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7

비치워크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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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혁은 좁은 공간에 서 있었다. 벌써 죽어서 관에 묻힌 건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관이라기엔 주위가 부드럽고 말랑했다. 몽롱하고 아늑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떠 보니 연녹색의 액체가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인간의 기관지와 폐는 기체 교환에 특화되어 있어 액체가 유입될 경우 본능적으로 고통을 느끼게 되어있는데, 이상하게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흐릿하고 일렁여서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앞쪽엔 그림이나 문자 같은 게 가득 그려져 있는 것 같았는데 역시나 알아보기 힘들었다. 주변을 둘러싼 액체에 몸이 떠 있는 것인지 발이 땅에 닿는 감각이 없었다. 서지혁은 자신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몸을 감싸는 부드럽고 편안한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온몸에 투명한 막을 두른 듯 몽롱하고 흐릿한 감각에 몸을 맡기며 서 있었는데 갑자기 내부의 빛이 모두 꺼졌다. 그와 동시에 서지혁은 엄청난 중력을 느끼며 천장에 처박혔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끝도 없이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는데 코와 입으로 액체가 쏟아지듯 들어와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몸이 이리저리 처박혔고 위와 아래도 구분되지 않았지만 어딘가로 뚝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왜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끝없이 추락을 하면서 서지혁은 자신과 같은 처지일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떠올랐다.

빛 한 점 없는 바다 바닥으로 처박히고 정신을 잃기 직전까지 서지혁은 이미 오래전 믿음을 저버린 신께 빌었다.

그 사람은 물에서 죽으면 안 돼요.

끝내 닿지 못한 기도였다.


"지혁씨, 잘 지내셨어요? 요즘은 어떠셨나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예, 잘 지냈습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상담실에 들어온 서지혁이 상담사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곤 의자에 앉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예, 요즘 좀 즐겁습니다. 아이처럼 웃는 서지혁을 보며 오 그러시군요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상담사가 서지혁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잠은 잘 자는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 있어 불편함은 없는지 등.

서지혁은 눈을 도르륵 굴리며 지난 일주일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이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저 즐거웠고 행복했고 매일 의욕이 넘치고 흔히 말하는 하늘을 나는 듯 붕 뜬 기분이었다. 잠은 좀 줄었나? 그래도 피곤하진 않았고 오히려 머리가 잘 돌아가는 느낌이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고민하고 갈등했던 문제가 모두 해결된 느낌이고 그래서 더 이상 병원을 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여전히 입꼬리를 올려 웃고 있는 서지혁이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았다. 말을 끝낸 서지혁은 상담사가 '오 그렇군요! 그럼 당장 다음 주부터 병원을 나오지 않으셔도 되겠네요!'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서지혁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으며 상담지에 빠르게 글씨를 써 내려가던 상담사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다녀오셨어요?"

"응. 병원은?"

"예, 저도 다녀왔죠. 뭐예요? 빵 사 왔어요?"

"사 온 건 아니고 만든 거야."

"예?"

현관에서 신해량을 맞이하던 서지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해량이 든 종이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갓 만든 빵 냄새를 맡으며 종이가방을 열어 보았더니 따끈따끈한 빵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서지혁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이걸 다 직접 만들었다구요? 그래. 신해량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에 들어간 사이 서지혁은 부엌으로 가 포장된 빵들을 모두 꺼내놓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오늘 할 일이 있다며 먼저 나가더니 빵을 배워 온 모양이었다. 하필 서지혁의 병원 예약 시간과 겹쳐 신해량은 차 키를 서지혁에게 맡기고 나갔다. 그 덕에 서지혁은 신해량의 차를 몰고 병원에 다녀올 수 있었다. 상담을 받고 집에 와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때마침 신해량이 빵을 한가득 가지고 귀가했다. 평소에도 신해량은 혼자 나가서 뭘 배워오는 일이 많았는데 손재주가 좋아서 뭐든 곧잘 만들어 왔다. 지난번엔 캔들과 비누를 만들어왔는데 캔들은 쓰기 아까워 장식용으로 두고 있고 비누는 전 팀원들에게 선물하고 집에서도 잘 사용하고 있었다. 

