'사건 이후 서지혁은 하루하루 제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완전 억울하고 분해서 온 세상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첫키스가 이렇게까지 흑역사가 될 수 있었다니. 괴로운 나날이었다.

집에서 신해량을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달달 떨렸는데, 이게 설레서 이런 것인지 트라우마가 도져서 이런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시선만 마주쳐도 심박수가 올라가는 게 느껴져 서지혁은 이 망할 스마트워치 설정에서 심박수 체크 기능을 완전히 꺼버렸다. 같은 집에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마주치고 같이 밥까지 먹어야 했는데, 신해량은 서지혁이 조금이라도 허둥댄다 싶으면 서지혁의 왼쪽 손목을 힐끔 쳐다봤다. 이 인간이 놀리려고 이러나 싶었는데 그냥 그게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개빡친 서지혁은 스마트워치를 서랍 속에 처박아두고 아날로그시계를 찼다.

서지혁이 이렇게 열이 제대로 오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제로 키스 좀 당했다고 이러는 건 아니었다. 말이 강제였지 따지자면 신해량은 서지혁이 하고 싶어 하는 걸 대신 해주었을 뿐이었다. 물론 그걸 서지혁은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좋아하는 사람과의 키스였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싫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너무 좋아서 심장이 터져버릴 뻔했으니 싫은 척도 못 하게 되었다. 그럼 뭐가 문제였는가? 서지혁이 개찐따아다새끼로 보인 게 존나게 문제였다.

서지혁은 가오는 안 챙겨도 간지는 챙기는 인간이었는데, '120bmp'사건은 서지혁 인생 탑파이브 안에 들 정도로 노간지 사건이었다. 진짜 아다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서지혁은 '스'로 끝나는 행위는 뭐든 자신 있었다. 끝내주는 피지컬과 끝장나는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서지혁도 신해량과의 키스를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주 옛날, 그러니까 신해량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귀엽고 소중한 연심을 품었던 시절. 짝사랑 상대와 이러쿵저러쿵하는 상상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상상하고 생각했던 첫키스는 그런 게 아니었다. 좀 더 조심스럽고 부드럽고 분위기 있는 그런 달달한 행위였다.

서지혁은 낭만이 있는 사람이었다. 누구처럼 좀 궁금하다고 남의 입에 냅다 혀를 밀어 넣는 인간과는 다르다고 자부했다. 여전히 뒤지게 쪽팔리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복수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용서하는 것보다 복수하는 게 더 쉽다' 이제는 손에 없는 문구를 떠올리며 다짐했다.


"와, 뭡니까?"

"뭐가?"

부지런히 일어나 간단하게 아침밥을 차리고 있는데 신해량이 아침부터 과하게 잘난 얼굴과 몸을 자랑하며 방에서 나왔다. 잘생긴 이마와 진한 눈썹을 과시하듯 깔끔하게 올린 앞머리에 꿀이라도 바른 듯 빛이 나는 얼굴,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름 정장,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탄탄하고 죽여주게 섹시한 몸매. 누가 봐도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근사한 모습이었다. 겉꼬라지 잘생긴 거야 7년 전부터 알았지만 최근엔 집에서 편하게 있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는데 작정하고 힘주고 꾸민 모습은 오랜만이라 서지혁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화보 촬영이 있다고 했다. 연예인도 아닌데 무슨 촬영인가 싶지만 신해량에겐 익숙한 일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시꺼먼 감자들 사이에서 혼자 하얀 진주처럼 빛이 나던 인간이라 홍보모델로 여기저기 굴렀던 전적이 있었다. 신해량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윗대가리들이 시켜대면 서지혁의 상관이었던 신해량도 구를 수밖에 없는 위치였다. 군대란 그런 곳이었다. 윗대가리 위엔 다른 윗대가리가, 그 윗대가리 위에도 또 다른 윗대가리가, 그 윗대가리 위에 또 윗대가리가 있고, 그 위에도 또 다른 윗대가리가 있는 윗대가리들만 가득한 미친 구조. 그중 가장 위에 있는 대가리가 시키는 건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굴에 검댕이 칠을 해도 눈에 띄는 인간이 본격적으로 얼굴이 팔려 작전 중에는 가명을 쓰거나 얼굴을 꽁꽁 가리고 다니기도 했다. 이런 단점이 있긴 했지만 신해량이 모델인 홍보 포스터는 군대 내에서도 구하기 어려울 만큼 인기 있었다. 그해 유독 입소자도 많아졌다나 뭐라나. 그 포스터가 부대 내에서 얼마나 불건전하게 소비되었는지는 윗대가리들도 신해량도 아직 모르고 있겠지.

