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지혁해량] 7월의 애정촌 4

입주

96x105 by 호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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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사 후 3개월 동안 백수가 된 서지혁과 신해량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볼 예정입니다.
* 오늘은 애정촌 첫 날입니다.

BGM : https://youtu.be/siqLJciyv6c



창창한 20대 초반부터 목숨 바쳐 국가에 충성한 결과, 서지혁은 또래 보다 몇 배는 두둑한 통장 잔고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죽기 살기로 모은 것치고 큰 돈을 쓴 적은 많지 않았다. 목숨 값으로 받은 돈이니 아까운 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서지혁은 그런 이유를 제쳐두고도 말 그대로 돈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한국인이라면 큰돈이 생기자마자 집을 산다고 하던데, 성인이 된 서지혁에게 집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대에서는 관사 생활을 했고, 군 제대 후 기껏 취직한 직장은 하필 해저기지라 몇년을 바닷속에 처박혀 살았기 때문이었다. 일 년에 몇 번 가지도 못하는 곳을 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자취방을 처분한 것도 벌써 몇 년 전인지.

퇴사를 준비하며 제일 골치 아팠던 건 다음 임무를 배당받기 전 주어지는 3개월의 휴가를 어디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본가에서 뛰쳐나온지 오래라 얼굴 보는 가족이라곤 동생들뿐인데 학교 다니느라 바쁜 동생들에게 빌붙자니 영 모양이 빠졌다. 당장 갈 곳이 없어 짐을 대학생인 동생의 집으로 보내둔 터라 퇴사 후 3일 동안은 두둑한 생활비를 뇌물 삼아 동생 집에서 머무르긴 했다. 하지만 1학기 기말고사를 앞두고 밤낮으로 학교 다니랴 공부하랴 바쁜 동생의 집에 머무르는 건 도저히 할 짓이 아닌 것 같아 간단한 짐만 챙겨서 후딱 호텔로 튀었다.

3개월 동안 호텔에서 생활하는 돈지랄은 도저히 할 수 없어서 호캉스라 생각하고 삼주일만 결제를 해두었는데 일주일 겨우 머물고 나가게 생겼다. 남은 이 주일은 100% 환불은 불가능하대서 생돈 날린 서지혁이 신해량에게 징징댔더니 난 월세 안 받잖아. 했다. 그건 또 맞는 말이라 수긍했다. 여름 옷과 전자제품 몇 개만 챙겨온 터라 가지고 나갈 짐은 단출했다. 동생 집에 있는 짐은 택배로 받기로 했으니 일주일 동안 서지혁의 밤낮을 책임져준 호텔과도 작별이었다.

7월이 되고 그 사이 방학을 한 동생을 택시로 써먹고 신해량의 집, 그러니까 음…… 망할놈의 애정촌에 도착했다. 이런 곳에 살아서 좋겠다는 동생에게 입만 웃으며 사람은 어디에서 사는지 보다 누구와 사는지가 더 중요하단다. 꼰대 같은 조언을 해주고 인사하듯 손을 흔들었다. 서지혁의 인사에 동생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길래 이번엔 내 차 다시 내놓을래? 하며 장남의 위엄을 보여줬더니 손 하나를 더 꺼내 하트를 만들어 날렸다. 그리고는 혹여나 차를 빼앗길까 빠른 속도로 서지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신해량이 알려준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에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운동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었기 때문에 곧바로 짐을 풀기 위해 방으로 향했다. 며칠 전 이곳에 방문했을 때, 신해량이 서지혁의 방으로 찜해둔 빈방을 보여줬다. 그땐 붙박이 옷장만 달랑 있었는데 지금 보니 커다란 침대, 그 옆에 작은 협탁, 책장이 딸린 책상도 들어와 있었다. 하여간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는 인간이었다. 침대 위에 전에 입고 왔다가 두고 간 옷이 각 잡혀 접힌 채 놓여 있길래 반가운 마음에 룰루랄라 옷을 끌어안았더니, 옷에서 섬유 유연제 냄새가 진하게 났다. 담배냄새가 어지간히도 싫었나 보다.

