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혁해량] 성장통3
여름 제철 청게 젹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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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일까.
이제 겨우 고등학생이 된 서지혁이 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시나 소설, 드라마나 영화에서 어렴풋이 봐온 사랑은 화려한 폭죽과도 같았다. 첫눈에 강한 이끌림을 느끼고 반한다거나, 인생을 뒤흔들만한 사건을 계기로 사랑에 빠진다거나. 흑백 세상 속 유일한 컬러처럼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강렬한 운명 같은 게 아닐까. 그런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서지혁이 태어나 처음 느껴본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런 대단한 게 아니었다. 계기라고 할만한 특별한 에피소드 조차 없이 그저 뒤늦게 눈치챘을 뿐이었다. 어느 때와 다름 없던 평범한 훈련 중 서지혁은 웃고 있었고, 옆에 있던 부원은 서지혁에게 뭐가 그렇게 재밌어서 웃고 있냐며 물었다. 그 아무것도 아닌 질문에 서지혁은 자신의 시선 끝에 신해량이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서지혁의 눈은 나침반 바늘처럼 그를 쫓고 있었다. 이미 동경이라는 감정에 사랑이 물들고 나서야 서지혁은 통보 당하듯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였는지 이유도 모른 채, 서지혁은 뒤늦게 발견한 감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5분 내로 휴게소에 도착할 거 같대. 조금만 더 참고 있어."
"……예."
열이 펄펄 끓었다. 아침에 약을 먹고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버스를 탄 지 한 시간 만에 근육통과 함께 열이 올랐다. 서지혁의 상태가 좋지 않자 신해량은 버스가 정차한 순간 앞쪽으로 향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는 서지혁의 이마와 무릎에 손을 대며 열을 체크했다. 서지혁은 자신의 무릎 위에 놓인 시원한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해량의 손등 위에 붙어 있는 강아지 스티커는 얄미울 정도로 여전히 해맑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약을 가방에 넣는 게 아니었는데. 서지혁은 지난 시간을 후회했다. 아침에 짐을 챙기며 신해량이 사준 약을 아무 생각 없이 가방에 넣었고, 그 가방은 버스 짐칸으로 들어갔다. 약효가 이렇게 빨리 떨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원래 약은 하루에 하나씩 먹으면 되는 게 아니었나?
기껏 신해량이 옆에 앉아주었는데 평소처럼 그를 웃게 만들긴커녕 짐만 된 자신의 꼴이 한심했다. 그런 와중에도 신해량의 손길에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무릎에서 퍼지는 열이 성장통 때문인지 신해량의 손길 때문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서지혁은 미리 사둔 음료라도 벌컥벌컥 마시며 열을 식히려 노력했다.
신해량의 말과는 다르게 차가 밀린 건지 10분은 넘게 지나고 나서야 버스가 멈췄다. 서지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신해량은 자신이 약을 찾아오겠다며 아픈 후배를 다시 앉혀 놓고 버스에서 내렸다. 잠시 뒤 돌아온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진통제와 물을 내밀었다. 정신 없이 허겁지겁 물과 약을 삼키고 나니 신해량이 숨을 몰아쉬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버스 짐칸에 박혀 있어 미지근해야 할 물이 시원했다. 설마 그 짧은 사이에 물까지 사 온 건가?
"……감사해요. 주장."
"배는 안 고파? 간식 먹고 싶은 거 있어?"
"어…… 아뇨. 저는 괜찮은데요. 다른 사람들이랑 가서 뭐라도 먹고 오세요."
"알겠어. 그럼 쉬고 있어."
"옙."
서지혁이 손을 흔들어 주니 신해량이 피식 웃고는 버스에서 내렸다. 창밖으로 그가 가볍게 뛰어가 강아영의 무리에 합류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태 그렇게나 과분하게 챙김을 받았는데도 좁아터진 마음은 더 많은 걸 바랐다. 그게 주제 넘은 못난 감정이라는 것을 잘 아는 서지혁은 그냥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버렸다. 더 욕심을 내면 안 돼.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무릎에 가져다 댔다. 대체 언제쯤 이 성장통이 멎을까. 키는 언젠가 멈추겠지만 이 울렁거리는 심장은 언제쯤 괜찮아질 수 있을까. 이 마음에도 끝이 있긴 한 걸까. 다 자라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속이 좋지 않았다.