아무튼 이번에도 신해량은 그런 비슷한 촬영을 하게 되었다. 국방부였나? 아무튼 용병 일을 하며 정부 쪽과 계약을 했더니 아주 단물을 쪽쪽 빨아먹을 생각인지 자원입대 홍보 잡지에 들어갈 화보를 찍어달란다. 다음에 또 어떤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얼굴이 대놓고 팔려도 되나 싶었는데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얼굴 다 팔려서 목숨 걸고 위험한 일은 더이상 못 하면 좋겠으니까. 계속 이렇게 잘난 얼굴이나 팔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혼자 반짝반짝하시네요. 이참에 모델 일이나 계속 하시죠?"

신해량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신해량이 바 테이블에 앉자 서지혁이 준비한 아침밥을 대령했다. 대왕 계란말이에 케첩으로 하트가 그려져 있었는데, 신해량이 젓가락질을 하려다 멈칫하고 서지혁의 얼굴을 보았다. 눈이 마주친 서지혁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신해량은 고민하다가 제일 가운데에 있는 계란말이를 쏙 빼먹었다. 하트가 반으로 갈라졌다.

"장난하세요? 하트를 왜 깹니까? 아주 사이코패스네. 감정이 없어요? 로봇이에요?"

"……가운데에 있는 게 제일 좋은 거 아닌가?"

자기 딴엔 제일 하트 가운데 부분을 먹은 거란다. 그러고 보니 말이 되네 싶어서 수긍했다. 머쓱해진 서지혁이 신해량의 옆자리에 앉아 국을 떠먹었다. 가장자리에 있는 계란말이도 쏙 빼서 김치를 얹어 입에 가득 넣었다. 우물우물 씹으며 신해량의 죽여주게 잘생긴 얼굴을 감상했는데 시선을 느낀 신해량이 서지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서지혁이 손가락으로 신해량의 볼을 밀어 고개가 정면을 향하도록 원상 복귀 시켜주었다. 감상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대충 알아들은 신해량이 조각같이 잘생기기 역할에 충실하며 밥을 먹었다.

"저녁에 들어오시죠?"

"응."

"잘 하고 오십쇼. 몇 없는 재능 소중히 여겨야지요."

넘쳐나는 재능 중 유일하게 노력 없이 얻은 재능을 콕 집어 말했더니 신해량이 웃었다. 신해량은 순식간에 밥을 다 비우고 밥 반 그릇 더 떠다 먹고 있는 서지혁을 구경했다. 입안 가득 밥을 밀어 넣고 있는 서지혁은 뭘 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신해량을 째려보았다. 밥그릇 빼앗기지 않으려는 개처럼 전투적으로 입안에 반찬을 욱여넣었다. 그 꼴을 가만히 구경하던 신해량이 네 밥은 안 뺏어 먹는다고 안심시켜주듯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서지혁의 눈빛이 온순해졌다. 순한 강아지가 된 서지혁의 밥그릇에 신해량이 계란말이 하나를 올려주었다. 서지혁이 히죽 웃자 습관적으로 시선이 서지혁의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이제 없거든요!!!"

아날로그시계조차도 손으로 가린 서지혁이 소리쳤다. 신해량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는데 화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잘 생겨서 그냥 봐줬다.

