칵테일은 스무고개에 적합하지 않다
공미포 6,748자
* 2024.03.17 포스타입에 업로드한 글입니다
* 어벤카일
!! 2.0 스포일러 주의 !!
* 공식과 관련없는 날조 설정도 있습니다 날조 주의
* 2.1 예고 방송을 봤고 정말....정말 많은 생각을 했는데요.... 계속 방송 내용 곱씹다가 뭐라도 써야할 것 같아서 급하게 썼습니다.. 퇴고 안했다는 뜻입니다
+ 03.20. 일부 수정했습니다
레이시오가 그날 그 시간대에 바 주변을 지나게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오래전부터 찾던 책 몇 권이 손에 들어온 참이었다. 최대한 맑은 정신으로 한 자 한 자 찬찬히 뜯어볼 생각이었다. 공적인 일정은 모두 처리했고, 이후로는 자유시간이다. 가볍게 씻고, 미지근한 물을 한 컵 마시고, 늦어진 저녁 식사를 한 뒤에 독서에 골몰하는 것도 좋겠지. 디카페인 커피나 얼음을 넣은 연한 솔글래드 한 잔을 곁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어디에도 알코올이 끼어들 만한 구석은 없었다.
그렇게 그날의 마지막 업무를 처리하고, 호텔에 도착해 객실로 올라가려던 참이었다. 벨보이 하나가 무언가를 쏟았고, 그래서 투숙객은 중앙 엘리베이터가 아닌 직원용 엘리베이터를 사용하게 되었다. 직원용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몰리는 것을 피하다 보니 바 근처를 지나게 되었고, 거기서 그는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말을 붙일 생각은 없었다. 술을 마실 생각은 조금도 없었고, 그의 머릿속에는 손에 들어온 책 생각뿐이었으니까. 그 책에 대체 어떠한 의문과 새로움이 가득할지 천천히 시간을 들여 알아가고 싶었다.
레이시오가 동업자와 마주 앉아 새로 얻은 책에 대해 이야기할 일은 오늘도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몇 번의 대화 끝에 레이시오는 어벤츄린과 이야기할 때 석고상이 필요치 않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둘이 서로에게 즐거운 대화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만으로는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기 어렵다는 걸, 원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어렵다는 걸 레이시오는 여러 경험으로 이미 체득한 뒤였다. 자신도, 그리고 동업자도 서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둘이 거의 상극에 가깝다는 것도. 이미 몇 번의 마찰이 있었다. 더 이상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이려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나았다.
그런 연유로 베리타스 레이시오는 혼자 바에서 잔을 비우는 동업자를 못 본 척 지나가려고 했다. 어벤츄린의 손을 벗어난 칩이 그가 깔고 앉은 의자를 도약대 삼아 튀어 오르기 전까지는. 의자를 박차고 튀어 오른 칩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다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
레이시오는 제 발밑으로 굴러들어 온 것을 주워들었다. 칩의 주인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든다.
"이런 날에도 일하는 거야? 지식학회는?"
발음은 또렷하고, 목소리도 평소와 같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붉은 걸 보니 이미 몇 잔은 마신 것 같았지만 만취한 것 같지는 않다. 끌어낼 필요는 없겠군. 그렇게 판단한 레이시오는 대답 대신 칩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오, 고마워. 어디 갔나 했네."
"도박꾼이 칩을 놓치다니, 취했나?"
"실수야, 실수."
칩을 두어 번 튕겨보고는 주머니에 쑤셔 넣는 동작도 평소와 같았다. 손이 헛돌거나 하는 일도 없는 걸 보면, 정말로 실수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럼 객실에 던져놓을 필요는 없겠군. 먼저 올라가 보지."
"너도 한잔할래? 내가 살게."
"사양하지."
"단칼에 거절하다니, 매정하기도 하지."
조금도 아쉬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만으로는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기 어렵고, 원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상대도 잘 알고 있을 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레이시오는 느물느물하게 웃는 동업자를 뒤로했다.
"진짜 가네. 쌀쌀맞은 친구라니까."