크림빵, 초코소라빵, 소금빵. 종류별로 나눠놓고 있으니 씻고 편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은 신해량이 거실로 나왔다. 싱글벙글한 서지혁의 얼굴을 본 신해량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빵은 많이 남아서 안 배운다더니.

"뭡니까? 빵은 안 배운다고 했잖아요. 잘 먹지도 않으면서."

"너 있잖아."

"제가 이걸 다 먹으라구요?"

"못 먹어?"

"하루 만에 다 먹는 거 보여드릴까요?"

신해량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인간이 요즘 왜 이렇게 예쁜 짓만 골라서 하지? 뭘 잘못 먹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마냥 기분이 좋아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쪽쪽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뽀뽀세레에 신해량은 서지혁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서지혁은 애정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기분을 느끼며 신해량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잉잉대며 앙탈을 좀 부리니 귓가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따뜻할 때 먹어."

"예, 그럴 건데요. 이걸 오늘 다 만들었어요?"

"응. 발효시간 때문에 좀 오래 걸렸어."

"반죽도 직접 하셨어요? 이제 베이킹까지 마스터하신 겁니까?"

"……그냥 배워본 거지. 혼자 만들긴 어려울 것 같던데. 재료도 생각보다 많이 들고."

아무래도 집에서도 빵을 만들어볼 생각으로 배워본 것 같았는데 누구를 위한 것인지 뻔히 보여서 사랑스러웠다.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따끈따끈한 소금빵 두 개를 뜯어 입에 먼저 넣고 신해량의 입에도 물려주었다. 짭조름하고 담백한 빵이 입안을 가득 채우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부드럽고 따뜻한 빵 결이 살아 있었다. 서지혁의 행복한 얼굴을 가만 바라보던 신해량도 우물거리며 빵을 먹었다.

"진짜 맛있는데요? 뭡니까? 힘이 세면 빵도 더 잘 만드는 거예요? 반죽할 때 막 힘이 세면 좋나?"

"그런 건 아니야. 반죽은 기계로 했어."

"기계도 사람 낯짝을 좀 가리나 보죠?"

그런 거 아니라니까. 웃으며 말한 신해량이 서지혁을 떼어놓고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그 모습을 본 서지혁이 날듯이 찬장을 열어 재빠르게 컵 두 잔을 꺼내왔다. 쪼르르르. 우유가 가득 채워진 컵을 들고 빵 몇 개를 품에 안은 서지혁이 본격적으로 간식타임을 가지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우유와 빵을 커피 테이블에 올려두고 소파에 기대앉으니 신해량도 서지혁의 옆에 앉았다.

서지혁은 소금빵을 꼭꼭 다 씹어 삼킨 뒤 초코소라빵 포장을 뜯어 입에 넣었다. 달달한 초코가 입안에 사르르 퍼졌다. 서지혁이 눈으로 이거 존맛! 이라고 외쳤는데 신해량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림빵 포장지를 벗겨냈다. 아무래도 서지혁의 입맛에 맞는 건 너무 달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신해량이 뽀송한 크림빵을 한 입 베어 물었는데 맛이 꽤 괜찮은지 한입 더 베어 물었다.

"그것도 맛있어요?"

"생각보다 많이 안 달고 괜찮아."

그리 말하곤 이미 입안 가득 초코소라빵을 욱여넣은 서지혁의 입가에 크림빵을 먹으라는 듯 가져다 댔다. 서지혁이 빠르게 오물오물 씹어 빵을 삼키더니 신해량이 내민 크림빵을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초코가 너무 달아서 크림은 아무 맛도 안 나네요. 그럴 거 같았어. 단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아 고개를 갸웃대며 맛을 음미하고 있는 서지혁을 가만히 보던 신해량이 우유를 고래처럼 마셨다. 신해량은 고민하다 먹던 크림빵을 서지혁의 입에 물려주고 다시 소금빵을 뜯었다. 아무래도 신해량의 입맛엔 담백한 소금빵이 제일 맛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는 뭐래?"

