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통의 편지와 한장의 후회
아스사라 문학 AU
고모님의 부탁을 받고 에도로 올라온 것은 작년 겨울의 일이다. 에도라고 해도 읍내의 끝자락이다. 그런 곳도 에도 안이라는 건 매한가지라 와카야마에서 온 나는 속절없이 인파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장사치의 아들이라면 사람 구경도 하면서 숫기를 빼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이곳의 시끌벅적한 소음과 섞여 들려오는 듯 했다. 길을 물을려고 해도 옷차림부터 세련된 에도 사람들은 내가 안절부절 하는 것을 옆눈으로 힐끔거릴뿐 멈춰 서주진 않았다. 그들에게 외지인은 익숙해서 별 구경거리도 못 되었다. 오히려 지나가던 색목인의 행렬에 놀라 자빠질 뻔 한 건 내 쪽이었다.
다행히 후지와라가를 찾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고모님의 말씀대로 그곳은 제법 큰 부지가 있는 저택이었다. 미리 보내온 서신 덕분인지 나는 금방 안채로 안내받았다. 그 집의 장녀가 나와 나를 맞이했다. 후지와라 나노카란 여자였다. 예의를 깍듯히 차리는 모습에서 오히려 나를 경계하는 모습이 서려 있었다.
하기야 어떤 딸이 자기 어머니의 옛날 연서를 반가워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이유도 다 편지를 주고 받은 당사자들이 죽은 지 오래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희 어머니의 편지에 대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여기 저희 고모님이 받았던 편지입니다.”
“… 확실히 어머니의 서체가 맞군요.”
마르고 가느다란 손으로 누렇게 색이 바란 종이를 쓰다듬던 후지와라 나노카가 고개를 돌려 정원을 응시했다. 대나무로 된 소즈가 물을 받아내선 탁 하고 맑은 소리를 내었다. 여자의 눈동자는 신비로운 제비꽃을 닮아 있었다. 눈가나 입가에 주름진 흔적이 그동안의 세월을 짐작하게 했다. 아마 그녀가 바라본 내 얼굴도 다를바는 없었을테다.
“그럼, 전해주시기로 한 물건을 받아봐도 괜찮을까요?”
“아, 그 전에 제 쪽에서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만…”
말부터 튀어나온 것은 충동에 가까웠으나 생각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쭉 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녀의 시선에 괜스레 바지에 손바닥만 문지르기 바빴다. 입안도 마르는듯 하여 고여지지도 않는 침을 삼켜낸 뒤에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고모님이 보냈던 편지를.. 제가 읽어봐도 될런지요? 전부가 아니여도 됩니다.”
급하게 뒤에 덧붙인 말에도 후지와라 나노카는 아무말 없이 날 바라보았다. 바깥 공기처럼 싸늘한 것도 같았고, 어딘가 동정이나 연민이 묻어 있는 것이 딱 막 상경한 꼴의 나를 바라보던 에도인들과 다를 바가 없게도 보였다.
“예. 물론이죠, 타츠이 씨.”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뒤에 있던 나무 상자를 통째로 내주었다.
“차를 더 내오겠습니다. 부디 편하게 읽어주세요.”
후지와라 나노카는 소리도 없이 일어나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마 나를 위한 배려였겠지. 그러나 그녀가 이럴수록 나는 고모님의 마지막 편지를 건내줘야 할지 어떨지 더 혼란스럽기만 했다.
나는 맹세코 고모님의 마지막 편지를 뜯어보는 불경은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고모님이 받으신 편지글들을 보고 나는 고모님의 편지가 어떤 실수나 당시의 여건 때문에 부치지 못한 것이 아닌 고의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겐 확신이 필요했다. 그건 ‘후지와라 미우’의 딸이 아니라 ‘타츠이 사라’의 조카인 나만이 가능한 일일 것이다.
심호흡을 가다듬고는 나무 상자 안에 두터운 편지 묶음을 살펴 보았다. 정갈한 글씨체는 내가 알던 고모님이었음에도, 안에 쓰여진 내용은 내가 모르던 그녀-아마도 지금의 나보다도 더 젊었을 청춘 한가운데의-의 모습이었다.
친애하는 후지와라 미우 씨에게
강가의 눈과 얼음이 녹아 물이 흐르는 노랫소리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 강물에 연분홍빛 벚꽃잎이 띄워지는 시기가 기다려지지만, 그대와 함께 보던 뒷마당의 벚꽃만큼은 덜한 아름다움이겠지요.