칵테일은 스무고개에 적합하지 않다
어벤츄린×카일루스
어벤츄린이 그날 그 시간대에 바를 찾게 된 것은 갑자기 시간이 붕 떠버렸기 때문이었다.
붓꽃 가문과 저녁 약속이 있었다. 붓꽃 가문 측에서 약속시간 30분 전에 갑작스럽게 일이 생겼다고 연락하지만 않았다면, 지금쯤 붓꽃 가문의 저택에서 가주와 그의 식솔, 그리고 손님이라는 구성으로 만찬을 즐기고 있었겠지. 업무의 연장선이기는 했으나, 붓꽃 가문에는 개인적인 호기심이 있었기에 그도 기다려온 일정이었다. 하지만 약속은 깨졌고, 그는 바쁘신 분의 일정을 엉망으로 만들어 미안하다며, 다음에는 꼭 만나 뵙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긴 전자 문서를 들여다보는 신세가 되었다. 전화는 전자 문서가 도착하고 나서 약 3분 뒤에 걸려 왔는데, 어벤츄린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가주가 직접 연락했다는 데에 플러스 점수를 주기로 했다. 그래 봤자 상부에서는 다음번 붓꽃 가문과의 계약을 더욱더 까다롭게 따져보고 진행하겠지만.
붓꽃 가문과의 만찬을 위해 일정을 조정해 둔 탓에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모처럼 여유가 생겼으니 기뻐해야 할 텐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텅 빈 스케줄표를 보면서도 여유시간을 알뜰하게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뭘 해야 할까?
그러고 보니 이른 점심을 먹고 난 뒤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 일부러 자주 가지 않던 길목까지 천천히 걸어갔고, 한 번도 들어가 보지 않은 가게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맛이었다. 그런 뒤에는 다시 천천히 걸었다. 한눈에 봐도 관광객임을 알 수 있는 무리가 웃고 떠들며 그의 곁을 지나갔고, 페페시 사람이 심각한 얼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실례합니다, 지나갈게요!" 인파를 헤치고 급히 달려갔고, 사람들 틈바구니로 회색 머리의―
"은하열차?"
그를 돌아보게 한 회색 머리는 이미 멀어졌지만, 그럼에도 어벤츄린은 자신을 지나쳐간 사람이 은하열차팀의 신입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키도 다르고, 옷차림도 다르고, 체격도 다르다. 젊은 개척자의 눈높이는 저와 비슷했고, 피부는 의외로 깨끗한 편이었으며, 체격도 그럭저럭 튼튼해 보일 정도는 되었다. 헷갈릴 수가 없었는데, 조금 전에는 왜 그랬지? 그는 멀어져가는 회색 뒤통수를 보다가 "미안해요, 좀 지나갈게요!" 아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옆으로 비켜나자 짐을 든 페페시 사람들이 우르르 지나간다.
왜 그랬지?
마침 할 일도 없겠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의문을 살살 구슬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흐릿했던 질문은 이제 밤거리를 밝히는 가로등만큼이나 밝다. 눈 돌려 외면한다 해도 계속 거기에서 빛을 뿌리겠지. 교수님이 은하열차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었는데. 어벤츄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호텔로 향했다.
생각할 거리가 생기자 발걸음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바를 찾았다. 그는 머릿속에서 번뜩이는 의문(왜 회색 머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왜 하고많은 회색 머리 중에서 은하열차팀의 신입을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인지)에 어울릴만한 답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스텔라론 보유자니까? 맞는 말이다. 그는 잔에 소금이 발린 칵테일을 넘기면서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한동안 신규 유입이 없었던 은하열차에 등장한 뉴페이스니까? 이것도 맞았다. 은하열차는 폐쇄적인 집단은 아니지만, 인원 추가가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한번 유입된 사람은 꽤 오랫동안 기존 멤버와 함께한다. 내리는 것은 그가 종착지를 찾았을 때로, 타는 것이 자유이듯 내리는 것 또한 그 사람의 자유다. 다른 이와 함께 내리기도 하고 혼자 하차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던가.
스텔라론에 관심이 있으니까? 이것도 정답. 만계의 암이라 불리는 물질이 체내에 들어있는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멀쩡하게 살아 움직일 수가 있지? 우주정거장ㆍ헤르타에서 시행된 신입의 신체검사 결과는 그도 알고 있다. 여느 단명종과 다르지 않은 몸을 갖고 있댔지.