신해량이 집을 나가고 서지혁도 씻고 건강음료를 쭉 들이켜고 조깅을 하러 공원에 나갔다. 일찍부터 갓생을 사는 이웃 주민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고 있어서 개들과 함께 공원을 돌았다. 개들이 유독 서지혁을 잘 따르길래 허락을 받고 몇 번 쓰다듬어주었다. 손가락 사이를 가르는 짧은 털의 느낌이 보송하고 기분 좋았는데 이래서 신해량이 자기 머리를 그렇게 자주 만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몸을 풀었으니 바로 헬스장에 가서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쉬는 동안 소홀히 했던 근육들 기강을 한번 잡아주고 목욕탕 온탕에 들어가 수고했다며 제 몸을 토닥여 주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사와 먹고 소화 겸 운동방에서 스트레칭 좀 해주니 다시 출출해져서 간식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지금 시간이면 점심 먹으려나 싶어서 핸드폰을 켜 신해량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냈는데 곧바로 답장이 왔다.

[오늘 저녁 먹고 들어오시죠?]

[응. 회식할 거 같아. 저녁 먼저 먹어.]

[예엡. 점심 먹고 계세요?]

[아직. 도시락 기다리면서 쉬고 있어.]

[그럼 전화해도 돼요?]

[응.]

핸드폰을 대충 물컵에 기대 세워두고 영상통화를 걸었는데 곧바로 신해량의 얼굴이 보였다. 촬영하느라 이것저것 얼굴에 손을 댔는지 아침과 다른 모습이었다. 반만 가지런히 내려 한쪽 눈썹만 덮은 앞머리가 잘 어울렸고 옷도 정장이 아닌 군복이었다. 군복을 입은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데. 괜히 예전에 품었던 감정이 떠올라 기분이 몽글몽글해졌다. 한쪽 턱을 괴고 화면을 바라보고 있자 신해량도 화면 속 서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넌 점심 먹었고?'

"예. 저는 이미 간식까지 조졌죠. 촬영 안 힘드세요?"

'괜찮아. 뭐 할 말 있어?'

"어… 아뇨. 그냥 보고 싶어서요."

그 말은 의외라는 듯 신해량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눈썹을 씰룩였다. 그리곤 카메라 각도를 조절하는 듯 이리저리 화면이 흔들리더니 좀 더 안정적으로 고정되었다. 방향도 돌린 건지 빛이 들어와 얼굴이 더 밝게 잘 보였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인데. 잘 보여?'

"예. 잘 보입니다."

서지혁이 턱을 괸 채 나른하게 웃자 신해량도 미소를 띠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신해량에게 여자친구와 통화하는 거냐며 툭툭 물어댔는데 신해량은 그저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좀 더 대화를 하다 보니 신해량에게 도시락이 도착했다. 척 봐도 부실해 보여서 서지혁은 영 못마땅했다. 마음대로 굴릴 거면 밥이라도 잘 챙겨 주든가. 마음 같아서는 3단 도시락을 싸서 배달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그땐 꼭 도시락을 싸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밥 맛있게 드십쇼. 남는 거 있으면 하나 더 달라고 하시구요. 그걸로는 배도 안 찰 거 같은데."

'괜찮아. 너도 할 일 잘 하고 있어. 담배 너무 많이 피우지 말고.'

"햐, 눈치도 빠르셔라. 아 맞다. 그… 그대로. 그대~로 집에 오십쇼. 어디서 씻고 오지 말고."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그 꼬라지 그대로 오라구요. 옷만 갈아입구요. 알겠어요?"