짐 중에 부피가 가장 큰 옷부터 정리하자 싶어서 붙박이 옷장을 열었더니 내부가 생각보다 더 넓었다. 우월한 기럭지 위에 걸치는 옷들은 모두 길이가 길어서, 늘 세로 공간이 긴 행거를 선호했는데 딱 마음에 드는 높이였다. 서랍도 넉넉해 종류별로 깔끔하게 수납하기도 좋았다. 구겨지기 쉽거나 긴 옷은 옷걸이에 걸고, 편히 꺼내 입는 옷은 각 맞춰 접은 뒤 서랍에 넣었다. 붙박이 옷장은 세 개가 붙어있었는데 여름 옷만 대충 챙겨온 터라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른 옷장을 열어보니 가로로 긴 서랍에 여분 이불과 베개 몇 개가 들어있었고, 그 옆의 옷장에는 뜬금없는 셔츠 하나가 달랑 들어있었다.

옷을 잘못 넣어놨나 싶어 신해량의 방에 두려고 옷을 꺼내봤더니 또 섬유 유연제 향이 났다. 세탁한지 얼마 안 된 옷인 것 같은데 아무리 봐도 신해량이 입을만한 옷은 아니었다. 소매 부분이 롤업 된 여름 셔츠였는데 색이 주황색이었다. 그 양반이 이런 색깔의 옷을 입는 꼴은 본 적이 없는데. 혹시나 싶어서 옷장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고 옷을 몸에 대보니 서지혁에게 찰떡같이 잘 어울렸다. 입꼬리를 올려 웃은 서지혁이 입고 온 하얀 반팔티 위에 주황색 셔츠를 걸쳐 입었다.

띵동.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미리 불러둔 티비 설치 기사였다. 문을 여니 커다란 티비가 사람보다 먼저 들어왔다. 놀라서 티비를 받아들고 기사와 함께 거실로 옮겼더니 어휴 힘이 참 좋으시네요. 한다. 예 제가 힘이 좀 좋습니다. 능글맞게 받아치고 있는데 핸드폰 진동이 울려 화면을 보니 차단이 풀린 신해량이었다.

"예이."

'도착했어?'

"옙. 짐 풀고 있습니다."

'가서 도와줄 테니 기다리고 있어.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한 시간 정도 걸려.'

"짐이랄 것도 별로 없어서 벌써 거의 다 풀었…… 어어어어~ 거기 말고 이쪽입니다."

'뭐?'

조금만 왼쪽으로요. 네 딱 좋습니다. 예예, 거기요. 티비 설치 위치를 조정하고 만족스러운 서지혁이 기사 아저씨에게 따봉을 날리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집에 누가 있어?'

"아아~ 들으셨습니까? 예. 제가 새 애인 좀 사귀어서 한번 불러봤습니다."

킥킥대며 농담을 좀 했더니 기사 아저씨가 떨떠름하게 저요? 하는 눈으로 서지혁을 쳐다봤다. 아니, 아. 들리셨구나. 아 죄송합니다. 농담입니다……. 하고 고개를 굽신대며 사과하니 핸드폰 너머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어색한 티비 설치 시간이 지나가고 다시 혼자 남은 서지혁이 만족스러운 듯 커다란 티비를 바라보았다. 그래, 바로 이거야. 이래야 집이 집 같지. 이건 신해량 몰래 서지혁이 준비한 거였다. 대충 집들이 선물이나 세 달 치 월세 비슷한 거였다.

서지혁은 지난번에 신해량이 만들어준 요리를 떠올렸다.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 순천 돼지라고 자부하는 서지혁도 흠잡을 곳 없었던 완벽한 요리였다. 하지만 사람은 늘 그런 고급 요리를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번엔 서지혁이 생활감 넘치는 집밥으로 신해량의 기선을 제압하기로 결심했다.