건드릴 때마다 재미있는 반응이 돌아와서?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그는 칵테일을 한 모금 더 삼키려 했으나, 잔에서는 짭짤함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좀 달콤한 걸 시켜볼까? 도수가 낮고 과일 향이 강한 걸로 하나 시켰다. 첫 만남에서 용돈이라며 신용포인트를 줬더니 거절하길래, 처음에 제시한 액수의 두 배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그때 표정 엄청나게 웃겼지.
운명의 길을 멋대로 넘나드는 게 신기해서? 이것도 맞았다. 보존, 수렵, 파멸, 공허, 균형, 화합, 지식……. 사람이 걸을 수 있는 운명의 길에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보통 하나의 운명만을 걷게 된다. 아무리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그래서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고 해도, 굽어지고 때로는 막다른 길을 돌아간다고 해도 결국 한 사람의 운명의 길은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완성한다.
어벤츄린이 보존 운명의 길을 걷듯, 그 개척자는 파멸 운명의 길에 올랐다. 나누크의 분신으로 추측되는 존재가 우주정거장ㆍ헤르타에 나타났었다는 소식은 이미 널리 퍼졌다. 혹자는 그게 분신이 아니라 본체의 강림이었으며, 젊은 개척자가 나누크의 의지를 이어받았다고 추측하기도 했다. 우주정거장ㆍ헤르타는 나누크의 분신 또는 본체의 강림에 대해 공식적으로 의견을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 개척자가 파멸의 에이언즈와 모종의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행성에서 그는 앰버로드를 알현했고, 보존의 길에 오른 것에서 그치지 않고 두 운명의 길을 멋대로 넘나들었다……. 그쯤에서 그는 바텐더를 불러 혹시 추천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물었고, 투명하고 푸르스름한 내용물이 담긴 잔을 받게 되었다.
나를 거절하지 않아서? 이건……잘 모르겠는데. 은하열차의 신입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워 보이기는 했으나, 경계심까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를 경계하면서도,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무슨 일인지 묻는 것이다. 부하가 급히 자리를 비워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불러내기도 했고, 정말 사소한 일로 연락하기도 했다. 왜 자꾸 신용포인트를 주는 거예요? 친구는 그렇게 사귀는 게 아니라던 말과 함께 돈을 돌려주면, 어떻게든 핑계를 쥐어짜 그 손에 쥐여주었다. 신용포인트가 몇 번 오가자 개척자는 받은 돈을 돌려주는 대신, 모아뒀다가 사탕이나 과자 따위를 사서 안기기 시작했다. 어떤 때에는 솔글래드 한잔이기도 했고, 샌드위치나 아이스크림일 때도 있었다.
사람 가려내는 법은 좀 더 배워야겠지만, 어쨌든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상대까지 포용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덜떨어진 인간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까지 신경 쓰지는 않았겠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신경 쓸 필요도 없었을 터다. 오늘의 추천 칵테일을 깨끗이 비웠으나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럼 다음. 어벤츄린은 이번에는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그렇게 혼자 스무고개를 하며 시간을 죽이는 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동업자는 어벤츄린이 흘린 칩을 들고 다가왔다.
"이런 날에도 일하는 거야? 지식학회는?"
발음도 목소리 크기도 평소와 같군. 이마며 뺨에 열감이 느껴지는 걸 보니 얼굴은 좀 붉어졌겠지만, 그래도 만취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 터다. 냅다 끌고 가려고 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판단한 어벤츄린은 선글라스 안에서 히죽 웃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고, 지금만큼은 교수님의 잔소리를 듣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어벤츄린은 동업자와 지나치게 사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이미 몇 번의 마찰이 있었고,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페나코니에서의 일을 완수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오, 고마워. 어디 갔나 했네."
"도박꾼이 칩을 놓치다니, 취했나?"
"실수야, 실수."
칩을 두어 번 튕겨보고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손이 헛돌거나 칩을 놓치는 불상사가 생기지는 않았다. 좋아, 아직 멀쩡해. 좀 더 마실까?