"어……."

신해량의 물음에 서지혁이 말끝을 흐리며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신해량이 서지혁의 손을 제지하고 다시 서지혁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말하기 싫은 건 아닌데요. 그럼? 별로 믿기진 않아서요. 서지혁은 자신을 향해 진지하게 상태를 진단해 주던 상담사의 표정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증…… 증세가 좀 있는 거 같다던데요."

"조증?"

"예. 조울증일 수도 있고. 단기성일 수 있으니까 지켜보자고 하던데, 솔직히 안 믿겨서요. 기분 좀 좋다고 그게 문제가 되나 싶은데요."

신해량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쓰다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서지혁이 괜히 눈치를 살폈는데 신해량은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소금빵을 한입 더 베어 물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걱정을 할 거라 생각했는데 별 반응이 없어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서지혁은 애교 떨듯 신해량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모르지. 약은?"

"아직 약 먹을 정도는 아니고 뭐 갑자기 우울하거나 감정 기복이 생기면 바로 연락 달라고 하던데요."

"그래, 그러면 돼. 요즘 흔하잖아 그런 건. 약도 잘 나와서 빨리 호전된다고 하더군."

신해량의 시선이 서지혁을 향했다. 담담한 말투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과 눈빛이었다. 하지만 서지혁은 이제 그 속에서 자신을 향한 애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입을 살짝 맞추니 신해량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봐. 이렇게 웃잖아. 서지혁은 자신이 만들어낸 미소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이렇게 행복한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아. 그리고."

"?"

"어…… 아닙니다."

애매하게 끊어진 말에도 신해량은 추궁하지 않았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말라는 듯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말하기 싫은 건 아니었지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서지혁은 지난 상담을 떠올렸다. 잠은 왜 줄었냐는 질문에 기분 나쁜 꿈을 꿔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더니 어떤 꿈이냐고 물었다. 말해주고 싶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찝찝한 기분과 꿈을 꿨다는 감각만 남아 있다고 말했더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럴 수 있다고 했다. 요즘 스트레스 받는 일이 딱히 없었는데 이상했다. 고민하다가 그 꿈의 배경이 이전 직장인 것 같다고 말했더니, 그럼 그때 억눌러두었던 스트레스가 마음이 편안해진 지금 터진 것일 수도 있다고 그랬다. 그래서 조증이나 조울증 같은 증상이 같이 나타나는 거일 지도 모른다고. 말이 되는 일이긴 했지만 서지혁은 군대에 있을 때 더한 꼴을 많이 봤기 때문에 크게 와닿지 않았다.

꿈같은 건 신경 쓰지 않지만 같은 날을 겪은 신해량에게 굳이 그와 관련된 것 같은 꿈을 꿨다는 사실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요? 요즘 어떤데요?"

"나아지고 있어."

"그건 다행이네요."