잠시 뒤 돌아온 부원들이 버스에 올라타는 소리가 들렸다. 버스 안은 온갖 간식 냄새와 시끄러운 수다 소리로 가득 찼다. 약효가 도는 것인지 몸이 서서히 괜찮아지자 서지혁은 뒤늦게 출출함을 느꼈다. 아까 뭐라도 사 먹을걸. 곧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라 이제 와서 나갈 수는 없었다. 아쉬운 대로 서지혁은 미리 사둔 초코롤빵의 포장을 뜯어 빵 하나를 입에 욱여넣었다.
"몸은 좀 괜찮아?"
"어. 오셨습니까? 예. 덕분에요."
강아영과 함께 돌아온 신해량은 손에 소떡소떡과 버터 알감자를 들고 있었다. 서지혁이 입에 빵을 물고 웅얼거리며 대답하니 신해량이 자리에 앉아 소떡소떡을 서지혁에게 건넸다. 서지혁은 빵을 열심히 오물거리며 신해량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거 제 겁니까?"
"그래."
"오. ……안 그래도 배고파지던 참이었는데. 어떻게 알고 사 오셨어요?"
"그냥. 딱 너 배고플 시간이잖아."
"제가요?"
"그래. 맨날 이 시간만 되면 군것질 하더만."
그랬었나? 학교에서든 훈련할 때든 틈만 나면 간식을 주워 먹긴 했었군. 서지혁이 수긍하며 소떡소떡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애매하게 하나 남은 초코롤빵을 신해량에게 나름의 답례로 건넸다. 신해량은 떨떠름하게 초코롤빵을 손에 들더니 한 입 베어먹었다.
"짭이라고 뭐라 하더니."
"맛은 있던데요."
서지혁의 말에 신해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빵을 한 입 베어먹었다. 반응을 보아하니 신해량의 입에도 괜찮은 모양이었다. 서지혁은 떡과 소시지를 한 번에 입에 넣었다. 매콤달달한 소스가 발린 쫀득한 떡과 육즙이 팡팡 터지는 소시지의 조합이 훌륭했다. 감동받은 서지혁이 눈썹을 추욱 내리고 눈을 빛내며 신해량을 보았는데, 신해량은 그런 서지혁의 반응이 웃기는지 잠시 웃고는 마지막 빵조각을 입에 넣었다. 그대로 빵 봉지를 버리려던 신해량은 포장지 구석에 박혀 있는 스티커를 발견하고 꺼내서 서지혁에게 내밀었다.
"스티커 확인해봐. 포x몬은 아니겠지만."
"주장이 확인해주세요. 그건 제가 들고 있을게요."
"알겠어."
신해량은 서지혁에게 알감자 컵을 건네고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스티커 포장을 뜯었다. 그 사이 또 떡과 소시지를 입에 문 서지혁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스티커의 정체를 훔쳐봤다.
"이건 고양이네."
"주장 닮았는데요."
"나? ……별로 안 닮은 거 같은데."
"뭐? 뭐가 신해량 닮았는데?!"
둘의 대화가 들린 것인지 앞쪽에 있던 강아영이 궁금하다는 듯이 불쑥 튀어나와 고개를 내밀었다. 신해량은 강아영에게 검은색 고양이 스티커를 보여주었다. 새침한 표정으로 식빵을 굽고 있는 검은 고양이 스티커였다.
"야! 그거 완전 귀엽잖아!! 너랑 뭐가 닮았어?!"
"몰라. 지혁이가 그렇다는데."
"지혁이가 착해서 그래. 그거 신해량 네 거야? 나 주면 안 돼? 핸드폰에 붙이고 싶은데."
"안돼. 지혁이 거야."
신해량은 스티커를 서지혁에게 건넸다. 그를 본 강아영은 귀여운 후배 걸 뺏을 순 없지! 하고 빠르게 수긍하며 아쉬움을 떨쳐냈다. 대신 강아영은 그게 무슨 캐릭터냐며 빵 봉지를 확인하곤 포x몬 빵 짭 같은데 이게 더 귀엽네. 같은 소리를 했다.
"그. 주장이 가져도 되는데요. 아영 누나 줘도 되고."
"크. 역시 우리 지혁이가 젤 착하다니까? 고맙지만 이 누나는 후배의 것을 빼앗을 마음이 없단다."
"너 줄 생각도 없었어."
"우씨. 신해량 진짜 짜증 나! 지혁아 그냥 네가 가져. 쟤는 그 귀여운 스티커 가질 자격이 없어."