저번 편지의 답이 늦어 송구합니다. 변명을 드릴 권한을 주신다면, 아버지의 일을 도와 교토로 갔다오는 기간이 예상보다 더 걸렸다고 답할 것이고, 그대의 기분을 풀 수 있는 영광을 주신다면 동봉한 빗이 제게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대는 필히 이런 장신구보다 서책을 더 좋아했을 테지만, 본인의 식견이 짧은지라 그대가 좋아하는 책을 알수가 없어 겨우 빗을 골랐다는 걸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
교토는 넓고 복잡했습니다. 허나 에도만큼은 아니더군요. 저도 어쩔 수 없는 장사치의 딸인지라 사람이 많은 곳을 가면 피곤함보단 활기를 느껴야 맞을 텐데요. 어쩐지 이곳의 화려함보다는 그대와 함께 별채에서 마셨던 차의 향기가 더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껏 피어오를 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대의 답장을 기다리겠습니다.
경애하는 나의 벗 미우에게
풀벌레가 우는 밤이 깊어만 가니, 이는 필히 낮의 뜨거움이 서러운 이들의 간곡이겠구나. 허나 내가 너에게 간청하는 것은, 짧아지는 밤을 부디 눈물로 지새우지는 말라는 것 딱 하나 뿐이란다.
너는 늘 내가 소중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지. 난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고 멋진 사람임에도 나만이 그 가치를 아직 잘 모르는 것이라고. 부끄럽게도 나는 아직 내 자신이 네 생각만큼의 사람이라고는 여기지 못해. 그러나 네가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나는 네가 생각하는 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상냥하고, 다정하고, 멋진… 그런 타츠이 사라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사람을 대할 때도, 공부를 할때도 네가 보는 내 모습은 어떤걸까, 하고 상상하며 열심히 하는 일이 나는 퍽 즐거워. 너를 보기 이전에는 계절이 바뀌는 것에도 나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말이지. 내가 하는 말의 진의를 알겠니?
내가 봤을 때의 너는 지금도 그 예전에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사람이야. 이건 단지 몸가짐이나 외모에 대한 것이 아니란다. 너는 그 누구에게도 항상 진심으로 웃어보이지. 그게 비록 네 집의 몸종이라 할지라도 말이야. 그런 인품은 하루 이틀새에 꾸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명심하렴. 네 미소는 처음부터 저 은하수가 빛나는 밤하늘보다 빛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만나 친해지게 된 계기는 너의 눈물이었지. 집안의 어른들이 모여든 자리를 피해 뒷마당에서 훌쩍거리던 너를 내가 위로한 방법은 분명 서툴었어. 그건 분명 그저 누군가가 진심으로 위로한다면 이런 거지 않을까… 하는 걸 보고 흉내내기에 그쳤기 때문이야. 물론 우는 너를 달래고 싶은 마음은 진심이었다만, 부끄럽게도 당시의 나에겐 그런 마음을 전부 드러낼 용기는 없었단다. 하지만 너는 달라.
너는 언제나 진심으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이야. 그런 용기는 쉽게 나올 수 없는 거란다. 그리고 나는 그런 미우의 모습이야 말로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
내일이면 이곳에서는 산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축제가 열린단다. 그날은 모두가 나와 하천에서 하는 불꽃놀이를 구경해. 너와 몰래 뒷문으로 나와 마을 사람들이 하던 축제를 구경갔을 때가 떠오르더구나. 이젠 뭐든지 너와 함께하기 이전의 추억과는 비교할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어.
이런 어리광쟁이인 나를 부디 용서해 주길 바라. 너의 답장이 빨리 오길 바라는 이 마음 또한 너그러이 이해해 주렴.
항상 바라기만 하는 친우라 미안하구나.
사모하는 내 친우 미우에게
벌써 찬 기운이 색색으로 물들였던 단풍잎들을 하나 둘 떨어트리는 시기가 왔구나. 네가 지내던 별채는 이맘때쯤 바람이 너무 들곤 했는데 내 걱정이 후지산을 거꾸로 놓은 만큼이나 깊어질 것 같아.
왜 내게 답을 주지 않은 거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으나 네 마지막 편지가 아버님에게 용기를 내어 항변해 보겠다는 말이여서 더 걱정이 드는구나.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에도까지 걸음하고 싶으나 혹여 내게 더한 민폐가 될까봐 하지 못하고 있어.