서지혁이 간식이었던 빵을 과하게 먹고 소화시키기 위해 공원을 돌고 오겠다고 했는데 신해량도 같이 가자며 따라 나왔다. 늦은 오후와 저녁 사이였지만 해가 긴 여름이라 밖은 아직 밝았다. 그래도 낮보단 온도가 좀 떨어져 적당히 뛸만했다. 서지혁은 달리면서도 수다를 떨어댔는데 대충 자기가 강아지들한테 인기가 많다는 이야기였다. 동네 개들이 유독 자기를 잘 따른다. 개들도 역시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것 같다. 한번 쓰다듬어 줬더니 아주 자지러졌다. 이런 실없는 자랑을 해대니 신해량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신해량의 깔끔하게 올려넘긴 까만 앞머리가 뛸 때마다 흐트러지며 내려왔는데 그 모습마저 연출된 광고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웃는 얼굴을 감상하고 있으니 신해량이 왜 그러냐는 듯 쳐다봤다. 좀 쳐다보면 본인이 잘생겨서 그런다는 걸 알 법도 했는데 매번 이유를 묻는 듯한 표정인 게 귀여웠다. 약 올리듯 혀를 내밀어 메롱 했더니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적당히 소화를 시키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었는데 산책하던 강아지가 다가왔다. 익숙하다 싶어 주인의 얼굴을 보니 이전에 혼자 조깅을 하며 만난 적 있는 이웃 주민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강아지에게 손을 내밀었는데, 몸에 닿기도 전에 서지혁의 발치에서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웠다.

"보셨죠? 제가 개들한테 인기가 많다니까요."

서지혁이 강아지의 배를 마구마구 쓰다듬어 주며 웃자 신해량도 강아지를 보며 웃었다. 그 순간 강아지가 벤치 위로 폴짝 올라오더니 신해량의 허벅지 위에 배를 까고 누웠다. 주인도 어머! 하고 놀랐는데 서지혁이 개도 사람 낯짝을 가리네... 하고 중얼대니 주인도 크게 웃었다. 신해량은 조금 당황했는지 강아지를 멀뚱 바라보기만 했는데 강아지가 빨리 배를 만져달라는 듯 왕! 하고 짖었다. 배 만져달라고 하잖아요. 서지혁이 투덜대며 말하니 신해량이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강아지의 배를 살살 만져줬다. 강아지는 기분이 좋은 듯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신해량의 쓰다듬을 받던 강아지는 왠지 부끄러워 보이는 주인의 손에 끌려갔다.

"개한테는 제가 더 인기 많을 줄 알았는데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원래 처음 본 사람을 더 좋아하는 개일 지도 모르지."

"위로하지 마십쇼."

장난스러운 투덜거림에 신해량이 웃으며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개 만진 손으로 제 머리 쓰다듬는 겁니까? 하고 따지자 신해량이 다른 손이라고 해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이게 싫지 않다는 거였다. 강아지가 왜 그렇게 몸을 배배 꼬면서 좋아했는지 서지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사실마저도 미묘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서지혁."

"예이예이~"

"9월에 여행 갈래?"

"복귀 전 마지막 여행입니까? 좋죠. 어디로요?"

"대한도 가서 팀원들 상태도 좀 살펴보고 근처 섬에서 머무를까 하는데."

"결국 미련을 못 버리셨구만. 섬이면 하와이 쪽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

7월도 절반쯤 지나고 이 애정촌도 서로의 존재도 익숙해지니 슬슬 몸이 근질근질한가 보다. 날마다 뭘 배운다고 나가더니 이제 소재도 다 떨어졌는지 여행을 가잔다. 이왕 가는 거 차라리 8월이 낫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성수기는 좀 피하고 싶단다. 그건 또 공감돼서 9월에 한 2주 정도는 원래 신해량의 계획대로 섬나라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미 비행기 표까지 알아보았는지 서지혁의 동의가 떨어지자마자 눈앞에서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하여간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서지혁은 오늘 신해량이 만들어온 쿠키를 뇸뇸 먹으며 하와이엔 뭐가 맛있고 어디가 예쁘고 또 뭐가 맛있고 뭘 하면 재밌는지 좔좔 나열했다. 신해량은 줄줄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대충 쳐낼 건 쳐내고 서지혁이 하고 싶다는 것을 간략하게 메모해 두었다.

"오늘은 기분 괜찮아?"

"오늘도 최곤데요."