부엌을 좀 뒤져보니 상온에는 견과류 봉지들과 뜯지도 않은 젤리와 사탕 같은 과자들이 있었다. 보아하니 뒤쪽의 것들은 서지혁 먹으라고 미리 사둔 것 같았다.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 젤리 하나를 입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냉장실과 냉동실을 확인했다. 며칠 전에 서지혁에게 해준 요리 재료들 몇 개가 남아 있었는데 그중에서 쓸만한 것들을 몇 개 골라냈다. 요리를 하기 전, 쌀을 씻어 밥부터 충분히 해두었다.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이 들리고 요리도 대부분 완성될 즈음 타이밍 좋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해량은 운동 후 씻고 왔는지 늘 깔끔하게 올려넘겼던 앞머리가 풀려있었다. 손에는 장바구니를 하나 들고 있길래 서지혁이 날듯이 튀어나가 삣어들었다.

"장 보고 왔습니까? 말을 하시죠. 같이 갔을 텐데."

"정신없을 거 같아서 오늘 먹을 거만 대충 사 온 거야. 그런데……."

서지혁에게 순순히 장바구니를 넘겨준 신해량의 시선이 부엌을 향했다. 서지혁은 개의치 않고 자신이 빼앗은 장바구니 내용물을 뒤지더니 유레카를 외치며 콩나물을 들어 올렸다.

"안 그래도 국이 없어서 아쉬웠는데 잘 됐네요."

"뭘 하고 있는데? 도와줄게."

"됐고, 손 씻고 옷이나 갈아입고 오십쇼."

떨떠름하게 본인 방으로 들어간 신해량이 잠시 후 편한 옷차림으로 다시 부엌에 들어왔다. 그러자 서지혁은 방해하지 말고 얌전히 앉아있으라며 신해량을 바 테이블 쪽으로 밀었다. 얌전히 자리에 앉은 신해량이 사슴같이 목을 쭉 빼서 서지혁이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하듯 쳐다봤다.

잠시 뒤, 바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하나하나 올라왔다. 새우가 들어간 고추장 해물 불고기, 통통한 버섯전, 상큼한 파&양파 겉절이, 계란프라이 여섯 개, 마지막으로 칼칼한 콩나물국까지. 고봉밥과 수저까지 손수 앞까지 밀어 넣어주니 신해량이 이걸 언제 다 했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서지혁을 바라보았다. 서지혁은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여유로운 미소로 어깨를 으쓱였다.

"잘 먹을게."

"잘 드십쇼."

신해량은 요리를 하나씩 입에 넣을 때마다 이 새끼 제법인데? 하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보았다. 그러면 또 서지혁은 제가 좀 합니다 하는 표정으로 우쭐댔다. 계란프라이를 보고는 왜 여섯 개나 구웠냐는 표정이긴 했지만 그건 무시하고 신해량의 앞접시에 계란 세 개를 올려주었다.

"저한테 할 말 없습니까?"

"? 잘 먹을게."

"그거 말고요."

서지혁을 멀뚱히 쳐다보던 신해량이 고개를 돌려 거실 쪽을 보더니 티비를 가리킨다. 아니 그것도 말고요. 그럼 뭐? 좀 더 자세히 봐 보십쇼. 자세히 보라면서 몸을 뒤로 쭉 빼는 서지혁을 보더니 신해량은 알겠다는 듯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잘 어울리네."

"제가 주황이 좀 잘 받죠."

"어울릴 것 같더라."

자랑하듯 주황색 셔츠를 펄럭이니 이제 밥이나 먹으라는 듯 신해량이 서지혁의 뒷머리를 긁듯이 쓰다듬었다. 거기에 화답하듯 계란프라이 하나를 한 입에 집어넣은 서지혁이 우물거리며 질문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이 미친 애정촌의 가장 최선의 결과가 뭡니까? 진짜 저랑 당신 눈 맞는 거예요?"

그 물음에 신해량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저는 이미 잡힌 물고기고……  그럼 제가 당신 꼬셔야 하는 거죠?"

"그럴 마음이 있긴 해?"

"없었는데요. 안 그러면 억울해 뒤질 거 같아서 작정하고 해보려구요."

열심히 해봐. 신해량이 남 이야기하듯 말하자 서지혁이 고민하다 자기 앞접시에 있는 계란프라이 하나를 신해량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다. 신해량이 바람 빠지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를 내며 웃었다.

"햐, 이건 나한테는 거의 청혼 수준인데. 제가 살다 살다 계란을 다 양보해 보네요."

