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바등/해량무현] 퍼즐
박무현 없는 해량무현(?)
* 24/03/07
* 한 번 정독했기에 설정과 고증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 최신화 (외전 연재분)까지 읽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아무 그림도 없는 하얀 직소 퍼즐도 모서리부터 시작하면 전부 맞출 수 있다. 조각이 아주 많다고 해도 방법은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된다. 신해량은 조각난 박무현의 정보를 다 맞춰 낼 자신이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빠르게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알았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신해량은 단순히 나무를 베거나 부수는 일을 잘했지만, 전체적인 숲을 보는 일에도 능숙한 사람이었다. 한국 국적의 엔지니어 팀과 민간인을 보호하는 임무는 완벽하지 못한 성공으로 끝났다. 숲을 살피기 위해선 임무를 복기할 필요가 있었다. 복기는 습관에 가까웠다. 용병으로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완벽하게 클리어하는 미션이란 건 없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었다.
위험한 탓에 당분간 모든 의혹을 묻어두었지만, 이제는 비교적 안전했다. 그러면 해야 할 일을 할 차례다. 늘 그렇게 해왔으니 별다를 것은 없다. 거기에 박무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수수께끼가 얹어진 것일 뿐이다. 신해량은 그렇게 수런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실타래가 굴러가듯 상념은 자연스레 박무현에게 흘러갔다.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려 보이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해저 기지에 온 지 고작 닷새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신해량은 박무현에 관한 데이터는 숙지하고 있었으나, 그뿐이지 실제로 마주한 것은 테러가 일어난 날이 처음이었다. 첫인상은 어땠더라? 그저 자국의 민간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박무현은 달랐다.
얼굴에 생각이 다 드러나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신뢰가 묻어나는 눈이 낯설었다. 같은 팀원이 아니라면 신해량을 그렇게 보는 사람이 없었다. 평판이 나쁘지 않은 치과의사가 악명을 날리는 신해량에게 믿음을 보낼 까닭이 있는가? 자신의 겉껍데기가 꽤 점수를 딸만하다는 점은 잘 알았지만, 의무감 70%와 효율을 빙자한 귀찮음 20% 그리고 개인의 원한을 10% 섞어 행했던 수많은 치아 훼손 행위를 치과의사가 좋아할 리 없다는 점도 잘 알았다. 박무현의 신뢰는 같은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신해량은 박무현의 말을 믿었다. 낯에 드러난 감정이 선연하기 때문이라 했지만, 결국 그건 자신을 설득할 말에 불과했다.
박무현의 지식은 기이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가치 있는 정보로 드러났다. 그를 믿었기에 결국 서지혁과 백애영, 정상현을 탈출시킬 수 있었다. 무섭다는 눈을 하고서는 기어코 다른 이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행위는 놀라웠다. 일 순위가 서지혁이라는 점은 의아했지만, 여성과 아이-정상현을 아이라고 칭하기엔 어렵지만, 정신연령은 애새끼가 맞다-를 먼저 보내는 모습은 숭고했다. 신해량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지만, 민간인에 불과한 박무현은 옳은 일을 하려 희생했다. 두 눈으로 목도했으니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함무라비 법전을 충실히 따를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은혜는 갚을 줄 알았다. 박무현이 보여준 자비와 희생은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의 마음에 경애를 품게 했다. 한정된 공간에서 테러가 일어나면 사람의 밑바닥을 볼 수 있다. 목숨은 한없이 무겁고 한없이 가볍다. 극한 상황에서 사람은 보통 자신의 목숨과 타인의 목숨을 같은 값으로 바라보지 못한다. 모두가 서로를 도우며 헤쳐나가는 집단이 있는가 하면 이기적으로 굴다가 다 망하는 집단도 있다. 해저 기지에 묶인 놈들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와중에 박무현은 눈부시게 다른 존재였다. 군계일학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면 자신은 평범하다며 고개를 젓겠지만, 그래서 더욱 어울렸다.
그러나 박무현이 선하다고 해서 모든 의문이 풀리지는 않는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은 테러리스트들의 행동 따위도 아니고 해저에 고여 썩어가던 인간 군상이 벌인 끔찍한 일도 아니다. 그런 것쯤이야 어떻게 돌아갔을지 열에 아홉은 맞출 수 있었다. 제일 중요한 문제는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 박무현이었다.
꾸준히 유행하는 장르문학에서나 나올 일이었다. 상식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고전역학의 관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양자역학은 신해량이 다룰 범위를 넘어섰다. 아직 태양계도 벗어나지 못한 인류라면 대부분 고전역학의 지배를 받았으니 과학적인, 혹은 사이비들이 좋아할 만한 원인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까닭에 관심 있는 사람은 연구동에 있던 과학자들 정도이리라. 엠마가 해변에서 몇몇 사람들의 증언을 조합하고는 했으니 그들 나름의 해답을 찾을 거다.