서지혁이 병원에서 조울증 가능성을 진단받은 뒤 신해량은 매일 서지혁에게 기분에 대해 물었다. 별다른 기복도 없고, 우울해질 기미도 보이지 않아서 서지혁은 해맑게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면 신해량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는데 표정을 읽기는 어려웠다. 크게 걱정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신경이 쓰이긴 하나 보다. 별것도 아닌 일을  괜히 말했나 싶었는데 그래도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문제가 있는 건 아닐 테니 더욱 그럴 이유도 없었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져 밤이 되었다. 서지혁과 신해량은 저녁을 먹고 거실에서 영화를 보고 있던 참이었다. 썩 재미는 없어서 서지혁은 쿠키에, 신해량은 여행 계획에 집중을 하고 있었다. 내용도 모르게 흘러간 영화의 엔딩 크래딧이 올라가고 서지혁은 남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신해량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신해량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벌써부터 여행 계획을 세우느라 집중한 듯 서지혁을 신경 쓰지 않았다. 서지혁이 그 모습을 보며 씩 웃더니 몰래 소파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하와이의 호텔을 찾아보던 신해량이 문득 익숙한 향기를 맡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이 다 꺼진 거실에 서지혁이 불이 붙은 캔들을 하나 가지고 걸어오더니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예전에 신해량이 직접 만들어 온 캔들 중 하나였는데, 중간중간 꽃이 박힌 플라워 캔들이었다. 신해량이 뭘 하는 거냐는 듯 쳐다보자 서지혁이 능청맞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워서 못 쓰겠다더니. 원래 아끼다 똥 되는 겁니다. 서지혁이 킥킥대며 웃자 신해량도 웃었다. 다시 신해량의 옆에 앉은 서지혁이 끄라는 듯 노트북을 톡톡 두들기자 신해량이 노트북을 닫았다. 노트북에서 나온 빛이 사라지자 주변이 더욱 어두워졌는데 통창으로 들어오는 주변 건물의 빛과 캔들의 불빛 덕분에 서로의 얼굴은 잘 보였다.

"이 향 익숙한데요? 그거 아닙니까? 그... 아, 비치. 뭐였더라?"

"비치워크. 맞아. 그거랑 비슷하게 만들었어."

"하여간 바다 진짜 좋아하시네요."

자극적이지 않은 은은하고 시원한 향이 둘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오렌지의 상쾌함과 머스크의 시원함도 느껴졌다. 당신 꼭 자기 같은 것만 좋아하는 거 알아요? 몰라. 은은한 불빛이 내려앉은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반쯤 내려온 앞머리를 옆으로 살짝 넘겨주니 시원하게 잘생긴 이마와 도드라진 눈썹 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톡 튀어나온 뼈에 그려놓은 듯 진한 눈썹과 그 아래 눈꼬리가 잘 빠진 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접히는 쌍꺼풀과 오똑하고 곧은 코, 그 아래로 이어지는 인중과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어느 구석을 봐도 조물주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온통 예쁜 것뿐이라 모아두면 부담스러울 법도 한데 어찌나 정성스럽게 빚어 놓았는지 어느 하나 튀는 부분 없이 조화로운 얼굴이었다.

또 왜 그렇게 쳐다보냐는 눈빛이다. 정말 몰라서 이러나 싶어 볼에 살짝 입을 맞추었는데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거짓말 탐지기도 달려있는 눈깔이 꼭 이럴 때만 둔하다. 괜히 심술이 나서 못생겨서요. 하고 대답하니 웃는다. 하여간 거짓말은 귀신같이 눈치챈다니까.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어 쭉 내밀었는데 신해량이 그 꼴을 가만히 보고만 있길래 뽀뽀해 주세요. 하니 곧바로 다가와 입을 맞췄다. 가벼운 뽀뽀 후 떨어지려는 신해량의 얼굴을 붙잡고 다시 입을 맞추며 입술을 핥으니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뽀뽀만 한다며. 그런 말 한 적 없는데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윗입술을 살살 핥다가 아랫입술을 쪽 빨았는데 아무래도 조금 더 도톰한 아랫입술을 빨아들이는 느낌이 더 좋았다. 상대도 그러려나 싶어서 자신의 아랫입술로 신해량의 입술을 꾹꾹 눌러대듯 물었다. 입술로 입술을 물고 당기니 조금 당겨져 오다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는데 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촉촉하고 매끈한 젤리를 입술에 물고 오물거리는 것 같았다. 젤리 같은 단 맛은 없었지만 달지 않다고도 할 수 없었다.