"그럴 줄 알았으면 계란 들이밀면서 이 집에서 살라고 할 걸 그랬군."

"그랬으면 바로 오케이 했죠."

서지혁이 낄낄대며 웃자 신해량이 어이없다는 듯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곤 서지혁이 큰맘 먹고 양보해 준 계란을 베어 먹었다. 맛있죠? 그래. 귀여운 지혁이가 줘서 더 맛있죠? 그래.

고봉밥을 싹 비우고 소파에 앉아 새삥인 티비를 틀어놓고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서지혁이 옆에 앉은 신해량의 무릎을 툭툭 쳤다.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신해량이 제 무릎을 한번 봤다가 서지혁과 시선을 맞췄다.

"취향이 뭡니까? 이상형 같은 거요."

"딱히 그런 거 없어."

"뭐 어떤 사람한테 끌린다 그런 건 있을 거 아닙니까?"

"……잘 모르겠는데."

"허, 출제자도 정답을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맞힙니까?"

"따지자면 나는 채점자지. 아무 답이나 일단 써봐. 노력이 가상해서 부분 점수라도 줄지 누가 알겠어."

"제가 또 구구절절 사연 있는 편지는 멋들어지게 잘 쓰죠. 말했었나? 대학 다닐 때 시험 전날 술 처먹고 숙취 때문에 날려먹은 전공 기말고사가 있었거든요. 머리는 팽팽 도는데 차마 백지를 낼 수는 없어서 술기운에 힘입어 취중진담 편지를 써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 크게 감동을 하셨는지 저를 나중에 따로 부르던데요."

"시험지에 편지 쓰는 놈은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인가 했는데 가까이에 있었군. 교수가 뭐라고 했는데?"

서지혁이 낄낄거리며 아이스크림을 크게 한 입 베어 오른쪽 볼 안에 넣어두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제 간드러지는 작문 실력에 감동을 받으신 모양인지 저보고 전공 당장 때려치우고 국문과로 전과나 하라던데요."

"그거 욕 아닌가?"

"예, 맞습니다. 뒤지게 털리고 C+ 받았어요."

"내가 교수였으면 D를 줬을 텐데. 교수님 인품이 뛰어난 분이셨나 보군."

"제가 재수강하는 꼴이 보기 싫으셨나 봅니다. 저야 땡큐였죠."

황당하다는 듯 웃는 신해량을 보며 같이 따라웃던 서지혁이 딴 길로 새어버린 대화의 꼬리를 다시 물고 왔다.

"아무튼, 공략 난이도가 너무 높은 거 아닙니까? 저한테 불리한데요."

서지혁이 투덜대며 말하자 신해량이 아이스크림을 한입 작게 베어 물고는 생각에 잠긴 듯 침묵했다. 이런 신해량의 버릇이 익숙한 서지혁은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얌전히 기다렸다.

"……그럼 넌.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봐."

"허, 참나. 제가 당신이랑 뭘 하고 싶은지 어떻게 알고요."

파격적인 어드밴티지에 어이없다는 듯 비웃는 서지혁을 신해량이 가만히 바라보았다. 서지혁은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까만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싶었지만 괜히 지고 싶지 않아 같이 노려보았다. 이렇게 눈을 보고 있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기만 하는데 이 인간은 도대체 남의 생각을 어떻게 읽는 건지. 서지혁은 앞머리가 이마를 덮은 탓에 평소보다 어려 보이는 신해량의 얼굴이 꽤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시원하게 잘생긴 이마가 보이는 게 더 나은 거 같기도 하고.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니 문득 대한도에서의 마지막 날이 떠올랐다. 이마를 간지럽히던 까만 앞머리와 교차되어 닿은 코, 닿을 듯한 입술과 미세하게 떨리던 눈동자. 서지혁은 의식적으로 침을 삼키지 않도록 노력했다.

"내가 모를 거 같나?"

그 질문에 모든 것을 들켜버린 것 같은 서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미친. 진짜 제정신 아닙니다, 당신."

"알아."

참으로 정신 나간 뻔뻔한 대답이었다.