‘어떻게 가능했는가?’ 보다 ‘박무현이 무엇을 했는가?’가 더 중요하다. 효율을 추구하는 신해량의 성미에도 잘 맞고, 일렁이는 마음을 다잡는 데도 매우 유용할 화두였다. 퍼즐 조각을 모아야겠다.
신해량은 가장 먼저 곱씹고 있던 자신의 기억을 글로 옮겼다. 급박히 흘러갔던 하루였다. 육체가 힘든 것은 버티고 넘어갈만 했으나 잔뜩 곤두세운 채 긴장한 탓에 정신이 지쳤다. 그래도 간단히 타임라인을 정리할 수 있었다. 위험 지대를 지나온 경험들이 도움이 됐다.
다른 생존자의 인터뷰를 얻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쉽게 요청할 만한 사람들은 역시 엔지니어 가팀이었다. 강수정과 이지현은 메일로 보낸 요청을 쉽게 수락했다. 1:1로 이루어진 화상 회의는 짧게 반가워하고 길게 기억을 맞추는 일로 이어졌다.
-제가 없었다고요? 이상한데요. 우리 모두 오피온에 있었잖아요.
-전 청룡동 탈출정으로 나왔습니다. 헨리도 보내셨잖아요.
그들은 신해량과 박무현이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오피온에서 머물렀던 사람을 모조리 읊기도 했다. 신해량은 그저 ‘그렇습니까.’ 혹은 ‘그러셨습니까.’라고 답했다.
신해량은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기보다 그저 사실로 받아들이기 위해 애썼다. 서지혁과 백애영에게 물었더니 이번에는 아예 다른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민간인보다는 더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탓에 더 문제가 베베 꼬여갔다.
-엔지니어 가팀이 아무도 없었어요. 그래서 방에 가서 내 전재산을 가져오려다가 박무현 선생님을 만났죠. 둘이 같이 대한도로 올라오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애영이가 그런 소리를 해요? 현무동에서 박무현 선생님이 날 처음 불러주긴 했지만, 그 선생님 성격이면 다음에 애영이 보내줬을 것 같은데? 아니었어요?
정상현의 정보는 별 쓸모가 없었다. 이미 철들기는 글렀다고 여겼지만, 험한 일을 겪어도 그대로인 것을 보니 다시 써먹을 수도 없어 보였다. 앞으로 다시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을 거다.
다음 대상은 한국의 연구원 두 명이었다. 박무현과 친분이 있었기에 쉽게 협조했다. 유금이와 김가영은 박무현의 일이라면 손을 걷어붙이고 도와줄 기세였다. 유금이와 김가영의 증언은 엇갈렸다.
-오피온에 가영씨는 없었어요. 무현씨가 가영씨가 갖혀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랑 찾아보러 갔는데, 주작동에 남는다고 했었어요.
-무현씨랑 신해량씨가 딥블루에 있겠다고, 서지혁씨에게 저와 투마나코를 탈출시키라고 하셨었어요. 애영씨가 많이 다쳤었고요. 정상현 그 개새끼가 방송으로 무현씨를 무한교 놈들에게 팔아넘겼었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신해량은 기억난다고 답할 수 없었다. 거짓말로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지만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정상현은 많은 상황에서 매를 버는 편이었으니 신빙성 있었다.
이어서 퍼즐을 하나씩 더해갔다. 투마나코와 김가영의 증언은 일치했다. 다만 서지혁은 그런 기억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김재희를 쥐어 박고 싶어 했고, 박무현에게는 고마워했다. 이지현과 강수정이 없어서 걱정했다고 덧붙였다.
엠마는 김가영이 죽었다고 여겼다. 그리고 이지현과 박무현도 죽었으리라 짐작했다고 말했다. 온갖 고생을 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을 때, 미친 여자가 습격했었다는 이야기였다. 신해량은 이 이야기는 서지혁에게 함구했다.
리코와 함께 탈출한 신해량은 분명히 죽었던 쟝이 수면 위로 올라오던 모습이 생각났다. 탈출이라는 목표가 명확했기에 애써 외면했지만, 두려웠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기억에 이상이 생기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리코와 신해량 둘이 잘못 봤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분명히 쟝의 시신을 확인했었다. 그 기억이 지금도 또렷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자 본능이 경고를 남발했다. 리코는 그저 그가 살아온 사실이 기뻐 두려움을 잊었지만 언젠가 떠올리게 될 거다. 차라리 다시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쟝에게 인터뷰를 하는 일이 꺼려졌다. 당신이 죽은 일을 기억하냐고 묻고 싶지 않았다.