입술만 끈질기게 괴롭혔더니 상대의 인내심이 끝이 났는지 혀가 쑥 들어왔다. 성질 급한 양반이라 달래듯 혀도 살살 쓸어주며 입술을 쪽 빨았더니 이건 마음에 드는지 혀를 질척하게 얽혀왔다. 웬일로 안달 나게 약 올리지도 않고 받아주는 게 기특해서 양 볼을 붙잡고 손가락으로 귀를 살살 쓸어줬더니 간지러운 듯 고개를 살짝 비튼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좀 더 꺾어 입술을 맞물린 뒤 혀를 쭉 빼 넣었더니 신해량이 하지 말라는 듯 발을 툭 찼다. 입안이 가득 차는 건 영 마음에 안 드나 보다. 난 그게 좋은데. 어쩔 수 없이 조금 물러나줬더니 신해량이 칭찬하듯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괜히 반발심이 들었지만 일단 원하는 대로 해주자 싶어서 얌전하게 굴었다.

포근한 해변을 떠올리게 하는 향도 좋고, 바다를 닮은 이 남자도 좋고, 그와 하고 있는 행위도 마음에 들었다. 눈을 살짝 떠보니 아니나 다를까 게슴츠레하게 떠 있는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안 감는 이유라도 있나 싶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입이 바빠서 눈으로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아 참, 이 인간도 지금 말을 못 하지. 눈을 뜨든 감든 좋을 대로 해라 하고 서지혁은 다시 눈을 감았다. 키스에 집중하니 손발이 근질거려서 참기가 힘들었다. 신해량의 어깨와 팔을 더듬어 손을 붙잡았다. 깍지 끼듯 손을 얽고 손가락을 살살 쓸었다. 도드라진 손가락 마디도 하나하나 쓸어주고 손바닥도 살살 간지럽혔다.

별 반응이 없길래 손을 놓고 신해량의 허리를 붙잡았다. 그리곤 몸에 힘을 주고 앞으로 밀었는데 신해량의 몸이 뒤로 살짝 넘어가다가 힘을 준 것인지 그대로 버텼다. 하여간 뭐든 쉽게 해주는 게 없다. 상의를 살짝 들어 옷 속에 손을 넣고 허리를 살살 간지럽혔는데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열이 좀 받아서 이번엔 골반을 붙잡고 확 끌어당기며 상체를 힘주어 밀었더니 그제야 뒤로 넘어간다. 넘어가는 머리 뒤쪽에 손을 받쳐주고 어정쩡하게 누운 꼴을 한 신해량을 쳐다보니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썹을 휘며 쳐다본다. 마음에 안 들면 덤벼보시든가. 하고 웃으니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쳐다본다. 그렇다면 마음대로 해줘야지 싶어서 애매하게 바닥 쪽으로 내려가 있는 신해량의 다리를 들어 올려 소파 위에 얹어주었다. 이제야 완벽하게 소파에 누운 신해량이 멀뚱 바라보길래 그 위에 올라타듯 몸을 숙여 끌어안았다. 무거워. 당신보단 가벼운데요. 엄살을 부리길래 볼을 살짝 깨물었더니 또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쓴다. 그러면서도 말리진 않아서 낄낄대며 웃었다.