"난 이미 있어서."
신해량은 강아영에게 자랑하듯 제 손등에 붙은 강아지 스티커를 보여주었다. 강아영은 약 오른다는 듯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는 다시 앞으로 사라졌다. 그런 강아영를 보고 웃던 신해량은 고양이 스티커를 떼어내곤 서지혁을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서지혁은 심장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건 네가 가져."
신해량은 떼어낸 스티커를 서지혁의 무릎 가운데에 붙였다. 예상 못한 행동에 서지혁은 가만히 제 무릎에 붙은 고양이 스티커를 보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신해량이 서지혁에게 버터 알감자를 다시 돌려받자 버스가 움직이며 휴게소 밖으로 빠져나갔다. 서지혁은 신해량에게 소떡소떡을 내밀었고, 신해량은 떡만 쏙 빼먹어 서지혁에게 한 소리 듣고는 소시지도 같이 빼먹었다. 신해량은 알감자 컵에 꽂혀 있던 꼬치 두 개 중 하나를 서지혁에게 건넸고 둘은 잠깐의 간식타임을 즐겼다.
이 망할 성장통은 대체 언제 끝나는 걸까. 휴일 첫날부터 쉬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서지혁이 홀로 기숙사 침대에서 꼼짝도 못 하고 누워있었다. 신해량이 사준 진통제는 도대체 어딜 간 건지 보이지 않았다. 버스에서 먹고 어디에 뒀더라? 옷 주머니와 가방을 다 뒤져봐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모처럼의 휴가 날에 혼자 아픈 상황 보다 신해량이 준 약을 잃어버린 자신이 바보 같아서 더 괴로웠다.
어떻게든 약을 사러 나가려 시도했지만 일어나기만 해도 열이 나는 머리가 팽팽 돌고 무릎뼈가 아파서 실패했다. 기숙사 건물을 빠져나가기도 전에 쓰러질 게 뻔했다. 전지훈련 기간 동안은 늘 신해량이 챙겨주었는데. 그의 부재가 뼈저리게 실감 났다. 신해량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도 했지만 기숙사 생활을 하지도 않는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서지혁은 염치가 없진 않았다. 차라리 신해량의 일정이 없는 것이 확실하다면 눈 딱 감고 연락을 해봤을지도 모르지만, 기껏 와달라고 했는데 선약 때문에 오지 못한다면 그가 죄책감을 가질 게 뻔했다. 그냥 참자.
서지혁은 끙끙거리며 이전에 사둔 간식으로 배만 간신히 채웠다. 몸을 조금 움직였다고 머리가 또 어질어질해서 다시 침대에 누웠다. 서지혁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다 핸드폰을 꺼내 까톡 어플을 켜 신해량의 프로필을 눌렀다. 새로운 게 떠 있길래 봤더니 배경 사진에 전지훈련 때 찍은 단체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서지혁은 사진을 확대해서 신해량의 얼굴을 살폈다. 언제 봐도 참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멀리서 찍은 탓에 개개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데도 신해량만 혼자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서지혁은 손가락을 옮겨 2학년 줄에 서 있는 자신의 얼굴을 확대해 보았다. 바보 같이 웃고 있었다.
내가 저렇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던가? 서지혁은 사진을 찍을 때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전지훈련 첫날, 로드워크가 시작 되기 전 찍은 사진이었다. 슬슬 무릎에서 열이 오르려고 하던 때라 서지혁은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그때 뜬금없이 앞에 있는 감독 머리가 거슬려서 봤더니 매미가 붙어 있어 웃음을 터뜨렸다. 혼자 갑자기 웃으니 부원들이 의아해하며 서지혁을 돌아 보았고, '감독님 머리에 매미 붙었는데요.' 서지혁의 한 마디에 초토화가 됐다. 초토화 직전에 타이밍 좋게 찍힌 사진이었다. 신해량 까톡 배경에 박제될 줄 알았다면 저렇게 바보 같이 웃지는 않았을 텐데. 왜 신해량이 그 멍청하게 생긴 강아지 스티커를 보며 저를 닮았다 했는지 알 거 같았다.