"그래? 그럼 객실에 던져놓을 필요는 없겠군. 먼저 올라가 보지."
"너도 한잔할래? 내가 살게."
"사양하지."
"단칼에 거절하다니, 매정하기도 하지."
레이시오는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몸을 돌렸다. 제 앞에서 석고상을 뒤집어쓰지 않는 걸 보면, 깐깐한 교수님한테 인정받은 듯했다. 눈앞의 작자는 발에 채는 돌멩이보다 많은 머저리는 아님. 하지만 머리가 비상하다는 것만으로는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기 어렵고, 원만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상대도 잘 알고 있을 터다. 자신이 그러하듯이. 어벤츄린은 느물느물하게 웃는 얼굴로 동업자를 배웅했다.
"진짜 가네. 쌀쌀맞은 친구라니까."
***
스무고개는 그가 딱 기분 좋게 취할 때쯤에 끝났다. 머릿속에서 번뜩이던 의문도 이제는 이따금 깜빡이기만 할 뿐.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앞으로는 그 개척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유익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서 복도를 걷는데 어디선가 허밍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가락이었지만 페나코니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소리였다. 아니, 모성을 떠난 뒤론 단 한 번도 듣지 못한 노래였다. 긴장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지만, 그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아주 어릴 적에 들었던 자장가가 제게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사어나 다름없어진 언어로 쓰인 가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까마득한 옛날이라 다 잊어버렸을 줄 알았는데.
자장자장 우리 아가
침대 끝자락에서 자지 말거라
그렇지 않으면 나쁜 늑대가 찾아와 널 잡아채 갈 거란다
늑대가 널 물고서 숲 속으로 끌고 들어가
금사슬나무 아래에 내려놓을 거란다
자장가를 부르는 목소리는 아주 작았고, 때로는 소리 없이 입술만을 달싹여 노래가 군데군데 끊어지기도 했다. 카드키를 꺼내기 위해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는 소리가 더 클 정도였다. 그 누구도 꿈꾸는 것을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깨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늑대야, 오지 말거라
우리 마샤를 깨우지 말거라
자장자장 우리 아가
침대 끝자락에서 자지 말거라…….
삐빅,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에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뚝 끊겼다. 객실 내부 구조는 이제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몸이 이끄는 대로 침대로 향했다. 드림풀을 지나 평범한 침구가 놓인 평범한 침대 앞에서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런 뒤에는 반지를 빼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장갑을 벗은 뒤에는 코트 안에 받쳐 입었던 베스트를 벗었다.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편하겠지만, 뒤늦게 올라온 취기가 어벤츄린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그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선글라스를 깔아뭉개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최선을 다한 셈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불 안이 뜨끈뜨끈한 게, 아무래도 과음한 모양이다. 언제나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객실이 이렇게 좁고 답답하게 느껴지다니. 그래도 그렇게까지 많이 마시지는 않았는데…….
***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숙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숙취에 찌든 몸으로 드림풀에 발끝이라도 담갔나? 그래서 드림풀의 사용자 치유 기능의 덕을 본 건가? 거기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벤츄린의 마지막 기억은 침대가 좁고 답답하며 따끈따끈했다는 것뿐이었다. 드림풀에 들어간 기억은 없는데, 왜 이렇게 컨디션이 좋지? 기분 좋은 나른함이 전신을 감쌌고, 그는 옆에 둥글게 뭉쳐진 이불을 끌어안았다. 머리맡에 두었던 단말기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좀 더 자고 싶었지만 정신은 점점 맑아지기만 한다. 왜 이렇게 몸 상태가 좋지?
술에 그리 약한 편은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궤짝째로 들이붓지 않고 자제력을 발휘했을 때의 이야기다. 어벤츄린은 자신이 어제 주문한 것 중에서 악명이 자자한 몇몇 주종에 대해 생각했다. 마시다 보니 흥이 났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좀 취하고 싶은 기분이 되었던 것까지는 기억한다. 만찬 준비를 위해 일정을 조절하다 보니 다음 날 오후까지 여유 시간이 생기기도 했고. 마음 놓고 취하기 좋은 상황이었다고나 할까. 레이시오와 마주쳤을 때까지만 해도 아직 괜찮다고 자신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썩 맑은 정신은 아니었을 것이다. 취한 사람이 나는 취하지 않았다고 우기는 건 흔한 일이니까.