서지혁과 신해량은 백색소음으로 예능프로그램 하나 틀어두고 간식까지 부지런히 조졌다. 이후엔 소화를 시킬 겸 스트레칭 좀 하다가 사이좋게 치카치카 양치까지 끝내고 남은 짐을 정리하기 위해 서지혁의 방으로 들어갔다. 잡동사니를 제외하곤 짐을 거의 푼 상태라 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있었는데, 신해량이 방을 쭉 둘러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리고 노트와 시집 몇 개를 책장에 꽂아두던 서지혁이 신해량을 툭툭 쳤다. 신해량이 돌아보니 서지혁은 자기 책상을 보라는 듯 가리켰는데,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 위에 뜬금없는 강아지 인형 몇 개가 올려져 있었다.

"이거 뭡니까? 제가 애도 아니고."

"네가 준 거잖아."

"예? 제가요?"

서지혁이 오기 전부터 빈 방에 덩그러니 앉아있던 인형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는데 모두 오락실 사격장에서 뽑은 인형이었다. 그러고 보니 적지 않게 줬던 것 같아 물어보니 대부분 아동 보호 센터에 기부하고 몇 개만 집에 뒀다고 했다. 그리고 그중 또 몇 개를 서지혁의 방에 둔 거라고. 멍청하게 생긴 강아지 인형을 툭 치고는 나머지는 어디 있냐고 했더니 자기 방에 있단다.

"내 방은 아직 안 봤어?"

"예. 제가 주인 없는 방 뭐 하러 들어갑니까?"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따졌다고."

"오늘만 좀 따졌죠."

남은 짐까지 정리를 끝낸 후 서지혁이 삭신이 쑤신다고 투덜대며 침대에 앉더니 상체만 뒤로 젖혀 누웠다. 그 꼴을 가만히 보던 신해량도 서지혁의 옆에 앉더니 고민하다 똑같이 누웠다. 왜 남의 침대에 허락도 없이 눕습니까? 내가 샀는데. 또 할 말이 없었다. 사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사줘놓고 생색을 낸다며 투덜댔더니 닥치라는 듯한 시선이 따라붙는다. 뻔뻔한 눈빛으로 대응하며 쳐다봤더니 신해량은 그래 네 마음대로 떠들어라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피곤한지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기분이 이상해진 서지혁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방주인도 아닌 사람은 여전히 낮잠이라도 자려는 듯 눈을 꼭 감고 누워있길래 옆에 있는 손을 톡 건드렸더니 천천히 눈이 뜨인다. 올려다보는 시선에 서지혁은 상체만 돌려 신해량의 양어깨 옆에 손을 짚고 반쯤 엎드렸다. 손을 짚은 부분이 조금 꺼지며 침대가 흔들렸다.

"제가 퇴사 날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나십니까?"

신해량은 졸린 건지 기억을 더듬는 건지 눈을 살짝 감았다. 몇 초 뒤 다시 서지혁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다음엔 진짜 할 거라고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

"예."

이런 말을 하면 좀 방어적으로 나오려나 싶었는데 여전히 나른한 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신해량의 반응에 헛웃음을 지었다. 혼자 마음 편해 보이는 꼴이 얄미워서 그대로 입술을 깨물어 버릴까 했는데 착한 서지혁이 참았다. 신해량은 이미 허락한 듯 굴었지만 서지혁은 그러지 않았다. 작정하고 꼬시자고 생각은 했지만 스킨십이란 좋아하는 상대와 해야 좋은 거지, 무조건 한다고 상대가 좋아지는 건 아니니까. 서지혁이 내가 봐줬다 하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더니 신해량도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고 싶은 거 해도 된다고 했잖아."

"하고 싶은 거 하는 것도 안 하는 것도 제맘입니다."

신해량의 방은 딱 예상한 대로 있을 건 다 있으면서 복잡하지 않고 깔끔했다. 신해량의 방에도 어울리지 않는 인형이 몇 개 있었는데, 몇몇 인형에는 뜨개 양말이 신겨있길래 물어봤더니 심심해서 떠봤다고 했다. 서지혁은 자기 인형한테 신겨줄 거라고 인형의 양말을 죄다 벗겨갔는데 신해량이 그 꼴을 보더니 이제 인형 양말까지 훔치는군. 했다. 서지혁이 낄낄대며 웃었다.