서지혁은 핸드폰을 돌려 투명 케이스 안쪽에 붙어 있는 고양이 스티커를 확인했다. 어제 기숙사로 돌아와 샤워를 하기 직전에 고민하다 무릎에 붙은 스티커를 조심스럽게 떼어내 핸드폰 뒤에 옮겨 붙였다. 신해량이 붙여준 걸 떼어내는 게 아깝긴 했지만 버리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그의 흔적인 것에 감사했다. 이건 간직할 수 있어. 열병에 가까운 성장통을 앓는 와중에도 그의 흔적이 기꺼웠다.
신해량의 프로필을 닫으니 강아영의 프로필이 업데이트 되었다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괜히 눌러보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손가락은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강아영의 프로필 사진과 배경 화면이 새로 추가되었는데, 배경 화면은 신해량과 마찬가지로 전지훈련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신해량의 사진과 똑같은가 하고 봤더니 서지혁이 웃고 있지 않았다. 감독 머리통에 붙은 매미를 발견하기 전에 찍힌 사진인 것 같았다. 그리고 프로필 사진은 셀카 사진이었는데 배경은 학교 근처 공원인 것 같았다. 라벤더 꽃이 만개한 걸 보니 시기상 최근 사진 같은데…….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거렸다. 멍한 머리와는 반대로 손은 빠르게 sns어플을 켰다. 기계처럼 타임라인을 넘겨보니 아니나 다를까 강아영이 바로 전에 올린 새로운 게시글이 보였다. 보라색 하트 세 개와 함께 사진이 여러 장 있는 것 같았는데, 첫 번째 사진은 까톡 프로필 사진과 같은 강아영의 셀카 사진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을 넘기니 신해량이 뒤를 돌아보는 사진이 있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적중했다. 다음 사진들은 넘겨보지도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멀리 던져버렸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서지혁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대체 언제 잠이 든 것인지. 누군가 기숙사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서지혁은 현실감각이 없이 멍하니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기숙사에 찾아올만한 사람이 없는데. 멀뚱멀뚱 문을 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서지혁. 안에 있어?"
신해량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몸이 먼저 뛰쳐나가 문을 열었다.
"주장?"
"하……. 너 연락을 왜 이렇게 안 받아?"
"예? 아……. 몰랐어요. 자느라."
"자고 있었어?"
"예. ……연락하셨어요?"
신해량이 한숨을 쉬며 땀을 닦았다. 복도의 후끈한 열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서지혁은 신해량을 끌어 당겨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게 하곤 문을 닫았다. 뭐지? 왜 온 거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심장이 시끄럽게 뛰었다. 바닥에 대충 던져둔 핸드폰을 들고 확인해 보니 정말 10분 전 쯤 신해량에게 연락이 와 있었다. 부재중 전화 세 통과 톡 몇 개가 남아있었다.
[몸은 괜찮아?]
[네 약이 내 가방에 있던데 기숙사에 상비약은 있어?]
[전화를 왜 이렇게 안 받아? 기숙사에 있어?]
[곧 갈 테니까 확인하면 전화해.]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었구나. 버스에서 내릴 때 짐이 섞인 모양이었다. 서지혁이 멍하니 톡을 확인하고 있으니 시야에 신해량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신해량은 커다란 손을 서지혁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그에 놀란 서지혁이 동그래진 눈으로 신해량을 쳐다보았고 그가 또 한숨을 푹 쉬었다.
"기숙사에 상비약은 구비해두고 있어야지. 운동하는 놈이."
"……아. 제가 자주 아픈 편이 아니라서……."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야지. 이렇게 아프잖아."
"……죄송합니다."
신해량은 서지혁을 침대에 앉히고 가방에서 약 몇 종류와 물을 꺼내 서지혁에게 건넸다. 전지훈련 때 서지혁이 먹고 남은 약은 물론이고 뜯지 않은 해열 진통제, 소염 진통제, 소화제와 연고, 소독약, 파스까지 있었다. 이걸 다 사 온 건가? 얼떨떨하게 받아서 드니 신해량이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감사합니다. 주장."
"밥은 먹었어?"
"어……. 그냥 간식만 몇 개 먹었습니다."
"그럼 약 먼저 먹어. 이것도 먹고."
서지혁이 진통제와 물을 함께 꿀꺽 삼키는 동안 신해량은 가방에서 샌드위치와 삼각김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뭐 먼저 먹을래? 신해량의 질문에 서지혁이 잠깐 생각하더니 삼각김밥을 가리켰다. 신해량은 서지혁의 손에 삼각김밥을 올려주고 샌드위치는 이따가 먹으라며 미니 냉장고 안에 넣어두었다. 삼각김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워온 모양인지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서지혁은 김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포장을 벗겨 두 입 만에 삼각김밥을 해치워버렸다. 짭짤 고소한 참치마요가 가득 들어 있는 게 맛있었다.