"이상한데……."
"뭐가요?"
"몸이 너무 가벼워. 머리도 안 아프고."
어?
"제가 비술을 대여섯 번은 썼거든요. 어벤츄린 씨 깨워서 쫓아내려고."
어어?
어벤츄린은 침대에서 튕겨 나오듯 몸을 일으켰다. 전날 그를 칵테일과 주스와 스무고개의 굴레에 빠지게 한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작은 트롤리에 손을 얹고 이쪽을 보는데, 아마 룸서비스를 주문한듯했다.
"취향을 몰라서 적당히 시켰어요. 일단 뭐 좀 마실래요? 우유랑 물이랑 커피랑 오렌지 주스 있는데 뭐 드려요?"
"커피로……."
그는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받아들었다. 커피를 조금씩 마시는 동안 접이식 테이블을 끌고 오더니, 테이블을 펴고 트롤리에 실린 음식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뭐라도 거들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식사 준비가 끝났다.
어벤츄린은 객실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익숙한 구조의 익숙한 방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개척자에게 양보한 룸이었다. 방을 바꿔준 뒤 카드키를 반납하는 걸 깜빡한 모양이었다. 이런 실수를 했다니.
"세상에."
반숙 계란 프라이를 쪼개던 얼굴이 이쪽을 본다. 상대방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었겠지. 자는데 갑자기 얼큰하게 취한 주정뱅이가 찾아와 대뜸 침대 옆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카펫에 돌돌 말아서 호텔 밖에 내다 버려도 이쪽은 할 말이 없는데. 어벤츄린은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세상에."
"왜요? 머리 아파요? 지금은 배고파서 비술 한 번밖에 못 쓸 것 같은데 써줘요?"
"아니, 아니야. 나 완전 멀쩡해, 친구. 좀 덜 멀쩡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네……."
사태를 파악하자 목덜미며 귓가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카일루스는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는 남자의 얼굴을 보다가, 그를 잠시 내버려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열차 사람들이 지나친 관심은 독이 되기도 한다고 했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 지금이 관심을 '거둘' 때겠지? 그래서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흘려들으면서("그냥, 그냥 걷어차도 됐는데. 아니면 굴려서 침대 밑으로 떨어트려도……."), 계란 프라이를 반으로 쪼개 잘 구운 식빵 위에 얹었다. 와그작, 바삭하게 구운 식빵을 씹자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더는 카일루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간밤에 비술을 연이어 쓴 탓인지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맛있다. 어벤츄린 씨도 식기 전에 먹어야 할 텐데. 다 먹고 비술 쓸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에 열중했다.
남자의 중얼거리는 소리와 먹고 마시는 소리만이 흐르는 가운데, 누군가의 단말기에서 오전 8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축제의 별 페나코니에서 또 한 번의 아침이 밝았다.
2.1 예고 방송 보셨나요...? 저는 몇 번 돌려보다가 도중에 뺨에 금간 반디랑 어린 어벤을 발견하고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으며........ 주말 내내 이것저것 할일 하면서도 계속 방송 내용 곱씹다가 이대로는 안되겠다 뭐라도 써야겠다(?) 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서 뭔가를...급하게 써왔습니다....
어벤츄린이 부르는 자장가는 러시아 자장가인 Bayu Bayushki Bayu 입니다. 호러게임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제목은 몰라도 한 2~3초만 들으면 아 이거! 하고 바로 떠오를 노래가 아닐까 싶은데요ㅋㅋㅋㅋㅋㅋ 데드 바이 데이라이트라는 게임의 살인마 캐릭터인 헌트리스의 허밍이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음정도 가사도 뭐가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한데 자장가라고 해서 처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네요ㅋㅋㅋㅋ 어벤이 자기가 허밍하는 소리에 놀라는 부분이랑 어울릴 것 같아서 가사를 빌렸습니다.
↓ 여기에서 번역된 가사를 보면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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