여전히 이해 못 한 바보 같은 표정을 한 신해량이 일단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둑한 저녁이 되자 도어락 소리가 들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신해량은 불이 다 꺼져있는 집안을 가만히 살펴보다 거실로 들어왔다. 거실에 들어오자 유일하게 빛이 있는 쪽으로 절로 고개가 돌아갔는데 부엌이었다. 바 테이블 바로 위에 있는 조명만 켜져 있고 그 뒤에 서지혁이 서 있었다. 짧은 앞머리를 살짝 올려 까고 각 잡혀 다려진 검은 셔츠를 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신해량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는 듯 부엌과 서지혁을 쭉 훑어보았는데 그 꼴이 답답한지 서지혁이 신해량에게 다가와 겉옷과 가방을 빼앗아 갔다.

"손님. 어서 오십쇼. 저는 이 바에서 최고로 잘생기고 섹시한 20대 바텐더, 서 바텐더라고 합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한 서지혁이 겉옷과 가방을 대충 소파 위에 던져놓고 신해량을 바 테이블 앞으로 데려갔다. 젠틀하게 의자를 빼주자 신해량이 뭐 하는 짓거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자리에 앉았다.

"바 이름이 뭔데?"

"좋은 질문입니다, 손님. '서 바이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저와 손님 둘 중 한 명 죽을 때까지 마시는 게 이 바의 룰입니다."

결국 신해량이 웃음을 터뜨렸다. 작명 센스가 별론데. 대한도 보단 백배 낫거든요. 잠깐 투닥거리던 서지혁이 다시 컨셉을 유지하며 깍듯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힘들고 고된 일상이라는 땅바닥에서 구르고 오신 손님을 위해, 저 서 바텐더가 몇 가지 칵테일을 준비했는데 괜찮으십니까? 참고로 우리 성질 더럽고 예민한 손님을 위해 저는 취급도 안 하는 논알콜 칵테일로만 준비했습니다."

"그래."

신해량이 한번 해봐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 손님, 초면에 반말이나 찍찍하고 싹바가지가 아주 없으시네요. 제대로 진상 떨어줘? 아니욥. 깨갱하고 꼬리를 내린 서지혁이 길쭉한 유리잔과 쉐이커에 얼음을 가득 담았다. 그리곤 파란색 파파야 시럽과 레몬주스를 쉐이커에 넣고 뚜껑을 닫아 현란하게 흔들었다. 유리잔에 푸른 액체를 쪼르르 흘려보낸 뒤 토닉워터를 채웠는데 자연스럽게 푸른 그라데이션이 만들어졌다. 그 위에 밀키스를 조심스레 얹어주니 바다 위에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얇게 썬 레몬과 로즈마리로 장식을 한 다음 신해량의 앞으로 유리잔을 부드럽게 내밀었다. 신해량이 오 이 새끼 제법인데?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길래 서지혁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는 겸손한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익숙한 상황이었다.

신해량이 눈으로 칵테일을 잠시 감상하고 있었는데 바다의 이름을 하고 있는 남자와 바다를 닮은 칵테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잘 어울렸다. 신해량이 유리잔을 들어 칵테일을 몇 모금 마셨다. 꿀꺽꿀꺽 목젖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는데 꼭 느릿한 파도처럼 느껴졌다.

"어떠십니까?"

"맛있어. 이거 이름이 뭐지? 처음 마셔보는 거 같은데."

"어…… 음. 'Trust your Blue'입니다."

더듬대며 내뱉은 서지혁의 대답을 생각해 보던 신해량이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급조한 이름이었다.

"내 이름을 표절한 것 같은데."

"원래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입니다."

뻔뻔한 대답에 신해량이 미소를 띠며 남은 칵테일을 마저 마셨다. 서 바텐더의 얼굴에도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곤 곧바로 다음 메뉴를 준비했다. 이번엔 코코넛 밀크와 파인애플 주스를 쉐이커에 넣고 흔들었다. 이리저리 던져가며 앙큼한 묘기를 부리니 신해량이 재롱떠는 강아지를 보는 듯한 흐뭇한 표정으로 서지혁을 보았다. 뽀얀 액체를 얼음이 담긴 둥근 유리잔에 넣고는 탄산수를 졸졸졸 채워 넣었다. 그리곤 냉동실에서 꺼낸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살짝 떠서 칵테일 위에 올린 뒤 그 위에 칵테일 체리까지 꽂아 완성했다.