"약이 없으면 연락을 하지."
"……제가 잃어버린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지? 아프면 연락을 해. 혼자 참지 말고."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요."
"그러면 네가 알아서 신경 안 쓰이게 했어야지."
내가 신경 쓰이긴 해요?
유치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삼켜냈다. 신해량은 강아영의 sns에 올라온 사진과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그의 등장에 놀람과 반가움은 잠시였고 못난 마음만 커졌다. 데이트를 하는 중이면 후배가 아프든 말든 신경 쓰지 말고 놀 것이지. 왜 또 이렇게 찾아와서 흔들고 희망 고문을 하는 건지. 고마움 보다 원망이 더 커졌다. 서러움에 눈이 뜨거워졌다.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속이 터질 것같이 아팠다. 불덩이 하나를 삼키고 소화하지 못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열이 오른 무릎보다 더 뜨거워진 가슴이 감당되지 않았다. 18살의 서지혁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통증이었다. 이렇게 아팠던 적이 없었는데. 억울함에 눈물이 절로 났다
차라리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지. 그렇게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말을 건네고, 쓰다듬어주지 말지. 뭐든 해줄 것처럼, 언제나 옆에 있어 줄 것처럼 달려오지 말지. 문득 바라본 신해량의 손등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비어 있었다. 이거 봐. 어차피 떼어버릴 거 당일에 떼어냈다면 내가 덜 바보 같았을 텐데. 핸드폰 뒤에 홀로 붙어있는 고양이 스티커가 부끄러웠다.
서지혁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으니 당황한 신해량이 서지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거 봐. 또 자기는 마음대로 손대고, 만지고. 그와 닿은 어깨에도 열이 올랐다.
"……괜찮아? 많이 아파?"
"안 괜찮아요. 너무 아파요."
떨리는 목소리가 형편없이 들렸다. 걱정이 가득한 신해량의 목소리마저 원망스러웠다. 당신이 왜 아무것도 아닌 내 걱정을 하는 건데. 목이 꽉 막힌 듯 갑갑했다.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은 죄다 못된 말 뿐이라서 꾸역꾸역 속으로 밀어냈다. 토하듯 모든 것을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러면 정말 신해량과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결국 아쉬운 쪽이 지는 싸움이었다. 애초에 신해량은 이 싸움에 참전한 적도 없었지만 서지혁은 그에게 질 수밖에 없었다.
신해량은 머뭇거리다 서지혁의 옆에 앉아 그의 등을 토닥였다. 그의 손길은 꼭 속에 든 답답한 것들을 모두 뱉어내라고 종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속에 있는 말들 중 내뱉을 수 있는 말은 단 한 톨도 없었다. 신해량은 다 괜찮다는 듯이 굴고 있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품은 이 역겨운 감정을 알게 된다면 신해량도 분명…….
"병원 가자."
"예?"
"못 걷겠으면 업히기라도 해. 단순한 성장통이 아닐 수도 있잖아. 성장통이 맞다 해도 주사를 맞든 뭘 하든 조치를 취하면 더 나아질 거야."
"……아니."
"업혀."
당황한 서지혁의 앞에 신해량이 업히라는 듯 뒤를 돌아 앉았다. 넓은 등을 멍하게 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돌아보며 얼른 업히라는 듯 재촉했다. 서지혁은 손을 뻗었다. 그의 등에 손바닥이 닿았다. 얇은 티셔츠가 축축했다. 생각해 보면 기숙사는 학교 가장 구석 산길에 박혀 있었다. 공원에서 기숙사까지는 넉넉잡아 20분 거리. 그런데 신해량은 편의점과 약국까지 들르면서도 연락을 한지 10분 만에 이곳에 도착했다. 서지혁의 손에 닿은 모든 면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눈앞이 흐려서 손을 거두고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병원 안 갈래요."
"고집 부리지 말고 업혀."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입만 벙긋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북받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한 번 뚫린 감정의 길은 닫힐 줄 몰랐다. 서러움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몰려와 파도처럼 휘몰아쳤다. 기분은 거대한 폭풍에 휩쓸린 것처럼 엉망이었다. 신해량이라는 사람은 미워하고 싶어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좋아하게 된 거겠지. 왜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는 걸까.