러시아 놈들의 증언은 건너서 다른 사람을 통해 얻어냈다. 직접 대면했다면 시베리아의 새들이 포식할 수 있었을 거다. 살기 위해 그랬다고 주장했지만, 신해량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약한 사람을 희생해서 살아남으려 하는 일을 긍정할 생각은 없었다. 죄를 지었으면 죄라고 인정해야 한다. 자기들 나름으로는 박무현에게 사죄한 모양이지만, 그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 없었다. 신해량은 나중을 기약했다.
-팀장님이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김재희는 정보를 오염시킬 의사가 충분할 거다. 신해량은 그렇게 판단했기에 직접 그를 찾았다. 그의 이야기 전부를 믿을 수는 없겠지만, 꼭 필요했다. 수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안전을 얻지 못한 박무현을 위해서 말이다.
-‘구원자’가 뭐지?
-음. 길게 설명해요? 아니면 짧게?
자세하게 말하라는 손짓에 김재희는 히죽 웃었다. 김재희의 이야기는 길었다. 따뜻한 커피 한잔이 차갑게 식고 이윽고 머그잔에서 다 비워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삶에서 제일 강렬하고 길었던 30분은 거짓말 같았지만 사실이었다. 약물을 한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박무현만큼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신해량의 눈을 피하기엔 무리였다.
이어진 무한교와 박무현의 이야기는 괴이했다. 고작 살점과 피가 섞인 커피를 마시는 일로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원하는 과거로 갈 수 있다고 믿어서, 그 모든 일을 일으켰다니 허탈했다.
김재희는 싫다는 박무현에게 구원자님이라며 비위를 맞춰 살살 꼬드기려던 기억은 까맣게 잊었는지 잔소리가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김재희에게 말해준 적 없던 계단을 박무현은 알고 있었다. 아마도 언젠가의 자신이 알려줬으리라.
무한교의 믿음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원하던 기적은 박무현이 받았다. 김재희의 증언을 믿는다면, 박무현은 적어도 다섯 번은 그 해저기지에서 죽고 과거로 돌아갔다.
-그나저나 이상하네요.
-뭐가?
-팀장님이 마지막까지 박무현씨랑 같이 있지 않았던거요. 나라면 무조건 팀장님을 물고 늘어졌을 텐데. 그만큼 약삭빠른 사람은 아니긴 하죠?
신해량은 김재희의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랬다면 박무현에게 가지고 있는 부채감이 덜어졌을 거다. 탈출에 유용한 사람을 손꼽으라면 신해량은 자신 있게 스스로를 내세울 수 있었다. 백애영이 나쁜 선택지라기보다 그 상황에서는 자신이 더 좋은 옵션이니까. 아마 그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다만, 박무현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신해량은 잘 알고 있었다. When you have eliminated the impossible, whatever remains, however improbable, must be the truth. - 불가능을 제외하고 남은 것은 아무리 믿을 수 없어도 진실이다. - 스트레스가 심한 상황에 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퍼즐의 테두리를 채우고 안까지 맞춰간다. 골치 아픈 원인은 제쳐두고 결과만 보자면 박무현이 동일한 시간대에 여러 곳에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의 하루는 남들보다 많이 길었다. 그 바다 아래에서 고군분투하며 손에 닿는 사람을 살렸다. 기적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과 그가 다른 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수많은 루프에서 랜덤하게 선택된 결과를 받아든 자들과 달리, 박무현은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있다. 바다 아래에서 벌어진 죽음이 없던 일이 된 것은 박무현이 이룬 기적이었다.
신해량은 산산이 부서진 목걸이를 생각했다. 무한교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보석은 소원을 비는 도구라고 했다. 그것을 가지고 바다 위로 올라갈 수 없었던 것이 떠올랐다. 소원이 담겨 있어서 그랬다면, 아마 그 소원은 자신이 아니라 박무현이 빌지 않았을까.
박무현이 왜 다른 루프를 경험한 자들과 다른 결과를 얻어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타인을 살리고 싶어 했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을까. 소원이 이뤄지고 나자 부서졌다면 그럴듯했다.
결국 군데군데 빈 퍼즐을 완성하지 못했다. 신해량은 자신의 시각이 섞인 분석을 신뢰하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박무현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그저 호기심과 감사한 마음만 늘어날 뿐이었다. 고생해서 알아낸 지식을 이기적으로 사용하지 않아서 고마웠다.
바다 아래서 죽고 싶지 않았다. 육지에 발을 딛게 해준 박무현에게 보답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안전을 보장한 후에…. 그를 더 알고 싶었다.
필요 이상의 관심이 왜 생기는지 깨닫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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