아니면… 혹시 내게 마음 상할 일이 있었거나 하는 거야? 제발 그럴 일이 있다면 나를 저주하고 경멸하는 내용이라도 좋으니 답장 한장이라도 남겨주렴. 그리고 내게 사과할 기회를 부디 줬으면 좋겠어. 네게 미움을 받은 채로는 나는 이제 제대로 살아갈 용기가 나질 않는단다…
아버지에게 배우던 가업도 슬슬 마무리가 되어가던 참이야. 이제 내 맘대로 큰 도회로 나가 장사할 수 있는 기회가 멀지 않았는데, 그 전에 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구나. 예전처럼 함께 볕이 들던 마루에서 책을 읽던 기억이나, 함께 정원을 거닐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던 때처럼… 돌아가고 싶어. 그렇지만 이게 나만의 소망이 될까봐 두렵구나.
제발 한줄이라도 좋으니 내게 답을 해주지 않겠니? 네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게.
후지와라 미우가 받은 편지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이후 고모님께선 실제로 후지와라 미우님을 뵈러 에도에 왔다고 했다. 그러나 둘의 인연은 거기서 끊어졌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모님은 끝끝내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본가의 가족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어렸을 적부터 나를 자기 친아들 돌보듯 잘해주신 고모님이었는데도, 그 일만큼은 평생 가져갈 비밀인듯 했다. 하지만 내게 이 이야기를 할때의 고모님의 얼굴만은 똑똑히 기억한다.
죄책감과 슬픔이 자글자글 주름진 눈가 사이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녀가 아마 당시에 후지와라 미우와 지내던 이 저택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병에 걸린 후부터는 늘상 흐릿했던 고모님의 눈동자가 그토록 맑게 빛날 수는 없을 테니까.
“편지는 충분히 다 읽으셨나요?”
장녀가 새로 우린 차를 가져오며 물었다.
“예.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희 어머니께서도… 아마 허락하셨을 테니까요.”
정갈한 움직임으로 내가 흩트려 놓았던 편지들을 모아 다시 봉투에 넣어 끈으로 묶던 후지와라 나노카 앞에서 나는 자세를 바로 하여 두 무릎을 모아 꿇어 정좌를 하였다. 조금의 의아함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던 그녀 앞에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모아 다다미 바닥에 내려놓고 허리를 깊숙히 내린다.
“저-저기, 타츠이 씨?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얼굴을 들어 주세요.”
“부디 고모님의 마지막 편지를 다 읽어 주세요.”
“네?”
“편지들을 없애고 싶으신 심정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이왕 처분하실 거라면 고모님의 편지를 다 읽으신 후에 하면 안되겠습니까?”
“… … .”
내 짐작이 틀리지 않았는지 후지와라 나노카의 입술이 꾹 다물어졌다. 두 눈동자는 나를 애써 외면한 채였다. 내가 다시 머리를 숙이려 하자 그제야 화들짝 놀라며 날 만류한다.
“알겠습니다. 그러니 이런 짓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곤란합니다.”
“고모님은 제게 어머니 같으신 분입니다. 그분의 마지막 진심을… 본인인 후지와라 님에게 전하지 못하더라도, 그 뜻만은…. 당신이라도 알아줬으면 합니다.”
“… … 굳이, 긁어 부스럼을 내고 싶지는 않았어요.”
씁쓸한 미소를 짓던 장녀가 천천히 내가 가져온 봉투를 여어 편지를 꺼내었다.
“전부 다 끝난 일이라고 할지라도… 어머니는 늘, 우리와 함께 있을 때도… 완전하게 행복해 보이지는 않으셨으니까. 두려웠어요. 내가 어머니의 불행의 시작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직접 묻지는 못했지만… 그걸 증명 받을까봐, 무서워서…”
떨리는 목소리의 끝을 잠재우려는 양 그녀는 조용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그래요. 이제 어머니는 죽어 나의 어머니가 아닌 후지와라 미우로 돌아가셨으니… 나도 그녀의 자식이 아니라… 이 편지를 받은 이로서의 도리를 해야 하는 거겠죠.”
눈을 살짝 감은 그녀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편지를 받은 이로서의 도리. 그녀도 나도 지금은 후지와라 미우의 딸과 타츠이 사라의 조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던 편지의 사정을 모르던, 하지만 그때의 둘만 알고 있던 감정들을 짐작하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그 편이 차라리 현 시점의 우리들에겐 사정이 좋았다. 어떤 관계는 너무 가깝기 때문에 쉬이 상대가 가장 이해받고 싶은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
몇번 더 숨을 들이 쉬고 내쉬며 목을 가다듬은 그녀가 편지의 첫줄을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 내가 가진 …”
내가 가진 가장 귀하고 약한 감정의 중심이 된 사람, 나의 미우에게
나는 너에게 용서 받지 못할 일을 했구나. 이젠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하겠지. 내가 네게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분명 후회가 없어야 할 일이어야 할텐데… 지금의 나는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는 뉘우침에 휩쓸려 이 글을 쓰고 있구나.