"이건 이름이 뭐지?"

"하… 다 그냥 제가 급조한 거니까 묻지 말고 드십쇼. 직접 지어줄 거 아니면. 아이스크림을 살살 풀어서 드세요."

신해량이 서지혁이 건넨 머들러로 아이스크림을 살살 풀어내고 칵테일을 한 잔 마셨다. 톡 쏘는 탄산과 달달한 파인애플 주스를 부드러운 코코넛밀크와 아이스크림이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이었다. 신해량은 꽤나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바라보았다.

"팁이라도 주고 싶군."

"코코넛밀크 베이스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사이다 넣을까 했다가 당신 먹기엔 너무 달 거 같아서 탄산수 넣어봤는데 맛이 괜찮죠?"

"너한테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제가 좀 재주가 많죠."

아낌없는 칭찬에 서지혁이 히죽대며 웃었다. 그렇게 서 바텐더의 특제 칵테일 몇 잔을 더 건네주고 나서야 서지혁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신해량의 옆에 앉았다.

"넌 왜 안 마셔?"

"저요? 저 아까 이거 연습하면서 배 터지게 마셨습니다. 화장실을 세 번이나 다녀왔는데요."

신해량이 수고했다는 듯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하, 이 인간 또 시작이네. 아무래도 개취급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 보여서 그냥 놔뒀다. 마지막 잔을 반쯤 마신 신해량을 구경하듯 쳐다보고 있었는데 신해량의 고개가 서지혁 쪽으로 향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절로 긴장이 되는 얼굴이었다. 서지혁의 요구대로 메이크업이나 헤어스타일을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온 것 같았다.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안 예쁜 구석이 없어서 심장이 조금 떨렸다. 스마트워치를 하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해 주었는데 신해량이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았다. 목까지 꼭 채운 셔츠가 답답해 보여 단추도 두 개 정도 풀어주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런 걸 다 준비했지?"

"무슨 바람은 안 불었구요. 제가 또 한 로맨틱하거든요. 누구랑 다르게."

"그 누구가 누군지 모르겠군."

"저는 너어어무 잘 알 것 같은데. 아무튼 제 주 종목은 알콜과다 칵테일인데 당신 오늘 술 마시고 올 거 같아서 착한 제가 알콜 빼고 아무거나 다 때려 넣어서 만들어 봤습니다."

"정말 네가 만든 거야? 원래 있던 레시피가 아니라?"

"원래 있던 레시피 베이스로 응용 좀 해봤죠."

서지혁이 어깨를 으쓱대며 말하니 신해량이 칭찬하듯 어깨를 토닥였다.

"마음에 들었어요?"

"응."

"그럼 보상 좀 받아갈게요."

서지혁이 오른쪽 손으로 신해량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과 동시에 잡은 턱과 볼을 살짝 끌어당겼다. 신해량이 그에 응하듯 따라가주었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눈을 마주 보았다. 집 안을 밝히는 유일한 조명이 위에서 내려주는 빛 덕분에 눈 밑으로 속눈썹 그림자가 살짝 졌는데 그게 예뻐서 눈에 먼저 입을 맞추니 신해량의 한쪽 눈이 감겼다. 입술을 떼어내자 감겼던 눈이 다시 서지혁을 향했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눈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에게 제 속을 보여주는 게 서지혁의 역할이었다.

당신은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잖아. 숨김없는 감정을 담은 눈으로 까만 눈동자를 응시했다.

읽는 것이 아닌 읽히기 위한 것이었다.