몸이 피곤하니 담배가 말려 눈치만 살살 보고 있는데 또 귀신같이 눈치를 챈 신해량이 다녀오라고 했다. 이번엔 잘 털고 오겠다며 셔츠는 방에 벗어두고 집 나가서 담배를 한 대 빠르게 피웠다. 꽁초를 쓰레기통에 쏙 넣고 티셔츠를 이래저래 펄럭이며 생쇼를 다 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양치하고 탈취제 뿌리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냄새를 날리기 위해 온갖 난리를 다 쳤더니 담타를 가지기 전보다 더 피곤해진 기분이었다.

멍하니 공기청정기 옆에 서 있으니 신해량이 저녁은 뭐 먹을 거냐고 물었다. 시원한 비빔국수가 먹고싶다고 했더니 자기가 만들어준단다.

부엌에 들어가 앞치마를 입고 국수를 삶는 신해량 옆에서 알짱대며 구경하던 서지혁이 몰래 국수 면을 조금 더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계란 열 개를 꺼내왔다. 뭐 하는 짓이냐는 눈빛에 삶아 먹을 거라고 하니 두 개만 삶으랜다.

그 말에 서지혁이 날뛰었다. 어떻게 계란을 두 개만 삶을 수가 있냐. 비빔국수엔 계란이 많을수록 맛있는 거 모르냐. 먹을 걸로 이러면 안 된다. 아까 내가 계란프라이 양보한 건 기억도 안 나냐. 구구절절 계란 열 개를 삶아야 하는 이유를 대는 서지혁의 말에 대꾸도 안 하고 양념을 만들던 신해량이 간단하게 답했다. 이미 일일 권장 섭취량을 넘겼어. 서지혁이 시무룩해하며 계란 여덟 개를 집어넣고 냄비에 물을 받아 계란 두 개를 넣었다. 비 맞은 강아지 꼴을 한 서지혁이 안쓰러웠는지 신해량은 한숨을 쉬며 계란 하나를 더 꺼내서 넣어줬다.

계란 하나를 더 얻어 신이 난 서지혁이 이번엔 신해량의 비빔국수 양념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일일이 계량을 해서 넣을 필요가 없다. 사람의 손과 입이 더 정확하다. 순천 손맛을 보여주겠다 조잘조잘 대니 신해량이 귀찮다는 듯 서지혁에게 오이를 물려 입을 닫게 만들었다.

서지혁의 취향대로 깨와 오이가 가득 올라간 비빔국수를 후딱 해치운 두 사람은 소화시킬 겸 동네 공원을 몇 바퀴 뛰고 다시 집에 돌아왔다. 서지혁은 거실에 딸린 화장실에서, 신해량은 자기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샤워를 했다. 미지근한 물로 몸을 깨끗하게 씻어낸 두 사람은 젖은 머리를 말리고 거실로 나와 티비를 틀어 영화 한 편을 봤다. 역시 티비를 사길 잘했다. 이 끝내주는 화질을 봐라. vod도 볼 수 있다. 서지혁이 영화를 보며 영업사원처럼 티비를 칭찬했더니 신해량이 그래 네 말이 맞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품이 절로 나오는 시간이 되어 잘 자라고 인사를 한 두 사람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폭신한 침대 위에 누운 서지혁이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삼 개월이 그리 나쁘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서지혁은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건 신해량도 마찬가지였는데 둘의 생각 회로는 조금 달랐다. 서지혁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미궁에 빠져 답을 내리기 어려워했고, 그런 그가 내리는 결론은 늘 극단적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잡아먹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는 서지혁은 생각 없이 남의 명령을 따르는 게 편했다.

반면에 신해량은 머릿속에 슈퍼컴퓨터라도 있는 듯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단기간에 그럴듯한 답을 내놓았다. 그게 모두 정답은 아니었지만 서지혁이 생각하기에 대부분 옳은 방향이었다. 그래서 서지혁은 신해량을 따랐다. 종종 그의 판단에 불만은 있었지만 그를 늘 믿었으니까. 서지혁에게 신해량은 나아갈 곳을 알려주는 등대와 같았다.