서지혁은 터진 울음을 주워 담지도 못한 채 서럽게 울었다.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 어린 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신해량의 표정을 보기 겁나 제 눈을 가렸다.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도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서지혁."
"……."
"……지혁아. 나 봐."
"……."
"많이 아파? 그럼 약이라도 한 알 더 먹자."
다정한 목소리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서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안아주면 안 돼요?"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엉망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면 좋겠어?"
"……예."
"알겠어. 이리 와."
침대에 앉은 신해량이 팔을 뻗었고 서지혁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눈가에 닿은 신해량의 티셔츠가 젖는 게 느껴졌지만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커다란 손이 서지혁의 등을 토닥였다. 그를 안은 손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을 더듬었다. 속절 없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빠르게 뛰었다. 마주 닿은 가슴팍으로 전해질 두근거림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그를 향한 마음은 멈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신해량의 품에 안겨 울던 서지혁은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서지혁은 자신이 남긴 눈물 자국을 가만 바라보았다. 이 또한 지워질 흔적이었다. 마주한 신해량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모자란 동아리 후배를 걱정하는 주장의 눈빛. 그 뻔한 표정에 또 가슴이 아릿했다.
"선배."
"응."
"……저 재워주면 안 됩니까?"
한 번 무리한 부탁을 했더니 두 번째를 요구하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코를 훌쩍이며 말했더니 이전과는 다르게 신해량의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가 아무리 후배를 끔찍이도 아끼는 주장이라 해도 이건 선을 넘었으니. ……이미 마음을 들켰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신해량은 답지 않게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다 자신의 티셔츠를 매만졌다.
"……땀을 많이 흘렸어."
"예?"
"……음. 그럼 옷 좀 빌려줘."
"예? 어……. 예."
뜬금없는 대답과 요구였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더니 신해량은 곧바로 양해를 구하고 옷장을 열었다. 그의 눈이 옷장을 빠르게 훑다 걸려 있는 흰색 티셔츠를 하나 꺼내곤 옷장 문을 닫았다. 신해량은 입고 있던 남색 티셔츠를 벗었다. 그는 고민하다 책상 위에 있는 휴지로 가슴과 등을 대충 닦더니 에어컨 앞에서 앞뒤로 몸을 말렸다. 서지혁이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신해량은 흰색 반팔 티셔츠로 갈아입고 다시 침대에 앉았다.
"안쪽으로 들어가 봐."
"아. 예."
서지혁이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앉자 신해량이 침대 바깥쪽에 누웠다. 앉아서 그를 멀뚱 바라보고 있으니 신해량이 누우라는 듯 손짓했다. 신해량의 신호에 서지혁은 고민하다 그를 마주 보고 누웠다. 침대에 함께 누워 마주 바라보고 있으니 또 눈물이 났다. 옆으로 누워있는 탓에 눈물도 옆으로 흘렀는데, 신해량이 작게 웃으며 손으로 서지혁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네가 이렇게 울보인 줄은 몰랐는데."
"……아파서 그렇습니다."
"응."
신해량은 손을 뻗어 서지혁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또 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눈물이 눈에 들어가 눈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신해량은 소리 없이 우는 후배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의 머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내가 보기엔 너 성장통 맞는 거 같아. 덩치만 컸지 아직 덜 자란 애였어."
신해량이 놀리듯 가볍게 말했다.
"……성장통이 원래 이렇게 아픈 겁니까?"
"괜찮아질 거야."
신해량의 손이 서지혁의 머리를 쓰다듬듯 토닥였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건, 그 또한 성장의 신호라면 나는 더 이상
"……더 자라고 싶지 않아요."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는 이 마음이 감당되지 않아요. 얼마나 더 커지게 될지 무서워요.
위로되지 않는 위로에 더 투정 부릴 수도 없는 서지혁은 그저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을 뿐이었다. 땀을 충분히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었기 때문일까. 그의 몸에선 옷장 안의 방향제 냄새나 기분 좋은 체취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딘가, 전부 닦아내지 못한 은은한 낯선 섬유 향수 냄새가 느껴졌다. 서지혁을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 그 향기는 자꾸만 서지혁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그럼에도 서지혁은 아무것도 모른 척. 눈치채지 못한 첫 눈을 감을 뿐이었다.
좋아하지 않으려 했어요.
그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게 잠꼬대처럼 웅얼거린 혼잣말이 서지혁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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