그대로 고개를 살짝 틀어 입을 맞추었다. 촉촉하고 말랑한 입술이 포개졌다. 동그란 입술이 닿는 그 순간의 촉감이 좋아서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붙이고를 반복했는데 심장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서로의 입술을 누르고 눌리는 압력을 느끼며 고개를 조금 더 비틀었다. 입을 살짝 벌려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입술로 물듯이 오물댔는데 그에 응하듯 신해량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말캉한 입술을 실컷 즐기다 눈을 살짝 떠 보았는데 신해량과 눈이 마주쳤다. 하. 이 인간 진짜 눈을 안 감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신해량은 입을 맞출 때 눈을 감지 않았다.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지혁의 입장에선 꽤 부담스러웠다. 서지혁은 입술을 여전히 떼어내지 않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눈 좀 감아주시죠. 왜? 신해량도 마찬가지로 입술을 댄 채 되물었다. 그렇게 해달라면 해줄 것이지. 하여간 마음대로 하라면서 마음대로 다뤄지지가 않았다.

"왜겠습니까? 그 꼴을 보고도 몰라요? 남의 심장 또 터뜨리지 말고 그냥 얌전히 눈 좀 감아주시죠."

그 말을 들은 신해량이 피식 웃고는 눈을 감았다. 여전히 닿아있는 입술의 끝이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혀를 살짝 내밀어 입술을 누르듯 힘주어 핥으니 그걸 키스의 시작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입을 좀 더 벌렸다. 하여간 성격 급하긴. 아직 더 기다리라고 아랫입술을 쪽쪽 빨아주니 다시 얌전히 입을 다무는 게 느껴졌다.

신해량의 감은 눈을 감상하기 시작했는데 눈을 감겨놔도 예뻐서 심박수 조절에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촘촘하게 박혀있는 속눈썹과 얇게 흔적이 남은 쌍꺼풀 선도 예뻤다. 몽글한 입술을 혀로 살살 굴리며 충분히 즐기다 입술 틈을 벌리라는 듯 쓸어줬더니 신해량이 얌전히 입을 벌렸다. 옳지. 웬일로 페이스를 맞춰주고 있는 게 기특해서 칭찬하듯 얼굴을 감은 손으로 귀를 살살 쓸었다.

또 치고 들어올까 봐 이번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먼저 혀를 쑥 집어넣었더니 얌전히 자신의 입에서 놀고 있던 신해량의 혀가 닿았다. 달달한 것을 잔뜩 먹여줬더니 단 맛이 나는 것 같았다. 사람의 혀는 다들 말캉하고 미끄럽다는데 그다지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힘을 가지고 움직이는 혀는 생각보다 딱딱했고 미뢰의 촉감 그대로 느껴져 그렇게 미끄럽지도 않았다. 따지자면 설탕이 발린 젤리를 먹는 것 같았다. 혀가 교차하듯 닿을 때마다 온몸이 찌르르 울리듯 소름이 끼쳤다.

사람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들은 대부분 키와 비례하게 컸는데 그래서인지 서지혁은 남들보다 모든 것이 대부분 컸다. 입이나 혀도 거기에 포함이 되었는데, 신해량의 경우는 같은 듯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이 인간은 대충 만들어진 다른 사람들과 달리 큰 키에 비해 머리도 작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서지혁에 비해 입도 혀도 조금 작은 것 같았다. 입이야 말수가 적은 사람은 대부분 작긴 했지만 입 안쪽의 실평수도 그리 넓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지혁이 만난 모든 사람 중에 신해량의 입 평수나 혀가 제일 크긴 컸다. 160cm 근처의 아담한 여자들보단 클 수밖에 없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자 신해량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자신의 입안을 가득 채우는 혀를 가진 남자와의 키스는 이 인간도 처음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달달한 기분을 방해하듯이 주인을 닮아 싹바가지 없는 혀가 좁아터진 입안에서 저리 좀 가라는 듯 서지혁의 혀를 열심히도 밀어냈다.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으니 의자가 돌아가면서 무릎이 부딪혔다. 그 덕에 자세가 어정쩡해져 서지혁은 그대로 일어나 왼쪽 손으로 바 테이블을 잡고 신해량을 가두듯 몸을 낮췄다. 높이 차이가 생겨 신해량의 고개가 위쪽을 향해 꺾였는데 그 때문인지 신해량이 꼴깍꼴깍 침을 넘기는 게 느껴졌다. 와. 저 속으로 들어가는 것 중 절반이 내 거일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술도 안 마셨는데 몸에 열이 올랐다.