서지혁은 이번에도 신해량을 믿어보기로 했다. 골치 아픈 문제들은 밀어두고 눈앞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그게 옳든 틀리든 신해량의 말대로 그 끝에서는 알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신해량이 노력을 해보겠다는데 이 세상에 안 되는 게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서지혁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서지혁은 기회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기회를 놓친 적은 없었다.

눕자마자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 일을 곱씹다 눈에 내려앉았던 잠이 달아났다. 서지혁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다 문득 억울해져서 몸을 휙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나만 못 자는 건 너무 억울한데. 그런 생각을 한 서지혁은 침대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신 뒤, 신해량의 방 앞에 섰다.

"주무십니까?"

잠시 후 막 잠에서 깬 듯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방에 들어가니 신해량은 협탁의 조명을 켜두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정말 자다가 깬 것인지 쌍꺼풀이 평소보다 더 도톰하게 부어 있었다. 그 모습이 더 괘씸해져 서지혁은 건들거리며 침대 옆에 섰다. 신해량이 왜 그러냐는 듯 올려다 보고있었다.

"잠이 안 와서요."

"내가 자장가라도 불러줘야 하나?"

"그건 됐고. 궁금한 게 있는데, 요즘 잠은 잘 잡니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듯 신해량이 서지혁을 느릿하게 노려봤다. 잠시 뒤 답을 찾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런 걸 묻지? 하는 표정으로 서지혁을 쳐다봤다. 빨리 대답이나 하라고 재촉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하루쯤은 잠 좀 설쳐보십쇼."

자는 달밤에 봉창 두들기는 악담을 들은 신해량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미간을 좁혔다.

서지혁은 조명을 등져 그림자가 진 신해량의 얼굴을 바라보다 몸을 숙였다.

말캉한 마른 입술이 닿았다.

사람의 몸 중에 가장 많이 쓰는 근육이 입술이라고 하던데, 그런 것치곤 너무 말랑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했다가 근육이란 힘을 줘야 단단해지는 거였지. 하고 혼자 깨달았다. 예상 못 한 입맞춤에 대비하지 못했는지 무방비하게 닿은 입술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고개를 꺾은 덕에 두 입술의 틈이 맞물리듯 닿았는데, 액체도 아니면서 눌린 몽글한 입술이 퍼지며 서로의 틈을 막는 것이 신기했다. 원래부터 붙어 있었던 것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듯 입술이 맞붙었다.

서지혁은 심장이 두근대고 가슴께가 간지러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190cm 중반의 키에 100kg이 근접한 커다란 몸뚱이 중 100분의 1도 안 되는 극히 작은 면적만 닿았을 뿐인데 온몸을 데인 듯 뜨거웠다. 입을 맞춘다는 것이 원래 이렇게 가슴 떨리게 설레는 일이었던가. 그저 가만히 닿은 입술에 집중하고 있었을 뿐인데, 서지혁은 뒷목에 소름이 돋으며 짧은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자다 깨서 말라있던 입술이 물기 머금은 입술을 만나 점점 젖는 것이 느껴졌다. 대한도에서는 바람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숨결도 닿았다. 온몸이 간지러워 땅에 닿아있는 발가락이 절로 오그라들었다. 몇 초가 지났을까? 입맞춤이 끝나는 타이밍은 언제일까? 언제 입술을 떼야 하는 걸까? 머릿속이 하얗게 된 서지혁이 간신히 몸을 떼어냈다. 하나라도 된 것처럼 달라붙어 있던 두 입술이 떨어질 때에는 아쉽다는 듯 서로를 따라가더니 간신히 쪽.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조명을 등진 얼굴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는데, 까만 눈만 천천히 깜빡이는 게 보였다. 허락은 진작해 준 주제에 정말 덤벼들 거라곤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잘 주무십쇼."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예상은 했기에 서지혁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 생각에 잠 못 이루면 더 좋구요.

애정촌에서 보내는 첫 날밤. 7년 만에 벌어진 반격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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