내 욕심으로 너를 직접 찾아가고 만 것이 잘못이었을까.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마도 너는 내 얼굴에 비친 온갖 추악한 감정들도 모두 읽어냈겠지. 나는 네가 나를 두고 남의 신부가 된다는 것에 경악했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네 남편에게 강렬하게 질투했으며, 네 눈물을 닦아줘서는 안된다고 외치는 내 이성에게 분노했단다.
감히 내가 널 두고 했던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아도 된다면… 나는 너를 데리고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고 싶었어. 네가 내 곁에 있어준다면 뭘 못할까!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녹록치 않은 에도의 시장 바닥도,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여자 혼자서 장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두려움도 전부 이겨낼 자신이 있었단다.
그러나 네가 나와 함께 하면서 겪을 수난은 견뎌낼 수 있을지 의문이더구나.
곱게 자라던 너를 내가 함부로 낚아 채도 되는 것일까? 네 부모님들, 가족들과 멀어진 뒤에 너는 과연 행복할까? 그 그리움을 외면할 수 있도록 내가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아니… 그 무엇보다도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와 함께하는 길을 선택해 줄까?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들이 어지럽게 얽히는 동안 너는 내게 답을 구해왔었지. 나는 그때 내 웃는 모습이 잘 꾸며졌는지 기억나지 않아. 마음에도 없는, 축하한다는 말을 내뱉고 난 후의 네 얼굴도 잘 떠올려지지 않는구나… 나는 그 뒤 도망치듯 그 저택을 나와 버렸지. 너를, 내가 그 저택에서 가장 사랑하던 너를 두고…
몇 번이고 다시 너희 집의 문 앞을 서성거렸어. 몰래 밤중에 네가 지내는 별채 뒤 담벼락을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날도 많아. 그러나 나는 끝끝내 너를 데리고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내 죄가 되지는 못했지만 나의 절망은 되었더구나.
결국 네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한 나를 부디 잊어 버리렴. 나와 주고 받았던 모든 편지들도, 그 안에 담겨 있던 우리의 소중한 추억도 전부 불태워 없애 줘도 괜찮아. 그 편이 내게는 더 지독하고 끔직할 처벌이 될테니…
지금 당장이라도 나는, 다음 보름달이 뜨는 밤 우리가 헤어지기 전에 서로의 안녕을 빌었던 작은 신사 앞에서 만나자고 쓰고 싶어. 네가 이 편지를 받고, 날 조금이라도 그리워해 준다면… 아니, 내가 미워서 어찌할 줄 모르는 분노나 증오를 품어서라도… 날 만나러 와줬으면 한다고 쓰고 싶구나.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이 편지를 네가 늘 앉아 있던 별채의 마루를 향해 던지고 싶어.
그러나 나는 내가 그러지 못하리라는 걸 안다.
네 행복을 비는 감정보다 내 두려움이 큰 어리석음 때문이야.
마른 겨울 가지 끝에서 까마귀가 울고 있구나. 저 까마귀의 꼬리 끝이 영롱하고 검게 빛나고 있어. 마치 너의 검은 머릿결 같아.
이제 날이 저물수록 나는 너를 끊임없이 그리워 하겠지. 너는 평생 나를 원망하며 살거나, 아님 아예 잊어버려 주렴.
그리 해서라도 네 기억 속에 내가 머물 수 있다면…
후지와라 나노카와 나는 둘의 편지를 태워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것으로 고모님의 평생을 걸친 후회가 풀릴 지는 알지 못했다. 의식은 의식일 뿐이니까. 하지만 살아있는 이들에게는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청년이었을 시절의 후지와라 미우가 살았던 별채 앞 편지함을 놓았다. 내가 고모님의 집에서 갖고온 편지도 함께였다. 후지와라 나노카는 고모님의 마지막 편지에 성냥불을 붙였다. 건조하고 찬 공기는 성냥의 불씨를 키워주었다. 붉은 불꽃이 넘실거리며 타츠이 사라의 마지막 편지를 삼켜 나갔다.
“이걸로 부디 두분의 마음이 저쪽에서나마 전해졌으면 좋겠군요.”
“… 분명 그럴겁니다.”
그녀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천천히 하얀 손에서 무거워진 눈덩이가 떨어지듯, 마지막 편지가 툭 나무함 위로 떨어졌다. 매케하고 검은 연기들과 함께 회색빛의 재들이 하늘 위로 흩어져 올라갔다.
바하흐로 재회의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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