다시 입을 맞추면서 상의를 들춰 가슴을 좀 주물렀는데 말랑하던 가슴근육이 갑자기 단단해졌다. 하지 말라는 듯 힘을 준 것 같은데 신경도 안 쓰고 만지고 있으니 다시 힘을 푼다. 큰 손으로 말랑해진 가슴을 힘주어 주무르는데 별 반응이 없길래 이번엔 살살 부드럽게 쓰다듬듯 만졌는데 그래도 별 반응이 없다. 여자들은 좋아하던데. 남자는 가슴으론 별 감흥이 없나 싶어서 그만할까 하다가 말랑거리는 근육의 촉감이 좋아서 좀 더 만지작댔다.

아래에 누워 있으니 침을 삼키는 시간이 짧아진 신해량의 목젖이 자주 위아래로 요동쳤다. 그럴 때마다 신해량의 몸에 기대고 있는 서지혁도 함께 꿀렁대며 움직였다. 입술을 살짝 떼고 얼굴을 바라보자 신해량이 번들거리는 입술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숨 참는 거 하나는 국가대표급인 남자가 키스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꼴이 꽤나 자극적이었다. 입술을 손으로 닦아준 뒤 가슴을 만지던 손을 빼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신해량은 대답하기도 귀찮다는 듯 뭐냐는 눈썹만 씰룩였다.

"저기. 밖에서 안 안 보이는 거 확실하죠?"

통창을 가리키며 물으니 신해량이 눈만 움직여 통창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서지혁을 쳐다본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서지혁의 표정을 살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한 서지혁을 본 신해량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했다. 신해량의 대답에 서지혁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다.

서지혁은 입고 있던 상의를 벗어 소파 아래쪽으로 던졌다. 탄탄한 근육과 선명하게 갈라진 복근을 자랑하듯 웃으며 신해량을 내려다보았다. 신해량이 한쪽 눈썹을 휘었다. 음.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군. 대충 좋다는 의미로 마음대로 해석을 한 서지혁이 다시 몸을 숙여 신해량에게 입을 맞추었는데 이번엔 손을 아래쪽으로 내려 신해량의 바지 속으로 쑥 넣었다. 고무줄이 달린 바지를 입고 있어 어렵지 않게 손을 넣을 수 있었는데 어딜 만져줄까 고민을 좀 하다가 엉덩이를 콱 쥐었다. 몸에 비해 골반이 좁은 탓인지 엉덩이도 비교적 작았는데, 손바닥으로 문지르듯 쓰다듬으니 또 힘을 준 듯이 단단해졌다. 힘 좀 빼라고 속옷 속에 손을 넣어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리니 그제야 힘을 푼다. 그리고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신해량이 서지혁의 혀를 콱 깨물었다.

"아! 미쳤습니까?"

"네 손이나 간수 잘 해."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면서요!"

"그럼 방으로 가든가."

"여기서 하고 싶은 데요."

엉덩이를 주무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고민하던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신호에 냉큼 다시 달려들려고 하니 신해량이 서지혁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왜 그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니 고개로 자기 방을 가리킨다.

"여기서 하고 싶다니까요."

"……서랍에."

"예?"

더 길게 설명해 줄 생각이 없는지 빨리 가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왜 갑자기 이러나 싶었지만 말을 안 들으면 허락을 안 해줄 게 뻔해서 얌전히 일어나 신해량의 방에 들어갔다. 방에 불을 켜면 눈이 부실 것 같아서 침대 옆 협탁의 조명만 켜두고 방을 살폈다. 무슨 서랍을 말하는 거지? 책상 서랍을 열어보니 별거 없어서 어느 서랍을 말하는 거냐고 소리쳐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하. 진짜.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또 서랍이 있는 곳이 있나 싶어 방을 둘러보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협탁에도 서랍이 있었다. 이걸 말하는 건가?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서랍이 쑥 열렸다.

와. 시발…

헛웃음이 터졌다. 아… 이 인간이 진짜…….

서지혁은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꾹 참고 대신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서랍 안에는 젤과 뜯지 않은 콘돔 박스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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