왜 키스를 입으로 하는 섹스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번엔 반대쪽으로 고개를 꺾어 다시 입술을 맞물렸다. 이번엔 혀뿌리까지 다 넣을 기세로 밀어 넣었더니 신해량이 속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밀어내지 않고 받아주는 게 귀여워 혀를 살살 쓸어 눕혔는데 힘이 빠진 혀는 말랑거렸다. 그 느낌이 좋아서 꾹꾹 누르듯 괴롭혔는데 하지 말라는 듯이 쳐낸다. 그 틈을 노려 이번엔 혀의 아래쪽을 공략했다. 여기야말로 정말 미끌거리고 부드러웠다. 머리털이 삐죽 서는 기분에 발로 제 발등을 비벼댔다. 꼭 가장 약하고 여린 부분을 만지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졌는데 키스하는 내내 목석처럼 아무 반응 없었던 신해량이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정말 여기가 약점인가 싶어 아래쪽을 살살 쓸면서 쪽쪽 빨았는데 인내심이 바닥난 신해량이 반격을 시도했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멱살을 잡고 다시 제자리에 앉힌 다음 자신이 일어나 우위를 선점했다. 여태 기다린 게 기특해서 얌전히 고개를 처 들어줬다. 이왕 일어난 거 좀 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주면 좋겠는데 싶어서 신해량의 허리를 붙잡고 제 다리 위에 앉으라는 식으로 끌어당겼더니 그건 싫다는 듯이 버틴다. 그래 뭐 이 정도면 만족한다 싶어서 포기하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제 입안을 가득 차지하고 있던 서지혁의 혀를 좀 밀어낸 뒤 드디어 공평하게 중간지점에서 혀가 오가기 시작했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지 신해량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본인 페이스를 되찾은 신해량의 스킬은 장난이 없었다. 혀가 살짝살짝 닿을 때마다 감질맛나게 내빼며 얽더니 성질이 오를 때쯤 상을 주듯 혀를 넓게 쓸었다. 그걸 몇 번 반복했는데 혀의 전체가 닿을 때마다 척추 부근에 전기코드라도 꽂은 것처럼 찌릿찌릿했다. 아 이거 더 있다간 큰일 날 거 같은데. 서지혁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그만해야 하는데. 여기서 빼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넘어오는 타액을 꿀꺽꿀꺽 삼켰다.

서지혁의 반응을 눈치챘는지 신해량이 속도를 조절하더니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두 사람 모두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서로의 숨결을 그대로 느끼며 바라보다 서지혁이 신해량의 얼굴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아. 정말 딱 죽어도 좋을 만큼 기분이 좋았다. 심장이 너무 간지러워서 꺼내서 긁고 싶은 심정이었다. 옴 몸이 베베 꼬일 것 같았다. 몇 번 더 쪽쪽대며 입술의 감촉을 느끼다 놓아주었는데 신해량은 자리에 앉지 않고 그대로 서서 서지혁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지혁은 스마트워치를 빼둔 것을 후회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심장이 이렇게나 뛰고 있다고, 행복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은 어떠냐고. 여전히 읽을 수 없는 눈을 하고 있는 그에게 서지혁이 대신 눈으로 이야기했다.

당신을 정말 좋아해요.

알아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신해량이 미소를 지으며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대답 없는 일방적인 고백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나는 당신을 나보다 더 사랑해요.

여전히 미소를 짓는 얼굴을 보며 이번엔 눈을 꼭 감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나를 사랑해 주세요.

다시 입술이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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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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